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世界 색점선
20세기 초 근대 중국 회화의 역사를 새로 쓴 화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서양 유학을 다녀온 화가이자, 중국적인 소재를 유화로 그린 첫 화가이기도 하다. 중국에 근대식 미술 교육을 도입했고, 서양화의 사실주의를 받아들여 전통 중국화를 개혁해야 한다는 ‘중국화 개량론’을 주장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어떻게든 실행하는 성격으로 주류 화단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치바이스, 리커란 등 재야 화가들을 주류 화단으로 끌어들이며 중국 미술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895년 중국 동부 양쯔 강 하류에 있는 장쑤 성의 이싱 시에서 태어났다. 화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여섯 살 때부터 전통 회화와 서예를 배웠다. 1915년 상하이로 이주해 개인 작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1917년 도쿄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고, 이듬해 귀국하여 중국 항일 운동 지도자이자 당시 베이징대학교 총장이었던 차이위안페이의 도움으로 베이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유화와 드로잉을 공부했고, 이탈리아, 독일 등을 여행하며 서양 미술의 여러 기법을 배웠다. 1927년 귀국 후에는 난징 중양대학교와 상하이 난궈 예술대학교의 강사를 역임했고, 1929년에는 베이핑 예술 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베이핑 예술 학원 원장이 되자마자 눈여겨 두었던 재야의 거장 치바이스에게 교수직을 제안했다. 당시 예순다섯 살이던 치바이스는 쉬베이훙보다 서른한 살이나 많았다. 게다가 치바이스는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기에 쉬베이홍의 결정에 보수적인 화단의 반발이 거셌다. 쉬베이훙은 치바이스의 교수직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원장직에서 사퇴했다. 치바이스는 후에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을 역임하고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는 등 중국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일찌감치 주류 미술계에 자리를 잡은 쉬베이훙은 치바이스 외에도 리커란, 중졸 학력의 만화가 출신의 예첸위, 중국 화가 최초로 국제 무대에서 입상한 웬원량 등 주류 미술계가 무시했던 작가들을 직접 발굴하고 지원하며 근대 중국 미술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1933년 쉬베이훙은 근대 중국 회화 전시회를 조직해서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러시아를 순회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싱가포르와 인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37년 다시 충칭 중양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했고, 1938년에는 인도의 문호 타고르의 요청으로 인도 국제대학교에서 강연과 전시회를 진행했다. 이때 타고르와 간디를 만난 경험을 〈우공이산〉이라는 작품으로 옮겼는데, 이 그림은 2006년 3300만 위안(약 40억 원)에 거래되며 당시 중국 내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1946년에는 베이핑 예술 전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쉬베이훙은 소묘, 유화, 중국화에 두루 능했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서양 미술을 익힌 후에는 이를 중국 전통화에 접목하여 새롭고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했다. 풍경화, 인물화를 비롯해 꽃, 동물, 역사, 신화 등 다양한 소재를 섭렵했는데, 특히 말, 사자,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은 애국주의 정서와 맞물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세상이 평화로워 농사가 즐겁다〉도 농부의 평화로운 일생을 묘사했지만, 묵묵히 일하는 농부들도 전쟁에서 활약하는 군인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애국주의 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실력 있는 화가를 발굴하고, 미술 교육 근대화를 주도했으며, 서양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등 현대 중국 회화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1949년 중국 건국 이후 중국 문학예술계연합회 상무위원,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으로 뽑혔고, 중앙미술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베이징에 있던 자택은 1954년 쉬베이훙 기념관이 되었는데, 이는 중국 정부가 세운 최초의 화가 기념관이다.
• 88위. 〈세상이 평화로워 농사가 즐겁다〉
=========================
우리나라에서는 ‘서비홍’으로 더 많이 알려진 쉬베이훙은 중국 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유명 화가다. 흔히 말 그림에 뛰어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풍경화도 잘 그렸고, 수묵화뿐 아니라 유화도 그렸다. 프랑스 유학파인 그는 서구의 사실주의 회화를 받아들여 보수적인 중국화를 개혁하려고 애를 썼다. 베이징 대학교에서 발간하는 한 잡지에 보수적인 중국 화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중국화 개량론〉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당시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고, 1933년에는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중국 근대 수묵화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문인화가 인생과 사회의 문제를 표현하는 새로운 회화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중국의 정치사회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다.
쉬베이훙은 사실주의 회화를 주창하고 전쟁과 민중의 삶 등 중국 현안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의 그림은 그런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런 특징들이 〈세상이 평화로워 농사가 즐겁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농부 3명이 땅을 경작하는 평범한 농촌 풍경이다. 그림이 완성된 1951년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로 중국도 참전 중이었다. 그림 왼편 위에는 ‘농부들도 용감한 군인들이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는데, 이는 당시 참전한 중국군들뿐 아니라 농부들도 뒤에서 보이지 않게 국가를 뒷받침하는 애국자들이라는 생각을 적어 넣은 것이다.
쉬베이훙은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대학인 중앙 미술 학원의 초대 총장과 중국 미술관 협회의 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송백고립도 전서사언련〉을 그린 치바이스를 주류 미술계로 끌어들인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주류 미술계는 치바이스를 화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쉬베이훙은 그의 탁월함을 알아보고 삼고초려 끝에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베이핑 예술 학원(베이징 미술 학원의 전신)의 교수로 모셔 왔다. 당시 쉬베이훙이 서른네 살, 치바이스가 예순다섯 살로 쉬베이훙이 서른한 살이나 어렸다. 하지만 보수적인 베이징 미술계는 쉬베이훙의 파격적인 행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온갖 나쁜 소문에 시달리던 쉬베이훙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치바이스의 교수직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홀로 편견과 맞서 싸우며 뭐든지 내 고집대로 하겠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았다.
쉬베이훙은 쉰여덟 살에 심장 마비로 급사해 짧은 생을 마쳤다. 쉰여섯 살에 그린 이 그림은 저명한 시인이자 역사학자인 친구 궈모뤄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궈모뤄가 1951년에 스탈린 평화상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그려 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궈모뤄 박물관을 거쳐 중국 베이징에 있는 쉬베이훙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다. 서양 미술이나 동양 미술이나 소장 기록이 좋은 그림은 잘 팔리게 마련이다. 이 그림은 2011년 12월 베이징 바오리 경매에서 2억 6680만 위안(440억 7000만 원)에 달하는 금액에 낙찰되었다.
/////////////////////////////
\
서비홍(1895-1953)
강소 의흥 사람. 1917년 일본에 가서 미술을 배움. 1927년 파리고등미술학교를 졸업. 1949년 중앙미술학원의 초대 원장이 됨. 대표작 : 전횡오백사. 우공이산. 군마. 타고르상등이 있음.
우공이산의 구상, 창작과 유전은 모두 전설적인 색채를 담고 있으며, 중국현대미술창작과 수장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939년 12월 서비홍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초청을 받아, 싱가포르, 랭구운, 캘커타를 거쳐 타고르의 거주지인 Shantiniketan으로 갔다. 1940년 2월에는 간디가 샨티니케탄을 방문했고, 타고르는 간디에게 서비홍을 소개시켜 주었다. 후세인들이 적은 글에 의하면 서비홍은 우공이산의 이야기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간디를 위하여 화상을 그리던 중에 이 인도독립의 영혼인물의 몸에서 우공의 영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후에 <<우공이산>>의 초고와 인물사생을 수십장 그렸다. 5월에 서비홍은 히말라야산맥의 시킴으로 가면서 구절양장의 길을 뚫어놓은 것을 보고는 <<우공이산>>의 구상을 보다 완성시켰다.
8월 24일 오후 1시, 서비홍은 <<우공이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전에 초벌그림만 30여폭을 이미 그렸었다. 11월에, 커다란 수묵화 <<우공이산>>과 유화 <<우공이산>>의 창작을 완성했다. 인도여행기간중에 창작한 수묵화 <<우공이산>>, <<타고르>>, <<군마>>, <<분마>>, 유화인 <<우공이산>> <<간디>>, <<희말라야산>>, <<식난교장로>>등의 스케치와 소묘를 완성했다.
1940년 11월, 서비홍은 타고르와 헤어져,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1941년 4월, 미국의 화교연합회와 임어당, 새진주등이 서비홍에게 미국으로 와서 전시회를 열도록 준비했다. 11월 전시회의 도록과 참고사진을 미국으로 보내는 동시에 수백장의 유화작품을 해운회사에 보내어 미국으로 보냈다. 나머지 대부분은 상자에 넣어 운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8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같은 날 새벽4시부터 싱가포르에 일본비행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15일에 빈성이 함락되고, 싱가포르로 몰려왔다. 진퇴양난의 서비홍은 수장한 백여상의 회화창작과 고대서화작품, 근대명가의 서화, 골동품, 도자기, 고서적진본등을 각각 한괴준의 홍모단원과 황만사의 백선재에 나누어 보관했다. 1942년 12월 일본기의 공습을 피해, 서비홍은 나농천의 숭문학교로 옮겨갔다. 이 학교는 복건 안계회관에서 만든 것으로 교장인 종청해는 서법에 뛰어났고, 서비홍과 안면이 있었다. 싱가포르가 위험한 것을 보고, 서비홍은 황만사등과 협의하여 밤에 백선재에 보관했던 회화, 서적, 비첩, 골동, 인장 및 <<우공이산>>을 포함한 10폭의 유화를 노농천으로 옮겨와서 옛날 우물 속에 숨겨두었다. 1942년 1월에 서비홍은 싱가포르함락을 전후하여 인도배를 타고 싱가포르를 떠났다.
1945년 9월,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황만사, 임금승, 종청해등 세 사람은 그동안 3년8개월간 감춰두었던 작품등을 꺼내고 서비홍에 서신을 보냈다. 서비홍은 회신에서 종교장이 일본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켜준 것에 감사하며, 그 중에 아무 것이나 하나를 택해서 가지시도록 하였다. 종청해는 <<우공이산>>을 선택했다.
1953년 서비홍이 병으로 사망하고 다음해 2월, 싱가포르에서 서비홍의 작품전을 열었는데, 이 때 <<우공이산>>이 전시된다. 이 작품은 1999년 대만의 모 화랑에서 구매했으며, 2000년 중국가덕에서 인터넷경매를 했고, 대만의 수장가가 250만위안의 가격으로 가져갔었다.
2006년 6월 24일에서 26일까지 북경한해춘계 경매회가 케리센터호텔에서 거행된다. 여러 경매작품중에 해외에서 수십년을 머물렀던 서비홍의 대표적인 유화인 <<우공이산>>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은 서비홍이 창작완성한 후에 65년만에 북경으로 처음 돌아온 것이다. 낙찰경매가격은 3000만위안으로, 서비홍작품중 최고가격을 기록했다.
서비홍의 <<우공이산>>유화작품은 두 개가 세상에 남아 있다. 서비홍은 일찌기 두 폭을 그렸다. 이번 한해에서 경매된 것은 첫번째 작품으로 크기가 비교적 적은 것이다(46X107.5센티미터), 현재 서비홍기념관에 수장되어 이는 <<우공이산>>은 두번째 작품이며 크기가 400X200센티미터이다. 위에 설명한 사항은 모두 첫번째 작품에 관련된 것이다.
두번째 작품은 문혁기간중에 물기가 많은 방안에 두었기 때문에, 색깔이 변했다. 중국과 프랑스의 유화전문가들이 5년의 시간을 들여 원상으로 복구한 후에야 전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재현하는데에는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에 경매된 소폭의 우공이산은 지금까지 서비홍의 항일전쟁기간동안의 창작풍모를 더욱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
서비홍의 말
서비홍의 말 그림은 매우 유명합니다. 사람들이 그가 그린 말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신을 감화시키고 미적교화를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의 아름다움은 서비홍만이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대(唐代)의 조패(曹霸), 한간(韩干)이 그린 말 그림은 이미 명화사(名画史)에 남겨져 있습니다. 당삼채(唐三彩)자기에 그려진 말 조각 역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역대 왕릉에도 말의 석조가 없는 것이 없으며 출토문물인 [마답비연(马踏飞燕)]에 동으로 조각된 말 역시 그 구상이 독특한 예술진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비홍의 말은 고금에 입각하여 그 자신만의 특색을 입혔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의 울타리 밖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예술거장의 성취라 하겠습니다.
서비홍의 말은 조형상으로 말의 아름다움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말의 웅장함, 건장함,용맹함을 표현했습니다. 황야를 거침없이 내달리고 창공에 머리를 치켜든 기세는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설사 고개를 숙이며 물을 마시는 모습이라도 말의 용맹스러움을 드러낼 정도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말의 살찌고 통통한 기세에 미혹되지 않고 오히려 말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예술적 매력이 있는 특징인 ‘강건함’을 포착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말 그림은 그 기골을 그리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서비홍은 말의 기골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 그려내었습니다.
서비홍의 말은 중국화입니다.그는 중국화의 전통을 사용하여 선으로써 형태(线造型)를 만들었고 항상 속이 꽉찬 듯한 중묵(重墨)을 사용했으며 자유분방한 필세에 그의 독특한 표현을 더해 중국화의 필묵미를 남김없이 드러냈습니다.
또한 그는 서양의 화법을 흡수하여 국부적으로는 체면조형(体面造型)을 접목하였으며 사물 이미지의 빛과 그림자(명암)에 주의했습니다. 이렇듯 동서양 화법을 결합했던 천의무봉한 표현수법은 그의 말을 붓과 먹의 정취가 물씬 풍기게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렸던 바람 앞의 작은 새들, 가지 위의 까치, 한가로이 쉬고 있는 고양이 그림과는 그 풍격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효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비홍의 말은 자신의 개성과 정치이념을 그 속에 기탁해놓은 것입니다. 그의 말은 [구방고]그림에서의 고삐 있는 말 이외에 다른 말들은 모두가 재갈이나 고삐, 안장도 없이 자유자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자유를 열망하는 대중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조국의 명운이 불안정하게 변화되어감에 따라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그는 각기 다른 모습의 말을 그렸습니다. 해방전에는 혹은 질주하고 혹은 걸음을 멈추어 있는 모습이었으나 해방이 되어 새로운 세상이 왔을 때 그의 말은 몸을 훌쩍 솟구치며 기뻐 날뛰고 있습니다. 화가의 강렬한 애증이 화지에 생생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술미는 예술가의 주관 감정이 객관 형상위에서 드러나고 한데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서비홍의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그렸던 달리는 말 그림의 제발을 본다면 예술거장의 영혼과 정치태도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면 해방전에 그렸던 그림 중 “ 이 밤은 결코 기나긴 밤이 아닐 것이며, 막막하고 황량한 것도 그 다함이 있을 것이니(直须此夜非长夜,漠漠穷荒有尽头)”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암흑 같았던 구사회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명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충만했습니다. 해방 후에 그린 말 그림에는 “세상의 어지러운 온갖 전쟁도 결국 백성이 주인됨으로 돌아가고, 험난한 길 없어져 평탄한 길 열렸네(山河百战归民主,除尽崎岖大道平)”라고 했는데 이는 의심할 것 없이 벅찬 환호를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서비홍의 달리는 그림은 진실을 위반했다고 하면서 생활 속의 말은 앞발이 착지 전에는 곧게 펼 수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사실 예술 진실은 원래 생활 진실의 기계적인 복제일수는 없습니다만 달리는 말의 앞발을 똑바로 뻗게 하였기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질주하는 기개를 보여주고 말의 본질적인 특징을 표현하고 대중의 심경을 기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이 사물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았을 때 진실을 다소 수정하는 과장을 허용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점이 거장의 뛰어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진실을 지나치게 따지는 화가는 예술창조의 오묘함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주제가 필요할 때면 서비홍의 달리는 말 역시 동일하게 말의 앞발을 구부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해방을 경축하는 그 분마도가 그런 경우인데 등장하는 이 말은 기쁨에 차 뛰어오르고 있습니다 하늘 높이 떠 오르는 기세가 대단합니다. 이 때 거두고 있는 발은 의심할 것 없이 곧게 펴 있는 앞발보다 신기(神气)함을 더합니다. 이것은 바로 “형식주의도 자연주의도 모두 진흙탕이다”라는 서비홍의 예술 주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서비홍의 《파인급수도》 경매가 1억7100만원 근현대 서화 경매가격이 하늘을 찌를듯하다. 리가염의 《장정》(长征)이 1억 750만원의 경매가로 중국근현대서화 최고경매기록을 창조한후 일전에 있은 한해(翰海)가을 경매회에서 서비홍의 《파인급수도》(巴人汲水图)가 1억7100만원의 가격으로 락찰돼 중국 근현대서화 경매기록을 갱신했다. 《파인급수도》는 높이가 30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62센치메터인데 서비홍이 1937년 항일전쟁당시 중경에 머물면서 당시 눈으로 보아온 중경사람들의 물을 긷는 간고하면서도 대를 이어 내려갈 항쟁정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1938년도에 완성한 그림이다.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