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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엄마의 일기
2015년 04월 30일 10시 27분  조회:1685  추천:1  작성자: 견이
엄마의 일기

2008. 3. 2
일기라는 걸 써본지가 언제던가… 일기장을 펼쳐 놓으니 눈물부터 앞선다.
나이 일흔이 다 돼서 새삼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언제부턴가 집안에 열쇠를 두고 출타하지 않으면 이것저것 깜빡깜빡 까먹기 일쑤고 오늘은 동대문에 갔다가 무엇을 사러 갔던지 생각나지 않아서 반나절 헤매고 다니다 양말 한 켤레 달랑 사들고 왔다. 치매가 올 조짐임에 틀림없다.
언젠가 TV에서 일기쓰기가 치매 예방에 도움 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방 한구석에 덤덤히 쌓여 있는 자료들을 바라보노라니 눈물만 난다. 내가 벌써 치매라니?! 아직 할 일이 많은 몸인데…….
X 연구를 시작한 지도 벌써 1년 하고도 10개월. 두 달이 모자라는 2년이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마침내 X의 기본체계와 규율을 파헤쳤고, 나아가서는 그 구체적인 룰과 내재된 비밀까지 대체적으로 파악했다.
드디어 실천에 옮길 때가 된 듯싶어서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첫 도전에 그만 오발했다. 계산은 옳게 했는데 Q를 잘못 써먹은 것이다. 두 번째 도전 역시 간발의 차이로 빗나갔다. 너무 안타깝고 맹랑해서 가슴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였는데…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 보기가 부끄럽고 미안하다.
우선 묵묵히 말없는 응원을 보내주는 그이에게 죄송하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극구 반대하고 구박하는 애들 볼 면목이 없다.
아직 내 노력이 부족했단 말인가? 하느님께서 아직 내 정성, 내 간절한 소망에 동요되지 않으셨단 말인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힘껏 머리를 외친다.
아니다! 아직 무언가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한층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이제 이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리가 부실해서 남들처럼 막벌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파고들어야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하지 않았던가!



2008. 3. 6
오전에 병원에 다녀왔다. 얼마 전부터 눈앞이 뿌옇고 침침해지는가 싶더니 요즘 들어 안경 없이는 TV화면에 자막도 알아보기 힘들다. 안약이나 처방받을 요량으로 안과에 갔더니 백내장이란다. 그것도 증세가 심각해져서 하루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앞으로 1년을 못 가 완전 실명할 수도 있단다.
 
엎친 데 덮친다고 실명이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런다고 당장 수술해달라고 들이댈 수는 없는 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의사한테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그냥 잘 알겠다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왔다.
아직 할 일이 많은 눈인데… 온전히 해놓은 것도 없는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거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다지만, 억울하고 서글프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볼 사이도 없이 허둥지둥 앞만 바라고 뛰어왔다. 젊은 시절 욕심을 부려 그 어려운 시기, 임시공 신세에 아이 셋씩이나 낳아 키운 탓에 사람들 말밥에 오르내리며 별의별 고된 일을 다 했고, 그 미열로 얻은 지병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규직에 배치되고 남부럽지 않은 공정사 자격증도 따냈고, 밖에서는 남자들도 설설 기는 실력자로, 가정에서는 현처양모에 손색없이 성심껏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렇게 젊어서 애들을 너무 호강시킨 탓인지 우리 애들은 다른 집 애들보다 늦됐다. 게다가 눈에 흙이 들어가도록 시름 놓지 못할 병신자식까지 있으니…….
사람들은 자식 인생은 자식 몫이고 불쌍한 건 불쌍한 거지만, 그런다고 자기 인생 전부를 자식한테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도 팔자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지, 정작에 병신자식 하나 있고 보면 그런 말이 쉬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이 병수발 때문에 일찍 퇴직했지만, 우리 두 사람의 퇴직금으로 노후를 보내기에는 아무 걱정이 없다. 큰애와 막내딸도 성가하여 저들끼리 잘 살고 있어서 큰 걱정이 없다. 병신 된 둘째가 걱정일 뿐이다. 절로 끙끙거리며 글도 쓴답시고 애쓰고 있고, 언제는 무슨 문학상까지 타 와서 우리를 놀라게 한 적도 있지만, 나이 40이 다 되도록 장가들지 못했으니 걱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남들은 자식 잘 둔 덕에 세계유람도 다니고 한다지만,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한시도 지체 말고 돈을 벌어야 한다. 꼭 성공해야 한다!
둘째가 그렇게 어이없이 병신이 되지만 않았어도, 그이가 한창시절에 그렇게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내 팔자는…….
속절없고 덧없는 인생이라더니…….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다. 일흔이 다 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일흔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건만…….
그래, 다 팔자소관이다. 그런 자식 두게 된 것도 정해진 내 팔자이거늘 이제 남은 시간을 이 일에 올인하는 길밖에 없다.
오후부터 X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분석하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요행을 바라는 건 장대로 하늘 재기. 아직 내 노력이 부족한 거다. 하루속히 이것들을 정복해야지!




2008. 3. 16.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걸까?
사랑하는 남편과 병신자식까지 내버려둔 채 부득부득 우기고 왔는데 성공은 갈수록 묘연하기만 하다. 금방 손에 잡힐 것 같아서 손을 뻗으면 또 저만치 앞에서 손짓한다.
 
남들은 매일같이 돈만 잘 번다는데… 부실한 다리 때문에 남들처럼 일도 못하고 하루하루 적자만 늘어가고 있으니… 정녕 하느님은 이렇듯 매정하게 내 꿈, 내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속셈인가? 암만 생각해도 억울하고 하느님이라는 작자가 야속하기만 하다.
그이가 보내준 돈도 이제 거의 바닥났으니… 이젠 일거리를 찾아 경비를 충당해야겠다. 萬難을 물리치고 끝을 봐야 한다. 그냥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



2008. 3. 29
이제 다시는 울지 않겠다. 지금이 어디 눈물 쥐어짜며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을 땐가!
아까 초저녁에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당장 돌아오라!”고 호통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봄이 오기 전엔 꼭 돌아가마고 약속했는데… 기다리다 못해 폭발한 거겠지? 무척 격앙된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어물어물하다가 전화를 끊고 말았다.
나도 조급하긴 마찬가지다. 27만원짜리 월세 방에 들어 살면서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일을 못하는 한, 암만 아껴 쓴다 해도 월 40~50만원은 고스란히 까진다.
이제나 저제나, 이번엔 꼭! 하고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가도 그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면 허탈하고 원통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행여나, 이번에야 되겠지 하는 생각에 또 하회를 기대하게 되고…….
그이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보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가는 병신자식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끼니, 빨래까지 도맡아 해야겠으니 오죽하겠는가…….
나라고 왜 하루빨리 내 남편, 내 새끼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발편잠 자고 싶지 않을까만, 시한부 생명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 일뿐, 모든 희망을 이 공정에 걸고 이날 이때까지 견뎌왔는데… 설령 운명의 조롱이라 하더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월요일부터는 식당일이라도 해서 경비를 마련해야겠다. 여태 부실한 다리 때문에 일할 엄두를 못 냈지만, 오늘 열심히 치료하면 곧 나을 거라던 의사의 말에 신심이 생겼다.
그리고 오늘은 그 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X의 아주 중요한 룰을 찾아냈다. 여태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알 것 같다.
그렇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거늘 그 동안 들인 공력이 얼마인데… 이제 성공의 그 날이 곧 다가오리라!
그런데 왜 이러지? 못난 눈물이 어느새 안경알에 흥건히 고여 있다. 다시는 울지 않기로 했는데…….
여보, 조금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줘요. 지금까지 잘 참아오셨잖아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조금만… 사랑해요.



2008. 4. 1
 
월요일부터 일자리를 찾아 "벼룩시장"이며 가로수와 교차로 전선대들에 붙여놓은 구인광고들을 이 잡듯이 훑고 다녔다. 눈에 띄는 내용들에 빨간색 볼펜으로 체크를 해가며 일일이 전화를 해봤는데 대부분 연령제한이라는 조건을 내세워서 맹랑했다.
선택의 여지는 극히 적었다. 출근시간대와 식당별로 전화를 해서 두세 곳에 면접을 가보았는데, 처음으로 면접 보러 간 돈까스점은 전화에서 초보자도 가능하고 교포도 환영한다 해서 잔뜩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여사장이 "60세 이하라고 밝혔는데요!" 하고는 바쁘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이를 속일 때도 이젠 지났구나 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동대문에 위치한 돈까스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원래 130만 이상이라던 월급을 나에겐 120만원밖에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일하고 그런 차별을 당할 수야 없지 싶어 그냥 나와 버렸다.
이튿날 다시 신촌현대백화점 맨 위층에 있는 돈까스점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선 나이제한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촌백화점 맨 위층은 "전주비빔밥집"이 대부분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목적하고 갔던 돈까스점을 찾다가 우연히 "전주비빔밥집" 본점의 구인전단지가 눈에 띄는 바람에 금세 생각이 바뀌어 "전주비빔밥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러다 신호가 가는 순간,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주비빔밥집"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전주 출신일 것이고, 우리 어머니가 전주 이 씨에 전주 출신이 아니던가?!
수화기 저편에서 사장이라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최대한 애교 어린 투로 말했다.
"저어, 저는 전주 이 씨인데요. 교포이고 낯선 고국 땅에 와서 서먹서먹하던 차 이렇게 한 고향 분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기쁘고 반갑네요……."
수화기 저편에서 여사장이 잠깐 뜸 들이는 듯싶더니 지금 바로 면접을 오라는 것이었다.
옳거니! 하고 부랴부랴 그리로 달려갔다. 아주 친절하게 나와 이 말 저 말 주고받던 여사장은 오늘부터 이틀간 시험 삼아 일해본 다음 결정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 삼아 해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망설여졌다. 아까 현대백화점 위층에 위치한 돈까스점이 여기보다 일도 더 쉬울 것 같았고 무엇보다 그 희미한 불빛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내 얼굴에 얼기설기 늘어앉은 주름살들이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라면 너무 선명하게 나타나진 않을 테니까.
내가 쭈볏거리며 대답을 않자 여사장은 지금 한창 바쁜 시간이라 훗날 다시 연락하자며 자리를 떴다.
비빔밥집에서 나와 다시 신촌현대백화점에 위치한 돈까스점으로 갔는데 그곳 사장은 무척 바쁜 모양, 나와 몇 마디 간단히 주고받고 나서 훗날 다시 전화로 연락하마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아까 "전주비빔밥집" 여사장이 시험 삼아 해보라고 할 때 제꺽 대답했을걸~ 하고 냉가슴만 앓았다.
오늘까지 이틀이 지나도록 기다리던 전화는 아무 데서도 걸려오지 않았다.




2008. 4. 3
어제 전단지들을 훑고 다니던 중 이태원에 위치한, 집에서 도보로 30분 거리 되는 곳에 위치한 김밥집에 가서 면접을 봤는데 사장님이 이튿날 바로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곳은 말이 김밥집이지 실상은 얼추 30~40가지나 되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짬뽕 가게였다. 그리고 나는 명색이 주방보조였지 실은 무엇이든 시키는 일은 다 해야 하는 잡역부였다. 그러다보니 간혹 손님이 없을 때에도 앉아 쉴 틈이 없었다. 내가 받기로 한 월급은 135만원, 그나마 주방장에 비하면 많은 편이었다. 그 집에서 4년째 일한다는 주방장의 월급이 겨우 150만원이었으니……. 주방장 역시 나와 같은 연길 출신의 교포였는데 요즘 그 정도 실력이라면 170~180만원은 충분히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비록 경력은 짧다지만 불고기집에서부터 한식집 등을 전전하면서 한국음식을 만드는 법에 익숙해서 주방보조 역할을 하기엔 손색이 없다.
그나저나 이젠 일거리가 있어서 한시름 놓인다. 지갑에 달랑 3만원 남짓 간들거리는데…….




2008. 4. 6
오늘 김밥집을 그만두었다.
12시간 내내 잠시도 앉아 쉴 틈 없이 일해야 했던 터, 내 부실한 다리로는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주방장도 계속 같이 일해주었으면 했지만, 나는 다리가 부실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나흘 수당을 받고 나왔다.
그런데 좀 전에 김밥집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일당 6만씩 쳐주겠으니 사람을 찾을 때까지만 하루 이틀 더 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다.
며칠 동안 같이 일한 것도 인연인데 싶어서 대답하고 말았다.




2008. 4. 11
김밥집을 그만두고 다리 때문에 이틀 쉬다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중, 그날은 운이 좋았던지 월 150만원을 받기로 하고 양대창집에서 일하게 됐다.
그 "양창구이집"은 금방 개점한 집이라서인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며칠째 파리만 날리던 여사장은 오늘 공연히 주방을 들락날락하더니 뜬금없이 나 보고 부대찌개를 끓이라고 했다.
앞서 면접할 때 불고기집에서 일해본 적은 있지만, 부대찌개는 할 줄 모른다고 분명히 말해두었는데 말이다. 생트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어림짐작으로 쪽마늘을 갈아 넣고 잘 다져진 돼지고기를 한줌 정도 넣고 생강 등 양념과 고춧가루를 듬뿍 떠 넣고 부대찌개를 끓였다. 한참 끓인 뒤 맛을 봤더니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간 탓인지 국물이 좀 진했다. 여사장 보고 맛 좀 보라 해서 국물을 한술 떠 맛보던 여사장은 이런 걸 어찌 사람 먹으라고 내놓을 수 있느냐며 물 한 바가지 떠다가 찌개그릇에 확 부어넣었다. 부대찌개는 핑계고 나를 내보내기 위한 수작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여사장 보고 그럼 다른 사람을 물색해보라고, 새로 사람을 얻을 때까지 일해주마고 했다.
그 말에 여사장은 기다렸던 듯, 손님도 없고 한데 오늘부로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오늘 당장 그만두면 토, 일 이틀 동안은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정조로 내일까지만 일하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여사장은 눈 한번 깜빡 않고 일단 3일치로 계산해준다며 지갑에서 15만원을 꺼내 주는 것이었다.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가까스로 내리누르고 차분하게 따졌다.
"월급을 150만원으로 정했더라도 중도에 내보내면 미안해서라도 일당 6만은 쳐줘야 할 텐데 일당 5만원이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요?"
그러자 여사장이 하는 말이 부대찌개도 끓일 줄 모르는데, 설거지 일당 표준으로 쳐줘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억지에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보세요, 요즘은 설거지도 일당이 6만이라구요! 어질다고, 교포라고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요?! "
여사장은 변명거리가 없었던 듯 다른 말은 못하고 빨리 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실 3일 동안 일하면서 지내보니 직원들 밥상에 반찬 하나 변변히 내놓지 않는 한심한 짠순이였다. 직원들은 거의 김치쪼가리에 맨밥을 먹다시피 했고, 어제는 저녁도 못 먹은 채 11시가 넘도록 일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시비를 따질 기력도 없고 하여 밥이나 먹고 가마고 걸상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여사장은 들은 척도 않고 휑하니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던 손님 한 분이 내 처지가 안 돼보였던지 닭다리 하나를 떼어 들고 와서 건네주며 요기하라고 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사장은 저녁 6시가 되도록 얼굴도 내밀지 않다가 밥 먹을 때에도 나 보고 밥 먹으란 소리 한 마디 없었다.
부아가 치밀고 현기증까지 일어 더 이상 그 자리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따끔하게 쏘아붙이고 나와 버렸다.
그깟 3일치 수당 더 쳐줘봤자 2~3만원밖에 더 되겠냐고. 암만 어째두 엄마뻘 되는 사람인데 밥 한술 먹고 가라는 말도 못하냐고. 젊은 사람이 부모도 없이 막 자란 모양이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설움이 북받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온전히 걸을 수가 없었다. 길가 벤치에 주저앉아 실성한 사람처럼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 몸, 내 나이에 식당일은 이제 무리라는 사실을…….
이제 다른 일거리를 찾아봐야겠다.



2008. 4. 14
오전에 간병인원 모집 광고를 보고 "대한간병사"에 등록을 했는데, 오후에 내일 일 나올 수 있겠느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대뜸 갈 수 있다고 대답해놓고 나니 안도의 숨이 활 나갔다.
 
요즘은 안경을 쓰고도 글이 잘 보이지 않아서 며칠째 작업을 하며말며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몸으로 환자를 잘 돌볼 수 있을는지… 그나저나 월세 낼 날이 당금인데 일자리가 생겼으니 천만다행이다. 오늘은 일찍 자둬야겠다.



2008. 4. 16
어제, 오늘 간병 일을 하고 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힘들진 않았다.
반신불수로 운신이 불편한 82세 할머니를 간호하게 되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목욕을 시켜드리고 휠체어에 태워 아파트단지 공원에서 해바라기 좀 하고 들어와 빨래를 하고 식사를 거들면 되는 일이었다. 아들, 며느리도 서글서글한 사람들이어서 크게 긴장할 일이 없었다.
할머니를 시중하는 내내 의료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둘째가 자꾸 떠올라서 눈물이 찔끔거렸다. 그래서 더 지극정성으로 시중을 드는데, 영문을 모르는 할머니가 애잔한 눈빛으로 유심히 나를 살핀다.
남편과 둘째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거겠지? 이제 전화통화한 지도 한참 되었는데… 내일 즈음 전화나 해봐야지.



2008. 5. 17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평화롭다.
입원한지 꼭 한 달째, 내일모레면 퇴원이다. 한쪽으로 돌아갔던 입도 거의 돌아왔고 이젠 부축해서 바깥출입도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치의 말로는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란다.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는 둘째의 전화를 받고 안주인을 찾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사정을 얘기했더니 참 안 됐다며 약값에 보태 쓰라고 10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대한항공 매표소에서 일한다는 딸에게 전화를 넣어 항공권까지 예약해주는 것이었다.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지만 변변한 인사도 못한 채 허겁지겁 귀국길에 올랐다.
돈이 무엇인지, 욕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만 일찍 돌아왔던들… 앞서 전화 왔을 때라도 못이기는 척 돌아왔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후회막심이었다.


2008. 5. 18
아까 오후 편에 둘째가 다녀갔다. 너무 온천하고 예쁘장한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는 결혼할 여자라며 소개시켰다. 신수 멀쩡한 아가씨가 왜 하필? 하면서도 은근히 응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고 번마다 헛물만 켜고는 냉가슴 앓던 둘째가 안쓰러웠던 터, 우리는 그저 아가씨가 서운해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응수해 보냈다.
그런데 둘째가 나가다 말고 다시 들어와서 내게 귓속말로 “어머니, 임신 6주째래요. 손자 봐줄 준비나 하쇼.” 하고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둘째가 다녀간 뒤 우리 양주는 적이 들떠 있었다. 이번만큼은 정말 잘됐으면 좋겠는데…….



2008년 5월 19일
또 눈물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왕과는 달리 기쁨의 눈물이다.
오늘 오전 그이가 퇴원했다. 주치의가 장기 복용할 약 처방을 떼어주면서 회복은 빠르겠지만 이제 재발하면 곤란할 것이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며 주의를 주었다.
저녁 편에 둘째가 그 아가씨를 집에 데리고 와서 모처럼 화기애애하게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남편은 밥 몇 술 뜨다 말고 입덧 때문에 조심스러운 모양, 야채만 야금야금 집어 먹는 아가씨를 자꾸 보고 또 본다.
“그만 봐요. 민망해서 먹을 것도 못 먹겠어요.”
내가 핀잔을 줘서야 그이는 겸연쩍게 웃으며 수저를 드는데 둘째가 시무룩이 웃으며 허두를 뗐다.
“저, 어제 정식 장인, 장모님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올 여름에 결혼식 올리겠다고.”
“아니, 얘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결혼식이라니?!”
“왜, 며느릿감이 맘에 안 드십니까? 그럼 뭐, 물릴밖에…”
둘째가 씨물씨물 웃으며 엉너리를 친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할 말을 잃고 그이를 돌아보니 그이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직 상황파악을 못하신 모양이다.
“아버지, 어머니도 이견이 없으신 거죠? 그럼 어머닌 이제 다시 한국 갈 생각일랑 마시고 슬슬 결혼식 준비나 서둘러주쇼. 드디어 이 애물단지를 내쫓게 되었는데.”
“아니, 그게 정말이오? 부모님 모두 동의하셨단 말이지?!”
내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아가씨를 빤히 마주보며 묻자 아가씨는, 아니, 며느릿감은 “예.” 하고 곱게 대답하고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다.
정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당신도 들었죠? 철이가 결혼한대요, 이 아가씨랑. 철이가 장가간대요. 지금 이게 꿈이 아니죠?”
내 말을 여겨듣고 한참만에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듯, 그이는 물끄러미 나를 마주보더니 이윽고 아이들 쪽을 건너다보며 입귀를 실룩이고 있었다. 두 눈 그득 고인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강하시던 이가, 위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약한 모습 한 번 보인 적이 없었던 그이가 이번에 앓고 나서부터는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곤 한다…….
그래. 네가 가정을 이루고 제구실하고 잘만 산다면 더 이상 무얼 바라겠냐만, 아무래도 너무 짝이 기우는 것 같아서 걱정이구나.
 
아까 설거지를 할 때도 눈여겨보니 어려운 집안에서 고생하며 자란 탓인지 손발이 잽싸고 눈치도 빨라서 살림은 착실하게 잘할 것 같더라만, 어린 나이에 빈주먹으로 사회에 나와서 식당일부터 시작하여 재봉사, 보따리장사를 두루 거쳐 자그마한 옷가게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는 그 아이와 과연 기죽지 않고 잘 받들고 살 수 있을는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둘째가 기죽지 않고 살게 하려면 다른 건 몰라도 집 한 채 정도는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형편에서 집 한 채가 다 무언가?
그이 때문에 이제 다시 한국에 나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 그거다! 그 동안 정신없이 돌아치느라 방치해두었던 X 연구를 계속하는 거다! 요즘은 인터넷이 사통팔달해서 컴퓨터만 있으면 집에서도 그때그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인 즉! 그러려면 컴퓨터도 배워야겠고… 내일은 안과부터 가봐야겠다.





- 에필로그

어느 날, 책장을 뒤적이다가 책장 깊숙이 숨어있는 목책 한 권이 눈에 띄어 별 생각 없이 펼쳐 들었다.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호기심에 한 장, 두 장 펼쳐보기 시작했는데 몇 장을 읽는 사이 나는 어느덧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고, 30페이지 정도 분량의 일기를 눈물로 다 읽었다.
어머니 생전에 내가 조금이나마 효도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머니의 이 일기 내용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이 글을 쓴다.
어머니는 건축공정사로 퇴직하셨다. 처녀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북조선으로 건너가 평양영화대학 연극학과를 다니시던 어머니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거면 관계를 정리하자는 아버지의 엄포에 부득불 돌아오셨는데, 북조선에 있다 돌아와서 호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십여 년을 임시공으로 일해야 했다.
중한수교 초기, 화가이신 아버지를 따라 처음 한국나들이를 간 어머니는 그곳 모모한 사회 각계 인사들의 접견도 받고, 대접깨나 받으셨다.
그러다 아버지가 갑자기 위암으로 쓰러지셨는데 조기치료와 어머니의 지극정성 덕분에 기적같이 20년 넘게 무탈하시다가 이태 전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변변한 직업 하나 찾을 수 없었던 나는 한때 장사를 한답시고 납돌다가 家産을 거의 탕진했고, 아버지 병구완 때문에 앞당겨 퇴직하셨던 어머니는 보따리장사며 옷가게를 전전하시다가 종당에는 한국에 품팔이를 나가시기에 이르렀다.
명망 높은 화가의 아내로서, 한때는 그곳 상류층 사회에서 존귀한 사부인 대접을 받으셨던 어머니가 한낱 파출부로 전락해 돈 몇 푼 때문에 식당 업주들로부터 갖은 업심과 수모를 당하셨을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 저변底邊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민다. 병신자식 하나 둔 게 당신의 죄가 되어 그 같은 수모를 감수甘受하면서 평생을 고스란히 자식한테 바치신 어머니…….

요즘 들어 어머니의 치매 증세는 날로 가중해지고 있다. 얼마 전엔 바람도 쏘일 겸 막내이모네 집에 간다고 나가신 어머니가 행방불명이 되어 친척, 친구들과 파출소까지 동원해 시내를 발칵 뒤집어서 겨우 찾아 모셔오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쯤에서 수년 간 지속된 어머니의 그 꿈, 그 신비한 - X 연구공정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도 생전에 말리다 못해 두손 들고 항복하셨고, 우리 삼남매의 간곡한 만류와 구박에도 요지부동이던 그 연구과제는 다름 아닌 로또 당첨의 미스터리를 푸는 일, 건축공정사의 치밀한 계산법으로 로또 당첨번호를 알아맞히는 공정이었다.
그야말로 허황하고 눈물과 모성애로 얼룩진 아름다운 도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치매 증세가 완연한 요즘에도 어머니가 하루 세끼 식사보다 더 꼼꼼히 챙기시는 일이 바로 X 연구작업이다.
철없던 시절, 병신 된 내 신세를 한탄하며 부모님을 원망할라치면 눈물을 훔치며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휴, 글쎄… 될 수만 있다면 내 몸뚱이를 통째로 다 바꿔줘도 좋지 않겠니…….”
현대의학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그러시고도 남을 어머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머니 평생에 자기 자신을 위해 하신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 그것은 오직 우리 가족, 이 病身자식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 세상 모든 어머니들께, 그리고 세상 모든 불효자들에게 삼가 이 글을 바친다.

2014.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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