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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4년 그는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보[4][5]로 진학한다. 어릴 적 장난꾸러기 같던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오산학교 재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영감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이라는 잡지 에 소월의 습작 <제이 엠 에스>를 지면에 싣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담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 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6] 이에 백석도 예외는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동기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학과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생들을 속된 학생들로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백석은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7]
독립운동가 조만식도 당시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8] 백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의전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한동안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방응모 응?! 의 지원을 받아 사범대학 대신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 등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는 아오야마가쿠인의 전문부 영어사범과에 진학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석과 의원이 말하는 아무개씨가 바로 방응모로, 백석 본인이 시에서 아버지같이 섬기는 분이라고 대답한다.">[9]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서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2배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고. 그때 쌀 가마 가격이 13원, 고급 양복이 30-40원이었으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경성문화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내어, 나중에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시인 신경림 씨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게 되었을 때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몇 번이고 읽고 다녔고 [10] 윤동주의 경우 아무리 찾아봐도 시집을 구할 수 없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적고 다녔다고. 고향이었던 평북지역 방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북한에서는 주로 아동문학에 천착하였으나, 1958년 무렵 '부르조아적 잔재'로 비판받고 삼수군[11] 의 협동농장 축산반으로 쫒겨났으며,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 그 후 1996년[12] 타계하기까지의 반평생에 대해서는 남한에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1996년이라면 하필 고난의 행군 때라 노령에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여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13] 기사
북한에서 쓴 글을 보면 북한 공산당(정확한 명칭은 조선노동당)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이 많다.에 수록되어 있다.">[14] 그런데 별로 충격일 것도 없는게, 북한 정권 아래에서 쓸 수 있는 글이 뭐가 있겠는가. 정권 단위로 압박하면 개인이 그걸 견뎌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다만 그의 사상까지 정권에 굴복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건 우리 소견은 아니다. 참고로, 그런 체제 찬양시들을 읽어보면 이게 문장은 백석 시인이 맞긴 맞는데, 백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퀼리티가 낮다. 서정성을 나타내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시에서도 결국은 당이 어떻고 하는 구절을 집어넣어버렸다. 역시 강요로 작품을 뽑아낼 수는 없는 듯. 링크 아동문학 평론에서는 '사상'만이 아니라 문학성 자체에 대해서도 중점을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정황상 바로 그 직후에 정권 산하 문인단에서 숙청[15]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은 서사시다.">[16]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백석의 시 <국수>를 읽고 나서 국수가 땡겨서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음식' '고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가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며 공동체적 유대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공간이다.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고향의 풍물, 세시 풍속, 생활 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우난 곬족이다.
당시 말 한 필이 5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2원 정도였다고 한다.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그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18].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자.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상략)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20]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하략)
통영(統營) - 백석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던 어학의 천재라고 한다. 월북 이후 번역국에서 일하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등 다양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여 북한에 소개했다.
여성관계를 찾아보자면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거론된다. 이 시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견이 많은 편이다. 일단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작품[21]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이다. 문제는 그 나타샤로 누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냐는 것. 또는 '나타샤'가 일반적인 러시아의 여성들을 일컬는 이름-우리나라의 '영희' '주희' 등과 같이-이므로 특정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백석의 연애 상대로 김진세(백석의 제자)의 누이, 란(蘭), 자야(子夜)라고 불렸던 기생 출신 김진향 씨가 있다. 본명이 김영한으로 진향은 기명(기생의 호칭). 자야 여사가 호기심에 함흥 시내 번화가로 나들이 갔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라다 백화점 책방에서 문예춘추, 여원, 자야오가라는 책을 사가지고 와서 백석 시인에게 보였는데 그때 지어준 이름으로 자야는 백석 시인과 김진향 여사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여담으로 자야는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서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나.'라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2011년 근대서지학회에서 발간하는 근대서지 2호에 백석의 미발표 번역시 167편이 발표되었다. 백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찾아보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다. 저런 머리를 하고도 잘생기다니 역시 헤완얼 키도 큰 편이라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게다가 이 분은 근 100년전 사람인데 지금 기준에서도 잘 생긴 편에 속한다! 키도 185cm으로 현재 기준으로도 상당한 장신. 황순원, 윤동주와 함께 현대문학 3대 얼짱이라 카더라
======================== 덤으로 더...
백석의 '사슴'
백석의 '사슴' 이미 말의 타락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을 때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살려내고 보존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시집이다.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방언을 그대로 사용하여 향토적·민속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등 구체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고향 마을의 역사와 그들의 순박하면서도 어두운 삶의 현장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투철한 그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일방적인 서구시의 도입과 추종으로 특징지어지던 시기에 지나친 서구 지향을 거부하면서 민족에 대한 주체적인 각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 민요시와 비견되는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지니고 있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반딧불이 난다 파란 魂들 같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한국현대시 100년사에서 우리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 백석(白石.1912~1995)의 ‘사슴’(1936)에 수록된 시 ‘정주성’의 일부다. 일본 유학 후 그는 고향 정주(定州)와 가까운 함흥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첫시집 ‘사슴’도 향토적 서정이 강하다. 계간 ‘시인세계’가 현재 활동중인 원로.중진에서 젊은 시인 156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현대시 100년사 최고의 시집으로 ‘사슴’을 꼽았다. 이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서정주의 ‘화사집’ 순으로 추천됐다. 이른바 ‘현대시 100년사 5권의 시집’이다. ▲다시 백석으로. 부모의 강권으로 세 번이나 결혼한 그에게는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 자야(子夜). 생활고로 조선의 권번으로 들어가 예인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 백석과의 만남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시작되고,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 1995년에 와서야 전기형식의 ‘내사랑 백석’을 출간해 사랑 얘기를 전했다. 본명은 김영한. 지난 15일 부처님 오신날, 김수환 추기경이 음악회에 참석해 화제가 됐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법정스님에게 아무 조건없이 시주했던 사람이 그녀다. 길상사는 최고급 요정의 하나인 대원각 자리에 김여사가 7천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의 부동산을 내놓아 세워진 사찰. 길상사측은 이날 자선음악회 수익금을 천주교가 운영하는 입양시설에 기부해 종교의 벽을 넘어선 사랑과 화합을 연출했다. 백석은 이날 최고의 시집으로 선정되는 영예와 함께 길상사에서 자야와의 비련의 사랑을 확인했을 것이다.
'사슴'은 백석 자신에 의한 유일한 시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사슴' 속의 시 33편은 1936년 1월 이후 백석의 창작 활동에 지대한 영향과 관련성을 가집니다. 이는 백석의 마지막 시로 평가받는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과 일종의 수미쌍관 구조를가지지만, 그 자체로도 순환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순환 구조는 하나의 주제로 여러 가지 리듬과 멜로디를 들려주는 변주곡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주제를 하나 정하라면 '여우난곬족(族)' 내지 '바다'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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