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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삭발을 한 윤동주...
2019년 11월 24일 20시 35분  조회:2663  추천:0  작성자: 죽림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 도쿄편⑦] 윤동주의 일본 유학 시절

[오마이뉴스 김보예 기자]





...이어 일본에서 윤동주의 학창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윤동주의 유학 시절은 크게 도쿄에서의 생활(릿쿄대학, 立敎大學)과 교토에서의 생활(도시샤대학, 同志社大學)로 나뉜다. [도쿄편⑦]과 [도쿄편⑧]에서는 릿쿄대학 재학 시절의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도쿄, 미션스쿨 릿쿄대학에 입학한 윤동주

윤동주는 고종사촌이자 단짝인 송몽규와 함께, 1942년 1월에 교토제국대학(현재 교토대학)에 입시 시험을 본다. 그러나 송몽규만 합격하고, 윤동주는 떨어진다.

윤동주는 차선으로 릿쿄대학의 입시를 다시 보고, 릿쿄대학의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윤동주와 송몽규가 유학 입시로 인해 처음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릿쿄대학은 기독교 신교의 한 교파인 '성공회(聖公會)'에서 경영하는 미션스쿨이다. 송우혜의 저서 <윤동주의 평전>(2014, 시정시학)에 의하면, '성공회'는 당시 통치자였던 쇼와(昭和) 일왕의 친동생 중 한 명이 영국 유학 중에 성공회 신자가 되어 돌아옴으로써 황실의 배경을 갖게 되었다.

때문에 '성공회(聖公會)'는 신사(神社)와 황실(皇室)이 숭상되고 불교(佛敎)가 치성인 일본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릿쿄대학은 이런 튼튼한 배경 아래 경영되고 있는 좋은 대학이었다.
 
▲ 릿쿄대학 전경 .
ⓒ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그러나 윤동주가 실질적으로 릿쿄대학에 다닌 기간은 매우 짧다. 릿쿄대학의 학적부를 보면 '1942년 12월 퇴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봄학기가 4월 시작, 가을학기가 10월인 것을 생각하면,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실제로 1942년 가을학기(10월)부터는 교토에 있는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에 다니기 시작한다.

윤동주는 7월 하순, 여름방학을 맞아 약 2주간 북간도 용정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윤동주의 모친이 병환 중이었는데, 모친의 병석 가까이에서 이야기 동무를 해 드리고 있을 때, 일본에서 전보가 왔다고 한다. 도호쿠제국대학(현재, 도호쿠 대학)에 재학 중인 친구(한국인)가 본인 대학의 편입 수속을 치르러 오라는 전보였다.

편입 시험 등 각종 수속을 치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는지, 윤동주는 급히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처음부터 윤동주는 릿쿄대에 계속 다닐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공식 나라명은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대학 이름에 '제국(帝國)'이 들어가면 명문국립대학이었다. 명문 학벌에 대한 선망이 만연했던 당시, 윤동주의 부친은 윤동주가 제국대학 중 하나에 다니길 바랐다.

그러나 윤동주가 옮겨 간 곳은 교토에 있는 사립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이었고, 전보를 받은 윤동주 부친은 노여워했다고 한다. 윤동주는 북간도 집으로 가기 전부터 도시샤대학에 전학 갈 예정이었으나, 제국대학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부친에게 차마 말을 못 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7월 하순, 윤동주의 도쿄 하숙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는 교토로 내려갈 이삿짐을 꾸렸다고 한다.

윤동주가 릿쿄대학을 떠난 사연, '교련 수업 거부'

윤동주 왜 이토록 급하게 릿쿄대학을 떠났을까? 릿쿄대학도 좋은 사립 미션스쿨이기에 또 다른 사립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으로 굳이 전학을 갈 필요가 없었다. 윤동주가 교토에 있는 학교로 옮겨간 이유로는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는 송몽규의 영향을 많이 꼽는다. 물론 송몽규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교련 수업 거부'로 보인다.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씨는 1942년 4월 10일 자 <릿쿄대학 신문>으로부터, '學部斷髮令四月中旬實施'(학부 단발령 4월 중순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 학생 중에서 교련을 거부한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군국주의 사상이 세간을 지배하고 있을 때, '교련 수업 거부'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영화 <동주>에서도 '교련 수업 거부'로 반삭발을 당하는 윤동주가 묘사된다. 실제로 윤동주가 거행한 '교련 수업 거부'는 교련복을 입지 않은 채, 교련 수업에 출석한 것이었다.
 
▲  영화 ‘동주’ 속 교련 수업 거부로 반삭발 당하는 윤동주(강하늘 역)
ⓒ (주)루스이소니도스

 
1941년 가을, 육군 대좌 이지마 노부유키(飯島信之)가 릿쿄대학의 군사훈련 담당 교관으로 배속된다. 남학생들은 누구나 매주 1시간씩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송우혜의 저서 <윤동주의 평전>(2014, 시정시학)에 의하면, 그는 릿쿄대학에 오기 전에 같은 기독교 학교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대학에 있을 때도 어찌나 횡포가 심했는지, 그가 릿쿄대학으로 옮겨갈 때 메이지대학에서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릿쿄대학의 학생 중, 이지마 대좌에게 미움을 사 '교련 출석 정지' 조치를 당하고 '징병 연기'가 취소되어, 군대에 입대한 학생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군국주의가 일본의 모든 대학에 만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7월 하순, 윤동주가 고향집 북간도를 방문했을 때, 송몽규도 맞추어서 일시 귀향한다. 이때, 윤동주와 송몽규는 다른 친지들과 함께 1942년 8월 4일에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 속에 반삭발한 사람은 윤동주뿐이 없다. 윤동주가 이토록 급히 릿쿄대를 떠난 것은 '교련 수업'에 대한 반감으로, '교련 수업'이 거행되지 않는 교토 지역으로 옮겨 간 것으로 보인다.
 
▲  1942년 8월 4일, 마지막 귀향 때, 남긴 사진. 뒷줄 오른쪽 반삭발 머리가 윤동주, 앞줄 가운데 안경을 낀 사람이 송몽규다. 송우혜의 저서 <윤동주의 평전>(2014, 시정시학)에 올려진 사진 재촬영.
ⓒ 시정시학

 
윤동주가 애정한 과목 <동양철학사>, 1104호 교실

릿쿄대학에서 윤동주가 이수한 과목을 살펴보면 봄학기에 <영문학 연습-85점>,<동양철학사-80점>으로 단 두 과목만 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릿쿄대학에서 수강한 과목 중, <동양철학사>는 윤동주가 가장 애정한 수업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가 동양철학사를 들은 교실은 릿대교대학 정문에서 보이는 건물 1층에 있는 1104호 교실이다. 릿쿄대학 교목 김대원 신부님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의 1104호 교실은 당시의 작은 교실 2개를 이어 넓게 만든 것이라고 하니,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의 1104호 교실은 지금의 약 절반 정도의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 윤동주가 <동양철학사> 수업을 들은 릿쿄대학의 1104호 교실 .
ⓒ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윤동주는 일본 유학 시절 한국에서 있었을 때보다, 더 많은 시를 지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1944년에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 <독립운동> 죄'로 체포되었을 당시, 거의 모든 시가 압수되어 처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 시절 습유작품(拾遺作品)으로는 '흰 그림자' '사랑스런 追憶(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여진 詩(시)' '봄' 이렇게 5편의 시가 있다. 5편의 시 모두, 릿쿄대학 재학 시절에 적은 시이다. 위의 5편의 시가 압수되지 않은 이유는, 위의 시만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당시, 친우였던 강처중에게 한국으로 우송(郵送)하였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유학 시절 습유작품 중, '쉽게 씌여진 시'에는 '노교수의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구절이 있다. 연구자 야나기하라 씨는, 시 속의 '노교수'는 <동양철학사>를 가르친 우노 데쓰토(宇野哲人) 교수라고 밝혔다. 우노 교수는 일본 동양철학계의 거목이자 도쿄제국대학의 명예교수로, 당시 릿쿄대학에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였다.

이쯤해서 영화 <동주>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속에 나온 교수는 누가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

(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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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2019년9월16일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용정시에서는 길가에 우뚝 솟은 웅장한 바위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그 유명한 '선바위'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사격훈련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선바위가 내려다보는 마을이 있으니 바로 '명동촌'이다. 이곳은 북간도 한인 문화의 발상지로 불리운다. 북간도로 옮겨와 새로운 터전을 다졌던 한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까닭이다. 

명동촌은 한국 근대사에서 눈에 띌 만큼 모범적인 공동체로 평가된다. 이곳은 민족교육의 산실이었고 이상적인 기독교 신앙촌이었다. 명동촌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신분의식을 타파하고 평등주의와 같은 시대정신을 꽃피웠다. 바로 이곳 명동촌에서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났다.

한반도에서 북간도로 넘어와 명동촌을 터전으로 다진 1세대에 이어 등장한, 윤동주가 포함된 명동촌 2세대는 부모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다. 특히나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일궈낸 승리의 기쁨은 물론 패배의 아픔까지 모두 듣고 자란 그들은, 민족 의식과 기독교 사상이 결합한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몸에 익히고 자랐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윤동주의 삶과 사상을 압축해 놓은 듯한 '서시'는 분명 이러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리라.

◇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관념 아니라 뚜렷한 의미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여느 명동촌 집안처럼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지식을 쌓고 삶의 태도를 다졌다. '십자가'와 같은 그의 시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기독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윤동주는 1936년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시, 시, 산문 등을 발표하면서 시집 간행의 꿈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러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시인으로서 윤동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는 극에 달한 일제의 탄압 탓에 한국어 사용과 창작이 금지됐던 시기다. 1941년 윤동주가 우리말 시집 출간을 추진하다가 무산된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 결국 그의 사후인 1948년, 어렵사리 보존된 육필 원고가 친지들의 도움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윤동주의 생을 대변하는 시들은 그렇게 빛을 봤다.

익히 알려졌듯이 윤동주 시에는 '하늘'이 자주 등장한다. 윤동주 연구에 천착해 온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을 크게 세 가지 의미로 풀이한다.
 

그 첫 번째는 '맹자'에 나오는 하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의미는 '자아성찰의 대상'으로서 하늘이다. "(윤동주 시)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의미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 "윤동주 정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줘"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시인 윤동주는 자신이 발 붙인 시대, 그리고 그 험한 시대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을 향했던 두 눈과 가슴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시들은 그 뚜렷한 증거다.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며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윤동주의 시는 치열한 자아성찰을 담고 있다. 김 교수 표현을 빌리면 윤동주는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서시'를 두고도 김 교수는 "결국 윤동주 정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준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언론, 논문이 윤동주를 '자아성찰' 안에 가두고 있다"며 "윤동주는 그야말로 혁명의 시인"이라고 강조했다.

그 근거로 김 교수는 윤동주 시의 구절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시 '십자가' 중에서),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시 '간' 중에서) 등을 들었다.

김 교수는 "윤동주처럼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냉철하고도 고독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을 방 안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쪼개어 자기 능력껏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꼭 정치적 행위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피는 사회 그 자체가 곧 혁명이라고 믿는다. 윤동주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혁명적 존재"라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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