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청명절, 그해 봄에 사망된 원 공산당총서기 호요방을 추모하는 수도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여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진을 치고 추모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대학생들은 물론 나와같은 젊은 인테리층들의 대다수는 호요방총서기가 권력 의자에서 추방당한 것에 대한 불만이 가슴에 차 있었다. 대학생들의 추모활동은 추모에서 끝나지 않았다. 천안문광장 앞에서 당중앙과 국무원을 향하여 성명을 발표하여 당시에 꼬리치고 늘어나는 부정부패(특히 권력자들)와 고급간부자녀 (高干子弟)들이 부모의 권력을 배경으로 사영기업이나 여러가지 돈벌이를 하는 일에 대하여 맹렬히 비판하면서 중국의 장래를 위하여서는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실시해야 한다고주장, 중앙정부에서 답변을 즉시로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상세한 정황을 알았지만 그때 호요방 총서기의 후임으로 공상당총서기가 된 조자양(趙紫陽,그전 까지는 국무원총리)이 천안문사건에서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민주화 정치개혁을 주장했으나 보수파들이 정치개혁을 거부하고 학생운동을 반공산당 반사회주의 운동으로 판단하여 진압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대학생들이 제출한 정치개혁과 민주화개혁 요구가 공산당과 정부의 전향적 답변을 받지 못하자 대학생데모는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되고 그 규모는 북경대학,청화대학,중국인민대학 등 몇개의 주요 대학으로부터 전 북경시의 대학으로 범위를 확산하여 진행되였다. 나중에는 전국각지의 대학에서도 같은 데모가 전개되는 상황이 되였다. 더 나중에는 단식투쟁(絶食鬪爭)으로까지 전변되였다. 북경에 한창 따뜻한 봄이 찾아와 백화만발하는 계절이였으나 대학생들과 정부의 대립은 절정에 도달했다. 5월중순이 되자 데모는 학생데모로부터 지식인을 중심으로한 시민데모로까지 발전하였다.
북경시민과 대학생 200여만명이 데모에 참가했다. 나와 우리대학의 학생과 교원들도 대부분 데모에 참가하였다. 대학캠퍼스를 출발하여 천안문광장까지 20여킬로미터 되는 길을 하루에9시간이상 도보하면서 데모에 참가했다. 대학생의 주장을 지지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열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다.
대학생데모에 관한 공산당중앙의 내부분쟁이 치열히 전개되여 있었다는 것이 2011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조자양의 비밀회억록(趙紫陽回顧秘錄) 에서도 여실히 폭로 되였다. 내부분쟁의 결과 정부는 5월19일에 계엄령(戒嚴令)을 반포하였다. 즉 군대와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대학생 데모를 해산하려고 한 것이다. 공산당중앙에서는 조자양 총서기에게 계엄령성명을 발표할 것을 요구했으나 총서기가 그것을 거부했기에 리붕총리가 선포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경찰과 작전부대가 북경주위에 모여 북경시구를 포위하는 상태가 벌어졌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철저히 저항하는 자세를 취하고 무장군대의 북경중심에로의 진군을 저지했다. 중심으로 가는 길은 공공 뻐스나 트럭으로 막아놓고 심지어 일부 시민들(노인들도 있음)은 군대차량앞에 가로누워 목숨을 걸고 군대의 진압을 저지했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북경교구의 군대차량이 정지하고 있는 곳에 가서 직접 군인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인민의 군대이며 총부리를 손에 무기도 없는 인민들한테 돌리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공작을 하였다. 군인들도 우리의 선전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표시하기도 하였다. 5월20일부터 6월3일까지는 이러한 공산당의 군대와 대학생 시민들과의 대치상황이 지속되였다.
북경의 모든 대학의 교학이 중지되였다. 북경시의 모든 공공교통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시민들의 데모 때문에 완전히 마비되였다. 그러니 당연히 북경의 기업이나 사업단위들도 교통마비로 인하여 전체 휴식상태에 들어갔다. 전 북경시의 질서가 파닉(혼란)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동도구는 자전거나 도보밖에 없었다. 역사의 대결이였다.
그 무렵 나의 안해는 임신하여 연길에 있는 처가집에 돌아 갔는데 병원에 가 검사하니 8개월되는 태아가 배속에서 태(胎)가 목에 감겨 세상도 구경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안해는 너무나 큰 쇼크를 받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안해를 북경에 불러와서 함께 여행하기로 작심하였다. 80년대 후반기에 조자양 총서기는 주택제도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나는 대학에 주택제도 개혁에 관한 현지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출장을 신청했다. 대학의 교학도 중지된 상태이니 사업에 지장이 없었기에 대학에서는 나의 신청을 쉽게 허가했다. 그래서 나는 안해와 함께 남방도시를 향해 5월 30일에 열차를 타고 북경을 떠났다.
목적지는 4개 도시였다. 산동성의 연태, 강소성의 남경, 소주와 안휘성의 풍부(蚌埠)시였다. 명목은 사회조사이나 기실은 여행이였다. 연태를 거쳐 소주(蘇州)에 갔다. 소주에는 대학시절의 동창생 친구가 있어서 그 집에 머물렀다. 6월4일 아침 천안문사태의 소식이 라디오를 통하여 방송되였다. 또 한번 크나 큰 쇼크를 받았다.
북경에 있을 때는 학생운동이 계엄령과 대치되는 가운데서 금후에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군부대가 탱크나 총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덮쳐들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하였다. 왜나하면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아온 교육은 중국인민해방군은 인민의 군대이며 공산당은 인민의 령도계급이라는 이론이였기 때문이다. 만약 공산당과 인민의 군대가 인민에게 총뿌리를 돌린다면 그것은 인민배반 행위이며 인민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대부분 중국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발생된 사건의 진실앞에서는 이론도 이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대학생들이 끝까지 정부와 대립하는 자세를 취한 것도 공산당과 군대가 아무리 어째도 학생과 시민들에게 총은 쏘지 못할 것이라는 공산당과 인민정부에 대한 최저한도의 신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였다고 나는 생각했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산당의 군대가 인민과 대학생을 향하여 총을 쏘고 탱크로 들이민 것은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였다. 천안문류혈사건이 일어 났다고 해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행객중인 나는 계속 상해로부터 남경으로, 무석의 태호로부터 항주로 안해와 함께 여행이 되여 버렸다. 왜냐하면 천안문사건 때문에 지방정부나 사업단위에서는 사회조사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해, 항주 등 대학생이 많은 도시에서는 계속 데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허나 김빠진 공처럼 기세가 아주 약했었다.
6월5일 저녁에 소주에서 항주로 가는 야간운행 려객선을 타고 이튿날 아침에 항주에 도착해보니 항주에서도 대학생 시위데모가 여러곳에서 일어나고 있어 시내교통은 기본상 마비되여 있었다. 할 수 없이 인력차를 타고 서호주변의 여행을 계속했다. 저녁에 시내에 돌아와서 다음 목적지로 가려고 했는데 열차도 운행을 중지하고 있었다. 하루밤 자고 이튿날 아침 열차를 타고 안휘성의 풍부로 향했다. 나에게는 인생처음의 남방행인지라 지도 한 장을 들고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풍부시에 도착하여 호텔을 잡고 시내돌이를 했다. 다음날은 북경으로 돌아갈 예정이였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 북경의 대학동료한테 전화를 걸어 북경이 안정되였는가? 돌아가도 좋겠는가 문의하였다. 그것이 6월7일이였다. 일단 북경의 시내질서는 어느정도 안정되였으니 돌아와도 되겠다는 대답을 받고 열차표 사러 역에 나가려고 하는데 공안경찰이 호텔로 찾아왔다.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해서 내보였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사정대로 대답했더니 이번에는 우리 부부의 여행짐을 열어 보이라고 해서 보였더니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는 돌아갔다.
돌연적인 공안경찰의 수사에 속이 좀 떨렸다. 허나 위법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대학교수 신분이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중에 꼼꼼히 생각해보니 내가 북경의 동료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때 그 전화가 감시당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아마 북경과 관련되니 대학생운동가나 민주운동가로 의심받고 조사를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대학생운동에 관한 비라나 무슨증거가 있었다면 그자리로 체포될 가능성도 있었다고 나중에 생각하게 되였다.
북경에 무사히 돌아와 동료들한테 천안문사건때 어떤 상황이였는가고 물으니 그날밤 천안문으로 향한 장안거리(長安街)에서 시위데모를 하다가 군대들이 진격해오는 것을 목격하고 뿔뿔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였다. 북경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폭풍우가 휩쓸고 간 후의 꽃밭과도 같이 싹 주눅이 들어 있었다. 대학의 교학질서는 차차 회복되였으나 교원과 학생들의 눈에는 정기가 보여지지 않았다.
드디여 공산당의 당내숙청이 시작되였다. 매일이다싶이 당지부회의, 당총지부회의가 개최되여 이번의 대학생을 위주로한 데모행동이 어떻게 위법이고 배후에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뒤엎으려는 ‘민주활동가’가 조직하고 관여하였으며 공산당으로써는 용납할 수 없는 반혁명활동이고 폭동이였다고 당중앙의 지시문건을 학습시켰다. 그리고 공상당당원들은 반드시 자아검토하고 반성하며 그것이 당총지부 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정상적인 교학과 활동에 참가 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따라서 ‘당원등기’(즉 당원으로써의 당중앙과 의견을 같이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고, 있다고 판단되면 당원으로 재등록할 수 있었다)를 실시하였다.
중앙정부의 판단에 의하면 대학생운동을 제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참가한 정부부처 6개가 중점적으로 숙청을 필요로 하는 부처인데 그중에는 중화전국총공회가 들어 있었다. 또한 총공회산하의 사업단위가 4개 있는데 그 중에는 내가 소속한 대학이 포함되여 있었다. 즉 이번 대학생시위활동에 제일 적극적으로 참가한 사업기관으로써 당원들은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때문에 매일 매일 당원회의가 끝이없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무사히 당원등록을 통과했다. 즉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대학의 우리학부(공회학부)에서는 유명한 민주활동가 한명이 있었는데 당장 체포되여 감옥살이로 들어갔다(내가2년후 일본출국 전에는 출옥했음). 학부의 학부장과 교연실주임은 당내 엄중경고 처분을 받고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였다. 즉 감시 대상으로 되여 출국이나 출장도 할 수 없이 계속 당에 향하여 반성을 해야 되였다.
북경 그리고 전국의 분위기는 매일 매일 무거운 구름이 싸여 있는 듯이 찌뿌듯한 감에 휩싸여 있었다.나의 마음속도 똑 같은 심정이였다. 유일한 출로는 출국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였다. 그때 당시의 분위기속에서는 어느 나라에 가는가? 어떤 자격과 경로로 가는가는 문제가 아니였다. 기회만 있다면 남미주던 아프리카던 상관없이 중국이라는 땅을 탈출하는 것이 최대의 념원이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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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6 ]
6 작성자 : 유령
날자:2013-01-12 13:55:28
글쓴이가 일본에 있다고 천안문사태를 대담하게 거론하지만...
천안문사태는 언제까지나 중국내부문제이지 외국에서 거론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5 작성자 : 로인
날자:2013-01-12 13:21:01
아래, 'zzz'님이 나이가 그리 많은 분이 아니지만 정말 문제를 잘 분석하였다고 샏각됩니다. 저도 그때 나이 40였는데 학생운동을 지지하였댔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리해가 갑니다. 우리는 중국의 실정을 보아야 합니다. 중국공산당이 착오가 없는것은 아닙니다. 그렇다하여 너무 나약하게 각곳에서 일어나는 데모를 그대로 놔 버린다면 13억 인구대국에서 어떻게 될가요? “星星之火可以燎原”아래분이 말씀하다싶이 이집트, 리비아, 수리아, 소름이 끼칠 일이지요.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착오만 보지말아야 합니다. 중국공산당은 착오를 과감히 시정하고 백성들을 부유의 길로 이끌지 않습니까? 지난 10년 호금도총서기, 온가보총리 얼나나 잘 하였습니까? 인민들의 물질 문화수준이 얼마나 제고 되였습니까? 습근평총서기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지도부의 8가지 사업작풍에 관한 결이, 얼마나 백성들의 마음에 와 닿습니가? 신심니 보입니다.
4 작성자 : zzz
날자:2013-01-12 12:34:17
세상살이가 그렇습니다.젊은피의 뜨거운 열정으로 한번 세상을 바꾸 보려는 그 열정이야 인정하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요?
저는 작자님보다 나이 어린 후배이지만 천안문사태가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학생들로 성공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중국공산당은 자신의 정권을 위하여서든 나라의 안정을 위하여서든 발빠르게 위기를 잘 넘겼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 아까운 목숨을 읽은 분들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런 과정에서는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도,공산당이 아닌 다른 정권이라도 피면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뤄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그걸 모르고 운동에 뛰어 들었다면 물불 가리지 못하는 애숭이들이 맞는거죠.
만약 천안문사태에서 중국공산당이 연약한 모습으로 굴복되였다면 정국은 지금도 대 혼란속에 빠져 국민들이 더 힘들게 살고있고,오늘과 같은 강대한 중국으로 될 수 없습니다.민주화란 단지 이유일뿐 대 혼국에 빠진 중국으로 되여 버리는 것이 미국을 포함한 여러나라들의 바램이 아닌가요.
중국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한발자국,한발자국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 우선으로 나라의 안정이 더 필요합니다.중국공산당의 오랜 집정으로 각 영역에 부패무능한 허점이나 한계들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지만 그건 중국공산당이 앞으로 극복하며 나아가야 할 시험대이지만 큰 의미에서 볼때에는 그동안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이끌어 가는데 큰 하자는 없고,지금까지는 국가와 국민의 리익에도 맞다고 봅니다.
이집트,리비아,수리아등 중동의 피비린 민주화전쟁들을 보십시오.그 민주화때문에 나라가 지금 무슨 꼴들인가?미국같은 열강들이야 팔장끼고 여유작작하게 지켜보고 있겠지만 새로운 정권이 올라오도 피비린 권력다툼은 끝나지 않고 국가의 끝나지 않는 피비린 혼란속에서 최대의 희생품이 무고한 불쌍한 백성들이죠.
중국같은 나라가 천안문 사태로 저 꼴이 나면 어떤 모습일까요?이 큰 땅,세계 최다 인구를 가진 중국에는 더 해괴망측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작자는 외국으로 도망쳤으니 이런 여유작작한 천안문사태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밝히겠노라 책임감 있는 글을 썼다고 자부하겠지만 외국으로 도망칠수도 없는 평번한 백성들은요? 내 아이 지금 소학교 2학년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에 태여나 살아 본지도 얼마 안되는 내 자식이 안정된 환경속에서 시름놓게 공부를 하고 살아가기를 바라지 싶지,목숨도 담보할 수 없는 피비린 냄새가 풍기는 혼란스러운 환경속의 시대의 희생품이 되지 말기를 제발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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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성자 : 아리송
날자:2013-01-12 11:04:16
4월이 아니라 6월로 알고 있는대요
2 작성자 : 오즌층
날자:2013-01-12 11:01:20
시진평총서기가 현재 추진하고 있는 반부패운동은 기세가 대단하지만 철저히 변혁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듯하다.전 중국 경제명맥의 90%이상을 차지한 사람?들이 지지할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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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사태는 언제까지나 중국내부문제이지 외국에서 거론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