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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필】
귀향길 6천리
내 고향 연변 떠나 한겨울 강추위를 모르는 남방에 가 대학교수에 나섰다지만 조선족 선후배 10여명과 어울리며 가족과 매일같이 통화를 가지니 연변이 지척인양 머얼리 떨어져있다는 느낌을 가져보지 못한다. 그러던 이 겨울방학에 렬차로 처음 연변행에 오르매 귀향길, 귀향길이 그리도 멀수가 없다. 남방 절강과 연변이 상상하기도 아찔한 6천리 길.
우리 일행 5명이 녕파—길림행 K76직행렬차에 오른것은 지난1월 28일 저녁 7시이다. 출발역은 절강 소흥, 연석차에서 포근한 밤을 맞다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렬차는 서서히 서주역에 들어서고있었다. 밤 사이에 경치가 수려한 항주, 상해, 소주, 무석, 상주, 진강, 남경 등지를 거치였으나 꿈나라 여행길에 오른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절강, 상해, 강소, 안휘 4개 성과 직할시를 누비여 안휘와 산동 사이의 좁은 지대ㅡ강소의 북단에 대이였다는 말인데 이미 장강이남을 넘어선터에 더는 남방의 사철 푸른 산천모습을 엿볼수가 없었다. 중국이란 이 960만 평방킬로메터의 대지는 넓기도 하여 우리는 하루밤 새에 서로 판이하게 다른 기후대에 들어섰던 것이다.
강소 북단땅 서주를 지나면 산동 최남단 땅에 들어서게 된다. 렬차는 그젯날 항일 철도유격대가 활동했다는 미산호를 가까이 두고 달리다가 오전 10시를 앞두고 천하절경ㅡ태산구내를 에돌아간다. 그러노라니 지난해 9월 3일 오후 2시~3시 사이 산동 제남을 지나 돌산구역인 태산일대를 거치던 정경이 떠오른다. 그 시각 나와 연변사범 김성숙선생은 차창가에 서서 내내 끝없는 돌산을 응시하고있었다. 태산을 지나서야 평원이던 그때가 어제런듯싶다.
태산을 지나고 제남을 지나니 산동의 북단 막바지ㅡ덕주역이다. 마침 정오가 갓 지난 시점이라 류은종선생과 서재학선생은 “덕주파지(扒鸡)를 몰라서야 안되지!”하면서 렬차에서 내리더니 덕주파지 하나 들고온다. 이미 숱한 먹거리에 연석차 술상이 차려지는데 무릇 고기라면 흥미가 없던 나에게 덕주파지가 그리도 맛날수가 있을가. 류은종, 서재학, 김성숙, 김은복 그리고 나 선후배 다섯이 웃고 떠드는속에 시간은 빨리도 흘러만 간다.
나는 다시 연석차 차창가에 나섰다. 우리 동북 연변과 서로 다른 기후대가 나의 짙은 흥미를 자아냈다. 제남, 덕주 땅을 달리고 달리여도 대지의 물은 얼줄을 모른다. 약간이나마 얼어든 모습들이 간혹 나타나기는 하나 살얼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망무제한 철도연선의 밭들엔 동맥이 쫘악 깔리여 대지는 또 다른 푸른 모습을 연출한다. 강추위 겨울이 한창인 우리 연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공화국의 960만 평방킬로메터 대지는 실로 여러가지 기후대를 낳고있구나!)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난 80년대 초반과 후반에 겨레 발자취 좇아 남녘땅, 섬북땅을 두루 답사할 때는 정신적여유가 없어서였던지 아니면 신경이 다른데 팔리였던지 이런 감탄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한것 같았다.
감탄은 감탄의 경지를 넘어 자연스레 력사의 언덕을 넘어간다. 나의 눈앞에는 지난 세기 20년대와 30년대, 40년대에 진리를 찾아, 향도를 찾아 남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태항산으로, 연안으로 달려갔던 수백에 달하는 겨레의 열혈청년들이 방불히 보이는것만 같다.
…20년대 중반이후 수백의 우리 열혈청년들이 남경, 상해 등지를 거쳐 남녘땅ㅡ광주로 달려간다. 그들은 광주에서 다시 북상하며 중국의 절반땅을 휩쓸었던 위대한 북벌전쟁에 뛰여든다. 또 위대한 남창봉기, 광주봉기, 정강산회사에서 용맹을 떨친다.
30년대 초반이후 그들중 살아남은 소수 정령들이 중앙혁명근거지 서금, 2만 5천리 장정, 섬북땅에서 활동한다.
30년대 중반이후 또 수백에 달하는 우리 열혈청년들이 조선의용대를 거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여 태항산근거지에서, 연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20년대의 그네들, 30년대~ 40년대의 그네들이 바로 이렇듯 광활한 중국의 대지에서 피어린 발자취를 남기였었다. 력사의 언덕을 넘어 오늘은 그네들과 같이 열혈의 피를 지닌 우리들이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중국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행로에서 렬차에 몸을 실었다.
“너, 무슨 생각에 골몰하니?!”
류은종교수님이 느닷없이 물어온다.
“예? ~그젯날 광활한 이 땅에서 활동했던 열혈청년들이 떠오릅니다!”
“너 생각이 어쩌면 내 생각과 똑 같니?!”
류은종교수님이 감탄에 취해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 조선의 젊은이들이 나아간다…” 노래를 부른다. 연변대 출신의 스승님과 제자는 력사속을 헤치며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 푹 취해버린다.
산동 덕주땅을 지나니 하북땅이고 천진을 앞두고 물이 얼어든 모습이니 여기가 북방임을 알려주는듯 싶다. 천진땅을 지나니 또 하북 당산땅이다. 하루길을 달린 해님이 서쪽 지평선에서 나물거리는데 때는 오후 5시 20분, 꼭 연변의 일몰과 한시간 차이를 이룬다. 중국의 시간대가 4시간 차이라더니 연변과 하북땅이 첫 한시간 차이로 안기여든다.
렬차는 어둠이 깔린 대지로 질주한다. 진황도, 산해관을 넘으니 추위속 겨울이 깔린 동북대지.꿈나락에 다시 빠져들었다가 밝아오는 새아침을 맞이하니 매하구를 지나온 반석—길림땅이 반겨준다. 길림대지 전체가 눈속세계를 이루어 우린 눈을 처음 보는 아이들로 변해버렸다. 류은종교수님은 새벽에 매하구역에 잠간 내려 보았더니 섬뜩한 강추위가 일신을 강타하더라고 말씀하신다. 북방태생이지만 그동안이나마 푸르른 남방기후에 젖어있던 우리들에게는 마치 처음 느껴보는 다른 세계에 들어선듯하다. 불과 30여시간사이에 6000리길을 달리며 남방세계에서 북방세계에 들어섰으니 실로 기후의 변화와 자연의 무상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가고가도 끝없는 눈속세계의 연장이다. 그런 눈속세계가 길림에서 장춘ㅡ도문행 렬차를 갈아타고 연변땅에 들어서서도 변함이 없다. 설경이란 주로 그림과 텔레비죤을 통해서만 보아오던 남방의 대학생 애들이 떠날 때 나보고 꼭 설경사진을 찍어오라고 절절히 부탁하던 일이 그저 말이 아니였다. 철도연선 소나무들에, 나무들에 사뿐 내려앉은 눈꽃들이 다른 한 감각을 자극한다. 간밤이 아니면 이 새벽에 눈이 내리였음을 어렵사리 보아낼수 있었다.
어느덧 내 고향 연변땅, 안도 명월구역을 금방 벗어나니 흰눈을 떠인 명월구 동쪽산ㅡ토월산이 한눈에 안겨든다. 명월구 출신인 류은종교수님은 벌써부터 흥분에 젖어들더니 몇해전에 즉흥시로 써냈다는 노래 “영월산 토월산”을 떠올린다. 2004년 8월, 이룡산 밑에 집이 있었다는 교수님이 소굽시절 뛰놀던 이룡산ㅡ영월산에 올랐는데 마침 아침이여서 토월산으로 아침해가 솟더란다. 그 아침해가 언어학자이고 시인이기도 한 교수님한테는 토월산이 달 토하는 모습으로 안기여들었다나.
달 토한다 토월산아
달 맞는다 영월산아
달노래 산노래
흥겨웁던 옛시절이
꽃향기로 풍기노나
풀내음에 젖는구나
달이 밝아 명월이냐
산 푸르러 청산이냐
어린시절 몸에 맞춰
섬섬옥수 지은 옷이
푸른 주단 펼쳤구나
너울너울 춤추누나
류은종교수님은 시를 읊다말고 제법 박자를 쳐가며 최현숙의 작곡으로 된 “영월산 토월산”을 부르다가 후렴으로 넘어갔다.
아 그리운 고향산아
옛 친구는 어데 가고
너만 홀로 설레느냐
명시인에 명가사라고 서재학선생이 연신 추어올린다. 그에 진한 감동을 느낀 내가 “귀향길 6천리” 수필이 씌여진다고 했더니 김성숙선생은 “광인선생한테 보이는것은 온통 글이구만!”하며 웃음을 지어올린다. 연변대 출신의 20대 김은복선생도 우리의 정서속에 빠져 성수가 난다.
렬차는 각일각 자치주 수부 연길에 박근한다. “귀향길 6천리” 수필이 무르익어간다. 그속에서 여러 기후대가 흘렀고 중국대지 주름잡던 그젯날 열혈청년들이 스친와중에 흰눈이 내린 길림 연변 대지가 고향애 부르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 살 같아서일가, 내 고향의 그리운 가족이며 그리운 사람들이 마주 달려온다.
(2007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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