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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적(翟).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하자,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은 그에 힘입어 신흥계급으로 성장하고 점차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씨족 귀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신흥계급의 입장에 서서 씨족 귀족의 정치와 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천하(天下)에 이익되는 것(利)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尙賢),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節用),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를 주장했다. 또 이러한 원칙과 방법에 기초를 둔 현실비판 속에서, 논리적 용어, '유'(類 : 보편), '고'(故 : 까닭, 이유)의 개념 등을 발명, 구사하여 논리적 사고를 풍부히 했다.
묵자라는 존칭으로 일컬어지는 묵적(墨翟)의 생존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의 활동 반경을 미루어 볼 때 대략 BC 479~438年 경으로, 공자(孔子)보다 10여 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기(史記)》에는 묵자가 송나라 대부라고 적혀 있으나 노예 출신의 수공인이어서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얼굴에 입묵했으므로 묵(墨)이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수성(守城)기구ㆍ병기ㆍ공구 등의 기계(器械) 제작에 능했으며 성곽 방위술에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주(周)나라의 사각(史角)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공자의 유학도 배웠으나 번거로운 예의가 백성들의 생산을 저해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할 우려가 있으며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배척했다.
그의 근본 사상은 [겸애설(兼愛說)]로서, 자타를 구별하여 사랑을 차등화하는 기존 유가의 한정적 사랑(묵가에서는 이를 “별애(別愛)”라고 부름)은 개인 간에 시기(猜忌)와 도둑질, 살인과 투쟁을 유발시키며 국제간에는 전쟁을 야기 시키는 등 천하의 가장 큰 화근이라 하여 비판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겸애(謙愛)를 실천하는 것만이 이러한 사회적 병폐와 문제를 제거하여 궁극적인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계급이나 신분의 차등에서 벗어나 평등한 사랑을 실천할 때 사리사욕이 아닌 공리를 얻어 서로가 이익을 보게 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으니 이를 [교상리(交相利)]라 부른다.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는 [상현정치(尙賢政治)]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노력에 의한 생산의 증대와 절용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귀족들의 사치ㆍ낭비ㆍ부의 편중을 지탄했다.
묵자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극히 검소하고 분수에 맞게 생활했으며 월나라 왕이 사방 500리에 달하는 봉지를 준다고 하는데도 분수에 넘는 대우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과 배치된다 하여 거절했다.
그는 천하에 이로운 일이 있으면 쉴 틈이 없이 동분서주, 찾아가 할만큼 근면하여 고통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활동했는데 “정강이의 털이 부스러질 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맹자(孟子)》).”는 정도로 호인이며 선인이었다고 한다.
제후들과 귀족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을 받아오던 백성들은 묵자의 평등ㆍ박애 사상에 크게 공감하여 당시에는 오히려 유가를 능가하는 주도적 사상이 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다가 전국 시대에서 진(秦)의 통일을 거치는 동안 점차 쇠퇴하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잊혀진 사상체계였던 묵가의 사상은 청나라 말에 이르러 묵자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묵가(墨家)는 묵자가 주창한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교설을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 《묵자(墨子)》 53편에 남아 있는데 상현(尙賢)ㆍ상동(尙同)ㆍ겸애(兼愛)ㆍ비공(非攻)ㆍ절용(節用)ㆍ절장(節葬) 등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민중들의 관념에 비해서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분과 지위상의 귀천ㆍ경제적인 빈부ㆍ지능상의 현우(賢愚)ㆍ힘의 강약을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함을 지적하며 육친간의 친소에 따라 사랑의 지향이 달라지는 유가(儒家)의 인(仁)을 배척했다.
만민에 대한 박애 정신인 겸애(兼愛)를 주창하는 묵가는 출발점부터 유가와 대립하기 시작하여 당시의 양대 학파를 이루었으며, 상대방을 통박(痛駁)하면서 소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서막을 올렸다.
묵가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믿는 모든 것을 타파하려고 했다. 혈연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겸애(兼愛), 인간의 숙명관을 타파하기 위한 비천명(非天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념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시비곡직을 바르게 가릴 수 있고 현우(賢愚)ㆍ근태(勤惰:부지런하고 나태함)만을 가지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묵자의 생각이다. 이 겸상애(兼相愛)와 비천명은 묵자사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겸애(兼愛)사상과 교상리(交相利)
묵자는 그의 중심 사상인 자타를 구별하지 않는 평등애, 곧 겸애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삼표(三表)]를 내세우고 이를 공리의 기준으로 삼아 개인의 사리가 아닌 천하의 공공복리를 추구하는 [교샹리(交相利)]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표란 성왕(聖王)의 사적에 근본을 두는 [본(本)], 백성들의 직접 경험에 근거한 [원(原: 연원(淵源))]>, 국가와 백성들의 이익에 일치하는 데에 효용성을 두는 [용(用)]을 가리킨다.
그들은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는 종지(宗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오히려 가능한 한 삼갔다. 비락(非樂)과 절장(節葬:장례식을 검약하게 함)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상현(尙賢)사상과 상동(尙同)사상
국가 제도는 안정되고 통일된 세상을 견지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묵자의 생각이다. 천하를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각인의 능력에 맞게 제후와 향장ㆍ이장(里長) 등을 임명해야 되지만 그러한 직분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범인이 아닌 현자(賢者)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여 아랫사람이 위에 있는 현자를 모방하거나 동일하게 되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상동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평화 사상인 비공(非攻)
[비공]이란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비전론이다. 묵자는 전쟁을 집단적인 살인행위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실제적으로도 수성 장비를 제작하고 밤낮으로 10일을 달려 자기의 조국인 송나라를 침공하려는 초(楚)나라 왕과 공성 기구 제작자인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가 이를 저지시킨 일도 있다.
경제 사상인 절용
묵자는 근검절약을 주창했으며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를 모두 갈아서라도 천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리라(마정방종 이천하위지(摩頂放踵, 利天下爲之)).”고 외치며“몸을 가릴 만큼만 입고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으며 노예들과 똑같이 어울릴지언정 벼슬자리 따윈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탁신이의 양복이식 비어빈맹 미감구사(度身而衣, 量腹而食, 比於賓萌, 未敢求仕))”고 하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농민이며 노동자ㆍ수공업자들이었던 묵자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산의 증가를 위해서는 인구의 증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산의 증대와 아울러 물자를 절약해 써야함을 강조했다. 길흉화복이 타고 나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근면과 절약이 부의 원천이라고 하면서 왕후장상 등 귀족들의 호의호식과 사치ㆍ낭비를 비난하고 특권 계층에 의한 부의 독점을 지탄했다.
묵자의 제자들과 묵가의 성쇠
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활동했는데 역대의 거자(鉅子: 묵가의 최고 지도자)로 알려진 금활리(禽滑釐)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활약이 두드려졌고 절용과 실리 비공 등을 주장한 학자 송형(宋銒)과 윤문(尹文)ㆍ공상과(公尙過)ㆍ허행(許行) 등등이 묵자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다.
또 여러 계파 중 상리씨(相理氏) 무리는 동방의 제(齊)에서, 초나라 사람인 고획(苦獲)ㆍ등능(鄧陵)ㆍ자이치(子巳齒) 등은 남방에서, 상부씨(相夫氏) 무리는 서방의 진(秦)나라에서 활동했다.
그 중 별묵(別墨)으로 불리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 등은 변론의 방법을 개발하여 묵가의 겸애사상과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변호하면서 제가(諸家)에 대한 비평에 치중했는데 이들을 [명가(名家)]라고도 부른다.
한동안 묵가들의 활약은 유가를 압도했다.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의 학설이 하늘 아래 가득하여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고 한탄했다. 한비자(韓非子) 또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학파를 꼽자면 유가와 묵가를 들 수 있다.” 유가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나 그때까지도 묵자의 학설은 유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학(顯學: 뚜렷하게 드러난 학파)’으로 꼽힐 정도로 창성했다.
묵가 집단은 거자를 중심으로 철통같은 단결력으로 조직되어 종교 집단이나 정치 집단처럼 엄격하게 활동했으며 그 조직원은 [묵자(墨者)]라고 불렸다.
복돈(腹)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초기 거자들은 투철한 묵가 사상을 지니고 이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 했으나 이후 묵가 조직에 이들 만한 사상적 지도자가 계속해 출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가 “묵자가 죽은 뒤 상리씨의 묵가, 상부씨의 묵가, 등릉씨의 묵가로 분열되었다.”고 전하는 바와 같이 묵가의 분파들이 서로를 별묵이라 비난하며 다투었다〈《장자(莊子)》〈천하편(天下篇)〉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 말기 칠국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쇠약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진(秦)ㆍ한대(漢代)이후에는 학맥 자체가 완전히 끊어져 잊혀진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청대(淸代)의 고증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묵가 연구가 부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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