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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의 "삶과 죽음의 지혜"에서 보는 현대사회의 죽음
2007년 10월 04일 19시 38분  조회:1600  추천:99  작성자: 명상클럽

내가 처음 서양 사회에 도착했을 때, 그때까지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죽음에 대한 태도에 비추어보건대 새로 접한 서양 사람의 태도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많은 것을 성취했음에도, 현대 서구 사회는 죽음이라든가 죽어가는 과정 또는 죽음 이후 무엇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실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상 죽음을 부인하게끔 교육받았으며 죽음은 상실과 소멸을 뜻할 뿐이라고 배웠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죽음의 공포 아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건전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죽음에 맡기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믿는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란 모든 권리를 다 써버리는 것이고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는 상태가 된다는 식으로 소박하면서도 분별 없이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티베트의 한 고승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종종 죽음을 하찮게 여겨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누구나 죽는다. 그러니까 죽음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지. 죽음은 자연스러운거야. 나는 괜찮아.' 그러나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1)

 

죽음을 대하는 이러한 두 가지 태도 가운데 하나는 죽음으로부터 허둥지둥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내버려두면 자연히 처리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견해 모두 죽음의 참된 의미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물론 기독교를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전통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비전을 전해 주고 있다. 그 비전은 우리가 지금 영위하는 이 삶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에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현재의 삶을 전부로 여길 만큼 영혼이 메말라 있다. 삶 이후의 삶에 대한 어떤 실제적인 또는 근거 있는 신념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극적인 의미를 상실한 채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야기되는 참담한 결과는 한 개인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그 참담함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 생이 유일한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현대인은 장기적인 비전을 계발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지구의 천연 자원을 약탈하는 행위를 자제하게 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으며, 미래에 치명적일 수 있는 자신만의 이기적인 삶을 억제시킬 방도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산성비로 황폐화된 아마존 강에 책임 의식을 느끼게 하는, 브라질의 전임 환경부 장관의 발언 같은 경고를 우리는 얼마나 더 들어야 하는 것일까!

 

현대 산업 사회는 광신적인 종교 집단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지구의 온갖 생명 시스템을 먹어치우고 독살하고 파괴하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차용 증서에 우리가 서명하는 셈이다.......우리는 이 지구상에 사는 마지막 세대라도 되는 양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나의 가슴 속에, 마음 깊숙이, 자신의 비전 한가운데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지구는 숯처럼 검게 그을려 황막한 금성처럼 종말을 맞게 되리라.2)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무지로 우리의 삶 전체를 위협하는 환경 파괴가 갈수록 격화되어 간다. 사람들이 죽음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기에 환경파괴가 더 한층 심화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죽음 뒤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자신의 삶 뒤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어떤 희망도 제시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삶의 모든 의미와 죽은 뒤 자신의 삶에 열쇠를 쥐고 있는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주제에 관해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높은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티베트 불교의 몇몇 고승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단 한 가지 간단한 질문은 종종 나의 흥미를 돋군다. 그대는 이 삶 이후의 삶을 믿는가? 그들은 이런 질문을 철학적 명제로서 묻는 것이라기보다 마음 깊이 느끼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그들은 만일 이 삶 이후의 삶을 믿는다면, 인생관 전체가 달라지고, 책임감과 도덕관이 한층 또렷해진다는 것을 안다. 티베트의 고승들은 이 삶 이후의 삶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이 없는 사람들이 행동의 인과응보에 대한 충분한 사려 없이, 근시안적인 결과에만 집착하는 사회를 형성하게 될 것을 염려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진실된 자비심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잔인한 세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지 않을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강대국들이 불교 경전에서 전하는 마왕들이 사는 세계가 아닌지 종종 생각한다. 마왕들은 영혼의 차원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온갖 쾌락에 빠져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한다. 죽음이 닥치기 전에는, 또한 예기치 않은 몰락의 신호가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듯하다. 그러나 파탄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마왕들의 부인과 연인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다시 마왕으로 태어나길 바란다는 의례적인 축원과 함께 저 멀리서 꽃다발만을 던질 뿐이다. 지난날의 행복이나 쾌락의 추억도 그들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고통을 경감시켜 주지는 못한다. 마왕들은 한층 난폭해지고 마침내 비참한 상태에서 혼자 죽어가게 된다.

 

마왕들의 이러한 운명은 현대 사회가 늙은이, 병자, 죽어가는 사람을 취급하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현대 사회는 젊음, 섹스, 그리고 권력에 사로잡혀 있고 늙음과 쇠약함은 멀리하려고 한다. 연로자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쓸모 없어지면 버림받는다는 것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이 아닌가? 노인을 경로원 같은 곳에 맡겨 외롭게 방치한 채 죽어가게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가?

 

또한 암과 에이즈 같은 시한부 인생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우리가 취급한 방식에 대해 되돌아보자.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나는 심지어 그들의 친구조차도 그들을 부랑아로 취급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에이즈 환자로 낙인찍힌 그들은 큰 절망에 빠져 자기의 인생을 구역질 나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다.

우리가 알거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어갈 때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그가 죽어갈 때, 우리는 그의 미래에 관해 어떤 식으로도 용기를 줄 수가 없다. 죽은 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지속될지 또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조차 넌센스라고 해서 비웃음거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런 현대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이전보다 더 한층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말이 분명하게 제기된다.

 

다행스럽게도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호스피스 운동은 죽어가는 사람을 실질적인 면과 동시에 감정 조절의 측면에서 보살피는 훌륭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죽어가는 사람이 그러한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한층 더 깊은 어떤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들은 죽음과 삶의 실제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것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궁극적인 의미에서 위안을 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그의 영혼을 평온하게 이끄는 일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에 직면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앎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서양에서 Elisabeth Kübler-Ross와 Raymond Moody 같은 개척자들이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사실에 나는 기운을 얻게 되었다. 퀴블러로스는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 무조건적인 사랑과 좀더 밝은 태도로 임한다면 그들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심지어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고 밝혔다. 레이먼드 무디의 용기있는 작업을 계승한, 임사체험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활발한 과학적인 연구들은 삶이 죽음과 더불어 끝나지 않으며 '삶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실재한다는 생생하고도 강력한 희망을 인류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렇게 놀라운 새 사실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지극히 매혹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죽음을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여 절망적인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한 비극적인 젊은이들의 일화를 전해 들은 일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해서 직면하기를 거절하거나 낭만적으로 여기는 경우, 죽음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죽는다고 절망해서도 안되고 죽음에 도취해서도 안된다. 죽음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도 아니고 흥분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과정일 뿐이다.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임박해서야 우리들 대부분이 삶의 진가를 인정하려 드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관련해서 나는 티베트 불교의 위대한 스승, 파드마삼바바의 다음 말을 종종 회상하게 된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준비를 시작한다. 죽음이 닥치면 그들은 회한으로 인해 날뛰게 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지 않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위해 아무 준비도 없이 살았던 것처럼, 어떤 준비도 없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현대 사회에 소름 끼치는 일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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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1) 차고뤼 튈쿠 린포체, <죽음과 삶의 관계 Life in Relation to Death> (Cottage Grove, OR: Padma publishing, 1987), 7쪽

 

2) 런던의 , 1991년 3월호에 인용된 Jose Antonia Lutzenberger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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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강철영
날자:2007-12-27 11:38:09
죽음을 준비해 두어야 겟습니다.
1   작성자 : 명상
날자:2007-11-01 21:42:03
그대가 두려워하든 두려워하지 않든 간에 죽음은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다. 죽음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삶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우연적이다. 그것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을 살펴보라.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마치 우연히 일어난 사고처럼 말한다. 누군가 죽으면 우리는 그가 너무 빨리 죽었다고 말한다. 마치 그것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우연이 아닌 것은 죽음 밖에 없다. 그외의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다. 죽음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대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대는 이것을 아주 먼 미래의 일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대는 이미 죽어있다. 태어나는 그 순간 그대는 이미 죽었다. 탄생과 더불어 죽음은 확고한 현상이 된다. 죽음의 한 부분인 탄생이 이미 완결되었다. 이제 두번째 부분이 완결되는 일만 남았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미 죽어 있다. 반은 죽어있는 것이다. 일단 태어난 사람은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젠 아무 것도 그것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 방법이 없다. 그대는 이미 죽음 안으로 들어왔다. 탄생과 더불어 반은 죽은 것이다. 죽음은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다. 삶이 하나의 과정이듯이 죽음 또한 과정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으로 나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그대의 두 발, 또는 두 다리와 같다. 삶의 과정이 곧 죽음의 과정이다. 그대는 매 순간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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