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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72돐기념】 단재 신채호 (1)
2008년 04월 11일 11시 39분  조회:3943  추천:98  작성자: 리함


                     단재 신채호 (1)

          (1880~1936)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그의 호 단재가 상징하는것처럼 일편단심 조선의 독립과 민족사의 정기를 천추에 길이 빛내기 위해 일생을 분투한 열렬한 독립운동가와 계몽사상가이며 탁월한 사학가와 작가이며 정력적인 정치, 문필활동가였다.

 

                                                1

 

신채호는 처음 호를 일편단생(一片丹生)으로 쓰다가 너무 길어 단생이라고 줄이고 다시 단재라고 고치였다. 아호와 필명은 무아생(無涯生), 금산협혈인(錦山夾頁人), 연시몽인(燕市夢人), 한놈, 적심(赤心) 등을 썼으나 그중 단재란 호가 가장 널리 쓰이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일제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류맹원(劉孟源), 박철(朴鐵), 옥조숭(玉兆崇), 왕국금(王國錦), 윤인원(尹仁元) 등 가명을 쓰기도 했다.

그의 본관은 고령으로서 가계를 보면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비의 전통을 이어온 사족(士族)집안이였다. 조부 성우는 일찌기 정모문과에 급제하여 임금께 간하는 일을 맡아보는 사간원의 정륙품 정언(正言)벼슬을 하다가 고향인 충북 청원군 랑성면 귀래리로 락향하여 농사일을 거들며 사숙을 꾸리였다. 그는 안동 권씨부인을 맞아 21살 때인 1849년에 외아들 광식이를 두어 선비로 키웠으나 기울어지는 가세를 돌려세울 힘이 없었다. 손자 채호가 태여날 무렵에는 자기 처가인 충남 대덕군 산내면어남리 도리미(일명 봉소골) 마을 외딴 묘막에 옮겨앉아 째지게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1880년에 광식이는 32살이였다. 이해 부인 밀양 박씨가 태기가 있더니 12 8 (음력 11 7) 귀염둥이 아들을 보았다. 맏아들 신재호에 이어 8년만에 안아보는 옥동자였다. 처음에 이름을 채호(寀浩)라 했다가 채호(采浩)라고 고쳐지었다.

신채호는 태여나서부터 병약하여 앓음자랑도 끝이 없었다. 그러던 일곱살 때 기둥같이 믿던 아버지가 훌렁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재호형은 흐느끼며 울었으나 어린 채호는 아버지를 그의 고향 충북 청원도 랑성면 추정리 가래울에 묻도록 어리둥절할뿐이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후 살림형편은 더욱 궁핍했다. 할아버지는 이듬해 일가식솔을 데리고 친척들이 많이 모녀사는 충북 청원군 랑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이사하였다. 채호는 6살때부터 형 재호와 함께 서당에 다니였다.

할아버지는 가난속에서도 두 손자에게 가세를 춰세울 큰 기대를 걸고 엄하게 학문을 가르쳤다. 하여 채호는 아홉살 때 벌써 《통감》전질을 해득하고 한시를 곧잘 지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채호가 아니였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의 훈도아래 10여 살 때에는 행시(行詩)까지 척척 지어냈고 이태후에는 《사서삼경》을 숙달하였다.

그만큼 신채호는 소시적부터 문학과 깊은 인연을 맺았다. 《리순신전》 등 조선고전문학작품들과 《삼국지》, 《수호전》, 《열국지》 등 중국고전소설들과 당시(唐詩) 등을 탐독한것은 그 시절이였다.

소년 채호에게 풍모와 재질이 한창 피여날 때 뜻하지 않은 재난이 덮치였다. 끔찍이 믿고 따르던 형 재호가 20살에 순흥 안씨 형수와의 슬하에 향란이라는 일점혈육을 남기고 요절했다.

채호와 재호사이의 우애의 정은 각별했다. 아버지가 사망되후 형도 농사를 거들고 가사를 돌보는 한편 동생과 같이 학문과 문장에 몰두하면서 자신들의 긍지를 키워왔었다.

아버지 사망때와 같은 크나큰 충격, 소년시절의 한가닥 믿음의 뿌리가 절단되니 채호는 일순 눈앞이 캄캄해나며 눈물을 거둘줄 몰랐다. 후날 고달픈 망명생활중에 그는 한시 《형님기일에》를 써서 망령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1895년 신채호가 16살 때, 형이 세상떠나 3년만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의사에 따라 풍양 조씨를 맞아 성례를 올리고 상투를 풀어야 했다.

1895 8, 국모 민비가 왜적에 의해 시해되였다. 이것을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두메산골에서 이 소식을 받아들인 소년 신채호는 솟구치는 의분을 참을길 없었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으로 급속히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두고 통탄했다.

 

     2

 

18살 되던 해 신채호는 천원군 목천에 있던 대학자이며 고관인 양원 신기선 대감댁을 드나들면서 신구학문의 장서속에 빠지였다. 그가 짧은 시간내에 대부분의 장서들을 독파했을 때 신기선은 놀라마지 않았다. 책 한권을 끄집어내고 어렵고 까다로운 대목만 물었는데 채호의 대답은 청산류수였다. 이에 신기선은 《너는 이 나라를 뒤흔들만한 대학자가 될 소양이 충분하다》고 크게 감동된 나머지 서울의 성균관에 천거하여주었다.

1898년 가을, 이해 19살밖에 안된 신채호는 서울에 올라가 3년제 대학인 조선의 최고학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는 재능과 실력이 월등하여 성균관에서 가장 총애받는 제자로 되였다. 성균관 관장 리종원은 자기를 아는 사람은 오직 신채호 한사람뿐이라고 했고 당대의 지사이며 성리학 대가였던 성균관 경학(經學)담당 스승 리남규는 자기의 제1제자에 신채호라고 거듭 외웠다. 그의 명성은 온 서울장안에 뜨르르하였다.

1898년은 신채호로 말하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뜻깊은 한해였다. 어릴 때부터 전수받아온 유교사상은 이 시기부터 자리를 내고 새로운 사물ㅡ자산계급개화사상이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신채호는 서울에 올라간 그해 늦가을《독립협회》에 참가하여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1896년에 조직된 이 독립협회는 조선의 애국문화운동을 지도한 첫 애국단체였다.

이해(1898) 겨울, 독립협회는 기습적인 해산명령을 받고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휘말려들었다. 소장파 신채호도 리승만, 리승훈, 안창호, 박은식, 리동휘, 리갑, 안병찬 등과 함께 체포되여 첫 옥살이를 당했다. 다행히 나이 어리고 신기선이 힘써준 덕에 대검거선풍에서 쉬이 풀려나왔다.

이때의 신채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였다. 그는 교육계몽운동과 언론애국운동으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붙잡으려고 결의하고 1901년 가을 충북 청원군 랑성면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때 집에는 할아버지가 안계시고 어머니 등 여러 식구가 있었으나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밤이 깊도록 친구 신규식, 신백우 등과 몇차례 모임을 가지고 인차리(仁次里)에 운동학원을 세웠다. 채호와 규식은 동향관계에다가 서울공부, 독립협회의 같은 소장파 회원이였기에 친분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들은 굳게 손잡고 민중의 민족의식을 깨우쳐나갔다.

그때 신규식은 서울에 중동학교를 세우고 또 청동학교까지 세워 몹시 바삐 보냈다. 신채호는 신규식, 신백우와 토론하고 문동학원을 랑성면 광저리의 신충진 사랑방에 옮기고 상동학당이란 간판을 건뒤 셋이 함께 개화자강운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1905 2월 신채호는 향리에서 성균관박사로 임명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봉건관리란 이 길을 택하지 않고 결연히 상투를 잘라버리였다. 그로 말하면 낡아빠진 상투는 봉건에 대한 예속을 의미하였다. 그뒤 성균관학생들은 모두가 머리를 깎고 개화물결속에 뛰여들었다.

1905년 여름, 신채호는 서울《황성신문》사 사장이며 애국계몽사상가인 장지연의 청을 받아들이고 《황성신문》의 론설기자로 들어갔다. 《황성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의 하나로서 매주 2회씩 간행되던《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받아 1898 9 5일 국한문혼용의 일간신문으로 창간된 신문이다. 《대한매일신보》 등과 함께 자주민권사상과 개화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서의 중심적언론기관으로 된데서 민중의 큰 지지와 환영을 받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하기 위하여 1905 11월에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파견하였다. 이달 9일 서울에 도착한 이또는《한일신협약》안을 제시하고 강제체결을 서둘었다. 이것이 이른바《을사5조약》이다. 드디여 11 17일 캄캄한 밤에 전문 5조의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여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로 전락되여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일제의 통감정치가 실시되였다.

이튿날 11 18일《을사조약》이 발표되자 온 나라가 분격에 떨었다. 나라 민중은 리완용 등 매국5적을 규탄하면서 불법조약의 무효를 극구 주장하였다. 19일에 통곡소리가《황성신문》사를 뒤덮었다. 신문을 앞질러 제작하고저 주필 장지연이《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사설을 써내려갔다. 주필이 설음에 북받쳐 끝을 맺지 못하자 론설기자 신채호 등이 나서서 계속 필을 들었다.

사설은 일제의 무모한 강압체결을 규탄하고 5조약에 조인한 대신들을 개돼지보다 못한 매국적이라고 통책하였다.

11 20일에《황성신문》에 이 사설이 실리자 온 서울, 온 나라가 울음바다로 번지였다. 일대충격과 분노가 전체 조선을 휩쓸었다. 피눈이 된 적들은 《황성신문》을 즉각 압수하고 무기정간처분을 내렸으며 장지연, 신채호 등  10여인을 구속하였다. 장지연이 단독기사라고 거듭 강조한데서 신채호 등은 얼마 안되여 풀려나왔지만 주필은 64일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황성신문》이 정간된후 신채호는 울분속에 잠기였다. 이 시기 그는《대한매일신보》의 총무 량기탁의 권유로 《대한매일신보》의 론설위원(후에는 주필)이 되여 삐여난 글을 쓰면서 만천하애독자를 끌었다. 특히 1905 12 28일에 발표한 사설 《재시일유방성대곡 (在是日又放聲大哭)》은 2천만동포의 울분과 비통을 힘있게 자극하였다. 신문의 부수는 상승선을 그으며 대폭 늘어났다.

일제놈들은 《대한매일신문》을 페간시키기 위해 갖은 음모와 획책을 시도했으나 신채호를 선두로 한 언론진은 불굴의 기개와 투지로 일제 및 그 친일분자들과 날카롭게 맞서싸웠다.

1906년 봄에 《대한자강회》가 조직되고 그 이듬해 11월에 《대한협회》로 다시 발족하였다. 신채호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대한협회회보》창간호에 《대한의 희망》이란 쟁쟁한 글을 발표하여 민중에게 희망의 복음을 안겨주었다.

          "겨레 항일지사들"(전4권)제3권, 민족출판사 출판,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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