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미지와 수사
시어의 생명은 객관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함축적인 의미에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논리적 분석의 대상만은 아니다.
문학 일반이 그렇듯 시는 독자에게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독자는 이를 통해 시적 체험(詩的體驗)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 절실하게 느꼈던 체험이나 감각을 생동감 있게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제재인 언어를 통해 그것을 감각화(感覺化)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감정이나 사상이 감각과 통일되어 나타난 것이다.독자들은 누구나 여러 가지 감각 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통한 환기(喚起)가 가능한 것이다. 예컨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고 했을 때 '소리'라는 청각과 '푸른'이라는 시각의 두 이미지가 합쳐져 있다. 이것을 공감각(共感覺)적 이미지라고도 하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하는 종소리를 보이는 대상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는 시의 회화성(繪畵性) 획득에 크게 기여한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이 시의 주된 정서는 '설움'이다. 그러나 그 정서는 '서럽다'는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제삿날 큰 집의 불빛', '해질녘 가을 강', '사랑 끝
울음', '소리 죽은 가을 강' 등의 이미지들이 모여 만들어 낸 정서다.특히,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인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울음(청각)'과 '타는(시각)'이 만나, '설움'의 정서는 한층 선명해지고,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 이처럼 직설적, 추상적인 어법을 피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지향할 때, 시는 보다 참신하고 풍요로운 예술적 형상화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새로운 의미, 새로운 이미지를 얻기 위해 비유의 방법을 동원한다. 비유의 방법이 가능한 것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유사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는 두 사물 사이에서도 공통점을 찾아 내기도 한다.이 공통점을 시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그 방식에 따라 직유(直喩)·은유(隱喩)·의인(擬人)·제유(提喩)·환유법(換喩法)등의 비유법이 성립하게 된다.
스스로의 생명을 키워
그 생명을 다 하기 위하여
빛 있는 곳으로 가지를 늘여
잎을 펴고
빛을 모아 꽃을 피우듯이
추운 이 겨울날
나는 나의 빛을 찬아 모아
스스로의 생명을 덥히고
그 생명을 늘여
환한 그 내일을 열어 가리.
(조병화, '난(蘭)')
이 시에서 '빛'은 시 전편에 반복되어 나타남으로써 시인 자신의 어떤 관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차원에 있다. 이 시의 화자인
'나'는 단순히 '빛을 찾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보조 관념인 '빛'은 자연스럽게 원관념인 '이상, 희망, 혹은 이념' 등의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이처럼 상징이란 가시(可視)의 세계, 곧 물질 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시인의 관념인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곧 정신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 양식이다
4. 운율과 시짓기
서정시의 본질은 언어의 유기적(有機的) 조직을 통해 의미와 음악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데 있다. 이 때 시의 음악성, 곧 가락(리듬)을
가리켜 운율이라고 한다. 음악이 시간 예술이며, 음의 고저장단(高低長短)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듯이 운율 역시 운율 요소들의 규칙적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규칙적 반복은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일정한 의미를 지닌 조화로운 형식이다. 운율이 조화로운 질서임을 구체적 예를 통해 알아보자.
괴나리 / 봇짐을 / 짊어지고 //
아리랑 / 고개로 / 넘어간다 //
아버지 / 어머니 / 어서오소 //
북간도 / 벌판이 / 좋다더라 //
('신아리랑'에서)
이 민요는 3마디가 1행을 이루고 있고, 이러한 행이 반복되어 1연을 이루고 있다. 1마디를 1걸음으로 치면 3걸음이 1행을 이룬다. 이
걸음은 소리의 걸음이기 때문에 음보(音步, foot)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위의 민요는 3음보 가락으로 되어 있다.우리 나라의 시는 대부분 3음보와 4음보의 가락으로 되어 있다. 민요와 현대시에는 3음보와 4음보가 두루 쓰이고, 고려 가요에는 3음보가 많으며, 시조(時調)와 가사(歌辭)는 모두 4음보로 되어 있다.
다시 위의 민요를 보면 1음보의 글자 수가 3자와 4자로 되어 있다. 즉, 3·3·4 // 3·3·4 // 의 규칙적 반복인 것이다. 그러면서
3·3·3으로 하지 않고 3·3·4로 변화를 주면서도 뒤의 글자수가 한 자가 많은 4자여서 전체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처럼 운율은 규칙적 반복과 변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강(秋江)에 / 밤이 드니∨물결이 / 차노뫼라 //
낙시 / 드리치니∨고기 아니 / 무노ㅁ라 //
무심(無心)한 / 달빗만 싯고∨빈 배 저어 / 오노라 //
(월산대군(月山大君)
이 평시조는 4음보로 된 1행이 3번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글자 수조차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3·4·3·4 // 2·4·4·4 // 3·5·4·3으로 3·4를 중심으로 가감(加減)되고 있다. 평시조는 4음보의 규칙적 반복이 외형적으로 틀이 잡혀 있는 시이므로 정형시(定型詩)에 속한다. 그리고 운율이 겉으로 드러나 있으므로 외재율(外在律)에 속한다.
해야 / 솟아라. // 해야 / 솟아라. /// 말갛게 / 씻은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산 너머 / 산 너머서 // 어둠을 / 살라먹고, /// 산 너머서 / 밤새도록 // 어둠을 /
살라먹고, /// 이글이글 / 앳된 얼굴 // 고운 해야 / 솟아라
(박두진, '해'에서)
이 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산문(散文)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호흡 단위로 율독(律讀)하면 4음보의 가락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운율이 겉으로 틀 지어져 있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 속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자유시라 하고, 그 운율은 내재율(內在律)이라 한다.
시의 운율에는 음수율(音數律), 음위율(音位律), 음성률(音聲律)등도 있다. 음수율은 글자수의 정형성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 시의 기본적인 음수율은 주로 3·4조나 4·4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음위율은 압운법(押韻法)을 말하는 것으로, 한시(漢詩)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음성률은 음의 고저 강약(高低强弱)에 의존하는 것이다.
운율의 요소로는 이 외에 음성 상징(音聲象徵), 의성어(擬聲語), 반복과 병렬등이 있으며, 행·연 등의 시의 형태도 운율과 관계가 있다. 음성 상징은 음색(音色)과 음상(音相)을 이용한다. 예컨대 발자국 소리를 '자박자박'이라고 표현하는 경우와 '저벅저벅'으로 하는 경우의 음성 상징은 서로 같지 않다. 전자처럼 양모음(陽母音)을 쓸 경우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음모음(陰母音)을 쓸 경우 어둡고 둔중(鈍重)한 느낌을 준다.
또 ㄴ·ㄹ·ㅁ·ㅇ과 같은 자음과, 모음과 모음 사이에 발음되는 ㅂ·ㄷ·ㅈ의 음도 즐겁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김영랑의 시 구절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과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의성어는 소리를 모방한 것으로, 실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삐이 뱃종 뱃종! / 하는 놈도 있고박두진의 '사슴'에서와 같은 것이다. 반복의 경우는 앞의 박두진의 '해'에서 잘 볼 수 있으며 병렬은 한시의 대구(對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시를 공부하면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및 분석과 창작하는 일의 선후 관계이다. 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나 분석은 이론의 문제일 터이고 창작은 직접 써 보는 일이 되는 셈인데,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옳은가 하는 문제는 당연한 물음이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몇 편의 시를 창작 혹은 분석해 보고 기쁨을 얻게 되면 대부분은 시를 많이 아는 양 우쭐거려 보기도 하고 마치 시인이 된 양 자찬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시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며, 시인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시를 가장 모를 때라고 한다면 오히려 옳은 말일 것이다. 조금 알고 있음에 만족하고 그치는 경우, 그 편협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시의 세계를 그릇되게 인식하고 심지어 시의 본질까지도 왜곡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문자 언어를 매개체로 하는 예술인 경우에 꼭 필요한 말로, '이해할 수 없으면 쓰지도 못 하고, 쓸 수 없으면 이해할 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론과 실제의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글 공부를 위해서는 '이해하지 못 하면 쓸 수 없다'는 말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시 짓기를 위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밟다 보면 짓기를 사사롭게 시도하지 않으며, 지으면서 그 과정 속에서 얻은 것을
조심스럽게 적용하려 할 것이다. 이에 널리 알려진 시를 분석하는 요령을 네 가지 차원에서 알아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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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유자효(1947∼)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마치 철칙인 듯 선물은 번듯한 것으로, 무엇을 베풀 때는 풍성하게 하는 친구가 있다. 받는 사람의 기분을 깊이 헤아리는 그 마음은 아름답지만, 곤궁하다 할 수 있는 그의 형편을 아는지라 옆에서 볼 때마다 안타깝다. “이것저것 섞어서 이천 원어치만 주세요.” 인색함이나 근천스러움에 대해 떠올릴 상황이 됐을 때 그와 주고받는 오래된 농담인데,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길에 한 일행이 이리 주문했단다. 그의 기질에 얼마나 경악했을까. 하지만 예의 그 사람은 제 말이 우리의 신랄한 농담거리가 된 줄 짐작도 못하리라. 마음이든 물질이든 우리는 저마다의 경제관념을 갖고 있다. 사랑의 총량도 저마다 다르리라. 그리고 대개 우리는 그 총량을 다 쓰지 못하고 가리라. 그래야 하리라. 사랑이 바닥난 채로 남은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스산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일 테다.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단다. ‘아직’이란 말에 밴 안타까움이 어떤 절박한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사랑이 깊으면 그 대상에 대해 항상 이리 절박한 느낌을 가지리라. 시에 ‘함빡’이란 말이 거듭 나온다. 화자가 가진 사랑의 빛깔은 알 수 없지만, 그 양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한정이리라. 그러니 언제까지라도 ‘아직’일 테다. 언제까지라도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을 테다. 이 사랑의 부자는 항상 제 사랑이 ‘아직’이라고 안달하는 사랑의 거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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