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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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운남 고대력사문화의 상징 숭성사삼탑(5) 댓글:  조회:2827  추천:0  2014-08-30
2013-05-17 운남 곤명에 다녀오다 운남 대리에서 또 하나의 경관은 숭성사삼탑(崇聖寺三塔)이다. 신비의 땅 대리성을 찾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경유해야 할 곳이 바로 숭성사삼탑이다. 숭성사삼탑은 대리고성의 북쪽에서 1.5킬로메터 상거해있었는데 창산자락에 의지하고 이해와 잇닿아있는 삼탑은 하나의 큰 탑과 두개의 작은 탑으로 구성, 모두 불탑이다. 하늘을 향해 거연하게 솟아있는 삼탑의 웅위로운 모습은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자연풍경화와 같다. 숭성사삼탑은 대리시 “문헌명방(文獻名邦)”의 상징이요, 운남 고대력사문화의 상징이며 또한 중국 남방의 가장 오래면서도 가장 웅위로운 건축의 하나이다. 1961년 3월 국무원이 공표한 첫패의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되였고 5A급 명승지로 되여 국내외 관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있다. 숭성사삼탑의 력사는 오랜 세월로 거슬로 올라간다. 소개에 따르면 숭성사삼탑은 남소왕 권풍우시기(기원 824ㅡ859년)에 만들어졌다. 큰탑을 “천심탑(千尋塔)”이라 불렀는데 방형 밀첨식의 벽돌탑으로 높이가 69.13메터, 도합 16층으로 구성되였다. 그뒤 남북에 두개의 탑을 각각 쌓았는데 높이가 모두 42.19메터, 도합 10층으로 한쌍의 팔각형의 벽돌탑을 이루고있다. 이 삼탑을 구축하게 된데는 당시 대리에 늪지가 많아 수환(水患)이 엄중해 이를 진재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세개 탑을 쌓을 때 흙 한층을 깔고 탑 한층을 쌓은 뒤 흙을 파내는 방식으로 한층한층 탑을 쌓아갔는데 당시 탑을 쌓기 위해 놓은 다리의 길이가 10여리에 달하였다. 고서에는 동원된 석장이 770만명, 400만근의 금을 소비했고 8년에 완성됐다고 기록돼있다. 숭성사삼탑이 지어져 천여년을 내려오면서 온갖 시련을 다 겪었는데 력사적으로 30여차의 지진세례를 겪었다. 명정덕 9년(기원 1514년) 대지진으로 하여 “천심탑”이 두자 가량 갈라져 마치 쪼개진 대나무 같았는데 신기하게 열흘이 지나 저절로 봉합되였다 한다. 1925년 대리대지진때 민가의 99%가 무너졌지만 “천심탑”은 꼭대기의 정보찰(定寶刹)만 흔들려 떨어졌을뿐이였다. 사람들은 돌기반이 없는 이 삼탑이 그렇게 강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서있는것을 보고 신기함을 금치 못하고있다. 다만 “천심탑” 량켠에 삼족정립으로 일떠선 남북의 두 탑이 지진으로 하여 안으로 약간 기울어졌는데 이렇게 400년을 내려왔다하니 넘어질 우려는 없는것 같다. “거꾸로 선 삼탑공원(三塔倒影公園)이 있는데 호수가에 비친 삼탑의 모습 또한 가관이여서 관객들은 이 “사탑(斜塔)”의 풍경을 렌즈안에 담지 않으면 더 없는 유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숭성사 역시 매우 가관이다. 삼탑에서 전기밧데리차를 타고 15분 가량 올라가면 숭성사가 문득 눈앞에 나타나는데 숭성사의 장관 또한 이를데 없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탑이 완공되자 또 규모가 방대한 숭성사공사를 시작하였다. 여러 조대의 확충을 거치면서 송나라 “대리국”시기에 이르러서 숭성사는 극성시기에 도달한다. 당시 대리국에는 불사가 곳곳에 분포돼있었는데 작은 불사가 3천개, 큰 불사가 8백개에 달하였다. 남소국을 이은 대리국시기 불교는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대리국을 “불국(佛國)”, “묘향국(妙香國)”이라고 불렀으며 당연히 숭성사는 국가불교행사의 중심지로 되였다. 이 숭성사는 대리시에 가지 않은 사람도 김용의 무협소설 “천룡팔부”를 읽은 사람이라면 결코 생소하지 않다. 이 무협소설에 나오는 천룡사가 바로 숭성사이다. 사내 8메터 높이의 관음상이 있었다는걸 보면 숭성사의 장관함을 엿볼수 있다. 1년에 한번 3월이면 대리고성은 관음거리로 변해버렸는데 그 향내가 성내를 진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현재 볼수 있는 숭성사는 재축한 숭성사이지 원래의 숭성사는 아니다. 숭성사의 사원은 청나라 함풍년간 소각되고말았다. 국가에서는 2005년 4월 대규모의 복원공사를 개시하여 숭성사삼탑에 약 100년간 “탑만 있고 사원이 없는”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삼탑 보호를 핵심으로 력사를 존중하고 또 력사를 초월하여 국내외 유명한 사당들의 분포특점을 감안해 당, 송, 원, 명, 청 등 력대 건축특색의 정수를 잘 살려낸것이 현재의 숭성사이다. 대리시의 웅위로운 삼탑과 장관을 자랑하는 숭성사를 바라보면서 고풍연한 아름다운 건축의 자연미와 함께 지혜를 깨닫게 하고 인생의 철리를 터득게 하는 불교문화의 진맛을 느껴본다.               오 지훈기자  
39    해발 3천여메터에서 펼치는 예술의 향연(4) 댓글:  조회:2884  추천:0  2014-08-30
 2013-04-19 운남 곤명에 다녀오다 여기는 해발 3,100메터 세계 유일 최고 높이의 로천예술극장. 북반구 최남단의 대설산, 국가중점풍경명승지 옥룡설산(玉龍雪山)을 무대배경(도로 하나를 사이두고있음)으로 펼쳐지는 대형 원생태가무공연이여서 장관인데다 선진적인 조수(造水)와 연무(烟r? 효과가 자연경치와 하나로 어울리면서 더욱 가관이다.         장백산천지의 모양과 흡사한 옥룡설산. 나시족 특색의 음악이 높게 두른 빨간 담장내(옥룡설산의 남쪽 돌벼랑을 쪼아서 만든 극장)에 울리면서 말을 탄 사내들이 납함하며 무대우로 등장한다. 험준한 차마고도를 한순간에 오르지 못해하는 안타까운 표정들… 이내 차마고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사내들은 술을 마셔댄다. “일이 있거나 없거나 술, 돈이 없어도 술, 친구가 와도 술, 술좌석을 마련하고 질퍽하게 마시며 놀아대세”. 노래와 춤이 극치에 이르면서 술과 인연이 아주 두터운 나시족들의 생활세태가 물씬 풍겨온다. 이어 무대화면이 바뀌여 어깨에 광주리를 짊어진 녀성들이 무대의 지(之)자형 비탈길을 한발자욱 한발자욱 힘겹게 오른다. 남정들이 생사를 모르는 차마고도로 떠나면 집 안팎의 힘든 일, 무거운 일은 모두 집에 남은 아낙네들의 몫이다. 려강지역 소수민족들의 고달픈 생활 원모습이 그대로 재연되는가운데 한쌍의 청춘남녀가 사랑을 위해 순정(殉情)하는 장면이 펼쳐져 관중들의 눈시울이 촉촉히 젖어난다. “누나 제발 가지 말아요!” 순정을 위해 떠나는 청춘남녀를 향해 웨치며 좇아가는 총각애, 친구들도 “옥룡제3국”(비단, 미주, 산해진미, 금은보화… 이 천연락원에 가면 그들의 령혼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수 있다고 함)에 가서 전생에서 나누지 못한 애틋한 사랑과 행복을 누리라며 눈물을 휘뿌린다.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펼치는 “인상 려강” 대형쇼 옥룡설산 주변 500여명의 나시족, 이족, 바이족, 묘족, 장족, 한족 등 민족들이 한데 어울려서 한시간동안 펼치는 이 “인상려강(印象麗江)” 대형 원생태가무쇼는 “고도마방”, “설산을 마주하고 술을 마신다” 등 6개 부분으로 구성, 민족색채가 짙은 노래와 가무, 복식으로 이 지역 소수민족의 오랜 력사문화와 풍속세태를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재연하고있다. “인상 려강”은 유명한 감독 장예모의 또 하나의 력작이다. 2006년 이 쇼가 화려하게 막을 올리면서부터 현재까지 매일 국내외 관객들을 맞이하고있다고 한다. 설이 방금 지난 고원지대의 쌀쌀한 날씨에 로천극장에 한시간동안 움추려있을라니 온몸이 떨린다. 다행히 9시가 넘자 해살이 얼굴을 내밀었지만 이내 구름에 가리웠다 나타났다 반복하여 춥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난생처음 고산지대의 로천극장에서 소수민족의 풍속세태를 체험한다는 내심의 기쁨속에서 추위를 잊은듯 예술의 향연속에 빠져들어갔다. 이제서야 가이드가 스케줄을 다그치는 영문을 알수 있었다. 엊그제 려강고성에 도착하여 짐을 내려놓기 바쁘게 고성안을 돌다나니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는데 아침 6시 반에 조찬을 먹고 7시에 출발해야 한다는것이다. 약 한시간 달리니 옥룡설산으로 향하는 관광뻐스들이 줄지어 올라가고있음이 눈에 띄였다. 다행히 길을 재촉하였으니 말이지 늦게 출발하였다면 9시 정각에 펼쳐지는 이 “인상려강”과 인연이 닿지 않았을수도 있다. 옥룡나시족자치현 경내에 위치해있는 이 옥룡설산은 남북길이가 35킬로메터, 동서너비가 13킬로메터로 면적이 960평방킬로메터에 이르며 고산설경이 해발 4천메터에 펼쳐있는데 마치 설산의 허리가 운무에 둘러쌓여있는것이 멀리서 바라보면 한마리의 은백색의 거룡이 휘감은듯 하여 옥룡설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옥룡설산은 나시족을 비롯한 이 지역 소수민족의 성산인데 옥룡설산의 화신이자 나시족의 보호신 “싼둬”를 위해 해마다 성대한 “싼둬절”을 거행한다. 옥룡설산은 또한 동식물왕국으로 갖가지 생태류형이 구전한데 이 횡단산맥은 고산동식물이 가장 집중된 지역으로 “천연고산동식물원”과 “현대빙천박물관”으로 불리운다. 옥룡설산 동쪽의 넓은 평지-깐하이즈(甘海子), 산비탈로 흐르는 옥룡설산의 눈석이물이 달빛이 푸른 하늘에 비껴 거꾸로 쏟아져내렸다는 란웨구, 그리고 “옥룡제3국”의 입구 윈싼핑(云杉坪) 등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경을 보는 순간만은 그대로 려로의 피로는 물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장사진속에서 긴 시간 대기하고 밧데리차(電甁車)를 련속 갈아타며 강행군하던 고달픔이 잊혀진다. 려강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또 해발 2,800메터 높이에 위치한 려강고성이다. 800여년 유구한 력사를 지니고있는 려강고성은 지난 2011년 7월 국가5A급관광풍경구로 되였다. 이에 앞서 1986년 국가급 력사문화명성으로 명명되였고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였다. 자고로 장터와 중진(重鎭)으로 유명한 려강고성은 면적이 3.8평방킬로메터이며 현유 주민이 2,600세대에 2만 5천명이 살고있다. 그중 나시족이 다수이며 30%의 주민이 동은기제작, 피모피혁, 방직, 량조업을 위주로 한 전통수공업과 상업활동에 종사하고있다. 동파문자로 쓴 간판 어둠이 깃들고 불빛이 환한 려강고성을 거니노라면 길 량켠으로 죽 늘어선 나시족건축의 상가들, 눈부실 지경으로 진렬된 특산물과 별미음식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인파들… 려강고성의 야경은 그야말로 매혹적이다. 거기에 고풍연한 모습을 살린 려인숙, 그리고 여기저기서 울려나오는 나시족의 음악, 더욱 관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곳은 술집, 커피숍 등 캐쥬얼오락장소이다. 려강고성의 밤문화에 푹 젖어 려인숙에서 며칠 더 머물고싶다는것이 많은 관광객들의 소원이라고 한다. 려강시는 운남성 소수민족주거의 대표지역이다. 운남성에 살고있는 소수민족이 26개인데 그중 려강시에만 22개에 달한다하니 가히 소수민족의 고장이라 할수 있다. 그중에서도 자체의 독특한 생활풍속세태와 왕성한 생명력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세계에 자랑하고있는 나시족이 대단하다는 인상을 느꼈다. 전국에 도합 32만 5천명의 인구를 가진 나시족은 운남과 사천, 서장에 살고있는데 려강시에만 22만명이다. 나시족은 자기의 집거지인 려강고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는가 하면 나시족동파고적(표음과 표의성분을 겸한 상형문자로 그 문자형태가 갑골문보다 더 원시적이여서 세계 유일의 살아있는 상형문자라고 불리우기도 함)도 세계기억유산명록에 등재하였으며 기타 소수민족과 공유하는 “삼강병류”(三江倂流, 란창강과 노강, 금사강을 가리킴)를 세계자연유산에 등재시켰다. 그래서인지 나시족은 “소민족 대문화”로 자칭한다고 나시족가이드가 자랑스레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나시족은 30여만, 자체 민족의 학교가 없지만 민족언어를 구사할줄 아는 인구가 10여만명이라고 한다(그러나 최근년 관광업 흥기로 점차 줄어들고있다). 장엄한 산과 그림같은 풍경, 유서깊은 문화, 살아숨쉬는 전통으로 하여 려강시는 실로 매력적이다. 언젠가 운남을 찾는 기회가 다시 생기면 소수민족의 고장€?려강에서 소수민족의 이색적인 생활에 한번 푹 젖어보고싶다.                        오지훈기자  
38    차마고도에서 마방의 흔적을 더듬어(3) 댓글:  조회:2104  추천:0  2014-08-30
 2013-03-22  운남 곤명을 다녀오다 새벽에 아침을 대충 요기하고 대리시에서 관광뻐스에 올라 려강(麗江)시로 출발하였다. 대리시의 명산 창산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동녘해를 뒤로 하고 한시간쯤 더 달려 굽인도로에 들어서자 지금 달리는 이 길이 중외에 유명한 차마고도(茶馬古道)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그 순간 저도모르게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수년전 한국 KBS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때문이다. 중국 서남부에서 가파른 협곡에 난 길을 따라 차(茶)를 운반하는 마방(이 길을 따라 물건을 교역하던 상인조직을 호칭하는 말)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담은 기록편이다.         마방들이 쓰던 마구들 차마고도는 실크로드보다 2천년 앞서 만들어진 인류의 가장 오랜 교역로로 중국 서남부의 운남성, 사천성에서 서장을 넘어 인도까지 이어지는 륙상무역로이다. 운남성, 사천성의 차와 서장의 말을 교환하였다고 하여 차마고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나라 이전의 기원전시기에 중국 서남부 운남성과 사천성에서 생산되는 차와 서장의 말을 교환하기 위해 형성되였고 당송시대를 거쳐 번성하였으며 네팔, 인도, 유럽까지 련결됐다. 1천년전 서장 불교가 서장의 주도인 라싸를 통해 운남과 사천 지역으로 전래되기도 했다. 차마고도는 길이가 약 5천킬로메터에 이르며 평균 해발고도가 4천메터 이상 높고 험준한 길이지만 눈에 덮인 5천메터 이상의 설산들과 금사강, 란창강, 노강이 수천킬로메터의 아찔한 협곡을 이루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이 세 강이 이루는 삼강병류협곡은 200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속하고성의 미식거리 도중 우리는 창녕현에 위치한 운남룡윤다업그룹유한회사에 들렸다. 회사의 홀 한가운데는 당년 마방들이 쓰던 말안장이며 여러가지 차제작도구들이 진렬되여있었다. 중국 유명 브랜드 “일품(壹品)”차제품을 생산하는 이 회사는 전문 보이차를 가공, 생산,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이 보이차체험관은 곤명체험관과 함께 세계의 첫 전문 보이차체험관이란다. 보이차는 전국 최대 차생산지인 보이시[普耳市, 원래의 사모(思茅)시가 보이시로 개명, 차마고도의 주요 역참이였다]에서 생산되는데 보이차가 마방들에 의해 험난한 길을 따라 서장으로 운반되였다 한다. 체험관에서 팡진메이(磅金妹, 나시족처녀들의 호칭)가 따라주는 보이차를 시음하며 차잎이 차병으로 만들어졌다 다시 둥글거나 옛날 옆전 등 여러가지 형태의 차로 제작되고 저장되는 전반 과정을 료해하였다. 마방들의 흔적은 또 려강 속하고성(束河古城)에서 볼수 있었다. 속하고성은 려강평원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역참으로서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였다. 웅장한 돌대문을 지나 상가들이 촘촘히 늘어선 마을길을 걷노라니 돌다리와 석판로(石板路), 상마석, 마과두의 정원이 눈에 띄였고 룡천사에는 명대벽화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도로 한켠의 도랑으로 물이 흐르고있어 속하고성은 한결 아늑하고 청신한 느낌이다. 마을 한복판에 이르니 이곳이 마방들이 려장을 풀고 쉬면서 물건을 교역하는 사방가(四方街)라고 한다. 가로세로 30메터가 될가말가한 사방가는 사명팔방으로 다섯갈래의 길이 뻗어있었고 물도랑이 주변을 둘러싸고있었다. 그 뒤의 건축에는 “팔방청음(八方聽音)”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빨리 와봐요. 여기가 마방들의 장터래요.” 뒤를 돌아보니 배낭을 짊어지고 문득 나타난 한국류학생들의 즐거운 비명이다. 한국인들이나 서양인들은 말타고 꽃구경하듯 가이드를 졸졸 따라 빠듯한 스케줄에 쫓기는 중국인들과 달리 직접 배낭을 메고 관광지를 답사하고 려인숙에 투숙하면서 당년 마방들의 생활을 체험하고 그 숨결을 느끼는데 려행의 즐거움이 더 크다고 한다. 사방가는 려강에서 가장 오랜 장터였는데  밤에는 야시장이 펼쳐져 팔고 사고 먹고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아 사방가의 야경은 “속하8경”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속하고성을 유유히 거니는 유람객들도 많았지만 말을 타고 도로 한가운데를 힘있게 달리는 어른, 애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재미있는듯 즐거운 표정이다. 말을 타고 속하고성을 한바퀴 도는데 50원에서 100원, 부르는게 값이였다. 운남에서 생산되는 보이차를 서장으로 운반하기 위해, 또 세계 어느 민족보다 차를 즐겨마시는 서장인들이 있었기에 차마고도가 생겨났다. 과거에는 이 지역 사람들의 생계의 길, 죽음의 길이였지만 오늘은 황금알을 낳는 세계 유명 관광지로 되여 수많은 려행자들의 로망으로 떠오르고있다. 천길 낭떠러지와 고산협곡에 그제날의 가파롭고 비탈진 차마고도는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이번 려행에서 차마고도와 마방들의 흔적과 숨결을 느낄수 있어 몸은 비록 고달팠지만 려행은 즐거웠다.            오지훈기자  
37    신비의 땅 대리에서 삼도차를 마시며(2) 댓글:  조회:1952  추천:0  2014-08-30
2013-03-08  운남 곤명에 다녀오다 운남에 다녀왔다면 바이족의 고향 대리(大理)시를 빼놓을수 없다. 거리가 곤명에서 약 320여킬로메터로 심양에서 단동까지의 거리였지만 렬차로 7시간 이상 달린다고 한다. “렬차가 자동차보다 더 뜨다.” 이른바 항간에서 말하는 “운남 18괴(十八怪)”중 하나다. 전날 밤 9시에 렬차에 올라 이튿날 새벽 4시 반에 대리에 도착하자 대리역밖으로 숱한 인파가 쏟아져나온다. 전국 각지에서 대리를 찾는 유람객행렬이다. 7시 반이 넘었지만 날이 완전히 밝지 않아 주변은 어두움이 채 가시지 않았다. 대리고성을 찾은 유람객들은 쌀쌀한 찬바람속에서 고풍연한 성문을 배경으로 연신 샤타를 눌러댄다. 다행히 집에서 준비해간 깃털외투를 걸쳤으니말이지 방한복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유람은커녕 추위에 떨고말았을것이다. 대리시는 “봄의 도시”로 불리우는 곤명보다 기온이 10도는 더 낮은것 같다. 더우기 해발 2천메터의 고산지대라니 더 말할것 없었다.        흥겨운 가무공연을 펼치고있는 바이족들 고색이 창연한 성문을 보니 여기가 한때 운남의 중심지라는 말에 실감이 간다. 대리시는 운귀고원에 위치한 도시로 4천여년전 바이족의 조상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다. 기원 937년 당나라의 도움으로 남소국이 건립돼 500년간 존속, 그뒤 대리국이 건립돼 역시 300여년 존속되다 후에 원나라에 의해 멸망되였다 한다. 현재 다민족이 거주하고있는 대리시는 바이족이 65%이상으로 중국 유일 바이족자치주이며 인구는 61만명이다. 먼동이 트지 않았지만 간혹 어깨에 물건을 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보이였고 조금 지나니 상가들에서 하나하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대리고성의 중심도로 량옆 모두 3, 4층 상가건물들이였는데 하얀색의 건물들은 하얀것을 숭배하는 바이족의 풍정세태를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 관광코스를 따라 걸어가니 문득 “양인(洋人)의 거리”라고 쓴 간판이 눈에 띈다. 2차세계대전때 서양인들이 여기서 거주하면서 장사를 하여 이 거리가 섰다고 한다. 여기저기 세워진 유람코스안내판에는 중문뒤에 영문, 그리고 한글, 일어가 씌여있었는데 그만치 많은 한국유람객들이 다녀가고있음을 말해주었다.       대리고성의 성문 대리에서 가장 인상깊은것은 창산(蒼山)을 마주하고 이해(耳海)유람선우에서 바이족들의 “삼도차”(三道多)를 마시며 흥겨운 가무를 구경하는것이다. 대리시경내에 있는 창산과 이해는 국가급자연보호구다. 창산은 대리시의 록색생태병풍으로 19개 남북주향의 봉우리로 구성, 해발 3,728메터이다. 이해는 국내 유명한 7대 염수호의 하나로 “고원명주”로 불리우는데 남북길이가 40.5킬로메터, 동서너비는 3~9킬로메터 된다. 사람들이 대리에 오고싶어하는 리유중 하나가 대리고성을 제외한외 창산과 이해라 한다. 유람객이 많이 모여드는 관광성수기에 이해풍경구에서는 다섯척의 대형 유람선을 띄운다. 설기간이지만 이날 세척의 유람선을 띄웠는데 한배에 보통 1천여명이 탈수 있다. 한시간남짓 이해를 신나게 달리는 유람선에서 창산을 마주하고 사진을 찍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그보다 “금화”(바이족은 처녀를 금화라고 부름)가 부어주는 삼도차를 마시며 공연을 보는것도 즐겁다. 유람선 2층에 마련된 좌석에 앉으면 바이족청춘남녀들의 흥겨운 노래와 춤이 시작되고 금화가 돌아가며 차를 붓는다. 그들이 세번 부어준 차를 다 마시고나면 노래와 춤도 끝난다. 삼도차의 첫잔은 쓰고 두번째 차는 달며 세번째 차는 수정과 같은 맛이다. 이른바 “일고이첨삼회미”(一苦二甛三回味) “삼도차”는 바이족의 차문화로 원래는 남소국시기 여러 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례우였는데 현재는 손님을 접대할 때의 습관으로 변화되였다.  금화의 고향에 오니 영화 “다섯송이 금화”가 생각난다. 바이족이 다수인 대리에는 이삼일 건너 명절이라며 명절때면 젊은 청춘남녀들이 공원도로 량켠에 죽 늘어서서 서로 노래를 통해 사랑과 삶의 내용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기약한다. 이 공원이 바로 대리에서 유명한 호접천(蝴蝶泉)공원이다. 창산의 한 봉우리아래 위치한 호접천은 풍광이 수려하고 샘물이 맑아 천하에 보기드문 기관€?나비들이 향연을 펼친다. 3, 4월이 되면 수천마리의 이름모를 나비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회의를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호접천이다. 특히 이곳에서 바이족의 삶을 보여준 영화 “다섯송이 금화”가 촬영되면서 호접천은 중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대리시의 “하관풍, 상관화, 창산설, 이해월”을 일러 “대리4경”이라 했고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이 이 “풍화설월”로 유명시구를 세상에 남겼다. 또한 바이족의 문화자원과 다민족문화가 융합발전한 대리지역은 중원문화와 이역문화, 그리고 토배기문화가 충돌되고 교류되면서 찬란한 남소대리문화와 특색있는 바이족문화를 만들어냈다. 누군가 대리시는 력사가 유구하고 소수민족의 찬란한 문화가 숨쉬는 곳이여서 “삼도차”처럼 시간을 갖고 음미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 말타고 꽃구경했으니 조금은 아쉽다.                      오지훈기자  
36    “천하 제1기관” 석림과 아스마의 전설 (1) 댓글:  조회:1993  추천:2  2014-08-30
 2013-02-22  운남 곤명에 다녀오다   운남성 곤명시 석림이족자치현에 위치한 석림풍경구는 하늘높이 치솟은 수천개의 기암괴석들이 거인마냥 우뚝 서서 이뤄진 돌의 수풀림이다. 곤명에서 80킬로메터 떨어진 석림풍경구는 차로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수 있다.   석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하는 인파들   석림풍경구 입구 정면에 “국내외 손님들이 세계자연유산 €?운남석림에 찾아오신것을 진심으로 반깁니다”라는 프랑카드가 걸려있어 설을 맞는 기간에도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있음을 실감할수 있었다. 풍경구내에서 화려한 복장차림의 이족들을 만나 소수민족의 풍정을 느낄수 있었다.   중국 최대 전통명절 춘절이였지만 풍경구는 말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뤄 석림풍광을 제대로 볼수 있을가 은근히 로파심이 앞서기도 했다.   석림풍경구는 갖가지 기암괴석과 특이한 봉우리, 거대한 돌기둥이 우뚝 솟은 카르스트지형으로 국가급풍경명승구다. 3.6억년전만해도 석림일대는 망망한 바다였다. 그러나 2.7억년전에 바다속의 석회암이 바다물에 부단히 충격되여 무수한 용구(溶構")와 용주(溶柱)를 남겨놓았는데 후에 이곳의 지각이 부단히 상승되고 오랜시간 침적이 생겨 점차 륙지로 변하였다. 바다물이 물러간다음 억만년의 뙈약볕과 비물에 부식되고 풍화되고 또 지진을 거치면서 동화세계와 같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오늘의 기경이 만들어졌다. 석림풍경구는 1982년 국무원에 의해 국가급풍경명승구, 200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지질공원, 2007년 5월 국가 66개 5A급관광경구의 하나로 지정되였고 2007년 귀주성의 려파(藜波), 중경의 무륭(武隆)과 함께 중국 남방카르스트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였다. 또한 석림부근에는 자운동(紫云洞), 천생교(天生橋), 장호(長湖), 월호(月湖), 대첩수(大疊水)폭포 등 유명한 관광지가 많이 있다.    석림풍경구 정상에 올라 굽어본 석림의 기암괴석들   석림풍경구의 주요 유람지역인 리자영석림은 면적이 12평방킬로메터로 석림호, 대석림, 소석림과 리자원 몇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다. 길이 5,000여메터 되는 유람코스를 따라 리자영석림에 들어서니 누군가 읊었다는 해학시(打油詩)가 문뜩 떠오른다. “먼곳에서 봐도 큰돌, 가까이 봐도 큰돌. 돌이 과연 크구나 정말로 큰돌들이구나.” 보통 높이가  5∼10m, 큰것은 30∼40m여서 이런 해학시가 나올법도 했다. 그러나 이곳의 돌들은 일반 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절묘한 시폭인양 매일 국내외 유람객들의 발길을 끌고있다. 공작새가 깃을 다듬거나 봉황이 날개를 펴거나 서우가 달을 바라보는 모양의 돌들, 당승, 오공, 팔계, 사승을 닮은 돌들, 또 관음, 장군, 사병과 같은 돌, 그리고 아스마와 비슷한 돌들이 무수히 나타난다. 이밖에 죽순, 버섯, 옥관화 등 식물과 같은 돌들이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았다. 한곳의 “종석”이라는 돌은 손으로 두드리자 여러가지 울림소리가 나 더욱 유람객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리자영석림은 말그대로 커다란 자연석경의 예술보물고여서 갖가지 동물과 식물들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우리 앞에 펼쳐진다.   빨간 글씨로 큼직하게 새겨진 “석림” 두 글자가 있는 석주를 배경으로 유람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들어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없다. “석림”글자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지 못하면 아마 석림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것과 같다는 가이드의 해설로 하여 유람객들의 자리다툼은 더 세다. 이 “석림” 두 글자는 석림의 상징으로 석림담배뿐만 아니라 석림을 대표하는 여러 곳에서 모두 이 글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원래 이 글자는 1931년 주종악이라는 사람이 행서체로 써서 석주에 조각하였는데 문혁시기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였다. 개혁개방후 관광사업을 발전시킨다고 하여 이미 파괴된 글씨체를 회복할수 없어 그 우에 다른데서 찾아낸 예서체의 “석림”(현재의 “석림”)을 새겨넣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원래 자리에 글씨는 보이지 않고 왜 하얀 흔적만 남겨놓았는지 하는 궁금증을 해소할수 있었다. 중국의 특정세월이 남겨놓은 생생한 력사현장이다.    뜨거운 열정으로 펼치는 이족의 노래와 춤   아름다운 자연석경과 함께 아스마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석림은 이족, 바이족 등 여러 소수민족들의 집거지로 “가무의 고향”, “씨름의 고향”, “현대민간회화의 고향”으로 불리운다. 어렸을 때 영화 “아스마”를 본 기억이 있어서인지 아스마전설의 고향 석림에 몸을 담그니 더욱 친근감이 다가온다. 이 지역에서는 처녀들을 모두 아스마(이족어로 아름다운 처녀라는 뜻)라 부르고 총각들은 용감하고 근면한 뜻으로 아허이(阿黑)라고 부른다. “아스마”는 아스마의 전설을 토대로 하여 이족청춘남녀간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아스마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어느 한 가난한 집에서 어여쁜 딸을 보았는데 이름을 아스마라고 했다.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아스마를 많은 총각들이 사모했는데 아스마는 고아로 태여난 아허이를 사랑하면서 그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래서 그들은 약혼까지 했는데 부자집 아들이 아름다운 아스마를 마음에 들어해서 돈과 재물로 유혹했지만 아스마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부자는 아허이가 먼 곳으로 양몰이를 나간 사이에 아스마를 강제로 잡아다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고 했지만 아스마는 끝까지 응답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허이가 밤낮으로 달려가 아스마를 구해 둘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화가 난 부자가 뚝을 터뜨려 그들은 그만 물에 빠지게 된다. 후에 아스마는 강가의 돌로 굳어지고만다…   미궁과 같은 석경속을 요리저리 에돌면서 아스마를 방불케 하는 돌, 그리고 전설속의 아허이와 아스마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자리를 쳐다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그 전설속에 빠져든 느낌이다. 석림의 한 곳에는 푸른 물이 찰랑이는 호수와 그 곁에 이족처녀와 같은 암석이 있었는데 매일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암석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있었다. 이 암석이 바로 운남석림의 대표인 아스마석봉이다.   빠듯한 반나절의 석림풍경구 스케줄로 이족 사니인들의 소박하면서도 호방한 씨름경기, 풍격이 독특한 혼례식은 보지 못했지만 풍부한 전설, 찬란한 민족의상,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는 노래와 춤을 엿볼수 있어 약간이나마 그 아쉬움을 달랠수 있었다.                오지훈기자
35    조선족서예가 조진빈씨 작품 유엔기구에 소장 댓글:  조회:1765  추천:0  2014-08-30
 2014-08-19    12점이 유엔 관련기구에 영구 소장       본사소식 지난달 유엔에서 있은 "유엔 2014년 국제생태예술전"(이하 유엔전으로 략칭)에서 조선족서예가 조진빈(趙振斌)씨의 12점 작품이 유엔 관련기구에 영구 소장돼 화제를 모으고있다.      금번 유엔전은 "2014년 유엔지소발전 고위급정치포럼, 지속도시및록색창신테마회의" 일환으로 캄보디아왕국정부, 유엔문명련맹생태위원회, 유엔국제생태안전합작기구, 세계정당기후및생태련맹, 유엔청년부권(賦權)및도시안전위원회 등 단체의 공동 추진하에 7월 2일부터 8일까지 미국 뉴욕유엔본부빌딩 전시홀에서 개최되였다.   국제생태안전합작기구 총간사, 세계정당기후및생태련맹창시주석, 유엔청년부권및도시안전위원회 집행주석 장명군(蔣明君)의 요청으로 조진빈씨는 이번에 도합 14점을 출품하였는데 그중 두점이 유엔 관련기구의 잡지에 채용되였고 국례목란꽃 8점과 "오도(悟道)" 등 12점이 유엔 산하 세계정당기후및생태련맹, 국제생태안전합작기구에 영구 소장되였다. 이번 행사는 지속발전을 추진하여 록색생태안전을 수호하자는것을 주제로 하여 생태와 예술의 융합을 통해 세계 각국이 지속발전과 생태안전에 관심을 돌리고 공중에게 자연환경을 보호하자는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예술형태로 지속도시 및 록색창신을 전시하여 환경위기와 생태위기가 직면한 준엄한 정세를 관심하고 지속발전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 전인류가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공동히 나서자는데 취지를 두고있다.   장명군주석은 일전 유엔북경주재 비서처를 통해 조진빈씨에게 소장증서를 전달하고 그를 "국제생태안전합작기구", "세계정당기후및생태련맹"의 례품(禮品)예술가로 지정함과 동시에 중국국제생태화원 부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지난달 7월 26일부터 14일간에 걸친 "중국꿈" 미국의 려행 중국팀이 부분 예술가들의 작품을 지니고 미국에서 중국꿈 정신을 고양하고 홍보하였다. 그중 조진빈씨가 쓴 "중국꿈"(해서체, 이번 유엔기구에 의해 소장됨)작품도 선정되여 세인에게 홍보되였다.   이번 수상소감에 대해 조진빈씨는 "중국꿈, 중국의 문화예술이 국문을 나와 세계에로 진출해 나라와 인민을 위해 영예를 빛내는데 보탬이 되였다는데 가슴이 뿌듯하고 중국꿈과 민족꿈을 이룩하는데 조그만한 힘이라도 이바지하고싶다"고 전했다.   현재 본계시에 살고있는 조진빈씨(1952년생, 흑룡강성에서 출생)는 중국예술가연구센터 명예부주석, 세계예술가협회 리사(국제), 중국서법가협회 회원, 중국미술가협회 회원, 중국서법연구원 리사, 국제미련(美聯)상무리사, 중국장군부장서법원 화사(畵師), 고급원사, 현역 중국인민해방군 모 보병사 장비부 공정사, 상교(上校)계급이다. 선후 미국, 일본, 싱가폴, 한국, 타이, 향항 등 나라와 지역 전시회 조직위원을 맡았고 연경서법원 부원장, 국제서법교류창의서법 상무리사, 동방문화예술련의회 서법부 학술위원, 문화부 문화시장발전센터 특별초빙 서법가, 중국국제예술가협회 종신고문, 고급서화사, 중국서화교역센터 관리위원회 상무위원 등 여러 직을 맡고 왕성한 창작과 사회활동을 하고있다.      오지훈기자         "중국꿈" 미국의 려행 중국팀이 조진빈씨의 "중국꿈"작품을 지니고 미국에서 홍보하는 장면. 이 작품도 유엔기구에 영구 소장되였다.           국제생태안전합작기구 총간사 장명군씨(왼쪽)와 함께. 작품 "강하호해"(江河湖海) 역시 이번에 유엔기구에 영구 소장되였으며 조진빈씨의 대표작중 하나다.  
34    조진빈씨 중앙텔레비죤 신화망 등 중앙매체의 뉴스인물로 댓글:  조회:1596  추천:0  2014-08-30
 2013-03-29    본사소식  삼생(중국)서법원 원장 조진빈씨(1952, 조선족)는 지난 1월 19일 북경오동귀예술관에서 있은 “어보가화(御寶嘉和) 2012€?013 세말년초대형예술경매대회”서 상상외 대성공을 거두어 중앙텔레비죤, 신화망 등 중앙급매체의 뉴스인물로 되였다.   조진빈씨는 처음으로 이런 국내 대형경매대회에 참가하여 서화작품 7점을 출품, 원래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모두 경매되여 매우 기쁘다고 감회를 털어놓았다. “40여년 심혈을 쏟았다. 최근년에 중국문화시장의 예술작품 경쟁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시장을 면밀히 고찰한끝에 이번에 출품을 결심하게 되였다. 이번 경매를 통해 나의 예술작품가치와 예술지위를 인정받은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경매를 조직한 북경어보가화국제경매유한회사는 중외 예술품의 감정, 평가, 경매, 기업재산권경매, 토지사용권 및 부동산을 경매하는 전문회사이다. 이번 경매에 참가한 작품은 도합 650여점, 그중 서비홍 등 대가의 작품(유품)도 있어 경매대회의 높은 차원과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매률은 30~40%에 그쳤는데 작품들이 창의력이 떨어지고 규범화되지 못한것이 주되는 원인이고 대가들의 작품은 그 진가를 가려내기 어렵다는것이다.   2003년 1월 중국서화교역쎈터에서 발급해준 서화예술작품수장증서에 의하면 조진빈씨의 서화작품 판매윤격(潤格)제시가격은 4만원/평방자이다.   현재 그는 중국예술가연구쎈터 명예부주석, 중국국제예술가협회 종신고문, 국제서법교류창의서화 상무리사, 중국서화교역쎈터관리위원회 상무위원 등 여러 직을 맡고있다. 그의 작품은 국제 및 국내 대형전시에서 2백여차 금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부분 작품은 국가기념관, 박물관에 의해 소장되였다. 그는 문화부와 국무원발전연구쎈터에서 수여한 “국수상금질상장”과 세계 16개 나라에서 련합으로 수여한 “세계서법가예술명인”영예칭호도 수여받았다. 그는 또 1996-2010년 중화인민공화국지식산권국으로부터 50여개의 명브랜드와 원생태표식, 제품방위표식 등의 디자인설계특허증서를 취득하였다.   중국문헌출판사에서 출판한 “서법중국”에 중국서법계 파워인물 18명을 소개, 그중 조진빈씨의 작품도 수록되였으며 중국국제우표수집망, 중국우표책발행조직위원회에서 공동발행한 당18차대회기념 소장우표책자에도 “중국예술대사 조진빈”기념우표책자가 들어있다.   조진빈씨는 고향 본계에 1만여평방메터의 개인작품전시장을 갖추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이고있다. 사진은 조진빈씨의 작품을 소개한 부분 기념우표집과 책자들이다.                         오지훈기자  
33    료녕 올해 빈곤부축중점지역 수험생 20점 내려 록취 댓글:  조회:1772  추천:0  2014-06-17
 2014-06-12 본사소식 일전 “료녕학생모집고시넷(遼寧招生考試之窓)"에 의하면 료녕성교육청에서는 “2014년 료녕성중점대학 농촌학생모집 특별계획”(아래 “계획”이라 략칭)을 제정하고 우리 성 빈곤부축 개발사업 중점현(시) 학생들에 대해 록취통제점수선보다 20점 내려 모집하기로 하였다. 우리 성에서 “중국농촌빈곤부축개발요강(2011-2020년) 실시 관련 의견”에 따라 확정한 빈곤부축개발 중점현(시)는 모두 15개, 조양, 건평, 카좌, 북표, 릉원, 의현, 부신, 장무, 강평, 수암, 환인, 청원, 신빈, 서풍 등이다. 그러나 상기 지역내 중학교 고중 3년을 다녀야 우대정책을 향유할수 있다고 규정하고있다. “계획”은 대학입시성적(대학입시 정책성 가산점 포함)에서 료녕성 일반류형 본과 제1차 록취통제점수선은 20점(20점 포함) 내려 모집하며 심양농업대학, 료녕공정기술대학 지망생은 대학입시성적(대학입시성적 정책성 가산점)이 료녕성본과2차 록취통제선에 도달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기자가 신빈현조중과 환인현조중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알고있는가고 묻자 며칠전에 알았지만 금년에 처음으로 나온 정책이여서 우리 조선족학생들이 가산점과 이번에 20점을 낮춰을 모집하는 우대정책을 함께 향유할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빈곤지역 농촌학생들을 록취통제점수선에서 20점 내려 모집하는 대학은 아래 25개 대학이다. 료녕대학, 중국의과대학, 심양공업대학, 료녕의학원, 심양항공항천대학, 대련의과대학, 심양리공대학, 료녕중의학대학, 료녕과기대학, 심양약과대학, 료녕공정기술대학, 료녕사범대학, 료녕석유화공대학, 심양사범대학, 심양화공대학, 발해대학, 대련교통대학, 대련외국어대학, 대련공업대학, 동북재정대학, 심양건축대학, 대련대학, 심양농업대학, 대련공정학원, 대련해양대학 등이다.                                                                                                    오지훈기자
32    롯데백화점 침체속 심양쇼핑시장에 연착륙할수 있을가? 댓글:  조회:2217  추천:0  2014-06-17
심양롯데백화점 오픈 2014-06-10   침체속 심양쇼핑시장에 연착륙할수 있을가? 중국내 최대 투자규모 5월 31일, 심양롯데백화점이 정식 오픈하였다. 소개에 의하면 롯데백화점은 해외점포중 7번째로, 중국에서 다섯번째로 문을 연 롯데백화점으로 중국내 최대규모다. 지하 1층∼지상 7층 규모에 연면적 12만 2천㎡, 매장면적 7만 3천㎡로, 입점 브랜드수는 420여개다. 이번 심양점 개점은 2017년까지 심양에 백화점, 쇼핑몰, 테마파크, 호텔 등이 복합된 "롯데타운"을 만드는 롯데그룹의 대규모 프로젝트 "롯데월드 심양"의 첫단계 오픈이다. 롯데그룹 계렬사 7곳이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의 총투자비는 3조원(한화)으로 중국 최대규모다. 올해 백화점과 영플라자, 롯데시네마가 1차로 문을 열고 래년에는 대형마트, 2016년 쇼핑몰과 테마파크가 조성된다. 2017년에는 호텔, 오피스, 아빠트까지 준공돼 연면적 116만㎡ 규모의 거대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 잠실에 조성중인 제2롯데월드의 1.4배 크기라고 한다. 심양지역 특성을 고려해 롯데백화점측은 백화점과 함께 영패션 전문관인 영플라자를 동시 오픈해 중국의 젊은 고객을 공략할 계획이다. 롯데백화점의 중국 점포중에서 영플라자가 백화점과 함께 문을 여는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백화점에도 심양의 최대 백화점인 탁전(卓展)백화점보다 2배 많은 영패션브랜드가 들어가고 또 중국인에게 인기있는 더페이스샵과 스킨푸드 등 중가 화장품브랜드와 가전브랜드 쿠쿠도 입점하였다. 특히 개점일에는 젊은층의 발길을 끌기 위해 “별에서 온 그대”로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 김수현(롯데백화점 전속모델)의 사인회를 열어 롯데백화점의 오픈을 알리기도 했다. 심양쇼핑몰의 생력군 역할 할가 롯데백화점이 오픈한지 얼마안되여 료심지역 지방신문인 시대상보는 상당한 지폭에 심양롯데백화점의 운명을 걱정하는 글을 실었다. 신문은 “가격우세 없고 별로 브랜드 인기 없이 단지 우상을 통한 흡인력이 떠나간 롯데백화점 심양에서 얼마 지탱할수 있을가”라는 제목하에 현 심양쇼핑시장 상황을 분석하고 심양롯데백화점의 현황을 세세히 보도하였다. 수년전 “쇼핑천국”을 꿈꿔온 심양은 이미 중국내 쇼핑몰이 가장 많이 집결된 도시로 부상하였다. 아직 오픈하지 않았거나 건설중인 쇼핑몰을 계산하면 심양의 쇼핑몰은 이미 심양지역과 주변 구매수준을 훨씬 초과하여 엄중한 과잉현상을 낳고있어 심한 우려를 자아내고있다. 일전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은 상주인구가 천만명도 되지 않은 심양시에 쇼핑몰면적이 이미 800만평방메터에 달해 현지주민의 소비수준을 초과했다면서 심양상업부동산이 과잉되였다고 보도한적 있다. 중량련행(仲量聯行)의 통계데이터에 의하면 심양쇼핑몰 공실률은 24.3%로 중국내 부성급도시 1위를 점하였다. 한정된 소비시장에 상점이 지나치게 많고 소비자들이 분산돼 상업기업의 영업액이 떨어지면서 대형 쇼핑몰에 입주했던 기업들이 륙속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본의 메이커 상업기업인 서무, 이스탄이 륙속 문을 닫았는가 하면 메이메이(대만)와 상타이(타이)도 철거하는 불운을 맞았다. 당면 저조하고 침체된 심양쇼핑시장에 진출한 롯데백화점이 연착륙할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있다. 심양롯데월드 프로젝트는 지난 2008년에 심양북역 부근에 들어서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년간의 건설을 거쳐 먼저 백화점을 오픈시킨것이다. 그러나 롯데백화점의 상품이 심양 기타 상점 가격과 비교하면 별로 우세가 없고 특색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있다. 시대상보의 기자는 상점내 입점한 브랜드상품이 심양 여러 시장에도 있고 가격방면에서도 우세가 없음을 발견했다. PSALTER 의류브랜드인 경우 구매시 20% 할인혜택을 주었는데 뉴마트에서는 구매액이 99원일 때 50원을 반환해주어 우대폭이 더 컸다고 했다. 그리고 롯데백화점에 입점한 기타 의류브랜드나 일부 화장품도 다른 상점에 있었는데 다른 상점에서는 판촉행사가 많았지만 롯데백화점에서는 아직 별다른 판촉이 이뤄지지 않았다. 롯데백화점을 찾은 류녀사는 “한국상점이라 하여 한국상품이 싼가 해서 왔는데 중가나 태원가의 상점 가격보다 싸지 않다”고 하였고 오씨 녀사는 “옷이 절말 비싸다. 보통 호가가 2,3천원인데 그리 큰 브랜드도 아니고 정말 한국브랜드가 맞는가?”하고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또 다른 고객에 의하면 입점한 상품이 30%가 한국산이라 하는데 실지 다수가 중국산이였다. 이 고객은 인터넷에 들어가 홍보하고있는 녀성의류브랜드 15개를 검색했는데 두개만 한국산이고 기타는 북경과 상해산이라고 했다.   롯데백화점안에 국내 브랜드가 많고 국제 일류 브랜드가 적은것은 심양내 상점이 많아 고객이동이 적고 임대료가 비싼데 반해 매출액이 보잘것 없어 새로 오픈한 쇼핑몰에 쉽게 입점하지 않은게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 오픈한 심양롯데백화점은 중국내 다섯번째, 한국 소매시장의 반을 차지하고있는 한국 롯데그룹 이 거대 상업함대의 중국진출은 최근년 들어 썰물마냥 거세다. 롯데백화점만 이미 5개인데 롯데백화점 중국본부 안세영총재에 의하면 2015년까지 25개를 오픈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런 거센 투자에도 불구하고 현재 오픈한 백화점의 실적은 락관적이지 못하다. 제일먼저 중국에 진출한 북경롯데은태백화점은 2008년에 문을 열어 당해 거액의 결손을 냈으며 결국 중국합자측과 헤여지고말았는데 순 한국모식으로 경영하였기에 중국소비자들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것이 그 원인이였다고 한다. 중국 시대마트 주식 인수로 중국내 신속하게 확장하고있는 롯데마트의 경우도 그 실적이 일반적이다. 2012년 안휘 회북에 2.8억원을 투자한 롯데마트는 오픈한지 2년 시간도 안돼 2천만원의 적자를 내고 휴업상태다. 이밖에 청도에 입주한 롯데마트도 적지 않은 적자 상태로 운영중이라고 한다. 롯데그룹의 중국내 경기부진에 대해 관련 매체에서는 중국 경제 성장속도가 느려진것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중국내 적합한 경영방식을 찾지 못하고있는것도 중요원인의 하나라고 분석하고있다. 한마디로 수토가 맞지 않은것이다. 롯데백화점은 심양쇼핑시장에 생력군으로 나타났지만 당면 침체속 심양쇼핑시장을 뚫고나갈수 있을런지 또 시종 태원가와 중가를 중심으로 이뤄진 심양쇼핑시장분포도에 하나의 굴직한 선을 그을수 있을런지 귀추가 주목된다.              본사기자
31    전통의 흥과 현대의 멋으로 거듭나는 축제 댓글:  조회:2538  추천:0  2014-01-24
전통의 흥과 현대의 멋으로 거듭나는 축제 date:2013-07-05 오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한국 강원도 강릉에서 개최되는 GTI국제투자무역박람회에 참가하는 기간인 6월 9일, 강릉단오축제현장에 가볼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강릉시 한 복판으로 흐르는 남대천이라는 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강릉단오장은 규모만 봐도 어마어마하다. 강릉 남대천의 남산교를 중심으로 하여 창포교, 솔향다리, 잠수교 량안에 펼쳐지는 그네장, 씨름장, 투호장, 단오제체험촌류전 등 짙은 민속특색의 장은 물론 과학체험, 향토먹거리촌, 다문화전시체험관, 농특산물판매부스, 서커스 등 갖가지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로 하여 그야말로 가관이다. 천여년 세월동안 보전되여온 강릉단오제는 지난 1967년 1월 16일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였고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여 세계인에게 점차 알려지고있다. 그러나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자 한때는 중국네티즌들의 강한 불만을 사기도 했는데 강릉단오제를 직접 눈으로 본다면 중국의 단오절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인상을 받게 되고 새로운 인식을 가질수 있을것이다. 강릉단오제는 중국처럼 단순하게 음식위주의 전통명절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행사로 거행되고있다. 행사 한달전 신주빚기로 시작되여 대관령산신제, 대관령국사성황제, 영신제, 조전제, 단오굿, 관노가면극, 농악경연대회, 어린이 농악경연대회, 학산오독떼기 등 지정문화재행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정문화재행사와 동시에 다양한 민속행사도 열린다. 한시백일장, 향토민요경창대회, 전국시조경창대회, 줄다리기대회, 씨름대회, 그네대회, 강릉사투리경연대회, 궁도대회, 투호대회, 단오장기대회, 이리농악, 북청사자놀음 등 전문가와 일반 참가자 누구나 즐길수 있는 행사여서 풍성한 행사로 자리잡아가고있다. 한국 강릉단오제 력사기재에 따르면 음력 5월 5일 단오는 년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로 인식되면서 수리날, 천중절(天中[W), 중오절(重午[W), 단양절(端q?[W) 등으로 불렸다. 민간에서는 농작물의 생장이 왕성해지는 시기를 앞두고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로서 24절기중에 손꼽히는 중요한 날인것이다. 5월 단오는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기원하는 파종축제의 성격이 짙다. 따라서 강릉단오제의 기원은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 풍림”을 신에게 기도드리던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기인하여 이러한 민속풍속이 현재까지 전승되여오고있다고 한다. 단오체험촌에 가면 관노가면극탈그리기, 단오부적그리기, 방짜수저만들기, 창포머리감기 등 다양한 단오체험을 즐기려는 어린이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있었다. 그중 창포머리감기는 머리에 윤기를 주고 액을 막아주는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보는 체험이여서 녀자애들한테는 인기다. 곳곳에 진렬된 한국 강원도의 갖가지 농특산물과 먹거리로 펼쳐지는 풍물시장이 자연적인 조화를 이루는 단오민속체험장은 참관객들에게 한국의 전통 민속행사와 놀이에 대해 리해하도록 하고 또 이렇게 현지민들에 의해 체험을 통해 더많은 사람들에게 전승되여오는것 같다. 단오장에는 한국서커스의 전통을 자랑하는 동춘서커스단 공연장도 설치되여 많은 관객들의 발길을 끌고있었는데 현재는 중국서커스인들의 초청공연단과 함께 어울려 공연을 펼치고있다고 한다. 동행한 중국기자들도 강릉단오제의 규모와 행사내용에 놀라면서 “중국의 단오절을 한국에서 앞서 유네스코에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판이하게 다르다. 이렇게 대단한 행사인줄 정말 몰랐다.”고 말하였다.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던 강원도청의 한 관계자는 이 말에 시무룩이 웃으면서 “한국인들도 강릉단오제에 대해 잘 모른다. 행사장에 와본 사람만이 강릉단오제의 진의를 조금 리해할수 있다. 행사기간 번 돈으로 일년을 먹고살수 있다고 할만한 행사라고 하면 어느정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단오날인 13일에 강릉문화원과 ㈔강릉단오제위원회, ㈔강릉단오보존회, ㈔강릉사투리보존회 등 단체에서 한복입기 운동을 벌이는데 단오날 하루만이라도 남성들도 한복을 입어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있다고 한다. 강릉단오제기간 6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19개 분야, 72개 프로그람이 다채롭게 펼쳐진다니 듣기만 해도 정말 대단한 축제다. 축제장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화해와 열린 공간, 전통의 흥과 현대의 멋이 어울리는 축제의 분위기가 짙었다. 한국의 잘 보존되여온 전통의 민속행사를 재현하고 거기에 현대인들이 참여해서 경연하고 실제 체험할수 있다는데서 이러한 전통민속이 더 잘 보존되고 날로 강한 생명력을 발산하여 세계무형유산으로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오지훈기자
30    한국 화페속의 두 력사인물 댓글:  조회:2934  추천:1  2014-01-24
한국 화페속의 두 력사인물 Date:2013-07-19 오전 ㅡ한국 강원도 강릉 “오죽헌”을 찾아서 세계 화페를 보면 대개 력사속에서 자국의 위대한 사상가, 정치가 등이 주로 화페의 인물로 등장한다. 한국화페속의 인물을 보면 100원권은 리순신, 1,000원권은 이황, 5,000원권은 리이, 1만원권은 세종대왕, 5만원권은 신사임당이다. 그중 리이와 신사임당은 모자간이다. 기존 한국화페의 5천원권에 등장하는 률곡에 이어 2009년부터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등장한 최고액권인 5만원권 화페가 시중에서 류통되였다. 한 나라의 화페속에 모자간이 등장하는것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드문 류례다. 일전 필자는 우연하게 이 두 력사인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서깊은 오죽헌(€{a竹j
29    한국속의 작은 중국 - “인천차이나타운” 댓글:  조회:2709  추천:0  2014-01-24
한국속의 작은 중국- “인천차이나타운”   -유구한 력사속에 깃든 화교들의 숨결을 찾아 Date:2013-08-16 오전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 곳곳에 차이나타운이 있어 자주 매스컴을 통해 차이나타운관련 뉴스를 많이 접한다. 한국에도 최근년에 중국 조선족들의 “코리안드림”과 더불어 조선족과 중국인의 집거지역인 서울의 대림, 가림봉동 등 지역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있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한국의 세번째 큰 도시 인천에 력사가 깊은 오리지날 차이나타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었다. 지난 6월 한국방문후 귀국길에 잠간 인천에 들린적 있었다. 인천에 계시는 한 한국사장의 안내로 인천항1국제려객터미널과 연안부두, 그리고 월미도공원 등 여러 곳을 둘러볼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가장 인상깊은 곳이 바로 인천차이나타운이다. 붉은색의 한자로 “중화가”라고 큼직하게 새겨진 웅장하게 서있는 패루를 지나면 경사진 길이 3백여메터로 죽 이어졌는데 길 량켠으로 온통 중국풍 상가가 늘어서있다. 붉은색 간판과 홍등이 내걸리고 음식점이나 상점이 중국일색이여서 중국의 도시일각을 방불케 했다. 인천 화교의 력사는 13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군역상인들이 이땅에 정착하였다. 그후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고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정관(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현재의 인천시 선린동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조계지가 세워지고 그해 10월 청국령사관도 세워졌다. 잇따라 중국의 건축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지면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여 경동, 신포동 일대, 용현동, 주안, 부평 지역에 화교들이 모여살며 상업활동외에 채소시장까지도 그들에 의해 성업을 이루었다 한다. 삼국지벽화거리 1887년에는 산동 연태지방에 살던 왕씨와 강씨가 채소종자를 들여와 채소농사를 시작, 당시 조선에서는 볼수 없던 양파, 당근, 도마도 등이 모두 이들에 의해 전파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그뒤 조선전쟁, 인천상륙작전 등 전쟁의 세례를 거치고 또 한국정부의 화페개혁, 외국인부동산 소유제한 등으로 인천에 살고있던 반수이상의 화교가 이곳을 떠나버렸고 화교들만이 경영하던 중국 음식업계에 한국인들도 경영허가를 내주어 화교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급부상과 지구촌시대를 맞이하여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조선전쟁이후 급속도로 위축된 인천차이나타운은 인천이 대중국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또한 21세기 지구촌의 세계화바람에 힘입어 이 지역의 력사성과 문화성이 재조명되면서 인천의 새로운 문화와 관광 명소로 부상하고있다. 차이나타운의 중심거리를 중심으로 중국전통음식점을 비롯해 중국제과점, 중국상품점, 중국벽화, 중국맛사지, 짜장면박물관 등 먹거리, 살거리, 볼거리 등 이색문화가 펼쳐진다. 3만 4,526평의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은 중국료리전문식당이다. 현재 27곳이 전문식당간판을 내걸고있다. 기타 일반음식점을 포함하면 식당수는 60여곳에 달한다. 한국인들의 국민메뉴로 불리우는 짜장면도 화교들의 손에 의해 탄생, 1905년에 생겨난 “공화촌”짜장면집이 바로 짜장면의 원조이다. 차이나타운에는 또 중국인들보다 한국인들이 즐겨 인용하는 중국의 “삼국지”벽화가 있는데 150m 길이의 “삼국지”를 따라가보면 “적벽대전” 등 ”삼국지”의 줄거리가 한눈에 볼수 있도록 그려져있었다. 중국전통 상가거리에는 전통차를 비롯해 전통옷인 치포, 엔틱도자기, 악세사리, 차세트, 소품 등 각종 물건들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매년 9월과 10월엔 각각 인천ㅡ중국의날 문화축제와 짜장면축제가 열린다. 2012년 인천시가 이 지역을 국제테마특구로 지정하면서 차이나타운의 발전속도는 더욱 빨라져 현재는 1,600여명의 화교들이 살고있고 관광객수도 같은기간131만명에서 250만명으로 91% 늘었다. 백여년전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며 활력넘치는 삶을 이어온 인천차이나타운, 누구보다도 눈물겨운 세월속에서 각인된 화교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생생한 숨결을 느껴본다.                           오지훈기자
28    “협회는 여러분이 함께 꾸려나가는것” 댓글:  조회:2412  추천:0  2014-01-24
“협회는 여러분이 함께 꾸려나가는것”  Date:2013-11-08 ㅡ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정만흥회장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는 성내 기타지역의 조선족기업가협회에 비해 늦게 발족되였지만 창립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만흥회장을 비롯 회장단의 강한 리더쉽과 추진력, 솔선모범적 역할, 지역사회발전에 맞는 여러가지 행사를 기획 추진하여 점차 대련시조선족사회의 구심점으로 떠오르고있다.        1,500일에 220차 활동 한 민간단체가 4년 남짓한 기간 루계 220차의 활동으로 평균 6.8일에 한차례 활동을 조직했다는것은 일대 “창거”라고 할수 있다.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는 지난 2010년 6월 26일에 정식 발족, 대련시위 통전부 산하 1급 협회로 정식허가를 취득하였다. 협회 정회장의 소개에 의하면 지난 2009년 7월부터 협회발기를 시작해서 금년 8월까지 협회관련 활동뿐만아니라 대련지역 조선족사회발전에 맞는 여러가지 행사들을 조직, 그 활동이 도합 220차에 달하고있다. 2009년 7월 대련정흥석화유한회사 정만흥리사장을 조장으로 하는 7명의 조선족기업인들이 의기투합하면서 협회발족을 위한 준비작업이 추진되였다. 그들은 선후 50여명의 대련 여러 지역에 분포되여있는 조선족기업가들을 만나는 한편 자료를 수집하였다. 처음에는 서로 잘모르는 사이였지만 자주 만나 대화하고 “단결, 협력, 발전” 리념에 동감하면서 각자가 인맥관계와 자원을 충분히 발휘하고 모두가 힘을 합친데서 약 1년시간의 노력끝에 대련시정부의 지지를 얻어내 협회를 성공적으로 탄생시켰다. 협회는 기업인들을 위한 단체였지만 대련시조선족사회발전에 기업인들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하나의 민족사명감으로 삼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대련시에는 원래 조선족이 적었는데 개혁개방과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연해도시우세가 돌출해지면서 조선족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 최근년에 대련시조선족사회는 전례없는 성장을 가져왔다. 정회장에 따르면 현재 대련시조선족인구는 7만명(지난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상주인구가 1.8만명), 조선족기업이 2천여개이다. 그러나 아직 집거지가 형성안되고 분산적이다보니 서로 교류할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협회는 선후 크고작은 행사를 조직하여 조선족사회 각 계층간 상호 교류와 화합의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그중 비교적 영향력있는 행사들로는 천여명이 참여한 “대단결, 대발전”교류세미나(4회), 800여명이 참여한 “사꾸라꽃봄맞이놀이”(2회), 500여명이 참여한 기업견학(5회), 1만여명이 참여한 제3회 대련시조선족민속문화예술절, 1,500여명이 참여한 조선족각계 음력설맞이행사(2회), 50명의 지명인사가 참여한 대련시조선족력사세미나. 이밖에 200여명의 대련시 각 대학교, 의학계 교수 박사들이 참여한 “자원공유, 공동발전”세미나(5회), 대련시조선족축구대회(2회), 200여명이 참여한 대련시조선족골프대회(2회), 150여명이 참여한 대련시조선족3.8부녀절기념행사 등 행사들을 꼽을수 있다. 4년 남짓한 시간에 초기 7명이 발기한 협회는 현재 300여명의 회원을 가진, 체계가 비교적 완선화된 민족사회단체로 발돋음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행사를 통해 협회는 대련시의 기업계뿐만아니라 정계, 학술계, 의학계, 종교계, 문화관, 학교, 로년사회 등 각계 조선족골간들을 단합시켜 대련시조선족사회의 “자원공유, 공동발전”에 탄탄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간부의 역할 발휘가 협회발전의 관건   “책임자들의 역할을 제대로 발휘시키는것은 협회를 잘 꾸려나가는 관건이다. 또한 후비간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여 협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꾀해야 한다.”  협회는 회장단성원들 각자의 자원우세와 적극성을 잘 발휘시키기 위해 2012년부터 당직(!]班)회장제를 실시하였다. 당직회장제란 회장의 통일적인 사업포치에 따라 부회장이상 간부들이 한달씩 협회 일상사업을 주관하는 제도이다. 회장은 당직회장들의 의사를 존중해 그들이 자기의 주관능동력을 발휘하여 일을 추진할수 있도록 권리와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협회에는 12명 상무부회장과 12명의 부회장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협회골간들로 협회발전에 큰 기여를 해오고있다.   당직회장들은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자기의 사회자원을 동용하여 당월계획을 잘 추진하기 위해 골머리를 짰다. 제조업의 경험교류와 기업견학, 민속절, 골프대회, 년말총화모임, 3.8부녀절기념행사,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투자환경 고찰방문, 세계한상대회 참가 등 굵직한 행사들은 모두 당직회장들이 알심들여 기획하고 추진한 성과들이다. 협회는 당직회장제 도입과 동시에 분회활동제를 실시하여 협회의 활력을 강화하였는데 분회활동제는 계통적인 관리모식으로 협회를 이끌고 회원들의 적극성을 동원하는데 중요역할을 하였다. 협회는 산하에 제조업분회, 무역분회, 과학기술분회, 찬음업분회, 종합분회, 의학분회 등 6개 분회와 국내업무부, 문체부, 법률자문부, 건강자문부, 재무세금자문부 등 5개 부문 및 비서처를 개설하였다.  분회활동제는 매개 분회와 부문의 분회장 및 부문책임제를 실시하였는데 각 분회에서는 회장의 통일적인 관리하에 각자의 주관능동성을 발휘하여 자기 업종과 특성에 맞는 여러가지 경제무역교류 및 사회활동을 조직할수 있다. 협회는 또한 제도적으로 회원들의 회비 50%를 각 분회에 분배해 이 경비로 활동을 조직할수 있도록 권한을 주었는데 분회들에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행사들을 통해 협회 홍보와 회원사 발전에 힘과 지혜를 모으고있다.  “협회가 설립되면서 동업종들간 서로 인재를 스카웃하는(빼내가는) 악성경쟁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며 대신 분회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기업을 견학하여 공동발전을 도모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높은 민족책임성을 가진 회원들이 나타나고있다고 정회장은 자랑스레 소개하였다.        소통플랫폼 구축도 중요   협회는 대련시정부, 그리고 국외기관, 은행계통 등 관련분야 관련부서들과의 원활한 관계를 구축하여 회원들이 사업과 생활상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데 주력하였다. 소개에 의하면 협회는 대련시위 통전부, 시민위, 민정국, 공안국, 안전국, 중소기업국, 대외무역경제합작국, 외사판공실과 시공상련, 시기업가협회 등 정부부서 및 단체들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여 여러 방면으로 정부기관의 관심과 지지를 받고있다.  또한 주심양한국총령사관, 주대련한국령사출장소, 심양조선총령사관, 주대련조선대표처, 주대련일본령사출장소, 일본상공회, 코트라, 대련한인회, 인천상공회 등 국외기관들과 량호한 협력관계를 맺고 회원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활용하고있다.  이 협회의 또 하나의 커다란 우세이자 장점이 바로 20여개 은행, 담보회사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회원사들에게 대출담보 등 금융서비스로 자금난을 해결해준데 있다. 동시에 국내외 20여개 매스컴들과도 량호한 협력관계를 맺어 회원사들을 위한 홍보도 게을리하지 않고있다. 이밖에 국내 20여개 상회와 량호한 협력관계를 건립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발전을 꾀하고있다. 정회장은 이렇게 소개하였다. “대련의 조선족 대부분은 개혁개방후 동북3성의 여러 곳에서 모여들다보니 아직 집거지가 없고 지리적우세가 없고 또 현지인맥 등 자원면에서도 기타 상회와 단체에 비길바가 못된다. 그러나 우리 회원 대부분이 문화수준이 높고 류학생과 유명대학 졸업생이 많은 우세가 있고 국내외 인맥자원도 괜찮다. 우리는 이러한 특점과 우세를 하나의 자원으로 정합한 플랫폼을 구축하여 한국, 조선, 일본, 구미 등 나라와 경제무역을 진행하고 수차 국외경제고찰, 투자설명회, 세미나 등에 참여하면서 상호협력을 추진하였다. 현재 20여개 회원사가 국외기업과 실질적인 업무를 진행하고있다.” ”대련시 기타 소수민족의 본보기” 대련지역 조선족사회에 전례없는 단결, 화합의 국면이 조성된데 대해 대련시령도들도 공개적인 석상에서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는 대련시 기타 소수민족의 본보기이다.”고 수차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를 치하하고 성과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였다. 협회는 대련시조선족사회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이 가운데는 협회 간부들의 민족사업에 대한 높은 책임감, 헌신적인 봉사정신과 갈라놓을수 없다. 협회는 회원경비사용에 있어서 엄격하고 투명하고 공개적인 재무제도를 내오고 회원들의 감독을 받고있다. 회원들의 경비를 허투루 쓰지 않고 유용한데 쓰는것을 보면서 회원들도 마음이 우러나 회비와 기부금을 내고있다. 협회 간부들은 국내외행사에 참가하는 일체 경비를 자부담하고있는가 하면 수십차 간부회의경비도 자기들의 주머니돈으로 충당하였다. 이는 협회가 건전하게 발전할수 있는 경제적토대라고 정회장은 말했다. 협회의 부회장이상 간부와 각 분회장이상 간부들은 또 조선족사회의 여러가지 행사에 물심량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내 행사를 조직하고있는가 하면 자금도 서슴없이 내놓고있다. 어떤 사람은 매년 몇만원에서 수십만원까지 기부하고있다. 이런 튼튼한 자금담보가 있기에 협회의 활동뿐만아니라 대련지역 조선족사회의 “자원공유, 공동발전”의 장을 만들고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전승해나가는 조선족민속문화절, 조선족로년행사, 조선족학교행사들이 무난하게 진행되고 기꺼운 성과들을 이뤄내고있다.  정만흥회장은 “민족기업인들의 높은 사회책임감과 강한 민족심이 있길래 짧은 시간이지만 협회는 조선족기업인들간 상호 윈-윈을 위하고 또한 대련지역 조선족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있다”고 피력하였다.                            오지훈기자
27    도시화,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기회는? 댓글:  조회:4081  추천:1  2013-10-29
도시화,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기회는? :10/25/2013 ㅡ성과학기술협회 부주석 김태원과 대담 리극강총리는 도시화(城鎭化)를 중국이 새로운 발전단계에 있어서 경제가 지속 발전할수 있는 새로운 성장동력, 커다란 잠재력이라고 강조하였다. 도시화는 엊그제의 일이 아니지만 오늘날처럼 도시화를 전반 중국경제발전의 핵심위치에 올려놓고 도시화의 중요성과 도시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보기 드물다. 그렇다면 도시화란 무엇인가? 도시화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기회를 가져다줄것인가? 등 문제를 갖고 일전 기자는 장기간 료녕성위리론연구실에 몸담아오면서 현역경제(顯域經濟)를 연구하고 이와 관련해 성위, 성정부에 건설적인 의견을 제출한 현 성과학기술협회 김태원부주석을 인터뷰하였다.     도시화는 농민의 시민화   일찍 현역경제를 연구하고 적지 않은 글을 발표하였고 이번에 료녕일보에 또 도시화관련 좋은 글을 발표해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일으킨것으로 알고있다. 도시화에 대해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ㅡ도시화는 우리에게 생소한 단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리해하는 사람은 아직 별로 많지 않다. 도시화는 가장 간단하게 농민의 시민화라고 리해하면 된다. 10여년간 현역경제와 농촌경제를 연구해왔는데 지금 말하는 도시화와 밀접한 련관성이 있다. 17차, 18차 당대회에서 도시와 농촌 일체화 추진에 대해 언급했지만 농촌문제는 중국에서 가장 핵심적문제다. 농촌인구를 줄여 백방으로 농민의 소득을 높이는것은 가장 간단한 문제이자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에로 전환되면서 도시화에 대한 요구는 더욱 높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도시화를 농민의 시민화로 본다면 농민이 시민으로 돼 진정으로 도시인들과 동등한 대우, 권리, 복지 등을 향유해야 하는것만큼 도시와 농촌이 분리에서 융합되고 일체화되여 더는 농민과 도시인간의 구별이 없도록 하는것이다. 맑스주의법칙에서 보면 도시화는 도시와 농촌 일체화의 중요 도경이다. 중국은 농민이 많은데다 아직도 소득이 낮아 도시화를 통해 강한 경제구매력을 형성할수 있다. 일본은 도시와 농촌이 일체화된 성숙된 경제여서 발전공간이 매우 작다면 중국은 성장형경제인만큼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메우는데만 해도 경제성장을 이끌수 있는 공간이 매우 크다.  현재 우리 나라 도시화률은 50% 조금 넘고 호적인구에 따라 계산한다면 35%에 불과해 발달국의 80% 평균수준과 비교할 때 아직도 그 차이는 엄청 크다. 신형도시화는 다음단계 우리 나라 경제발전의 강한 성장점이 될것인데 중국의 도시화률이 60~70%에 도달하려 해도 40만억원의 투자가 소요된다. 향후 도시화가 중국경제에 주는 영향은 지대할것이다. 그럼 현재 중국내 붐이 일고있는 “신성”(新城, 신도시)과는 어떤 구별점이 있는가? 어떤것이 중국실정에 적합한 도시화형태라 보는가? ㅡ현재 국내 여러 도시들에 추진되는 “신성”내막을 들여다보면 도시공간이 부족하여 도시의 외연확장에 급급해하고있는 느낌을 주고있는데 이는 도시화의 목적과 거리가 멀다. “신성”은 도시화의 조성부분이다. 따라서 산업규모화가 있는 기초에서 도시화가 이뤄져야 한다. “신성”처럼 고층빌딩숲만 이루어놓아도 그 안에 산업의 기반이 갖춰지지 않고서는 “신성”은 결국 “공성(空城)”으로 될수밖에 없다. 도시화한다고 하여 작은 도시 건설에 의거해서도 안되고 또 어느 중심도시 위주의 도시화도 적합하지 않다. 내가 보건데 대중소형 도시가 결합된 형태가 중국실정에 맞다. 도시화형태는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수 있다. 하나는 동심원(同心圓)형, 북경이나 서울처럼 도시중심을 둘러싸고 1환, 2환, 3환, 4환, 5환이 형성되는것. 다른 하나는 부채형, 중심도시 주변 여러개의 위성도시가 분포되여있는것(중심도시가 그리 크지 않다), 또 하나는 도시군(群), 도시벨트(帶)형이다. 우리 성에서 추진하고있는 심양을 중심으로 료녕중부 7개 도시의 료녕중부도시군형의 심양경제구가 바로 이 류형에 속한다. 도시속에 마을이 있고 마을속에 도시가 있는 전원도시가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도시화다. 그렇다면 도시화에서 류의할 점은 어떤것인가? ㅡ신형도시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아래 10가지 점을 류의해야 한다. (1) 도시화는 “작은 도시화”(小p焰?가 아니다. (2) 도시화의 “공심화”(空心化)는 금물이다. (3) 도시화는 “전역화”(全域化)해서도 안된다. (4) 도시화에서 “거농화”(去"筮?를 방지해야 한다. (5) 도시화를 “세멘트화” 되는것도 막아야 한다. (6) 도시화는 “몰문화”(沒文化)해서도 안된다. (7) 도시화는 “기능화”에 주의돌려야 한다. (8) 도시화의 최고 경계는 인성화에 있다. (9) 도시화의 가장 적합한 방식은 “집군화”(集群化)이다. (10) 도시화의 지나친 “행정화”도 안된다. 이와 관련 구체적인 내용은 저자의 원문(http://www.qstheory.cn/zl/bkjx/201309/t20130910_269906.htm)을 참조하기 바람.   도시화가 우리에게 주는 기회 도시화로 하여 주변 농촌들이 많이 페쇠되고있다. 특히 우리 민족이 많이 살고있는 마을들도 이 영향권속에 들어가고있는데 도시화는 우리에게도 어떤 기회를 가져다줄것인가?    ㅡ과경민족으로 중국에 이주하여 수전을 개간하면서 농경민족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한테는 도시화는 그야말로 위기이자 커다란 기회라 할수 있다. 우선 도시화과정에 많은 새로운 조선족시민이 탄생되여 조선족사회의 가정구조와 사회상태의 변화를 가져온다.  현재 적잖은 조선족이 도시로 진출하였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도시화에 앞서고있음을 말한다. 시장경제혜택을 본것도 있지만 한국로무가 우리 민족한테는 최대수익을 가져다주어 기타 민족보다 소득수준이 향상돼 강한 외부구매력이 형성되였다. 외국로무에서 번 돈으로 도시의 아빠트를 사고 자녀공부를 시키고있지만 여러방면으로 어려움이 많다. 그것은 비록 도시에 아빠트를 사고 도시에서 살고있지만 시민과 동등한 대우와 복지를 받을수 없기에 아직도 진정한 시민으로 되려면 도시화에 따른 일련의 국가의 지원책이 필요된다. 우리는 어떻게 도시화에 적응해야 하는가? 도시화는 사회가 장기발전과정에서 전형, 업그레이드, 대발전할수 있는 기회다. 전통 농민에서 시민으로 된다는것은 새로운 문명을 향유함을 의미하며 생활방식이 개변되고 삶의 질이 개선됨에 따라 민족자질도 크게 향상된다고 할수 있다. 다른 한 방면 도시화는 원시적인 마을이 축소되고 소실돼 족군(族群)사회가 존속되지 않음을 의미하게 된다. 사유, 사고, 생활방식이 변화되면서 민족성원간 정감교류와 문화전승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새로운 생존방식이 형성돼 과거 마을 위주에서 조직이나 민간단체를 중시하는데로 변화되고 학교의 교육도 집중되면서 교육이 더욱 최적화된다.   이 과정에 아래 몇가지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땅으로 사회보장대우를 바꾸는것”인데 정부에서 강요하는것이 아니기에(농민의 선택을 존중함) 토지는 꼭 지켜야 한다. 농민이든 시민이 되든 토지는 생명줄인것만큼 보유하고있는것만큼 경제적 부가 될수 있다. 둘째는 도시진출에 따른 리농현상이 엄중한데 모든 사람이 도시진출이나 외국로무에 나갈수 없기에 토지를 집중해 가정농장을 꾸리거나 기타 종식업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하여 새로운 농민기업가나 능력있는 신형의 농민이 나올수 있도록 여건을 창조해야 한다. 셋째는 취업문제다. 우리 민족은 천성적으로 “중농경상(重農輕N商)”의 민족이여서인지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왔어도 큰 민족기업가를 배출하지 못하고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 창업분위기가 부족하다는것을 설명한다. 단순로무에 의거해서는 장기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창업을 통해 취업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창업하려면 무엇보다 창조적인 인재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먹고 입고 노는 소비민족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하다. 쓰레기를 줏더라도 잘사는것이 더 영광스럽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조선족사회에서 짙은 창업분위기를 형성하고 더 많은 민족기업인이 나오도록 여건을 창조해야 할것이다.   한마디로 도시화에서 수동적으로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주동을 쥐고 시대발전에 적극적으로 합류해야 한다. 국가정책과 민족정책을 충분히 리용하여 민족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족의 꿈” 나아가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데 일조해야 한다.  오지훈기자
원칙과 포용의 자대로 Author:관리자 Date:2/7/2013   ㅡ주심양한국총령사관 김영근령사 인터뷰   주심양한국총령사관(아래 심양공관으로 략칭)은 한국 해외공관 비자업무의 80%를 담당하는 공관으로 한국 법무부의 동포비자정책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곳이다. 비자업무가 초부하인데다 또한 동포들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는 공관이다. “심양근무기간 정말 밤낮을 모르고 일한것 같다. 욕도 가장 많이 먹었고 지어 신변위협까지 받았다. 하지만 동포들이 불리익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해왔고 그들의 정상 한국방문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지난 2009년 8월말부터 금년 2월중순까지 심양에서 근무한 김영근령사의 페부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그는 심양공관 사증령사팀장으로 부임된후 심양공관의 서비스제도개선에 앞장에 서서 중국지역 공관 선참으로 개별신청 전면 허용, 지정대행사 관리감독, 령사면담 등 획기적인 조치를 실시하여 사증신청 편의제공은 물론 불만사항 해소와 민원서비스제도 개선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전 기자는 근무기간을 마치고 곧 귀국하는 김영근령사를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기자: 그동안 동포민원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심양근무기간 가장 어려웠던 일과 아쉽다고 생각하는 점이라면요?   김령사: 저도 심양에 오기전에 심양공관이 가장 힘들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힘들줄 몰랐습니다. 일은 죽도록 하면서 왜 욕을 먹는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사증령사들이 외부와 전혀 접촉을 하지 않고있었기에 민원인들의 불만사항을 잘 모른데다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었던것이였어요. 당시 공관 팩스와 대표메일로 민원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마침 총령사님이 사증개선을 적극 주문하셔서 저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였습이다.   물론 아직도 동포들의 기대와 요구에 완전 부응하기 힘들고 미흡한 점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불허률을 더 떨어뜨리고싶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일정수준에서 머물고있습니다. 여기에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기자: 김령사님이 팀장을 맡고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해온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어떤 조치들은 심양공관이 아마 한국 해외공관 최초여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좌초도 따랐으리라 봅니다.   김령사: 예. 그래서 가장 민원이 많은 일부터 하나하나 풀어나갔습니다. 먼저 접수창구 직원들이 사증서류를 잘 접수하지 않는다 해서 무조건 사증서류를 받도록 교육하고 감독하였습니다. 접수창구에서 서류가 부족하다고 접수를 거부하는건 잘못된 관행이지요. 처음엔 잘 따라주지 않았는데 발견되면 혼을 내기도 하면서 루차 강조한데서 3~4개월 지나니 거의 근절되였습니다.   두번째로 사증신청을 왜 꼭 지정려행사를 통해야 하는가, 대행사와 무슨 거래가 있지 않은가 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대행사를 통해서 신청하던것을 점차 사증별 개별신청을 실시하여 2010년 4월부로 개별신청을 전면 허용하였습니다. 동시에 멀리에서 찾아오는 동포들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사증우편발송까지 허용하도록 했습니다.   세번째는 지정대행사를 포함해 려행사들의 횡포를 호소해왔는데 지정대행사들을 엄격히 관리하여 브로커와 련계를 차단하였습니다. 2010년 3월말에 지정대행사 관리감독 관련 제도를 내와 지정대행사들을 강력 단속하였고 두달후 이 제도를 위배한 세개 큰 려행사의 자격을 취소하였습니다.   네번째로 사증불허에 대한 민원이 컸습니다. 공관홈페이지에 사증거부원인을 간단하게 기재하던것을 될수 있는대로 구체적으로 기재할것을 요구했고 2011년 8월부터 아예 사증령사면담제를 실시하여 확실하게 구제할 대상은 구제해주었습니다. 례를 들면 동명인이나 특별원인으로 입국금지규제조치를 받은 대상들은 면담을 통하지 않으면 영원히 한국에 들어갈수 없었지요. 이런 구제자만 20~30명 됩니다. 령사면담제를 실시해서 매주 목요일을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 견지해오고있습니다. 처음엔 하루 100~150명이 몰려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밤 11시까지 찾아온 사람은 다 면담했습니다. 예약제나 인원제한조치 제의도 들어왔지만 민원을 호소하는 동포 다수가 인터넷을 잘 몰라 예약제를 하면 자칫 브로커한테 돈을 뜯길 소지가 있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특별사유를 제외하고 불허 2개월내 면담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근무시간내 면담이 거의 종료되고있습니다. 령사면담제로 하여 사증령사들과 직원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다섯번째는 본인이 직접 당관에 와서 사증을 신청하도록 하였습니다. 2011년 12월부터 예약에 따른 무작위추첨제로 바뀌면서 브로커들이 개입할 공간이 커졌지요. 자기를 통하면 얼마든지 비자를 받을수 있다고 현혹하는 브로커들의 사기사례가 근절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량한 동포들이 불리익을 당하지 않도록 꺼내든 카드가 바로 추첨당첨자 본인이 직접 당관을 방문하여 사증을 신청하는 제도였습니다. 보통 대행비까지 포함해 800원이면 가능한것을 2천원에서 2~3만원까지 브로커한테 돈을 뜯길 위험이 컸습니다. 수개월동안 이 제도 실시로 브로커개입이 많이 차단되고 또 추운 겨울에 멀리서 와서 2~3일 체류하면서 사증을 신청해야 할 동포들의 고충을 감안하여 2012년 12월부터 대행사를 통해 신청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기자: 그런 조치들을 강구하게 된 특별원인이 있었습니까? 동포들에게 부탁하고싶은 말이 있다면요?   김령사: 단 한사람의 민원이라도 해결해주는 차원에서 저희 공관은 민원인이 피해받지 않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브로커들의 악성제보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면서 동포들을 위한 포용조치를 강구할수 있었던것은 심양공관 관할지역이 동북3성으로 조선족밀집거주지역이라는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심양공관의 내부구조의 틀을 정비한다음 차츰 제도개선을 추진하였는데 그 수혜자가 바로 90%가 우리 동포라는데 있었습니다.   한가지 부탁이라면 하루빨리 한국에 가겠다고 가짜서류를 만드는데 절대 가짜서류를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불허률을 더 떨어뜨릴수 있습니다. 불허률을 2009년의 14%에서 2010년에 8%로 떨어뜨려졌지만 지난해에도 이 수준에 머물고있는 원인중 하나가 바로 가짜서류때문입니다. 담당령사들도 서류심사시 고심하겠지만 가짜서류가 발견되면 본인에 대한 입국규제조치는 물론 또 다른 선량한 사람들한테도 피해가 가서 비자불허률이 늘어난다는것을 념두에 두고 꼭 자제해주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한국의 동포정책은 문호를 계속 확대하고 전향적정책은 변하지 않을것입니다. 실무과정에 어떤 비자정책이 일관되지 못하고 정비돼있지 못한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문취업제도로 큰 틀을 마련하고 재외동포사증제도를 계속 확대해나간다면 동포들의 한국방문은 더 쉬워질수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한국내 합법적인 체류와 취업을 하여 불리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아직 한국을 방문 못한 동포들도 내심하게 기다린다면 정책완화로 하여 수년사이 한국방문이 이뤄지리라 봅니다.  기자: 귀국후에도 계속해서 중국동포들의 고국방문과 한국취업에 많은 편의정책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해주었으면 합니다.              오지훈기자
중한 량국을 잇는 든든한 다리ㅡ대한항공                                  Date:8/24/2012 ㅡ대한항공 심양지점장 홍정기씨를 찾아서   중한수교 20주년을 맞는 올해는 대한항공이 창립 43주년을 맞아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여 세계 최고 명품항공사로 도약하는 한해이기도 하다. 일전 기자는 대한항공 심양로선 취항 18주년을 맞는 대한항공 심양지점 홍정기지점장을 인터뷰하였다. 심양로선 “황금로선”으로 일컫는 리유   1994년 12월에 첫 취항을 한 대한항공 심양로선은 18년 동안 대한항공의 거족적인 발전에 힘입어 신속한 성장을 이뤄냈다.   한창호 초대지점장에서 현재 7대 지점장으로 근무중인 홍정기씨를 거치면서 대한항공 심양지점은 보잉 747기 등 대형항공기를 투입하여 매일 2편씩 심양-인천 로선을 운항하는 동북지역 최대 외국항공사로 자래매김하고있다.   시정부광장 북쪽 탁월(卓越)빌딩 28층에 위치한 대한항공 심양지점에는 지점장 및 현지직원들을 포함해 모두 23명이 근무하고있다. 시내 여러 지점들에서는 항공권 예약, 발매, 대리점판매 관리업무를 담당하고있으며 심양도선공항내에 위치한 공항지점에서는 공항 조업사들과 함께 탑승수속 및 출입국서비스에 만전을 기하고있다.    홍정기지점장은 심양로선이 중국 23개 도시 로선중 여전히 “황금로선”의 매력을 발산하고있다고 하였다. “북경과 상해 등 연해도시가 이미 개발된 시장이라면 동북시장은 한국과 지리, 력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마지막으로 남은 노란자위의 시장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동북진흥정책에 힘입어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지역입니다.” 따라서 첫째, 초기의 한국인과 조선족 위주에서 현재는 한족들이 현저하게 증가되는 추세, 둘째, 심양이 동북지역에서 해외로 나가는 관문로선, 셋째, 비행기투자, 객실서비스강화 등을 통한 부단한 서비스경쟁력강화 등을 그 리유로 꼽았다.   대한항공의 차별화된   서비스     20년전만해도 싱가폴이나 향항 항공사는 한국 항공사들의 선망과 배움의 대상이였지만 20년이 지난 오늘 오히려 외국항공사들에서 대한항공사에 배우러 찾아오고있다. 20년간 항공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대한항공은 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서비스질을 향상시켜 고객들의 찬사를 받고있다.   Service Excellence(최상의 운영체제), Operational Excellence(고객감동과 가치창출), Innovative Excellence(변화지향적 기업문화)라는 3가지 운영목표아래 대한항공은 차세대 항공기 도입을 비롯해 첨단 신기재 및 신개념 좌석 장착, 개인용모니터 설치 등으로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하고있으며 곤드레나물밥, 저칼로리식단의 웰빙 기내식 개발 등 다양한 고객서비스를 만들어냈다.   또한 인천공항내 “중국전용카운터”(China Express)를 운영중이며 중국로선 및 미주, 유럽, 대양주 지역 등 중국려행객이 많은 로선항공편에 중국인승무원이 탑승하여 고객을 모시는 등 중국인승객의 편의를 위한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있다.   대한항공은 개인성향이나 국적, 문화가 다른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육훈련과 서비스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있다. 또한 작년부터 A380 초대형 항공기를 도입하면서 2층 전 좌석에 비즈니스석을 마련하고 기내면세품 전시공간, 바라운지를 설치하는 등 독창적인 설계로 유수기관으로부터 그 노력을 인정받은바 있다.     대한항공은 2019년까지 초일류 항공사로 도약하기 위한 “2019 경영목표”와 슬로건 “새로운 비상”(Beyond 40years of Excellence)을 발표하고 명품좌석을 비롯한 고품격서비스, 최첨단 항공기 도입, 글로벌 신시장 개척 등을 토대로 2019년에는 매출액 25조원(한화) 달성 및 국제항공려객 수송순위 10위권내에 진입하여 글로벌 초일류항공사가 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작년 6월부터 “하늘의 특급호텔”로 불리는 A380 항공기 5대를 순차적으로 도입하여 현재 향항, 도꾜, LA,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뉴욕 로선에 운영중이며 또한 현재 146대의 항공기 운영대수를 2019년까지 180대 이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올해 2월에는 기존 화물기 대비 수송능력이 월등히 뛰여나면서도 연료소모량이 적은 “그린화물기” B747-8F 및 B777F 차세대 화물기를 새로 도입하였다.   아울러 글로벌 네트워크도 더욱 확장하고있다. 현재 41개국 121개 도시를 련결하는 로선을 2019년까지 아프리카, 남미, 북유럽 등을 포함 전 세계 140개 도시로 넓혀갈 계획이다. 중국에서 대한항공의 기여    대한항공은 지난 2007년부터 내몽골 쿠부치사막에 “대한항공록색생태원”을 조성하고있다. 또 작년 9월까지 매년 시행한 식림사업으로 317만 2,200m€?면적에 약 100만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숲을 가꾸었다.   특히 중국지역의 빈곤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애심(H€心)계획”프로젝트라는 대한항공 특유의 사회공헌활동을 진행하고있다. 2008년 북경 빈곤학교 도서기증행사를 시작으로 북경장애우(殘疾人)초청 제주캠프, 그리고 대지진 피해지역 어린이를 제주도에 초청하여 사기진작캠프 등을 실시하였다. 작년에는 북경농민공자녀학교에 컴퓨터를 기증하고 의료봉사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도 진행했다.   이런 노력들로 인해 대한항공은 지난해 6월 중국 려행전문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가 실시한 “2011골드리스어워드(상)”에서 “최고의 아시아항공사”로 선정되는 등 중국내 10여개 기관으로부터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올해 1월 유명 려행월간지인 《트래블 플러스 레저》의 중국판인 위에뤼(私家地理)로부터 “중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항공사”에 3년 련속 선정되였다. 4월에는 중국 미디어관광련맹 선정 “2011년도 최고의 항공사” 반렬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물 마실 때 근본을 잊지 말아야   중한수교 20주년을 맞는 소감에 대해 홍정기씨는 “물 마실 때 근본을 잊지 말라” 는 한자성구로 일괄,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조선족과 계속 서로 감사하고 서로 신뢰하면서 협력하는 상생의 장을 열어가는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연세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1992년에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북경, 천진에서 근무하다 2009년부터 심양지점장으로 취임한 그는 일찍 량친과 누이가 모두 항공사에 취직한적 있어 가히 “항공사집안”이라며 그래서인지 항공사가 개인적으로 친근하고 적성에 맞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중국에 대한 오해가 큽니다. 피부색갈이 같은데다 유교, 삼국지, 서유기 등 한자문화권으로 하여 쉽게 접촉할수 있다는데서 비롯되겠지요. 그러나 행동과 사고방식이 크게 다릅니다. 책에서 읽은 중국과 생활속의 중국은 완전히 틀립니다. 한국기준(사고방식)으로 중국을 생각할게 아니라 중국생활에 적응하는것이 필요합니다.” 그의 중국에 대한 일가견이다.   홍정기씨는 심양이 인정과 풍유가 있는 도시로서 우정과 의리를 충분히 나눌수 있는 곳이라고 심양인상을 폈다. 재심양한국인들을 봐도 90년대 초반 심양에 진출하여 경제기반을 닦은 분들은 한인사회에 이뤄놓은 성과도 대단하다며 존경할만 하다고. 그러나 계속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빠르게 변하는 중국생활에 적응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의 몫이라고 하였다.    “지금이 발전을 위한 중요시기입니다. 수교20주년을 량국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 중한간 5천년의 교류력사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로 하였으면 합니다.” 홍정기지점장이 수교20주년에 거는 기대였다.                          오지훈기자
2013년 상반기 기술교육 및 하반기 방문취업 사전신청 접수                                    Date:11/20/2012 기술교육 및 방문취업 대상자 총 5만 5천명   본사소식 주심양한국총령사관은 공관홈페이지를 통해 11월 19일(월) 12시부터 12월 9일(일) 12시까지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2013년 상반기 기술교육 및 하반기 방문취업 대상자 선발을 위한 사전신청을 인원제한없이 접수한다”고 공지했다.   따라서 신청희망자중 방문취업자는 2012년 12월 14일 기준 만 25세 이상(1987년 12월 14일 출생), 기술교육자는 2012년 12월 14일 기준 만 25세∼만 48세(1963년 12월 15일∼1987년 12월 14일 출생)가 신청이 가능하다. 그러나 방문취업(H-2) 체류자격 소지자 및 방문취업 재입국 대기자는 신청대상에 포함안되며 불법체류중인 사람은 자진출국후 신청이 가능하나 입국규제기간중에는 신청이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번처럼 13~16회, 18~19회 한국어시험합격자도 신청해야 추첨대상에 포함된다.    이번 선발인원은 2013년 상반기 기술교육대상자 2만 5천명에 2013년 하반기 방문취업대상자 3만명으로 총 5만 5천명이다. 이 명액은 한국내 중국동포방취제 체류자 총 코타수 30만명을 기준으로 하여 최근에 만기출국자수 등을 감안하여 확정, 지난번보다 1만 5천명이 더 늘어난것으로 풀이된다.    신청자는 먼저 하이코리아에서 회원가입후 신청하되 기술교육, 방문취업, 기술교육과 방문취업 이 세가지중 한가지를 선택하여 신청하면 된다.    전산추첨은 12월 14일(금)에 진행예정이며 그 당첨여부는 하이코리아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 사증발급은 공개 전산추첨시 결정된 개인별 “사증발급 신청시기”에 맞추어 재외공관에 방문취업(H-2) 복수사증을 신청, 래년 7월부터 6개월간 순차적으로 사증을 발급할 예정이다. 기술교육대상 선발자 역시 공개 전산추첨시 결정된 개인별 “사증발급 신청시기”에 맞추어 재외공관에 단기방문사증(C-3, 체류기간 90일)을 신청, 입국후 빠른 시일내 기술교육을 등록하고 6주 기술교육과정을 마쳐야 방문취업(H-2)체류자격 변경이 가능하다.   그리고 신청시 주의사항에 있어서 기존 신청자는 려권번호를 수정 및 입력할 필요가 없으며 신규로 가입 신청하는자는 려권번호를 반드시 입력하여야 하며 려권번호 등 각 사항별 입력사항이 허위거나 미입력시 추첨대상자명단에서 제외된다.     한편 담당령사는 공지한 신청방법에 따라 본인이나 가족 등 지인의 도움으로 신청이 가능하기에 거액을 주고 신청하지 말것을 당부하면서 “전산추첨이나 기술교육을 보장해준다”는 말은 모두 허위사실이므로 추첨을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거나 제공하는 등의 사기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고 했다.                               오지훈기자  
아시아나항공 심양지점 심양ㅡ부산 로선을 리용한 상품개발에 주력  Date:12/25/2012    아시아나항공(대표 윤영두)이 심양에 지점을 개설한지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때는 아시아나항공이 심양과 부산간 항공로선 취항을 위한것이였다.  심양ㅡ인천 이 황금로선 취항은 아시아나항공의 숙원사업이였으나 중한 량국간 항공로선협의에 의해 취항시기만 기다리고있는 실정이다. 오랜기간 남방항공과 대한항공이 심양ㅡ인천 로선을 독점하다싶이 해 티켓값이 대련 등 타 도시에 비해 비싸다고 고객들도 상당한 불편을 호소하고있다.   그러다보니 많은 심양사람들도 아시아나항공에 대해 잘 모른다. 기껏해야 한국의 량대 항공사라는것뿐. 아시아나항공은 4년 련속 세계 전문 공인기관으로부터 최고의 항공사로 선정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수준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항공사이다. 기네식은 최상은 물론 외투보관서비스, 해피맘서비스(유아 동반 고객 편의 제공, 아시아나항공의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있어 리용객들의 호평을 받고있다. 최근에 중국려행전문잡지로부터 “중국내 업계 최고 기내 서비스항공사”상을 수상하였다.    중국로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있는 아시아나항공은 북경, 상해, 천진, 중경 등 직할시외 심양, 성도, 청도, 대련, 할빈, 장춘 등 중국 22개 도시에 31개 로선을 운영하고있는 중국지역 최다 운항항공사로 되였다. 또한 중국인관광객 전용기인 제주쾌선 운용과 한국의 첨단 IT 산업을 체험할수 있는 IT 투어 등 중국과 관련된 다양한 마케팅활동과 려행상품을 제공하고있다. 부단히 확충되고있는 중국업무에 걸맞게 중국공익사업도 전개하고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중국지역을 순회하며 “1지점당 1교행사”를 추진하여 한개 학교를 선택하여 자매결연을 하고 전산시설과 교육용기자재 등을 기증하고있으며 아시아나그룹과 함께 중국지역을 돌며 한국어말하기대회도 개최하고있다.   총통빌딩에 위치한 아시아나항공 심양지점은 지난 2002년 6월 18일에 심양ㅡ부산 첫 운항을 시작하면서 개설, 현재 지점장을 포함하여 직원이 4명이다. 동계 들어 심양ㅡ부산 로선을 화/토요일 주 2회 (하계에는 주 3회: 화/목/토) 운항하고있으며 최근 부산ㅡ싸이판 로선을 개척해 고객들의 인기를 끌고있다. 금년 5월에 심양지점장으로 파견된 김진지점장은 “늘 겸허한 자세로 더욱 고품격서비스를 유지하고 손님들에게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한다”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작년초 북경에 어학연수차 6개월 지낸적이 있다가 금년에 심양에 발령받아 중국 생활이나 문화에 별로 낯설지 않다며 “명실상부한 G2에 자리매김하고있는 중국은 그야말로 꿈틀거리는 거대한 룡이다. 심양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거리 곳곳에 펼쳐진 공사현장을 보며 심양의 활기찬 기운을 감지했다. 특히 조선족이 많고 서탑에 한식점이 많아 생활하는데 어느 도시보다 편한것 같다. 심양은 동북3성의 중심도시로서 또 청나라 첫 수도의 력사가 깃들어있는 큰 도시임을 실감했다”고 심양인상을 폈다.   그는 심양ㅡ부산€ㅡ싸이판 로선에 이어 이번에 개통된 할빈ㅡ심양€ㅡ대련 고속철을 리용한 동남아나 미주를 련결하는 로선 개발에도 주력하고있다고 소개하였다. 또한 부산관광공사 출범을 앞두고 부산관광공사와 다채로운 프로모션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김진지점장은 아직 아시아나항공의 심양ㅡ인천 로선 취항이 되지 않아 리용객이 많지 않지만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있다며 자신의 임기내 이 로선에 취항할수 있지 않겠냐며 락관하였다.                  오지훈기자  
그는 우리 협회의 골간이였다”                           1/25/2013 대련리공대 김일화교수를 추모하여   “김일화교수는 우리 협회의 골간으로 협회 일에 누구보다 발벗고 나섰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것은 우리 협회의 큰 손실이다.” 대련리공대 환경학원 김일화(金一和, 1959년생)교수의 갑작스런 사망을 두고 성민족과학보급협회 김희성리사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 1월 5일, 대련리공대에 갑자기 국가프로젝트상담차 복주에 출장갔던 김일화교수가 작고하였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일순간 망연자실했던 그의 가족과 학원 관계자들, 그리고 생전친우들은 복주에 가서 5일장을 치렀다. 평소부터 가깝게 지냈고 그를 존중해왔던 이 대학교 재료학원 동성룡교수는 빠른 시간내 협회와 주변사람들에게 이 비보를 전하고 제집일처럼 후사처리를 도와나섰다. 1월 12일 대련리공과대 환경학원에서는 김일화교수의 추모회를 가졌다. 이날  대련외 심양, 할빈 등 전국 각지에서 그의 생전친우 100여명이 모여 그를 추모하였다. 이 대학교 화공및환경생명학부 당위서기 전섭씨는 친히 추모회를 사회하였다. 그는 "김일화교수는 조선족의 우수한 과학자이며 우리 대학교의 업무골간이였다"라고 평가하였다. 김희성리사장은 심양에서 1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이날 대련에 가서 추모식에 참가하였다. 추모식에 전국 여러 지역의 환경연구분야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등 나라의 환경연구단체에서도 조전과 화환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의 갑작스런 사망을 두고 협회성원들의 비통한 심정과 아쉬움은 더 했다. 지난해만 세번이나 김교수를 만났고 20일전에 만나 이야기하던것이 생생하다는 협회 판공실주임 리월련은 아직도 현실로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탈하면서도 대바르고 마음이 후더운 김교수는 책임성이 강하고 조직력이 강하였다"고 회고하는 그는 지난해 천진에서 있은 전국조선족과학자협회회의에도 같이 참가했고 특히 12월 15일 전국과학기술사업자 "회원의 날"의 날을 맞아 대련에서 있은 당18차대회정신학습교류회는 김교수가 전적으로 조직하였다고 했다.    대련리공대 환경학원 홈페이지는 김교수의 작고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생평을 소개했다. 심양시 금가만촌태생인 김일화교수는 1983년 할빈의대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거쳤으며 1986년~2006년 심양의대에서 사업하였다. 1998년 일본 추전대학 의학박사를 취득하고 귀국한 뒤 교수로 근무하다가 2006년 4월 대련리공과대 환경학원에 전근하여 현재까지 이 학원의 교수, 박사생도사로 사업해왔다. 그는 중국기상학회 대기화학위원회 위원, 일본독리학회 해외평의원, 중국조선족과학기술사업자협회 상무리사, 료녕성민족과학보급협회 부리사장을 겸한외 국외의학(위생학분책), 중화예방의학잡지, 위생연구, 생태독리학보 등 학술간행물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다. 1992년~2005년 일본체류기간 그는 일본 추전대학 의학부 객원교수, 일본삿보로의대 특별연구원, 일본국립수오(水俉)병종합연구쎈터 객원연구원 등 직을 맡았었다.   김일화교수는 대련리공대 환경학원에서 근무하면서 환경독리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방향을 개척하였다. 그의 이 연구는 지속성 유기불소오염물의 환경행위, 외연성 화합물의 안전성평가, 생태분자독리학, 인군(人群)건강위험평가 등 내용이 망라된다. 그는 또 국가자연과학기금중점프로젝트, 국가물관련 자테마연구, 국가고기술발전연구계획프로젝트, 과기부와 일본국제협력기구의 합작프로젝트 등을 포함한 약 20건 프로젝트의 연구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국내외 높은 수준급 간행물들에 100여편의 론문을 발표, 그중 10편이 환경과학기술분야 국제권위간행물과 국제독리과학권위간행물에 발표되였다.   김교수는 이미 박사생 10명, 석사생 14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들 모두 국내외 중요부서에서 골간역할을 하고있다. 환경학원에서는 “김일화교수는 학원, 학부, 학교의 발전과 환경학원, 환경학과 및 공업생태와 환경공정교육부중점실험실의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김일화교수의 별세로 하여 우리는 훌륭한 선생과 좋은 친구를 잃었고 학생들은 자애로운 스승을 잃었으며 학원은 과기선봉을 잃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오지훈기자  
글자로 사회와 소통하는 학자   10/12/2012 한국 원광대 여태명교수를 만나 10월 9일 “한글의 날”을 맞아 기자는 로신미술학원 연구교수로 중국에 체류중인 한국 원광대 여태명교수(1955)를 만났다. 여교수는 한국에서 한글서예의 독특한 특성을 일찍부터 간파, 필묵의 재해석과 새로운 실험을 통해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우리 민족전통문화예술을 사회와 소통할수 있게 만든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이미 15여년전부터 한국적 캘리그라피의 문화, 상업적인 무한한 가치를 인지하고 여태명문자조형연구소(http://www.ytmart.net)를 통한 전통문자연구와 한글상품세계화에 앞장서 시대와 소통하는 작가로서 대외적으로 신망받고있다. 중한수교전인 1990년부터 중국을 드나들기 시작하여 방학기간마다 거의 중국을 찾는다는 여교수는 중국에 대한 정이 남달랐고 특히 중국내 소수민족문자를 포함하여 중국에서 문자의 “보물”을 찾아 연구범위를 넓혀가는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있다. “1999년에 로신미술학원 객원교수로 오신걸로 알고있는데 이번에 연구교수로 오신 목적은요?”라고 묻자 여교수는 소탈하게 웃으며 “만리장성 사진과 탁본 출간, 전용작품지 제작과 함께 중국한자폰트 개발을 추진하고싶다”고 했다. 기자가 좀 의아해하자 그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만리장성 사진과 탁본 출간”은 사실 그가 방학간마다 중국을 찾은 리유중 하나다. 만리장성을 쌓은 돌들에 씌여진 락서가 백년전에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고있고 오랜 세월속에서 희미하게 또는 또렷하게 그 흔적들을 남기고있는데 이것이 자신의 민체연구분야 “보물”이라는것. 일찍 조상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쓴 글자들을 전문 연구하여 그것을 나름대로 체계를 형성해 한국에서 최초로 “민체”로 명명하고 그것을 현대 정서나 미감에 맞게 재해석해서 개발, 자기의 호를 딴 “효봉(호)축제체”, “효봉 개똥이체” 등을 개발했고 또 컴퓨터용 한글폰트 6종을 CD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미 만리장성 등 중국 주요 풍경구에 남아있는 락서를 찍은 사진만 1만여장, 그것을 탁본으로 해서 책을 출간한다고 하였다. 여교수는 한국에서 민체 개발자로 높은 명망을 갖고있다. 부단히 나만의 개성을 추구해온 그는 또 이번에 중국에 와서 서예, 한국화 등 작품용 개인전지를 제작할것이라고 하였다. 또하나의 목적이 중국 간체자 4,888자와 영문, 아라비아수자, 특수기호를 한세트로 해서 여러가지 서체의 폰트를 개발하는것. 현재 여태명교수는 전주, 서울, 북경, 심양, 빠리, 베를린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미 15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그의 서예작품들은 한국국립현대미술관, 중국미술관, 독일교통력사박물관, 칠레대사관 외무성, 로씨야 모쓰크바 동양미술관, 모쓰크바대학, L.A UCLA대학, 하와이대학교, 한국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한국국립전주박물관, 중국로신미술학원 미술관 등 여러곳에 소장되고있다. 초대 한국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 회장, 한국민족서예인협회 회장인 여태명교수는 서예작품이 단순한 소장에 그치는데서 서예를 생활화, 대중화하여 현재는 간판, 현판, 책표지, 영화드라마(“1박2일” 등의 제목글씨) 등 분야에로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캘리그래피란 손으로 쓴 글씨를 디자인한것으로 글자에 표정을 담아 부동한 언어환경에 따라 부동한 정서를 표달하는것입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단어 “사랑”과 “사기치다”에서의 “사”자는 컴퓨터에서 모두 똑같지만 사실 언어환경에서 볼 때 사랑의 랑만을 보여주는 “사”자와 기편을 보여주는 “사”는 엄연 다른것이다. 이렇게 한글에서 같은 글자이지만 부동한 언어환경에 따라 부동한 정서를 잘 나타내는 한글폰트를 개발하고있다고 했다.  그는 원광대 서예과교수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그중 연변출신의 서영근씨(현재 한국 서경대 원어민 교수로 근무)는 그의 “1호박사”이다. 여태명교수는 원광대는 한국 최초 서예과를 개설하였고 캘리그래피의 사회응용범위가 넓어지면서 뜻이 있는 조선족젊은이들이 원광대에 류학하여 캘리그래피를 전공하면 그 취직범위가 더욱 넓어질수 있다고 하였다.   사진은 중국제자와 함께 포즈를 취한 여태명교수.    오지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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