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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법가학파 - 한비자
2019년 11월 20일 22시 34분  조회:3190  추천:0  작성자: 죽림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한비자

법()은 드러내야 하고, 술()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한비자(기원전 약 280∼233년)의 이름은 한비이고 전국 말기 한() 출신이다. 원래는 한나라의 공자로 순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원전 234년은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 13년으로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한나라를 공격해왔다. 이 해 진왕 정이 한을 공격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오랫동안 천하통일에 힘을 쏟아온 진은 6국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6국 중에 가장 약한 한나라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진왕 정은 6국을 소멸시키는 자신의 숙원을 위해 인재를 적극적으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런 진왕 정이 언젠가 한비자의 저술인 『고분()』과 『오두()』를 읽고는 깜짝 놀라며 이 책을 쓴 사람은 틀림없이 기재일 것이며 자신의 통일대업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사()에게 감탄을 연발하며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사는 "이것은 한비자란 자가 쓴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진왕 정은 한비자를 얻기 위해 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한비자를 지명하며 진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한왕은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한비자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저주받은 비서(秘書)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한비자와 이사는 사실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도 잘 꾸미지 못했다. 하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썼다. 이사는 이런 한비자에 열등의식을 느끼며 자책했다. 『한비자』는 군왕들이 보라고 쓴 책이다. 한비자는 유가 학설에 반대하면서 군주의 권술()에 대해 대서특필하여 훗날 군주가 전제독재로 신하를 통제하는 데 이론과 방법을 제공했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걱정이 되어 여러 차례 한왕에게 부국강병의 모략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한왕이 씩씩하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또 권력을 가지고도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한나라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로 허영과 사치에 빠져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갈 인물들을 등용하고 있었고, 이 자들의 지위가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보다 더 높았다. 이에 울분을 품고 『고분』, 『오두』, 『내외저()』, 『설림()』, 『세난()』 등 십만여 자에 이르는 저작을 써서 역사상 득실의 변화를 종합했다.

한왕은 당초 한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자 비로소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자청하게 했다. 진은 한비자를 억류시킨 다음 단숨에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왕 안()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이는 한비자가 제창한 치국의 길이었다. 한비자가 말하는 '법'은 상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술'은 신불해()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신불해와 공손앙(상앙) 두 사람의 견해 중 어느 쪽이 나라에 더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제다. 사람은 열흘 이상 먹지 않으면 죽고, 아주 추운 날씨에 옷을 입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 그런데 옷과 음식 중 어느 것이 사람에게 더 긴요하냐고 묻는다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이 사는 데 꼭 있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한비자』 「정법」)

그는 국가에서 '법'과 '술'은 사람에게 있어서 옷이나 음식과 같은 것으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법이란 먼저 관부에서 공포하여, 지키면 상을 받고 명령을 어기면 처벌받아 상과 벌이 분명하게 시행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법'이란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조령() 같은 것으로, 이 조령은 각종 상벌 조건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군주에 복종하면 상을 받고 저항하면 벌을 받도록 한다.

'술'에 대해서 한비자는 "지금 신불해는 '술'을 공손앙은 '법'을 제창하고 있다. '술'이란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되 그 관직에 따른 직책을 맡긴 다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지고 신하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군주가 장악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군주가 관직 임명과 일처리에 대한 검사,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 신하들을 심사하는 일 등에 대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통치에서 '법'과 '술'이 갖는 중요성은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바보처럼 멍청하게 윗자리를 차지하는 꼴이 되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밑에서 난리를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인 것이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법'과 '술'을 장악하여 운용하는 종합적 원칙은 "절기에 맞추어 농사를 지어 재물을 얻게 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여 빈부를 고르게 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하여 간사한 악행을 끊는다. 백성들이 땀을 흘려 일해서 부를 쌓고, 직무를 잘 처리하여 귀한 지위에 오르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공적을 세워 상을 받게 하고 군주의 인자한 은혜만을 바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다(「육반」)"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법은 드러내는 것이 낫고 술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략적 사상을 강조한다. 이 말의 뜻은 '법'은 널리 선전하여 집집마다 다 알게 해야 하고, '술'는 마음속에 꼭 감추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백성을 통치하고 신하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킨다. 통치자는 말과 행동을 떠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영향력도 커진다. '세'를 탈 줄 알면 좋은 사람도 나쁜 자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유능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지만, 못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어지럽히게 된다. 통치자로서 현명한 군신은 자신의 권력으로 국가를 다스리지만, 간사한 군신은 권력으로 백성과 어진 사람을 해친다. 군왕이라면 권세를 잘 이용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우화 한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조보()가 밭을 갈고 있는데 한 부자가 마차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놀라 더 이상 가려 하지 않았다. 아들이 마차에서 내려 앞쪽으로 말을 끌고 아버지는 뒤에서 마차를 밀었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밭을 갈고 있던 조보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보는 농기구를 챙긴 다음 마차 위로 뛰어올라 말을 모는 자리에 앉은 다음 고삐를 잡고 채찍을 드니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이 고사를 이용하여 신하와 백성을 다루는 현명한 군주의 이치를 설명한다. 조보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더라면 있는 힘을 다해 마차를 미는 일을 도왔을 것이고, 그러면 말은 계속 버티고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보가 마부 자리에 편히 앉은 것은 그에게 말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군주에 있어서 국가는 수레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군주의 '세(권력)'는 말에 비유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이 없다는 것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이 피로하면 국가는 환란을 면하기 어렵고, 몸을 편안한 곳에 두면 국가도 다스려져 부강해질 것이다.

한비자는 현명한 군주는 "관리들만 잘 감독할 뿐이지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지 않는다. 나무줄기를 흔들면 나무 전체 잎사귀가 흔들리게 되고, 그물의 벼리를 당기면 힘들이지 않고 그물을 펼 수 있는 이치가 바로 이런 도리다(「외저설·우하」)"라고 말한다. 또 "이익이 있는 곳에 백성들이 몰리고,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에 선비들이 목숨을 건다(「외저설·좌상」)"고도 했다.

한비자는 군주가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는 데는 효과적인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릴 필요가 없고 각급 관리들을 통하여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무줄기를 흔드는 것과 같아, 나무 전체가 흔들리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연못 주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도 놀라 하늘로 날아가고, 연못 속의 물고기들은 바닥으로 숨는다. 또 그물을 잘 던지는 사람은 그물의 벼리만을 쥐면 되지, 그 많은 그물코를 일일이 건드리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따라서 관리는 나무줄기와 그물의 벼리에 비유할 수 있고, 군주는 이 관리들만 잘 다스리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 불을 끄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다. 관리들에게 직접 물동이를 들고 가서 불을 끄게 하는 것은 개인의 작용을 발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리들에게 채찍이나 지휘용 깃발을 들게 하여 만 명의 백성들을 지휘하면 빨리 불을 끌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구체적이고 작은 일에는 매달리지 않는다.

한비자는 또 백성들을 너무 사납게 압박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의 반란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앞서 인용한 조보의 이야기를 다시 들고 있다.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조보는 제나라 왕을 위해 마차를 몰았다. 그는 말을 길들이기 위해 백 리 동안 말에게 물을 주지 않고 갈증을 나게 만들어 말을 길들였다. 그런 다음 제나라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제나라 왕은 화원에서 한번 시험해보라고 했다. 조보가 말을 몰고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말은 화원의 연못을 보자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보가 고삐를 당기며 통제하려 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조보는 말을 갈증나게 하는 방식으로 말을 길들였지만 물을 본 말은 참지 못했고 조보도 어쩔 수 없었다. 조보는 이 일을 가지고 군주를 깨우쳤다. 백성의 생존방식으로 백성들을 길들이려 해서는 되레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사람을 기용하는 '용인()' 기술은 군주 통치의 중요한 방면이다. 한비자는 이 방면에서도 많은 견해를 제기했다. 한비자의 통치모략에는 법가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한비자는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유능한 인재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능한 인재는 반드시 군주를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를 제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강태공의 예를 소개하고 있다.

강태공이 제()나라에 봉해졌다. 제나라에는 동해에 숨어사는 은사() 광율()과 화사()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천자의 대신이 되는 것도 싫고, 제후와 사귀는 것도 싫고, 남의 도움 없이 그저 스스로 농사를 지어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높은 명성도 좋은 자리도 군왕이 주는 녹봉도 싫다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사람을 보내 이 두 형제를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주공() 단()은 그 두 사람은 모두 성현인데 왜 죽였냐고 물었다. 강태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이 군왕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면 그들을 기용하여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제후들과 교류도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을 사신으로 활용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농사를 짓고 우물을 파서 먹고 마시겠다고 하니 상벌도 그들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큰 명망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지혜가 있다한들 써먹을 수 없습니다. 또 군주의 녹봉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유능하다한들 공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관리도 싫고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군주가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것은 녹봉과 형벌 아닙니까? 이런 자들에게 네 가지 수단을 모두 동원해도 소용없다면 저의 법·술·세가 힘을 잃는 것이니 죽이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외저설·우」)"

강태공은 또 이런 말도 했다.

"말 같기도 하고 기린 같기도 한 천하 최고의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그쳐도 달리지 않고 멈추라고 해도 멈추지 않습니다. 왼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고 오른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이라면 주인에게 필요한 공구가 될 수 없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의 표본이 되어 다른 말들도 그것을 본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군주를 위해 소용이 없다면 말 안 듣는 천리마처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재를 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라야 유능한 인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유능한 인재의 기준을 분명하게 정했다. 또 이런 인재들을 기용하고 추천하는 용인의 원칙도 제기했다. 그는 "안으로는 친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고, 밖으로는 원수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법'과 '술'의 요구에 부합하고 재능이 있으며 군주에게 소용이 있다면,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아도, 또 친척이나 원수라도 추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런 '용인' 철학은 지금 보아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깊은 산속이나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감옥에 갇혀 있는 범죄자라도, 요리를 하거나 소를 치는 노예라도 현명한 군주는 그 지위의 비천함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 재능에 근거하여 대담하게 추천하고 임용하여 법도를 밝히고 국가와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여 자신의 몸과 지위를 존엄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진()의 중모현()에 현령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진 평공()이 조무()에게 "중모는 진나라의 요충지이며, 한단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오. 과인은 우수한 관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가장 적당하겠소?"라고 물었다. 조무는 형백의 아들이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평공은 깜짝 놀라면서 "형백이라면 그대와 원수처럼 지내는 집안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조무는 "군주를 위해 국사를 말하는 데 사적인 은혜나 원한 같은 감정이 끼어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진 평공은 또 "중부() 담당관으로는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소?"라고 조무에게 자문을 구했다. 조무는 자기 아들을 추천했다.

이처럼 인재를 추천할 때는 원수나 아들이라고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 이런 예도 소개한다.

해호()가 조간자()에게 자기와 원수인 사람을 재상으로 추천했다. 재상에 추천된 그 사람은 이에 원한이 없어진 것이라 생각하여 사례를 하고자 해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호는 그를 맞으러 나오면서 활시위를 당겨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면서 "당신을 추천한 것은 공적인 행동일 뿐이다. 당신이라면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과의 원한은 사적인 일이기 때문에 원한이 있다고 왕께 당신을 추천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개인의 원한이 공적인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비자는 진()에서 6국을 병합하는 계책을 건의했다. 먼저 원교근공으로 6국의 합종을 깨고 한·조·위를 멸망시킨 다음 다른 제후국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왕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고는 얼마 뒤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한 이사가 진왕 앞에서 "한비자는 한의 공자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시는데, 한비자는 결국은 한을 돕지 진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런데 그를 기용도 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머물게 한 다음 돌려보내는 것은 후환을 스스로 남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구실을 달아 법에 따라 그를 죽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진왕은 사법관에게 명령하여 한비자의 죄를 묻도록 했다. 이어 이사는 다시 사람을 보내 한비자에게 독약을 주면서 자살케 했다. 얼마 뒤 진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한비자를 사면하려 했으나 한비자는 벌써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진왕은 법·술·세를 결합한 한비자의 정치모략을 모두 접수했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실행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비자의 학설이 후세에 남게 되었다.

사마천은 한비자를 두고 일을 단호하게 잘 처리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명쾌했지만 그의 사상은 너무 가혹하고 각박하여 은덕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유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한비자가 『세난』 편을 상세하게 저술했음에도 결국은 진에서 죽음을 당해 그 자신이 유세에 따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몹시 비탄해 했다.

인물소개 한비자

저주받은 '비기'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 그는 인성의 약점과 욕망을 끔찍하리만큼 아프게 지적한 칼날같이 예리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무서운 지성으로 법가 사상을 집대성했고, 그것은 통치술과 제왕학으로 표출되었다.

한비자, 영광과 비극을 한 몸에 지녔던 이 학자는 법가학파의 종합판이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이런 것이었다.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녀야 하며 인민들의 감사를 바랄 필요가 없다. 또한 인민의 원망에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면 정부를 만능으로 만들 수 있다.

한비자가 죽은 뒤 그를 숭배하는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여 『한비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비자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 진시황과 동문수학한 이사는 한비를 죽였지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접수하여 날로 커져가는 그들의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한껏 활용했다.

제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킨 한비자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숱한 오해와 공격의 표적이 되었지만 그만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제왕학과 정치사상을 제시한 인물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권력관계와 그를 둘러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틀'로서 인성()이란 문제를 제기했던 한비자는 존재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간파한 다음 이를 제왕학(통치학)의 권술()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권력론-권술론-제왕학이 그에 이르러 하나로 결합되어 가장 실감나는 이론체계로 확립되었다. 그의 이론은 깨어 있는 시대의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면키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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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초상화

한비자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한비자 [韓非子] - 법(法)은 드러내야 하고, 술(術)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두산백과

한비자

 

 ]

요약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BC 280?∼BC233)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구분 논저
저자 한비
시대 중국 전국시대 말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로, 원래 《한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나라의 한유()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로 추정되는 <오두()> <현학()> <고분()>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나 묵가()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에 즉응()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으로, <난()> <난일()∼난사()> <난세()> <문변()> <문전()> <정법()>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난세>와 <정법>으로, 유가의 덕치론()은 물론 법가()에 속하는 신자() ·신자() ·상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설림()> <내외저설()> <십과()> 등의 제편(). 상고()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의 유()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까지의 한비 후학()들의 정론()으로 추정되는 제편(). 편수()는 가장 많으며 그 중 <유도()> <이병()> <팔간()> 등은 오래된 것이고, <심도()> <제분()>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나 법의 운용(:)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주도()> <양각()> <해로()> <유로()>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육반()> <충효>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로 하여 신하()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 편은 정론()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의 주석()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 <존한()>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 ·한의 법형제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의 22자본()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 [韓非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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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상의 뿌리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사상적으로 법가를 완성시킨 사람은 순자의 제자인 한비였다. 제자는 스승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 유가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어디에서도 스승을 언급한 곳은 없다. 존경해서였으리라. 순자는 평생의 학문적 노력을 통해 제자백가 사상을 집대성하였고, 한비는 뛰어난 머리로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말더듬이였으나 글은 훌륭하여, 진시황이 "오호라!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보고 더불어 놀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사기』 「노장신한열전」)고 할 정도였다.

한비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 의거하여, 우화를 통해 구체적인 방법들을 얘기한다. "상고에는 도덕을 겨루었으며, 중세에는 지모를 쫓았고, 당금은 기력을 다투는데"(『한비자』 「」), 과거와 같은 도덕주의만 지향한다는 것은 토끼가 와서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어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주대토()의 어리석은 무리라고 힐난하며, 또 "의사가 사람들의 상처를 잘 빨아주고 사람들의 피를 입가에 머금는 것"(「」)이나, 수레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라는 현실적 인성론을 제기한다.

또, 한비자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신관계가 매매관계라고 말한 사람이다.1) 그는 군주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고 생각하였고, 신하에 대한 통제 또한 군주의 이익, 즉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절대적 세를 가지고 공평무사한 법을 집행하여야 하며, 효율적인 술로 신하를 통제해야 한다는 법·술·세를 혼융한 법가정치를 주창하였다. 이 입장에서 그는 초기 법가 노선을 비판하였다. 상앙은 법은 알았으나 술이 없어 법 또한 다하지 못했으며, 신불해는 술은 알았으나 법에 통달하지 못해 술 또한 다하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2) 또, 신도의 세에 관한 주장은 미진했다고 보았다.3) 특히 한비자는 신하 제어술에 대하여, 노자사상을 흡수하여 독보적인 권모술수의 경지를 열었다.4)

한편 한비자는 정치에 관한 논의, 특히 조국 한나라의 정치 상황을 감안한 강간약지()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국부는 농사에 달려 있다"(「오두」)는 주장에서처럼 경제 방면의 중본억말() 사상 또한 대단히 구체성을 띠고 있다. 자연의 규율에 따르고, 농사철을 위배해서는 안 되며, 땅을 다루는 농사 지식을 익히도록 하고, 새로운 농사 도구를 개량하고, 낭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등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에 집중하였다.

전국시대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법가는 그 변동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고, 가장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들은 전쟁과 형벌을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로 여겼다. 전쟁을 통해 천하통일을 하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고, 형벌을 통해 사회적 죄악이 없어지면 마침내 형벌도 없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또, 실용적인 지식이나 법을 해석하는 관리만을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고 일체의 학문사상을 금지시키라고 주장한다. 한비자와 같이 순자에게 동문수학한 이사는 진시황의 재상을 하면서 강력한 법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군주 전제제도와 중앙 집권에 큰 공헌을 하여 중국을 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문화 이상의 결여로 법가사상 자체는 생명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중국사상의 뿌리)

============================================///참고...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韓)나라에 살던 공자(公子)로 한왕(韓王) (安)의 서자로 태어났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의 한유를 한자라 부르게 되면서, 유가가 아닌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의 우선순위가 낮기 때문에 한자 쪽을 이름 전체를 넣어서 한비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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