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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청, 모자, 시, 자살, 그리고 인생...
2017년 05월 07일 02시 23분  조회:4464  추천:0  작성자: 죽림
 
[일기]12월 15일 일요일

 

유리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 오전

장롱 안을 정리했다. 살이 쪄서 더 이상 입기 힘든 55 사이즈 정장이 아직 몇 벌이나 남았다. 다 직장 다닐 때 입던 옷이다. 워낙 보수적 집단이다보니 청바지나 원피스 종류는 입지 못했다. 옷과 집단성에 대해서 어디 쓴 글이 있는데 찾기 귀찮다. 그동안 셋째 올케와 숙자에게 처분했음에도 이렇게 남은 옷을 볼 땐 기분이 쿰쿰하다. 옷에도 기억이 스민다. 만난 사람, 일어났던 일, 다녔던 거리가 소환된다. 사진처럼 옷에도 추억이 담겨 있어서 찬찬이 쓰다듬다가 집어 넣었다. 새 봄에는 누군가에게 줘야겠다. 

 

■ 저녁나절

경향신문 블로그에 원자력 서평을 한 편 정리하고 복순이에게 저녁을 먹이면서 시럽을 한 숟가락 먹였다. 폐가 나쁜 상태에서 추운 날씨에 자꾸 바깥에 나가 걱정이다. 야단을 쳐서 집으로 들여 보냈다. 알라딘에 들어와 일기를 한 편 써야겠다고 로그인했다가 ‘꾸청의 모자’를 써야겠다는 지난 일기가 밟힌다. 웬만하면 이런 약조 아닌 약조는 하지 않아야지. 귀찮다. 

 

 

공개일기를 쓰다보면 스스로에게 한 말이 익명의 독자에게 약조처럼 비춰질 우려가 있는 것 같다. 즐겨 읽는 티스토리의 한 블로그에서 비슷한 경우를 봤다. 독서일기는 아니었지만 “다음번에 계속”이라는 글을 기다린 적이 있다.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 얽힌 뒷담화였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마지막 영화이며 다음 편 글에 감독 이야기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달이 지나도록 다른 영화 이야기만 올라왔다. 

 

처음엔 궁금해하다가 까무룩 잊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 블로그에 가 보니까 어떤 사람이 댓글로 묻고 있었다. 주인장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깜빡했는데 언제 한 번 쓸게요” 그러니까 “다음번에 계속”은 대개 “다음번에 안 계속” 할 가능성이 높다. 내 버릇이 이렇게 굳어진 건 쓰는 일 보다 읽는 일에 더 치중하며, 쓰는 일 보다 읽는 일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깜빡 차원이 아니다. 귀찮다.

 

■ 꾸청(顧城)의 모자

 

꾸청을 구글 이미지에서 찾으면 모자 쓴 사진이 수두룩하다. 터키 남자들이 쓰는 전통 모자 tarboosh와 비슷한 원통형 모자다. 꾸청이 이 모자를 쓰게 된 이유는 간략하게 나온다. 《잉얼》1권 말미에 붙은 <꾸청의 작품 세계>에서 유세종 한신대 중국학과 교수 설명을 인용하면 이렇다. (공개 독서일기는 이런 것까지 쓴다는 점에서 번거롭다. 숙고해 볼 문제)

 

“이즈음부터 그는 굴뚝처럼 생긴 이상한 모자, 청으로 된 원형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꾸청이 자살한 뒤, 그의 아버지 꾸꽁은 이 모자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였다. 아들은 “무언가 둘러싸맨 듯한 원통형 모양의 헝겊모자를 즐겨 썼다. 그 아인 그 모자 모양이 베이징성(北京城)과 흡사해서 그것을 쓰면 자기가 집을 떠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청으로 된 모자는 무슨 모자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으로 된 모자’가 아닐까 추측한다. 아니면 청바지 원단과 같은 ‘청으로 된 모자’일수도 있다. 그러나 꾸청은 털실로 짠 모자, 수가 놓인 모자도 썼다.)

 

인용글에서 가리키는 ‘이즈음’은 열아홉 살에 하방(遐方)을 마치고 베이징 문단에서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을 무렵이다. 꾸청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다. 1969년 문화혁명 폭풍 속에 우파분자로 낙인 찍힌 아버지와 산동성 동북지방의 한 돼지농장으로 보내졌다. 베이징의 관리 자식으로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꾸청은 들판에서 거듭 났다. 산과 강, 들판과 계곡을 누비며 광활한 자연의 정기를 마음껏 흡수한다. 마치 물 먹은 스펀지처럼 이 때부터 꾸청의 사상은 풍부한 원시림처럼 풍성해진 것 같다. 굴원과 도연명과 두보를 비롯해 빅토르 위고, 발자크, 안데르센, 도스토예프스키와 월트 휘트먼 등 남들이 학교를 다닐 때 돼지가 뛰어 다니는 들판에서 책을 읽었다. 

 

하방이 풀려 베이징으로 복귀한 후에도 목수일과 페인트 공, 공사장 잡부 일 등을 하면서 광적인 독서를 이어 나갔다. 하방 당시 읽은 책이 인식의 넓이를 확장해줬다면 베이징 복귀 후 독서는 깊이 있는 탐구였다. 헤겔의 변증법과 맑스주의를 공부하며 철학과 역사에 심취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고 싶었다.”. 당시 꾸청은 일기에서 탐독의 이유를 밝히며 책에서 자신과 세계를 찾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서도 책을 좋아했던 데보라는 누들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워. 나는 모든 걸 알고 싶거든” 그러나 책에 세상의 모든 진리와 모든 이야기가 과일쨈처럼(‘잼’이 아니다. ’보다는 ‘쨈’이 침을 고이게 한다) 농축된 것은 아니다. 책 밖 방언이 펄떡펄떡 뛰는 활어라면 책 속에 깨알처럼 박힌 글자는 그 활어를 갖고 요리한 것, 레디컬인가 2차 가공인가의 차이.

 

 

 

■ 그리고 하오랑

 

꾸청의 노동과 탐독은 프랑수아 쳉이 일흔 살에 쓴《티아니 이야기》의 주인공 ‘하오랑’을 연상시킨다. 막일을 하며 책을 읽은 하오랑의 광대한 독서는 그에게 지적 유희를 넘어 사상을 재편성하고 마침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숭고한 가치를 돌아보게 했다. 물론 꾸청은 베이징의 출세지향에 붕 뜬 분위기에 일찍 염증을 느꼈고 하오랑처럼 담대한 인물이 아니다. 두 사람의 광적인 독서는 비슷하나 하오랑은 생애 전체로 책을 완성한 실천적 인물이었고 꾸청은 심약한 자아에 매몰됐다. 

 

그러므로 하오랑과 꾸청은 독서력을 견줄만하나 생애를 비교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삶은 그렇게 평면 액자처럼 단순하지 않다. 심약함과 대범함은 우열 대상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 크고 작은 것의 가치와 의미가 다르듯이 상대성을 띠었다고 해서 절대적 평가로 비교할 수 없고 가늠할 길 없고 동질화 할 수 없는 고유성, 한 개체와 개체는 같은 이름으로 호명되는 성질이 아니다. 그래서 지나친 확신은 무지와 같고 무지는 위험한 것일지 모른다. 아니 겪어 본 바에 의하면 무지는 맹목적 낙관만큼이나 위험하다. 여기서 무지는 지식을 많이 알고 적게 앎이 아니다. 아, 관두자. 이런 일기로 호젓한 밤 시간을 공연히 진지하게 만들기 싫다. 

 

안 그래도《티아니 이야기》를 한 권 주문했다. 2001년 출간된 이 책은 어쩌면 절판이나 품절 위기에 처해질지도 모른다. 문화혁명을 관통하는 섬세한 대서사시를 읽으며 여러번 감탄했다. 그래서 두번째 책《독과 도》에서《티아니 이야기》를 가리켜 “비단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문장마다 진중한 공을 들였다.” 라고 소개했다. 내가 쓴 이 감탄문 때문에《티아니 이야기》를 위시리스트에 올려놨지만 절판되어 속상하다고 쓴 어떤 독자 푸념을 인터넷에서 봤다. 이렇게 잘쓴 소설이 왜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백년 동안의 고독》과 함께 뽑을 근사한 소설이다. 

 

꾸청의 모자를 쓰다가 하오랑까지 훌쩍 넘고 말았다. 깊은 밤, 꾸청의 모자 사진 검색을 한참이나 계속했다. 누군가 남긴 흔적을 대면하는 일, 하물며 이제는 그 자국만 애잔하게 남은 과거를 보는 일은 스산하다. 함박눈이 펄펄 내렸으면 싶은 밤이다. 남은 막걸리나 한 잔 마셔야겠다.

 

 <뉴질랜드에 머물 때의 꾸청과 그의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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