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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후기)
□ 리 함
겨레 렬사비 렬사묘 답사 소감
“왜 사비를 털며 자기 품을 팔며 지꿎게 현지답사의 이 길을 걷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땅의 우리 겨레들 중 누군가는 걸어야 하는 길이니 운명은 나를 이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기만 한다.”
“고독을 동반한 나 혼자의 알심으로 중국대륙을 누비며 이 땅에 널리 분포된 겨레 렬사비와 렬사묘들을 아는 대로 빠짐없이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 정녕 꿈만 같고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두발로 뛰며 써낸 것들이여서 더욱 감회가 깊다.”
2017년 6월 8일 답사길에 광서 흥안현 상강전역기념관에서 리함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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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의 휘넓은 땅우에는 곳곳에 우리 겨레 렬사들의 기념비와 렬사묘들이 널리 자리하고 있지만 이 땅의 우리 겨레들은 하북대지의 태항산항일근거지 진광화, 석정, 4렬사묘와 무명렬사묘, 기동지구의 주문빈 묘소 외에는 거의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9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인데 이 기회를 빌어 중국대륙에 널린 겨레렬사들의 기념비와 렬사묘들을 신문지면을 통해 널리 알릴 수 없을가?’
이 생각을 바탕으로 한 제의는 인차 《길림신문》 지도부의 대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올해 2월 초부터 매주 한편씩 편당 5000자 좌우의 특별기획 련재가 시작되였다. 한두곳도 아니고 거의 전체를 아우르는 중국 관내의 광활한 대지에 널린 겨레 렬사 기념비와 묘소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로는 전례가 없는 일이였다. 이 련재가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로 고고성을 터쳤으니 마음은 한없이 울렁이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올해 써내기로 한 두편의 인물평전을 모두 뒤로 미루고 모든 정력을 《길림신문》의 이 특별기획 련재로 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지만, 올해도 자신 있게 건군 90돐 기념 길림신문 특별기획 련재를 벌렸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현유 이미 정리된 글로는 〈광주봉기렬사릉원 찾아서〉와 〈화북렬사릉원의 주문빈렬사기념비〉 두편의 글 뿐이였다. 그런대로 먼저 이 두편을 보내여 련재를 시작하였는데 그 다음 글들은 새로 써야 하니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 후 련속작전으로 〈8.1남창봉기와 우리 겨레들〉,〈추수봉기를 빛낸 국제주의 전사 진룡학〉 두편을 써내니 잠시 숨 돌릴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련재 제5기부터 몇기는 겨레 항일항공렬사들인 전상국과 김원영인데 이들의 묘소는 남경 자금산 북쪽기슭에 자리한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에 모셔져있었다. 이곳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 여러 비림에는 중국, 구쏘련, 미국 등 나라의 항일항공렬사 3304명의 이름이 새겨져있는데 이 속에는 조선인 전상국, 김원영 두 항공렬사도 들어있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당 계렬에서 항일에 나선 그네들이 이 땅의 우리 겨레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필자는 절강월수대 시절인 2013년 9월 13일, 남경사범대 유성운박사의 안내로 현지답사를 거친 데 토대하여 현지기행을 쓰면서 이제 《길림신문》을 통하여 두 항공렬사가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사회에 알려지면 어떠할가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조선족력사연구가의 책임이 무거움을 다시 느끼는 시각이였다.
다음은 그제날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묻힌 겨레 4렬사묘와 진광화, 석정 묘소, 무명렬사묘다. 혹자는 이 부분은 이미 《길림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는가고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단순 그런 것만은 아니였다. 이 렬사묘들에 깃든 진실한 이야기와 력사의 전후관계를 틀림이 없이 사실 대로 알리는 것은 우리 조선족력사연구가의 책임이였다. 책임이니 력사에 충실해야 했다. 다년래의 연구와 진실한 현지답사에 토대하여 써내니 믿음과 자신감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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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남경항일항공렬사들인 전상국, 김원영 외 다른 렬사묘들은 필자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흘러간 력사 속에서도 다다소소 알려지기도 하였다지만 그 다음 렬사기념비와 렬사묘들은 우리 력사에 관심을 가진 극소수외에는 중국조선족사회가 거의 모르는 사실들이니 보다 신중하고 설복력이 있어야 했다. 이 부분에서 가장 급선무로 나서는 이는 하북 기동지구의 주요지도자의 한 사람인 주문빈렬사라 하겠다.
주문빈렬사는 지난 혁명전쟁년대에 중국대륙에 쓰러진 겨레렬사들 가운데서도 특이한 존재였다. 다른 겨레렬사들과 달리 주문빈렬사는 묘소만도 렬사가 희생된 하북 풍윤지구와 당산시, 석가장시 여러 곳에 있다 하니 그 때 력사를 잘 모르면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석가장시 화북렬사릉원 밖에 다녀오지 못한 필자도 례외가 아니다. 진짜 묘소는 석가장시라고 하는데 혹자는 하북성 풍윤현의 양가포렬사릉원도 묘소라 하고 또 당산시 기동렬사릉원도 묘소라고 한다.
이번 련재는 현지답사기행이니 연구자료에만 의거할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하였다. 이 결단은 련재글만을 위한 희생이니 그 희생은 적어도 인민페 3000원 정도를 소모하며 하북성 당산시로 다녀오는 현지답사의 길이였다. 왜 사비를 털며 자기 품을 팔며 지꿎게 현지답사의 이 길을 걷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땅의 우리 겨레에서 누군가는 걸어야 하는 길이니 운명은 나를 이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기만 한다.
지난 4월 27일과 4월 28일 양가포렬사릉원과 기동렬사릉원 현지답사를 통하여 주문빈렬사의 묘소 문제가 원만히 풀렸고 이 세상 우리 겨레가 모르던 주문빈의 전신사진도 새롭게 발견되였다. 이런 현지답사 결과가 《길림신문》 이번 특별기획 련재 14기와 15기를 통해 고스란히 해빛을 보니 이보다 더 큰 기쁨 어디에 있을가. 돈으로 따질 바가 아니였다. 우리 조선족사회가 모르는, 우리 력사연구가들도 잘 모르는 하나 또 하나의 진실한 력사가 펼쳐지는 그 기쁨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기지 못한다.
이번 《길림신문》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의 주체는 렬사묘였다. 렬사묘니 만큼 위대한 8.1남창봉기와 추수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했거나 쓰러진 겨레렬사들도 모시고 국민당 계렬에서 항일의 싸움터에 나선 항일항공렬사들도 모셔야 했다. 선후하여 하북 기동지구와 석가장 화북렬사릉원에 묻힌 주문빈렬사도 모시고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쓰러진 조선의용군 렬사들도 모셔야 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선민족의 수령인물로 활동한 양림과 무정, 장세걸, 리철부도 꼭 모셔야 했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수령인물들을 모시기란 말 그대로 쉽지 않은 일이였다. 지난 세기 30년대 중공 천진시위 서기이고 하북성위 서기였던 리철부가 그러했다. 리철부는 1937년 7월 10일 연안 교아구에서 불행히 병사한 후 연안 청량산에 묻히고 1945년 4월 당7차대회 전야에 중공중앙 판공청에서 그의 묘소에 대리석 비석까지 세웠지만 오늘날 여러가지 원인으로 연안 청량산에서 리철부의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장정 전 홍1군단 참모장이고 홍23군 군장이였던 양림도 그랬다. 양림은 장정 후 1936년 2월의 황하도하작전의 선봉으로 나섰다가 그 해 2월 22일 희생되였고 선후로 산서땅 하가와촌과 황하 북안의 섬서땅 하구촌에 묻혔다지만 세월 속에 잊혀지면서 역시 묘소를 찾을 수가 없다. 홍22군 참모장이였던 장세걸도 그랬다. 장세걸의 묘소는 묘소조차 운운할 수가 없이 그가 일찍 홍14군 1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던 강소 땅에 무명동상으로 남아있을 뿐이였다.
2017년 5월 22일 다시 찾은 강소 여고의 홍14군기념관 1층 홀 17명 장령 군체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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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들은 ‘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련재에 무조건 모셔야 할 수령인물들이였다. 그런 연고로 양림과 리철부는 이미의 현지답사에 토대하여 실사구시하게 련재글을 써서 발표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장세걸은 쉽게 쓸 수가 없다. 절강월수대 시절로서 5년 전인 2012년 1월 31일, 강소 여고시에 일어선 홍14군기념관을 찾아보았다지만, 홍14군기념관 1층 홀에 홍14군 17명 장령 군체 동상으로 모셔졌다지만 그중의 어느 동상이 장세걸동상인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5년 후인 2017년 5월 22일 홍14군기념관 두번째 현지답사는 이렇게 다시 돈 팔며 품 팔며 이루어지고 장세걸 련재가 제19기로 《길림신문》에 오를 수가 있었다.
이제는 무정장군이 맘에 걸린다.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익히 아는 태항산근거지가 아닌 무엇으로 무정장군을 모실가? 장정길 상강전역이 선참 안겨온다. 그래 상강전역이다. 무정장군 평전에서도 현지답사를 거치지 못한 상강전역이다. 헌데 주저도 없지 않다. 상강전역은 머나먼 광서 땅 계림지구여서 한번 다녀오자면 정녕 쉽지가 않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상강전역 현지답사길에 나서기로 작심하였다. 지난 6월의 계림 가족려행과 현지답사는 그렇게 이루어지고 〈상강전역 기념관에 떠오른 무정장군〉제20기, 21기, 22기는 그렇게 마음속에 뿌리내린 기념비로 계림 현지에서 씌여져 발표로 이어졌다.
‘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 련재에서 미안함도 없지 않다. 련재형식이 현지기행문인 만큼 모든 련재는 현지기행으로 씌여져야 했다. 그런데 이번 련재에 꼭 올리기로 한 조선의용군 문명철 묘소 련재는 당지 현지기행으로 되지 못하였다. 련재의 순서로 보아 주문빈과 장세걸, 무정 부분은 련재에 앞서 4월과 5월, 6월에 련속 하북 당산지구에도 다녀오고 강소 여고에도 다녀오고 광서 계림에도 다녀오면서 순차적으로 풀렸으나 문명철 부분에 이르러서는 다녀오기로 한 산서땅 흔주 황룡왕구촌에 다녀오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문명철과 그의 중국 련인 윤봉이 태항산근거지 출발을 앞두고 광서 계림에서 다시 만났기에 계림만남을 계기로 련재를 잡을 수가 있었다. 다행히 계림행에서 문명철과 윤봉 관련 풍부한 력사사료와 회고문 거의 전부를 수집할 수가 있어 련재 23기와 24기, 25기를 위해 석도에 돌아와서 써내려갈 수가 있었다. 보다 행운스러운 것은 윤봉으로 불리운 윤복구의 회고문을 계림에서 알게 되고, 계림에서 인터넷으로 구매한 회고문을 위해 석도에 돌아오자 받을 수 있은 것이라 할가.
윤봉 관련, 문명철 관련 이미 널리 수집한 사료들이 전면적이여서 회고문은 새로운 신선함은 안겨주지 못하였지만 윤봉의 경력상 약간부분은 조절할 수가 있어 좋았다. 더우기 윤봉의 회고문에서 처음 보게 된 문명철 사진, 윤봉의 옛 사진들을 접할 수가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모두가 이 땅의 우리 조선족사회가 처음 보는 사진들이였다. 계림행이 가져다준 엄청 큰 연구성과였다.
련재 1기부터 25기까지 쭈욱 훑어보며 소감을 적어보았다. 그 사이 《길림신문》 지도부와 담당 편집선생님의 로고 덕분에 무사히 련재를 마칠 수 있어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고독을 동반한 나 혼자의 알심으로 중국대륙을 누비며 중국대륙에 널리 분포된 겨레 렬사비와 렬사묘들을 아는 대로 빠짐없이 《길림신문》 기획련재로 엮어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 정녕 꿈만 같고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문명철렬사묘 외 모두가 필자가 두발로 뛰며 써낸 것들이여서 더욱 감회가 깊다. 운명은 필자를 어제도 이 길로 부르고 오늘도 이 길로 부르며 래일도 이 길로 부르고 있다…
2017년 7월 15일 위해 석도에서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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