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http://www.zoglo.net/blog/liguangren 블로그홈 | 로그인
<< 2월 2025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블로그

나의카테고리 : 《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겨레렬사비7]겨레 항일항공렬사 김원영(2)
2017년 03월 21일 15시 39분  조회:1164  추천:0  작성자: 리함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7)

□ 리 함

1

상해로 돌아온 후 김원영은 호남의 지강공군기지(芷江空军基地)의 중미혼합련대(中美混合联队) 공군준위견습관(空军准尉见习官)으로 배속되였다가 소위(少尉) 3급 비행원으로 중일공중전에 가담하게 된다. 여기에서 지강공군기지의 중미혼합련대를 알고 지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국공군의 력사를 보면 항일전쟁 초기 중국의 공군력량은 약소하지만 1941년 8월, 미국의 진납덕(陈纳德) 장군이 이끄는 미국항공지원대가 중국의 항전에 나서서부터는 정황이 확연히 달라진다. 1942년 6월, “중미조차협정”(中美租借协定)에 따라 국민정부에서 두번에 나누어 중국공군 각 부대의 비행원들이 인도에 가서 관련 훈련을 받은데다가 많은 중국의 열혈청년들이 미국 공군학교에 가서 학습하고 돌아오니 힘이 부쩍 커졌다. 1943년 6월에 진납덕 장군이 중 미 두 나라 공군련합련대를 조직하자고 건의하니 국민정부는 이를 통쾌히 받아들였다.

남경 자금산 북쪽 기슭에 일어선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드디여 1943년 10월 중미공군혼합련대가 계림에서 무어지고 이 해 11월 3일에 정식으로 설립을 선고하였다. 중미공군혼합련대는 중국공군과 미국륙군 제14항공대 부분 인원들로 구성되면서 광서 계림 공군기지를 자기의 기지로 하였다. 련대 산하에 제1, 제3, 제5 작전대대를 두고 매 대대에 4개 중대를 설치하였다면 중대 내에 또 4개 분대를 두고 매 분대에 작전비행기 6대를 배치하였다. 따라서 제1대대를 폭격기대대로 하고 B-25 중형폭격기를, 제3대대와 제5대대는 전투기대대로 하고 처음에는 P-40 상어형(鲨鱼型) 전투기를, 후에는 P-5 들마형(野马型) 전투기를 실전 사용하도록 하였다. 중미혼합련대 공군기지는 각기 계림(桂林)과 감주(赣州), 은시(恩施), 지강(芷江), 한중(汉中) 등지로 되여 진납덕 장군의 통일지휘를 받으면서 중국공군의 서렬에 속하였다. 진납덕장군은 또 중국공군의 참모장이기도 하였다.

본 문에서 전문 소개하는 중미공군혼합련대가 다름 아닌 중국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항전시기 공군비호대이다. 이 중미공군혼합련대의 출현으로 중국공군은 전략적 방어로부터 전략적 진공으로 넘어가면서 중국하늘의 제공권(制空权)을 완전히 잡게 되였으니 우리 겨레 김원영은 비호대로 소문 높은 중미공군혼합련대 제5대대 제29중대 소위(少尉) 3급 비행원이였다. 이 시절 김원영의 행적을 알리는 자료는 별반 없지만 김원영의 동기 비행사들인 공군군관학교 제13기 생 황상춘(黄翔春)과 제15기 생인 단유리(段有理)의 회고문에서 김원영이 제16기 생임이 잘 알려진다.

2

먼저 황상춘의 회고문을 보면, 김원영 소속 제5대대의 기지는 호남 지강공군기지로서 비행장은 산마루에 건설된데서 항공모함의 활주로를 방불케 하였다. 그만큼 비행장 량켠은 소구릉 지대를 이루었다. 하기에 비행기가 안전하자면 리륙할 때 비행기 고도를 제때에 공중으로 올려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못하면 비행기는 활주로 끝에서 산비탈로 굴러떨어지게 된다. 황상춘은 한국인(조선인) 김원영은 이런 원인으로 변을 당했다면서 이렇게 회고하고있다.

16기 후배인 구양명은 리륙할 때 비행기의 머리를 미처 올리지 못하여 옹근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떨어져 희생되였다. 정말 유감스럽다. 이 후배는 한국인으로서 비행기술이 훌륭했다. 만약 살았다면 2차대전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 공군 총사령으로 되였을 것이다. 정말 가석하기만 하다.

황상춘의 회고문에서 알리는 김원영의 최후는 지금 류행되는, 비행기 고장과 추락으로 인한 최후와 비슷하다. 이런 설도 있음을 그대로 밝혀두면서 김원영과 같은 제5대대 제29중대에서 근무한 단유리도 자기의 회고문에서 김원영이 16기 생이라고 알리고 있다. 김원영의 국적을 말할 때는 한국화교라고 하여 재미를 던져준다. 지강공군기지는 오늘의 호남성 회하시 지강동족자치현에 위치하였다. 동으로 회화(怀化)와의 거리는 31키로메터 밖에 안된다.

29중대 8명 동료가 함께 찍은 사진. 중간줄 왼쪽 첫 사람이 김원영(단유리)이다.

희한한 것은 단유리가 회고문에 여러 비행사들 개인사진과 더불어 29중대 시절 동료 8명이 찍은 단체사진을 함께 올린 것이다. 단체사진은 29중대 비행사들이 재미나게 웃는 다정한 모습의 사진인데, 사진 속에 공군군관학교 제16기 생인 김원영도 함께 보인다. 단유리의 소개에 따르면 뒤로부터 네번째가 자기이고 자기 옆 다섯번째 사람이 구양명(즉 김원영)이라고 한다. 사진의 김원영과 개인사진에서의 김원영은 다른 모습으로 보이여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본 문에서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 29중대 단체사진은 이번에 처음으로 발굴한 사진이라는 점이다. 중국조선족사회와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관 측,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진이니 이 사진의 발굴은 김원영 연구에서의 일대 성과가 아닐 수가 없다.

김원영은 중미공군혼합련대 제5대대 29중대에 근무하면서 동료들과 더불어 중국의 항일전장에서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1945년 2월 7일 명을 받고 출격하여 악양(岳陽)·형양(衡陽) 등지에서 일본군 운수부대를 소탕한 공중작전이였다. 지금까지 김원영 관련 자료는 모두 2월 7일 이 날 김원영은 비행기를 몰고 작전과업을 수행하다가 일본군의 대공포에 피격되여 락하산으로 탈출하게 되였다고, 그 날 락하산은 김원영을 장강에 떨구어놓았지만 다행히 수영을 잘했기에 무사히 본대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던 1945년 3월 24일, 김원영은 또 일본군 공격을 위해 리륙하다가 비행기 고장과 추락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것도 너무나도 아까운 20대의 한창나이에 말이다.

3

김원영을 잘 모르던 시절, 김원영 관련 자료가 모두 그러하여 필자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편 최근년간 수집한 김원영 연구자료들을 전면 검토하면서 5,000자 정도의 한편의 전기로 완수하였다. 이 전기는 항일항공렬사 전상국 전기와 더불어 민족출판사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도서》인 《중국조선족항일지사 100인》(박문봉 김광영 주필, 2015년 9월 출판)에 올라 반향이 좋았다. 국민당 계렬 항일렬사인데다가 중국조선족사회에 처음으로 알려지는 중국 공군인물이여서 더구나 그러한가 보다.

그러나 그 후 계속되는 연구에 따르면 희생될 때까지도 구양명으로 알려진 김원영은 일본군의 대공포 피격에 의한 락하산 탈출도 아니고 락하산이 장강에 떨어지고 수영을 잘한 원인으로 살아난 것도 아니였다. 희생될 때 정경도 사실과 크게 어긋나고 있다. 김원영은 출격과업을 맡고 리륙하다가 비행기 고장과 추락으로 희생되였다고 하지만 력사 속 진실한 이야기는 이와 전혀 달랐다. 최근 2~3년래 김원영 관련 첫 비행기 추락과 희생 과정이 김원영 구출자의 이야기로 호남 당지에서 생생히 밝혀지고 있어 대단히 고무적이다.

먼저, 력사의 시침을 1945년 2월 7일로 되돌려 보기로 하자.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관 안에 전시된 당년 비행기 모형

이 날 김원영 소속 제29중대는 명령을 받고 호남의 지강공군기지에서 리륙하여 악양, 형양 등지에 대한 먼거리 일본군 소탕 과업을 완수하고 기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귀로에서 그들은 호남성 상향현 영풍진(湘乡县永丰镇, 영풍진은 오늘의 双峰县에 소속된다.) 상공을 지나게 되였는데 호남 상향현성은 1944년 7월 2일에 일본침략군에 함락되고 영풍은 그 이튿날 함락된 지구들이였다.

그 때 일본군이 점령한 영풍진 왕가요(汪家坳)에는 1922년 5월 출생으로 알려지는 20대 초반의 가난한 집 젊은이 설맹자(雪猛子)가 살고 있었다. 설맹자의 이름은 소회생(肖会生) 이고 본명은 소설봉(肖雪凤)으로 나타났다. 키가 크고 우람진 체격의 소유자인 그는 두려움 모르는 호방한 성격이여서 사람들은 “설맹자”라고 친절히 불렀다. 그러던 설맹자가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있게 되니 그 날이 1945년 2월 7일이다.

이 날은 눈꽃이 흩날렸다고 한다. 이 날 오후 4시 경에 하늘에서 느닷없이 우릉우릉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떼의 비행기 무리가 형양(衡阳) 방향에서 날아와 영풍 하늘을 날고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지강공군기지로 돌아가는 국민당의 비행기들이였다. 보매 비행기 18대는 3대를 한개 대렬씩 6개 대렬로 편대를 지어 날고 있었는데 지면과 가까운 하늘을 날고 있었기에 비행기 몸체의 표지까지도 모두 보였다.

4

바로 그 때다.

비행기 한대가 돌연히 편대를 벗어나더니 영풍 상공에서 네댓굽이를 돌다가 영풍진 북쪽 1키로메터 되는 대가주(戴家洲, 오늘의 万福桥 동쪽 가) 미수하(湄水河) 강가에 추락되지 않는가. 당지 농민들은 볼거리가 생겼다고 하나 둘씩 모여들더니 어느덧 세겹 네겹을 이루었다. 바로 그 때 뒤미처 비행기 추락 현지에 이른 설맹자는 겹겹이 둘러싼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설맹자가 비행기 앞에 나타나니 비행사는 금방 비행기 조종실 유리창을 열어제끼였다. 비행사는 갑자기 추락된 데다가 주위에 숱한 사람들이 둘러서니 긴장한 상태에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설맹자는 급히 비행사를 부축하며 화기롭게 말을 건넸다. 한참 만에야 비행사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당신은 누구예요?”

“여긴 상향현 영풍진이고 우리는 모두 선량한 백성들입니다. 무서워 마십시오. 내가 당신을 도울 텝니다 !”

그 때에야 비행사는 다소 시름을 놓았는지 비행기 출격 과업을 마치고 돌아설 때 그만 일본군 고사기관총 사격으로 여기 상공에 이르러 더 날지 못하고 추락하게 되였다고 사연을 터놓았다.

그 시각 영풍진 쪽에서 몇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일본놈들이 비행사 잡으러 온다면서 뿔뿔이 달아났다. 정의감으로 넘치는 설맹자는 달아나지 않았다. 그는 비행사를 부축해 비행기 조종실에서 나오게 하고는 그를 둘쳐업고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하였다.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관에 전시된 김원영, 전상국 사진과 문자설명

‘어디로 갈가?’

설맹자는 일본놈들에게 점령된 자기 마을로는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먼거리 마을 쪽으로 가면 일본놈들이 쫓아올 것이 아닌가. 설맹자는 생각을 다잡고 현지에서 그닥 멀지 않은 웅가사당(熊家祠堂)으로 움직였다. 웅가사당에는 아버지의 결의형제인 웅설사(熊雪四)가 살고 있었다. 설맹자는 눈길을 헤치며 1키로메터 쯤 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렸다. 그런데 이거 야단이다. 웅설사는 설맹자가 중국군인을 업고 집에 들어서니 겁에 질려 쩔쩔 맨다.

“설맹자, 너 정신 나갔니? 네가 화근을 업고 들어서면 어떡해? 일본놈들이 이 사람을 찾아내면 우리 집은 재더미가 된다. 빨리 떠나거라.”

“넷째아저씨, 어쩔 수가 없어요. 모두 중국사람이 아닌가요? 먼저 숨기고 다시 봅시다. 만일 일본놈들이 아저씨 집을 불사르면 아저씨네 가족은 우리 집으로 옮겨 사세요.”

설맹자의 절절한 사정 앞에서 웅설사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별수 없이 설맹자와 함께 비행사의 비행복과 가죽구두를 벗겨 돼지우리 우 벼짚 속에 감추고 비행사는 집 뒤 감자굴에 감추고 굴 문을 닫은 다음 땔나무를 가려놓았다. 얼마 후 20여명의 일본군들이 웅가사당 마을에 나타나 집집마다 수색을 들이댔다. 놈들은 웅설사의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돼지우리 우와 감자움은 뒤지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였다.

2015년 7월 초고, 2017년 2월 보충정리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6 [겨레렬사비26]선렬들 찾아 천만리 2017-07-31 0 1707
25 [겨레렬사비25]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3) 2017-07-25 0 1403
24 [겨레렬사비24]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2) 2017-07-18 0 1659
23 [겨레렬사비23] 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1) 2017-07-12 0 1431
22 [겨레렬사비22] 상강전역기념관서 떠오른 무정장군(3) 2017-07-11 0 1256
21 [겨레렬사비21]상강전역기념관서 떠오른 무정장군(2) 2017-07-01 0 1235
20 [겨레렬사비20] 상강전역기념관서 떠오른 무정장군(1) 2017-07-01 0 1211
19 [겨레렬사비19]장세걸 홍14군기념관에 동상으로 모셔져 2017-06-13 0 1337
18 [겨레렬사비18]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 (2) 2017-06-13 0 1236
17 [겨레렬사비17] 양림의 묘소는 하구촌 어디메냐(1) 2017-06-01 0 1663
16 [겨레렬사비16] 연안 청량산 리철부 묘소는? 2017-05-23 0 1417
15 [겨레렬사비15] 양가포서 찾은 주문빈 새 사진 2017-05-16 0 1162
14 [겨레렬사비14]주문빈과 당산시 기동렬사릉원 2017-05-16 0 1128
13 [겨레렬사비13]동욕진 상무촌의 무명렬사묘 2017-05-16 0 1094
12 [겨레렬사비12]진광화 석정 묘소에 깃든 이야기 3 2017-04-28 0 1425
11 [겨레렬사비11]진광화 석정 묘소에 깃든 이야기 2 2017-04-21 0 1363
10 [겨레렬사비10]진광화 석정 묘소에 깃든 이야기 1 2017-04-17 0 1396
9 [겨레렬사비9] 화북대지 황백평촌 4렬사묘 2017-04-05 0 2050
8 [겨레렬사비8]겨레 항일항공렬사 김원영(3) 2017-04-04 0 1332
7 [겨레렬사비7]겨레 항일항공렬사 김원영(2) 2017-03-21 0 1164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