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중)
어쩌면 이처럼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있을까. '솟아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아 물결이 은빛처럼 반짝이는 강'같은 청량한 내면을 가진 이는 영랑 말고 대체 누가 있을까. 가장 애송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내 마음을 아실 이>, <강물>, <가늘한 내음>, <노래>, <달>, <청명> 등 영랑의 시는 한결같이 아름답고 영롱한 세상과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인간의 삶을 관조한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모습을 그는 '도른도른' 이란 정겹고 토속적인 남도 어휘의 조탁(彫琢, 갈고 닦음)으로 그려낸다. 흔히들 영랑을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심성으로 노래하는 탐미주의 시인의 전형이라 평한다. 그가 좋아해 마지 않았던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명시 구절처럼 그에게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었다.
영랑 시의 아름다움은 소리를 내어 읽어야만 제맛이 난다. 처음 읽으면 뭉클한 감동에 가슴이 '철렁'하고, 한 참 읽다보면 "부드럽고 섬세한 서정이 어느새 운율을 타고" 흐르며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고 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는 "언어의 격조가 높은 점에서는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다. 소월의 그 많은 한과 노래는 영랑의 옥저(옥피리)의 여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없지 않다"라고 했다.
'추한' 세상에 반기를 들고
▲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 본래는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다. | |
ⓒ 김현철 |
영랑은 1903년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전남 강진에서 탯줄을 끊고 나왔으나, 그가 당장 경험한 세상은 일제에 의해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추한' 세상이었다. 청소년기에 무용가 지망생 최승희와 목숨을 건 열애에 빠지고, 프랑스 미인 여배우의 그림엽서 한 장에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순수미'를 시어(詩語)로 담아내고자 했던 그였다.
나긋하고 달착지근한 서정시를 쓰며 세상을 호호낙낙 살기를 꿈꾸었을 영랑이 사실은 '독(毒)을 품고' 산 시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삶과 시를 제대로 조망하는 사람들은 그를 '시대의 반항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잡티 하나 없는 박속 같던 영랑이 '자연'을 거스르는 '부자연', 그리고 '아름다움'에 반하는 '추함'에 처음으로 저항한 것은 불과 14세때였다. 그는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휘문의숙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훈방조치 되었다. 아직 솜털이 송송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요주의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영랑의 항일정신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맞아 본격 발동한다.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지자 서울에서 몰래 입수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구두 안창에 숨기고 강진으로 내려온 영랑은 4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아 봉기하기로 친구들과 모의한다. 그러나 거사일 사흘을 앞두고 경찰에 급습 당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어린 학생(16세)신분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6개월 만에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된다.
▲ 휘문 고보 시절의 김영랑 | |
ⓒ 김현철 |
영랑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기를 꿈꾸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견디지 못한 영랑은 동경유학길에 올라 아오야마학원(청산학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만난다.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같은 하숙집에서 교유한 것도 이때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 영랑의 자유의식과 항일정신은 이때 더욱 고취되었다.
일본에서 '독을 차고' 귀향하다
일본에서 시문학을 공부하며 암중모색하던 영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한다. 관동대지진시 엉뚱하게 증오의 대상이 된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강진으로 돌아온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누워>, <사행소곡7수(四行小曲七首)>,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토속적 서정이 듬뿍 담긴 작품을 쏟아낸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일제의 폭압이 극도로 심해지기 시작하자 저항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1930년 말에서 1940년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저항시를 쏟아내는데, 말랑한 서정시를 쓰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윤동주와 한용운의 저항시에 버금갈 만한 다수의 시편이 그때 발표되었는데, <독을 차고>는 그때 토해낸 시다.
▲ 김영랑의 생전 모습 | |
ⓒ 김현철 |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중략)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독을 차고> 중)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 말, 일제는 황국신민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인의 혼까지 말살하려 들었다. 일제는 국책문학을 내세우며 천황을 찬양하거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시를 쓰도록 강요했다.
영랑은 추한 세상에 빌붙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세태를 비관·비판하는 한편, '독을 차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힘썼다. 데뷔 초기작부터 유독 '내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온 영랑은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를 갈고 닦아 자연과 세상을 노래하며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억제해 오던 터였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랑은 이리(일제)와 승냥이떼(친일 부역자)가 득실대는 세상에서 '독립이고 뭐고 모두가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를 회유하는 친구조차도 위협하며 '독을 차고' 일제가 지배하던 세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독을 차고>에 이어 <거문고>, <두견>, <춘향> 등에는 그의 결연하고 비장감이 감도는 '내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거문고> 중)
쓴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쓴 시인
영랑은 시를 쓴 그대로 살았고, 살아간 만큼 시를 썼다. 그가 일찍이 <시문학>에서 고백했듯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하며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머리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진실을 은폐시키지 못한다"고 절규하며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문인들이 머리를 굴려 추한 짓을 할 때, 영랑은 교활한 폭압체제의 실체를 폭로하고 항거했다.
그는 갖은 탄압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이 쓴 <아버지 그립고야>라는 책에 기록된 일화에 그의 '뚝심'이 잘 나와 있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 가구주들에게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할 때면 영랑은 "내 성명은 김윤식이다. 일본 말로 발음하면 '깅인쇼큐'다. 즉 나는 '깅씨'로 창씨했다"라며 당당히 대응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거부하도록 했는데, 자녀들은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매주 토요일 형사들이 대문을 두드리며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도 습관성 설사병 등을 핑계로 이리 저리 이를 피했다. 양복을 갖춰 입고 단발을 하라는 명령도 끝내 불복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한복을 벗지 않았다.
'외로운 혼'으로 '독을 차고' 살던 영랑은 회유와 협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자 홀연 절필을 선언했고, 1940년 <춘향>을 마지막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우리말을 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기에 영랑은 일본어로 된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총을 가지고 싸운 독립군이 있는가 하면 펜과 종이로 싸운 사람들이 있는데, 영랑은 총칼 대신 펜과 종이로 싸운 독립군이라 할 수 있다. 친일문학연구가임종국 선생이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친일을 하지 않은 영랑을 '일제 저항시인 7인'(윤동주, 변영로, 김영랑, 이희승, 황석우, 이승기, 오상순)에 포함시킨 이유다.
일제에 펜과 종이로 싸운 시인, 해방을 맞다
▲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본래 모습. 1997년까지 우아한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고, 현재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있다. | |
ⓒ 김현철 |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제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저지다 휘모라보아
이러케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중략)
떠밧는 명기인듸 잔가락을 온통 이즈오
떡떡궁! 정중동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잇어
인생이 가을가치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제
(<북> 중)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꾸나 큰 바다로 가자꾸나
(<바다로 가자> 중)
영랑은 해방 정국에서 한때 순진하게도 대한청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다가 폭력적 상황에 질려 금방 그만 두었고, 이승만 정권에서 공보수석비서관이었던 <성북동비둘기>의 시인 김광섭의 권유로 출판국장을 맡았으나 친일파들이 중앙청에 득실대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했다. 일제시대에 입었던 흰색 바지저고리와 검은색 두루마기를 그대로 다려입고 관청에 출근하는 그를 주변에선 못마땅해 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영랑이 경무대를 발칵 뒤집은 사건은 그의 유별난 결벽증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어느날 영랑이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집무실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무실 뒷벽 전면을 장식하고 있던 대형 병풍 그림을 보고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영랑이 "각하, 어찌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에 일본 금각사를 그려 넣은 병풍을 놓아둘 수 있습니까? 외국인들이 볼까 두렵습니다"라며 직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저게 일본 사찰 그림이란 말인가? 누가 그런 말을 해줘야 내가 알지. 당장 치우도록 사람을 부르게!"라고 했다.
무질서한 정국과 이승만의 독재에 환멸을 느낀 영랑은 7개월만에 출판국장직을 그만 두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 영랑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49년 여름 신당동 자택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 |
ⓒ 김현철 |
영랑은 1950년 한국전에서 유엔군에 맞서며 후퇴하던 인민군이 쏜 유탄에 맞아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해방을 맞은 기쁨에 떡떡궁! 북을 쳤던 영랑은 "찬란한 슬픔"을 안고 일찍 그렇게 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영랑 사후 68년이 흐른 지난 2018년에서야 그의 애국정신을 기려 독립유공 훈장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영랑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예술인이 받는 금관문화훈장도 지난 2008년에서야 받았다. 전남 강진에 있는 영랑의 생가는 문학인의 생가로는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순수한 시적 감성으로 추악한 일제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여 '독하게' 그려낸 영랑. 교활하게 거짓을 감추며 더 추해져가는 현재의 일본과 잔류 친일파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시어(詩語)로 이들을 꾸짖을까.
아들 김현철이 본 아버지 영랑, 그리고 대한민국
슬하에 5남 3녀를 둔 영랑은 '배 곯게 하는 문학은 절대 안 된다'고 자녀들에게 신신당부했으나, 두 딸을 제외한 5남 1녀가 글쓰는 일(영문학, 불문학, 언론인, 독문학, 영어학)을 전공하여 교수, 통역사, 언론인 등을 평생 업으로 삼아 아버지의 명을 어기며 살았다.
현재 영랑의 직계 자손 중 셋째 현철, 다섯째 현도, 여덟째 애란(여)이 생존해 있는데, 특히 셋째인 김현철(84) 선생은 전남 강진의 '영랑 현구 문학관' 관장을 거치며 영랑 시인의 삶의 족적을 관리.보존하는데 초석을 다졌다.
김현철 선생은 MBC 본사 기자를 거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미주 동포언론 <한겨레 저널>을 창간한 언론인 출신이다. 도미 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독하게 맞서 싸우다 한때 입국금지인물 명단에 오른적도 있다. 그가 7년 전 폭로한 박정희 관련 유튜브('비운의 여배우 김삼화')는 5백만 회가 넘는 클릭을 기록하며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코리아 위클리>와 <서울의 소리> 등에 남북관계와 한국정치 관련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 영랑 사후 58년 만에 추서된 금관문화훈장 증서와 훈장. | |
ⓒ 김명곤 |
- 영랑이 뒤늦게나마 그 진면목을 인정받아 항일 저항시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감은?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지난 2008년의 금관문화훈장에 이어 작년에 독립유공훈장 건국포장을 받은 것은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장기간 친일파 정권이 지속된 탓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늦게 진실을 인정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좀 안타깝다.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 선친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모두는 아니지만 아버님의 시에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정서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면도 강하다고 본다. 가령 <바다로 가자> 같은 시는 해방정국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나,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예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역시 슬픔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희망의 세계가 암시되어 있다."
- '영랑 시인의 시는 운율적 흐름이 강해 한참 읽다보면 절로 노래가 나온다'는 평들이 많다.
"사실 아버지는 성악가(테너)를 꿈꾸셨다. 어머님과 지역 노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아버지의 남도 판소리는 당시 명창들도 놀랄 정도로 수준급이었고, 거문고, 가야금, 북, 양금의 연주 실력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임춘앵, 김소희 등 당대의 명창들을 생가에 초청하면 고수를 데려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북 연주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 선친과 음악에 얽힌 이야기 중 특별한 기억이 있을 듯하다.
"아버지가 서양 클래식뿐 아니라 판소리까지 고전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 4살쯤부터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는 그 긴 판소리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셨다. 미칠 지경이었다. 소변이 마려워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나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컸다."
- 영랑시인은 일제에 대해 '독을 차고' 사셨으면서도 서정주 등 친일파 시인들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선친이 친일파 시인 서정주와 어울리는 것을 보고 대학생이던 큰 형님이 '왜 저런 분과 가까이 지내십니까'라고 종종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11년 연하의 서정주를 지칭하며) 불쌍한 사람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아버지는 매우 인간적인 분이셨다."
- 선생님이 본 아버님의 성격은?
"이광수, 김광섭, 정지용, 서정주, 박목월 등 선후배 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친은 수줍음을 매우 많이 타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불의를 보면 불같이 화를 내는 과격한 면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 출판국장 시절 한글맞춤법통일안 수용 여부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통일안을 반대하는 이승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절친 김광섭에 뒤틀린 나머지 교자상을 뒤엎고 나온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옹졸한 직계 상사가 사사건건 월권을 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정도다."
- 선친이 한국전 당시 북한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고들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설령 인민군의 포격에 돌아가셨다고 해도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도 북한군을 원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버님이 한때 잘 모르고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하신 일이 있으나,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을 선호하신 분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모셔서 결혼식 주례를 서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여운형 선생이 주례를 설 정도였으면 해방정국에서 좌파 사회주의로 기울었을 법한데.
"큰 형님의 생전 전언에 따르면, 언젠가 일본 유학생 시절 친구들이 '자네 같은 엘리트가 택할 길은 우리처럼 사회주의인데 왜 그 길을 따르지 않나?'라고 추궁하며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선친은 '사회주의 좋지… 그런데 말야, 자유가 없는 게 싫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선친은 같은 시문학파 동료이자 영랑이라는 호를 지어준 정지용과 단 둘이서 금강산 여행을 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나 사상에서 차이가 있어 서로 멀어지며 결국 결별했다. 선친은 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 분이셨다."
▲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영랑 시인의 삼남 김현철 선생 | |
ⓒ 김현철 |
- 한인사회 일각에서 선생님을 친북인사로 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한데.
"(웃으며) 지겹도록 들어온 한심한 소리다. 나 스스로는 누가 뭐래도 선친과 같은 진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 세대가 받아온 길고 긴 반공교육이 가져온 트라우마 때문에 북을 적대시 했다. 운영하던 신문사에서 김재준, 함석헌, 송건호, 함세웅, 문동환 등 민주인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으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한다."
-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은 독립 후 242년간 200여차례나 타민족을 괴롭혀 왔다. 노엄 촘스키에 따르면, 미국은 평균 9개월마다 침략 전쟁을 벌인 나라다. 이러한 미국을 보고 친미를 한다면 그게 정상인가?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오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과 미국을 인권국가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가령 악명높은 관타나모 인권유린의 실상을 안다면 감히 미국을 인권국가로 부르지 못할 것이다. "
- 영랑 시인이 살아 있다면 현재의 한일관계에 얽힌 논쟁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현재의 갈등은 친일파 70년 체제에서 나온 토착왜구 세력과 민족주의 진영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아버지는 결단코 토착왜구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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