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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이며 유교의 시조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을 지닌다.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언행과 사상에 대해서는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인 오경을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가난한 가정환경 속에서 부모를 일찍 여의었지만, 학문에 힘써 17세에는 관리가 되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노나라의 정치에 실망하여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정치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랜 방랑 생활에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정치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주나라의 봉건 질서가 쇠퇴하는 춘추 말기,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해지자 공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나라의 초장기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덕을 사람에 대한 사랑인 '인(仁)'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중심으로 삼았고, 정치에 있어서는 위정자가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교화하는 이상적 지배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인은 부모 형제에 대한 애정인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사상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禮)'의 형식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자의 신(神)에 대한 개념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압박하는 존재가 아닌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로서의 신이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는 물론 본인 스스로에게도 인의 실현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으며, 그 영향력은 살아생전에도 지대하였다. 공자 사후에도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유지되었으며, 특히 맹자는 제자백가 사상의 난립 속에서 세력이 약해져갔던 공자의 사상을 다시 일으켜 전파하였다. 그 후 전국 시대 말기에 순자는 다른 학파의 사상도 받아들여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고 집대성하였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丘)라고 이름 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의 나이 20세 무렵 계씨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벌여 대접을 했다. 공자도 가서 참여하려고 했는데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쫓아내며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자는 것이지, 너 같은 놈을 대접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 이후 공자는 발분망식하여, 공자의 나이 34세 때에는, 노나라의 대부 맹리자(孟釐子 : 삼환의 하나인 맹손씨)가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는 맏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공구는 성인(은나라 탕왕)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여공에게 양위한 분이다. 정고보(正考父)에 와서 여러 임금을 보좌함에 그 공손함이 지극하였다. 내가 듣자하니 성인의 후손은 비록 세상을 맡아 다스리지는 못하나 반드시 통달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는 나이가 젊고 예를 좋아하니 아마 통달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니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라는 당부를 남길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실제로 맹의자는 공자에게 예를 배웠고 『논어』에 나온다.
공자 나이 35세에,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과 닭싸움을 하다가 다투어 후소백의 집터를 침략하여 집을 늘려 지었다. 평소에도 계평자는 못된 짓으로 노나라 대부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가 평소 집안의 힘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싫어했던 소공도 가담하여 그를 몰아내려고 군사를 이끌고 쳤는데, 계평자는 맹씨 숙손씨의 세 집안과 더불어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의 군대는 패배했고,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갔다. 그 뒤 노나라에 난리가 나자 공자는 제나라에 갔다.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그를 통해서 경공과 통하려고 했다. 제나라 태사(太師)와 더불어 음악을 논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들은 다음 배우려고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자 제나라 사람들이 칭송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 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을 업신여기고 배신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 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로 말미암아 재상의 일을 대리하면서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약 2000섬)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 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 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과 순화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 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를 불러들였다. 자공은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식량이 떨어졌다. 따르는 이들은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어진 이는 필히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라면 어찌 백이·숙제가 있었겠으며,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후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 : 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 : 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이상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임)
[네이버 지식백과] 생애 해설 (공자 『논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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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출현은 중국, 아니 인류의 큰 행운이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구수한 목소리에 술 잘 마시고 사람 좋아하는 인간, 솔직담백하고 항상 세상일에 열변을 토하는 사람, 끊임없이 탐구하며 옳은 일에 고집불통인 공자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다. 독서와 사색을 겸하는 공부 방법, 재능에 따라 달리 가르치는 교수 방법으로 공자는 그 이전 중화문명의 진수들을 집대성하여 유가 및 제자백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공자는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닌 학자이다. 예를 들어 공자의 어록인 『논어』엔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한다. 임금의 아들[君子]이라는 기존 개념에 도덕적 의미부여[儒]를 함으로써 군자의 뜻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인(仁)이 그렇고, 예(禮)가 그렇고, 그의 철학적 개념이 모두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사람의 말을 옮겼을 뿐 창조하지 않았다"고 겸손해 한다. 예를 중시한 주나라에서 큰일을 치르는 의식에 밝은 유들은 예식을 돕는 상례(相禮)와 교육활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는데, 공자는 거기에다 기존의 사상적 유산인 6예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리고 마른 고기 한 묶음만 가져오면 각지에서 찾아온 가난한 자, 강도·건달까지도 가리지 않고 열성으로 가르쳐 그들을 전통문화의 계승자로 만들어냈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의 기적이다.
그의 관심은 땅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아직 사람도 섬길 수 없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논어』 「선진」)고 대답한다. 사람과 사회를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개인의 수양과 품덕을 특별히 강조한 도덕주의자였으며, 상식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과거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정의하였다. 예컨대 삼년상을 치를라치면 산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며 합리적인 항의를 한 재아를 어질지 못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식으로 태어나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기"(「양화」) 때문이라는 인간적인 이유를 단다.
이렇게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성공한 공자는 기존의 『시』 『서』 『예』 『악』 『역』 『춘추』를 재정리했고, 이로써 유가는 경전을 갖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학파가 될 수 있었다. 고문헌에 대한 선별·편찬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나, 체계적인 이론이 바탕이 되어 줌으로써 오히려 육경의 의미는 더욱 승화되었다. 『예기』 「경해 經解」편은 공자의 육경에 대해, "사람됨에 온유하고 돈후하란 것이 『시』의 가르침이다. 소통하여 멀리 알라는 것이 『서』의 가르침이다. 폭넓고 어진 삶을 살라는 것이 『악』의 가르침이다. 정밀하고 미묘한 것을 잘 재어 보고 헤아리라는 것이 『역』의 가르침이다. 공손·검약하고, 엄숙·경건하라는 것이 『예』의 가르침이다. 사건을 잘 비유하여 말을 하라는 것이 『춘추』의 가르침이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 스승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교육에 종사하면서 스승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유복(儒服)이라는 독특한 복장을 하며 동질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유'가 한 학파의 칭호가 된 것은 공자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승의 사상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제자들 사이에 급속히 분파가 생겨났다. 『순자』 「유효」편은 이들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고,1) 구체적으로 제자들 이름을 거명해 자궁(子弓)을 공자의 정통으로, 자사와 맹자를 정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잡학한 사람으로, 자장(子張)씨의 유는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자들로, 자하(子夏)씨의 유는 의관만 정제하고 있는 사람들로, 자유(子游)씨의 유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로 비판하기도 한다. 『한비자』 「현학」편엔 "공자가 죽은 뒤 자장의 유, 자사의 유, 안(顔)씨의 유, 맹(孟)씨의 유, 칠조(漆雕)씨의 유, 중량(仲良)씨의 유, 손(孫)씨의 유, 악정(樂正)씨의 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유가가 쇠락했다기보다 발전했다는 징표이다. 즉, 이러한 분파 투쟁을 통해 이론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뉜 초기의 유가 사상가들에겐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된 사상 형식·개념·범주가 있었다. 정치와 윤리를 일체화시킨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과 정치 사이를 오간 유가 사상가들은 첫째, 선왕 특히 요·순(堯舜)과 문·무(文武)의 도를 자신들의 깃발로 삼았다. 둘째, 전통 문화유산이며 공자가 정리한 육예를 모든 교육과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셋째,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논어』 「안연」)는 가르침에 따라 군신·부자·귀천·상하·친소의 구분이 엄격한 예의를 숭상하였다. 넷째, 인·의·예·지·충·효·신·애·화·중(仁義禮智忠孝信愛和中) 등을 사회생활을 실천하는 데 공통된 기본 개념이자 범주로 삼았다. 다섯째, 모두가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따라서 덕·중용·정명(正名) 등 공자의 주장은 항상 유가의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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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 시절의 공자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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