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부끄러움과 마광수 /김동렬
마광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말이다. 마광수의 제자 되는 분이 팟캐스트에 나온 적은 있지만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마광수는 떠났다. 나의 궁금증은 영영 풀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마광수가 규명한바 윤동주의 시를 관통하는 정서인 부끄러움이 동성애 코드와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궁금증은 묻힐 것이다. 윤동주는 27살에 죽었다. 기형도 시인은
28살에 죽었다.
나는 마광수의 얼굴에서 쓸쓸한 그림자를 보았다. 나만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는 운명적으로 외로웠다. 사회의 냉대 때문만은 아니다. 냉대는 오히려 맞대응의 투지를 불러일으킨다. 그 이상이다. 기형도 시인은 마광수가 발굴해 등단시켰다.
그는 28살에 지금은 없어진 파고다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죽었다. 게이들의 집합처로 알려진 곳이다. 윤동주, 기형도, 마광수 셋 다 자녀도 없이 외롭게 살았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건 세 사람에게 공통으로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다.
그것은 자기애다. 나르시시즘이다. 왜 그들은 자신을 탐닉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흥미가 있으니까. 야한 여자가 좋다는 마광수의 말은 모순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나는 권력이 좋더라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권력을 빼앗기는 수가 있으니까.
야한 여자가 좋다고 선언하면 야한 여자가 도망간다. 그것은 마치 호랑이가 나는 사슴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슴이 그 말 듣고 호랑이를 피한다. 위험한 자기소개다. 필자가 자기소개를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상대방의 호응을 구하는 절차가 필요한 거다.
일방적인 호소는 무례하다. 마당쇠가 주인집 마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멍석말이를 당한다. 마광수는 다수의 호응을 기대했지만 한국인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남자도 호응하지 않았고 여자도 호응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교재를 구매하지 않았다. 외로워진 거다.
왜 남자들은 야한 여자가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까? 좋지 않으니까. 사실 대부분 남자는 야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다. 남자에게 야한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판타지 속에나 머물러야 한다.
가슴이 강조된 여자 게임 캐릭터처럼 말이다. 비현실이 현실에 쳐들어오면 남자는 당황하게 된다. 예컨대 이런 거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여자는 입구 쪽에 서고 남자는 뒤쪽에 가서 선다. 남자는 자기 뒤에 누가 서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왜? 공격당할까 봐.
누가 뒤통수를 흉기로 가격할지 모른다. 여자는 반대다. 여자는 등을 돌려 남자의 음흉한 시선을 방어한다. 남자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여자가 앉으면 결례가 된다. 뒷좌석은 조폭 보스가 앉는 자리다. 뒤로부터 공격받을 일이 없는 안전한 자리가 되니까.
무엇인가? 야한 상황은 남자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해했는가?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가보자. 개는 자기 냄새를 감추려고 하므로 집에서는 배변을 하지 않는다. 주인과 산책을 나가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몰래 배설해야 한다. 주변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한다.
빙글빙글 맴을 돌다가 배변하는 개도 있다. 그 순간은 개 입장에서 취약한 상황이고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새끼를 낳는 동물은 신음소리도 내지 않는다. 극심한 출산의 고통을 느끼지만 절대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다. 나의 출산사실을 알리지 말라.
출산한 즉시 태반을 먹어치워 증거를 인멸한다. 새끼가 배설을 하면 핥아서 냄새를 지운다. 자신의 약한 고리가 되는 지점을 들키지 않는 것이 동물의 살아남기 전략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야한 상황은 인간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다. 들키면 안 된다. 말하면 안 된다.
야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자다. 야하다는 것은 여성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야한 것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조종할 수 있다. 그렇다. 마광수는 남자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입장을 대변한 거다. 여자들이 차마 못 하는 말을 대신해준 것이다.
레이디 가가나 마돈나, 김완선의 전성기 패션에는 야한 것을 무기로 삼아 남성을 조종하겠다는 권력자의 카리스마가 있다. 여성들은 강렬한 호피무늬 옷이나 땡땡이 의상 혹은 가죽벨트에 번쩍거리는 금속성 악세서리를 달아서 그러한 동물적 카리스마를 표현한다.
과거에 정양이라는 예명으로 수술한 가슴을 내세워 화보를 찍은 연예인이 있었는데 온라인으로 사진을 다운받아 볼 수 있었다. 돈을 내고 사진을 다운받은 사람은 당연히 남자였을 거라는 편견은 보기 좋게 깨졌다.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사람은 다수가 여자다.
여자가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사진은 인터넷에 많다. 제인 러셀의 가슴을 훔쳐보는 마릴린 몬로의 사진이 그러하다. 남자가 야한 것을 보면 마음이 끓어오른다. 그것은 강한 스트레스다. 왜냐하면 그 순간 숨을 쉬지 않기 때문이다. 100미터 경주는 무호흡경기다.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춘다. 호흡을 하면 에너지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격선수는 호흡을 멈추고 총을 발사한다. 타자는 호흡을 멈추고 자세를 잡는다. 권투선수는 호흡을 멈추고 가격한다. 격투기 선수는 상대방의 호흡을 읽고 들어간다.
호흡을 읽히면 죽는다. 이런 것을 액션영화로 묘사할 줄 아는 제대로 된 감독을 나는 발견하지 못했으니 유감이다. 이소룡 영화에 살짝 묘사되기는 하지만. 풀쩍풀쩍 뛰면서 리듬을 타면서 척 노리스를 두들겨주는 것이다. 상대방을 자기 리듬에 끌어들여 패준다.
웃을 때 웃음소리가 크게 나는 이유는 놀라서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가 알고 보니 별거 아니라서 발작적으로 호흡을 재개하기 때문이다. 미소를 지어보면 알 수 있다. 어린이가 TV에서 야한 장면을 보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눈을 가리는 것과 같다.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순수한 본래다. 그러므로 남자는 야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내숭 떠는 게 아니라 진짜로. 왜? 그 순간은 극도로 취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공격받을 수 있다. 개도 자기 약점을 드러내는 행동을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부끄럽다는 말은 취약하다는 말과 같다. 민망하다는 것은 타인에게 약점을 들킨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럴 때 얼어붙는다. 마광수는 남자를 오해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남도 생각할 것으로 믿었다. 뭐든 위에서 내려다보면 작아 보인다. 모니터로 테스트할 수 있다.
눈높이에 따라 피사체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맹수가 공격할 때는 눈동자가 작아진다. 눈동자가 작으면 김완선 눈처럼 무섭다. 조폭의 사백안이다. 양아치들이 눈 깔어 하고 겁주는 게 그 때문이다. 양아치는 눈을 야린다. 눈동자를 작게 하여 째려본다.
그게 동물의 공격신호다. 상대방이 작아보여야 공격할 수 있다. 상대방의 동작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동건처럼 눈이 크면 복서로 성공할 수 없다. 동체시력이 안좋게 된다.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읽을 수 없다. 상대방의 다음 동작이 전혀 읽히지 않는 것이다.
목욕탕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보면 커 보이고 자기 것을 내려다보면 각도 때문에 작아 보인다. 그래서 남자는 성기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다. 욕설에 성기가 등장하는 게 이유가 있다. 욕설은 그것이 공격신호다. 초컬릿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성기를 떠올리면?
당연히 불쾌하다. 초컬릿도 좋고 섹스도 좋은데 왜 초컬릿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성기를 떠올리면 기분이 나빠질까? 섹스는 취약한 상황이다. 누가 쳐다보면 하던 섹스도 멈추게 된다. 포르노배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사람이 힘을 쓸 때는 피를 모아야만 한다.
피가 하체로 이동해 있으므로 힘을 쓸 수 없는 취약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낀다. 마광수는 남자의 원초적 본능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는 한국이 야한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그렇지가 않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한국 남자들은 공격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격당할 위험이 없어져야 야할 수 있다. 마광수의 오해다. 야한 상황은 유쾌한 상황이 아니라 자객에게 습격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며 남자들은 여자의 야한 공격에 방어태세로 가서 자세가 굳었다.
인터넷에 음란물이 넘쳐나지만, 남자들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몰래 본다. 그 순간은 외부의 침입자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취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광수가 꿈꾸었던 야한 사회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안전하지가 않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야한 것은 여자의 무기다. 여자는 얼마든지 야할 수 있다. 공격받을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공격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제왕은 옛날부터 야했다. 이건희도 여자를 끌어들이다 죽은 판에 말이다. 이런 건 진지하게 토론해봐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인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부끄러움이 취약함과 동의어이며 그것이 정글에서 살아남는 과정에 발달시킨 인간의 생존본능임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모르고 있고 필자 역시 모르고 있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게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야한 상황은 여자의 카리스마에 남자가 심리적으로 제압되어 위축된 상황이며 극도로 안전한 경우에만 남자가 이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삶에 찌들어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 남자에게 그런 정신적 사치는 비현실입니다. 해외 신혼여행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런 극도로 편안한 심리상태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광수는 정신적 귀족인 거죠. 반대로 그런 극도의 편안하고 안전한 무방비 심리상태를 경험하는 방법으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자들도 있지요. 샤크티 신앙의 탄트라가 그렇습니다.
탄트라에서 강조하는 야한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샤크티 신도들이 섬기는 두르가 여신이 마히사 아수라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아수라의 왕 마히사는 시바의 은총을 받아 모든 적을 이기게 되어 있지만, 오직 여자에게만 패배합니다. 섹스를 은유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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