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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로 살 것인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나는 시인 백석에게서 주체의, 욕망의 변증법을 본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노예는 쇠사슬에 묶인 존재다. 쇠사슬은 노예의 영혼까지 묶어 놓는다. 이런 불행은 자본이라는 ‘물적’ 현실이 그 지배적 폭력의 형식으로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즉 시적 화자는 지금 일제 치하라는 폭력적 현실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아내도 집도 모두 잃고 부모와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한없이 외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물적, 지배적 현실에서 소외된 이상 그는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그는 어느 목수네(박시봉)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서 쥔을 붙일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방(方)은 방(房)이다. 즉 그는 남의 집에 세를 얻어 기거하게 된 기생적 존재, 잉여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잉여적 존재가 꾸는 ‘너무도 많은 생각들’은, 무의미한 기표에 불과하고, 뜻없는 글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그는 이렇게 환멸적 자기애라고 할 수 있을 상상적 거울에, 자폐적 기호놀이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환멸적 자기애의 끝은 죽음이다. 여기, 환멸적 자기애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거세와 좌절, 박탈은 모두 주체의 소외'라는 정신분석학자 라캉Lacan의 전언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나’다. 예술은 해방을 그 고유의 존재 조건으로 하는- 왜냐하면 체계는 인간과 예술의 적이기 때문이다-본질적으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지향한다. 주체의 자기소외는 자기도취다. 죽음에 이르는 나르시시즘이다. 자기도취에 출구는 없다.
그러나 여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고 나와 주위를 인식의 대상으로 설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이기를 그치고 나는 타자가, 네가 될 수 있는- 왜냐하면 나는 너의 욕망의 구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전이displacement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단순히 나이고만 한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더 크고 높은’ 어떤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연대의식solidarity consciousness에 다다르는 순간, 나는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매개적 지평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리하여 점차 '고립된 자아'의식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열린 자아'의 단계로 의식이 전화하는 순간,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상징'이라는 세계 이미지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다. 가령, 김수영이 '귀족'이라는 자기도취의 거울적 상상의 단계를 벗어나 ‘풀’이라는 상징에서 거대한 뿌리라는 역사의 주체를 발견하게 된 과정처럼.
그것은 분명 자신과는 다른 존재(타자)이지만 동시에 이 ‘크고 높은’ 그 무엇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다시 말해 외롭고 춥고 고독한 가운데서도 굳고 정하게 버티고 서 있는 '갈매나무'라는 존재들에 대한 유적 인식의 전화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과 관련하여,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문체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문체는 단순한 기술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관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우리는 또한 ‘언어도 무의식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는 라캉의 금칼 같은 명제를 마주한다. 그리하여 여기, 구조화된 형식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콤마 ‘,’의 빈번한 사용이다. 이는 의식, 무의식 중에 물적, 폭력적 현실이 압도하는 현실에서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진 시적 화자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조급하고 간절한 염원처럼, 의미있는 세계에 대한 매우 강렬하고도 집요한 열망에 휩싸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즉 여기서, 쉼표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물적 현실이 압도하는 현실에서 그 물적 현실을 넘어 새로운 욕망을 실현하려는 끈질긴 의미화 기제mechanism라고 볼 수 있다.
서술narrative 또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서술은 산문정신, 즉 실용적 목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그 핵으로 하는 표현방식이다. 즉 그는 서술을 통해 자신이 처한 외적, 지배적 현실을 정확하게 파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현실을 서술을 통해(나는~헤매이었다.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외로운 생각이 드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의 지리멸렬한 삶을 개념화함으로써 그 지리멸렬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의 전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희망의 지렛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새로운 관점의 전이의 정점에서 우리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루’를 만나다.
더욱 중요한 것은what matters more '그'다. '그the'는 선험적 기표다. 즉 ‘그’는 그가 익히 갈매나무를 알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그’는 기억이고, 대치이고,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는 하나의 변형, 이형으로서의 반복이자 새로운 전망으로서의 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그를 통해 환기된 갈매나무로 인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의 빛a ray of hope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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