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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차로 상해를 떠난 연변두만강수석회 김봉세, 리분녀 부부가 절강 소흥역에 내린 시간은 11월 27일 오후 2시쯤이다. 소흥역으로 마중을 나가니 김봉세회장은 오후 시간도 있고한데 로신선생의 옛집을 찾고싶다고 속셈을 터놓는다. 김봉세 부부를 안내한 소흥의 로신옛집 답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소흥의 로신선생 옛집은 소흥시 해방남로 로신거리에 위치. 로신의 옛집, 조부네 옛집, 백초원, 어린 시절 공부하던 삼미서옥, 로신동상광장 등으로 이루어지고 국가급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받들리고 있는 현실. 우리가 로신 옛집 거리에 들어서자 목요일 오후인데도 유람객들이 련속부절히 밀려 들어 일대 풍경을 이룬다.
우리가 선참 발을 들여놓은 곳은 로신선생이 어린 시절 글을 읽었던 삼미서옥이다. 삼미서옥에서도 어린 로신이 앉아 공부하던 책상과 걸상이 인상적이여서 김봉세회장은 련속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김회장은 세월이 흐른다음 남는것은 사진 뿐이라며 삼미서옥에 무척 흥미를 가지였다.
이어 우리는 그 옛날 시절에도 흔치않은 로신의 조부네 옛집—주가로대문과 로신의 옛집—주가신대문을 돌아 보았다. 로신선생이 소흥의 주씨네 명문대가에서 태여나 자라남이 알리는 력사의 현장이라 김회장은 소흥에 와서 로신의 옛집을 찾을줄 어찌 알았겠느냐며 로신선생이 어린 시절 뛰놀았다는 로신옛집내 안뜰의 백초원에서 인츰 떠날줄 모른다. 로신선생에 대해 남다른 지식을 가진 김회장이 돋보이는 순간이였다.
답사의 발걸음은 나중에 로신옛집 구내 로신기념관으로 이어졌다. 로신기념관은 2004년의 건축물로서 로신 조부네 옛집과 로신옛집 사이에 위치, 전체 면적이 5500여 평방미터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 기념관 보다 두배 남짓히 크다고하는데 강남의 전통적 풍격으로 지어진 기념관 정면에는 곽말약선생의 필체로 된 “소흥로신기념관” 금빛글자 일곱자가 유난히 눈부시었다.
2층으로 된 로신기념관에 들어서면 로신선생의 출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사망후의 이모저모 추모사진과 글, 인물형상화, 멀티미디어 등이 현대진렬수단으로 잘 나타나 있었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것은 로신의 어머니 로서사진과 로신선생의 원 부인 주안의 사진이라 할까.
로신선생의 어머니 로서는 1857년생 소흥출신으로서 결혼하여 주씨댁에 들어서니 남편되는 사람은 수재이고 시아버지는 한림 출신으로서 소흥의 이름난 명문대가였다. 그러나 시아버지 주복청은 북경에서 관리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과거시험 회뢰사건에 휘말려드는 신세. 그 영향으로 로신의 아버지 주백이는 과거출세 희망이 끊기고 화병으로 페병에 걸려 가산을 탕진하고 만다. 1896년에 남편이 끝내 병사한후 로서는 아이 넷을 데리고 어려운 가정의 중임을 떠메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아들 로신이 남경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하자 로서는 장신구까지 팔아가며 백방으로 8원을 갖추어 주고 로신이 후에 일본류학길에 오르자 또 온힘을 다해 받들어 준다.
로신 어머니의 잠간 스케치라 하겠다. 그만큼 로신은 어머니께 효도를 하며 어머니의 성씨 따라 필명을 로신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어머니건만 로서는 아들의 결혼문제에서는 치명적 오유를 빚어내고 만다. 로신한테는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외삼촌의 딸 금고가 있었는데 두집 사이에 언약까지 한 사이면서도 로서는 금고가 양띠라고, 녀자가 양띠면 남편을 먼저 죽이는 살이라고 오래동안 정식청혼을 미루기만 한다. 화가 난 로신의 외삼촌은 딸 금고를 다른 남자한테 시집 보낸다. 결국 금고는 우울증으로 앓다가 죽는다.
1898년 5월, 로신은 남경에 가서 선후로 남경강남수사학당, 강남륙사학당 부설 광로학당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이 기간인 1901년 4월 로서는 아들 로신과의 말도 없이 주안이라는 처녀를 며느리감으로 정하게 된다. 하나 로신은 주안과의 결혼을 반대하며 1902년 3월에 일본류학길에 오르고만다. 그러다가 로신이 일본녀자와 결혼했소, 아이를 낳았소 등 풍문이 들리자 모친의 병이 위독하니 급히 귀가하라는 급전을 보내게 되고 로신은 소흥에 돌아와 구식결혼에 맞띠우고 구식결혼에 응할수 밖에 없다. 혼례식 날 저녁 로신은 신방에서 온밤 울다가 나흘후 일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후 로신선생은 8년 일본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경의 중앙교육부에 취직하다가 교육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고 북경녀자사범학당(후에 북경녀자사범대학으로 개칭)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5년 10월에 녀학생 허광평과 사랑관계를 맺게 되고 같이 생활한다. 유감이라 할까, 로신은 시종 주안과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파혼하지 않은 채 시종 어머니와 주안과 더불어 한집에서 생활하나 로신은 로신대로 허광평과 부부생활, 주안은 처녀로 늙어야만 한다.
여러 자로를 통해 보는 로신의 어머니 로서와 원 부인 주안의 개략 소개이다. 주안의 사랑비극이 애절하여, 로신 어머니의 극단 봉건조치가 안쓰러워 우리의 발길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가, 로신기념관 답사를 마치고서도 로신 어머니와 원 부인 주안의 사진인상이 머리를 감돈다.
로신옛집 답사는 깊은 인상속에서 끝나간다. 김봉세회장은 항주까지 다녀가도 소흥은 거치게 되지 않는데 나 덕분으로 소흥 로신옛집을 찾아 보았다며 무척 감회에 젖어든다. 어린 로신이 할머니한테서 옛말 듣는 모습을 형상한 동상앞에서 유머동작으로 기념사진을 남기는 회장안해 리분녀의 모습도 그러하다. 로신옛집 방문이 주는 인상이 너무나도 큰가부다.
2008년 11월 30일, 소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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