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世界 색점선

부부 추상 표현주의 화가
2017년 11월 19일 23시 58분  조회:3465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904년
사망 1997년
 
윌렘 드 쿠닝
윌렘 드 쿠닝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했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 등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을 추구한 뉴욕 스쿨의 일원이었다. 다른 추상 표현주의 화가와는 달리 구상과 추상을 동시에 추구했으며, 액션 페인팅에 가까운 격한 필체가 특징이다. 초기에는 극단적인 추상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여인’ 시리즈에서 보이듯 전통적인 주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표작으로 〈여인〉 시리즈를 비롯해 〈핑크빛 천사〉, 〈벤치에 앉은 여인〉 등이 있다.

190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열두 살 때 일반 학교를 그만두고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 견습생으로 일하며 1916년부터 1925년까지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 시기에는 꽃잎, 줄기, 잎 등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추구하던 ‘유겐트슈틸’과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극단적인 추상화를 추구했던 네덜란드의 ‘데스테일’에 관심이 많았다.

스물두 살이던 1926년 미국으로 밀항하여 한동안 페인트공, 광고 일러스트레이터, 상점 디스플레이어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뉴욕에서 잭슨 폴록, 바넷 뉴먼, 프란츠 클라인, 마크 로스코와 같은 뉴욕 스쿨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가난 때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뉴욕에서 예술가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아 다른 지역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초창기 추상 표현주의를 이끌었던 동갑내기 화가 아실 고키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아실 고키는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기체적인 추상화를 그렸는데 드 쿠닝은 고키와 작업실을 함께 쓰며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큰 자극을 받았다.

1935년부터 2년 동안 미국 정부의 의뢰로 공공건물의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이때부터 상업 미술을 그만두고 순수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1938년 엘레인 프리드라는 여성을 조수로 고용했는데 그녀 역시 훗날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둘은 1943년 결혼했는데 두 사람 모두 외도를 하는 등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별거하다가 1950년대 후반 이혼했고 1970년대 중반 다시 재혼하여 아내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1940년대 중반부터 추상 표현주의의 대표 주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두 작품 모두에서 볼 수 있듯이 형상과 배경이 혼재되어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형태와 거침없는 붓놀림 등 드 쿠닝 특유의 스타일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 무렵 ‘흑과 백’ 시리즈를 발표하여 뉴욕 미술계의 호평을 받았는데, 이 시리즈는 사실 물감을 넉넉하게 살 형편이 안 되어 가정용 에나멜페인트로 작업한 것이었다. ‘흑과 백’ 연작은 1948년 찰스 이건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화제를 모으며 드 쿠닝을 단숨에 스타 화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1953년에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들의 전시장으로 유명한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수록된 〈여인 3(Woman Ⅲ)〉을 비롯해 ‘여인’ 시리즈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여인’ 시리즈는 드 쿠닝의 대표작으로 194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까지 사실상 작품 활동 내내 만들었던 시리즈다. 하지만 〈여인 1〉을 제외하고는 거칠고 기괴하게 왜곡된 형태와 여성을 비하하는 느낌까지도 드는 ‘여인’ 시리즈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대중과 평론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드 쿠닝은 계속해서 여인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1950년대 들어서 활발한 작품 활동과 더불어 자신의 예술관을 책으로 알리고, 다양한 예술가 그룹을 이끌었다. 정작 드 쿠닝 자신은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지만 추상 표현주의의 리더로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풍경화와 조각 등 기존에 하지 않았던 작업들에 손을 대기도 했다. 이런 작업 역시 이전 작업 못지않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급기야 1989년 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 예술가로서의 경력이 끝이 났다. 딸의 보호를 받으며 생명을 이어 가다가 1997년 아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드 쿠닝 작품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이후에 그린 작품의 가치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의 예술적 업적은 잭슨 폴록에 비견될 정도로 출중하지만 구상성과 서사를 중요시하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전통적인 회화의 요소를 담고 있다. 그 때문에 일부 현대 미술가들은 그의 가치를 폄하하기도 했다. 대상을 변형하여 구상적인 측면과 추상적인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했던 그의 작품은 수많은 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5위. 〈여인 3〉
• 41위. 〈가제트 형사〉
=
========================
 

 
출생 1904년 4월 24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망 1997년 3월 19일, 미국 뉴욕 이스트햄프턴
국적 미국

요약 20세기 미국 작가로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주요 작품은 연작 <여인 시리즈>.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단순한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한 추상화를 탐구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대립시키는 작품을 그렸다. 이후에는 인물의 형태를 포함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해 1940년대부터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관여했고, 나아가 그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후기에는 인물이 추상적인 배경 안에 흡수된 듯한 작품으로 대담한 채색의 풍경화 안에 수직의 인물이 서 있는 작품이 주를 이뤘다. 말년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완숙도가 덜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생을 마쳤다.

초기 생애와 작품 세계

특히 '액션 페인팅'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구상화와 추상화를 동시에 그렸지만 1945년경에 이르러 이 2가지 경향을 하나로 융합한 것처럼 보인다. 연작 〈여인 Ⅰ~Ⅵ Woman Ⅰ-Ⅵ〉(1952~53)은 그 격렬한 이미지와 충동적이고 정력적인 기법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후기 작품은 풍경화에 점점 더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데 쿠닝(Willem de Kooning)
데 쿠닝(Willem de Kooning)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아버지 렌데르트 데 쿠닝과 어머니 코르넬리아 노벨은 데 쿠닝이 5세 때 이혼하여 그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1916년 상업 미술가와 장식가들이 세운 회사에 견습생으로 들어갔고, 거의 같은 무렵 로테르담 미술 아카데미 야간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8년 동안 창조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예술을 배웠다. 1920년 큰 백화점의 미술 감독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특히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 등 예술의 단순화에 이바지한 피에트 몬드리안과 테오 반 두스뷔르흐 등의 화가들이 이끄는 데 스테일 그룹 등 현대 미술운동과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은 전통적인 스케치 몇 점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1926년 미국에 밀입국하여 뉴저지 주 호보컨에 자리를 잡고 주택에 페인트 칠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갔다. 1927년 맨해튼의 한 화실에 들어가 화가이자 미술품 감정가이며, 미술평론가인 존 그레이엄과 화가인 아실 고르키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고르키는 데 쿠닝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928년경부터 파리 유파와 멕시코의 영향을 보여주는 정물화와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초에는 생물형태와 단순한 기하학적 구도를 이용한 추상화를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대립시키는 이런 경향은 그가 평생 그린 모든 작품에 널리 퍼져 있다. 이 초기 작품들은 친구인 그레이엄 및 고르키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많았고, 둘 다 생물의 형태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작품을 만들어낸 파블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인 후안 미로 등 젊은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1935년 10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계획에 참여하여 일하기 시작했으나, 1937년 7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실업자 구제 계획에서 강제 사직당했다.

이 2년은 대공황 초기 상업적인 작품을 그리면서 간신히 생계를 꾸려온 이 예술가에게 비로소 모든 시간을 창조적인 작업에만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연방미술계획의 회화부와 벽화부에서 일했는데, 그가 도안한 벽화 가운데 일부는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WPA를 떠난 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장 의약품관의 벽화 디자인을 주문받았다.

이 벽화는 전문적인 벽화가들이 채색했으며, 박람회가 끝나고 철거되었다. 1940년 연방정부의 미술부는 그에게 미국 해군 군함인 '프레지던트 잭슨호'의 도서실 벽화제작을 위촉했다. 데 쿠닝이 연방미술계획을 위해 도안한 벽화는 1930년대초에 그가 그린 추상 작품과 비슷한 양식이었으나, 세계박람회장과 연방정부 미술부의 주문을 받고 그린 벽화는 좀더 구상적이었다.

1938년 데 쿠닝은 아실 고르키의 영향을 받아 〈서 있는 두 남자 Two Men Standing〉·〈남자 Man〉·〈앉아 있는 인물(고전적인 남자) Seated Figure(Classic Male)〉 등 슬픈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남자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작품들과 더불어 〈분홍빛 풍경 Pink Landscape〉·〈비가 Elegy〉 같은 서정적인 채색의 추상화도 제작했다. 인물화와 추상화를 동시에 그리는 이런 경향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어, 제목을 붙이지 않은 수많은 추상화와 더불어 구상적이지만 사뭇 기하학적인 〈여자 Woman〉·〈서 있는 남자 Standing Man〉가 제작되었다.

그의 추상화에 표현되는 형태는 갈수록 인물의 형상을 점점 더 강하게 암시했다. 1945년경에 그린 〈분홍빛 천사들 Pink Angels〉에서는 이 2가지 경향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것처럼 보인다. 1946년 그림물감을 살 돈마저 떨어지자 그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검은색과 흰색 에나멜을 이용하여 거대한 추상화 연작을 그렸다. 이 작품들 가운데 〈8월의 빛 Light in August〉·〈검은 금요일 Black Friday〉은 기본적으로 검은색 바탕에 흰색 요소가 섞여 있는 반면, 〈취리히 Zurich〉·〈우편함 Mailbox〉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요소가 섞여 있다.

첫번째 전시회가 끝난 뒤 이들 작품은 〈애슈빌 Asheville〉·〈다락방 Attic〉·〈발굴 Excavation〉처럼 복잡하고 불안정한 추상화로 발전한다. 다시 색채를 도입한 이들 작품은 그가 오랫동안 씨름해온 자유 연상 구성이라는 문제를 정연하고 결단력 있게 요약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1938년 일레인 프리드를 만나 1943년에 결혼했다.

1940년대부터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점점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1950년대 중엽에는 그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되었다. 1948년 뉴욕의 찰스 이건 화랑에서 흑백 에나멜 구성작품들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48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마운틴대학에서, 1950~51년에는 예일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데 쿠닝은 1940년대초와 1947~49년에 정기적으로 여인상을 그렸다.

후기 생애와 작품 세계

초기 추상화에 나오는 생물체의 형태는 여성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가 오로지 '여인'의 주제만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여름 그는 〈여인 Ⅰ WomanⅠ〉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많은 변형을 거쳐 1952년에야 겨우 완성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다른 여인상도 제작했다. 이들 작품은 1953년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전시되어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추상 표현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그의 동료들은 추상화만 그리고 있었는 데 반해, 그의 여인상은 구상적이었고, 그림의 기법과 형상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거칠게 칠한 그림물감과 화폭 위에 안료를 쏟아놓은 듯한 기법이 한데 어울려, 현대 남성들에게 내재된 성에 대한 두려움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자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 전성기가 지난 축 늘어진 젖가슴, 공허한 눈, 그리고 말라빠진 손발은 프로이트적 통찰을 가장 우울하게 형상화한 것이었다. 〈여인 Ⅱ Woman Ⅱ〉부터 〈여인 Ⅵ Woman Ⅵ〉까지는 〈여인과 자전거 Woman and Bicycle〉·〈시골의 두 여인 Two Women in the Country〉처럼 모두 이 주제의 변형이다.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고의적인 천박함은 1950년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가 그린 연작 〈여체 Corps de dame〉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뒤뷔페의 그림도 데 쿠닝의 그림 못지않게 거칠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흙빛으로 풍부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져 여성의 보편적 상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1955년에는 데 쿠닝도 〈풍경으로서의 여자 Woman as Landscape〉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여성의 상징적인 측면에 눈을 돌린 것 같다.

이 그림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인물은 추상적인 배경 속에 거의 흡수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뒤이어서 〈경찰 가제트 Police Gazette〉·〈고덤 뉴스 Gotham News〉·〈10번가의 뒤뜰 Backyard On Tenth Street〉·〈로젠버그 공원 Parc Rosenberg〉·〈아바나 교외 Suburb in Havana〉·〈강으로 향한 문 Door to the River〉·〈장미빛 손가락을 가진 루스포인트의 새벽 Rosy-Fingered Dawn at Louse Point〉 같은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들은 구성적이고 다채로운 복잡성에서 대담하게 채색된 단순성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완전히 정착한 1963년경에 데 쿠닝은 다시 여자를 모델로 삼아 〈전원곡 Pastorale〉·〈조개 캐는 사람들 Clam Diggers〉 같은 그림을 그렸고, 이 주제는 그후 몇 년 동안 〈우먼 애커보닉 Woman Acabonic〉·〈모자상 Woman and Child〉·〈방문 The Visit〉 같은 그림에서 다시 탐색되었다.

초기에 그린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들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그림들은 인습에 구속받지 않는 주제로 화려하고 매끄러운 그림으로 여성 나체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잊혀진 이름 ………Whose Name Was Writ in Water〉·〈무제 Ⅲ Untitled Ⅲ〉 같은 후기 작품들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빛으로 반짝이는 장면을 그린 서정적이고 싱그러운 그림들이다. 후기에는 그림보다 점토소조 작업에 점점 더 열중했다.

한동안 소원하게 지낸 아내이자 뛰어난 화가인 일레인 프리가 1978년 알코올중독증에 시달리던 그를 보살펴주어 회복시켰다.

1980년대 그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만년의 작품들은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추상을 보여주지만 빈약하고 완숙도가 덜 하다는 평판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1987년 〈분홍빛 숙녀 Pink Lady〉(1944)가 360만 달러, 1989년 〈인터체인지 Interchange〉(1955)가 2,060만 달러에 팔리는 등 엄청난 판매가를 기록했다.

============================= <여인 3> 감상하기...

 
제작시기 1953년
가격 $137,500,000(1442억 6000만 원)1)
작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윌렘 드 쿠닝, 〈여인 3〉, 캔버스에 유화 / 172.7×123.2cm
윌렘 드 쿠닝, 〈여인 3〉, 캔버스에 유화 / 172.7×123.2cm
“몇몇 화가나 비평가가 ‘여인’ 시리즈를 안 좋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 내 문제는 아니에요.
나는 스스로 추상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이미지 같은 것들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만든다는 건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모든 그림을 추상화냐, 추상화가 아니냐로 분류합니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안 그리는 것이 더 이상한 게 돼 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가 두렵습니다.”
-윌렘 드 쿠닝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는 윌렘 드 쿠닝의 그림이 두 점 나오는데 두 작품 모두 판 사람과 산 사람이 같다. 판 사람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영화 엔터테인먼트 사업가 데이비드 게펜이다. 바로 앞에 나온 폴록의 〈넘버 5〉를 판 바로 그 사람이다. 8000만 달러(839억 3000만 원)에 거래된 재스퍼 존스의 〈부정 출발〉과 6350만 달러(666억 2000만 원)에 거래된 드 쿠닝의 〈가제트 형사〉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다 판 것이니, 그가 얼마나 거물 컬렉터인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림을 산 사람은 뉴욕의 헤지펀드 억만장자인 스티븐 코언이다. 컬렉터로서 스티븐 코언은 데이비드 게펜보다 더 유명하다. 스티븐 코언이 초고가의 미술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무렵으로, 다른 유명 컬렉터들에 비해 그 기간이 짧다. 하지만 약 10년 동안 그림을 사는 데 10억 달러(1조 490억 원) 이상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에 1200만 달러(126억 원)를 주고 데이미언 허스트의 유명한 설치 작품 〈상어(원제는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를 사서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로 보도된 사람이 바로 스티븐 코언이다.

스티븐 코언은 ‘미술 시장’에 발을 늦게 디뎠지만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를 비롯해 세계적 갤러리들을 다니며 비싼 그림들을 싹쓸이했다. 그 덕분에 어떤 역사적 컬렉터 못지않게 훌륭한 컬렉션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한창 미술계의 주목을 받을 때 〈뉴욕 타임스〉는 1면을 할애해 ‘갑자기 떠오른 거물 컬렉터 스티븐 코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고, 뉴욕 소더비는 그의 컬렉션만 모아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2013년 기준 순 자산 93억 달러(9조 7570억 원)로 《포브스》가 집계한 세계 부자 순위 106위에 올라 있다.

이 두 사람의 그림 거래를 중개한 이는 래리 개고시언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 해 매출액이 11억 달러(1조 540억 원)이며 세계 최고 갤러리로 꼽히는 개고시언 갤러리의 설립자이자 대표다. 이렇게 사고파는 과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만으로도 입이 벌어지는 그림들은 비싼 그림 순위에서 충분히 높은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게다가 〈여인 3〉은 스티븐 코언과 데이비드 게펜이 소장하기 전인 1994년까지는 테헤란 미술관 소장품이었다. 그림을 누가 가지고 있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 내놓았는지를 알 수 있는 ‘소장 기록(Provenance)’은 그림을 사고팔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이 그림은 참으로 뛰어난 소장 기록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거래에 얽힌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 그림의 작가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 쿠닝은 폴록과 함께 추상 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 작가로 분류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스타일은 폴록과 완전히 달랐다. 사실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은 모두 뉴욕에서 활동했고 추상화를 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뉴욕 스쿨’이라 불리지만, 작품 스타일은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드 쿠닝은 다른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종종 이 그림처럼 구상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여인을 소재로 그렸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 그림처럼 우악스러운 초상화인 ‘여인’ 시리즈 대작으로 모두 여섯 점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화가 자신이 여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드 쿠닝의 아내 엘레인도 추상 표현주의 화가였는데 이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 대부분을 별거 상태로 살았으니 사실상 남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드 쿠닝은 “여자는 가끔 짜증 난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이 그림에서 눈, 코, 입은 지나치게 크고, 이를 드러내고 웃는 표정은 괴기스럽다. 지나치게 큰 가슴을 드러낸 것도 보기 편하지 않고, 몸매는 일반적인 여성 모델에서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한마디로 왜곡되고 비뚤어진 여인 초상이다.

그런데 단순히 드 쿠닝이 개인적으로 여성을 혐오했기 때문에 이렇게 뚱뚱하고 못생기고 무섭기까지 한 여인상을 그린 것은 아니다. 1950년대 미국은 소비가 팽창하고 각종 광고에서 여성의 상업적 이미지가 넘쳐 나던 때다. 여성은 언제나 상냥하고 예쁘고 섹시하게 그려졌다. 여성의 이런 이미지가 당연히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드 쿠닝은 “이건 어때?”라며 이와 같은 그림을 내민 것이다. 즉 이 그림에는 드 쿠닝의 개인사 및 당시 사회 분위기와 얽힌 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서처럼 이 그림에서도 전후의 불안과 긴장감, 공포와 희열이 섞인 다이내믹한 시대 상황이 느껴진다.

드 쿠닝은 다른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여인 초상을 즐겨 그렸다. 뉴욕에 있는 화가들 모두가 구상화를 집어던지고 완전한 추상화만 그리던 1950년대에 ‘뉴욕 스쿨’의 핵심 멤버이던 드 쿠닝이 구상화, 게다가 닳고 닳은 소재인 여인 초상화로 다시 돌아간 것은 용감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여인 초상화는 결코 과거의 그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섹시하고 전형적인 과거의 여성 초상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혁명적인 그림이었다. 시대를 잘 반영하면서도 작가의 개인사와 내면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그림이라 드 쿠닝의 ‘여인’시리즈는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여인’ 시리즈 여섯 점 중 다섯 점은 미술관에 있고 이 작품만 유일하게 개인 컬렉터 손에 있었다. 그래서 이 그림이 1억 3750만 달러(1442억 6000만 원)라는 엄청난 가격에 팔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
영국의 세계적 현대 미술 작가로, 1990년대에 이른바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그룹으로 불리며 전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한 새로운 영국 아티스트들 중 최고의 위치에 있다. 죽은 동물, 알약 등 엽기적인 소재로 작품을 만들어 ‘미술이 될 수 있는 소재’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의 엽기적인 작품들은 시장에서 종종 수천만 달러(수백억 원)에 거래되어 생존 작가 작품의 가격 한계도 허물었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아주 독특하고 엽기적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산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물리적 불가능성〉은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넣은 ‘상어 박제’다. 일명 ‘상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그가 즐겨 만드는 죽은 동물 시리즈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작가는 1991년에 만들었고, 뉴욕의 유명한 컬렉터인 스티븐 코언이 개고시언 갤러리를 통해 2004년 말에 1200만 달러(126억 원)에 사들여 외신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이후 자기 작품 수백 점을 직접 경매에 내놓았고, 세계 최고의 상업 화랑인 개고시언 갤러리와 맺은 17년간의 계약을 끝냈으며,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갤러리를 열겠다고 발표하는 등 미술 시장의 관습과 통념으로부터 벗어나는 특이한 일을 많이 해 세계 미술 시장에서 끊임없이 이슈가 되고 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3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533 [세상만사] - "5억=10억"... 2021-09-08 0 1056
532 [그것이 알고싶다] - "인도 소똥 축제" 2021-04-17 0 1463
531 [세상만사] - 피카소 = 그림 엽서 2020-12-05 0 1630
53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2020-10-14 0 1595
529 [그것이 알고싶다] - 세계 최대의 불교학원 2020-09-10 0 1735
528 독일 화가 - 막스 에른스트 2020-02-29 0 3203
527 [시공부 하기] - "데칼코마니" 2020-02-14 0 3311
526 [세계국제] - 치마냐... 바지냐... 바지냐... 치마냐... 2020-01-18 0 2422
525 [세계는 지금] -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 23 2019-12-12 0 1972
524 오스트리아 "수수께끼"같은 화가 - 클림트 2019-12-12 0 3007
523 "당신은 감각을 잃어버리는것은 아닌지?!..." 2019-12-01 0 2101
522 [그것이 알고싶다] - 2000여년전의 그린 벽화... 2019-11-26 0 2147
521 [그것이 알고싶다] - 천재 화가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미완성 그림이라고?!... 2019-11-26 0 2112
520 무수한 점점이 백억이 되기까지... 2019-11-23 0 3090
519 [고향자랑] - 아름다운 장백... 2019-10-23 0 2117
518 우리 가락 우리 멋 - 장고야 울려라... 2019-10-10 0 1910
517 ... 2019-05-13 0 1893
516 먼... 길... 멀지만 가야 할 길... 꼬옥... 2019-04-21 0 2129
51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세계는 지금... 2019-04-10 0 2655
514 [동네방네] - 환경 미화원 = 미술가 2019-02-06 0 2229
513 [그것이 알고싶다] - "비로봉" 그림?... 2018-11-26 0 2543
512 [쉼터] - 자작나무(봇나무) 숲으로 가고싶다... 2018-10-17 0 3171
511 [쉼터] - 그림 가격에 눈이 휘둥그래지다... 2018-10-15 0 3179
510 해란강은 유유히 흘러흘러 륙십리 평강벌 흥건히 적시고... 2018-10-12 0 2261
509 [그림과 함께] - 신사임당과 초충도 병풍 그림 2018-08-24 1 3303
508 [동네방네] - "민속벽화" 닐리리~~~ 2018-06-28 0 2139
507 [동네방네] - 하마터면... 2018-06-06 0 2103
50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순간, 찰나, 8초... 2018-06-02 0 2670
505 [동네방네] - 그림 사시오... 그림 사시오... 2018-05-16 0 2646
504 영국 거리 락서화가 - 뱅크시 2018-05-14 0 3110
503 [동네방네] - 이순에 동양화를 배워 제2의 인생을 빛내이다... 2018-05-04 0 2919
502 [이것저것] - "소 그림" 팔고사고... 2018-05-04 0 2958
501 [쉼터] - "로망쟁이" = 5월 봄눈 2018-05-03 0 2299
500 [그것이 알고싶다] - "성공과 평화", "평화와 소망"... 2018-04-29 0 4264
499 [동네방네] - 금강산의 기운 받아 "통일대박" 만들자... 2018-04-29 0 3592
498 [쉼터] - 사진은 말한다... 2018-04-15 0 2552
497 [동네방네] - 피카소 그림 또 해빛을 보다... 2018-03-31 0 2473
496 [쉼터] - 안중근 의사 어록과 15m 대형 광목천 서예 2018-03-25 0 2886
495 [쉼터] - "미완성작 모나리자", "완성작 모나리자" 2018-03-25 0 5017
494 [쉼터] - "12세 모라리자" 2018-03-25 0 2655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