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불교명상
현대인과 불교 명상
명상의 단계적 수행을 위한 지침
What Meditation Implies
Āchārya Buddharakkhita
아차리야 붓다락키따 지음
이 경 숙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1. Bodhi Leaves No. 74)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PTS)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주요 술어는 빠알리어 음을 취했으며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 본문의 주는 원주(原住)이며 역주(譯註)일 경우 따로 [역주]라고 표기하였음.
▶ 차 례
․현대 생활에서의 명상 6
명상이란 무엇인가 13
․명상 수행과 마음의 제어 21
․명상과 재가자 41
현대 생활에서의 명상
현대의 특징은 대중문화이고, 거기에서 집단 히스테리, 세뇌, 규격화 그리고 개성말살을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물질적 발전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나머지 날로 비인간화해 가고 있다. 이제 사람은 한낱 복잡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전문화 추세를 열렬히 추구한 결과 시야는 좁아질 대로 좁아져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들에 대해 쓸데없이 많이 알게 되었다. 획일화 경향은 판에 박은 사고를 하게 만들어 이제는 생산품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마저 규격화되었다.
그 결과, 개성 있는 자기표현이 사라져 버렸다. 한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개개인이 원래 지니고 있는 전일성(全一性)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일관조립식(一貫組立式) 생산기술이 사생활에까지 침투하여 그 대가로 고유한 인간성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가치의 붕괴다. 인간에 내재해 있는 더 높은 가능성의 씨앗을 현실로 꽃피워내는 내면의 율동인 도덕성이 첫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실제로 나타난 결과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형편에서는 아무리 고상한 동기도, 계산하고 재려드는 의식구조, 즉 심화되어 가는 상업화 추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사소한 적선마저도 이웃돕기 운동이라고 광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버렸다. 이렇듯 무미건조한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이제 유일한 희망은 마음밭을 갈아 그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서 찾는 수밖에 없다.
교육의 상황은 어떤가. 고상한 가치 수단으로서의 교육 본래의 면목은 사라져버리고 교육 그 자체가 목적처럼 되어버려 현실적 이윤동기에 의해서만 사고파는 풍토로 변했다. 교육은 이미 나무 위에 주렁주렁 달린 푸짐한 과일을 딸 수 있도록 딛고 올라설 사다리가 아닌데다가 그 과일 역시 쓴맛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으나 그 흥정 와중에 지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힘은 획득했지만 막상 그 힘을 쓸 지혜가 없다. 인간이 자연의 보고(寶庫)를 노획했지만 그 보물을 쓸 재주는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우울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중차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려 하고 있을 뿐이다. 기술의 발달이 물질적 번영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상응하는 문화와 인성(人性)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는 없다. 기술적으로 앞선 사회에서 일고 있는 온갖 대립과 부패 그리고 갈등이 바로 그 증거이다.
세상이 이런 비극적 상황에 직면한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심령과학의 초심리학(超心理學) 연구나 천안통(天眼通)과 같은 초자연적 지혜에 의하면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전개가 있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득히 먼 옛날, 지금은 대서양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아틀란티스라는 대륙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륙에서 이루어졌던 놀라울 정도로 높은 문명의 실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재 가장 까다로운 과학자들마저도 진지한 검토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 급격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우주과학 분야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자료에 의하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순전히 물질적인 면으로만 발전하였고, 그 결과로 쾌락을 탐하는 문명에 빠져들어 결국 자멸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자체에서 생겨난 녹 때문에 쇠 조각 전체가 녹슬어버리고만 경우와 같다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고 있는 현재의 우리를 위해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긴 두 단어를 이미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냥 보기(sight)’와 ‘꿰뚫어 보기(insight)’1)이다. 꿰뚫는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이 지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실재에 연결시켜 주는 교량이다.
꿰뚫어 봄이 의미하는 지혜란, 사물을 간파하여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이해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옳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판별하는 능력이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름, 거짓, 악을 누르고 옳음, 진실, 선의 편에 서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사물의 겉모습 이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상황의 노예가 아니라 그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는 것에만 만족하여 겉보기에만 그럴듯하면 넋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언제나 바쁘고 소란하고 인위적이고 기계화된 삶을 살고 있어서 내면적으로 불안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적․경제적․도덕적 혼란의 와중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냥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아내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 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하루빨리 깨달아야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명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명상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며, 그 지혜가 우리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고 우리 시대의 과학과 기술의 탐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이란 말은 너무나 다양한 정신활동 ― 그것도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활동들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명상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후 그것을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명상은 실제적 체험이며, 이 점에서 지적 관념과 구별된다. 부처님께서는 명상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셨다.
1) 바와나(Bhāvanā) : 정신적 계발 또는 마음 밭 갈기[耕].
2) 심청정(心淸淨 Citta Visuddhi) : 마음의 정화.
3) 사마타[止 Samatha] : 마음을 진정시킴 또는 가라앉힘.
4) 심일경성(心一境性 Ekaggatā) : 마음과 제반 정신적 기능을 한 곳에 집중시킴.
5) 사마디[三昧, 定 Samādhi] : 제각각인 정신적 힘들을 통일시키는 것, 그러면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제 위에서 열거한 용어들을 하나하나 풀어 명상의 정확한 의미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바와나(bhāvānā)
‘마음을 갈다, 마음을 계발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를 토지에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여기 얼마간의 땅이 있다. 만일 그 땅을 경작하지 않고 불모지로 내버려둔다면 쓸모가 없어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땅은 황폐해지고 잡초가 무성하여 뱀이나 전갈 같은 해충들이 서식하기 좋은 위험한 곳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발되지 않은 마음은 정신적으로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위협이 된다. 왜냐하면 탐욕과 증오와 미혹이라는 독사․전갈들이 그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바와나(bhāvanā)는 ‘되다’란 뜻을 지닌 빠알리어 ‘bhu’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실상, 또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창조적 과정에 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되어가는’ 것이며, 그것도 업에서 점점 헤어나게 되는 ‘됨’이 되는 것이다.
심청정(citta visuddhi)
연못물을 예로 들어 ‘심청정’을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열정과 이기심과 증오로 흐리고 탁해진 마음의 연못이 있다면 그 물에는 자신의 모습도 또 세상 사물의 모습도 바르게 비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을 수행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자신의 참 모습뿐 아니라 주변 세상의 실상에 대한 통찰까지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마타(samatha)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 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행위이다. 규칙적인 명상은 내면의 고요와 평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의 지각과 판별력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그래서 인생은 정말로 경이로운 경험으로 가득 찬 멋진 탐험 길이 된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부딪쳐야 하는 갖가지 갈래길에 당황하지 않고 이를 태연히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잃음과 얻음,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등 삶이 몰고 오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마음은 동요되지 않고 평온하다. 이는 깊이 있는 제어력을 성취한 것을 뜻한다.
방파제를 비유로 들어보자. 바다에 방파제를 만들어 놓으면 아무리 거센 파도라도 그 벽에 부딪쳐 잘게 부서지므로 항구는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명상을 수행한다는 것은 마음의 바다에 방파제를 쌓는 일이다. 그리하여 삶의 파도로부터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끝없이 성난 파도가 밀려드는 이 세상에서 든든한 마음의 방파제보다 더 유익한 것이 또 있을까.
심일경성(ekaggatā)
지적인 집중과 명상의 집중은 같지 않다. 지적 집중이 부분적인 것이라면 명상의 집중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전체적인 집중이다. 뉴턴의 일화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연구에 몰두할 때면 다른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하숙집 주인이 삶아서 아침 식사로 먹으라고 두 개의 달걀을 놓고 가자 그는 달걀대신 그의 회중시계를 끓는 물에 넣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명상수행의 집중상태에서는 그와 같은 상궤를 벗어난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명상 상태에서는 깨어있는 마음이 모든 감각 기능을 통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초세간의 저 높은 세계로까지 이끌어주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집중은 분명히 힘이다. 하지만 명상의 집중은 탁월한 힘이다.
사마디(samādhi)
삼매 또는 몰입(沒入)은 제각기 다른 그 모든 마음의 기능들을 종합한 상태를 말한다. ‘통일’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낸다는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역어라 하겠다.
명상은 잠자고 있는 일체의 잠재력을 활성화해서 우리를 새로운 경지로 들게 함으로써 자기 변혁을 이루어내게끔 해준다.
명상 수행은 어디까지나 자기 변혁을 이루어내는 자기 계발의 방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도 대단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자기 계발은 매우 특이한 돌파 작업을 완수해내는 바, 그것은 지성의 겉껍질을 돌파하여 우리의 마음이 지혜의 빛 앞에 활짝 열리도록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지혜의 빛이 흘러 들어와야만 우리의 인격은 비로소 향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명상 수행과 마음의 제어
나아갈 것인가, 뒷걸음 칠 것인가
인격의 전반, 즉 지적, 윤리적, 정신적 제 방면의 발전에 끼치는 명상의 작용에 대해 저 유명한 세계적 고전인 법구경은 명쾌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를 풀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직관의 기능은
마음이 명상에 매여 있을 때에만 작용하네.
명상에 의해 마음이 계발되지 않으면
직관의 기능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위축되네.
나아갈 것인가, 뒷걸음질 칠 것인가,
이 두 길이 있을 뿐이니
이 점 분명히 깨달아서 직관의 지혜가
무르익도록 길을 잘 택하여 나아가라.
[게송 282]
부처님은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한 중립적이라든가 혹은 두 발을 걸치는 식의 제3의 길은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뒷걸음질 치게 된다. 세속주의자들이 취하는 것과 같은 엉거주춤한 태도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소극적인 것이다. 불모지건 경작되지 않은 땅이건 둘 다 생산능력의 부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듯이 어정쩡한 태도도 적극적인 정신적 결실을 맺지 못하는 점에서는 똑같다.
명상만이 인간의 잠재력을 활성화시켜 주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명상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위대한 스승께서는 한 조각의 불모지가 초목으로 우거진 정원으로 바뀌는 그림과 같은 정경을 그려 보여주며 명상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고 계신다.
마음갈기
명상 수행은 마음을 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갈다’라는 이 말을 농사에서 사용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밭을 경작하여 그 마음이 가진 모든 가능성들을 초월적 완성이라는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계발한다는 뜻이다.
한편, 마음의 제어(mind control)는 명상 과정을 구성하는 필수적 부분 중 하나이다. 그것은 마치 농사를 짓자면 김을 매고 해충을 쫓는 등 갖가지 제어조치가 불가피한 것과 같다.
마음은 밭과 같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밭을 경작하지 않고 방치해둔다면 땅은 메말라서 척박해질 뿐 아니라 잡초만 무성한 가운데 독사와 전갈 등이 끼어들어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다. 똑같은 상황이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또한 갈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사악하고 그릇된 망념의 잡초가 무성해 질 것이다. 탐욕과 증오, 미혹으로 가득 찬 마음은 위험하다.
반대로 체계적인 방법으로 잘 갈아 나간다면 마음은 계발되고 본래 갖추고 있던 힘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음을 간다는 것은 하루 한두 시간씩 명상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을 챙기려 애쓰는 것만을 말한다기보다는 종일 깨어있는 시간 내내 일정한 속도로 내면적 진보를 지속하고 있는 그러한 발전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명상을 하다보면 다양한 관법(觀法)으로 마음을 훈련시키게 된다. 신체를 단련시킬 때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단련 역시 마음챙김과 정신집중 그리고 통찰을 계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으로 마음을 훈련시킨다. 신체단련을 통해 힘을 계발하고 허약함을 극복하고 인격과 건강을 증장(增長)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단련을 통해서는 정신적인 허약함과 한계를 극복하고, 악과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적극적 자질을 강화시켜 정신적 향상을 한층 더 높여줌으로써 마침내는 세상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든다.
마음의 제어
마음의 제어는 결코 그 어떠한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스런 정신적 욕망을 억제 또는 억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초극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라도 마음의 제어를 하지 않고는 인생사를 감당해내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못 박아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제어되지 않은 마음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제어되지 않은 마음은 참으로 몰아가기 어렵다.”
“비구들이여, 잘 제어된 마음보다 더 다루기 쉬운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제어된 마음은 참으로 몰아갈만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제어되지 않은 마음보다 더 손해를 주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길들지 않은 마음은 참으로 큰 손해를 입힌다.”
“비구들이여, 길들여지지 않고 제어되지 않고 지켜지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마음보다 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준다.”
“비구들이여, 길들여지고 제어되고 지켜지고 참는 마음보다 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준다.”
단번에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기 초극은 지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면보다는 인격 전반에 걸쳐 새로이 태어나는 결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더 크다. 즉 견해와 태도, 정서와 의지 그리고 인생살이 전반에서 거듭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인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점진적인 도정이며 순차적인 발전이다. 신체적 습관에 대한 훈련, 삶을 보는 안목의 변화, 지적(知的)․의지적 활동유형의 재정립,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자기정화는 반드시 정확하고 미더운 방법론에 입각해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 당시 유명한 수학자, 가나까 목갈라아나가 세존께 와서 여쭈었다.2)
“존귀한 분이시여, 세속적인 직업의 경우, 어떤 직업에서건 으레 점차적인 배움과 점차적인 익힘 그리고 점차적인 훈련 과정이 있습니다. 고따마시여, 정신적인 삶을 닦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그와 같이 점차적인 훈련과 점진적인 발전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방법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능하오. 배움 많은 청신사(淸信士)여, 정신적인 삶에도 점차적인 훈련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오. 능숙한 조련사가 말을 길들일 때 갖가지 방식의 훈련에 말이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과 같이 진리의 발견자인 여래도 사람을 정신적으로 순화시켜 나가는 데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쓰는 것이오.”
도덕적인 몸가짐
그 제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오라, 제자여. 청정한 계율을 통해 도덕적 습성을 몸에 익혀라. 도덕적 의무를 자발적으로 준수하여 절제된 삶을 살라. 바른 행을 재산으로 알고 계율의 밭을 떠나지 말고 잘 지켜라. 계를 지킴에 있어 때를 묻히거나 타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살펴라. 그리고 계율에 따라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라.”
감각의 제어
제자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닦으면 세존께서는 그를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자, 이젠 감각기관을 잘 지키도록 하라. 감각기관의 주인이 되라.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그 드러나는 겉모습에 취해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자제력을 견지하라. 그대 만일 감각을 제어하지 않으면 감각적 매력뿐만 아니라 욕구불만과 온갖 좋지 못한 마음상태가 그대 속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그대의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음을 잘 제어하고 지키면서 길을 나아가라.”
음식 절제
제자가 자신의 마음과 함께 감각기관을 잘 제어해 나가면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지시하신다.
“음식은 절제하도록 하라. 음식을 먹을 때는 그 목적이 맛을 즐기거나 식탐에 빠지는 데 있지 않으며 신체적 미모나 매력을 얻는 데에도 있지 않고 다만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음식은 정신적인 삶을 도와서 우리가 안락하고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명심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방심하지 않음
세존께서는 다시 그를 더 나아가도록 훈련시킨다.
“이제 방심하지 않도록[不放逸], 열심히 노력해서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이해[正知]를 계발하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를 명상 훈련의 기회로 전환시킴으로써 항상 챙겨진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몸과 느낌과 생각과 모든 심리적 충동을 빈틈없이 분명하게 지켜볼[隨觀] 수 있도록 하라. 그리하여 너의 마음에서 장애가 되는 요소를 불식시켜라.”
장애를 극복하라
제자가 깨어있는 동안은 언제나 걷고 있건 앉아있건, 서 있건 누워있건 또 어떤 일을 하고 있건 간에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잘 챙긴 채로 예리한 식별력을 유지하여 잃지 않게 되면 세존께서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도록 다음과 같이 훈련시킨다.
“자, 이제는 너의 마음을 제어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모든 그릇된 생각들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욕망과 악의(惡意)라는 때를 씻어내고 너그럽고 관대하고 동정적인 마음으로 머물러라. 나태와 해이함을 쫓아내버리고 활발하고 확고하고 원기 왕성한 상태에 머물러라. 들뜸과 회한을 떨쳐 버리고 내면의 평온(平穩)에 머물러 고요해져라. 의심과 당혹을 떨쳐 버리고 신뢰와 확신에 찬 마음으로 머물라.”
제자가 마음을 능히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그는 다시 여러 가지 명상법을 지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사마디(samādhi)라는 더 높은 단계들, 즉 명상 몰입에서 오는 더 높은 식(識)에로 인도된다.
사마디(samādhi)
사마디는 정신적 면에서 특히 수승(殊勝)한 몇몇 가지의 상태를 한데 묶어 완전한 통일‧통합을 이루는 일종의 변증법적 종합을 가져온다. 이 종합은 단순히 마음을 완전하게 정화시키고 또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잔의 불꽃처럼 마음이 한 점에 모인 상태로 지속되게 할 뿐만 아니라 소위 지혜라고 하는 내면의 조명(照明)을 생겨나게 만든다.
이 지혜는 일체의 미망과 어리석음, 무지 그리고 자기 기만을 사라지게 만들어 우리가 실상(實相)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직관력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정신적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 밝혀지고 열려지는 것이다.
인도가 낳은 위대한 조어장부(調御丈夫)3) 부처님께서는 향상의 추구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도전이라고 선언하셨다. 자기 초극이란 바로 이 향상의 추구를 뜻한다. 우리들의 시대는 지식의 추구에만 모든 마음을 쏟아왔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고양된 덕목은 될 수 없고 단지 힘이 될 수 있을 뿐인데 때때로 파괴적 힘이 되어서 탈이다. 이에 반해 향상은 사람을 자제할 줄 아는 인격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만듦으로써 진정한 행복과 안녕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더 높은 덕이자 내면적 빛이다.
현대사회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역설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지식이 몇 배로 많아지는 가 했더니 문제도 똑같이 많아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악은 지식의 증가에 정비례하여 늘어나는 것 같다. 오늘날 인류의 지식 축적은 가히 엄청나지만 인류의 굴레 역시 그러하다.
체계적인 계율
“길들여진 유순한 마음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체계를 갖춘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꼭 필요하며, 이때 그 도덕률은 마음과 견해와 행동을 점차적으로 더욱 더 깊이 순화시켜 나가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부처님이 체계를 세운 오계(五戒)는 폭력, 부정직, 불륜, 거짓의 네 가지 행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또 일체의 술이나 약물 중독을 멀리 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계율들을 음미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매우 적극적으로 인간애, 자선, 순결, 만족 그리고 정직으로 충만한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을 그렇게 영위할 수 있다면 굳이 부와 권력의 획득이나 관능, 약물, 술 따위에 탐닉하는 식으로 표출되는 어떤 형태의 현실 도피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계율 체계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범죄를 피할 뿐 아니라, 매우 고상한 인성(人性)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고상한 인성이 되려면 향상의 필요성이야말로 가장 절대적이다.
오늘날 급속히 바뀌고 있는 인성이 안고 있는 문제는 비단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불안과 불확실성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이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면 키 없는 배와 같이 된다.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마음 닦는 법은 병든 인성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비구니 단띠까는 부처님의 이 마음 닦는 법을 실제로 수행한 후 그 체험담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영축산에서 한낮의 휴식을 취한 후 내려오다 코끼리가 강어귀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네.
조련사가 막대기를 들고 그 큰 짐승에게 명령하였네.
‘자 다리를 내밀어요.’
코끼리가 순종하니 그 몰이꾼은 냉큼 목 위로 올라탔네.
나 분명 제멋대로 굴던 놈이 길들여진 것 보았네.
코끼리가 주인의 뜻에 복종하는 모습을.
그 광경 가슴에 새긴 채 나는 숲속 깊이 들어갔네.
확신에 차서 정진 끝에 거기서 나의 마음
마침내 모두 조복(調伏)받을 수 있었네.
[ 장로니게』3장 4, 게송 48〜50]
명상과 재가자
재가 생활인에게 명상이란 당치도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까닭인즉 명상을 하면 사람이 초연하고 무감각하고 제반 의무에 대해 냉담해지기 마련인데, 세속생활은 원래 삶에 대한 열정과 따뜻한 온기를 그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명상과 세속생활은 결국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재가자가 떠맡고 있는 의무가 얼마나 많은지 역설한다. 자신을 돌보아야 하고 가족과 공동체,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도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명상을 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의무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쉽다면 어떻게 명상을 재가자의 생활에 알맞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일 명상이란 말이 ‘현실 도피(escapism)'를 뜻한다면 그들 말이 맞다. 그러나 ‘벗어남(escape)’을 뜻한다면 그들의 말은 틀렸다.
현실 도피는 그릇된, 건전치 못한 자세이다. 그것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현실을 직면하기를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타조가 제 머리를 땅에 박고는 ‘나는 없소’ 하는 것과 같이 자기 기만에 뿌리를 둔 자세라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벗어남’은 건전한 접근 방식이다.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정신적 갈등과 한계성을 넘어서고 격정이라든가 여타의 갖가지 정신적 타락을 극복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명상 수행을 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이기심과 아만(我慢)으로 사방 벽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숨어 버린다면 명상은 한낱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하므로 분명히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따라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명상이 만일 탐욕과 증오와 미혹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하며 실제로 격정과 미움 그리고 무지에 갇혀 있는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이라면 이야말로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재가자를 줄곧 괴롭히고 있는 그 모든 병을 고쳐주는 유일한 만병통치약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으로 재가자는 두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
하나는 이기심이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타심이 내리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기심은 자기 이익을 도모할 때 생기고, 이타심은 타인의 이익을 도모할 때 생긴다. 자기 이익이라 해서 꼭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회 전체 또는 국가까지 확대될 수 있다.
요컨대 여기서 ‘자기’란 각자의 경험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또 ‘타인의 이익’이란 정신적 요구와 책임을 염두에 둔 말이다.
현명한 재가자라면 이 두 가지 의무를 균형있게 잘 이행할 것이다. 그런데 경험적 의무와 정신적 의무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은 이른바 ‘현명함’이라는 놀라운 정신적 재능에서 온다. 이 자질을 계발시키는 것이 바로 명상 수행의 유일한 목적이라 할 수도 있다.
명상은 정신적 긴장과 오염을 제거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안정시키며, 마음의 갖가지 기능을 통합시키고, 마음이 갖추고 있는 잠재력을 계발시킨다. 마음은 하나의 광산이니, 우리가 이 내적 부의 보고를 파내는 방법만 안다면 얻지 못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 무진장한 보고의 자물쇠를 여는 데에 명상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명상은 현실 도피이기는커녕 자유와 완성, 미(美)와 지(知), 지혜와 자비를 향해 내딛는 가장 적극적인 발걸음인 것이다.
현실적 이해를 정신적 수행과 융합시키는 일은 옛 사람들에게 커다란 문제였던 것 같다. 성스러운 빠알리경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사회 지도층에 속했던 디가자누(Dīghajānu)라는 사람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고 있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저희는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속인입니다. 저희는 처와 자식들에게 매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까아시(Kāsi)에서 가져 온 백단향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화관과 향수와 머릿기름으로 치장하고, 금․은 장식품으로 몸을 감쌉니다.
비록 이런 형편의 우리들이지만 고귀하신 분으로부터, 금생 동안 안락과 행복에로 이끌어 주고 또 다가올 생에서도 안락과 행복으로 이끌어줄 법을 가르침 받고 싶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디가자누여, 선남자(善男子)가 바로 이 생에서 안락과 행복을 누리려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 네 가지란 무엇인가? 줄기찬 노력, 잘 보살핌,4) 좋은 친구와 사귐, 분수에 맞는 생활, 이 네가지의 구족(具足)이 그것이다.
디가자누여, 선남자가 다음 생에서 안락과 행복을 누리려면 다시 네 가지 조건을 더 갖추어야 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신심, 계행, 자비, 지혜 이 넷을 구족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족’이란 단어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정감과 충족감의 토대를 형성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전히 물질적 사회적 의미에서의 부, 재산, 명성, 권력뿐 아니라 지성적 및 정신적 차원에서의 성취를 돕는 도덕적 자질과 정신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의미로건 그것은 ‘성취’, 즉 안정감과 충족감의 토대를 의미한다.
위에서 말한 이른바 구족함의 두 가지 방향성, 즉 당장의 현실과 관련 있는 경험적 구족함과 그리고 차후와 관련 있는 정신적 구족함의 두 방향도 결국은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일종의 정신적 수확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명상은 정신의 밭갈이이므로 명상을 통한 마음의 계발은 방금 말한 정신의 수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줄기찬 노력을 구족한다는 것은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 ― 그것이 직업적인 일이든 자발적인 근로든 또 이해관계가 있든 순전한 취미든 간에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 기울이는 지칠 줄 모르는 정신력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소위 세속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딱 잘라 양분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직업이라 해서 반드시 생계 수단에 그쳐야 할 이유는 없고 정신적 발전의 수단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사무원이든, 사업가든, 주부든, 의사든, 농부든, 판사든 간에 바로 그 직업을 정신적 자질을 계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히 전심전력을 기울일 때 그 직업은 이미 넌더리나는 귀찮은 짐거리가 아니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경이에 찬 경험의 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그처럼 전심전력하는데 어찌 숙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디가자누여, 여기에 한 선남자가 어떤 일, 그것이 농사일이든, 장사든, 가축 사육이든, 무사든, 왕을 섬기든 아니면 다른 어떤 재주로든 간에 생계를 꾸미다 보면 그 일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싫증낼 줄 모르게 된다. 그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의무를 계획성 있게 채비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을 일러 줄기찬 노력을 구족했다고 한다.”
이를 다시 정신적 맥락에서 표현한다면 모든 한계를 극복해 내어 정신적 자유로 충만한 저 무한대의 세계를 향해 뻗쳐나가도록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의 구족인 ‘잘 살펴 지켜냄’은 정신차려 마음 기울이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전생업(前生業)에 의해 타고 났거나 금생에 노력해서 얻었거나 간에 일단 자기 것이 된 훌륭한 재물과 자질을 잘 보존해 낼 수 있도록 해준다.
사실 인간은 어떤 것을 지니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무지와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탓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근면하게 마음을 기울이면 자신이 이미 얻은 것을 잘 보존할 수 있어 자신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디가자누여, 여기에 한 선남자가 열심히 일해서 벌고, 팔뚝 힘이나 이마의 땀으로 모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정당하게 얻은 재산을 지니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왕이 그것을 수탈해가지 못하도록,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화재로 불타 버리거나 수마가 할퀴어 없어지지 않도록, 악에 기울기 쉬운 상속자가 탕진하지 않도록 지키고 살피어 그 재산을 잘 관리할 것이다. 이를 두고 신중성의 구족이라고 한다.”
정신적 맥락에서 말하자면 이는 의미있는 목적을 지향하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정신적 역량을 말한다고 하겠다.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그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따라서 의미있는 목표를 놓치지 않을 때 의미있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커다란 즐거움 중의 하나가 현명한 사람과 사귀는 일이다. 훌륭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고서는 성공도 기대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 비린내 나는 생선을
꾸사 잎으로 싸맨다고 하자
그 풀잎도 비린내가 배고 말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 사귀는 것도 그와 같으리.
이번엔 누군가 향기로운
따가라 꽃5)을 나뭇잎에다 싸면
그 잎도 향내를 풍길 것이다
현명한 사람과 사귀는 것도 그와 같으리.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영기(靈氣)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남들의 선한 영기를 쏘이면 쏘인 그만큼 그 사람도 선하고 고상해질 수 있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설한 「망갈라경」6)에서 부처님께서는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전진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하셨다.
“나쁜 친구를 갖지 않고 현명한 이와의 사귐을 돈독히 하며,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는 것, 이런 일들이 최상의 복을 이룬다.”
따라서 좋은 사귐이야말로 그것 없이는 지금에도 나중에도 아무런 성취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구족’인 것이다.
“디가자누여, 여기 한 선남자가 어떤 마을이나 읍내에 살고 있으면서, 신심이 견고하고 덕성이 고매하며 자비심이 충만하고 지혜가 수승한 선남자 또는 그 자제들, 젊었지만 수행이 높거나 또는 나이나 수행이 모두 높은 이들과 교류하고 담화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신심있는 이의 신심을, 덕성있는 이의 덕성을, 자비로운 이의 자비를, 현명한 이의 지혜를 본받으려 애쓴다고 하자. 이런 것을 두고 좋은 우정이라고 한다.”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건전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활력이 북돋아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네 번째 구족해야 할 요소인 균형있는 생활은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낭비와 인색 사이에, 또한 분수를 넘어선 생활과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것도 도무지 남에게는 주지 않으려는 성미 사이에 중용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분수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상외로 빨리 파국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재산을 물 쓰듯 하는 심리는 그 원인이 대개 강력한 욕망이나 허영심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만, 또는 망상 탓이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인색한 태도 역시 위축된 마음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사실 너무 인색하다 보면 스스로 생의 보람을 누리지 못하고 말뿐 아니라 남의 행복마저 앗아버리게 된다. 균형있는 생활을 함으로써 비로소 이러한 함정을 뛰어넘어 복된 생을 유지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디가자누여, 여기 한 선남자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잘 알고 있어 낭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은 가운데 자신의 수입이 지출을 웃돌도록, 그러나 지출이 수입을 웃도는 일은 없도록 균형 잡힌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마치 금세공인 또는 그 도제(徒弟)가 저울질을 할 때 어느 분량만큼 저울이 아래로 기울었는지 혹은 어느 분량만큼 위로 기울었는지 잘 아는 것과 같다. 그처럼 선남자는 자기의 수입과 지출을 잘 알아서 낭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게 균형 있는 살림을 꾸민다.”
이를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그 모든 상반관계의 대칭, 즉 좋고 싫음, 칭찬과 비난, 일어남과 스러짐, 지혜와 무지, 빈곤과 풍요, 젊음과 늙음, 사랑과 미움 등등을 초연할 수 있을 정도로 치우침을 벗어난 균형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마음이 되면 다음 단계의 네 가지 구족, 즉 정신적 발전을 돕는 심신, 덕성, 자비 그리고 지혜를 생각해 볼 채비가 된 셈이다.
신심은 더 높은 가치를 향해 마음의 창을 계속 열고 있음으로써 진리의 빛살을 맞아들이는 일종의 수용 태세를 말한다. 신심은 씨앗에 비유되어 왔으니, 이 씨앗이 싹이 트면 해탈이란 열매를 맺는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다.
신심은 재산이니
여기 인간에겐 가장 값진 것.
윤회의 바다 건너려면
신심부터 갖춰야 하리.
계행은 도덕적 정화를 이루어 주며 또한 자칫하면 유혹에 빠지거나 본의 아니게 분쟁에 휘말려들 위험이 많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온갖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도 한다. 계행은 자발적으로 행하는 자기 훈련에서 우러나온다. 계행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일련의 행동규범이다.
자비심은 복을 담는 그릇으로 여겨왔다. 빈곤과 풍요, 행복과 불행, 출생 신분의 높고 낮음, 이 모두는 수행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비심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자비심은 도덕적으로 우리를 고양시켜줄 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향상시켜 준다. 자비로운 그만큼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복락을 누리고 또 내생에 가서도 복락을 누린다.
지혜는 태양처럼 마음의 어두움을 모두 쫓아 버린다. 우리가 모든 악을 뿌리 뽑고, 마음을 깨끗이 닦아 이를 깨달음을 이루는 도구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혜 덕분이다.
인생은 윤회의 황야를 끝없이 구르는 바퀴처럼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다. 그래서 생이라 불리는 여행을 끝없이 계속한다.
이 무의미한 편력은 업(業)이라는 의지적 행위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업력을 해탈 지향의 원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혜뿐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대장부가 구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것이다.
자기 일에 활기차고 주의 깊으며
자신의 재산을 현명하게 관리하여
균형 잡힌 생을 사는 사람은
모은 재산 잘 지켜내네.
신심과 계행마저 갖춘 그는
허욕에서 벗어나 도량도 크구나.
길을 닦기 위해 언제나 힘쓰니
내생의 행복이 보장되는구나.
그렇듯 신심 넘치는 재가자에게
그분, 이름 그대로 ‘깨달으신 분’께서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조건 말씀하셨나니
그것은 금생에도 내생에도
행복으로 이끌어준다네.
자, 그럼 이 모든 구족함을 최상으로 완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명함’7)에 의해서라고 부처님은 저 유명한 ‘가없는 사랑의 찬가’8)에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현명함은 명상 수행을 통해 갖추어지는 마음의 성숙이다. 그러므로 명상 수행은 재가 생활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 수행을 하면 재가 생활 역시 더욱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역주] 꿰뚫어보기 : insight(통찰)은 vipassanā(觀)의 역어이다.
2) [역주]『중부』107경, Ⅲ권 2~4쪽.
3) [역주] 조어장부(調御丈夫) :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의 하나. 중생을 잘 길들여 향상을 성취케 해주시는 분이란 뜻.
4) [역주] 잘 보살핌 : 보살핌의 구족, ārakkhasampadā. 한역은 수호구족(守護具足), 영역어는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부지런히 공들인다는 뜻에서 diligence로 옮기고 있다.
5) 미나리아재비 같은 향기로운 흰 꽃.
6) [역주]「망갈라경」: 『소송경(小誦經)』 제5 길상경(吉祥經)과 『숫따니빠따』의 4 대길상경(大吉祥經)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복을 가져오는 서른일곱 가지의 공덕행을 들고 있다.
7) [역주] 현명함 : 본문에는 nepakka로 나오는데 저자는 이를 sagacity로 영역하고 있다. 보리수잎․여섯에서 prudent로 영역된 것을 ‘빈틈없고’로 옮겼었다.
8) [역주] 가없는 사랑의 찬가 : 『소송경(小誦經)』의 제오 길상경(吉祥經)과 『숫따니빠다』의 Ⅱ. 4, 대길상경(大吉祥經)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복을 가져오는 서른일곱 가지의 공덕행을 들고 있다.
출처: 고요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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