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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생전에 안중근에 대해 특별히 들려준것은 없지만 두가지 일은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한가지 일은 어머니가 18살에 시집갈 때 친정어머니가 없어서 일가집에서 혼례를 치뤄주었는데 당시 고향인 황해도 해주근처에서 살던 안중근의 안해가 찾아와 옥양목속옷을 선물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는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는 홍할머니가 11살 되던해인 1946년 민주동맹에서 개원조선족중학교 회당에서 3.1운동을 기념할 때 어머니더러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하였는데 그때 어머니는 “안중근옥중가”까지 불렀다고 한다.
홍할머니의 어머니 곽희종은 안중근의사의 고종륙촌녀동생이면서도 의병대장의 딸, 혁명렬사의 어머니이다. 곽씨는 1912년 조선 황해도에서 곽재경과 안현경(안중근의사의 5촌고모)의 막내딸로 태여났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곽재경은 성질 또한 불같아서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앞에서 굴할줄 몰랐다. 왜놈들이 흰옷을 못입게 하고 상투를 자를것을 강요했지만 그는 버젓이 상투를 틀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초기에 그는 화승총을 쥐고 의병대장이 되여 선두에서 왜놈들을 족쳤다.
유년시절 곽씨는 안중근의사가 살던 천계동의 외가에서 근 4년간 살면서 한동네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막내녀동생 안익근언니네 집에 자주 놀러갔다. 그때 안익근은 그에게 가족사진첩과 안중근의사의 유상을 꺼내보이면서 안중근의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안중근옥중가”도 배워주었다.
당시 이 노래는 완전히 금지된 노래였다. 할빈역에서 안중근의사의 “코리아독립만세!” 웨침소리로 하여 간담이 서늘해진 왜놈들은 이 노래를 엄밀히 단속하였다. 동네어른들도 애들에게 이 노래를 배워주는 곽희종이 걱정되여 “음전(애명)아, 너 아무데서나 함부로 이 노래를 부르면 안된다. 왜놈들이 알면 큰일난다”고 타일렀다. 그렇지만 어린 곽희종은 “이 노래는 우리 칠성오빠(안중근의 애명)가 감옥에서 왜놈들과 싸우면서 부른 노래”라며 열심히 배워주었다.
곽희종은 17살에 홍안표와 가정을 이루어 아들딸을 보았다. 조선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에 왔건만 석달만에 장대같던 남편이 급병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세상뜬 뒤 그는 재가하지 않고 모든 사랑과 정성을 오로지 두 남매에게 쏟아부었다.
곽희종은 2000년에 88세로 세상떴는데 돌아가기전에도 “안중근옥중가”를 불렀다고 한다.
오빠는 중국인민지원군 렬사
홍성희할머니의 오빠 홍성필은 홍씨집안의 3대독자였고 곽종희의 대들보였다. 개원에서 8.15를 맞고 이듬해 3월 곽희종은 17살나는 홍성필을 설득하여 해방군(당시 지방공안대)에 참군시켰다.
아들이 떠나는 날, 곽희종은 남매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성필아, 우리는 모주석과 공산당의 덕분에 광복의 날을 맞아 기를 펴고 살게 되였다. 너의 외조부는 의병대장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몸바쳤고 또 너의 칠촌외숙(안중근의사)은 빼앗긴 삼천리강토를 되찾기 위해 할빈역에서 일본침략괴수 이등박문을 쏴눕혔다. 너도 총을 메고 우리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 없이 잘 싸워라!” 홍성필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용감히 싸워 수차 공을 세웠다. 그는 참군하여 부대를 따라 동북해방전역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48년 동북해방 당시 제4야전군 118사 353퇀 정치처 견습참모로 되여 남진하여 평진해방전투, 해남도해방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홍성필은 다시 부대를 따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떠나기 3일전 홍성희는 어머니와 함께 개원에서 오빠를 만나러 단동에 있는 부대를 찾아갔다. “우리 부대는 곧 조선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인민군과 협동작전을 잘 벌리면 전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중조인민군대의 승리로 끝날것이다. 그때 오빠가 돌아오면 어머님을 모시고 우리 한번 잘 살아보자꾸나!” 그런데 이번 상봉이 오빠와의 마지막상봉일줄을 홍성희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매불망 오빠가 돌아오기만 고대했던 홍성희모녀에게 불행한 소식이 날아든것은 1951년 봄철이였다. 신나게 국어랑독을 하던 홍성희는 “쟈는 제 오빠가 죽은줄도 모르네.” 옆에서 동학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얼결에 듣게 되였다. 촌정부에서 이 비보를 차마 모녀에게 전달할수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던것이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 모녀는 붙어잡고 련며칠 통곡하였다. 어머니가 아예 병석에 드러눕게 되자 16살난 성희는 생산대에 나가 농사일을 하였다. 전교 문오위원으로 노래 잘 부르고 활약했던 그 역시 강한 충격을 받아 과묵해졌다.
가난한 집 아이가 빨리 셈이 든다고 성희는 낮에는 생산대로동과 전선원호, 가마니짜기를 하는 한편 밤에는 피곤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1951년 개원조중 초중반을 졸업한 그는 개원조선족소학교 교원으로 되였고 모범교원의 영예를 지녔다.
오빠 홍성필은 조선전쟁에 나가서 1951년 1차전역때 21세의 어린 나이에 전사하였는데 결국 싸워보지 못하고 죽었다며 홍성희할머니는 가끔 눈물을 훔쳤다.
남편과 짝사랑에서 결혼까지
성희는 남편 윤유갑씨에 대한 짝사랑에서 종국에는 결혼에까지 이른다. 소학시절부터 성희의 사모를 받은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다름아닌 상급반학생 윤유갑이다. 신체가 건강하고 생김새가 시원하게 생긴 윤유갑은 학교 마라톤에서도 1등을 하여 녀학생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1948년 11월 2일 심양이 해방되자 윤유갑은 개원현공안국경찰대에 참가하였고 그후 해방군에 편입되여 장사군관학교에서 군사, 정치, 시사 등 학과정을 마쳤다.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사령부 소속부대에 배치되여 조선에 나간 그는 지원군총부 소재 평안남도 인평회창군에서 지원군공정지휘소 초대소 소장직을 맡고 각종 복잡한 임무를 완수하였다. 주요하게 동북에서 오는 참전부대를 인솔하여 지정된 목적까지 안전하게 보내주고 조선 각 지방과의 긴밀한 련계로 지원군부대의 활동을 적극 협조하며 수시로 적정을 알아내여 지원군총부에 보고하고 또한 최전선 부상병들을 후방근거지 혹은 동북으로 후송하는 등 임무들이였다.
윤유갑은 1차전역때부터 운산, 상소리, 덕천, 개천, 령원, 회령 등 묘향산맥 서쪽지구에서 적정을 살폈는데 임무를 훌륭히 완성하여 수차 공을 세웠다. 2차전역에서 제38군은 팽덕회사령관의 제의로 “38군만세”란 영웅부대로 명명되여 전군에 명성을 날렸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후 윤유갑은 초대소에서 사업하면서 주요하게 전선복구건설을 지원하였다. 1956년 5월 휴가를 맡고 고향인 개원에 왔을 때 오래동안 부대생활로 장가를 못간 로총각은 중매로 홍성희와 맞선을 보게 된다. 성희도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슴 한곳에는 윤유갑을 사모하고있었는지라 더없이 기뻤다. 그리하여 6월 5일 청춘남녀는 약혼사진을 찍었고 이튿날에는 윤유갑을 따라 렬차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단교와 복구건설이 한창인 조선의 산천을 목격하는 성희는 오빠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지원군총사령부는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인 곳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여기서 성희는 윤유갑과 돌격식결혼식을 올렸다. 38군 소속 공정지휘소 지휘관이 주례를 선 간단하지만 뜻깊은 결혼식이였다.
결혼뒤에도 하나는 조선에서, 하나는 중국에서 서로 떨어져 살다가 1958년 남편이 귀국해서 심양중형광산기계연구소(현재의 화평구조선족소학교 자리)에 배치받은 뒤 밀월을 보낼수 있었다. 1963년 단위가 사천으로 옮겨질 때 자식교육때문에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여 남편은 심양소재 경공업부 심양판사처에 남게 되였다. 단위에선 일능수, 모범이여서 영예게시판에는 언제나 그의 남편의 사진이 버젓이 붙어있었다. 단위책임자도 “우린 대학생보다 로우윈(老尹)만 있으면 되오.”라고 그의 사업실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남편과 성희의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어 남부러움없이 살았는데 1999년에 남편이 불시에 암으로 돌아갔다. “우리 남편같은 사람 정말 보기 드물어요.” 언제나 튼튼한 뒤심이 되여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주었던 남편, 그와의 로맨틱하였던 과거를 돌이키면서 홍성희할머니는 지금도 이렇게 남편자랑을 늘여놓는다.
오빠는 조선의 무명묘소에 묻혀있다
홍할머니와 그의 오빠 홍성필 두 남매의 사이는 유별났다. 아버지없이 어머니의 사랑과 엄한 교육속에서 자라나면서 빨리 철이 들었고 성희는 오빠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 오빠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차마 믿을수 없었고 그토록 슬퍼했으며 조선에 나가는 날이 있으면 꼭 오빠의 묘를 찾겠다고 몇번이나 다졌는지 모른다.
1956년 7월 24일 방학기간 조선에 가서 윤유갑과 결혼식을 올린 성희는 이튿날 남편과 함께 지원군총사령부에서 1킬로메터 떨어져있는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을 찾았다. 부지가 9만평방메터인 렬사릉원은 1954년에 지어졌는데 130여명의 렬사들의 유골이 정중히 모셔져있었다. 정문에는 중조 두나라의 글로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이라고 새겨져있었고 정문중앙에는 “항미원조보가위국의 렬사들은 영생불멸하라”는 글귀를 새긴 돌기둥이 세워져있었다. 그 뒤면에는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 라성교 등 전투영웅들의 화상이 있었다.
지원군의 조선전쟁을 반영한 청동조각상과 중조우의의 군상이 새겨진 비석 뒤켠으로는 희생된 지원군장령들의 유골이 모셔져있는 묘지였다. 성희는 렬사릉원으로 발길을 향하면서 오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서러움이 북받쳐올랐다. 그러나 묘지의 맨 앞줄 중앙에 세워진 비문을 보고 화뜰 놀랐다. “모안영지묘”라고 쓴 묘비가 눈에 안겨왔던것이다. 설마 모주석의 아들이?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남편에게 물으니 일찍 모안영과 한 부대(제38군)에서 싸워온 남편으로서는 감회가 더욱 깊었다. 성희 또한 학교에서 배운 모안영의 사적이 떠올라 감개무량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어정쩡하게 서있는 성희를 끌어당겨 모안영의 묘앞에 정중히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세번 절을 올렸다.
앞줄에서부터 하나하나 세면서 오빠의 묘를 찾기 시작하였다. 어떤 묘비에는 이름과 소속부대가 적혀있는가하면 또 어떤 묘비에는 이름만 있었으며 지어 어떤 묘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의 묘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가로 훑고 세로 훑어봤지만 찾지 못하였다. 혹시나 해서 이튿날에도 계속 찾아봤지만 찾을길이 없었다.
안타깝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편이 처남의 유골은 아마 무명의 묘지에 묻혀있을터니 더 찾지 말고 고향에 있는 렬사릉원에 가서 참배하자고 하였다. 모안영의 묘를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성희도 남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모주석도 보가위국을 위하여 조선전장터에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또한 우리 가족처럼 무수한 가정들에서 혈육을 잃었다. 오빠는 조선민족의 아들로 고국에서 싸우다 희생되여 고국땅에 묻혀있는데 어디에 묻혀있은들 어떠하랴? 오빠, 고국땅에서 부디 고이 잠드시라. 오빠의 유골을 꼭 찾고야말겠다는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아들을 그리워하고있는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그후부터 항미원조기념일때면 부부는 심양항미원조렬사관을 찾아가 참배하였다.
취재를 마치면서 만년생활이 고달프지 않냐고 묻자 “자식들이 다 커서 제노릇을 잘하는것이 지금세월엔 효자다”라며 온돌방이 습관되여 15년째 이곳에서 산다고, 이 “보금자리”가 없어지기전까지는 이곳에서 계속 살고싶다고 하였다.
행복은 자기 스스로 창조하고 또 그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산다는 홍할머니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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