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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韶濩堂). 개성 출신으로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익복(益福)의 둘 째 아들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장에서 이름을 떨쳤고 17세에 성균초시(城均初試)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개성인을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과 무반 가계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20대 초반에 서울에 와서 이건창(李建昌)과 교유하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황현(黃玹)과 더불어 신헌(申櫶)의 아들인 신정희(申正熙)의 식객 노릇을 하며 지냈다. 1883년 김윤식(金允植)의 소개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인 장건(張騫)을 알게 되었는데 장건은 뒷날 김택영의 중국 망명을 주선하게 된다.
1891년 여론의 압력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가문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그 뒤 갑오경장으로 벼슬길이 열려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1903년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으로 임명되어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5년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장건의 주선으로 남통(南通)에 있는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하였다.
김택영은 시와 문이 모두 대가의 반열에 드는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중국에 망명한 뒤에도 국내의 문단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한문학 분야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망명지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한문학을 중국에 소개하는데 진력하는 한편 그와 교유한 남방의 문인들로부터 양계초(梁啓超)에 필적하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김택영은 청나라의 시인 왕사정(王士禎)에게 깊이 경도하여 그의 신운설(神韻設)을 자신의 문학론으로 소화하여 시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또한 산문에서는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을 모범으로 삼고 자신의 독자적 문체를 개발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국내의 문인으로는 시에서는 신위(申緯), 산문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는 바, 신위와 박지원이 시와 산문 분야에서 각기 조선 제1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데는 김택영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신위시집≫과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抄≫등을 편찬하여 한국 한문학의 진수를 중국에 알리는데 공헌하였으며, 지기인 이건창과 황현의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망국의 한을 노래한 다수의 시편을 남겼다. 김택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고려 유민(遺民)의식이다.
이는 조선 5백년 동안 외면 당해온 개성인의 의식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택영은 중국인들에게 한국 역사를 소개할 목적으로 ≪한사경 韓史綮≫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이성계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여 국내에서 많은 물의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개성 출신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숭양기구전 崧陽耆舊傳≫을 집필한 것도 이 고려 유민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한국소사 韓國小史≫, ≪한사경 韓史綮≫, ≪교정삼국사기 校正三國史記≫가 있고 시문집으로는 ≪창강고 滄江稿≫와 ≪소호당집 韶濩堂集≫이 있다.
[ 金澤榮 ]
조선후기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창강고(滄江稿)』 등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는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김익복(金益福)이고,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소년시절부터 고문과 한시를 공부해서 1866년(고종 3) 17세의 나이로 성균초시(成均初試)에 합격했다. 20대 전후에 이건창(李建昌)과 교유를 가지면서 문명(文名)을 얻기 시작했다. 34세인 1883년(고종 20) 김윤식(金允植)의 추천으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첸[張騫]과 알게 되었다. 장첸은 그의 시문을 격찬했다.
1891년(고종 28)에 42세로 진사가 되고, 1894년(고종 31)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고종 32) 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지내고 이듬해 낙향했다. 1903(광무 7)년 다시 홍문관 찬집소(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속찬위원(續撰委員)으로 있으면서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5년(광무 9)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이 해 겨울에 사직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5년(광무 9)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양쯔강[揚子江] 하류 난퉁[南通]에서 장첸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창작활동과 병행해서 한문학에 대한 정리·평가와 역사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승만(李承晩) 등과 관계가 있어 중화민국정부에 우리나라 독립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썼다.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장핑린[章炳麟]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김택영은 한문학사의 종막을 장식하는 대가로서 시에서의 황현(黃玹)과 문(文)에서의 이건창과 병칭된다. 그는 고문가(古文家)로서 문장일도(文章一道)를 주장하였으며,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이것이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화려하여 신운(神韻)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중국 망명 이후에는 주로 우국적인 시작품을 많이 썼다. 특히, 망국의 한을 작품 속에 담아 내어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 하였다. 「오호부(嗚呼賦)」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문은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과 박지원(朴趾源)의 문장을 좋아하여 웅혼한 기상이 있다. 저서로는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창강고(滄江稿)』와 『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詩有聲先而意隨者。如明月松間照。若就明字。易以皎字或寒字。可能有天然之意乎。亦有意先而聲隨者。如愁思看春不當春。若將一春字。作椿字讀。則雖利口。必不能諧律矣。
시에는 먼저 소리가 있고 뜻이 따라가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명월송간조(밝은 달이 소나무 사이를 비춘다)”에서 明자를 皎나 寒으로 바꾼다면 천연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마는 그것은 또한 뜻이 먼저요 소리가 따르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추사간춘부당춘(시름겨운 생각에 봄을 보아도 봄인 것 같지 않다)”에서 만약 春 한 글자를 가져다가 椿으로 하여 읽으면 비록 발음에는 이롭겠지만 반드시 음률에는 맞지 않는다.
吾邦盖在上古之世。只有方言而無文字。其有文字自箕子始。則吾邦字音。卽箕子之所授也。而今其字音。與中國大異而小同者何。吾嘗思之。盖始同而後變耳。安徽王饒生聞余讀書曰。某字某字。是中國之古音。夫中音有古今之變。則東音何獨不然。故今之不同者。卽互失其本音故也。惟吾邦入聲字音。似與中國絶異。然徐而尋之。特其音太猛而已。亦未甞絶異也。
우리나라는 대개 상고때에 단지 방언만 있고 문자는 없었다. 문자가 있게 된 것은 기자로부터 시작하니 우리나라 글자의 음은 기자에게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글자의 음이 중국과 매우 다르고 같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생각해 보니 대개 처음에는 같다가 나중에 변했을 뿐이다. 안휘의 왕요생이 내가 글 읽는 것을 듣더니 말하기를 “무슨 무슨 글자는 중국의 고음입니다.”하였다. 무릇 중국의 음이 고금의 변화가 있었으니 우리나라 음이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는가? 서로 그 본음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오직 우리나라의 입성 글자의 음은 중국과 완전히 다르지만, 천천히 찾아보면 특별히 그 음이 매우 사나울 뿐이지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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