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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영웅 무정장군(4)
2007년 12월 14일 06시 52분  조회:3366  추천:54  작성자: 리함

전설적 영웅 무정장군(4)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무정장군은 조선의용군주력이 연안에 간후 의연히 한패의 조선동지들과 함께 태항산근거지에 남았다. 그들에게는 적통치구와 의거해오는 동지들을 맞아들이고 조직하는 과업, 태항산에서 계속 인재를 키워내야 하는 과업, 지하공작자들은 화북 각지와 동북의 조선족지구에 파견하여 조선사람들을 독립동맹의 두리에 묶어세우며 반일투쟁에 궐기시키는 과업들이 놓이였다.

1944 여름 밀가을이 끝나자 무정장군은 한패의 신입전사들을 조직하여 연안으로 보내게 되였다. 그떄 북평서 태항산으로 온지 1년도 안되는 리섭도 덩달아났다. 이때 무정장군이 리섭을 찾아 완수해야 간고한 임무가 있다면서 만류하였다. 간고한 임무란 이미 꾸린 대중병원과 3.1상점과 더불어 방직공장을 하나 꾸려 군복을 자체로 해결하는것이였다.

태항산근거지 군민들의 열성적인 지지와 한동안의 학습, 준비를 거쳐 조선의용군의 방적공장이 일어섰다. 나무로 만든 방사기와 방직기는 4 그리고 타면기 공장설비들이 갖추어지자 무정장군은 군정학교의 10여명 녀전사들을 보내여 베를 짜도록 하였다. 남자들은 방사기를 돌리며 실을 뽑았다.

그때 태항산 군정학교는 말이 학교이지 전문교실이 따로 있는것도 아니고 낡은 절간을 수리하여 숙사 교실로 썼다. 책상걸상도 없어 얇은 이불을 묶어서 깔아 걸상으로, 자기 무릎을 책상으로 하였다. 무정장군은 리섭을 찾아 걸상대신용 쪽걸상을 부탁하였다. 이에 리섭은 헤염 잘치는 김평이와 함께 청장하에 나가 목숨을 내걸고 산홍수에 밀려가는 나무들을 건져냈다. 잇따라 리섭과 목수칸동무들에 의해 200여개의 쪽걸상이 마련되여 눅눅한 땅바닥에 앉아 공부하던 일이 과거사로 되였다.

그뒤 연안에서 미국고찰단이 태항산으로 오게 되였다. 무정장군은 재차 리섭을 찾아 손님접대용 안락의자와 둥근 탁자를 만들 과업을 주었다. 이튿날 목수일이 시작되자 무정은 시간을 타서 리섭의 일손을 거들었고 총부의 김영숙조직부장도 도와나섰다. 한데서 처음해보는 일이라 수수해긴 했으나 하루새에 보기좋은 안락의자와 둥근탁자가 만들어졌다. 연기에 그을린 토막집을 회칠하고 안락의자와 둥근 탁자를 차려놓으니 제법 훌륭한 응접실이 마련되였다.

드디여 연안에서 미국손님이 왔다. 그들이 누구인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찍 대련호텔에서 료리기사로 있던 안희현이 빵과 료리를 만들고 마른 감속에다 호두속을 닦아서 넣어 간식용  쵸콜레트까지 준비하였다. 미국손님들은 입맛은 물론 조선동지들의 열성적인 접대에 대만족이였다. 리섭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손님들이 태항산을 떠나 자국으로 돌아간 사흘후에 무정장군과의 담화내용이 신문지상에 보도됐다고 한다.

태항산에서의 무정장군의 활동은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1943 6월중순에 연안의 《해방일보》기자가 국제공산당의 해산과 관련하여 태항산근거지에서 무정을 찾아 취재할 무정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태항청년혁명학교를 대표하여 장기간에 걸쳐 동방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지원했던 국제공산당의 획기적의의가 있는 이번의 결의를 한맘으로 옹호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국제공산당이 해산된후부터 각국의 혁명은 본국 공산당의 령도를 받아야 하는데 조선에는 공산당이 없으니 조선의 해방운동이 희망이 없게 되였다고 여긴다. 이런 견해는 옳지 않다.금후의 조선해방투쟁에서…조선혁명단체는 단결을 가일층 강화해야 한다. 단체끼리 단결하여 전 민족의 단결을 이룩함으로써 조선민족해방의 승리의 날을 앞당겨야 한다.

국제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 조선의 현실과 조선해방투쟁과업을 대비한 무정장군의 일가견이다. 기자와의 대담은 1943 6 16일부 연안《해방일보》에 실리였다.

한편 무정장군은 일본공산당 대표 오까노 스스무가 연안에 사실에 언급할 반가운 일이라고 하면서《그가 이번에 연안에 온것은 동방약소민족의 해방운동에 직접적인 의미를 갖고있다.》고 지적하였다.

연안 해방일보기자와의 대담에 앞서 무정장군은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청년혁명학교의 련명으로 일본공산당 대표 오까노 스스무를 열렬히 환영한다는 전보를 연안에 보냈다.

어느덧 겨울동안의 긴장한 학습과 군사훈련이 끝나고 꽃피는 1945 새봄이 찾아왔다. 태항산근거지에서 이른봄부터 대생산운동을 벌리자 조선의용군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분대별로 농업생산계획이 토론된후 무정장군은 어느날 리섭이와 김흥이를 불러 험준하고 강파른 오지산에 올라가 감자를 심을수 있는 개간지가 있는가 보라고 지시했다. 그들 둘이 당지 로농을 찾아 길을 물으며 벼랑길을 톱아 오지산에 오르니 펑퍼짐한 산우에 묵밭도 있고 넓은 개암밭도 있었다. 잇따라 군정학교의 조선동지들이 매일 가파로운 뒤길로 오지산에 올라 개암밭을 일구고 감자를 심었다. 늦게 개간한 묵밭에는 녹두를 심으니 여름에 들어선 감자는 영글기 시작하며 풍작을 약속했다.

 

 

7

 

 

1945 7월초에 무정장군은 팔로군총부의 명령을 받고 비행기를 타고 장년에서 태항산의 동지들에 앞서 연안에 갔다. 7 4일에 연안에 먼저 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전체 사생들, 사무원들이 무정장군을 위해 환영대회를 가지였다. 1945 7 7일부 연안《해방일보》의 보도이다.

알다싶이 무정장군한테는 연안이 생소하지 않았다. 아래 연안일화 셋을 적어본다.

1.     정률성의 사랑이 곡절을 겪을

1936 12 12, 서안사변이 있은후 당중앙과 중앙군위 지도기관은 와요보, 보안을 거쳐 연안으로 옮겨갔다. 그때 보안주재 중국조선인 전권대표 김산과 팔로군 포병퇀 퇀장 무정 동지도 연안에 들어섰다. 그들은 연안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조선인이였다.

1941 11, 무정장군은 섬감녕 변구 2 참의회 참석차 전선에서 다시 연안으로 왔다. 그때 연안의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성악을 가르치던 조선족 정률성과 항일군정대학 녀학생대 대장 정설송이 이미 사랑을 속삭이고있었는데 《중국녀자대학》에서 정률성에게 이른바 정치문제가 있다며 막아나서는데서 그들의 사랑은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되였다. 시기의 정설송은 1939 7월에 항일대학 본교가 전선으로 이동하고 녀성대 대부분 성원이 연안의 《중국녀자대학》에 합병된데서 정설송은 《녀자대학》고급연구반에 들어가 학습하게 되면서 녀자대학교 구락부주임을 겸하여 하였다.

마침 둘사이의 사랑이 곡절을 겪고있다는것을 알게 무정장군은 정설송을 친히 찾아 담화하였다. 이때를 두고 정설송은 자기의 회고담《영원한 기억》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변구참의회 개막전야에 팔로군포병퇀 퇀장 무정동지가 전선에서 회의에 참가하러 연안으로 왔다. 나는 녀대 부교장한테서 무정은 2 5천리 장정에 참가하였던 조선동지로서 당에서 그를 아주 신임하고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정동지의 도착은 나와 률성의 사이에 전환점이 생기게 하였다.    그이는 률성이를 특히 귀여워하셨는데 동생처럼 생각하였다. 그이께서 우리들의 련애에 파동이 생긴걸 알고는 즉시 나를 찾아 담화하였다. 그이는 률성이를 잘알고 있다면서 률성이의 큰형과 둘째형도 알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정률성에게 문제가 없어요. 그의 가정은 혁명가정이에요.>하고는 나더러 더는 주춤거리지 말라고 하였다. 무정동지의 말을 들은 나는 마음이 거뜬해졌다. 하지만 조직의 권고가 그냥 머리에서 맴돌았다. 무정이 열정적으로 우리 둘과 사진을 찍자고 하였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피하였다. 변구참의회가 있은후 조직에서는 나를 새로 선거한 변구정부 부주석 리정명선생의 비서로 파견하였다. 나는 거듭 고려하던 끝에 당중앙 조직부에 정률성과의 결혼여부를 문의하였다. 조직에서 <간섭하지 않는다. 둘의 결정에 따른다.> 표시하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이 나왔다.

 

1942 5월에 정률성은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하여 모택동동지의 연설을 직접 들었고 이해 8월에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파견된 무정장군을 따라 태항산으로 떠났다.

2.     동방 민족 반파쑈대표대회 주석단 성원

1941 10 26, 동방 민족 반파쑈대표대회가 연안에서 소집되였다. 무정은 대회주석단 성원으로 뽑히였다. 대회의 사흗날(28), 이날 여러 민족 대표들이 각기 연설하였는데 조선대표 무정이 세번째로 연설하였다. 연설내용은 두개 부분으로 되였는데 첫번째부분은 《망국후의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방면의 정형》이고 두번째 부분은 《조선인민의 혁명투쟁》이였다. 연설의 결속부분에서 무정은《조선이 반일투쟁가운데서 중요한 전략적위치에 서있으며 조선은 기필코 조선인 자신들의 조선으로 될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회 마지막 (30), 무정이 대회페막사를 올렸다. 대회에서 동방각 민족반파쑈동맹이 결성되였다. 무정이 동맹의 지도성원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모택동동지도 대회에《나는 대회의 주요한 목적은 단결이며 민족이 단결하여 파쑈를 뒤엎는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는 축사를  보내왔다.

3.     동방민족대표 좌담회에 참가

1941 9 21 오후 2시에 연안의 군인구락부에서 동방 여러 민족벗들이 참가한 좌담회가 소집되였다. 좌담회는 주덕총사령이 직접 소집하였는데 여러 민족대표들이 직접 수표하여야 한데서 출석부에는 여러가지 부동한 문자들이 씌여졌다. , 대표 50명의 희귀한 이름들이 한자로도 번역되여 이채를 끌었다.

조선대표로 좌담회에 참가한 무정장군은 자기의 소감을 솔직하게 그대로 피력하였다.

《내가 중국에서 이런 좌담회에 참가하기는 이번이 두번째이다. 첫번째는 대혁명시기에 무한에서 <반일대동맹회의>였다. 그러나 회의는 얼마 지나서 대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열렸던지 말았던지 모를 지경으로 성과가 유야무야 말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 항일민족근거지에서 많은 민족의 벗들이 모여 일본파쑈를 반대하는 모임을 가졌다. 나는 동방의 여러 민족이 친밀히 단결하여 왜놈들을 종국적으로 쳐부시고 여러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쟁취할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는 1941 9 22일부 연안《해방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연안에서 활동한 무정장군의 동방민족대표좌담회에서의 발언이다. 상기 일화 셋으로부터 우리는 1945 이전시기 이미 연안에서 활동한 무정장군의 발자취를 그대로 추적할수 있게 된다.

 

김호웅 강순화 주필,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한국명인연구에 게재,

연변인민출판사,20077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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