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윤동주와 광양의 연관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 맥락은 이러하다. 1941년 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친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3부 작성해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한 부는 은사인 이양하 교수께 드리고, 나머지 한 부는 문과 2년 후배 정병욱에게 건넸다. 윤동주가 타계했을 때 자신과 이양하 교수가 가지고 있던 것은 일실됐으나, 정병욱이 보관했던 원고가 해방 후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는 윤동주라는 보석 같은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정병욱은 1943년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윤동주 시집 원고를 어머니께 맡기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루 널을 뜯어 그 아래에 원고를 보관했던 것이다.
일찍이 정병욱은 이 원고를 어머니가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보관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그 후 정병욱의 누이동생 정덕희가 새로운 증언을 하게 되어 사실이 바로잡히게 됐는데, 정병욱이 학병 나가느라 집에 없어서 잘 몰랐을 거라고 하면서 정덕희는 그 원고가 마루 밑에 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마루 널 아래 땅을 깊이 파서 그 속에 짚을 깐 다음 큰 독을 들여놓고, 그 안에 원고를 넣어 보관했다는 것이다. 깊이 숨겼을 뿐만 아니라 짚으로 건조 상태가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은 정덕희 여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윤동주 평전’의 작가 송우혜 선생이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바 있다. 정병욱은 집에 돌아와 이 원고를 다시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원고는 ?1948년 1월 한 권의 시집으로 빛을 보게 됐는데, 이 원고가 망실됐다면 우리는 최소한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등을 전혀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문학사에 윤동주라는 빛(光)과 볕(陽)을 한꺼번에 쏘아 준 사건이 광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정병욱 가옥에 보존됐던 윤동주 유고 원본은 지금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원래 정병욱은 경남 남해 출신이고 하동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는데, 부친의 사업차 일가가 광양으로 옮겨 가 살게 됐다. 고택이 있는 망덕포구는 옛날분들이 섬진강을 거슬러서 구례나 광양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섬진강물이 남해 바다와 합수하는 곳이기도 하다. 1925년 건물인 이 고택의 공식 이름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고, 현재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돼 있다. 이제 이 고택은 두 사람의 우정과 믿음을 문학사의 아름다운 후경(後景)으로 두른 채 맑은 섬진강물처럼 광양 밤바다에 뜬 밝은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매천 황현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광양은 이러한 윤동주·정병욱으로 이어지는 상징 가치에 눈을 뜨고, 한편으로는 정병욱 고택을 명소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윤동주를 가능하게 했던 이곳의 문화적 브랜드를 차근차근 만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윤동주와 정병욱과 광양의 세 꼭짓점을 잇는 커다란 문화적, 학문적 기념비가 될 것이다.
이제 윤동주와 다섯 살 차이였던 정병욱도 얼마 있으면 탄생 100주년(2017년)을 맞는다. 자신의 호(號)를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가져와 ‘백영’(白影)이라고 지었을 만큼 윤동주를 사랑했던 정병욱. 윤동주와 그가 맺었던 생전의 인연과 사후에도 지속되는 아름다운 관계를 광양시가 잘 이어 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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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시 진월면 망덕(望德)포구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341호’로 등록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있다.
1925년에 지어진 이 상가주택은 양조장과 딸린 살림집인데 이곳에 윤동주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정병욱(1922-1982)이 윤동주(1917-1945)를 알게 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정병욱은 1학년, 윤동주는 3학년이었다. 윤동주가 5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선·후배로 깊이 사귀었다. (권오만, 윤동주 시 깊이 읽기, 소명출판, 2009, p 342)
1941년에 두 사람은 기숙사를 나온 후 10개월 동안에 세 번이나 하숙집을 옮겨가면서 한 방을 같이 썼다. 처음은 종로구 누상동에서 한 달 간, 두 번째는 5월말부터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였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김송을 요시찰 인물로 감시했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책과 짐까지 뒤지는 소동을 벌였다. 별수 없이 두 사람은 9월에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1941년 12월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시집 간행을 기획하였다. 이를 위해 그동안 쓴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1941년 11월20일에 쓴 ‘서시 序詩’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라는 표제를 붙이고 3부를 필사하였다.
윤동주는 자필시집 3부 중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1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고, 마지막 1부는 본인이 보관하였다.
정병욱이 받은 자필시집 필사본은 200자 짜리 세로쓰기 원고지였는데, 첫 페이지에 ‘鄭炳昱 兄(정병욱 형)앞에’, ‘尹東柱 呈(윤동주 정)’이라고 적었다. (권오만, 위 책, p 345)
그런데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에게 출간을 미루라고 하였다. 이 시집이 일본관헌의 검열에 통과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신변의 위험까지 부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결국 윤동주는 시집 발간을 포기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정병욱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월에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광양으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윤동주 시집을 잘 간수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윤동주가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이 독립되면 이 시집을 연희전문학교에 보내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윤동주 시집을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양조장에 딸린 살림집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 안에 깊숙이 숨겼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정병욱이 윤동주 시집을 챙기자 그의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를 내놓았다.
1948년 1월30일에 정음사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윤동주 자필시집의 시 19편과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 강처중이 보관한 시 12편 도합 31편이 실렸다.
1955년에 증보판이 나왔다. 88편의 시와 산문 5편이 실렸는데, 서울대 교수 정병욱은 편집 자문을 하였고, 시집 후기를 썼다.
또한 그는 1976년 외솔회 발행 <나라사랑>에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을 기고하고 윤동주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윤동주 자필시집의 당초 제목은 ‘병원’이었단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라서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붙이려 했단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 1976, p 140-141)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1940.12)
한편 윤동주와 정병욱은 인척을 맺었다. 윤동주 동생 윤일주와 정병욱의 누이동생 정덕희가 부부가 되었고, 윤일주의 장남 윤인석은 정병욱 가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2017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다. 내년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가 활발할 것이다. 윤동주 자필시집을 고이 보관한 광양 망덕포구도 빛을 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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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1922-1982)이 윤동주(1917-1945)를 알게 된 것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정병욱은 1학년, 윤동주는 3학년이었다. 윤동주가 5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선·후배로 깊이 사귀었다. (권오만, 윤동주 시 깊이 읽기, 소명출판, 2009, p 342)
1941년에 두 사람은 기숙사를 나온 후 10개월 동안에 세 번이나 하숙집을 옮겨가면서 한 방을 같이 썼다. 처음은 종로구 누상동에서 한 달 간, 두 번째는 5월말부터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하였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김송을 요시찰 인물로 감시했고, 윤동주와 정병욱의 책과 짐까지 뒤지는 소동을 벌였다. 별수 없이 두 사람은 9월에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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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자필시집 3부 중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1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고, 마지막 1부는 본인이 보관하였다.
정병욱이 받은 자필시집 필사본은 200자 짜리 세로쓰기 원고지였는데, 첫 페이지에 ‘鄭炳昱 兄(정병욱 형)앞에’, ‘尹東柱 呈(윤동주 정)’이라고 적었다. (권오만, 위 책, p 345)
그런데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에게 출간을 미루라고 하였다. 이 시집이 일본관헌의 검열에 통과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신변의 위험까지 부를 것이니 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결국 윤동주는 시집 발간을 포기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정병욱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월에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광양으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윤동주 시집을 잘 간수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윤동주가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이 독립되면 이 시집을 연희전문학교에 보내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윤동주 시집을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양조장에 딸린 살림집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 안에 깊숙이 숨겼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정병욱이 윤동주 시집을 챙기자 그의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를 내놓았다.
1948년 1월30일에 정음사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윤동주 자필시집의 시 19편과 연희전문학교 문과 동기 강처중이 보관한 시 12편 도합 31편이 실렸다.
1955년에 증보판이 나왔다. 88편의 시와 산문 5편이 실렸는데, 서울대 교수 정병욱은 편집 자문을 하였고, 시집 후기를 썼다.
또한 그는 1976년 외솔회 발행 <나라사랑>에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을 기고하고 윤동주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윤동주 자필시집의 당초 제목은 ‘병원’이었단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라서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붙이려 했단다.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 1976, p 140-141)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1940.12)
한편 윤동주와 정병욱은 인척을 맺었다. 윤동주 동생 윤일주와 정병욱의 누이동생 정덕희가 부부가 되었고, 윤일주의 장남 윤인석은 정병욱 가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2017년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다. 내년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행사가 활발할 것이다. 윤동주 자필시집을 고이 보관한 광양 망덕포구도 빛을 보길 기대한다.
///뉴스24 /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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