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은 살아생전에 유럽의 현대 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메뉴얼 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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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폴락의 작품들은 전형적인 미국 서부 풍경에 기초한 작업과 구상 회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고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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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의 미술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멕시코의 벽화가인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작업실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것이 예술적 기법일 수도 있으며, 그림 표면에 에나멜 페인트와 래커, 모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당시 폴락은 알코올 중독, 우울증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정신병원에 넉 달간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작품들은 추상적인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현대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후안 미로의 작품들에서 따온 모티프들과 시케이로스로부터 배운 기법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그림에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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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은 1945년 여성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해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헛간을 개조해 작업실로 꾸미고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그는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사방을 돌며,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튀기고, 쏟아 부으면서 몸 전체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떨어뜨린 물감의 흔적이 층위를 쌓아가면서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캔버스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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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은 미국 미술계의 첫 번째 슈퍼스타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1947년부터 1952년까지의 작품은 미술계에 대변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948년 뉴욕의 금세기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고, 1950년에는 빌럼 데 쿠닝, 아실 고키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 참여하는 등 예술적인 열정을 불태웠으나, 알코올 중독과 창조성의 한계에 가로막힌 그는 육체와 정신의 쇠락으로 방황하다 1956년 만취상태에서 과속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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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은 평소 커다란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넓은 공간에 캔버스를 놓고 사방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막대기나 팔레트나이프를 이용해 캔버스 위해 페인트를 붓거나 떨어뜨리기(드리핑)를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모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던 폴락은 그들의 방법을 착안해 작업에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왼손에는 페인트 통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팔레트나이프 등을 이용해 재빨리 페인트를 튀기며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그림만의 독자적인 운명을 갖지만, 최종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예술적인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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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술계를 놀라게 할 회화들을 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폴락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혼란스러운 작품을 만들 뿐이라고 비평하기도 했지만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은 저명한 비평가들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며 폴락의 재능을 칭송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팝 아트 같은 뒤이어 등장하는 미국의 미술 운동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폴락은 비로소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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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잭슨 폴락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천재적이면서도 알코올에 중독되어 기벽을 일삼던 폴락과 그의 아내 크레이즈너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삼았습니다. 폴락에게 그녀와의 사랑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예술적 진폭을 더욱 크고 넓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조금은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 왜 예술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 영화이기도 합니다.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태어난 폴락은 아들 5형제 중 막내였는데 화가가 꿈이었던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미술에 눈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공황 시절에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서 화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만 해도 폴락의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폴락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풍경화나 구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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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의 작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멕시코의 벽화가인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를 만나면서 한 단계 도약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채색이라는 고전적인 방법 대신 다양한 기법들에 눈을 뜨게 된것입니다.
운좋게도 그는 당대 미술계의 유명한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 1943년에 개인전을 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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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후 이젤에 고정된 캔버스를 버리고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고서 캔버스 위로 물감을 뿌리고, 쏟으면서 몸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게 바로 액션 페인팅, 드리핑(dripping)이라는 기법입니다. 드리핑이란 붓이나 주걱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칠하거나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물감을 캔버스 위에 흘리거나 붓든지 또는 튀겨서 제작하는 회화기법을 말합니다.
폴락은 이 드리핑 기법으로 안료를 직접 캔버스에다 흘림으로써 얻어지는 우연적인 표현 효과를 성취하였습니다.
폴락의 드리핑 기법은 다다이스트들의 오토마티슴(회화나 시에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과 흡사한 점이 많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회화의 새로운 형식적 요소의 개발이라는 점과 정신 보다는 육체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드리핑 기법은 잭슨 폴락, 하면 떠오르는 그의 전형적인 작품 양식이기도 합니다.
층층이 다른 물감을 사용하면서 그 물감들이 우연하게 번지고 퍼지며 만들어내는 흐름과 윤곽은 회화를 미지의 카오스 상태로 밀어넣어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느낌을 주는 회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린버그를 필두로한 미국 비평계는 폴락의 드리핑 행위를 보고 다분히 미국적인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즉,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남자다움등으로 상징화된 폴락의 예술 행위 뒷면에는 백인우월주의의 폭력성도 같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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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낸 폴락은 미술계의 인기스타였습니다. 추상표현미술주의의 선구자였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가였습니다.
미술계에 긍정적인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열고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폴락이었지만 알코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조의 고뇌로 고통받는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956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니 그가 좀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현대 미술계가 어떤 진전을 겪었을지 또 모를 일입니다.
지난 2006년 폴락의 작품 한 점이 1억 4천만 달러에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생전에는 가장 위대한 미국의 화가였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이기도 한 잭슨 폴락,
어지럽고 난해하기만한 그 물감의 폭풍 속에서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을, 그 몸짓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가치디자인그룹 SY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