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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 서일장군 (2)
2010년 09월 12일 19시 49분  조회:3174  추천:27  작성자: 리함


                               백포 서일장군
(2)

 

(1881~1921)

 

 

3

 

 

서일은 북로군정서 본부를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에 설치하고 사관련성소도 부근에 세웠다. 십리평은 지금의 왕청현성 서쪽가인 덕원리에서 동으로 강을 거슬러 수십리 상거한 산간지대인데 잣덕은 십리평에서도 동쪽으로 몇리 떨어진 산언덕에 위치하고있었다.

헌데《북로군정서》의 본영문제에서 개별적인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십리평이라고 하고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를 비롯한 대부분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서대파라고 하고있다.

서대파촌은 왕청현성에서 동쪽으로 25킬로메터 가량 되는 곳에 자리잡은 산간마을이다. 현성에서 뻐스를 타고 한시간쯤이면 서대파에 이르게 되는데 서대파는 온통 산으로 둘러쌓이고 골짜기는 동서로 유유히 뻗어갔다.

1989 여름 서대파를 처음 찾은 연변력사연구소 필자일행은 서대파의 산야를 둘러보며 흘러간 력사의 갈피갈피를 되새겼으나 마을에 이른 우리는 서대파마을 로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만 실망하고말았다. 당지 로인들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십리평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서대파가 본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군사적요새지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찬탄해마지 않던 우리의 열정은 대번에 사그라졌다. 그래도 내친 걸음이라 우리는 서대파촌에서 20킬로메터 가량 떨어진 십리평향으로 가보았으나 안내자를 찾지 못한데서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우리는 다방면으로 각종 자료를 헤아리며 선색을 더듬고 일면 왕청현에서 다년간 현안의 력사와 교육사연구에 종사해 문호갑 로선배들을 찾아뵙는 가운데서 북로군정서의 본영은 서대파가 아니라 왕청현 십리평향 잣덕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개별적 자료들에서 본영을 십리평에 두었다고 하는것은 다소 차이가 보이긴 하나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1991 12 7 우리는 십리평을 다시 찾았다. 십리평향 십리평촌에서 발길을 멈추니 도로켠의 지명패는 《장영촌》이라고 박혀있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촌은 워낙 향소재지였는데 몇년전에 향정부를 태평촌으로 옮긴후 지난해 마을 이름도 장영촌으로 고치였다.

장영촌과 향소재지와의 거리는 1킬로메터반 정도밖에 안되였다. 우리는 구간을 걸으면서 십리평의 이모저모를 익혀두기도 했다. 그날따라 매서운 칼바람이 일신을 사정없이 강타했지만 북로군정서의 본영—잣덕을 찾아냈다는 희열은 우리의 걸음을 재우쳐 주었다.

십리평향소재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향의 간부들한테서 향안의 경작지는 420헥타르로서 인구당 16.7아르 돌아가며 죄다 척박한 모래불땅이여서 강냉이, , 조이의 아르당 소출은 내내 10킬로그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것을 알았다. 행정구역은 22개사로 나뉘여지고 인구는 2887명에 달하는데 조선족은 겨우 20여세대밖에 안되였다. 광복전에 십리평이란 버덕안에 조선인 200세대가 살고있었다는것에 비해볼 너무도 적은 수자가 아닐수 없었다.

(여기엔 필경 원인이 있을텐데?)

우리의 의문은 68살인 백원옥 안로인의 집을 찾은데서 스스로 풀리였다. 우리는 함경도식의 수수한 조선집 가마목에서 로인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원옥은 조선 평안도 순천군태생으로서 그가 십리평에 들어선것은 광복직전이였다. 그해 그는 18살이였는데 한해 먼저 십리평에 자리잡은 시아버지를 따라 이주길에 올랐었다. 시할아버지는 본세기 10년대에 벌써 십리평사람이된데서 백원옥으로 말하면 십리평이 그리 생소한 지대가 아니였다.

당년 십리평의 조선사람은 200세대에 달했다. 그때 일대는 밀림지대였다. 일제놈들은 여기에 목재판을 앉혔는데 조선사람 거개가 목재 채벌과 가공판에서 막벌이일을 하고 있었다. 목재판이라 지금의 장영촌에 일본분주소가 도사리고 앉아 여기(향소재지) 경찰대대를 세우고 사금구에 경찰소대를 세웠다. 8.15광복을 맞은후 조선으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흩어진데서 조선사람 수십세대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20여세대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십리평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생긴건지요?

《듣자니 독립군 때 부터라오. 그때는 지대가 나무로 찼는데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소생했다더구만. 십리평이란것도 벌의 길이가 10리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그렇다면 잣덕이란 어디를 가리킵니까?

《그젯날 여기(향소재지) 잣덕이라 했소. 보다싶이 북쪽산기슭은 온통 잣나무로 덮였고 지대가 아래 십리평마을에 비해 언덕진곳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지. 잣덕이란 지명도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지은거라오.

백원옥 안로인과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시야는 훨씬 넓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해전에 향소재지가 들앉기까지 이곳을 태평촌이라 했는데 그것도 광복직후 그의 시할아버지 조병선로인(당시 60여살) 지은것이다. 그때까지 일대의 사람들중에 중병으로 앓거나 때이르게 죽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해서 시할아버지가 태평촌이란 이름을 제기했는데 당지의 한족들도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마을가의 서쪽언덕에 오르니 잣덕의 북쪽산과 펑퍼짐한 산기슭, 아래변두리에 자리잡은 향소재지의 전경이 눈앞에 환히 펼쳐졌다. 저기 건너편 북쪽산엔 그제날의 잣덕유래를 나타내는듯 잣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었다.

북로군정서는 바로 이곳 잣덕의 북쪽 펑퍼짐한 산기슭 밭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집 2개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메터 좌우의 련병장 두개가 건설되였다. 독립군전사들은 두개의 련병장에서 매일 긴장히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창격술을 익히며 실탄훈련에 뛰여들었다.

당년 십리평에서 잣언덕까지는 소수레가 다닐만한 길이 한구간 있고 나머지는 한사람이 다니기도 불편한 오솔길이였다. 한데서 북로군정서는 숱한 인부를 동원하여 소수레가 다닐수 있는 길을 닦았다고 한다.

사관련성소는 잣덕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동북쪽계곡에 설립했다고도 하고 잣덕에 설립했다고도 하며 본부부근에 설립했다고도 하는데 딱히 어느곳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력사학가들은 자료를 놓고 의론할 따름이지 누구도 준확한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우리가 자료에 의거하여 동북쪽계곡을 따라 산굽이까지 올라가 보아도 묘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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