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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4)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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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시 기동렬사릉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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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반도에 벗꽃이 아름답게 피여나던 4월 26일, 산동성 위해시 영성(荣成)역에서 제남 행 고속렬차가 출발하니 시침은 오후 3시 35분을 가리킨다. 위해와 연태를 거치며 제남역에 도착하니 밤 8시 12분, 옹근 네시간 30분을 흘러보냈다는 말이 된다. 이날 밤 제남역 철도호텔에 투숙하였다가 이튿날을 잡아 당산 행 고속렬차로 제남역을 출발한 것은 오전 8시 52분이려니 이번 행은 두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산역에 이르니 정오 11시 26분이다. 점심시간이라 당산시의 기동렬사릉원은 문을 열지 않는단다. 정오 사이 시간을 헛보낼 수가 없어 택시로 ‘당산항진(抗震)기념비’를 찾으니 당산항진기념비는 당산역에서 동으로 10여리 상거한 당산시의 중심구역 넓은 광장에 거연히 솟아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76년 7월 28일 새벽, 이곳에서 중외를 진감한 7.8급 당산대지진이 일어나면서 24만여명의 생명을 앗아갔으니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소소리 높이 솟은 당산항진기념비는 그날의 참상을 알리면서 필자를 41년 전 그 나날로 이끌었다. 부근에는 당산항진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정오라 문을 닫은 상태다.
조용히 당산항진기념비를 거닐며 력사속에 묻히다가 다시 택시를 잡고 그닥 멀지 않은 남쪽가의 기동렬사릉원을 찾으니 아니나 다를가 기동렬사릉원 철대문 정문은 닫겨져 있다. 나이지숙한 택시운전사는 당산에는 당산항진기념비 뿐만 아니라 당산지진옛터기념공원도 있다고 튕겨준다. 내친걸음으로 그 택시 그대로 시가지 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옛터기념공원을 찾으니 놀랍게도 41년 전 공장건물 잔해가 그대로 보이고 그날의 순난자 24만여명의 이름을 새긴 거대한 이름벽 10여개가 일렬로 길게 길게 뻗어있다. 옛터기념공원에는 당산지진박물관도 있어 당산대지진의 력사사진 이모저모를 처음으로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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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렬사릉원 구내 높이 34.5메터의 웅위로운 렬사기념탑
처음 이른 당산에서 무엇을 볼가. 처음이 주문빈 동상을 모신 기동렬사릉원이라면 그 다음은 흘러간 당산대지진 력사흔적이 아닐가. 정오라 기동렬사릉원이 문을 닫은 덕에 당산항진기념비와 당산지진옛터기념공원, 당산지진박물관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 시간을 헛보낸 것이 아니였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오후 1시 30분이 되여온다. 택시운전사는 택시를 다시 당산시 로남구릉원로(路南区陵园路) 2번지에 위치한 기동렬사릉원으로 돌리였다. 마침 기동렬사릉원 정문에 이르니 문은 열리여 있다. 그때까지 점심식사를 하지 못했더니 할 겨를도 없었다. 발걸음도 가벼이 고전 문패루(牌楼)형식으로 된 정문안에 들어서니 송림으로 우거진 7.5만 평방메터의 릉원이 맞아주었다. 그때에야 필자는 기동렬사릉원은 1958년 청명절에 락성되여 사회에 개방되였지만 1976년 7월 28일의 당산대지진으로 하여 릉원의 모든 건축물이 평지로 되였다가 1986년에 다시 준공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기동렬사릉원 정문 안내비 앞에서
고전 문패루 정문에 이어 필자를 맞아준 건축물은 높이 34.5메터에 이른다는 웅위로운 렬사기념탑. 흥미로움은 기념탑의 네 면 모두가 로일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인 주덕, 림백거, 팽덕회, 소극의 제사로 이루어진 것. 기념탑 정면 남쪽 면은 주덕의 제사로, 북쪽 면 안쪽은 팽덕회의 제사로 되여 보다 인상적이였다.
렬사기념탑 북쪽은 건축면적 2,146평방메터를 알리는 기동렬사기념관이라지만 아쉽게도 다른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는 릉원은 기념관 문을 꽁꽁 닫고 있었다. 얼마나 맹랑하던지. 멀리 위해 석도에서 제남까지, 제남에서 다시 당산으로 달려왔건만 기념관 복은 비껴가기만 한다. 다행히도 기동렬사기념관 앞은 송림속 동서 량측 록지에 대표적인 20명 기동혁명선렬들 동상을 모시여 마음이 많이 풀리였다. 바이두(百度)에서 언녕 찾아본 동상구역이여서 인상이 깊다지만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인상은 보다 깊어만 진다.
기동렬사릉원 최북쪽 렬사묘소 구내에 모셔진 원 주문빈 묘소
끝끝내 자기 발로 당산 기동렬사릉원 내 주문빈동상을 찾은 기쁨과 감수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주문빈동상은 기동렬사기념관 앞 동쪽 구역에 반신상으로 나타났다. 석가장 화북렬사릉원의 주문빈동상에 이어 두번째로 현지에서 직접 대하는 동상, 남쪽 멀리를 응시하는 주문빈의 모습이 그리도 정답기만 하다. 중공당산공작위원회 서기요, 중공기동지위 서기요, 중공기열변특위 조직부장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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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렬사릉원 구내 기동렬사기념관
20명 동상 구내를 한품에 안은 기동렬사기념관 북쪽은 묘소구역으로 펼쳐진다. 묘소구역은 기동렬사릉원의 최북부에, 전체 면적 4,749평방메터, 렬사묘소 166자리에 178명 렬사로 이루어졌다. 그중 주문빈렬사묘소는 묘소구역의 중앙부 제일 앞자리에 모셔져 당산지구에서의 주문빈의 력사위치를 알 것 같았다. 하다면 기동렬사릉원 이곳의 주문빈묘소는 진짜 묘소일가. 그런 것이 아니였다. 주문빈렬사 유골은 하북성 소재지 석가장에 위치한 화북렬사릉원으로 언녕 이장하였다니 이곳 묘소는 원 묘소를 그대로 모신 것이리라.
어언 기동렬사릉원을 떠날 때도 되여온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찾아볼가. 발걸음은 가볍지가 못하다. 기동렬사릉원 내 기동렬사기념관을 보지 못한 유감에서이다. 그러던 기회가 숨박곡질하듯 그 이튿날로 다시 펼쳐졌으니 옛말 같기만 하다. 내친 김에 기동렬사릉원에 이어 그길로 당산 중심부에서 북으로 28키로메터 떨어진 당산시 구내 풍윤구로, 풍윤구에서 다시 남으로 15키로메터 상거한 양가포렬사릉원으로 다녀오니 5.1절 대목이라고 고속렬차요, 모든 귀가표가 없다나. 귀가 고속렬차표는 4월 29일로 안겨지니 기동렬사릉원을 다시 찾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였다.
기동렬사기념관 내 주문빈 전시물을 배경으로
이튿날 4월 28일 오전 9시 직후 필자는 기동렬사릉원을 다시 찾았다. 릉원 구내는 한적하기만 한데 한 젊은 녀성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보매 렬사릉원의 사업일군 모습이라 무작정 청부터 들이댔다. 멀리멀리 동북 길림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주문빈을 찾아 달려왔는데 이곳 릉원 내 렬사기념관을 보지 못함이 유감이라 다시 찾아왔다고 하니 그녀는 련락해주겠으니 잠간 기다리라고 한다.
과연 조금 후 곡위(谷伟)라고 부르는 릉원 선전과의 젊은 남자일군이 찾아주었다. 그는 먼곳에서 온 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리유가 없다면서 렬사기념탑 구내를 지나 렬사기념관으로 나를 안내하더니 기념관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주며 등불을 일일이 켜주었다. 그 덕분에 기동렬사기념관의 한 구내에서 사진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국제주의 전사 주문빈〉 전시를 찾을 수가 있었다. 주문빈렬사 전시는 기동렬사기념관 주요 전시의 한 부분을 이루어 위인으로서의 주문빈의 위치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1958년 청명절에 기동렬사릉원을 찾은 주문빈렬사 어머니 홍기주와 녀동생 김신정 옛 사진 /이상 사진 2017년 4월 27일, 28일 촬영
당산시 기동렬사릉원의 주문빈 동상과 묘소, 기념관 내 기념전시물은 이렇게 이 땅의 중국조선족사회에 사실 그대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는 발걸음은 정말이지 가볍기만 하고 마음은 즐겁기만 하다.
주문빈렬사여, 길이길이 빛나시라 !
2017년 5월 4일 위해 석도에서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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