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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무대는 서로 다르지만 불멸은 같다...
2019년 11월 04일 22시 52분  조회:2661  추천:0  작성자: 죽림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퇴계 이황 14대손으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 -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나라 되찾을 일념 펜 대신 총을 들다. 
                                       
친가·외가 모두 선비 집안, 독립운동으로 평생 17차례 피검, 투옥돼... 지조와 절개 번뜩이는 시 36편 남기고 광복 1년 전 베이징서 순국
 
9월 24일 중국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기념관의 벽시계는 9시30분에 멈춰서 있었다. 107년 전 그날의 거사 시각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 안 의사 흉상을 지나면 ㄷ자 형의 좁은 공간에 성장과 거사 과정 등이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이곳 안쪽에서 유리벽 너머로 기차역 플랫폼이 내다보인다. 도착한 열차에서 승객들이 내렸다.

플랫폼의 바닥에 삼각형과 사각형 표시가 선명하다. 플랫폼의 천장에는 ‘안중근 격살 이등박문 사건 발생지’란 팻말이 걸려 있다. 1909년 10월 26일, 세계를 뒤흔들었던 현장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열차에서 내려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했다. 거리는 불과 5m. 이토에게 3발이 명중됐다.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사서(四書)와 <사기(史記)> 등을 읽으며 자랐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을 익혀 명사수로도 이름났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귀국한 뒤 학교를 세우고 운영했다. 그러나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그는 반일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된다. 거사 5개월 만인 이듬해 3월 26일 안 의사는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31세 나이로 순국한다.

여기 또 한 명의 독립지사가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죽음으로 일제에 맞섰다. 그도 조부로부터 사서를 배우고 교육에 참여했다. 그리고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명사수가 된다. 총을 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안 의사 기념관에서 떠올린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1904∼1944) 시인이다. 안 의사의 흔적을 찾아간 여행에 마침 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75) 여사가 동행해 분위기는 숙연했다. 시인은 왜 권총을 들었을까. 이제 그 궁금증을 풀어보자.
10월 1일 육사가 태어난 마을을 찾았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다. 안동시청에서 퇴계로를 따라 북쪽으로 25㎞를 가면 도산서원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산 하나를 넘으면 퇴계종택이다. 다시 퇴계 묘소를 지나 고개를 내려가면 육사의 고향 원촌이다. 마을 입구에 이육사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확장공사로 휴관 중이다.

진성 이씨 집성촌인 원촌 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쇠락했다. 육사가 살 때만 해도 100여 호에 가까웠다고 한다. 육사의 생가는 옮겨지고 그 자리엔 지금 ‘청포도’ 시비와 시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웃한 목재(穆齊)고택에서 이옥비 여사를 만났다. 조선 철종 시기 대사간을 지낸 목재 이만유의 증손 이원봉은 육사와 8촌이었다. 이 여사는 이 집에 머물며 문학관 일을 돕고 있다.

먼저 28세 육사로 돌아간다. 1932년이다. 당시 육사는 대구에서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기자를 그만두고 중국 펑톈(奉天), 즉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간다. 거기서 의열단 창립멤버이자 핵심인 윤세주를 만난다. 알고 지내던 사이다. 일제 경찰의 기록에는 육사가 ‘일거리를 찾아 펑톈으로 갔다’고 돼 있다. 육사는 처음에 테러를 일삼는 의열단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육사는 결국 의열단이 설립한 난징(南京)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한다. 군인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졸업하면 일제의 요인을 해치우는 등 비밀조직원이 된다. 교장은 의열단장인 김원봉이었다.

육사는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거기서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운다. 놀랍게도 당시 육사는 권총 사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룬 모양이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는 권총 5자루를 촛불을 꺼놓고 해체한 뒤 짧은 시간에 다시 조립해낼 만큼 무기를 잘 다뤘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말을 타고도 명사수였다고 한다. 나라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펜 대신 총을 든 것이다. 육사는 이듬해 4월에 졸업한다.
넉 달 뒤 귀국한 그는 언론계 복직과 문필 활동을 계획한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귀국한 지 8개월이 지난 1934년 3월 육사는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령이 내려진 것이다. 육사는 당시 일제 경찰의 고문이 혹독해 몇 차례 옷이 피로 얼룩졌다. 그가 풀려난 직후인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가 경성으로 보고한 ‘이원록 소행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위에 선전할 우려가 있으며 (…) 본인의 성질로 보아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육사는 이때부터 문학에 뛰어든다. 시작(詩作) 활동을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기백을 키우고 길러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곧 행동이오.”

“시를 생각하는 것도 곧 행동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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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의 고향에 들어선 청포도 시비. 육사는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시를 통해 당시 민족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1939년 8월 그는 <문장(文章)>지에 시 ‘청포도’를 발표한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는 스스로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시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1943년 7월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지인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육사는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라며 “‘내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일본도 곧 끝장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했다.

안동시는 최근 육사의 고향으로 이어지는 도산면 도로변에 청포도 단지를 조성했다. 올해는 ‘264청포도 와인’도 선보였다.

육사는 시를 쓰면서 말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가까웠던 신석초 시인은 “동동주를 연거푸 아홉 사발 마시고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신석초는 육사가 시를 쓰거나 술을 마실 때 즐겨 쓴 한 구절이 있었다고 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거워도 탐닉하지 않고 슬퍼도 상하지 않는다)’이다. 한결같은 자세다. 전하는 시 36편 중 ‘절정’ 등 12편이 1940∼41년에 발표된다. 하나같이 지조와 절개가 번뜩인다. 1943년에는 ‘만등동산(晩登東山)’ 등 한시 3편만을 남겼다. 일제가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1943년 4월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떠난다. 독립 투사의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지식인과는 반대의 길을 간 것이다.

그 무렵 이 땅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은 일제에 무릎을 꿇고 변절했다. 친일로 돌아서 침묵했다. 한 술 더 떠 일제의 앞잡이가 돼 민족을 기만하는 지식인도 있었다. 육사는 홀연히 견위수명(見危授命: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하는 선비의 길을 걸었다. 당시 중국행은 무기를 들여와 무력항쟁을 도모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어두운 밤에 더 빛나는 별빛과도 같은 행보였다.
베이징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육사는 1943년 7월 귀국한다. 그는 안동에서 어머니와 맏형의 소상(小祥,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치른 뒤 잠시 서울에 머물던 중 다시 검거된다.

이제 그의 삶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부인 안일양은 동대문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만난다. 이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딸 옥비의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이징으로 압송되기 직전이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이옥비 여사는 기자에게 “당시 아버지께서 밀짚으로 얼굴을 가린 용수를 쓴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고 증언했다. 모습이 특이해 어렸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그렇게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두고 베이징의 차디찬 감옥에서 순국했다. 당시 육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는 베이징 감옥의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길로 달려가니 육사는 옷이 피로 낭자한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육사의 눈을 쓸어 내리면서 “육사! 조국은 우리가 맡을 테니 이제 고이 가십시오”라고 했더니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육사의 마지막 모습이다.

억울한 옥살이 뒤 ‘육사’를 필명으로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성장 과정은 문사에 가까웠다.

육사의 조부 이중직은 향리에 신교육기관인 보문의숙을 세워 초대 교장을 지내는 등 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육사는 여섯 살 때 조부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우고 10대에 경서를 외는 등 한학을 공부했다. ‘은하수’라는 육사의 수필에는 한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묘사돼 있다.

“논어나 맹자에 시전(詩傳), 서전(書傳)을 읽는 선비라면 어느 권에 무슨 장이 나올는지 모르니까 전질을 다 외우지 않으면 안됨으로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외조부 허형은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의병장 왕산 허위와 사촌이다. 육사에게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는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어머니로부터 “(나라를 찾는 날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배워온 것이 세 살 때부터 버릇이 되었다. (…)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규모’는 이 마을에 내려온 정신일 것이다. 이처럼 육사는 친가와 외가가 모두 선비요, 독립운동가인 환경에서 자랐다.

육사는 16세 때 대구로 나간다. 이듬해는 부친의 엄명으로 혼인한다. 육사는 직후 처가가 관여하던 영천 백학(白鶴)학원을 다니고 9개월 동안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육사 평전>을 쓴 김희곤(62) 안동대 교수는 “이 시기에 육사가 민족문제에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육사는 귀국해 대구 조양(朝陽)회관에서 신문화운동에 참여했다. 도서실·신문사·문화운동단체 등이 들어서 청년을 교육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던 공간이다. 1925년에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한다. 1927년 육사가 귀국하자 대구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뜨린 장진홍 의거다. 일경은 1600명을 투입하고도 단서를 잡지 못했다. 다급해진 경찰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육사 형제도 잡혀 들어갔다. 폭탄상자 겉면에 적힌 글씨가 육사의 동생 이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정작 거사의 주인공은 사건 1년 4개월 뒤 일본 오사카에서 붙잡힌다. 육사는 당시 혹독한 고문을 받는 등 1년 7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이때 수인번호가 264번. 필명 ‘육사(陸史)’의 유래다. 한자는 ‘식민지 역사를 베어낸다’는 뜻을 담았다.

옥고를 치른 뒤 1930년 육사는 <중외일보> 기자가 된다. 당시 기자들은 다수가 언론을 통해 일제에 항거했다. 1931년 육사는 기자 신분으로 2개월간 구금된다. 광주학생사건 이후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을 대구에 뿌린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육사는 신문기자를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육사는 일생 17차례 피검, 투옥된다.

육사는 일제의 탄압이 가혹해지는 생의 마지막에 시 ‘광야’를 썼다. 이 작품은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자유신문>에 발표된다. 시로 쓴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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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의 마지막 시 ‘광야’의 시상지인 ‘쌍봉·윷판대’에서 바라본 왕모산과 낙동강. 앞에 펼쳐진 들판은 원촌의 강 건너 마을인 내살미다.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 지녀
이육사문학관 건너편 산에는 ‘광야’의 시상을 다듬은 곳이 있다. 원촌 마을을 떠나면서 그곳에 들렀다. 깊은 산속에 큰 강이 흐르고 이런 탁 트인 들판이 있을까 싶은 곳이다.

육사는 옥중에서 일제에 맞서는 용기와 광복의 희망을 심었다. 그러면서 순국하는 그날까지 일제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찾기 위해 기꺼이 권총을 든 눈 속 매화 같은 선비였다.

이옥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 현장에서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며 “아버지도, 기회가 주어졌으면 총을 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상은 “그에게는 시보다도 문학보다도 조국이 더 컸었다. 조국을 찾은 뒤에야 시도 있고 문학도 있었다”고 기렸다. 이육사에게 광복은 곧 지조이자 절개였다.

하얼빈에 동행했던 도진순(57)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육사는 개화 지식인이면서 의병의 기개를 지니고 옥중에서 유언을 남겼다는 점에서 안 의사와 닮았다”고 말했다. 한학을 공부하고 명사수가 된 것도 공교롭다. 물론 사상은 차이가 있다. 육사는 나이가 안 의사보다 25년 아래다. 기록은 없지만 육사는 틀림없이 안 의사를 흠모했을 것이다. 육사는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 생명을 던져 의를 취하다)’란 말이 딱 들어맞는 선비가 아닐까.


[박스기사] 한국의 ‘별’ 이육사 | 북간도의 ‘별’ 윤동주 - 출신, 사상, 시 세계 달랐지만 일제에 맞서다 옥중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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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이육사(왼쪽)와 윤동주.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의 시는 한국과 중국 조선족 교과서에 모두 실렸다.
이육사는 ‘민족시인’으로 불린다. 묘비에도 그렇게 새겨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 다른 민족시인이 있다. 올 초 <동주>란 영화로 친숙해진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이다.

두 시인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이육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윤동주는 북간도(北間島)로 불린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옌볜의 김승종(53) 시인은 “윤동주는 북간도의 ‘별’, 이육사는 한국의 ‘별’로 밤하늘 별처럼 남북에 드리운 한줄기 빛”이라고 표현한다. 또 이육사와 윤동주는 이상화·김소월과 더불어 한국은 물론 옌볜 조선족의 교과서에도 작품이 동시에 실린 시인이었다. 북한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두 시인의 성장 배경은 판이하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선비 집안에서 자랐다. 윤동주는 살기 어려워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디아스포라(離散: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집단) 3세다. 육사가 요즘 말로 ‘금수저’라면 윤동주는 ‘흙수저’라고나 할까.

‘살신성인하는 좌경적 유교’가 육사의 사상적 바탕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최근 중국이 윤동주의 국적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룽징의 윤동주 생가를 찾아가면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고 한글·한자로 함께 쓴 바윗돌이 세워져 있다. 중국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인으로 만들려고 한 이른바 동북공정 역사 왜곡의 흔적이다.
이곳에 들른 한국 관광객들이 “윤동주 시인을 중국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고 분노하는 이유다.

사상적 바탕을 보면 이육사는 유학이다. 김관웅 옌볜대 교수는 “그것도 살신성인하는 좌경적인 유교”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군사훈련까지 받은 이육사를 “직업적인 혁명투사”로 표현한다. 이에 비해 윤동주는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또 서구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시(詩) 세계도 달랐다. 이육사는 선비의 기개로 일제에 항거하고 타협할 줄 몰랐다. 반면 윤동주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언제나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했다. 육사의 시 ‘광야’, ‘절정’은 선비풍이 느껴진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 ‘서시’는 속죄하는 인간을 그린다. 김관웅 교수는 “윤동주는 투사이기보다 항일을 양심적으로 실천했다”고 평가한다.

두 시인이 주는 감동의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나이는 이육사보다 13년 아래다. 활동무대도 서로 달라 생전에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두 시인 모두 일제에 맞서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그만큼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불멸의 공통점이다. 
/글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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