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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었는지 확실한 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지』 「위지동이전」,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동명성왕 설화, 김유신과 천관의 설화 등에 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소주(燒酒)는 고려 후기에 몽고의 영향으로 제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술의 원료가 멥쌀에서 찹쌀로 바뀌고 발효기술이 발달하면서 질 좋고 다양한 술들이 제조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술은 지역마다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술을 만드는 방법도 다양해졌는데, 약재를 이용한 이강주(梨薑酒)와 죽력고(竹瀝膏), 양조주와 증류주를 혼합해 산패를 방지할 목적으로 개발된 과하주(過夏酒) 등이 제조되었다. 『해동농서』1) 에서는 구황작물인 고구마를 술 만드는 원료로 소개하고 있어 고구마 전분을 이용한 술 제조 방법을 알려주는 효시가 되었다.
술은 만드는 재료와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크게 과일이나 동물의 젖과 같이 당분을 함유한 원료를 효모로 발효시킨 과실주나 유주(乳酒), 누룩이나 맥아로 당화시킨 곡물 양조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곡물 양조주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누룩은 국(麴)이라 하여 곰팡이 균사에 덮여 썩은 것을 말하며, 얼(蘖)은 보리를 물에 담가 싹을 틔운 것으로 술을 빚는 데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여러 책에는 누룩을 사용해 술을 만드는 방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누룩의 형태는 크게 분곡과 조곡으로 나뉘는데, 분곡은 밀가루로 만들었고 약주(藥酒)나 과하주용으로 사용되었다. 조곡은 밀을 세 조각으로 쪼개어 얻은 가루와 밀기울을 함께 써서 만든 것으로, 탁주(濁酒)나 소주용으로 사용되었다. 소주용 조곡에는 옥수수 · 콩 · 팥 · 보리 등을 섞은 것과 귀리로 만든 것, 소주 지게미에 쌀 등을 섞은 것이 있었는데, 충청도와 경상도에서는 조곡과 밀가루를 일정 비율로 섞어 체에 내린 나머지로 만들었으며, 함경도에서는 귀리 · 겉보리 · 피 등을 술지게미와 섞어서 찐 것을 원료로 삼았다.
그런데 원재료와 제조법, 그리고 모양에 따라 누룩의 이름이 달랐으며 술의 이름도 달랐다. 대표적으로 진면국(眞麵麴), 요국(蓼麴), 녹두국(綠豆麴), 추모국(秋麰麴), 미국(米麴), 이화주국(梨花酒麴), 동양주국(東陽酒麴), 홍국(紅麴), 신국(神麴) 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밀가루, 쌀, 녹두, 솔잎, 연꽃, 도꼬마리, 담죽의 잎, 찹쌀 등을 재료로 했다. 이 재료를 단독으로 하거나 섞은 뒤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술을 제조했다.
16세기 초까지 누룩이 매매되었는데, 중종 때에는 도성 내 7, 8곳의 시장에서 누룩을 팔았다. 하루에 거래되는 양도 700~800문(文)에 이르렀으며, 술을 빚는 데 들어가는 쌀도 거의 1,000여 석이나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누룩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명산지가 형성되었다. 사찰에서 누룩을 만들던 전통은 고려 때부터 이어졌는데, 동래 범어사와 양산 통도사의 누룩이 유명했다. 일반 민가의 것으로는 평양과 원산의 만두형 누룩이 있었다. 그밖에 곱게 가루를 내어 탁주나 약주용으로 두루 쓰인 고양군 공덕리의 누룩, 절구 모양의 남한산성 누룩, 타주(馱酒, 질이 좋지 않은 술)와 약주용인 경북 위천의 누룩, 선산의 분곡, 온양과 평택의 누룩, 경북 오지의 각형 누룩, 전남 목포의 3홉 크기의 누룩 등이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까지도 농가에서는 부업으로 누룩을 조금씩 만들어 시장에 갖고 나가 팔았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 합병 이후 세금 확보와 통제를 위해 누룩 제조에 면허제를 시행하면서 전통술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신식 술이 등장했다. 그 결과 누룩의 형태도 바뀌었다.
조선시대에는 질병 예방, 건강 추구, 장수 기원, 혼인, 기타 연회에서 술을 이용했다. 노동 과정에서 흥을 돋우거나 문학예술작품 제작에 영감을 얻기 위해, 그리고 친목 도모를 위해 술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각 절기에 맞게 술을 빚어 때에 맞춰 마셨으며, 술의 명칭도 달리 붙였다. 이는 건강 특히 불로장생과 벽사(辟邪) 관념 등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보름날 이른 아침에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했던 귀밝이술, 무더운 여름을 탈 없이 날 수 있는 술이라는 뜻의 과하주 등이 대표적인데, 이것들은 약효를 지닌 술로 여겨졌다.
중국에서도 술이 약으로 쓰인다는 의미에서 약주라 했다. 명대의 학자 이시진(李時珍)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이라는 의서에서 술을 이용한 처방들을 소개했는데, 이때 약주는 질병을 예방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장수를 기원하는 술로는 율무쌀주(薏苡仁酒), 천문동주(天門冬酒), 지황주(地黃酒), 구기주(枸杞酒), 복령주(茯笭酒), 황정주(黃精酒) 등이 있었다. 중국의 주조법은 조선의 주조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의 약주는 술을 빚은 단지에서 얻은 말갛게 익은 술이나, 용수2) 를 박아서 떠낸 맑은 청주를 지칭했다. 또 소주 등에 약재를 넣은 술을 의미했다.
술이 약주라고 불리게 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17세기 인조 때의 문신 서성(徐渻)은 호가 약봉(藥峰)이었는데, 그의 집안에서는 좋은 청주를 빚었다고 한다. 그의 집이 약현(藥峴)에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에서 빚은 술을 약산춘(藥山春)이라 했고, 사람들은 이를 약주라고 불렀다 한다.
약주 외에도 탁주가 있었다. 손님이 방문하거나 갑작스런 상을 당하면 속성으로 술을 빚어 손님을 대접해야 했다. 이때 제조된 술은 투명한 윗부분과 탁한 아랫부분으로 나뉘는데, 윗부분을 청주라 하고, 가라앉은 아랫부분을 탁주 또는 막걸리라고 했다.
그런데 탁주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기도 한다. 누룩과 술밥을 잘 섞어 담근 술을 그대로 고운 체로 거르면 그 색깔이 뿌옇고 흐려서, 이를 탁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명은 쌀누룩으로 만든 이화주 같은 술을 탁주라 부르고, 밀누룩으로 빚은 것을 탁배기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칭은 같아도 술의 맑은 정도에 따라서, 또 재료 자체에 따라서 탁주가 뜻하는 내용은 달랐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탁주는 술 단지 윗부분의 맑은 술을 퍼낸 뒤 밑부분에 가라앉은 술을 휘젓거나 물을 타서 마시는 것으로, 흔히 막걸리라고 부른다. 약주가 고급술에 해당한다면, 막걸리는 그야말로 일반 백성이 즐길 수 있는 값싼 술이었다. 김홍도의 〈주막〉은 주막에서 국밥을 팔면서 술도 함께 파는 그림이다. 이때 사용된 술잔의 형태와 양을 보면 그 술은 틀림없이 막걸리였을 것이다.
앞서 열거한 것 외에 조선시대에 자주 거론되는 술 중에는 소주가 있다. 조선 초만 하더라도 소주는 사대부가에서 드물게 쓰는 고급술이었다. 소주가 민간에 널리 퍼진 것은 세종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세종 때의 이조판서 허조(許稠)는 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자가 많다며 과음하지 못하도록 영(令)을 내릴 것을 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벼슬에 처음 오른 시절에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으며, 그 호화롭고 사치함이 극에 달했다고 했다. 이를 통해 당시 소주가 대중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허조의 이야기를 보면 조선 초에는 소주가 고급술이었고 구하기조차 힘들었던 모양이다. 소주에 대한 선호도는 세종 때에 더욱 높아졌고, 사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조선 초기 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은 『태평한화(太平閑話)』에서 죽으면 소주인 삼해주(三亥酒)를 마시지 못할 터이니 죽는 것이 싫다는 표현을 썼다. 당시 술에 대한 선호도를 간접적으로 살필 수 있는 예이다.
그러나 소주든 청주든 탁주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굳이 종류를 따지지 않았다. 몇몇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그런 모습들이 잘 드러나 있다. 신흠3) 은 이렇게 노래했다.
술이 있으면 됐지, 청주와 탁주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작자가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그대로 알 수 있다.
김창업4) 은 관직을 중시하는 현실 사회에 대한 조소와 자신의 건강을 따져야 하는 처지에서, 술을 매개로 그런 문제들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마음을 이렇게 토로했다.
이 시는 다소 현실 회피적이다. 하지만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래 가면 술에 절어 중독이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그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초상화는 그 사람의 인품과 인상까지 보여준다. 그림에 곰보 자국을 비롯한 잡티까지 자세히 그려 그 인물이 지닌 결점도 그대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림 중에는 주인공의 코끝을 붉은색으로 표현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이는 피부색이 변조된 것이 아니라,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 중독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코가 빨갛게 된 것이다.
술은 기호품에 불과하지만, 인간 관계 특히 연애하는 대상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작가 미상의 다음 시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작하면서 술맛도 좋지만 임과 함께하는 기쁨이 더함을 술 마시는 분위기를 이용해 토로하고 있다.
술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친분을 돈독히 하고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기도 하며, 그것을 매개로 분위기를 만들고 농을 치기도 했다. 세조는 신숙주와 구치관(具致寬)이 정승 자리에 있을 때 두 사람을 ‘신정승’, ‘구정승’이라 놀리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면 벌주를 주어 분위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이는 술을 좋아하던 세조가 정승들과 격의 없는 술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기지와 장난기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술은 개인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인간 관계를 끈끈하게 맺어주기도 한다.
술을 팔고 마실 수 있는 곳이 주막(酒幕)이다. 조선시대에 주막은 주가(酒家), 주점(酒店), 주사(酒肆), 주포(酒鋪) 등으로도 불렸다. 또 주막에는 주기(酒旗) 또는 주패(酒旆)라 불리는 깃발을 달았다. 『한국사회풍속야사』에는 조선시대 주막이 나그네가 하룻밤 쉬어가는 여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만 객줏집이나 여각(旅閣), 원관(院館)과 달리 비슷한 영업 형태 중에서 가장 소박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주막은 전국 방방곡곡에 손쉽게 차릴 수 있었다. 삼남(三南) 대로를 비롯한 전국의 길거리, 부근의 큰 마을, 소읍, 선착장, 장터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광산촌과 산간벽촌까지 으레 존재했다. 그리하여 주막은 원래 술을 파는 것이 본업이지만, 도회지에서는 음식점을, 시골에서는 여인숙도 겸했다. 주막의 영업주는 대개 남의 소실이거나 일선에서 물러난 작부들이 많았다.
술집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그림인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는 약주가(藥酒家)를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술집 주변 건물이나 기와를 덮은 담장, 그리고 술 마시는 자들이 의금부 별감이나 양반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주점들은 드러내지 않게 나름대로 술을 파는 데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1894년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가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필명으로 쓴 『조선잡기(朝鮮雜記)』에는 술집 문에 이렇게 써놓은 곳이 있었다고 한다. “술상머리에 술값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시오(莫惜床頭沾酒錢).” 이곳에서는 안주로 명태와 돼지고기, 김치를 팔았다고 한다. 19세기 말 조선 주막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운치 있는 장사법이라 하겠다.
고문서 중에는 주점을 매매하는 내용도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고문서 수기(手記)와 가옥문기5)에는 주점을 매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주점을 파는 이유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주막 외에 술을 파는 들병장수도 있었다. 노상술집이라고나 할까? 술병 몇 개와 술잔들을 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술을 팔았는데, 유숙(劉淑)의 〈대쾌도(大快圖)〉에서도 그런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색주가(色酒家)를 들 수 있겠지만 자세한 소개는 하지 않겠다.
주막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술통, 술항아리, 술병, 술잔 등을 들 수 있다. 술통이나 술항아리는 양조 과정에서 술을 모으는 역할을 했으며, 술병은 호리병이나 장군(缶) 모양이었다. 술병이나 술잔은 양반들이 들놀이를 가거나 기생들과 노니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에 자주 등장한다. 찻잔과 유사한 형태의 고급스런 술잔도 있었지만, 서민들은 주로 사발과 같은 막잔을 사용했다. 막잔의 형태는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김홍도의 〈주막〉에서는 아낙네가 손님에게 국자로 술을 퍼주고 있는데, 이때 손님이 술을 받는 잔이 막잔이다.
주막에서는 대체로 사기나 질그릇을 잔으로 이용했고, 주막이 아닌 곳에서는 더 다양한 재료들로 만들어진 술잔을 사용했다. 술잔의 재료로는 금 · 은 · 놋쇠 같은 금속, 옥이나 사기, 그리고 흙 등을 들 수 있다. 술잔은 재료와 모양 · 무늬 · 색깔 · 용도에 따라 명칭이 달랐으며, 음주 습관과 술 따르는 횟수, 술을 주는 주체에 따라 술잔의 성격이 달라졌다. 때문에 술잔에 대한 표현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술을 마실 때 미사여구로 들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금준미주(金樽美酒)’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금준이란 금으로 된 술동이 또는 술잔을 말하며, 미주는 좋은 술을 지칭한다. 하지만 『춘향전』에서는 여러 사람의 피땀을 비유한 표현이었으며, 이는 곧 관리들의 착취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을 상징했다.
술꾼들은 술을 잘 마시는 것, 특히 마신 술의 양을 자랑으로 내세울 때가 많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유명한 술꾼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자랑처럼 분위기가 조성되어, 국왕이 신하의 엄청난 주량을 들어 당호(堂號)를 지어준 적도 있다.
당대에 술꾼으로 유명했던 홍윤성(洪允成)의 일화가 있다. 홍윤성은 주량이 엄청나서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는 바다를 기울여 술을 마실 정도라는 의미인 ‘경해(傾海)’를 홍윤성의 당호로 지어주고, 인장도 새겨주었다. 홍윤성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한림(翰林) 진감(陳鑑)은 그에게 ‘경해당(傾海堂)’이라는 당호를 써주기도 했다. 홍윤성이 술을 잘 마시는 점을 알고 그를 만나려고 했던 어떤 사람은 “바다를 기울이는 주인에 바다를 기울이는 손님이라, 주인이 바다를 기울이면 손님 어찌 사양하리(傾海主人傾海客, 主人傾海客何辭)”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술은 양을 잘 조절해 마시면 몸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약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과음했을 때에는 독이 되었다. 서호수의 『해동농서』에는 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술을 단순한 기호식품이라 여기면 즐기는 차원이지만, 과도한 음주는 문제가 되었다. 그 정도가 되면 술은 이미 기호식품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조선시대에 과도하게 술을 마신 후 병을 얻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른 예도 적지 않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종 때의 이조판서 허조는 술을 절제하도록 국가에서 영을 내릴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당시에 이미 술로 몸을 망친 자가 많다고 했다. 허조는 당시 술로 사망한 자로 이방우(李芳雨)의 아들 봉녕군(奉寧君),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申檣), 세종 때 우사간(右司諫)을 지낸 김고(金顧)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중에서 봉녕군의 사망 원인이 술 때문인지 실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이방우가 술로 인해 사망한 기록이 있어서 허조가 이름을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이들은 독주인 소주를 과하게 마셔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잦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세조는 원래 술을 좋아했지만, 종친을 비롯한 공신 및 고위 관료들도 잦은 술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그 때문에 과음으로 술병을 얻어 고생한다든지 심지어 사망하는 자도 있었다. 세조가 신숙주에게 “공신들 중에 과음하여 죽은 자가 자못 많다. 이계전(李季甸), 윤암(尹巖) 같은 사람이다. 또한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 계양군(桂陽君) 증(璔),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홍달손(洪達孫) 등은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역시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라고 했던 이야기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정치권 내의 한정된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여파가 술을 마시는 사회 분위기로 이어졌다. 또 세조가 홍윤성에게 ‘경해’라는 당호를 지어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술을 잘 마시는 것을 내세우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므로 술 마시는 분위기를 진정시킬 필요도 있었다. 특히 조선 초만 하더라도 고려 말의 분위기가 이어져 술을 마시는 정도가 지나쳤다. 1433년(세종 15)에는 술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교서(敎書)를 간행해 나누어주기도 했다. 교서에는 술의 해독(害毒)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와 같은 교서를 내린 이유는 술로 인해 사망자들이 증가했기 때문인데, 세종은 교서에서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종이 이와 같은 교서를 내린 까닭은 금주령을 내려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사망하는 자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위 글은 조선 초에 술 마시는 분위기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교서를 통해 요구한 것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되 절제하라는 것이다. 술 마시기를 즐기다가 일을 망치거나 하지 말며, 과음하여 몸에 병이 들게 하지 말며, 몸가짐을 조심하고 술을 상음(常飮)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술이 몸에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시인들이 술을 시의 소재로 삼았듯이, 술을 통해 영감을 얻은 화가도 있었다.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사용했던 김명국(金明國)은 술을 마신 뒤 떠오르는 영감과 감흥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 뛰어난 서화 비평가였던 남태응(南泰鷹)은 김명국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술을 마신 후 나타나는 부작용은 주정이다. 주정은 취객에 따라 다양한 행태로 나타났다. 심한 경우 주정꾼이라고 조롱을 받거나 모주망태라는 소리를 들었다. 술주정하다가 싸우는 일은 현재도 흔히 벌어지지만 조선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조 때 액정서6) 에서 대궐 문의 열쇠를 관리하던 백경전(白景旜)은, 상급 관청 세력가의 부하나 사대부 집안의 종들이 취해 행패를 부려도 삼사(三司)에서 어쩌지 못하는 반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술잔을 모조리 비웠을 때는 술주정한다고 붙잡아 가서 혼을 낸다고 했다. 그는 술주정을 금하는 것은 법을 따르는 것이지만, 세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법적으로 다루어야 할 정도로 술주정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술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국가와 사회 집단, 그리고 개인이 제례나 연회를 행할 때 술은 필수적으로 이용되었다. 금주령이 내려져 술을 제조하거나 마시는 것을 금지한 때도 있었으나, 금주령은 대부분 재해를 당했을 때 기한을 정해 시행되었다. 주로 곡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에 내려졌다. 금주령은 조선 시기를 통틀어 영조 때에 가장 심했다고 하는데, 제사를 지낼 때도 술 대신 식초(醋)를 사용하게 할 정도였다. 다른 왕대에도 상황에 따라 금주령을 내렸지만, 전격적으로 금지하지 않았던 점과 비교하면 영조는 매우 엄격했다.
금주령에 따른 문제점은 이미 조선 초에 나타났으며, 세종의 교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종은 신하들의 금주령 요청에 반대하면서, 청주를 마신 자들은 걸리지 않고, 탁주를 마시거나 사고판 자만 도리어 걸려들어 처벌받고 있다고 했다. 또한 금주령으로 벌을 받는 자들은 모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며, 넓은 집에 깊이 들어앉아 호화롭게 살며 향락하는 자는 하나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는 금주령에서 나타나고 있던 문제점과 불공평한 법의 시행을 지적한 것이었다.
금주령을 내릴 때 가장 큰 명분은 쌀의 소비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금주령은 한시적인 조치로 내려질 때가 많았다. 중종 때에도 호된 금주령을 내렸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술을 빚었다. 술을 금지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또한 누룩 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재화의 유통을 막는 것이므로 다음해 가을까지만 한정해 시행하자고 할 정도였다. 이미 인간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술은 어떤 권력으로도 쉽게 막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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