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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13일 영국 작가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대형 스타 작가인 앤디 워홀의 그늘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팝아트의 아버지’ ‘원조 팝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은 해밀턴에게 돌아간다.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1956)라는 긴 제목의 작품은 그를 미술사에 분명히 각인시켰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현대의 가정은 전기청소기, 오디오 기구, TV 등 각종 가전제품과 포스터, 회사 로고, 영화 광고 등 현대적 시각매체로 채워져 있다. 창밖에는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 가수’의 극장 간판이 보인다. 램프에는 포드 자동차의 로고가, 벽에는 명화가 아닌 만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멋진 집이지만 읽을거리라고는 소파 위에 있는 신문이 전부이며, 먹을거리는 테이블 위의 인스턴트 햄뿐이다. 벽에 걸린 엄격한 19세기 비평가 존 러스킨의 초상화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듯 보인다. 이런 현대적인 집에 사는 남자는 당연히 근육질의 몸짱이고, 여자 또한 당연히 섹시하다. 울퉁불퉁 근육남이 들고 있는 것은 ‘POP’이라고 쓰인 사탕. 팝아트란 용어는 로런스 알로웨이라는 평론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POP’이라는 단어가 이미 여기 등장해 이 작품을 팝아트 작품의 효시로 여기게 한다. 이 작품에 대해 평론가 할 포스터는 “새롭게 등장할 팝아트 도상학의 목록을 보여 준 작품”이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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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은 57년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팝아트에 대한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섹시한 규정을 내린다.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소모적이고, 저가다. 그것은 대량생산되고, 젊고, 위트가 있으며, 섹시하고, 교묘하며, 매력적인 큰 비즈니스다. 20세기에 도시 생활을 하는 예술가는 대중문화의 소비자이며 잠재적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자일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모두 실천한 사람은 해밀턴 자신이 아니라 미국의 앤디 워홀이다. 워홀은 할리우드 스타의 마케팅 기법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스튜디오를 팩토리라 부르면서 작품을 대량생산해 미술을 큰 비즈니스로 만들었다.
팝아트는 일용할 육체적 양식으로서의 대량생산 상품과 정신적 양식으로서의 대중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미술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가장 지배적 요소인 상품이 발견한 가장 적확한 미술적 기호가 바로 팝아트다. 상품은 미술작품 속의 주인공이 됐다. 또 스타나 유명인 같은 상품적 가치를 가진 인물들이 미술작품 속에 등장하게 됐다. ‘위인’이 아니라 스타나 유명인에게 더 큰 상품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대중문화다. 팝아트는 이런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면서 ‘동시대성’을 구가했다.
해밀턴을 비롯한 영국 작가들이 팝아트를 먼저 선언했지만 궁극적으로 그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던 것도 이러한 이유와 관련 있다. 50년대 중반 영국은 여전히 미국의 전후 원조를 받고 있었고, 해밀턴 등 영국 작가들은 이런 소비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경제대국으로 ‘소비가 미덕’인 시대의 풍요로움에 취해 있었고 상품사회의 미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미국의 팝아트는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션버그,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톰 웨슬먼, 제임스 로젠퀴스트 등 긴 명단으로 이어지는 미국식 흐름을 만들어 냈다.
해밀턴을 비롯한 영국의 팝아트 작가들은 자신들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의 인상 깊은 또 다른 작품은 ‘Swingeing London’(1968)이다. 민트색 양복을 입은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는 카메라를 피해 얼굴을 가리는데, 그와 같이 수갑이 묶여 있는 사람은 60년대 해밀턴의 아트 딜러이기도 했던 로버트 프레이저이다. 두 사람은 약물 복용 혐의로 체포됐다. 신나는 록음악과 약물 복용, 학생운동과 히피문화 등 60년대 후반 서구사회의 명암을 고스란히 담아낸 장면이다.
팝아트 작가로서는 드물게 그는 정치적인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북아일랜드 감옥에 수감돼 있는 죄수 보비 샌즈를 예수처럼 형상화한 ‘The citizen’(1981~83), 2003년 바그다드 대공습과 관련해 카우보이 복장을 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모습을 담은 ‘충격과 공포’(2007~2008)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이미 런던 테이트 갤러리, 뉴욕 구겐하임,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치러졌던 그의 회고전은 미국 LA 현대미술관에서 2013년 다시 한 번 준비되고 있다.
2004년 톰 웨슬먼, 올해 리처드 해밀턴까지 한 시대를 풍미하던 팝아트 작가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한 시대가 물리적·육체적으로 종언을 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팝아트 작가들이 유명을 달리한다고 팝아트 자체가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다. 80년대 접어들면서 서구에서는 시들해졌던 팝아트 현상이 90년대가 되면서 한·중·일 동양권에서 새롭게 등장했다. 60년대 서구에서 팝아트가 발전해 나왔던 것과 유사한 경제·문화적 배경이 다시 한 번 형성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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