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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영웅 무정장군(2)
2007년 12월 12일 12시 17분  조회:4523  추천:77  작성자: 리함

전설적 영웅 무정장군(2)

 

       

장정길에서의 무정은 제5군단 팽덕회장군의 유력한 조수였다. 그는 소속부대를 지휘하여 오강천험을 돌파하고 사품치는 금사강, 대도하를 건넜으며 백설로 뒤덮힌 설산, 일망무제한 초지를 지나 파서지구에 이르렀다.

그럴 때 홍4방면군의 자도자 장국도는 당중앙의 북상항일방침을 반대하던 나머지 각 군단간에 그리고 각 군단과 군위, 모택동과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제3군단을 자기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각 군단간의 정보를 이어주는 비밀전신번호책을 거두어들였다.

정세가 급변했다. 3군단은 이외의 정황에 대처하기 위해 무전기를 따로 갖추고 비밀전선부호책을 달리 만들었다. 장국도의 음모를 파탄시키고 조성된 위기를 돌려세우려면 아계에서 길잡이를 바라고있는 홍군 제1군단에 비밀전신부호책을 보내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3군단에서 1군단에 급한 무전련계를 지을수 있었다.

헌데 누구를 파견할것인가? 팽덕회장군은 무정을 생각했다. 장군은 수년간 한부대에서 같이 지내는 가운데서 무정의 사람됨됨이와 혁명에 대한 헌신성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하기에 팽덕회장군은 자기의 자술에서 당중앙의 운명, 홍군의 운명에 관계되는 이 대사중의 대사를 중국인도 아닌 《조선동지》인 《무정동지》에게 맡기고 지남침을 가지고 이틀전에 아계로 진출한 1군단을 찾아 꼭 전신비밀번호를 림표, 섭엽진에게 넘겨주라고 당부했다.

무정은 팽덕회장군의 태산같은 신임에 가슴이 뜨거워났다. 헌데 어디를 보나 망망한 초원이여서 무정으로서는 아계가 어디인지 알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길잡이도 없고 물어볼데는 더구나 없었다. 있다면 수중의 지남침뿐이다. 무작정 북으로 북으로 달려야만 했다. 그것도 물을 찾아서 말이다. 부대가 지난 방향이라면 물구뎅이곁에 밥지은 자리가 있기 마련이였다.

벌써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발치에 가마후렁이가 나타났다. 아직도 약간 온기가 있는걸 보아 홍군대오가 멀리 간것 같지 않았다. 온 몸에 힘이 솟구쳤다. 나래라도 돋쳐 훨훨 날아가지 못하는것이 한스러울뿐이다.

무정은 천신만고끝에 끝내 홍군 제1군단을 찾아 비밀전신부호책을 넘겨주었다.

 

림표, 섭영진: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다. 군단은 제자리에서 대기할것.

 

3군단이 그날로 제1군단에 띄우는 긴급전보였다. 모택동이 일신의 위험도 무릅쓰고 3군단을 찾아 발송한 전보문이였는데 장국도의 음모를 제때에 알아차리고 취한 조치였다. 장국도의 강제성초치아래 3군단이 남진한다면 3군단이 단독으로 북진할수가 없거니와 또 당중앙이 북진하지 않으면 1군단이 단독으로 북진하여서는 아무 역할도 발휘할수가 없었다.

무정은 자신이 전한 비밀전신번호책에 의해 전보문이 번역되고 중국혁명사상 일대 위기가 만구되는것을 보고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혁명전사만이 느낄수 있는 그런 기쁨이였다.

1935 10, 홍군 제1방면군의 주력부대는 승리적으로 섬북에 이르렀다. 조선인 10여명이 장정에 참가하였는데 장정도중 거의다 희생되고 섬북땅을 디딘 사람은 무정과 양림 두 조선동지뿐이였다.

1936 2월에 홍군부대는 일본침략군과 싸우기 위하여 당중앙과 중앙군위의 직접적인 지시와 지도하에서 력사적인 동정항일을 시작하였다. 조선족 양림이 홍군 15군단 제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선참으로 황하천험을 돌파할 영광스런 과업을 맡았다면 홍군총부 작전과장 무정은 한달동안의 준비과정에서 용감하고도 지혜롭게 황하대안의 적정을 자세히 정찰하면서 팽덕회장군의 미더운 조수가 되였다.

홍군동정부대는 모택동이 직접 지도하고 팽덕회가 부대를 통솔했다. 양림이 소속부대 제223 9영을 지휘하여 황화도하작전의 선봉으로 도하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후 적들의 중심진지를 돌격할 때 불행히도 복부에 중상을 입고 희생된후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으로는 무정 한사람만이 남게 되였다. 무정은 연안에 진출한 첫번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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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무정은 2 5천리 장정가운데서 렬악한 환경속에서 갖은 기아에 시달리다가 위장병을 얻었는데 장정이 끝나니 더욱 심해졌다. 홍군총부에서는 무정에게 휴식할것을 명령하였다. 무정은 가만히 앉아 휴식할수가 없다면서 학습기회를 줄것을 바랐다.

1936 6, 당중앙은 무정을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 보내여 학습하게 하였다. 항일군정대학은 처음에는 당중앙이 자리잡은 와요보에 있다가 후에는 보안으로 옮겨갔는데 무정은 이 항일군정대학의 제1기 고급간부과 학원이였다.

1기 고급간부과 학원들은 주요하게 홍군 사단급이상 간부들이였는데 모두 38명으로 헤아려졌다. 몸에 사람당 세개 상처를 갖고있다는 학원들중에는 림표, 라영환, 라서경, 진광 등 홍군의 고급장령들이 섞이였다. 무정은 이런 학원들과 함께 항일군정대학에서 철학, 정치경제학, 련공당사, 군사전략 등 학과를 배우면서 해당 군사지식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36년 이해 12월말에 무정은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하고 홍군총부에서 작전과장 중책을 짊어졌다.

1937 7.7사변이후 중국로농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총부 작전과장이기도 한 무정에게 총부 포병주임을 맡기고 포병부대 주비사업을 내밀도록 하였다.

수장들과 당조직의 지도밑에 무정은 한동안의 긴장한 준비를 거쳐 드디여 1000여명 대원에 6개련을 가진 포병퇀을 조직하였다. 포병퇀에는 퇀기관과 관통대 및 선전대를 두었다.

1938 1 28, 산서성 림분부근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 성립대회가  성대히 열리였다. 지방의 각급 지도자들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팔로군과 통일전선을 맺은 국민당 제2전구 사령장관 염석산도 대표를 보내여 축하를 표시하였다. 이날 대회에서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봉이 무정을 퇀장으로, 구창성을 정치위원으로, 원광을 정치처 주임으로 할데 관한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랑독하고 중공중앙 북방국책임자 양상곤이 축사를 드렸다. 무정을 퇀장으로 하는 포병퇀은 우리 군 력사에서의 첫 포병부대로서 무정은 명실공히 팔로군부대 포병의 최고권위, 최고지도관이였다.

포병퇀 성립대회가 끝난후 무정은 포병퇀의 명의로 전국에 통전을 보내여 팔로군포병퇀의 성립을 만방에 선고하였다. 통전은 우리 포병퇀에 대한 적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켜 무정은 상급의 비평을 받아야 했다. 필경 팔로군총부에 보고하지 않은 행동이니 그럴만도 했다. 이는 팔로군부대시기 포병퇀성립후에 생긴 무정의 한낮 에피소드가 아닐수 없다.

포병퇀이 세워지자 무정은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군중을 발동하여 포와 기자재가 매우 결핍한 곤난을 자체의 힘으로 풀어가는 한편 단기 포병간부훈련반을 꾸리고 몸소 포사격원리와 포다루기요령을 전수하였다.

1938 2월 일본침략군이 태원을 강점한후 포병퇀은 연안 등지를 거쳐 락천에 가서 단기정돈훈련을 하게 되였다. 주은래, 팽덕회 동지가 포병퇀을 시찰할 때 주은래는 포병퇀이 짧은 기간내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치하하였다. 동필무, 하룡 등 동지들도 시찰하고 높은 평가를 주었다. 이해 4~5월에 포병퇀 제1련은 황하를 거너 중양현에서 팔로군 129사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는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제4련과 9련 그리고 관찰통신대 일부는 송가천(오보)에 가서 포병공사를 수축하며 섬감녕변구를 보위하는 성스런 과업을 감당하였다. 포병퇀건립 첫돐에 즈음하여 모택동동지는 포병퇀이 항일전쟁가운데서 주력병퇀으로 되며 민족을 위해 영광을 떨치고 팔로군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제사를 써주고 금기를 증송하였다.

력사사실이 보여주다싶이 무정은 주덕, 팽덕회, 라서경 등 동지들의 깊은 사랑과 믿음을 받고있었다. 성미가 급하고 과격한것이 장애로 되지 않았다. 무정은 평소에 늘 라서경과 같이 주숙하였고 팽덕회의 중매로 포병퇀직속대 지도원인 등기(藤绮)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들 부부간에는 자식 1 1녀가 태여났는데 연려(延丽)》는 1943년생으로서 현재 북경에서 생활하고 아들 연진(延震) 1944년생으로서 1970년에 결장암으로 사망하였다.

1939 2월중순에 무정은 팔로군총부의 명령을 받고 반수에 달하는 포병퇀의 대오를 거느리고 락천에서 삼원으로 남하하고 다시 기차를 타고 동으로 황화를 건너 팔로군 전방사령부 소재지인 진동남에 가서 일본침략군과 싸웠다. 1940년에는 진동남에서 전퇀을 거느리고 중외를 진감한 백퇀대전에 뛰여들었다.

 

 

                                                                 4

 

 

백퇀대전이 끝난후 무정은 팔로군내의 조선간부들은 앞으로는 자기 민족간부양성에 중점을 두라는 모택동의 지시와 당중앙의 포치에 따라 팔로군 포병퇀을 떠나 진동남에서 관내조선인항일단체들을 통일하고 련합하는 조직사업을 맡아보았다.

일찍 1939 양력설에 무정은 자기가 앞장서 서명하고 발표한, 섬북조선청년련명편지에서 관내의 조선혁명동지들은 일치단결하여 공동히 항일하자고 호소한바가 있다. 이에 따라 관내 각지에서 모여드는 조선청년들은 무정의 소개로 연안에 있는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정치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1937 1월에도 연안에서 처음 만난 조선인 서휘와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화북에서 떠돌아다니고있는 조선청년들을 여기로 불러들여야 하고 조선에 있는 뜻있는 청년들을 여기로 불러들여야》한다고 속셈을 터놓았었다. 공산당원인 서휘는 장학량장군의 수하군관으로 있다가 서안사변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동지였다.

이에 토대하여 무정은 1940 5월부터 진동남에서 화북조선청년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단체결성에 몸을 잠구었다. 

드디여 1941 1 10, 태항산 항일근거지의 진동남팔로군전선 총사령부소재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1 대표대회가 성황리에 열리였다. 지점은 진동남 료현 동욕진 상무촌인데 회의에는 무정, 진광화, 리유민, 장진광 21명의 우수한 조선동지들이 참가하였다. 진동남의 단체와 부문, 학교들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축사를 드리고 축기를 보내여왔다.

대회에서 무정장군이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행동강령과 앞으로의 과업의 대해 보고를 드리였다. 보고내용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간부양성에 진력하여야 한다.

둘째, 중국 경내의 여러 조선혁명단체들을 통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째, 화북의 20만 조선동포를 항일투쟁에로 뭉쳐세워야 한다.

 

대회 두번째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장군이 대회에 출석하여 정치보고를 하였다. 정치보고에서 장군은 조선동지들의 련합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설립을 축하하고 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전사들에게 숭고한 혁명적경의를 표시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선동지들은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를 타승할 때까지 싸워 보다 휘황한 위훈을 세울것을 희망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1차대표대회는 3일간 열리였다. 대회는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련합회의 강령과 선언을 토의하였으며 당면 과업을 포치하고 지도기구를 내왔다. 회장에 무정, 부회장에 진광화, 조직부장에 리유민, 선전부장에 장진광 등이 선거되였다.

1 대표대회후 조선청년대표들은 무정의 파견을 받고 락양, 서안 등지로 가서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조직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대표대회에 참가한 조선의용대의 로민이 락양에 돌아가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창립소식을 알리자 조선의용대 2구분대의 대원들은 너나없이 흥분속에 잠기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의 조선인항일무장대오이다. 1938 10 10, 한구에서 정식으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한개 총대와 3 지대 100여명으로 구성되여 중국의 6 전구(战区), 남북 13개성에서 대일선전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의용대전사들은 이태 남짓한 동안 중국의 항일싸움터를 전전하는가운데서 소극적으로 항일하고 적극적으로 반공하는 장개석의 진면모를 보아냈다. 하여 제1지대와 제3지대는 1940 10월에 벌써 중경의 총대부를 찾아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태항산항일근거지와 혁명성지 연안으로 갈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팔로군중경파사처에서 사업하는 주은래의 지지를 받은데다가 화북조선청년련합회 동지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재빠르게 추진되였다.

1940년말~1941년 봄사이 각지에 분산되였던 조선의용대의 다수 전사들이 륙속 락양에 집결하여 비밀리에 황하를 건너 태항산근거지로 갈 준비를 다그쳤다. 몇달 동안의 천신만고끝에 조선의용대의 다수 전사들이 네개 패로 나뉘여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해빛찬란한 태항산근거지에 들어섰고 1941 6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였다.

 

 

김호웅 강순화 주필,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한국명인연구에 게재,

연변인민출판사,20077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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