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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11분》

《11분》 (련재11)
2015년 01월 18일 08시 03분  조회:1654  추천:0  작성자: 세계명작
《감사합니다. 이제 움직이셔도 됩니다.》
막 꿈에서 깨여난듯한 표정을 짓고있는 화학자에게 화가가 말했다. 그러고는 마리아를 돌아보며 스스럼없이 주문했다.
《저 구석에 가서 앉아요. 될수 있는대로 편한 자세로. 빛이 완벽해요.》

마치 모든것이 운명에 의해 결정되여있는것처럼. 이것이 더없이 자연스러운 일인것처럼. 그녀가 평생 이 남자와 함께 지냈거나 혹은 꿈속에서 이 순간을 이미 살아보았기때문에 자신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꿰뚫고있는것처럼. 마리아는 아이스잔과 가방과 책을 집어들고 그가 가리킨 창가의 테블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붓, 캔버스, 다양한 색갈의 물감이 들어있는 유리병들, 그리고 담배 한갑을 옮겨놓은 뒤 그녀옆에 무릎을 꿇고앉았다.

《그 자세로 가만히 있어요.》
《무리한 요구네요. 끊임없이 움직이는게 제 삶이라서.》
그녀는 말하고나서 스스로 재치 넘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 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내의 눈길이 불편했기때문에 마리아는 가능한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면서 창밖의 거리와 표지판을 가리켰다.
《산티아고의 길이라는게 도대체 뭐죠?》

《순례의 길이예요. 중세때 전 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지방 라코루냐주에 있는 종교도시. 예수의 열두 제자중 한사람인 야고보가 묻힌 곳이라 하여 중세 유럽 최대의 순례지로 번영하였다.)에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났죠.》
그가 캔버스를 펴고 붓을 준비했다. 마리아는 여전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저 길을 따라가면 스페인에 가닿게 되나요?》
《한 두어달 걸릴걸요. 걸어가면 말이죠. 그런데 부탁 하나만해도 될가요? 입 좀 다물어주세요. 십분 이상 걸리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테블우에 있는 그건 뭐죠? 그것 좀 치워줘요.》

《책이예요.》
사내의 명령투의 말에 은근히 화가 난 마리아가 대꾸했다. 자기앞에 앉아있는 녀자가 도서관을 드나드는 교양있는 녀자라는걸 알리고싶었다. 하지만 그는 량해도 구하지 않고 직접 책을 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 실패했다. 특별히 강한 인상을 남기고싶었던것도 아니지만. 하긴 지금 직업상 여기 앉아있는것이 아니니. 매력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후하게 지불해주는 남자들을 위해 아껴두는 편이 나았다. 내가 왜 저 화가와 인연을 맺어야 하지? 서른살이나 된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고있는것도 꼴불견이였다. 그녀는 왜 그가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가? 카페 녀종업원은 그가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니. 저 화학자가 유명하다는 뜻이였을가? 그녀는 그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옷만 봐서는 아무것도 알수 없다. 삶은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사람들이 실은 정장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부자라는 사실을.

(내가 저 남자생각은 왜 하지? 내가 관심있는건 그림인데.)
십분. 화폭우에 불멸의 녀인으로 남을수 있다면 그 정도 시간쯤은 얼마든지 내줄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옆에 자신을 그려넣고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혹 그가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려요.》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녀는 행인들과 산티아고의 길 표지판을 바라보며 그 길이 수세기전부터 거기 있었고 오래동안의 진보, 세계와 인간의 변화에도 살아남았다는것을 생각했다. 좋은 징조가 아닐가? 이 그림 역시 똑같은 운명을 거쳐 오백년후 어느 미술관에 전시될수도 있다…

사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이 진전될수록 마리아는 처음 가졌던 흥분을 조금씩 잃어갔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 카페에 들어설 때 마리아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한창 벌이가 좋은 직업을 그만둘 결정을 내릴수 있는 자신만만한 녀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또다시 한낱 창녀에게는 사치라고 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안정한 자신을 느끼고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그 리유를 찾아냈다. 몇달만에 처음으로 그녀를 하나의 대상이나 녀자로서가 아니라 뭐라 표현할수 없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있는 눈길을 느낀것이다.

(그는 내 령혼, 내가 느끼는 두려움, 나의 연약함, 삶을 스스로 지배하는척하지만 실상은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과 싸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내 능력을 바라보고있어.)
말도 안되는 소리, 또 실없는 생각을.
《저기요…》
《제발 입 좀 다물어요.》
사내가 말했다.
《지금 당신의 빛이 보이고있으니까.》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슴이 정말 탱탱하군.》, 《허벅지가 정말 매끈해.》, 《열대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엿보여.》 따위. 또는 기껏해야 《보아하니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싶어하는군.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당신에게 아빠트를 한채 장만해주겠소.》 그녀에게 익숙한 말은 이런것들이였다. 그런데… 나한테 빛이라니? 석양이 나를 비추고있다는 말일가?
《당신만의 빛 말이요.》

자기가 한 말을 그녀가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걸 알아차린 화가가 덧붙였다.
나만의 빛? 그렇다면 서른살이나 먹었으면서도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 덜떨어진 화가보다 현실에서 더 유리된 사람은 없을것이다. 잘 알려져있는 바와 같이 녀자는 남자보다 훨씬 더 빨리 성숙한다. 그리고 철학적인 문제로 고민하느라 밤을 새지는 않지만 마리아는 적어도 한가지는 확실히 알고있었다. 화가가 《빛》이라 불렀고, 그녀가 나름대로 《특별한 광채》로 해석한 그것을 마리아 자신은 갖고있지 않다는것을. 그녀는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였다. 그녀는 묵묵히 외로움을 견디고있고 자신이 한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약할 때는 강한척했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땐 약함을 가장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모든 정열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목표에 근접한 지금에 와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곱씹고있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존재에게 《특별한 광채》같은게 있을리 없었다. 그건 그저 멍청이처럼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한 말이 분명했다.
(당신만의 빛이라니! 다른 말을 고를수도 있었잖아. 《옆모습이 참 예쁘네요.》라든가.)

집안에 빛이 어떻게 들어오지? 활짝 열린 창을 통해서. 한사람속으로는 빛이 어떻게 들어오지? 사랑의 문을 통해서. 열려있기만하다면. 그런데 그녀의 문은 닫혀있지 않은가. 진심으로 한 말이라면, 그는 통찰력 없는 삼류화가가 분명했다.
《끝났어요.》
그가 말했다.

마리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림이 보고싶었지만, 보여달라고 하면 교양 없다고 할가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그녀가 부탁하자 그가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가 그린것은 그녀의 얼굴뿐이였다. 그녀와 흡사하긴 했지만 모델이 누구인지 모르고 봤다면 그녀가 거울을 통해서는 볼수 없는 《빛》으로 가득한, 그녀보다 훨씬 강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것이다.
《내 이름은 랄프 하르트요. 한잔 더하겠어요?》

《아뇨, 괜찮아요.》
만남은 이제 슬프도록 예측 가능한 단계로 접어들고있었다. 남자는 녀자를 유혹하려 시도하는것이다.

《여기 아이스각테일 두잔 더 주세요.》
그녀의 대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음료를 주문했다.

그녀에게 달리 할 일이 뭐가 있는가? 농장경영에 관한 지루한 책을 읽거나 이미 수백번은 했을 호수가 산책을 하느니 그녀의 《실험》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지금 그녀로서는 도무지 정체를 알수 없는 빛을 그녀에게서 봤다는 남자와 잡담을 나누는것도 괜찮을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하시죠?》
사내가 물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접근해왔을 때, 스위스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여하는것을 꺼리기때문에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새로운 만남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할수만 있으면 그녀가 피하고싶어하는 질문이 떨어졌다. 뭐라고 대답할수 있을가?
《나이트클럽에서 일해요.》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져버린것처럼 홀가분했다. 질문을 하고(쿠르드인들은 어디서 왔죠? 산티아고의 길이라는게 도대체 뭐죠?) 타인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답하는것(나이트클럽에서 일해요.) 그것이 그녀가 스위스에 발을 디딘이래 배운 모든것이였다.

《전에 본적이 있는것 같아요.》
마리아는 그가 잠시 주춤하는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승리를 음미했다. 몇분전만해도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원하는것을 확실히 알고있는것처럼 보였던 화가가 이젠 모르는 녀자앞에서 머뭇거리는 뭇사내들과 다를바 없어보였다.
《그럼 그 책들은?》

그녀는 책들을 보여주었다. 농업, 농장경영. 그가 또다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섹스산업에 종사하세요?》
그가 위험을 무릅썼다. 옷차림때문에 창녀로 보였던걸가? 어쨌거나 그녀는 시간을 벌어야만했다. 게임이 다시 팽팽해지고있었다. 그녀는 잃은게 전혀 없었다.
《왜 남자들은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죠?》
그가 책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섹스와 농장경영. 둘다 아주 따분한 분야로군요.》

뭐라고? 그녀는 도전을 받았다고 느꼈다. 어떻게 내 직업에 대해 그따위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그래, 그는 내 직업에 대해 잘 모르고있다. 아마 어디서 들은 얘기를 주어섬기는거겠지. 하지만 그냥 넘어갈수는 없었다.

《그래요? 전 그림보다 따분한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고정된 사물, 멈춰버린 움직임, 결코 원본에 충실하지 못한 그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나고 더 교양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세상에서 뒤처진 화가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양길로 접어든 예술분야. 후안미로라고 들어봤어요? 전 들어본적 없어요. 어떤 식당에서 한 아랍인한테 들은것 말고는. 그리고 그건 내 삶을 털끝만큼도 바꿔놓지 못했죠.》

그때 주문한 음료가 도착했고 대화가 중단되였기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말이 그에게 심했는지 어떤지 알길이 없었다.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마리아는 이제 일어서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랄프 하르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있을듯했다. 그런데 테블엔 아직 손도 안댄 각테일 두잔이 놓여있었다. 그것이 자리에 앉아있을수 있는 핑게거리가 됐다.
《왜 하필 농업에 관한 책이죠?》
《뭘 묻고싶은거죠?》

《베른가에 간적이 있어요. 그곳의 제일 비싼 나이트클럽에서 당신을 본 기억이 나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당신의 <빛>이 너무 강했거든요.》

마리아는 딛고있는 바닥이 쑥 꺼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으로, 그럴 리유가 전혀 없었는데도. 그녀는 자신의 직업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자신과 부모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베른가를 찾아간 그였다. 순간, 기대했던 모든 마술은 사라져버렸다.

《잘 들어요, 하르트씨. 난 브라질사람이지만 아홉달전부터 스위스에 살고있어요. 그리고 스위스사람들은 우리가 방금 확인한것처럼 거의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있을만큼 작은 나라에 살고있기때문에 아주 신중하게 처신해요. 아무도 타인의 삶에 대해 질문하지 않죠. 당신이 한 말은 경우에 맞지 않는데다가 아주 무례했어요. 당신의 목적이 날 모욕하는거라면 시간랑비하신거예요. 이 악취나는 아이스각테일 고마워요. 난 이걸 모두 마신 다음, 담배 한개비를 피우고 가겠어요. 당신은 당장 일어나 가도 좋아요. 유명한 화가가 창녀와 한 테블에 앉아있는건 꼴불견이니까. 내 직업은 창녀예요. 아시겠어요? 죄의식도 없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래에서 우까지 창녀라구요. 그래요, 당신, 내 미덕이 뭔지 알아요? 당신도 나도 속이지 않는것.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거짓말로 당신 같은 사람의 환심을 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저기 저쪽에 앉아있는 유명한 화학자가 내가 뭐 하는 녀자인지 알게 될가봐 두려우세요?》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창녀! 그런데 이거 알아요? 난 그 일때문에 자유로워졌어요. 그리고 정확히 구십일후면 이 저주받은 나라를 떠날거구요. 여기서 번 돈과 눈우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방을 꽉꽉 채우고 질좋은 와인을 고를수 있는 교양과 남자들의 본성을 꿰뚫어볼수 있는 통찰력까지 얻어서 돌아간다구요!》

종업원아가씨가 질겁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있었다. 화학자는 그녀의 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마리아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했을가. 그것은 각테일에 섞인 알콜, 머지 않아 다시 브라질 시골녀자가 된다는 확신, 또한 자신의 직업을 속시원히 털어놓았으니 이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 멸시의 눈길, 별꼴 다 보겠다는 몸짓을 가벼운 마음으로 비웃어줄수 있을거라는 생각때문이기도 했을것이다.

《잘 알아들으셨나요, 하르트씨? 난 아래에서 우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창녀예요. 그리고 그게 나의 장점이자 미덕이예요!》
화가는 침묵을 지켰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자신감이 회복되는것을 느꼈다.

《이봐요 당신, 당신은 자신의 모델에 대해 아무것도 리해하지 못하는 엉터리 화가예요. 저기 반쯤 잠든채 앉아있는 화학자는 실상은 철도 잡역부일수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 그림에 그려진 다른 사람들 역시 겉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일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내게서 특별한 <빛>을 봤다고 주장할리가 없겠죠. 방금 들으신대로 창녀에 불과한 녀자한테서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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