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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72돐기념】
단재 신채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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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겨울, 의렬단 단장 김원봉(약산)이 신채호를 찾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의렬단은 1919년 11월 동북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인데 폭력투쟁을 목표로 내세웠다. 조직당시 《공약10조》라는 내부적인 강령과 수칙은 있었으나 만천하에 의렬단의 폭력투쟁의 정당성을 천명할만한 무엇이 없었다. 내부 단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폭력속에 담긴 반일투쟁정신을 일반 민중에게 널리 알리자면 쇠소리나는 선언문을 작성해야 했다. 누구한테 말길것인가. 단의 참모격이며 리론가인 류자명은 신채호를 추천하였다. 김원봉도 평소 신채호가 저명한 력사학가이고 독립운동의 대선배이며 투철한 독립운동가라는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원봉이 신채호를 찾았었다.
김원봉은 신채호와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그가 진부하고 고루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의열단의 폭력반일과 그 투쟁로선을 포섭해주는 대선배임을 알고 의렬단의 행동강령과 투쟁목표를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의렬단의 혁명선언문을 작성해줄것을 바랐다. 신채호는 쾌히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상해로 가서 프랑스조계지안의 어느집 지하실에 설치된 고성능폭탄제조실을 돌아보았으며 중국인 모 전염병원장의 부인 조씨댁에 거처를 잡았다.
그로부터 한달 남짓이 지난 1923년 1월, 장장 6400여자에 달하는《조선혁명선언》 (일명《의렬단선언》》이 탈고되였다. 이로부터 의렬단의 폭력적태도는 한층 정당화되고 리론적지도를 가지게 되였다. 의렬단에서는 선언문을 인쇄에 교부하였으며 의렬단원이 휴대하는 필수품의 하나로 되여 조선 국내와 중국, 일본 각지에 널리 뿌려졌다.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후 의열단의 항일무력투쟁은 일대 앙양을 가져왔다. 1923년 1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투탄사건, 1923년 3월 김시현, 황옥, 류석현 등의 폭탄반입사건, 1924년 1월 김지섭의 일본도꾜 이중교투탄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조선혁명선언》을 품속에 간직하고 독립항쟁에 나선 투사들이였다. 1926년 12월에 라석주가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 행투탄총격사건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신채호와 김창숙이 밀모한것이다. 신채호는 유사시에 쓰려던 폭탄 2개를 내주었고 서울의 안해한테 라석주의 길안내를 부탁하였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일제강점하의 민족주의독립운동의 극치를 보여주고있다. 그는 이 선언문 서두에서 《강도일본》이란 격렬한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독립사상공개문서에서의 최초사용으로 된다. 그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민중직접혁명》론을 정립하고 폭력에 의한 독립투쟁로선과 전략을 내세웠다. 의열단의 명의로 발표되였지만 그를 알거나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모두 《이는 단재의 글이군!》하며 감탄했다.
1923년 정초에 각지 각파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국민대표회를 열었다.
3월중순에 림시정부개조안이 의사일정에 오르자 회의참가자들은 림시정부를 조직, 개편하자는 소극적인 개조파와 결렬청산하고 조직을 새로이하자는 적극적인 창조파로 대립되였다. 하여 5월에 이르러 국민대표회는 철저히 실패하고말았다. 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했다가 회의결과에 크게 실망하였다.
신채호는 지긋지긋한 파쟁에 질리였다. 이로부터 오는 허탈은 큰것이였다. 게다가 처자를 멀리 서울로 보냈건만 자기의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어려웠고 조용히 앉아 글을 쓸자리조차 없었다. 1924년 초봄에 그는 중국인 진씨(일설은 북경대학 교수 리석증이라고 한다)의 권고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북경에 있는 관음산에 가서 6일 고행 끝에 입사하여 몇달간 지냈다.
그때 류자명은 북경에 없었다. 그는 뒤늦게야 신채호가 어디론가 《출가》하고없다는것을 알았다. 후에 북경에 돌아오니 또 《귀가》하였다는것이엿다. 그해에 류자명이 신채호를 찾으니 그는 《출가》와 《귀가》의 원인을 돌려주었다.
《내가 관음사로 간것은 불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다만 조용한 곳을 찾아 한맘으로 력사글을 집필하기 위해서였소. 헌데 입산하니 사정이 다르더구만. 그곳은 내가 상상한것처럼 세속에서 벗어난 도화원이 아니였소. 그곳도 현실세계와 이어져 복잡하기 그지없었다니까. 조용히 앉아 저술에 힘쓴다는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소. 그래서 돌아온 거요.》
그후 류자명은 신채호와 거의 같이 있다싶이 하며 대만 동지들인 범본량, 림병문 등과 가까이 보냈다. 하루는 그가 밖에 나갔다가 자기의 처소로 돌아오니 책상우에 신채호가 남긴 글쪽지가 있었다. 글쪽지에는 《나는 또 관음사로 가기로 결정했소!》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급해난 류자명이 급급히 신채호의 처소로 가니 마침 그는 떠나지 않고있었다.
《어떤 곤난이 있어도 다시 출가해선 안됩니다.》
류자명이 말하자 신채호는 선선히 응답하였다.
《나는 이미 다시 가지 않기로 결심했소. 그러나 계획중에 있는 력사론문과 저서는 될수 있는 한 계속 써내려가야겠소.》
그후부터 신채호는 자기의 력사론문들을 서울의 동지들한테 보내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 륙속 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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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신채호의 세계관은 극히 복잡하였다. 그는 파쟁에 시달리는 민족독립운동에 실망과 의혹을 던지기도 하고 《조선혁명선언》에서 제시한바와 같이 《민중혁명론》에 환희고무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이며 맑스주의의 전파자이며 북경대학교수 겸 도서관 관장인 리대소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저는 전후 10년 간을 정처없이 방황하며 지리한 세월을 지치고 시달리며 초로같이 깃들이고 언쥐같이 마시면서 구차히 쇠잔한 목숨을 보존하여 올뿐이니 나아가서는 능히 국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물러가서는 능히 전야에 몸소 밭갈아 숨은 지사를 벗하게도 못합니다.
국가흥망이란 일조의 돌발이 아니라는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그러면 장차 이 몸이 나갈곳은 어디일가? 〈유어도 아니오, 전어도 아니어니 못속으로 들어가랴! 솔개도 아니어니 하늘 우로 올라가랴!〉라고 한시를 외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이 편지에서 신채호는 자기가 걸어온 투쟁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고뇌에 찬 자기 심정을 피력하였으며 극히 고통스러운 모대김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신채호는 리대소한테 도서열람초청편지를 썼다가 북경대학교수 리석증을 만나 그의 소개로 리대소를 만났으며 북경대학도서관에 무상출입하였다. 그는 리대소와의 친분을 두터이하면서 직접 맑스ㅡ레닌주의를 접촉할수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리해를 같이하였다. 또한 조선인 조기공산주의자들인 리동휘, 김립 등과 이미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다. 중국의 손중산이나 로신도 그가 아주 존경하는 인물들이였다.
더욱이 밝힐것은 그가 중국공산당의 기관지 《향도》와 맑스의《자본론》을 읽었고 로씨야 10월혁명을 긍정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당시의 창작품들인 수필, 정론 등에서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리대소를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로 우러르며 《학계의 령수》로 《우뢰같이 익히 듣고 항상 사모하여마지않았》다는것은 그의 마음의 진실한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신채호는 1923년을 전후하여 현실을 심각히 정시하게 되였다. 내분과 파쟁에 휘말려 든 독립운동가의 현실, 일제의 《자치론》 등 회유책에 말려든 타협주의경향, 림시정부의 독립로선인 외교론, 준비론 등은 그에게 환멸과 염오감을 안겨주었다. 1923년 5월의 결렬은 그를 크게 실망시켰다. 1923년이후 독립운동이 침체와 시련을 거듭하니 더욱 그러했다. 이런 가운데서 신채호는 자산계급민족운동에 점차 실망을 느끼고 몽롱하나마 무산계급의 민중혁명에 동경하게 된다. 이점은 1925년의 평론 《랑객(浪客)의 신년만필》, 1928년의 정론 《선언》과 《조선혁명선언》, 소설《룡과 룡의 대격전》 등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이런 글들에서 그는 민중혁명을 지지하고 무산계급의 폭력혁명을 긍정 옹호하고 있으며 새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선언》에서 신채호는 맑스주의사상의 긍정적영향을 받은 흔적을 보이고있으며 《랑객의 신년만필》에서는 《유산자보다 나은 무산자의 존재를 잊지 마라》고 하였다.
상술한바는 신채호를 단순히 민족주의자로만 결론할 수 없으며 민족주의란 이 차원에서만 평가할 수 없다는것을 제시해주고 있다.
중국에서의 새 사상의 흐름과 심각한 정치, 사상변혁은 신채호를 크게 충격하였다.
그러나 신채호는 그가 걸은 길과 1920년대의 시대적 조건과 제한성으로 하여 민족주의란 이 범위를 철저히 벗어날 수 없었으며 당대사회사조의 하나였던 무정부주의적 사조의 영향도 받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그는 한때 무정부주의를 민족독립투쟁의 일익으로 리용하려고 《무정부주의 동방련맹》대회에 참가하고 주역을 담당하게 된다.
1924년을 중심으로 한 북경망명시절에 신채호는 조선력사연구를 조선민중의 애국사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도경으로 삼고 조선사연구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일찍 1908년 《대한협회 회보》에 발표한 《력사와 애국심과의 관계》에서 자기 조국의 유구하고도 찬란한 력사를 잘 알아야만이 애국주의사상을 발양할 수 있다면서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썼다.
《력사의 공적이 이러한 까닭에 말을 배우며 그 어머니가 무릎에 안고 개국공신의 업적을 들려주며 걸음을 배우매 그 아버지가 공원에 데리고 가서 건국위인의 동상을 참배한다. 학교강의에 어느 전쟁에서 개선하던 정황을 설명하면 온 강당이 기뻐날뛰며 연설과정에 강토의 어느 부분을 빼앗기던 국치를 통탄하면 만청중이 울음보를 터뜨린다. 오호라 력사가 없으면 나라의 백성들에게 애국심이 어데서 생기리오!》
신채호는 이같이 력사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력사를 애국심과 희망의 무궁한 원천과 원동력으로 보았기에 북경망명시기에 《전후삼한고(前後三韓孝)》 등 조선고대사에 관한 무게있는 론문을 집필했고 이미 쓴 원고들을 크게 수정하고 투고했으며 《조선상고사》(총론), 《조선상고문화사》, 《전설시대사》, 《력사총론》, 《선랑사통론》 등 력사저서를 써내면서 광막한 력사의 처녀지를 개간하였다. 하여 1924년 10월 20일부터 이듬해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고사상 리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지〉동이렬전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력사상 1천년래 제일대사건》 등 6편의 력사론문이 실리게 되였다. 《조선고대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광객의 신년만필》 등 평론들이 실린것도 이때의 일이다.
"겨레 항일지사들"(전4권)제3권, 민족출판사 출판,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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