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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사 스님과의 대화
2008년 12월 21일 18시 22분  조회:1624  추천:64  작성자: 명상클럽

열하나

띠사 스님과의 대화
(불교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시다)

Bhikkhu Tissa Dispels Some Doubts

 

레오나드 프라이스 지음
이 경 숙 옮김

Leonard Price
(Bodhi Leaves No. 102)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지은이에 대하여

지은이 레오나드 프라이스는 캔터키 주 루이즈빌에서 태어나 다모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배우이며 작가이기도 한 그는 여가를 독서와 선(禪)수행 그리고 불교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BPS와 관련된 그의 저서로는 이 밖에도 'Radical Buddhism(Bodhi Leaves B 92)', 'To The Cemetery And Back(Bodhi Leaves B 96)' 등이 있다.

 

 

띠싸 스님과의 대화
(불교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시다)

 

(찌는 듯 더운 어느 여름날의 해질 무렵, 띠싸라는 법명을 가진 한 스님이 나무 그늘 아래서 고요히 선정에 들어있다. 이때 신도 프랜티스 씨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연방 문질러 가며 길을 올라오고 있다. 스님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그쪽으로 다가간다.)

프랜티스 : 아, 띠싸 스님, 안녕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기 계시면 좋겠다 생각하며 올라오는 중이었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안녕하십니까?

프랜티스 :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전 뭐랄까, 순전히 호기심에서 이따금씩 절을 찾기는 했지만 제 이름까지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스님: 그럼 당신을 지금 이 곳에 오게 한 것도 그 호기심이겠군요?

프랜티스 : 아유,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헌데 날씨가 퍽 덥습니다.

스님 : 앉으시지요. 잔디가 좋으니….

프랜티스 : 고맙습니다.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스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는다.)
여기까지 오느라 한참을 걸었더니, 다리가 좀 아프네요. 스님께 불교에 관해 몇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데 시간이 있으신지요?

스님 : 말씀해보시지요. 그래 어떤 의문을 갖고 계십니까?

프랜티스 : 간단히 말하자면 불교 그 자체입니다.

스님 : 호오, 불교의 모든 것이 다 수긍이 안간다는 말씀이십니까?

프랜티스 : 글쎄요, 저는 사실 그 동안 불교에 관한 책도 좀 읽어보았고 여기저기 다니며 강연도 들어보았는데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불교가 대단히 매력있는 종교라고 인정합니다.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이 매우 냉철하고 이치에 맞고 과학적이거든요. 스스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자부하는 저에겐 불교가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마음과 물질을 분석하는 방법이 제겐 아주 과학적으로 보이더군요. 그러나 불교의 또다른 면, 다시 말해 종교적인 측면은 제게 혼란을 일으킵니다.

스님 : 당신은 열렬한 과학 예찬자이시군요. 안 그렇습니까?

프랜티스 : 네, 그렇구말구요.

스님 : 그러니까 당신은 과학을 닮은 만큼만 불교를 인정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프랜티스 :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님 : 그러시다면 실제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나 탐구하시면 될 일이지 구태여 불교를 알아보려고 고생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프랜티스 : 저 뭐랄까, 과학만으로는 좀 ….

스님 : 종교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말씀이겠지요?

(프랜티스 씨는 반갑다는 듯이…)

프랜티스 : 바로 그렇습니다. 스님, 사실상 저의 문제점은 제가 불교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저의 이성으로는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불교에 귀의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의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저는 불교 사상에 감탄은 하면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실행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 : 진지한 실천적 자세는 바로 종교와 철학의 차이입니다. 철학가는 허다한 이론들을 다루면서 시간을 보내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의 삶을 몽땅 겁니다.

프랜티스 : 바로 그것이 제게 부족한 점입니다.

스님 : 실은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프랜티스 씨
프랜티스 : 헌데 제가 내심 바라는 건 그런 자세입니다. 진지한 실천의 자세 말입니다. 모든 삶을 거는 그런 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꼭 그래야 겠다는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댁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프랜티스 : 네? 아, 그건 약 2,3킬로미터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스님 : 그러니까 이 여름날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을 마음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려고 그 먼 길을 걸어오셨단 말입니까?

프랜티스 : 아, 그렇게 되나요? 참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제가 좀 말씀드려 볼까요? 불교 수행은 말입니다. 자기 성찰로 시작해서 자기 성찰로 끝나는 공부입니다. 모든 불교사상이나 이론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기 성찰의 방법과 그에 따르는 결과를 가르쳐 줄 뿐입니다. 불교사상을 알고 싶어 책을 많이 읽고 배우기도 합니다만,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마치 약 처방만 알고 약은 먹지 않을 때처럼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프랜티스 씨, 불교에 대해 꽤나 읽기도 했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하셨지요? 특히 어떤 점이 그러하던가요?

프랜티스 : 어떤 점이 꼭 그렇다기보다는 스님 말씀처럼 저로 하여금 선뜻 약을 먹지 못하게 하는…, 의심이랄까…, 아니 아예 터놓고 말씀드리지요.
제가 무엇 때문에 혹독한 고행이 따라야 하는 선(禪)수행과 엄한 계율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거기서 제가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지요?

(따지는 듯한 어조에 스님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그런 다음 조용히 입을 연다.)

스님 : 프랜티스 씨, 무엇보다도 우선 `혹독한 고행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점을 알아두십시오.

프랜티스 :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고요?

스님 : 그리고 무언가를 돌려받을 셈으로 노력을 투자한다는 식의 생각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프랜티스 :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스님.

스님 : 우리는 말입니다, 이미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다름 아닌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라든가 해탈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요.

프랜티스 :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지혜와 해탈 같은 것에 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들이야말로 가치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님 :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원하면 아무 때고 움켜쥘 수 있는 물건처럼 그렇게 구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고(至高)의 진리는 전리품이 아니지요. 진리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 수행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는 겁니다. 수행자는 물론 정진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뭔가를 `얻을' 생각으로 노력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프랜티스 : 제가 듣기엔 스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스님 : 세속적인 삶의 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에겐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 같지는 않군요.

프랜티스 :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저는 불교사상을 이해하고 수긍할 수는 있지만 진실로 실행해보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스님, 왜 불교를 믿으려면 무조건 빠져야만 되는 겁니까?

스님 : (담담한 어조로)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빠져서는 안됩니다.

프랜티스 : 그렇지만 불교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까?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빠져보는 것 말입니다.

스님 : 아니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빌거나 믿는 것은 당신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그러면 무슨 이유로 불교를 믿는단 말입니까?

스님 : 그 `이유'라는 말을 잘 하셨습니다. 프린티스 씨, 불교의 수행자에게는 직관을 바탕으로 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이유와 직관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소원 때문에 믿지는 마십시오. 관념적인 이론에 끌려 믿어서도 안되지요. 당신 스스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만을 믿으십시오.

프랜티스 : 그러나 제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님. 깨달음이 무엇인지, 열반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스님 : 프랜티스 씨, 그렇다면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랜티스 : (한참 궁리하다가) 제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혼란… 불확실성… 그리고 불행하다는 느낌…, 적어도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스님 : 그래서요?

프랜티스 :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나의 고통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스님 침묵한다. 프랜티스는 더듬거리며 마음을 털어놓는다.)
제가 무슨 사물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안목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세상사가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점점 늙어가고 있는데 나이를 먹는다고 더 지혜로워지지도 않는다는 것. 세상이 잘못되었든지 내가 잘못되었든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괴로운 현실에 대해 어떻게든 해보고 싶습니다. 이 엉망진창이랄까, 뭐랄까, 아무튼 괴로움이라는 말로밖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이 상태로부터 도망가고 싶습니다. 아, 이제서야 겨우 제가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군요. 불교는 고통을 말하고 또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저는 꼭 해내고 싶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이제야 비로소 당신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셨군요.

프랜티스 : (조금 흥분된 어조로) 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저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의심하는 마음이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던가 봅니다. 스님께선 조금 전에 자기 성찰에 관해서 말씀해주셨죠. 저 역시 우선 제 마음부터 들여다보면서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스님 :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당신은 이미 자기 성찰을 시작하신 겁니다. 깨달음의 길로 접어든 구도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어둠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며 지금 내딛는 걸음걸음에 주의를 집중하며 지금 바로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는 미래를 가지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울로 삼아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어떤 것이 나와 남에게 이익이 되고 어떤 것이 이익되지 않는가를 비추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찰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알아진 것이 있다면 그는 거기에 따라 행동합니다. 나와 남에게 이롭지 못한 행위와 뜻을 삼가고 이로운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닦아나가며, 이해를 차차 깊게 하고 청정하게 하여 가르침을 법다이 행동에 옮깁니다.

프랜티스 : 하지만 스님, 그러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스님 : 아니지요. 깨달음의 길은 엄격한 계율이나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단지 바른 삶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좋은 삶의 길입니다. 우리가 고통과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릇된 삶의 방식에 너무 오랫동안 젖어 있다보니 인생을 사는 다른 길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것이지요.

프랜티스 : 스님께서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시는…,

스님 : 그렇습니다. 불법(Dhamma),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기 고행과 자기 방종의 양극단이 아닌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육체와 정신을 괴롭히면 악이 소멸되고 지혜롭게 될까 하여 몸과 마음을 학대하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또 욕구를 좇아 쾌락에 내맡겨서도 안됩니다. 부처님께서 제시한 중도는 어리석은 양극단을 버린, 잘 조화되고 지각있는 바른 삶입니다.

프랜티스 : 네, 그 점은 불교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불법은 지성적 측면에서 볼 때는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에 옮기는 것은 겁이 난다고 할까, 하여간 감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스님 :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푸툿자나(puthujjana)' 즉 속인의 마음은 번뇌에 좌우되어 사실을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거칠고 고통에 시달림을 받으며 미망에 빠져 있습니다. 정열에 휩쓸려 여기저기 헤맵니다. 그 마음은 탐욕과 증오에 끄달린 나머지 억제당하거나 길들여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이를테면 번뇌에 물든 마음은 법의 위력을 두려워해서, 법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고 계속 노예로 부리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지요. 오랜 세월을 두고 이런 마음에 익숙해졌지 때문에 이 마음을 좀 바꿔보겠다는 생각만 해도 처음엔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프랜티스 : 그런데 우리 마음은 왜 이처럼 번뇌에 짓눌려 있을까요?

스님 : 한마디로 무지 때문입니다.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상태에서 우리는 번뇌에 끄달리기 십상이며, 어리석은 행위가 가져오는 해가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채 우리 마음은 이리저리 어리석게 내닫습니다. 무지야말로 우리가 지혜롭고 밝게 행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참으로 무서운 짐입니다. 법(Dhamma)을 수행하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고통을 `버리기' 위한 것이란 점을 명심하십시오. 이 세상과 자신을 법에 따라 살필 때 통찰하는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 지혜가 드러나면 무지는 자연히 소멸됩니다. 무지가 사라지면 갈애는 정복되고 고통 또한 사라집니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지요.

프랜티스 : 스님께서는 그런 일들이 마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스님 :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우리 삶의 고통을 억지로 뽑아버리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보다는 근원으로 들어가 그 뿌리를 제거해서 저절로 시들게 해야 합니다. 이는 인과에 관한 문제입니다.

프랜티스 : 아, 그런 법칙이 있어서 고통을 소멸시켜 나가는 모든 과정이 거기에 따라 이루어지는군요. 그러나 그 일을 성취하자면 개개인의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스님 : 물론, 그렇습니다. 자, 그럼 이렇게 설명을 드려보지요. 어두운 방으로 불켜진 램프를 들고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온 방안이 불빛으로 환해집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워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명확해집니다. 이때 램프는 곧 법입니다. 전에는 깜깜했던 것이 이제는 명료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어두움에 법이라는 램프를 가져다 비추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방법입니다.

프랜티스 : 그 방법이 곧 선수행 아닙니까?

스님 : 반드시 선수행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요.

프랜티스 : 선수행은 불교 수행의 근본이 아닙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 핵심인 것 같던데요.

스님 :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만을 고르고 다른 나머지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완전한 해탈을 이루는 데에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곧 바른 견해[正見]의 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많은 측면이 있습니다만.

프랜티스 : 그러니까 바른 견해가 완전히 서야 하겠군요.

스님 : 팔정도의 모든 요소들이 충분히 닦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프랜티스 : 그렇군요. 그러니까 바른 견해를 다 닦은 후에는 바른 생각을, 다음에는 바른 말 그리고 바른 행위, 바른 생활수단,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 이렇게 차례로 닦아나가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스님 : 아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은 사다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프랜티스 : 그러면 팔정도는 하나하나 닦아 올라가는 길이 아니란 뜻입니까?

스님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팔정도의 모든 길은 함께 수행되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이 따로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함으로써 수행자를 받쳐줍니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팔정도의 순서는 팔정도를 실제로 닦아가는 과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안심이 됩니다. 사실 저는 팔정도의 첫 관문조차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거든요.

스님 : 아, 당신은 아직도 무언가를 `통과'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꼭 밟아나가야만 하는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길은 해탈을 향한 자기 계발에 필요한 모든 중요한 측면들을 수반하고 있는 여덟 갈래의 수행프로그램입니다.
그 첫걸음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본성과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 여덟 가지 요소의 수행을 통해 자신을 차츰 정화시켜가는 작업은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또 다르게는 팔정도의 수행을 세 가지로 구분해 설명하기도 하지요. 계[戒, siila], 정[定, samaadhi], 혜[慧, pa~n~naa], 즉 도덕적 계율, 선정 그리고 지혜로 나누고 있습니다. 도덕적 계율은 전체 수행과정의 토대입니다 계율을 잘 지키면 선정수행의 지주가 되고, 선정이 잘 이루어지면 지혜의 토대가 됩니다. 도덕적 계율이 따르지 않을 때 수행자는 알맹이 있는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요. 그렇다고 이 말이, 먼저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된 다음에 선정과 지혜로 옮겨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수행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함께 닦아야만 비로소 완성과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어리석은 탓이겠지만 제게는 그 셋 가운데 지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솔직히 말해서 계율과 선정에 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요.

스님 : 그건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지혜란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수행의 목적은 아닙니다. 지혜의 힘으로 우리는 사물의 본성을 식별하여 해로운 생각들을 근절하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스님, 저는 지금까지 혼동을 일으켜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혜와 지혜를 토한 수행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을 혼동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시 불교 수행에는 단계를 밟지 않고 보다 높은 경지로 단숨에 뛰어넘는 일종의 비약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스님 : 아, 그런 비약 말씀입니까? 프랜티스 씨, 그럼 한번 물어봅시다. 여기 오시는 길에 과수원을 지나오셨겠지요?

프랜티스 : 과수원이요? 네, 그랬었지요.

스님 : 그 과수원에서 가을철에 사과를 수확하는 것도 보신 적이 있나요?

프랜티스 : 물론입니다.

스님 : 사람들이 사과를 따려고 할 때 나무 아래에 서 있다가 공중으로 냅다 뛰어올라 사과를 잡아채던가요?

프랜티스 : 원, 천만에요. 아!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스님 : 그럼 그들이 사과를 어떻게 따던가요?

프랜티스 : 그거야 사다리를 가져다가 나무에 걸쳐놓고 올라가서….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단계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밑 사다리를 밟지 않고서는 위 사다리에 오를 수 없다… 물론 그렇습니다. 띠싸 스님, 수행에 대해 지금까지 이해해 왔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봐야만 할 것 같습니다.

스님 :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사과를 따려는 열을 올리며 빨리 사과를 따겠다고 덤벼 나무 위로 뛰어오르다가 땅으로 떨어지곤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딱하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종교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숭고한 해탈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만 잘못된 방법으로 찾아 헤매는 셈이지요. 반드시 밟아 나아가야 할 단계를 준비하지는 않고 말입니다.

프랜티스 : 실은 저 역시 그런 사람의 하나인 듯해서 부끄러워집니다.

스님 : 그렇습니까? 하하!

프랜티스 :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수행을 위해 계율과 선정에 대해 좀더 여쭤보겠습니다. 선정이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동요없음과 안정이 아닙니까?

스님 :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선정이란 어떤 대상에 정신이 하나로 모아진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대상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고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정의 힘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까지는 이 힘을 갖고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아주 사소한 일조차도 하기 어려우니까요. 예를 들면 밥을 먹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편지를 쓰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도 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을 닦는다는 것은 이처럼 누구나가 갖고 있는 이상적인 능력을 강화시키고 계발시켜 진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도구로 전환시키는 일이지요. 이 세상 모든 일이 원인과 조건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듯이 지혜 또한 난데없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선정은 지혜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의 마음은 초점이나 목적이 없이 산만하고 나약해서 사물을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을 만큼 한곳에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생기는데 필수적인 고요함과 한결같음이 부족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한결같지 않으면 지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선정을 닦는 것은 지혜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고 지혜가 드러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는 작업입니다. 마치 정원사가 나무에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고 잔가지를 쳐서 정성껏 나무를 돌보면 수확의 계절에 열리지 말라고 해도 가지마다 탐스런 열매가 저절로 주렁주렁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프랜티스 씨, 선정이란 당신이 알고 있듯이 선수행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선정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적용되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프랜티스 :  저는 이제껏 선정이 특수한 정신훈련에만 필요한 것이라고 알았는데, 이제보니 지혜를 얻는데 필수적이라고 해야만 하겠습니다. 사소한 일을 할 때에도 어느 정도의 선정과 성찰이 필요한데, 하물며 인간의 괴로움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경우라면 얼마나 깊은 선정의 힘이 필요할까요!
그런데 계율은 어떻습니까? 계율에 관해선 뭔가 석연치 못한 점이 있는데…, 어째서 계율이 선정이나 지혜처럼 꼭 필요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덕적인 계행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다른 면에서는 탐구방법이 그처럼 과학적인 불교가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한 계율을 왜 중요하게 여길까요?

스님 : 당신은 계율이 왜 과학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랜티스 : 그야,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계율을 모독하려는 것은 아니고 또 분명히 높이 사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계율이 어떻게 해서 스님께서 이제껏 설명하신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수행방법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프랜티스 씨, 부처님께서는 도덕적 계율이 지혜라는 밥에 잘 어울리는 반찬이기 때문에 계행을 찬양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수행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기 때문이지요. 구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초발심자들, 곧 당신 같은 분들이 처음엔 흔히 불교 사상의 합리성이나 `과학적'인 측면에 감명을 받지만 그 본질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불교에 있어서 도덕적 계율도 다름없이 합리적인 것이란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도덕적 계율을 지키는 이유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거나 혹은 인습에 얽매어서가 아니고 우리의 정신 계발과 행복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조금이라도 향상하고자 한다면 바른 이해가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극복해야만 한다는 점을!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번뇌들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말이지요. 프랜티스 씨,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도 단속하지 못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프랜티스 : 그럴 수는 없겠지요.

스님 :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선이라고 부르고 어떤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말하지요. 예를 들어, 자선을 하는 것은 선에 해당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악이라고 할 것이고 프라이팬을 닦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겠지요.

프랜티스 : 그거야 상식 아닙니까?

스님 : 상식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선악의 구별을 인정해야 할까요? 그건 아마도 어떤 행동은 고통과 비애와 불행을 가져오는 반면에 어떤 행동은 행복과 안락과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일 겁니다. 선은 나와 남의 이익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악은 그 행위자와 피해자에게 고통을 낳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프랜티스 : 맞습니다, 스님. 어떤 행위가 불행을 초래하고 어떤 행위가 행복을 가져오는지는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그러므로 도덕은 수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고 본질적으로 선정의 토대가 됩니다. 비도덕적이고 무절제한 사람은 결코 선정의 힘을 계발시킬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항상 분출하는 감정에 따라 휩쓸리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은 늘 망상으로 산만하고 들떠있으며 어디에도 안착을 하지 못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성찰할 힘이 없습니다. 도덕적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티없고 떳떳한 마음을 갖추게 되고 탐구하는 마음을 방해하는 번뇌들의 위세를 꺾을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도덕적 계율에 맞는 행동을 함으로써, 헐떡이는 마음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기는 삶이 아니라 고결한 가치를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을 절제할수록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무아(無我)의 교설이 단지 요원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체험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정수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는 거지요.

프랜티스 : 그렇군요. 부끄럽게도 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스님 : 뭐, 부끄러워하실 것까지야…, 누구나 책을 읽고 질문을 하고 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입니다. 처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문제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 가운데 혹시 잘못 이해될 수도 있는 내용을 계속 고수하는 데 있습니다.

프랜티스 : 그런데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에서 특히 놀라운 것은 불교의 성격이 매우 명확하다는 사실입니다. 제 머릿속에서 불교는 어딘가 신비하고 이 속세와는 동떨어진, 마치 두루미 한 마리가 가을 달밤을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비현실적인 종교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불교는 전혀 막연하거나 애매하지 않고 매우 정확하며 현실에 적합한 종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신비주의는 찾아볼 수가 없군요.

스님 : (웃으며) 어디 그런 구석이 남아있는지 좀더 찾아보시지요.

프랜티스 : 불교는 특별한 교리체계를 가진 종교인 줄 알았습니다만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대단히 실제적인 가르침이라 여겨집니다. 스님께선 불교를 취미로 하려는 사람들에겐 아예 설자리를 주지 않으십니다.

스님 :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신중하게 탐구하고 사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수박 겉 핥기 식의 불교애호가를 면하게 되지요. 그중 어떤 사람들은 남달리 더 열심히 그 길에 전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말대로 불교를 막연히 취미로 하는 사람은 불교에 설 땅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론으로 짜맞춘 교설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법(Dhamma), 다시 말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일반 철학에서는 이런저런 사상을 맛보거나 다양한 가설들을 마음내키는 대로 즐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자세는 어리석어서 우리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부처님 법은 숭배하라고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실천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지요. 박물관 안에 전시하라고 만들어 놓은 골동품이 아닙니다. 또한 법은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간에 그대로 법입니다. 말하자면 사물의 본 모습은 우리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법은 우리들의 변덕에 따라 이렇게 변했다, 저렇게 변했다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리저리 갈라놓고 입맛에 맞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도 법을 새로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라 다만 이를 발견하여 중생의 이익을 위해 널리 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법에 대해 이를 받아들인다느니 안 받아들인다느니, 혹은 인정한다느니 안 한다느니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법 전체를 혹은 일부분을 자시의 구미에 맞게 고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불교를 취미로 하는 구경꾼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들은 오락 삼아 또는 자기의 편견을 굳히기 위해 불교를 구경다닙니다. 어떤 것에 무작정 뛰어들거나 뛰쳐나오는 것은 똑같은 행위입니다.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은 무조건 믿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편견없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전제 조건이나 구실을 붙이지 않으며 이런저런 이론에 한눈 팔지 않고 종교를 취미로 삼지도 않으며 오로지 부처님이 제시해주신 길을 따라 묵묵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성실이야말로 참으로 큰 장애입니다.

프랜티스 : 스님 말씀을 듣자니 제가 애당초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불교를 대하게 되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어쩐지 닫힌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불성실한 자세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도 단순한 불교 구경꾼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님 : 참 다행한 일입니다. 모쪼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음미하셔서 몸소 실천해보도록 하십시오.

프랜티스 : (다시 정색을 하며) 스님께서는 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성찰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셨지요?

스님 :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공부할 마음이라면 그 성찰하는 방법이 보다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당신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물어왔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꼭 이런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의문들은 기껏해야 예비 단계의 성찰일 뿐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체계적인 방법에 따라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자, 이제 일단 이 세상에서 당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다는 것과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았으니,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안 취하고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신자를 자처한다고 해서 깨달음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프랜티스 : 띠싸 스님, 저는 부처님이 제시하신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는 그 길을 실제로 닦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저도 나름대로 수행 같은 것을 해오긴 했는데 법에 맞게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어떤 것이 바른 선수행이며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스님 : 아무리 급해도 수레를 말 앞에 묶으면 끌고 갈 수가 없겠지요. 프랜티스 씨, 당신은 일정한 자세를 취하는 좌선에 대해 물으시는가 본데 우선 선수행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프랜티스 : 알 듯도 합니다만…, 분명 잘못 알고 있겠지요.

스님 : 자, 그럼 우리 아주 기초부터 이야기를 해봅시다. 흔히, 선수행(meditation)이라 번역되는 말은 빠알리어로는 봐와나(bhaavanaa)인데 그 뜻은 정신 수양(mental cultivation), 혹은 자기 계발(self-development)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어의 meditation이란 말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지녔지요. 이 점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교의 선수행이라고 하면 어두침침한 곳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난해한 주제를 숙고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저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해왔었지요.

스님 : 그런 생각에서 불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신비니 뭐니 하는 얘기가 나온 것이지요. 올바른 선수행은 환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유별난 자세나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선수행의 골자는 `마음을 챙기는 일', 빠알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하는 작업입니다. 마음챙김(mindfulness, 正念)이란,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고 또렷이 깨어있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놓치지 않고 주의하는 마음상태를 뜻합니다. 그것은 치우침없이 주시하며 다잡고 있는 마음입니다. `선수행한다'는 말은 당신이 무엇을 하거나 어떤 장소에 있거나 상관없이 마음을 챙기고 선정의 힘으로 그 상태를 지속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하면서도 선수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스님 : `함께'가 아니지요. 선수행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상생활 그 자체를 놓치지 않고 마음을 챙기는 수행입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선수행과 일상생활이 같은 것입니까? 그건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스님 : 거기에 아무런 차이도 구별도 없어야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참선하는 시간 따로 있고, 마음 편히 지내는 일상생활이 따로 있는 줄로 압니다. 그들은 하루 한두 시간씩 방석에 앉아 좌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요.
프랜티스 :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루 온종일을 선수행에 모두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상관없습니다. 시간을 꼭 정할 필요는 없지요. 무엇보다도 우선 수행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행위인지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만일 피아노 연습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미 당신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인간의 완성인 이상 무엇 때문에 우리의 노력을 특별한 행위나 제한된 시간에만 국한시키겠습니까? 세상을 전체로서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세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또 마음챙김의 수행은 항상, 쉬지 말고 이어져야 합니다.

프랜티스 :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한순간에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바쁜 일과 속에서 어떻게 순간순간을 마음챙기는 일에 전념할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사띠(sati)는 원래 단지 `잊지 않는다(memory)'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마음챙김의 의미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도 잊지 않고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고 또렷이 깨어있으며,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한 번에 한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오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때라야 마음챙김의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챙기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인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일을 하고 있다면 일 자체에 당신의 주의를 온통 기울이십시오. 생각이 여기저기 떠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먹고 있음을 또렷이 알아차리십시오. 목욕을 할 때는 목욕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이와 같이 현재 당신의 감각에 와닿는 것이 곧 당신이 행하는 선수행의 주제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단지 보고 알아차리고는 그대로 놓아버려야 합니다.

프랜티스 :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어렵군요. 그런 마음은 일상의 우리 마음과 어떻게 다른가요?

스님 : 사람들은 대개가 지금 이 순간의 일에 마음을 챙겨 임하지를 못합니다. 현재 이 순간을 알아차리고 있지 못해요. 우리의 마음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갈갈이 흩어져 끊임없이 여기저기 헤매며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궁리하느라 아주 바쁩니다. 그 마음은 갈망과 증오로 끊임없이 헐떡거리고 여기서 서둘러 저기로 달려갑니다. 그러느라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알아차릴 틈이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프랜티스 씨 자신의 마음도 또한 챙겨져 있지 못하고 바로 앞에 있는 일에서 멀리 도망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마음챙김을 수행하여 쓸데없는 마음의 동요를 막고 현재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여기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고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프랜티스 : 그러니까 선수행은 참으로 마음을 훈련시키는 일이군요.

스님 :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도덕적 계율을 지킴으로써 다스리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은 선정 수행으로 다스립니다.

프랜티스 : 지금 이 순간에 머물도록 마음을 챙기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선수행입니까?

스님 : 그건 아니지요. 마음챙김과 더불어 한편으로 선정(samaadhi, concentration)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음챙김이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관찰, 탐구, 알아차림이라면 선정은 우리의 마음을 일정한 어떤 대상에 지속적으로 붙잡아두는 것입니다. 선정과 어울려 마음챙김은 더욱 발전하여 정지(正知, sampajaana)를 성취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주의를 고정시키고 그 상태를 지속하며[禪定]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바라보게 되면서[正念] 이 정지(正知)가 드러납니다. 이 정지에 의해 대상이 어떤 것인지, 또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며 그 대상이 어떤 이익을 주고 어떻게 위험한 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를 정지에 의해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릇됨과 참됨, 비천함과 고상함을 제대로 가려보게 됩니다. 이 같은 수행이 궁극에 이르게 되면 이상생활과 선(禪)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프랜티스 : 스님께선 좀전에 `대상'을 말씀하셨는데 선수행에 특별히 어떤 대상이 필요한 건가요?

스님  : 어떤 물체나 정신적 현상이나 모두 선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지요.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또는 마음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선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프랜티스 : 무엇이나 다 될 수 있단 말씀이죠? 일상생활 자체가 선수행이 되어야만 한다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었군요! 그렇지만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관(觀)할 주제를 특별히 선정해주지 않습니까?

스님 :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서 사념처(四念處)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프랜티스 : 들어본 듯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스님 :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asatipa.t.thaana-sutta)』 에 보면 마음챙김에 관한 저 유명한 부처님의 법문이 실려 있습니다. 마음챙김의 네 가지 토대[四念處]에 관한 가르침 말입니다.
첫째는 몸에 대한 관(觀)입니다[身念處). 이것은 우리의 몸에 일어나는 모든 신체적 현상을 남김없이 지켜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각(知覺)하고 사고하는 이 여섯 자 몸안에 세계의 시작이 있고 세계의 끝이 있으며 세계의 끝으로 가는 길이 있도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해탈하기 위해 찾아내고 깨달아야 할 모든 현상이 바로 이 몸 안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마음을 챙기고 관하는 것은 특히 수승한 열매를 맺는 공부입니다.
마음챙김의 두 번째 토대는 느낌에 대한 관입니다[受念處].

프랜티스 : 느낌이라니요? 감정을 말하는 것인가요?

스님 : 여기서 말하는 `느낌'이란 유쾌한 느낌, 불쾌한 느낌, 또는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느낌을 말합니다. 우리가 대하게 되는 모든 대상은 우리 마음속에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혹은 그저 그런 느낌을 일으켜줍니다. 수념처관(受念處觀)이란 이러한 느낌들의 성질을 주의깊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느낌들을 지켜보되 유쾌한 느낌에 애착하거나 불유쾌한 느낌을 싫어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종류의 선수행이든간에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편파적이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프랜티스 : 아무래도 어렵게 들리네요. 유쾌한 느낌을 불쾌한 느낌보다 더 좋아하지 말라니요. 아무튼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스님 : 마음챙김의 세 번째 토대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관입니다[心念處]. 이는 순간순간의 마음상태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행복한가, 불행한가, 괴로운가, 의기양양한가, 태만한가, 힘이 있는가, 집중돼 있는가, 흩어져 있는가 등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지켜본단 말입니까? 스님, 그건 좀 억지소리 같습니다.

스님 : 실제는 그렇지 않지요. 그것은 표현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다만 편의에 따라 마음이란 말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엄밀히 말해 끊임없이 흐르는 정신현상의 과정들이 모여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마음을 지켜본다는 말은 마음을 챙겨서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매순간순간에 그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주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프랜티스 :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상태를 관한다는 것은 마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지켜본다는 뜻이군요?

스님 : 그게 아닙니다. 심념처관(心念處觀)이란 매순간의 마음상태나 마음의 성질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이루는 내용, 혹은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특정한 현상은 네 번째인 법념처(法念處), 즉 정신적 대상에 대한 관에서 이야기됩니다. 이 법념처관(法念處觀)에서는 마음챙김의 방향은 마음의 대상이 되는 여러 정신 현상들 쪽으로 향해집니다. 그 현상들이란 어떤 사상이나 기억이나 개념이나 희망이나 공포 등 모든 사고(思考) 형태를 말합니다.

프랜티스 : 왜 염처(念處)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스님 : 사실 마음챙김 자체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달라질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 마음챙김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를 배우기 위해, 대상을 분류하고 그 중의 어떤 대상으로 마음챙김을 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념처란 어떤 특정한 경험을 토대로 수행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몸을 관함에 있어 우리는 우주의 주의력을 몸으로 돌려 몸으로부터 일어나는 경험을 주시해 놓치지 않고 지켜봅니다. 좌선수행에서 스승은 흔히 제자들에게 호흡의 들숨과 날숨, 혹은 복부의 오르내림과 같은 한 가지 신체적 현상에만 집중할 것을 권하지요. 이 경우 마음챙김은 몸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느낌[受], 마음의 상태[心] 그리고 마음의 대상[법]에 관해서도 역시 그 과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이 사념처란 네 가지 분류는 아무렇게나 편의에 따라 분류된 것일까요?

스님 :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념처는 우리가 평소에 구별하지 못하는, 경험의 한 특정한 측면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주십시오. 사념처관을 수행해가는 동안 차츰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 자신이라고 알아왔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몸뚱이는 어디까지나 몸뚱이일 뿐, 나 자신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지요. 우리의 느낌들 역시 그냥 느낌일 뿐이고 마음의 상태는 단지 마음의 상태일 뿐이며 마음의 대상 또한 그대로 마음의 상태일 뿐입니다.

프랜티스 : 아, 그렇군요.

스님 : (프랜티스를 유심히 바라본다.) 프랜티스 씨, 선생께선 내가 한 말을 이해하신 것 같군요. 그러나 여기서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참다운 이해는 스스로의 힘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네, 그렇게 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또 여쭤봅니다. 아까 수념처관(受念處處)을 설명하시면서 스님께서는 유쾌한 느낌을 불쾌한 느낌보다 더 좋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이 사념처관을 수행할 때 수행자는 오로지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 마음을 챙기는 일에만 전념할 뿐입니다. 예컨대, 어떤 종류의 느낌을 경험하게 되면 그는 있는 그대로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 경험이 유쾌한 것이면 유쾌한 것으로, 불쾌한 느낌이면 불쾌한 느낌으로, 그저 그런 느낌이면 그저 그런 느낌이라고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프랜티스 : 그렇지만 스님, 사람들은 유쾌한 것을 불쾌한 것보다 더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스님 :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불쾌한 것을 참아가며 좋아하고 유쾌한 것을 억지로 싫어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느낌이란 유쾌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기 마련입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좋다, 싫다는 생각을 제쳐놓고 다만 그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 속에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얻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멀리 하려고 부득부득 밀어내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놓여있는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서 오직 평등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이 일어나든 간에 다만 지켜보기만 해야 합니다.
프랜티스 : 그러니까 스님 말씀은 어떤 불쾌한 느낌이 일더라도 그 느낌에 대해 어찌 해보겠다는 생각은 그만두고 그대로 참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스님 : 아닙니다. 부처님이 제시한 길은 고통의 완전한 소멸을 위한 길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불법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은 분명 그의 생활 속에서 고통이나 불쾌가 줄어드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물론 상당한 경지에 이른 분들도 때로 불쾌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는 모든 현상이 덧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헛되이 집착하거나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을 닦음으로써 좋아함과 싫어함의 아귀다툼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고통들에서 벗어납니다. 집착을 버린 것이지요.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일들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그대로를 지켜볼 뿐 거기에 대해 기뻐 날뛰거나 비탄에 빠지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겠군요.

스님 :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도 한때는 거칠고 어리석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성실히 수행하려면 우선 당신의 마음을 닦으십시오. 그리고 덧없는 현상을 믿고 의지하던 마음을 거두십시오. 마음챙김을 닦아나가면 당신의 내면과 바깥 경계가 다 무상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현상은 참으로 믿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고 생멸하며 계속 흘러갑니다. 이 점을 사실대로 보게 되면 다신은 더이상 어딘가에 집착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프랜티스 : 모든 집착의 근본은 헐떡이는 욕망, 즉 갈애(渴愛)가 아니겠습니까?

스님 : 갈애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우리 마음에 뿌리 박혀 있습니다. 불법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더욱 잘 파악하게 되어 마침내는 갈애의 뿌리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갈애는 어리석음이라는 자양분을 받아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수행의 길에서 게으르고 방일하는 일상생활로 되돌아간다면 갈애는 분명 우리의 인생에 고통의 새끼를 치고 또 칠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수레바퀴는 돌고 또 돕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면 갈애는 틀림없이 그 뿌리를 내릴 토양을 잃고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그에 따라 고통 또한 소멸될 거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프랜티스 : 만일 안한다면? (걱정스런 표정으로) 똑같은 삶의 되풀이?

스님 :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똑같은 삶의 되풀이지요.

프랜티스 : 그러니까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군요. 행복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스님 : 세속의 즐거움이란 찾아왔다간 떠나 버립니다. 변치 않는 행복은 결코 우연히 찾아오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불멸의 행복을 얻는 것이 정말 가능합니까?

스님 : 가능하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가능하지 않다구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표정이 밝아진다) 아, 네. 그러한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때 행복의 성취가 가능하겠군요.

스님 : (미소지으면) 그렇지요. 가능합니다.

프랜티스 : 아, 알겠습니다. 이제야 알 듯합니다.

스님 : 불법에 관한 책을 읽거나 설법을 듣고 배우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프랜티스 : (불쑥) 띠싸 스님, 만일 누군가 수행의 길로 나선다면 아니, 제가 나선다면 과연 해낼 수 있을까요?

(스님, 침묵한다. 프랜티스 씨는 조바심을 내며 스님의 대답을 기다린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주위는 향기로운 꽃내음과 함께 적막함이 깃든다. 아직도 스님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윽고 프랜티스 씨는 스님께서 대답을 안할 작정인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당황해서 혼잣말을 한다.)

프랜티스 : 아, 네. 물론입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스님의 법문을 듣고나니 뭐랄까,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지요.

(잠시 후 스님의 목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스님 : 마음을 편히 하시지요. 프랜티스 씨,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의 마음을 머물게 하십시오. 잔디를 꽉 움켜쥐고 계시군요. 그걸 놓으시지요.

프랜티스 : 알겠습니다.

스님 : 자, 이제 계속 놓으십시오.

프랜티스 : 계속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스님!
(잠시 후 일어나며) 벌써 어두워졌는데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스님 : 살펴 가십시오, 프랜티스 씨.

프랜티스 : 좋은 말씀 고마웠습니다. 이제 저의 의심은 말끔히 가셨습니다.
(깊숙이 허리 굽혀 절한다) 편히 계십시오.

(프랜티스, 잔디밭을 건너간다. 스님이 그를 불러 세운다.)

스님 : 프랜티스 씨.

프랜티스 : 네?

스님 : 마음을 챙기십시오.

프랜티스 : 노력하겠습니다.

(프랜티스, 잔디밭을 지나 사라진다. 밤의 적막과 어두움이 깔리는데 띠싸 스님은 그대로 앉아 있다. 풀과 나무와 스님의 모습이 차차 시야에서 사라지고 시간은 흘러간다.)

 

 출처: 보리수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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