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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1TV <불멸의 청년, 윤동주> ⓒKBS |
▲KBS 1TV <불멸의 청년, 윤동주>
1945년, 해방을 불과 여섯 달 앞둔 채 만 스물일곱의 나이로 후쿠오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 윤동주. 죽을 때까지 시단에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한 무명의 청년이었지만 그는 지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1위에 올라있으며 그의 시는 8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무명의 문학청년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 기적 같은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또한 무엇이 무명시인의 시를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불멸의 시로 만들었을까?
“윤동주는 기적이에요, 기적. 친구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육필원고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전에 시인으로 공인받은 적이 없었던 그의 시가 친구들의 힘으로 발굴된 것은 우리나라 문학의 축복입니다.” – 마광수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유학 시절까지도 윤동주는 무명시인이었다. 심지어 그의 일본유학 시절 동문들은 윤동주가 시를 쓴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렇다면 윤동주의 시는 어떻게 불멸의 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연희전문학교의 후배였던 정병욱은 당시로서는 위험했던 윤동주의 육필시고를 생가의 마루 밑에 깊숙이 숨겨둔다. 또 동기였던 강처중은 해방전후의 혼란기에 끝까지 윤동주의 유품과 편지에 담긴 시들을 지켜낸다. 결국 정병욱과 강처중, 두 친우의 헌신은 윤동주의 시를 오늘에 부활시킨 것이다. 한 무명시인의 시가 한국문학사의 빛나는 별로 자리 잡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펼쳐진다.
“영혼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것이 시에 나타나 있어요. 영혼의 아름다움, 슬픔이 거기에 있어요. 한 영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말 훌륭한 시입니다.” – 카와즈 키요에 (일본 현대시수첩상 수상 시인)
“윤동주의 시는 결코 한 민족의 것이 아니라, 인류, 인간 그 모든 것의 근원으로 통하는 시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역시 사랑이죠. 인류입니다. 인류와 사랑.”- 니시오카 겐지 (일본 후쿠오카현립대 명예 교수)
매년 윤동주의 기일이 되면 일본 곳곳에서 윤동주의 죽음을 추모하는 추도회와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는 강연회가 열린다. 일본에서 문고판이 나올 정도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윤동주의 시. 그의 시는 일본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8개국에 번역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윤동주의 시는 어떻게 시대와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세계인의 시선으로 윤동주 시의 아름다움을 조명해 본다.
“전 그 시를 중학교 때 처음 봤어요. 가슴이 철렁하고 이렇게 감동적이 시가 있구나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시어가 문어체가 아니고 구어체죠. 해방 이전, 아니 해방 전후까지도 지금까지 생생하게 읽히는 시를 대봐라, 윤동주밖에 없어요.” – 마광수 (연세대 교수)
“전 윤동주 시 중 <해바라기 얼굴>을 가장 좋아합니다. 많은 독자들이 그 시를 읽으면서 떠올리는 지점이 70년대, 80년대가 아닐까요. 사람들이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는 수도 없이 많은 이유가 있지만, 아주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희망의 단서를 놓지 않는 그만의 특징이 있어요.” – 이정록 시인 (윤동주 문학상 수상자)
- 변방 출신 무명 청년이었던 윤동주. 해방 후 무명 시인의 유고집으로 세상에 처음 빛을 보게 된 윤동주의 시는 어떻게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영원성을 획득했을까?
1980년대 중반 최초로 윤동주 시 연구 논문을 발표하며 윤동주 시의 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는 평가를 받는 연세대 마광수 교수. 그리고 윤동주 문학상을 통해 한국 시단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한 김용택 · 이정록 · 공광규 시인과 함께 윤동주의 독특한 시 세계와 아름다운 시 언어의 아름다움을 조명...
6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많이 잊힌 상태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압정은 간교하고 잔혹했다. 모국어(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급기야 죽음까지 당한 윤동주 시인. 지난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다.그는 정확하게 27년 2개월 동안 살았다. 그것도 죽기 전 2년 동안 감옥에 갇혔으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전부 25살 이전에 쓰인 시들이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고, 그가 쓴 <서시(序詩)>는 가장 애송하는 시다.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2살 되던 해(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북간도에서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윤혜원(84)씨가 20여 년 동안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3·1만세운동 88주년을 맞아, 여동생의 증언을 윤동주의 생애를 중심으로 3회에 걸쳐 들어본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
[오마이뉴스 윤여문 기자]
▲ 윤혜원-오형범 부부가 북간도에 가서 새롭게 단장한 윤동주 묘소. |
북간도-청진-서울-도쿄, 그리고 후쿠오카 감옥
윤동주 시인은 27년 2개월이라는 짧은 생애 중에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객지에서 공부했다.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로 이어지는 긴 유학생활 끝에, 그는 후쿠오카에서 감옥에서의 객사(客死)라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말았다.
오죽하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1948년)서문에다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으로 계산)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까.
그가 숨을 거둘 당시 고향 연길에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할아버지도 생존해 계셨다. 유교적 관습으로 보면 크게 불효를 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고향엔 두 명의 남동생(일주, 광주)과 여동생 혜원이 살고 있었다. 두 남동생 일주와 광주는 나중에 시인이 되었다.
윤동주의 형제들은 단명했다. 장남 윤동주 시인이 28세, 2남 윤일주 시인이 58세, 막내 윤광주 시인이 31세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결국 윤혜원씨가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다.
해외동포가 찾아내고 보수한 윤동주 무덤
▲ 윤동주 시인이 숨을 거둔 후쿠오카 감옥. | |
그런 연유로, 윤동주 시인을 후세에 잘 전하기 위해서 맡아야할 윤혜원씨의 임무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진다. 북간도에 남아있는 윤동주 시인 무덤의 개수와 관리도 윤혜원 권사와 남편 오형범씨의 몫이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신길우(전 상지대 교수. 현 서초문학회 회장)씨가 2003년 3월부터 중국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근무하면서, 마침 윤동주 묘를 개수하러 연길에 와 있던 80세의 윤혜원·오형범 여동생 부부와 여러 차례 만나서 확인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1945년에 장례를 지낸 이후 윤동주는 잊혀졌다. 그때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그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조차를 몰랐다.그러다가 지난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 선생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손자들이 낙서를 해놓은 상태였다고 함)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같은 해 8월에 중국을 방문하여 연변의 유지들과 자치주정부에 가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주기를 부탁하였다.그런데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을 안 주어서, 그가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하고, 내년 방문 때에는 묘소를 꼭 찾아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한편 윤동주 시인의 친동생인 윤일주 교수가 1984년 여름에 일본에 가 있던 중,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된 와세다대학의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 12일에 연길에 도착하였는데, 연변 문학자들은 윤동주는 물론 작품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오무라 교수는 공안국의 허가를 받아 5월 14일 연변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와 역사에 밝은 용정중학의 한생철 선생과 함께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그들이 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가지고 간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덕이었다.묘소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미국에 거주하는 현봉학 선생이 주동이 된 미중한인우호협회(美中韓人友好協會)가 연증(捐贈)하고,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였다.윤동주 묘소를 두 번째로 개수한 것은 2003년이다. 호주 시드니에서 살고 있는 오형범·윤혜원 여동생 부부가 15년만에 다시 개수하면서 두어 달에 걸친 공사로 7월 15일에 완료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 호주한인문인협회 회원들이 윤동주 시인 60주기 시드니 행사를 마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
윤동주 애창곡 '네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윤혜원씨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오빠의 애창곡은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다. 거기에 얽힌 얘기를 잠깐 들어보자.
"그 노래는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았던 오빠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면서 자주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또한 유학생활 중에 방학을 맞아 고향에 오면 동생과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리랑' '도라지' 등의 민요와 함께 그 노래를 가르쳐주었습니다.고향의 조무래기들을 삥 둘러 앉혀놓고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가르치던 오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오빠의 단짝이었던 문익환(나중에 목사가 됨) 오빠는 주로 찬송가와 율동을 가르쳐주었지요."
그런 윤동주 시인이 떠난 지 어언 60여년, 그런데 이번엔 그가 남겨놓은 시편들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를 부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우리가 읽어왔던 윤동주의 시들이 윤동주가 원고지에 써놓은 본디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윤동주 육필원고와 교과서나 시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들이 영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윤동주의 시와 원고지에 직접 쓴 시들 사이에 차이가 나는 어휘만 무려 570개에 달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원래의 형태로 그의 시들이 되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런 사실을 밝혀낸 홍장학(53. 동성고 국어교사)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읽어온 윤동주의 시가 오리지널과 그토록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니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윤혜원씨 부부가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지난 2005년 시드니에서 열린 '윤동주 60주기 추모문학제'에 홍장학 선생을 초청하여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 중국동포 소녀들이 재작년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아 묘소 앞에서 눈이 내리는 가운데 서시를 낭송하고 있다. |
해외에서 더 애틋한 윤동주 추모
윤동주 시인은 현대용어로 얘기하면 이민자에 해당하는 이주민의 후예였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윤동주 시인 추모의 열기는 모국이 아닌 해외에서 더 뜨겁다.
여동생 윤혜원씨가 살고 있는 호주 시드니와 그의 고향 룽징(龍井)을 비롯해서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추모행사가 계속해서 열리고 있는 것. 그 행사들을 취재하던 기자는 아주 뜻밖의 큰 소득을 얻었다.
윤동주 시인의 친척 김태균(전 경기대 교수)씨와 연결이 된 것. 그는 은진중학교에 다닐 때 외가인 윤동주 시인의 집에 살았는데, 그것도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방에서 2년 동안이나 지낸 사람이다. 그는 1986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현재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현재 암 투병 중이다.
함께 기거했던 연유로 그는 1937년 당시, 윤동주 시인의 시 창작과정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내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윤동주 시인이다. 내가 국문학자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면서 "아픈 몸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한 때를 늦게나마 증언하게 되어 기쁘다"고 토로했다.
윤동주 시인의 출생지인 연변자치주에서 전해온 소식들은 더 애틋하다. 매년 2월이면 엄청난 눈이 내려서 묘지참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1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동포들이 고인에게 꽃을 바치고 시를 낭송하면서 윤동주 시인을 추모한다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유학하고 옥사한 일본에서 전해오는 소식들도 애틋하긴 만찬가지다. 일본 교토에 거주하는 박세용(45. 도시샤 코리아 동창회 이사)씨가 전화와 팩스로 기자에게 전해준 소식 중에서 민단계와 조총련계가 자리를 함께 했다는 내용도 있다.
▲ 작년 중국 연변에서 열린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장면. 윤혜원 오형범 부부(왼쪽에서 4-5번째)도 참석했다. |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 시인'
윤동주 시인의 3형제가 전부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건 문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3형제 모두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무심했고, 너무 일찍 작고한 것 등이 그 이유다.
또한 윤일주 시인(1927-85, 전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교수)이 시집 한 권 펴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주 형이 못내 안타까웠는지 살아생전에 시집 내는 걸 저어했던 탓도 있다. 형과 10살 터울인 윤일주씨는 1955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한 시인으로 유고 동시집 <민들레 피리>가 있다.
한편 막내동생 윤광주씨가 시인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매형 오형범씨다. 그가 죽은 지 40여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오씨가 연길에서 윤광주씨의 시를 발굴한 것. 윤광주씨는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함께 월남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다보니 윤광주 시인의 작품이 제대로 보관됐을 리 없다. 1990년에 연변을 방문한 오형범씨가 연변일보 10년 치와 문학지 <천지>를 다 뒤져서 몇 편의 시를 찾아냈다.(그 시들은 본 기자의 보도로 <신동아> 1995년 2월호에 최초로 공개됐다)
이렇듯 오형범씨는 윤동주와 관련된 일이면 미국, 캐나다, 중국을 가리지 않고 떠난다. 중국의 출입이 가능해진 1990년 이후, 매년 연변에 가서 윤동주 묘지를 새롭게 조성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손수 관리하고 있다.
▲ 홍길복(왼쪽) 목사와 함께 한 윤혜원-오형범 부부. |
ⓒ2007 윤여문 |
'3형제 시인 심포지엄'을 시드니에서
지난 2월 12일, 윤혜원 오형범 부부는 84세의 노구를 이끌고 비행기 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가족친지들과 함께 윤동주 62주기를 보내고 4월 28일 연길로 가서 5월 3일 열릴 예정인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시드니우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홍길복 담임목사와 함께 만난 두 분은 "건강상 이번이 마지막 중국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도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떠나는 것이다. 윤혜원씨는 이미 여러 차례 심장수술을 받았고 오형범씨도 뇌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상태인 것. {주; 두 분 다 작고했음}
그럼에도 두 분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2008년 윤동주 63주기에 즈음하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윤동주 연구가를 시드니로 초청해서 윤동주 문학심포지엄을 여는 것이다. 그 일로 윤동주 문학의 대단원을 장식하여 저세상에서 윤동주를 만나면 전해주고 싶어서다.
윤혜원씨에게 "왜 하필이면 시드니냐?"고 물었더니 "내가 20여 년 동안 살고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어 그동안 보답하고 싶었던 분들에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울이나 룽징을 고려해보았지만 건강이 여의치 않아 여동생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우려가 깊은 것.
그러면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에서 윤동주 연구가들이 모일 것이다. 그 중엔 미국의 현봉학씨, 캐나다의 김태균씨가 첫 손에 꼽히는 분들인데 워낙 고령이라서 시드니까지 올 수 없을 것 같아 두 분은 걱정하고 있다.
만약에 광명학교 시절에 윤동주 시인과 2년 동안 한 방에서 기거했던 김태균씨가 심포지엄에 참석한다면 아주 귀한 체험담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동주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고 말한 바 있다.
/윤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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