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시의 세계
2019년 11월 29일 작성자: 강룡운
황홀한 시의 세계
□ 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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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했다. 소학교 다닐 땐 동요 동시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조기천의 시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때 우리 학교의 한 선생님은 휴교일이면 자주 학교에 나와 조용한 교무실에서 우람찬 목소리로 조기천의 시를 랑송하군 하였는데 격정에 차넘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나도 가끔 선생님처럼 시랑송을 해보면서 시의 황홀경에 빠져보았다.
그 시절엔 무턱대고 시를 좋아하였기에 그저 손에 닥치는 대로 뿌쉬낀이며 레르몬또브며 이싸꼽쓰끼의 시집들을 들고 다니면서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래도 열심히 읽군 하였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해서는 김소월의 시에 흠뻑 빠져 그 아름다운 음률에 심취된 듯 때로는 시를 쓴답시고 무병신음 (无病呻吟)도 해보았고 한때는 마야꼽쓰끼와 하경지의 시를 흔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공이 중국문학이다 보니 주로는 당송시사(唐诗宋词)를 많이 접하게 되였고 ‘문화대혁명’ 때는 모택동의 시사를 최고의 시로 간주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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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도 명색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그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점점 시를 멀리하게 되였다. 왜 이렇게 되였을까? 그것은 줄곧 전통시만 읽어오던 나로서는 현대시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태여나는 시들을 보게 되면 아무리 읽어봐도 도통 그 뜻을 리해할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지금은 다들 이미지시를 현대시라고 지칭한다. 한 시인이 쓴 《이미지》란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말짱 처음 보는 것들이구나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니고
죄다 이 생 저 생에도 없는 것들
불과 물의 살놀이로 태여난 이쁨들아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닌 이런 시구들을 도대체 어떻게 리해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차츰 시와는 담을 쌓고 일찌감치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래서 정년퇴직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잡지나 신문지상에서 시를 보게 되여도 아예 곁눈조차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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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간 나는 북경, 청도, 무석 등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면서 만년을 보내게 되였는데 금년 여름엔 무석이란 고장이 어찌나 무더운지 무작정 피서하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길에 와서 우연한 기회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2007년 4월에 출간한 최룡관 저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책을 손에 쥐게 되였다.
범굴에 들어가야 범새끼를 잡고 배를 먹어봐야 배맛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만년에는 흔하디 흔한 게 시간이고 날마다 남아 도는 게 시간인지라 나는 어디 한번 시간을 허비해볼 셈 치고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이 범의 굴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작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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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룡관 시인이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알심들여 집필한 《이미지시 창작론》은 수많은 동서고금의 명시들을 이미지즘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48만자에 달하는 현대시론에 관한 전문적인 문학저서로서 우리 연변에선 물론, 중국조선족문단에서도 미증유의 거작이였다. 그래서 나는 최룡관 시인이 우리 겨레 문학 발전을 위하여 큰 일을 해놓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자유문학》 문학계간(季刊)이 2008년 가을호 69기부터 시작하여 2011년 여름호 80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3년동안이나 12기에 나누어 연변 조선족시인이 쓴 시론 《이미지시 창작론》을 련재했다는 것은 두말할것없이 이 책의 무게를 잘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최룡관 시인이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 현대시의 세계는 어쩌면 사람들에게 낮설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한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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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먼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한 시인의 대표작부터 읽어보자.
하아얀 너울을 쓴
수천만 가수와 악사들
휘우듬히 반원으로 둘러서서
장엄한 교향곡을 울린다
튕기는 하아얀 목소리에
하아얀 악음에 젖어
속세의 어지러움과 소음
쥐죽은 나라로 달아나고
청신과 순수만 메아리쳐
구중천을 휘젓는다
천만년 부르고 불러도
끝이 없는 다부작 연주
그속에서 한번만 젖어봐도
혼령마저 시원히 가셔지는
너그러운 대자연의 교향곡이여
이것은 최룡관 시인이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김응준님의 수많은 시 가운데서 그의 대표작으로 점찍은 “나이아가라폭포”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폭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한마디도 없다. 제목에 ‘나이아가라폭포’란 명칭이 있을 뿐 본문에는 폭포라는 언어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 시가 바로 이미지시, 바꾸어 말하면 현대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훌륭한 현대시도 온통 변형투성이라는 리유 때문에, 그리고 전통시처럼 쉽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리유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외면하여 왔다. 그런데 최룡관 시인이 펴낸《이미지시 창작론》을 읽고나니 김응준 시인의 “나이아가라폭포”를 비롯하여 김철 시인의 “대장간 모루우에서”, 조룡남 시인의 “옥을 파간 자리”, 리상각 시인의 “파도” 등 현대시 대표작품들이 차츰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고 비록 아직까지는 많이 미흡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리해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현대시들의 묘미에 대해서도 재삼 음미해볼 수 있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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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의 골짜기 파란 잔디밭에서 고독의 피스튼이
작업한다 한쌍 꽃망울의 향로에 취하여
무아의 황홀이 퍼득거림이여 비탄의 발광속에서
하늘의 열림이여 대지가 태여남이여 부옇게
휘여든 하늘에서 흐느끼는 구름구름 훨훨 태양의
힘찬 날개짓 아늑한 자장가의 부드러운 바람결에
별들이 익어가는 소리 생성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대지의 희열이여 면면한 산발은 그대 기발의 물결이런가
오색이 피여나는 오색의 소리는 그대의 아름다운 노래런가
이것은 최룡관 시인의 “고독의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한 부분이다. 몇번 읽어봐도 무엇을 썼는지 잘 리해가 되지 않는다.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으면서도 알듯말듯 아리숭하고 몽롱하다. 하지만 참 아름답다. 게다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시이므로. 독자 나름 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있기에 각양각색의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시를 예술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만약 자연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을 생각나는 그대로 직설한다면 그것 역시 문학이 아니다. 신이 만들어낸 이 세상 만물 중에는 직선이라는 게 없다. 곡선미가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다. 직선은 예술이 아니다. 미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게끔 직설적으로 씌여진 시는 문학이 아니다.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자가 독자에게 전혀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례외없이 미를 추구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예술의 궁국적인 미적 감수는 애오라지 수용자의 상상과 재구성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 미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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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온 세상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피카소의 일부 대표작들을 감상하면서 나도 남들처럼 그것들이 어찌하여 그렇게 엄청난 천문학적인 수자로 헤아려지는 값어치를 지니게 된 명화들인가를 리해해보려고 무등 애를 써보았다. 그런데 그 게 다 허사였다. 아직까지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마냥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미스터리, 아니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읽었던 피카소에 관한 한 일화가 매우 인상적이였다.
누군가가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그림은 어찌하여 그렇게 알아보기 힘든 겁니까?” 그러자 피카소가 되려 그 사람에게 물었단다. 그들의 일문일답은 아래와 같다
“당신은 새의 지저귐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까?”
“예, 듣기 좋았습니다.”
“그럼 그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까?”
이 일문일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2015년 9월 15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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