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앞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엘뤼아르는 요양원에서 나오자마자 간호병으로 전선에 동원되었다. 그는 야전 병원에서 전쟁의 참상을 맛보았고 이는 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어 전시 중 병원에서 쓴 '평화를 위한 시' 외 1편의 선언문 같은 시들을 자비 출판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한때 차라와 당시 유행하던 다다이즘 운동을 벌였고 후에는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데스노스, 아라공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요하고 열렬한 멤버가 되었다.
엘뤼아르와 초현실주의와의 관계는 밀접할 뿐 아니라, 이 새로운 문학 정신이 그의 시에 준 영향은 깊다. 1920년에서 1936년까지 그는 브르통이나 르네 샤르와 공동으로 여러 권의 초현실주의적인 시집과 평론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으므로 죽는 일' 및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통의 수도', '사랑', '시', '목전의 삶', '모든 사람의 장미' 등 그의 중요한 시 작품들은 모두 직접 간접으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초현실주의와의 결별
시집 <모든 사람의 장미>로 그의 초현실주의 시대는 끝난다. 이 동안에 엘뤼아르는 첫 부인 갈라와 헤어지고 제2의 부인 마리아 벤즈, 속칭 뉘쉬와 결혼한다. 엘뤼아르는 그녀를 가장 <완전한 여인>이라고 예찬한다. 뉘쉬와의 사랑과 애정은 그의 첫사랑인 갈라에 못지않게 짙고 깊어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낳게 했으며 그녀의 영향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 새로운 여인의 출현으로 그의 시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빛의 세계를 향한 일대 도약을 하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랑이란 내 자유를 고통스럽게 희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달라졌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도 않고 질투도 하지 않으며 그 여자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나에게는 자유로와질 수 있는 용기가 있다."
1936년을 전후하여 그의 시는 점차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보이고 인류와 정의를 위한 연대 운동에 가담한다. "지금의 모든 시인은 그가 다른 사람의 생에, 공동의 생에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주장할 권리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때가 왔다"고 그는 썼다. 이 1935년에 그는 그의 오랜 지기이자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파블로 피카소 회고전을 위해 1월부터 5월까지 스페인의 많은 지역을 순회했다. 스페인을 둘러 본 엘뤼아르의 시선에는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였다. 나치가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 선언을 했으며 그 전해에는 이탈리아에서 뭇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누구보다 이런 시대의 파랑을 예견하고 있던 그는 이듬해인 1936년 영국 런던에서의 한 강연에서 "지금 모든 시인들이 타인의 생활 속에, 공통된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시련의 시대가 될 것이며, 시인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에 참여할 것을 부르짖었다.
그의 강연이 있은 지 불과 한 달 뒤인 1936년 7월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고,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말았다. 그는 당연히 공화파에 가담하였고 <게르니카의 승리>를 발표했다. 이 동안 인간애와 자유를 노래부른 시집에 <풍요한 눈>, <자연의 흐름>, <볼 것을 준다>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사상적으로 엘뤼아르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역시 비극적인 상황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피카소가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도 스페인에서의 파시스트정권에 저항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런 일 역시 엘뤼아르의 영향이 컸다.
전쟁과 시인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한때 사랑과 꿈의 시인이었던 엘뤼아르는 자유와 조국을 위한 투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엘뤼아르의 시는 커다란 변모를 보여준다. 그의 시는 <한 인간의 지평에서 모든 사람들의 지평을 향한> 전환을 꾀하고 집단적인 감동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모든 죄악과 억압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표현하며 그때부터 시는 저항을 위한 투쟁의 수단과 무기가 된다.
"시인은 자기의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사상은 진보를 향한 인간의 궤적 속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194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독 비밀 저항 운동에 가담하여 싸웠고, 작가 국민 위원회의 북부 책임자가 되어 비밀 출판물인 <심야총서>를 간행하여 자유와 조국 해방을 위하여 시를 통해 투쟁했다. 이 동안에 그는 시집으로 <시와 진실>(이 시집 맨 첫머리에 유명한 시 '자유'가 실려 있다), <전쟁 중에 일곱 편의 사랑의 시>, <독일인의 집합지에서> 등이 있다. 1942년에는 영국의 항공 편대가 수천 부의 그의 <시와 진실>을 독일군 점령 아래 싸우는 프랑스의 항독 투사 위에 뿌렸다. 시가 무기가 된 것이다.
대전이 끝나자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을 고취하고 계속 시집을 펴냈으로써 자유와 인간애를 노래불렀다. <그치지 않는 시>, <정치 시편>, <도덕의 한 교훈>, <모든 것을 말한다> 등이다. 그가 세계와 인류와의 연계를 주장하는 소위 참여 문학에 가담했다고 하나 그의 시는 계속 개성적이며 서정적이고 그의 시의 주제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과 죽음, 평화, 자유였다. 피카소와 엘뤼아르는 삶의 뜨거운 연대자이자 정신적 동지였다. 엘뤼아르가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피카소를 "한 폭의 그림 앞에 설 수 있는 시인처럼 그는 한 편의 시 앞에 설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어둠 그건 눈뜰 때의 나의 이름
어둠 그건 나를 괴롭히는 원숭이
나는 어둠의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미치광이인 척 한다네
어둠 그것은 부조리한 나의 무게
차갑게 썩어버린 나의 반신(半身)
<마지막 유예의 노래> 중에서
엘뤼아르와 피카소
엘뤼아르와 피카소는 여름 휴가철마다 남프랑스 무쟁의 바닷가에서 가족들끼리 오붓한 바캉스를 즐기기도 했다. 엘뤼아르가 피카소에게 그의 그림에 있어 사상적 깊이를 주었다면 피카소는 엘뤼아르에게 시적 영감을 주었다. 전통적인 스페인의 색이자 원시적 제의의 색이랄 수 있는 검은 색에서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감각으로 인간의 내면 속에 감춰진 어둠의 실체를 밝음 속에 드러내고 있다. 엘뤼아르는 참다운 시인이란 '어두운 진실'을 작품 속에 드낸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세계의 어둠과 맞섰다. 엘뤼아르는 평생 동안 두 차례 공산당에 입당한다. 처음의 입당은 1926년 <고뇌의 수도> 간행 이후 일련의 초현실주의자 그룹과 함께였다. 그후 1933년 공산당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축출된다.
당시의 프랑스 공산당은 이념적 경직으로 인해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분방함을 견딜 수 없었고,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공산당의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1943년 그는 나치 독일하의 프랑스에서 공산당에 재입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유럽을 통틀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나치 독일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세력은 좌파였기 때문이다. 엘뤼아르가 <게르니카의 승리>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전인류에 대한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그의 마음은 폭력과 전쟁, 죽음과 암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참다운 정신을 그가 쉬르 레알리즘이란 그의 문학적 사조 안에서도 실현시키고 있다. 그의 이런 정신은 멀리 우리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유신시대의 김지하, 5월 광주 이후의 김남주 시인 등에게 이르러 꽃을 피웠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초현실주의와 공산주의 운동 - 폴 엘뤼아르
1946년 강연 여행으로 스위스에 있을 때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뉘슈의 죽음의 통지를 받았다. 엘뤼아르는 이때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니쉬의 죽음으로 그는 한때 절망과 공허에 빠져 약 1년 동안 실어증에 빠져 있었다. 엘뤼아르가 기운을 되찾게 된 이유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여인을 발견했다는 것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회한을 일삼는 태도를 거부하며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의 성품도) 인류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희망으로 이 위기를 극복했다.
1949년 멕시코의 세계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다시 도미니크라는 여성을 만나 제3의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재혼을 기하여 엘뤼아르는 <불사신>이라는 시집을 써서 생의 기쁨을 되찾은 행복을 노래했지만 엘뤼아르의 시들은 뉘쉬의 죽음 이후 쓰라린 회한과 생에 대한 쓸쓸함이 암시되어 있었다. 1952년 엘뤼아르는 과로와 협심증을 일으켜 급사했다. 그의 유해는 전세계의 지식인과 문인의 애도를 받으며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파리의 다다그룹 - 오른쪽 1열부터 Tristan Tzara, Céline Arnauld, Francis Picabia, André Breton 2열: Benjamin Péret, Paul Dermée, Philippe Soupault, Georges Ribemont-Dessaignes; 3rd: Louis Aragon, Théodore Fraenkel, Paul Eluard, Clément Pansaers, Emmanuel Faÿ
외국의 문학사조나 유파의 이름만을 듣고서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리는 편리한 이해방식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문화 사조에 있어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에 대한 오해의 상당수도 그렇게 발생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기법까지 초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더한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통해 초현실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물론 초현실주의 선언문 자체는 암시적인 서술로 전개되어 있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초현실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가치를 환기시키면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꿈꾸며 살 권리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초현실주의 선언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와 부르주아 문명의 종말을 예감했다. 자크 라깡이"광기로 하여금 항상 이성을 감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 문명을 지배했던 부르주아의 도덕율이 한계에 달했음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사회의 속박과 검열, 억압에 의해 욕망을 축소하게 된 인간의 모습을 비참한 현실로 파악하고, 이 세계를 인간의 욕망 차원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문명(전쟁과 부르주아 물질문명)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 본연의 정신적인 힘과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해 시인은 현실 세계의 논리와 일치하는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했다. 그들은 현실과 몽상이 조화롭게 연결되는 통일된 세계를 지향했다. 초현실주의가 추구했던 정신적 모험은 합리주의적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반항과 현실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 세계의 강력한 장벽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출현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폴 엘뤼아르를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이 공산당에 입당한 까닭은 초현실주의가 실제 현실세계에서 부딪친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이상은 좌절되었고, 현실은 개선되지 않았다. 진정한 삶 La varie vie과 현실적 삶 La vie reelle의 대립에서 초현실주의는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랭보의 테마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테마 사이에서 평화로운 화해를 이루어 낸 시인" 이라고 엘뤼아르를 말한 것은 그가 초현실주의의 이상을 실현한 시인으로서, 실천적 삶을 살았던 인간으로서 열렬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삶은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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