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http://www.zoglo.net/blog/wuzhixun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즐겨읽는 글

전체 [ 40 ]

20    심양국제학교는 글로벌리더를 육성하는 곳 댓글:  조회:2143  추천:0  2012-07-23
심양국제학교는 글로벌리더를 육성하는 곳                                                           6/15/2012 심양한국국제학교 고영규교장의 교육마인드   “가슴은 한국에, 시야는 세계로” 슬로건을 내건 심양한국국제학교가 개교한지도 벌써 5년이 넘었다. 2003년부터 재심양한국인들은 숙원사업으로 심양한국국제학교를 정력적으로 추진, 2006년 3월 10일, 심양시인민정부의 현 학교부지(2,285평방메터) 무상임대 제공으로 드디여 개교하였다. 김성웅 재심양한국인회장의 초대 교장직무대리에서 송용석씨가 2대 교장직무대리로 취임하였으며 2011년 2월 20일, 고영규씨(1962)가 한국교과부(교육과학기술부)의 파견으로 정식 교장에 부임하였다.   학생 교사 학부모는 삼위일체   교장실은 유리벽으로 되여 교무실복도로 다니는 사람들이 훤히 들여다볼수 있고 또 수시로 드나들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였다. “이 학교의 실제주인공은 학부모와 학생들이다. 학부모님들이 만족하고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며 행복해하는 학교를 만들고싶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학부모들에게 신뢰를 준다면 우리 학교는 분명히 더욱 발전할거라고 생각한다.” 고교장은 이런 마인드를 갖고 학교사업에 몰입하면서 심양한국국제학교 전반변화의 앞장에 나섰다.   1985년 서울교육대학 졸업후 초등교사에서 서울시교육청 최년소 장학사, 교과부 연구기관에서 근무하였고 또 길림사범대학과 북경언어대학에서 각각 6개월씩 중국어어학연수를 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중국에 오게 되였다고 했다. “한국정부에서 처음으로 교장자격증을 가진 저를 파견한것은 심양한국국제학교의 비중이나 가치를 크게 평가했기때문이다.” 그만치 그의 짐은 무거웠다.   교육은 교감이 이뤄져야 한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학생, 교사, 학부모가 삼위일체가 되여야 서로 신뢰하는 가운데 학교교육이 바르게 이뤄질수 있다는것. 그는 “교원들한테 항상 학부모들에게 친절하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열심히 가르쳐라. 그것만 잘해주면 최선으로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모토로 교직원평가제를 내와 교사, 학부모, 학생지간 자유로운 조화관계를 만들어나갔다.   “먼저 본을 보이지 않고 타인에게 지시하는것은 효과가 제한적이다. 최대한 남에게 본을 보이라.” 그는 항상 교내에서 “사랑합니다”, “수고합니다.”, “감사합니다.” 세마디를 강조하고 솔선수범하였으며 좋은 책이 있으면 독서하고나서 권유하고 선물하기도 하였다. 유초중고(유치원, 소학교 초중, 고중) 참새처럼 작지만 오장륙부가 구전한지라 그는 매일 메모를 하고 생각을 하면서 글로벌인재 육성을 위해 내실있는 교육시스템을 구축해나갔다. 해외(중국, 필리핀)학교와의 자매결연을 통해 학생간 교류활동을 활성화하였고 조선족소학교와의 교류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미 혼남신구조선족학교, 화신조선족소학교, 그리고 부신홍모자소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여러가지 행사를 추진중이란다. 또 수준별 영어도서읽기지도를 통한 학생들의 영어독해력을 높이였고 중국현지에 맞는 학교교육과정을 운영하는데 모를 박았다. 동아리활동, 학생인성상담교육, 예체능교육, 독서지도 등 창의, 인성 교육활동을 활성화하였다. 이밖에 학생스트레스해소를 위한 다양한 시설물도 설치하였다. 매 학급의 학생들의 벽보란을 보면 학생들의 취미, 특기, 지향을 한눈에 엿볼수 있는데 이를 통해 교원들은 개인별 맞춤식교육을 지도, 강화해나가고있다.    학교 도서실에만 7천여권의 책이 수장되여있는데 모두 2000년 이후의 도서로 바꾸었다.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사고방식을 접수하려면 새로운 도서를 많이 읽어야 한다는것이다. 이 학교 도서실은 교사나 학생들이 많이 리용하는 곳으로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는 공간으로 되고있다. 현재 학교에는 학생이 약 190명, 교사는 한국인 32명, 중국인(조선족포함) 21명, 영국, 카나다 등 4명으로 구성되였다. 이미 고등학교(고중)의 10명 졸업생을 배출, 모두 한국의 여러 대학에 진학했다.   긍정적사고 글로벌리더 육성의 핵심   고교장은 글로벌리더육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중국에 살았던 아이들이 장래 커서 중국을 친구의 나라로 기억하고 상호 윈-윈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교육하는것이 국제학교의 역할이고 참뜻이다. 다음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 이런 유산을 남겨주는것이 교육이다. 중국에 왔으면 중국에서 배울수 있는것을 찾아 서로 공유해야지 자꾸 한국과 비교하여 부족한것을 끄집어낸다면 하등의 가치가 없다.” 이를 위해 중국내 타 학교간 자매결연을 통해 서로 선진시설이나 도서자원, 학습방법, 상호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활발한 교류를 추진해나갈것이라고. 만약 신축학교가 부임기간내 건축되면 영어나 중국어 도서실을 별도로 설치하여 도서관을 “쎈터”중 “쎈터”로 만남, 정보교환, 소통의 장으로 만들어나갈것이라고 했다.   고교장은 올해는 중한수교 20주년을 맞는 해로 “아이가 태여나 20살이 되면 어른이 되여 성숙됨을 인정하고 성인으로서의 책임있는 행동을 기대하는것만큼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했다. “학교차원에서 한중 량 학교간 자매결연 촉진, 학생 및 교사들의 우호방문 기회 확대, 언어연수교류 등 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여야 하며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 학생들과 교육자들이 상대국가에 대해 보다 더 깊이 리해하고 가까와질수록 미래사회에서 한국과 중국은 보다 더 친밀한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하게 될것이다.”   현재 안해는 서울에서 초등교사로 근무하고 아이 둘은 미국에서 류학생활을 하고있어 별로 큰 부담이 없다며 오로지 국제학교 기틀을 세우는데 전념하고있는 고교장은 아침일찍 출근하고 저녁늦게 퇴근하면서 교원들을 독려하고 학교의 부단한 변화들을 시도하고있다. “인생에서 중요한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성취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보람이다. 나만을 위한데는 성취지만 남을 위한데는 보람이다. 소요보다 나눔이 더 중요하다.” 이런 신조를 갖고있는 고영규교장은 유초중고 중임을 맡을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를 가져 자신의 교육방향을 직접 실천할수 있어 다행스럽다며 3년 동안 몰입하여 감사하고 보람있는 마음으로 심양생활을 치렬하고 감동적으로 살고싶다고 토로했다.   오지훈기자  
19    더많은 조선족가수들을 발굴하고싶다 댓글:  조회:2175  추천:0  2012-04-20
 더많은 조선족가수들을 발굴하고싶다    2009.04 “북경아가씨”의  작곡가 정원수씨   일전 기자는 심양에서 조선족가수 김월녀를 한국가수계에 성공적으로 데뷰시킨 한국작곡가 정원수씨(1960)를 만났다. 한 무명 조선족가수의 음반취입을 위해 심양을 방문한 그는 “생각외로 조선족가수들의 음악기초와 자질이 좋았다. 누가 곁에서 잘만 이끌어준다면 빨리 가수로 될수 있다. 더많은 조선족가수들을 한국에 데뷰시키고싶다”며 대화를 풀어나갔다. 그는 중국말도 비교적 류창하게 구사하였는데 일찍 중국에서 사업한적 있어서인지 중국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있었고 리해도 깊었다.   김월녀를 “북경아가씨”로 일약 성공 정원수씨가 “북경아가씨”를 작곡한것과 김월녀가 이 노래로 한국에 성공적으로 데뷰한데는 그 원인이 있었다. 지난 1993년 KBS의 “전국은 지금” - 제주도에서 장백산환경캠페인 프로그램을 위해 천진에서 입경한것이 첫 중국행으로 되여 그는 이듬해 대련에서 1호 중한합자 천청궁찬음오락유한회사를 담차게 꾸렸다. 1년뒤 부득이한 원인으로 회사를 정리하게 되였는데 그때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정들었던 한 녀인과 갈라지게 되였다. 눈물번벅이가 된 그녀의 영상과 1년간 추억은 그에게 불쑥 창작충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기내에서 “북경아가씨”를 작사 작곡하였고 누구를 통해 음반을 취입할가 하다 여러가지 사항으로 이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뒤 1997년 중국록가수 최건씨를 만났다. 여러 한국방송사와 회사들에서 방한공연을 추진하였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모두 무산되였다. 그와 만나 이 얘기를 꺼낼때는 벌써 27번째였다. KBS에서도 성사시키지 못한것을 그는 밀어부치기로 작심했고 최건을 포함한 공연단원들의 출국수속을 마쳤는데도 문화부에서 쉽게 허가를 주지 않았다. 입국하는 날, 그는 미리 공항에  “카메라부대”를 동원하여 입국을 기정사실화시켰고 자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건의 방한공연을 성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98년 북경에서 1년간 체류할 때 한 지인이 조선족가수 김월녀를 추천했다. 그러나 김월녀가 출국중이여서 만나지 못하고 1년뒤 귀국하여 그와 전화를 통했다. 그는 “북경아가씨”를 김월녀에게 주면서 잘 련습하고 자신이 있으면 한국에 나와 음반취입을 하자고 건의하였다. 한달뒤 계획대로 김월녀는 한국에 와서 음반취입을 했고 생각밖으로 노래를 잘 부른 김월녀에게 신심을 갖고 정원수씨는 설운도나 남진 공연때에 가끔 김월녀를 등장시켜 친분을 쌓게 했다. 과거 설운도나 현철의 매니저였고 이때는 남진, 김혜영의 매니저인 그에게는 김월녀를 한국가수계에 띄우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였다. 중국에서도 김월녀의 “북경아가씨”음반이 급속도로 퍼졌고 지어 평양에서도  불리우기 시작했다. 그는 멜로디와 전주, 간주를 모두 중국풍이 짙게 했고 특히 가사에 중국말을 첨가해서 그런것 같다고 그 원인을 이야기했다. 김월녀를 자기가수로 키우고싶다는 그의 아집은 대단했다. KBS PD와 싸우면서 2002년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2003년 새해를 알리는 KBS생방송에 첫 스타트로 차이나복을 입은 80명 연원들이 춤추는 가운데 김월녀를 등장시켜 주변으로부터 한국가수를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심양에 정원수라이브카페를 만들고싶다 조선족들이 한국에 속속 밀려들면서 추석이나 설명절때 동포들을 위한 노래자랑이나 위문공연에도 그는 발벗고 나서고있다. 또 누구보다 중국과 조선족사회를 많이 리해하고 재한조선족의 처우를 동정하면서 “신도라지”, “그리운 내아들아” 등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다. 이러한 노래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이국만리 한국에 나와 홀로 지내는 아줌마들이 고향을 그리고 자식들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과 향수를 담은 노래들이다. “중국노래들은 음악이나 멜로디가 서정적이거나 시적이지만 한국노래는 비정서적으로 흐르면서 템포가 빠르고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고 말하는 그는 기회가 되면 심양에 정원수라이브카페를 만들고싶다고 했다. 이를 통해 동북3성에 있는 조선족가수들을 도와주고싶다고. 중한교류에서 한국인들이 더는 실수하지 말고 사기하는 일이 적어졌으면 하는것이 그의 바램이며 문화교류를 통해서 조선족과 한국인간의 반목의 곬을 메워주고싶은것 역시 심양에 정원수라이브카페를 만들려는 또하나의 리유다. 최근에 그는 안산에 있는 조선족기타리스트 허국철의 딸 허여나(21살)의 음반을 중국과 한국에서 준비하고있으며 기회가 닿으면 4,5월경에 출시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양꼬치, 고수풀(香菜)과 같은 중국음식을 즐겨먹을 정도로 중국을 좋아한다는 그는 또 한국인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류덕화의 노래) “심우”(心雨), “달이 내마음을 대표하네”(月亮代表我的心), “첨밀밀”(甜蜜蜜)의 가사들을 한국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한국에서 음반취입을 하여 한국인들이 더많은 중국노래를 부르게 하고싶다는것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메니저, 작곡가로 인정받는 그는 금년초에 “최고의 녀자”로 다시 한국가수계에 데뷰하였다. 그가 작곡한 유명한 노래들로는 “최고의 여자”, “사랑의 포로”,  “첫사랑오빠”, ”빰빠라빠라”, “살짝쿵”,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님이 오는 계절”,  “두손 싹싹”,  “미련의 부루스”, “내사랑도 가져가세요”, “슬픈 행복”, “사랑의 폭발”, “북경아가씨”, “신도라지”, “그리운 내아들아”, “국민여러분”, “뜨거운 사랑”, “돌려주오” 등이 있다.  “가수와 작곡가는 서로 박자가 맞아야 하지요.. 아무리 좋은 곡이라 하더라도 그 곡을 잘 부를수 있는 가수가 없다면 유명한 곡으로 될수 없지요. 김월녀가 나의 곡을 불러 유명하게 해주었기에 서로 성공할수 있은것이 아니겠어요? 김월녀가 나의 곡을 잘  불러주어 더 고맙습니다. 김월녀와 같은 더많은 동포가수를 발굴하고싶습니다” 중한 량국간 문화교류에 전도사의 역할을 하고싶다는 정원수씨의 말이다.  오지훈기자  
18    과학연구에서 조급성은 금물 댓글:  조회:2085  추천:0  2012-04-20
과학연구에서 조급성은 금물  2007.12 -장춘광학정밀기계및물리연구소 우병희연구원 일전 기자는 심양칠보산호텔에서 있은 중조한 국제학술회의에 특별참석차로 심양에 온 중국과학원 장춘광학정밀기계및물리연구소 우병희연구원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호텔에서 단둘이 마주앉은 우병희선생은 중국 항공우주선의 공신과는 너무 판이할 정도로 조용하고 인자한 로인의 모습이다. 그는 이미 정년퇴직을 하였지만 지금도 자신이 연구하고있는 테마로 하여 연구실에서 거의 살다싶이한다 한다. 일찍 길림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한 그는 40여년을 장춘광학정밀기계연구소에서 고스란히 한우물을 파왔다. 1986년 중국국가고신기술연구발전계획인《863계획》 항태분야항목설립에서 우리 나라 국민경제발전 및 국방건설에서 중요의의를 갖는 《분광사진기》, 《태양광측정기를 제안하고 채택하게 한후 이 분야 연구에서 수석과학자의 신분으로 중대성과를 이뤄냈다. 그가 이끄는 연구팀이 제작해낸 《고분별분광사진기》는 선진원격탐지장치로 국제원격탐지기술의 전연과제였는데 항공비행에 응용실험한 결과 그 성능이 국제선진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기술은 우리 나라 우주선 발사시에도 크게 리용되였고 향후 우리 나라 우주선의 진일보로 되는 우주탐사 및 우주정거장건설 등 분야에도 크게 리용될 전망이다. 그가 20여년 연구해온 태양의 빛을 측정하는 기계 즉 태양광측정기는 이미 세계기상조직의 표준에 도달하여 세계복사중심에서 사용되고있을 정도로 오차범위가 매우 작다. 이 장치는 《신주3호》우주선궤도창에 설치되여 2000년 3월부터 9월까지 태양을 측량하고 정확한 수치를 얻어냈다. 이 중국 최초의 태양광측정기술로 하여 우병희는 중국과학원 과학기술진보 1등상을 수상, 국가고신기술연구발전계획 선진개인, 전국선진사업일군 등 영예를 지녔다. 그는 태양광측정기는 태양에너지의 연구와 갈수록 심해지고있는 지구온난화연구에서도 특수의의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지구온난화의 주원인은 탄스가스 등 기체 방출이다. 지구의 에너지는 모두 태양의 빛에 의한것으로 여러가지 현상 이를테면 태풍, 바람, 풍능, 수능이 생긴다. 그러므로 태양의 빛을 장기적으로 준확하게 측정하는것은 태양광과 지구온난화 연구에서 자못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는 과학연구에서 조급성은 금물이라고 했다. 특히 돈을 벌기 위해 과학에 뛰여든다면 그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과학은 절대 조급해서는 안되며 오직 기초를 튼튼히 닦고 꾸준히 몰입하는 정신으로 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70년대말 원격탐사분야를 접근하면서자신이 배운 물리학지식으로는 너무 미약함을 느끼고 도서관을 찾아들며 지질학, 우주학 등 상관분야 지식을 폭넓게 섭렵하였으며 또 자신이 배운 리론지식을 공고하기 의해 3년간 석,박사생들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또한 시종 과학연구 1선에서 몸으로 부딪기며 하나하나의 애로를 물리치고 난관을 돌파하였다. 이러한 꾸준하고 허심한 과학탐구정신으로 하여 그는 끝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나라 우주항공분야 권위자로 군림할수 있었다. 그는 과학연구에서 연구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또 이번 호금도동지의 과학발전관은 현단계 우리 나라 제반사업이 좋고도 빨리 발전할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것으로 매우 즉시적이고 옳은 판단이였다고 했다. 그는 한때 우리 나라가 농업을 발전시킨다고 생태환경을 엄중하게 파괴했던 50-60년대의 가슴아픈 과거를 회고하면서 중국은 대국으로 천천히 카브를 돌아야지 갑자기 카브를 돌려고 해서는 쉽게 사달이 생길수 있다고 했다. 언제나 긴장과 고달픈 연구의 순간속에서도 그를 매료시키는것은 서양화(로씨야의 풍경화나 미국의 야외풍경화). 국외 나가면 다른것은 몰라도 서양화는 여러점씩 들고 들어온다. 서양화를 흔상하노라면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고뇌를 날려가고 정신이 새롭게 충전된다고 한다. 그는 로맨 로랑의 유명한 작품 《명인전》(베토벤, 미크랑지러, 톨스토이 세 사람의 전기)은 청소년들이 한번 읽어볼 책이라면서 화가들이 그림에 몰입하는 정신이 곧바로 과학연구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또 동방의 고대문명이 인류에 준 위대함을 긍정하면서도 서방철학이 현대과학에 미친 영향을 높이 평가, 현대과학은 많게는 서방철학을 기초로 해 발전하였다면서 우리들은 서방철학을 배우고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오지훈기자
17    한 로지원군전사가 하고픈 말 2009 .01 댓글:  조회:2236  추천:0  2012-04-20
 한 로지원군전사가 하고픈 말  “미안합니다”   일전 76세의 한 로지원군전사가 신문사를 찾아왔다. 죽기전에 39년전에 차사고로 피해를 끼친 당년 지식청년을 찾아 “미안합니다” 사과의 말을 전하고싶다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로지원전사가 바로 료녕성로간부이고 2008년지원군로전사방조대표단 단장을 맏았던 정덕홍씨이다. 16세 어린 나이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여러차 공을 세웠고 1953년 판문점전장터에서 통역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하여 고향의 뉴스인물로 되기도 하였고 또 여러차 차사고와 악연을 맺으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다재다난”의 인물로 현지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판문점전장터에서 통역으로 정덕홍씨는 16살의 어린 나이 지원군에 참군하여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수장들은 그가 너무 어려워 “꼬맹이”라고 불렀는데 한어, 조선어, 일어가 숙련하여 67군의 정찰처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는 “꼬맹이”이였지만 다른 두 정찰병과 함께 기민하게 적군을 생포하는데서 공을 세웠고 또 수장이 준 카메라를 메고 전장터 곳곳을 누비며 많은 귀중한 사진을 남겼다. 1953년 3월, 3국언어를 익숙히 구사할줄 하는 정덕홍은 개성군사위원회 제7련합군 관찰소조 통역으로 불리워갔다. 제54군 진지에서 350킬로의 군사분계선을 감독 확정하는 통역을 맡았다. 8월 적의 차량이아무런 저해없이 군사분계선을 진입해오다 아군에 의해 차압당하였는데 제7관찰소조 책임자이며 지원군상교 백병훈이 이끄는 정덕홍 등은 신속하에 사고발생지점에 도착하였다. 정덕홍의 통역하에 백병훈은 기고만장한 적병에게 질문을 들이대고 이 일을 신속하게 상급에 보고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시 32호 기록편으로 촬영되여 전국에 방영되였고고향 길림성 통화시 류하현 성관진에서 이 기록편이 방영되면서 그의 부모들도 참전하여 종무소식이던 아들의 소식을 알게 되였다. 고향에서는 정덕홍을 고향의 영웅이라 자랑했고 참군을 반대했던 부모들도 이러인해 가슴이 뿌듯해났다. 1953년 11월의 어느날, 하룡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지원군위문단이 금성전선에 위문하러 왔다. 54군은 환영식을 가졌고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공연이 끝난뒤 인민군 김학범대교가 정덕홍을 데리고 가 하룡장군을 만났다. 김학범은 “저는 조선인민군 대교 김학범입니다. 하룡장군이 이곳에 오신데 대해 환영합니다.”라고 인사의 말을 건늬자 하룡장군은 김학범과 악수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덕홍이 또박또박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통역하였다. 대화가 끝날무렵에 하룡장군이 웃으며 정덕홍에게 몇살이냐? 고향이 어디지? 라고 물었다. 정덕홍의 가정형편과 부대생활, 학습정황 등을 일일이 물을 때 하룡장군의 검고 까칠한 수염이 약간씩 떨렸는데 그를 보고 웃는듯 했다. 그때의 정경을 회고하는 정덕홍씨는 화기가 넘치고 자애로운 하룡장군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고 했다.   차사고에 대한 저주 조선전쟁에 참가하여  5년남짓한 시간에 그는 선후 3차 3등공을 기입하였고 1956년 귀국하여 제남군구 사령부에서 14년간 참모장을 담임하였다. 1951년 4월 그는 고향의 11명 동학들과 지원군에 참군하였지만 그를 포함해 3명이 무사히 귀국하고 기타 사람은 전장터에서 전사하였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것은 그가 수십여년간 여러차 차사고를 당하고 빈번히 구사일생으로 사선에서 탈출할수 있었다는것이다. 첫번째 사고는 1969년 1월 24일. 당시 그는 심양시 황고구무장부의 참모로 있었다. 음력설기간이라 공안부문과 배합하여 치안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이날 새벽 4시경에 찦차를 몰고 다른 한 동사자와 함께 우홍구 대흥향 등가황촌에 왔다가 마침 귀성하는 두 녀지식청년을 차에 태우고 시내로 들어가고있었다. 차가 정상툰 근처의 기차길에 이르렀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경적소리가 들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는 기차에 부딪쳐 두고패 번진후 레루길아래로 떨어졌다. 네사람은 모두 병원에 호송되였고 정덕홍은 오른쪽 쇄골이 골절되여 두달남짓 입원치료를 받았고 기타 3명은 경상을 입어 그날로 집에 돌아갔다. 두번째 사고는 1983년 8월 8일이다. 한번 생사고비를 벗어난 그는 다시는 차를 운전하려 하지 않았고 차만 보면 멀리서 피해 다녔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료녕성사격대에 배치받았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서 그는 다시는 차사고를 당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 30분좌우 성위체육위원회에서 회의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장강북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누가 말이 놀랐다는 웨치는 큰소리가 뒤전에서 들려오는가 했는데 뒤도 돌아볼새없이 그는 말발굽에 차여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다. 인사불성이 된 그를 급히 병원으로 호송했고 4개 갈벼대가 끊어져 그는 한달동안 병원에 누어있어야 했다. 세번째는 20년이 지난 2002년 9월14일, 누가 차사고로 이젠 액을 다 때웠다해서 그런가했는데 액운은 또한번 그에게 덮쳤다. 이미 퇴직한 그가 친구 몇사람과 함께 와방점저수지에 가 고기를 낚았고 1메터가 넘는 고기를 낚은 그는 기쁜 나머지 고기를 안고 기념촬영까지 하였다. 하루종일 고기낚시질에 지친 그들이 봉고차에 앉아 눈을 부치다싶이 하면서 웅요부근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차가 또랑에 번져지면서 정덕홍을 차밖으로 팽개쳤다. 왼쪽 뒤잔등이 쑤셔나는듯한 통증을 느낀 그는 인차 움직일수 없었지만 자신이 살아있다는것과 다시 차사고를 당했음을 예감했 다. 이번에도 그는 끊어졌던 갈벼대가 다시 끊어지는 등 심한 상처를 입어 웅요에서 구급치료를 받고 심양병원으로 옮겨 한달동안 다시 치료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여러번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나고 빨리 회복할수 있은데 대해 그는 다행히 자신이 몸이 좋았고 력기운동과 권투운동을 한 덕이라고 자랑했다.   미안합니다 사과라도 한번 세차례 차사고를 겪고난 정덕홍로인은 오히려 차분해졌고 차사고와 인연을 맺었다고  우스개소도 거침없이 했다. 그는 큰사고에도 살아날수 있었다면서 이런 경력은 자신에게 행운일뿐만 아니라 생활가운데서 갑작스레 부닥친 일을 여하히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것을 알려주었다며 인생에서 귀중한 재부를 얻은것이라고 토로했다. 그의 구사일생 경력은 그의 로친구들속에서 미담으로 전해졌고 그를 보면 구사일생이면 꼭 뒤에 복이 따른다며 롱담을 던졌다. 그는 죽지 않은것 자체가 큰복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현재 안해와 함께 만년을 행복하게 살고있는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그의 생활도 매우 규칙적이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서 심양시로간부활동센터까지 걸어가서 운동했고 점심때에 집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 차사고경력에서 인생의 도리를 더 깨우쳤다는 정덕홍로인은 그래선인지 첫번째 차사고때 같이 승차했던 두명의 녀하향지식청년을 지금이라도 만나보고싶고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다를 꼭 전해주고싶다고 했다. 그는 2007년 1월 27일과 2008년 2월 18일에 두번에 걸쳐 “료심석간”지에 당년의 두 녀지식청년을 만나 사과 한마디 하고싶다는 간절한 념원을 절절하게 표달했고 또 료녕텔레비죤방을 통해서 같은 심경을 표달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그를 만나서 그 두사람을 만났는가 물었는데 이 말이 인사말로 되였고 그의 사실을 보도한 매체들에서도 만나면 꼭 알려달라고 부탁해오고있다. 그의 소박한 념원을 담은 기사가 처음 신문에 나간뒤 그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당년 하향지식청년들의 기념합동촬영사진을 얻을수 있었고 두사람의 이름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거처하고있는 곳도 알아냈지만 아직 여러가지 사정으로 만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기자가 꼭 사과할 필요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만나서 자기의 진심을 표달하고싶다며 안해와 두 아들도 나의 행동을 지지해주고있다고 했다. 정덕홍로인은 만날수 있다면 꼭 사과파티를 열고 흘러간 세월을 돌이키고 자신의 불찰로 빚어진 사고에 사과할것이라며 기자에게 만나도록 주선해줄것을 신신당부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과 가슴아픈 추억이 있다. 이미 흘러간 수십년 세월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한순간을 추억의 한장으로 떠올리면서 사과하려는 정덕홍로인의 집요함에서 고통을 락으로 간주하는 한 로간부의 인생철학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오지훈기자
16    중국사업으로 재기꿈 펼치는 82세 고령할머니 댓글:  조회:2738  추천:0  2012-04-20
중국사업으로 재기꿈 펼치는 82세 고령할머니    2008.10   -한국 셀라늄생명공학연구 하상남회장   일전 기자는 심양에서 하상남 한국 셀라늄생명공학연구소 회장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하회장은 여든을 넘은 고령의 할머니였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피부나 얼굴이나 너무 젊은 인상이였다. 말마디를 또박또박 조리있게 엮어가는 모습이나 제스처에서 하회장은 고령의 년세를 무색케 하는 무서운 힘과 정렬적사고를 분출하였다.   하상남회장은 기자가 만난 수많은 기업인중 고령할머니로서는 처음이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조심스러웠는데 그와 대화하면서 이런 로파심은 어느새 저 멀리로 사라졌고 대신 친근하고 존경스런 기분으로 바뀌였다.   지난 1982년부터 특허를 내면서 현재까지 30개를 갖고있는 그는 인류건강에 크게 기여할 신물질 세리온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여 "한국의 큐리부인"으로 불리우고있다. 그것이 하회장의 꿈이고 그는 또 이 꿈을 중국에서도 꽃피워볼 생각으로 일전에 심양을 노크했고 심양에서 중국사업구상을 펼쳤다.    하회장의 중국연(緣)   하회장이 중국을 처음 방문한것은 지난 1992년 산동성의 초청으로 한국기업인대표단의 한사람으로 중국에 왔다. 그때 그는 산동뿐만 아니라 북경에 들렸으며 자금성도 참관하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1998년에 북경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고 2001년에는 한국기업인녀성협회의 한 성원으로 청도를 방문하였다.   이번 심양방문은 다섯번째로 그에게 있어서 아주 뜻깊은 방문이다. 원래 개인사정으로 수십년간 해온던 사업을 포기하다싶이 하였는데 오곡백과가 영근다는 9월의 어느날 심양으로부터 문득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이 전화가 다시 인연이 되면서 그는 포기했던 사업을 재기하기로 결심했고 그것도 중국사업으로 사업을 재기하겠다는 맘을 먹게 되였다. 그는 심양에 오기전에 먼저 북경에 가서 그 전화를 건 지인과 만나 중국사업을 검토했고 이번에 심양에 와서 사업구상을 무르익히게 되였다 한다.   사실 하회장의 중국연(緣)은 열여섯 나이 우연한 기회에 "화타와 편작"이라는 책을 접촉한뒤부터라 할수 있고 그보다 썩 전이라고 할수 있을만치 자기와 중국과는 무언의 끈이 이어지고있는것 같다고 했다.   이번에 하회장은 6박7일로 째여진 심양방문이 매우 뜻이 깊고 의의가 크다고 했다. 그는 심양체류기간 세계 최초로 당뇨병을 치료할수 있는 싸이클로지를 개발한 재미과학자 송문기박사와 만났고 두분은 서로 자기의 과학성과에 대해 교류하고 합작할 의향을 내비쳤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지난 9월 18일 북경방문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100명에 가까운 환자들에 대한 자기의 발명품인 세리온의 림상실험에서 좋은 효과를 보니 매우 기쁘다고 했다.   또 중국 미래생물과기유한회사 등 중미한 3개국 합작(미국 BSF사와 기술제휴)으로 림상실험을 진행중이고 관련제품 허가가 나오면 단기간 제품이 중국에서 출시될것으로 보여 중국사업으로 사업을 재기하는 꿈이 곧 실현되는것 같다고 토로했다.   50년대 한국 최고의 녀배우   하회장의 지나온 삶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다이다. 한국전쟁중 손목이 포탄파편에 맞아 절당상황에 처했던 일, 세리온이라는 물질을 입수해 치료한 결과 절단된 혈관과 심줄이 이어졌던 일, 남편과 함께 조산원과 약국을 운영하면서 자신들과 동물을 대상으로 림상실험을 했던 일, 헌 책방을 뒤지며 의학 광물학 등 서적을 참조하며 세리온리론체계를 다져갔던 일...그중에서 그에게 가장 화려했던것은 영화배우 시절이다.    하씨네 집안의 7남매중 다섯째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꿈이 오페라가수였지만 결국 영화배우로 되고만다. 그것도 아버지의 강한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삐어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하여 46년에 "자유만세"로 데뷰하여 56년에 대히트작 "처녀별"(윤봉춘감독)을 비롯해 "노들강변" 등 10여편에 출연했고 이로 하여 50년대 한국 최고의 녀배우반렬에 오르게 된다. 당시 예명은 하연남, 백락인 윤봉춘감독이 지어준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의 배우생활은 그리 평탄치만 않았다. 몰래 영화를 찍고있다는 일이 들통 나면서 아버지가 한강변에서 자살소동을 벌리는바람에 영화배우생활은 한동안 중단되고만다. 그러다 오빠와 약국을 운영하던도중 6.25 당시 피난도중 폭격에 파편을 맞아 오른손이 절단되는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곡절도 결국 영화배우가 되려는 그를 단념못한다.      그는 오른손이 장애의 비운을 맞는 가운데서도 윤봉춘감독의 고무와 권유하에 다시 등단하여 "손병신"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도 극복하고 "처녀별" 히트작을 만들어내고 자신은 유명 스타로 된다.    그는 영화일을 하면서 무슨 일이든 해낼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배우 하연남"보다 발명가로 남고싶다   하회장은 50년대에는 인기배우로서 이름을 날렸고 1980년대부터는 발명가로서 세계 발명계에 이름을 새기고있다.      하회장은 영화계에 등단하여 한순간을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당시 의학기술로 부상당한 손을 수술할수 없다는 절망의 소식에 혼자 치료처방을 찾아나섰다. 양의보다 한의쪽에 더 관심이 갔고 중국의 명의 화타와 편작의 책을 연구하였다. 거기서 적석지, 양기석, 운모 등 광물질의 효능을 소개한 내용을 보고 그 광물질을 자기의 손에 사용해봤는데 효과가 있다는걸 경험했고 이러한 천연광물질의 뛰여난 효능에 대해 알리고싶은 충동을 받게 된다.    후에 남편과 함께 본격적인 발명작업에 착수했고 광물질을 얻기 위해 광산을 인수했다. 그러다 미국의 물리학자이며 의학박사인 클리우스 슈바르츠박사의 셀레이움이라는 항암, 항로화미네랄에 관한 연구론문을 접하면서 여기서 흰트를 얻고 여러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끝내 셀레니움과 희귀 미네랄 등이 천연상태로 함유되여있는 "세리온"이라는 신물질을 발명해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천연광물질인 세리온은 정혈작용, 해독, 피부세포에 영향을 주고 신진대사를 활성화하는 작용을 한다. 그는 세리온에 대한 림상실험효과를 얻기 위해 분말을 내여 매일 복용하고 손과 얼굴 등에 발랐다. 그런데 기적이 나타났다. 세리온을 꾸준히 바른데서 절단하지 않은 손목에 혈액이 돌면서 손가락을 움직일수 있게 된것이다. 여기에서 고무를 받은 그는 림상실험과 연구범위를 넓여나갔다. 세리온을 주성분으로 하는 세리온비누와 세리온화장품 등 계렬제품이 하나하나 탄생되였다.   어떤 제품은 삼성전자와 계약해 납품한것도 있다. 세리온비누는 92년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발명대상을 탔다. 그의 세리온제품은 세계 독일발명전시대회에서 92년에 이어 2002년에도 대상을 수상했고 미국유엔지적재산권기구에서도 1등을 수상했다. 또 한국대통령산업포장을 비롯한 상을 수십여차 수상했다. 그는 93년에 한국녀성발명가협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했고 몇년후에 학생과 어머니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단법인 한국어머니발명가협회를 만들어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그는 "발명과 과학이 살아야 나라도 살고 경제가 살지요. 나는 경제의 기본에는 과학과 발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게이츠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발명가로서 기억되고싶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발명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 제가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으니까요. 발명이 무엇인지 또 발명인과 발명품을 소개해야 많은 사람들이 알수 있죠"라고 했다.   하회장은 세리온은 신물질로 인류가 추구하는 자연미네라로서 환경오염에 찌든 우리들에게 삶의 희망이 줄것이으로 확신했다.     그는 인터뷰도중 스크랩북에 있는 화려했던 녀배우시절의 흑백사진과 환자들로부터 받은 감사편지, 산업포장을 비롯한 상장들과 신문기자들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기자는 80고령의 하상남회장의 재기꿈이 꼭 이뤄지고 그가 약 60년간이 이뤄낸 업적 신물질 세리온연구가 인류에게 더많은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줄것을 기대해본다.  오지훈기자       
15    취미가 성공을 부른다 댓글:  조회:2146  추천:0  2012-04-20
취미가 성공을 부른다   2008.08   -심양약과대학교 교수 허영남씨   대학생이 1만명이 넘는 심양약과대학교에서 "무서운 교수"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으며 이 대학중견교수로 활약하고있는 허영남씨(1963년생)를 일전 기자는 30도이상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의 연구실에서 인터뷰하였다.   길림 조양천태생인 그는 일찍 길림대학 화학학부를 졸업하고 심양약과대학에 배치받았고 후에 한국 서울국립대학 약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후 "인재유치" 방식으로 다시 심양약과대학에 돌아와 교학과 천연물과학에 전념하고있다. 현재 16명의 석박사생을 거느리고있는 그는 이 대학 약물화학전업 박사생도사, 중약화학전업석사생도사로 유기화학류과정 교학, 약물합성에 종사하고있으며 이 기간 국가2류신약 "벤트렉"원료 및 그 제재림상연구를 주최해 림상인가서를 취득했고 한국SK케미칼 약물연구실 책임자로 한국보건보건복지부의 "유도화합물의 전합성 및 그 연생물의 합성" 국제합작테마를 책임지고 진행중이며 중국과 미국, 일본 등 국내외 학술간행물과 국제대회에서 약 20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취미는 천성적이 아니다   허영남씨는 사람들은 성공하려면 흔히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것이라 말하는데 자신의 경우는 취미가 오늘을 만들어주었다고 했다. 소학시절부터 수학에 취미가 있은 그는 중학때 현수리화경연에서 우수한 수학성적으로 여러차 수상한바있고 제1회연변주수리화경연에서 수학 2등상을 취득하는 영예를 가져 대학지망서를 쓸 때 1지망을 수학, 2지망을 물리로 선택했다. 그런데 길림대학 수학학부 졸업생인 고중담임선생이 수학은 기초이기에 앞으로 성공하려면 화학을 잘해야 한다고 화학을 제1지망으로 바꾸게 되였고 그는 결국 길림대학 화학학부에 진학하게 된다.   "무슨 일이나 취미가 있어야 깊이 연구할수 있고 자신이 취미 있는것을 해야 성공할수 있어요. 그러나 취미는 천성적이 아니지요. 어떤 문제를 풀거나 연구하는 과정에 양성되지요. 만약 컴퓨터게임을 한다고 하면 처음부터 게임을 잘하는것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게임규칙을 파악하고 또 다른 사람과 게임하면서 점차 취미를 붙이고 놀아야 게임의 고수가 될수 있는것이지요."   그는 료녕성민족과학보급활동에 참가하여 선후 심조1중과 철령조선족중학교에 가서 특강하였는데 학생들에게 우선 취미가 있어야 성공할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화학이란 무엇이며 생명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실천과 경험을 통해 설명해 커다란 공감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중소학시절 미지의 수학세계에서 여러가지 꿈을 키워오던 그는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화학을 배우며 생명과학에 매료되였다. 심양약과대학 영어약학반의 유기화학을 가르치고있는 그는 국내 기타 유기화학강의에서 보기드물게 영문으로 된 미국 원판 교재를 채용하고있다. 중문교재는 여기저기서 카피한 부분들이 많아 체계가 형성되지 않고있기에 배우고난후에도 별로 쓸모가 없다는것이 그의 주장, 그래서 교수로서 자기의 권리를 행사하고있다고 했다.   천연약물연구에서 두각을 내밀어   지난 1998년 3월부터 2004년 8월까지 한국 서울국립대학에 류학하면서 한국 SK케미칼과 인연을 맺었고 귀국후 심양약과대학교와 한국 SK케미칼회사의 합작을 추진해 2005년에 대학교내 한국 SK케미칼연구실(200여평방메터)을 개설하였다. 21명으로 된 교수와 부교수, 석박사연구생이 포진하고있는 연구실은 매년 SK케미칼회사로부터 약정된 테마연구비를 받고 천연물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있다.   천연물연구란 천연약물화학연구를 말하는데 자연의 식물, 동물,광물, 해양과 세균 등에서 유효성분을 발견, 분리, 개발하는것을 말한다. 현재 그가 맡고있는 천연물연구는 동북지대에서 쉽게 볼수 있는 할미꽃에 대한 연구이다. SK케미칼은 할미꿏에 로인치매증을 치료할수 있는 유효성분을 찾아냈고 허영남연구팀과 합작으로 2단계 림상실험을 하고있는중이다. 그는 중국 동북지역에 나는 할미꽃을 선정하여 시험재배하고 단계별 채집하여 거기서 유효성분을 추출 정제하는 사업을 주관하고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심양농업대학 박종원교수팀과 합작, 시험재배하여 이미 신빈의 10무되는 땅에 재배하였고 허영남연구팀은 이미 채집한 할미꽃에서 17가지의 사포닝을 성공적으로 추출 정제해내여 약재품질관리로 사용하고있다. 같은 할미꽃이지만 지역마다 틀리고 성분함량이 틀리기에 자연산품종에서 우량종을 선정하여 재배하는 해수, 채집 적정시기를 파악하여 가장 많은 유효성분을 추출정제해내는것이 연구팀의 당면 과제다. 연구팀은 3년동안 채집해온 신빈, 통화, 연길 등 지역의 할미꽃에 심입되는 연구를 진행하여 장차 지역을 축소하고 우량종를 선정하여 대면적재배를 진행할 계획이다. 그때에 가면 3000무되는 땅에 대량으로 재배하게 되는데 신농촌건설과 빈곤지역지원과 결부해서 진행되며 연구사업도 더 활발해지고 관련 개발산업도 규모화될것이라 한다.    연구팀은 매년 한국에 가서 상황보고를 진행하고 새로운 테마를 연구하고있는데 며칠후 연구팀이 한국에 가서 래년계획을 상의하게 된다고 했다. 중국은 할미꽃을 다만 리질치료 중약재중 한가지로 사용, 할미꽃에서 유효성분을 추출정제하여 약물로 만들어 치매증을 치료할수 있다는것은 세계에서 한국 최초의 발견이라고 했다. 따라서 현재 2기림상실험을 마치고 래년부터 3기림상실험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약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커저 엄청난 시장이 형성될것이라고 했다.   이밖에 허영남연구팀은 한국보건복지부의 프로젝트인 항암제연구중 약물합성을 3년간 수행했고 또 1호천연물약품인 관절염치료제의 조인스 등 3개 생약의 추출 정제도 진행하고있다.   생명과학은 전망이 크다   한국에 가서 쉽게 돈벌려하지 말고 앞선 과학지식을 배우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허영남씨는 최근년에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쉽게 돈을 벌수 있는것만 연구하는것이 문제라고 했다.   대학을 지망할 때도 조선족학생들이 많이는 공상관리, 금융, 컴퓨터 등 학과를 선택하는데 여기에는 고중담임선생들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고중때부터 학생들에게 화학과 같은 생명과학에 대해 많이 소개해서 관심을 갖게 하여 대학지망을 쓸 때 이런 학과를 선택하도록 의식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심양약과대학을 일례를 들면 80년대만해도 매년 모집하는 300명 학생가운데 10명의 조선족이 있어 전체모집인원수의 3%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매년 모집하는 1500여명중 겨우 2-3명이여서 천분의 1도 도달못하고있다는것이다.   그는 화학이 기타 학과보다 힘든것은 사실이지만 졸업후 취업률이 훨씬 높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심양약과대학의 취직률은 80%이상으로 일반대학보다 훨씬 높아(30%) 북경대학, 청화대학 등 명문대학이나 중점대학과도 견줄수 있다고 했다. 졸업생들은 거의 제약회사, 병원이나 약방, 그리고 대학연구생으로 들어간다는것이다.   "해마다 취업률이 치렬해지는 현실에서 왜 이렇게 취직률이 높은 대학이나 학과가 우리 조선족들에게는 외면당하는지 생각이 안되요." 그래서 매번 신입생이 들어오면 조선족학생이 몇명 되는가 유심히 살펴보는 그다. SK케미칼에서도 괜찮은 조선족을 추천하라 하지만 심양약과대학이나 중국약과대학에도 이 방면 조선족인재가 없어 추천못하고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현재 딸애는 복단대학 부속중학교 고중2학년에, 안해는 복단대학 한국어과 부교수로 사업하고있어 독신생활을 하고있는 허영남씨는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서 자료를 검색하거나 관련 서적을 섭렵하는것이 취미라고 한다.   오지훈기자   
14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에 혼신을 쏟는다 댓글:  조회:2132  추천:0  2012-04-20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에 혼신을 쏟는다   2007/06 김좌진장군의 손녀 김을동을 만나 일전 기자는 심양한국주기간 심양을 잠간 방문한 독립운동가 김좌진장군의 손녀인 한국탈랜트 김을동녀사(63세)를 심양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해림에 세운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의 인테리어건때문에 해림에 들렸다 전원주선배를 만나로 심양으로 오는 길이였다. 장군의 손녀, 김두한의 딸, 성공한 탈랜트, 《국민스타》의 엄마 등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갖는 그녀였지만 녀장부다운 건장한 체구외에는 보통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장군의 손녀로 기념관을 세워놓으니 당당하다》고 허두를 뗀 그녀는 려로의 피로도 잊고 기자에게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과 자기일가에 대한 일화를 자상히 들려주었다.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과 《청산리구국대장정》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은 목단강지역 해림시에 위치해있는데 김좌진장군이 피살된 곳이라한다. 이 사업관은 김을동씨가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를 만들고 1999년부터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흉상건립 및 생가복원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지난 2005년말에 개관하였다. 기념관의 16,000여평되는 부지는 해림시정부에서 무상제공받았고 박물관과 복지관 두동의 건물로 구성되였다. 박물관에는 현재 한국독립기념관에도 없는 문물이 전시돼있는데 당시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독입운동가들의 업적이 수록돼있다. 중한 력사학자들이 공동발굴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관련 등 항일무장투쟁사적과 한국인과 중국인 항일투사 각 15명의 개인사적들이 전시되여있다. 소개에 의하면 김좌진장군은 군자금을 마련하고저 정미소를 운영하다 41살에 피살, 그는 일찍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를 지휘하여 대승전을 거두었다.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은 일명 중한우의공원이라도 하는데 독립운동유적지로 되여 해마다 적잖은 참관자들의 발길이 잇고있다. 지난해 단체손님만 400여명, 올해는 5천여명에 달할것으로 본다. 지금은 해림의 관광코스로 되여 목단강에서 해림으로 가는 직승비행기가 개통되여 20분이면 도착할수 있다. 복지관은 숙박장소외 식당과 례식을 할수 있는 장소로 만들 계획, 살아있는 민족문화의 례식, 환갑잔치 등을 이어나가는 공간, 또한 세미나를 할수 있는 공간 마련으로 한중우호관계의 컨셉으로 만들고싶다고 했다. 그는 현재까지 사재를 털어가며 투자한 자금이 2500만원에 가까운데 그 과정에 사기를 당하는 등 원인으로 공사가 계획보다 많이 지연되고있지만 이 곳에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을 고집한데는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것도 있지만 자라나는 후세대들에게 민족의 얼과 넛을 심어주고싶었다고 했다.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의는 련속 6년째 해림조선족실험소학교(김좌진장군이 생존에 지은 학교라고 함)에 장학금을 지급, 이미 100여명이 장학금을 받았으며 래년 5월에는 전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것이라 했다. 동시에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의는 지난 2001년부터 한국의 대학생을 모집해 해마다 《청산리구국대장정》을 펼치고있다. 초기 심양을 경유했지만 후에는 단동에서 배를 타고 와서 집안의 환인, 이도백화, 연길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지역, 다시 발해지역에서 김좌진장군기념관, 할빈731부대, 할빈역 등 로정으로 10박이상의 대장정을 한다. 특히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지에 갈때면 독립가를 부르며 12킬로를 걸어가서 주먹밥을 먹으며 당년 독립군들의 생활을 체험한다.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애국애족의 정신과 민족정신을 함양시키는 일에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고싶다》며 오로지 외고집으로 오늘까지 왔는데 참으로 감회깊다고 했다. 《주몽이 엄마》 김을동 자신도 한국에서 성공한 탈랜트. 그러나 최근 아들 송일국이가 출연한 한국드라마 《주몽》이 뜨면서 《일국이 엄마》, 《주몽이 엄마》로 더 각인되고있다. 그는 아들이 성공해서 기분이 좋다며 그러나 내아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선조들이 잘 보살펴준 덕분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청산리구국대장정》 1회때부터 송일국이는 이 대오에 합류하여 환인 오녀산성에 가서 999개 층계를 올라 참배한적 있는데 누가 꿈에라도 주몽역을 맡으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또 세상에 우연일치라는 말이 있듯이 2005년 10월 29일,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이 준공하는 날 일국이는 금정(金鼎)호텔 선물가게에 가서 활 하나를 사와서 kbs 소품실에 갖다놓겠다 말한적 있는데 5개월후 그는 주몽역을 맡게 되였다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국이도 사극에서 성공하였는데 그가 맡은 역은 《해신》에서 장보고를 죽이는 염장이라는 악역, 여기서 성공하면서 그는 kbs신인상, 우수연기상을 수상하여 스타로 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몽》에서 주몽역을 맡았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거의 반대하였다. 그 리유인즉 사극에 편중하면 탈렌트로 성공하기 어렵기에 여러가지 드라마에 출연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김일동씨는 어머니로서 력사적으로 최고의 인물을 재연한다는것은 그 누구도 상상할수 없는 대단한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해나섰다. 일국이가 주몽이 형들에게 하마트면 진흙탕에 생매장당할뻔한 장면을 찍고나서 집에 들어왔는데 그 흙탕물이 푹 밴 옷을 자신이 손구 며칠이나 빨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북핵문제로 남북정세가 긴장하던 시기, 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김을동씨는 평양 동명성왕릉에 참배하는 가는 기회를 갖고 주몽의 릉앞에 일국이 사진을 갖다놓고 현재 일국이가 대박이 터지고있으니 끝까지 성공할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빌었다. 김을동씨는 원래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55평에 살던 집과 가산을 김좌진장군기념사업관과 청산리구국대장정에 투자하다보니 월세 100만원짜리 집에 들었다가 쫓겨날 무렵 일국이가 대박을 터뜨려 가긍한 신세를 면하게 되였고 일국이도 기념관사업에 적극 지원하고있다고 했다. 그는 성공한 배우를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으로 비유하면서 외교관 수백명이 하기 어려운 일을 성공한 욘사마가 해낼수 있었다며 《국민의 스타》로 뜨고있는 아들에게 호의호식이 아니라 나라에 기여하는것을 항상 잊지 말고 행동거지에 조심하라고 타이르고있다한다. 《각본없는 드라마》 김을동씨는 할아버지가 세상뜬지 100년만에 손녀가 흉상을 모셔놓았고 거기에 한국 국회의원과 한국인들이 와서 참배하고 또 일국이가 국민스타로 성공했으며 한 방송사에서 다큐맨타리로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과 아들 4대가 나왔으니 가히 《극본없는 드라마》라고 했다. 할아버지 김좌진장군은 한 대가가문의 둘째로 태여났으며 17살 되던해 한국사상 처음으로 35명의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재산을 전부 무상으로 나눠주면서 가노를 해방시켰으며 문중 어른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않고 99칸이나 되는 집에 호명학교라는 학교를 열어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일본 경찰에 쫓겨 만주에 가서도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다. 특히 독립군사령으로 몸소 지휘한 청산리전투는 청산리대첩으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독립운동의 빛나는 한페이지로 길이 남아있다. 아버지 김두한도 한국에서는 전기인물이다. 그는 김좌진장군의 아들이라는 리유로 일본경찰에 쫓기며 살았고 대담하게 일제에 항거했다. 특히 그가 한국 국회에서 오물을 투철한 이야기는 후세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대의를 주장하고 불의를 타매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을동씨에 의하면 그때 한국정치가 정경유착으로 판을 치자 김두한은 탑골공원(순국선렬공원) 화장실에서 똥물을 퍼다 국회에 부으면서 선렬들의 응징리라고 했는데 이것이 국제적으로 잇슈가 되였다. 그리하여 군사독재시절 김두한은 국회의원 빠지를 빼앗겼으며 국회에서 제명당했다. 김을동씨는 부친이 국회의원을 했지만 김두한이라는 이름으로 재산등기한적 없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자신은 생활이 그처럼 검소했는데 국회의원치고 그렇게 어려운 가족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두한의 출생 자체가 한편의 로맨틱한 드라마다. 김을동씨에 의하면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쫓기여 도주하던중 어느집 담장을 뛰여넘어들어갔는데 거기서 한 착한 녀자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고 임신하여 김두한을 낳았으며 그뒤 그 녀성은 김두한이 여덟살되던 해 일제본경찰의 심한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일국이는 《주몽》의 역으로 《국민의 스타》로 뜨고있고 자신은 스타다큐맨타리에 출연, 또 무지하다고 할 정도로 김좌진장군기념관사업을 추진하고있으니 말이다. 그는 심양은 옛날 아버지가 머문적 있었던 봉천이여서인지 더 정이 든다며  《재중동포는 글로벌시대 한국의 엄청난 자원이다. 한국인이 중국에 무난하게 진출할수 있은 원인중 동포들이 가교역할을 해준데 있다. 중한 량국간 윈-윈관계를 이룰수 있는 사업들을 통해 중국에서 우리의 말과 우리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있는 중국동포들에게 현대식 한국문화 보급 및 교육과 장학사업 지원, 한국의 학생과 기업인들의 동북 3성 지역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오지훈기자  
13    강영삼씨의 파란많은 인생 댓글:  조회:2317  추천:1  2012-04-20
강영삼씨의 파란많은 인생   2007.07   내가 있는 곳엔 웃음이 있도다-   웃음은 우리 생활의 윤활제이고 활력소이다. 중국말에 10년 웃으면 백년 장수한다는 말이 있듯이 웃음은 우리 생활의 그늘을 가셔주고 세월의 주름을 제거해주며 또 랑만, 쾌락, 즐거움, 행복을 만들어준다.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로인들에겐 자식들의 효도도 효도지만 웃을 때보다 즐겁고 행복할 때가 없다 한다. 심양시조선족로인들에게 "재간둥이", "보배둥이"로 불리우는 강영삼씨, 그도 예쉰 후반의 로인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특유의 재치와 유모어로 항상 로인들을 웃기군 하여 그가 있는 곳엔 폭소가 그칠줄 모른다. 그래서 주변에선 그를 "우리의 코미디"라고 친절하게 부르기도 한다.   하하- 웃고삽시다   강영삼씨는 코미디라 불러도 손색없다.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언제나 폭소가 터지고 씨원한 웃음바다가 펼쳐지며 또 어떤 때는 배꼽을 잡고 웃다가 눈물과 코물이 나오게 하기 일쑤다.   그는 자신이 천생적으로 롱담을 잘하는것이 아니라 다만 웃기 좋아하다보니 남을 웃기게 되였다고 했다. 특히 로년생활에 접어들어 로인들과 많이 접촉하면서 가정의 불화목, 로년기에 오는 우울과 고독감, 여러가지 병으로 인한 고통... 등으로 하여 웃음을 잃어가고있는 로인들에게 웃음과 건강을 주기 위해 자기의 모든 재치를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로인들이 웃으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상 쾌락을 줄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리롭다는것이 그의 지론이다.     기자가 그에게 웃음의 비결에 대해 묻자 그는 웃으면서 "난 관상쟁이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해서 전문학교도 나오지 않았지. 다만 소품을 좀 연구하고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유심히 관찰하고 사람의 심리를 더 연구한것뿐이야."라고 실토한다.   "내앞에선 안웃는 사람이 없다"고 장담하는 그는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그와 몇마디 말을 건네보고 묘한 웃음거리를 만들어낸다. 한번은 젊은 한족음악애호가들과 한자리에 앉았는데 그중 자신이 나이가 가장 많아 서로가 어색한 분위기였다. 누구하나 말문을 먼저 열지 않자 그는 "오늘 이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다 나의 선배다. 이 동생이 여러 선배들한테서 많이 배우고싶다."고 말해 젊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고 이내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그들과 친숙해졌다한다.    아무리 낯선 사람이나 생소한 장소에서도 그는 약간 분위기만 파악하면 순간적으로 머리에 웃길수 있는 령감이 절로 생겨난다고 한다. 그에게 웬간해서 웃지 않는 조카애가 있었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놈은 웬간해서 웃지 않는다. 한달에 한번씩 웃지, 그래 1년에 12번 웃을가 말가."라고 그 조카도 피씩 웃고말았다 한다.   조선사람을 만나서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평양말을 흉내내여 웃겼고 로인과 젊은 사람들을 만나서는 무작정 웃음을 유발시키는것이 아니라 장소와 년령, 시간을 봐서 웃음거리를 척척 묘하게 만들어내 듣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가 출연한 소품에서도 그는 자신의 재치와 장기를 남김없이 연출했다. "세방살이", "감주", "바보나으리", "술친구" 등 소품에서 그는 못난이(小芻), 머저리, 바보 등 역을 맡아서 관중을 웃겼다. 평안도인 그는 평안도말 자체가 사람을 웃기기에 평소 평안도사투리를 많이 쓰고 장소마다 다른 사투리로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자신이 구겨지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웃길수 없다는 그는 챠플린 등 동작을 너무 근사하게 흉내내였는데 어떤 사람은 아예 강영삼씨를 보고 "채플린" 또는 "떨만이"("세방살이"의 인물)라 불렀다. 그는 대창(對唱)을 잘 불렀는데 학교교사때 "우리 소녀 백점 맞았네"를 학생과 같이 대창하여 전교를 들썽케 했고 최근에는 "요렇게 조렇게" 라는 대창을 불러 장내를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두 누이나 녀동생들이나 또 그의 두 아들딸들이나 모두 옷기기를 즐긴다. 그래서 처녀때 새차고 말수가 적었던 그의 안해도 성격이 개변되리만치 활달해졌다. 온가족이 항상 무뚝뚝하게 있는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웃기기 시작하면 웃기기 시합이라 하듯이 우스개소리가 떨어질줄 몰라 시종 화기가 돌았다.   그는 우리말 사투리 자체가 웃긴다며 시간이 있으면 우리말 사투리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싶다고 했다.      소개신 한장에 사라진 꿈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말을 잘해라" 부친의 이 한마디 말은 학생시절 그가 학업에 열중할수 있었던 동력이 되였다한다.   신빈태생인 그는 7살되던 해 심양으로 이사했다. 처음엔 서탑 정미소 부근 한 일본집에 들었다가 1년뒤 명렴가로 이사해서 그는 명렴대리조선족소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어릴때 얼마나 까불었는지 이사오던 날 그는 남잡목역에 들어서는 기차를 불과 5메터 앞두고 레루길에 서서 놀다가 렬차관리원에게 붙들려 호된 꾸지람과 매를 맞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씨름을 잘해서인지 그를 당해낸 사람이 없는 주먹대장이다. 그의 가족이 대흥향 전성촌이라는 중국동네에 이주하는바람에 그는 소학 6학년을 졸업못하고 한족소학교에 전학하여 4학년에 입학했다가 중국어를 도무지 알아듣을수 없어 다시 3학년, 2학년, 결국은 1학년부터 다시 다녔다. 처음에는 부끄러운줄 몰랐다가 같은 또래들이 중학교를 다니는걸 보고 철이 들기 시작, 그때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4학년때 대흥소학교로 전학했고 그후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의 금이 세개 있는 완장을 두른 대대장으로 되였다.   1959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 그는 심양시1중을 지망했다. 그때는 학생들이 자기의 성적에 따라 중학교를 선택할수 있었는데 그는 어문성적은 우수해서 매번 5점이였고 수학성적이 좀 나리였다한다. 후에 통지가 왔는데 그는 지망대로 심양시1중에 진학, 대흥소학교에서 유일하게 심양시1중에 붙은 학생으로 되였다. 심양시1중은 대동구에 있었는데 왜정시대 학교건물이여서 인상에 학교건물도 좋았고 학교시설도 훌륭했다. 그는 마치 날개가 돋혀 날아갈것만 같은 기분이였다. 그때 전교에 조선족은 유일하게 강영삼씨 혼자였는데 개학해서 얼마안되여 성이 조씨라는 녀담임선생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반장으로 임명한다고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학급에 학생이 모두 55명, 유일한 조선족으로 반장이 되였으니 말이다. 전학급에서 연설할 때 그가 말을 더듬거리자 담임선생은 너무 격동되서 그런다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동학들도 나이가 많은 그를 보고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장"이라 깎듯이 불렀는데 그때 그는 중국어를 한족처럼 잘하겠노라고 은근히 벼르기도 했다.   하루는 부교장이 그를 찾았다. 수두룩이 쌓인 편지더미를 가리키며 조선어를 중국어로 번역해보라는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문제없다고 대답했고 며칠을 씨름하며 그 편지를 중국어로 다 번역해냈다. 이 편지들은 학교 선배들이 조선 평양중학교 학생들과 거래한 서신이였는데 마침 그가 번역해내면서 그는 학교내 유명인물로 되였다. 가정이 곤난한 그는 당시 2등 조학금 월 9원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그를 당과와 단과 학습에 참가시키면서 중요대상으로 배양하였다. 그때 그는 적잖은 자본가와 지주의 자제들이 당과 공청단에 가입하는걸 보면서 자기도 하루빨리 이 대오속에 가입하리라 결심했다. 그때는(1961년) 계급투쟁이 갓 시작되던 때였는데 도시보다 농촌에서 그 분위기가 더 짙어갔다. 여직껏 자신이 청백한 성분으로 알고있었던 그는 1년뒤 소개신을 떼러 촌에 갔다가 소개신 뒤에 써준 부농성분을 보고 눈앞이 아찔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부친이 신빈현 백기촌에 있을 때 촌장을 한적이 있어 성분이 부농이라는것이였다. 며칠동안 고민속에 모대기던 그는 담임선생을 찾아가 가정이 곤난하여 학교를 다닐수 없다고 핑계를 댔고 담임선생과 동학들과 눈물을 뿌리며 그렇게 갈망하고 열망했던 학업을 그만두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그는 그렇게 자기를 믿어주고 밀어주던 담임선생과 학교령도를 속였다는 죄책감에서 차마 부농성분이 찍힌 소개신을 내밀수 없었던것이다.    음악과 미술에 남다른 흥미가 짙었던 그는 학업도 학업이였지만 매번 활동때마다 신나게 연출하는 학교악대의 연주가 부러워했고 또 선배들의 참군을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이 모든 꿈이 그 소개신 한장때문에 산산쪼각이 나고말았다.     "부농"의 자식에서 교원으로   하루아침에 "부농"의 자식으로 락인된 그는 농촌에 와서 재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부친이 부농성분으로 획분된것은 상급의 어느 지시정신에 근거한것이 아니라 농촌의 토배기정책에 의한것이였다 한다.   성분이 나쁜 사람겐 개조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가슴깊이 새긴 그는 새벽 4시 이슬을 이고 들에 나가 모를 져서 논판에 펴놓고 사람들이 나오기 기다렸가 같이 모를 꽂았고 남들이 다 들어간후 일손을 거두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바람이 세차게 번지던 시절, 그가 살던 신광대대에서 투쟁대상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 결국 "부농"의 자식이였던 그와 그의 모친은 "4류분자"로 투쟁의 화살을 피할수 없었다. 그의 모친이 쓴 죄장은 남보다 좀 살았다는것이 고작이였다. 그들 모자는 마을 소텅간 옆에 있는 헐렁한 집에 같이여 집조차 갈수 없었다. 투쟁할 때는 "강영삼을 타도하자"라는 글에 빨간 승표를 친 커다란 간판을 목에 걸고 뙈약볕에 서서 투쟁을 받았다. 모친이 투쟁당하면서 뺨을 얻어맞는걸 본 그는 모든 죄가 자기한테 있다며 조금이라도 모친의 고통을 덜어주려 모지람을 썼다.   낮에는 투쟁받고 밤에는 검토서를 써야 했는데 투쟁골간들이 일자무식쟁이라 검토서를 받아쥐고 몇장인가 세보고 적다고 다시 윽박지르기도 하였다. 하루는 집을 수색하다 오선보가 적힌 조선음악책이 나오자 무슨 비밀암호인가고 따져물어 음악책이라 한적도 있었다한다. 로동개조는 동네 모든 청소였는데 소텅간에서 집집마다 변소를 청소였다. 구린내가 코를 찌르는 한여름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동네에서 년세가 있는 사람들은 강영삼씨 모자가 무고함을 빤히 알면서도 누구하나 앞에 나서서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하나 그들 모자와 감히 말을 건네지 못했고 일이 있어 그의 집에 가도 등록해야 했다.   그때 동네에 벽돌집 한채 없었는데 후에 한족미장쟁이들이 와서 일하는걸 훔쳐본 강영삼씨는 눈썰미가 좋아서 후에는 아예 미장쟁이가 되여 동네 집집의 굴뚝을 쌓아주었다. 그리고 신광소학교 변소도 그때 그가 처음으로 직접 지었다. 후에 또 목수일까지 배워낸 그는 손재간이 너무 좋아 이불장, 가시장, 옷장도 척척 짜냈는데 쏘파도 여러개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투쟁은 좀체로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한 마을에 사는 한 녀성과 결혼했지만 태여날 자식들의 자기와 같은 "4류분자"의 신세를 면치 못할 캄캄한 앞날을 생학하던 어느 하루 자결을 시도하려 했다가 주변의 감시가 심해 결국 목숨을 끊치 못했다.   "재간둥이"이였던 그는 모진 투쟁속에서도 자기의 여러가지 재간을 익혀나갔고 더우기 음악에 심취한 그는 끝내 음악창작에서 두각을 내밀어 사회의 인정을 받을수 있었다. 1974년 그가 작곡, 작사하고 안무한 무용 "빈하중농 재교육 받네"가 전구문예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그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여 그는 끝내 이해 8월 오가황조선족소학교 음악미술교원으로 정식 초빙되였다.   3년동안 오강황조선족소학교 음악미술교원을 하던 그는 1977년 심조3중이 서면서 심조3중의 음악교원으로 전근돼서 자신의 음악재질을 과시했다. 심조3중 건립초기 그가 조직한 악대와 지휘한 "동방홍" 합창은 시조선족중소학교문예콩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는 학생들로 구성된 악대를 조직하여 여러번 문예콩클에 참가하여 상을 받았으나 후에 심조3중에 고중이 없어지고 초중만 남으면서 초중생들에게 희망을 걸기엔 너무 힘이 부치다 생각하고 교원악대를 조직하여 여러차 공연하여 수상하는 실적도 쌓았다.           꺾을수 없었던 음악의 불씨   사회에선 강선생은 음악선생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전문 배운것은 아니다. 그는 피리에서 크라네트, 손풍금, 바이올린에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줄 알고 또한 작곡도 하고 안무도 할줄 알기에 로인협회에선 음악골간이다. 천생적으로 음악의 자질을 타고난 그여서인지 이 모든 악기를 놀라운 의지로 자학해내였다.   "부농"의 자식으로 억울한 죄명을 쓰고 투쟁받던 나날 그의 가슴에 지핀 음악의에 불씨는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학업의 꿈을 접고 농촌에 온 그는 처음으로 신광대대선전대를 조직하였다. 그때 악기란 그가 산 낡은 손풍금 한대와 장구 하나, 그리고 만든 피리뿐이였다. 후에 크라네트 역시 그가 가마니를 짜서 판 돈으로 샀다. 농촌문화생활이 거의 없었던 시기, 그들의 공연은 삭막한 농촌마을에 생기를 부여했다. 여기서 신바람이 난 강영삼씨는 혼자서 심양시조선족문화관에 가 무용반에 참가해 춤도 배우고 장구도 배웠다. 대대에서 파견하면 보조를 받을수 있었건만 자기처럼 성분이 나쁜 사람은 파견할리 만무하다는것을 누구보다 잘아는 그는 신광대대에서 7,8리를 걸어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북역에 와서 내려 다시 걸어서 문화관까지 왔다. 그러나 민족음악에 청춘이 불타오른 그때 조금도 힘든줄 몰랐다. 김관장이 민족음악을 잘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 말을 듣은후부터는 조선상점에 가서 민족악기를 보고는 참대를 사다 모방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굵은것은 단소, 중간것은 젓대, 가는것은 피리 처음에는 제대로 되지 않아 수없이 참대만 짜개버렸지만 끝내 하나하나 음이 비슷한 악기가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때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악보가 무엇인지 몰랐던 그는 태원가에 있는 한 음악학교에서 배워주는 악보지식을 창문너머로 조금씩 훔쳐배웠고 후에는 다른 사람의 화성책이나 기타 음악책을 빌려서 하나하나 베끼면서 짬짬히 자학했다. 1965년 연변조선조가무단이 전국소수민족문예콩클 참가차 심양에 들려 공연을 본 그는 완전히 민족음악에 심취해버렸다. 그때 민족음악이 그렇게 훌률하고 아름다울수 없었다한다.   그래서 한여름 비닐신을 신고 투쟁받던중 발가락으로 도레미화 하며 악곡에 골몰하다 결국 발각되여 벽돌에 꿇는 고통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1968년 심조1중 졸업생들이 하향하여 신광대대에 와 모주석어록을 선전한다고 할 때 강영삼씨는 다시 선전대로 불려가 자신의 창작을 할수 있었다. 그때 그는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해놓았던 나무를 잘랐고 거기에 성차지 않아 산골에 가서 목재를 구해다 6개의 가야금을 만들었다. 초라했지만 가야금과 같은 음이 나온다는데서 그는 매우 흡족했다. 그가 선전대에 나오면서 마을에선 민족음악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전대의 활약으로 하여 대대의 벽에 걸려있는 상장도 수두룩해졌다.   그를 최종 투쟁대상에서 벗어나게 한 무용 "빈하중농 재교육 받네"'는 그의 피와 땀의 결정이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악대 지도에서 안무, 작곡, 작사 모두가 혼자 도맡다싶이 했고 모판에 씌운 비닐과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그는 동네에서 우산을 빌려다 그우에 씌운 천을 뜯어버리고 거기에 비닐을 씌워 비닐박막을 만들었으며 천둥소리를 내기 위해 모진 고민끝에 벽에 걸린 "모주석이 안원으로 가다"의 큰 철판그림을 흔들어서 같은 효과를 낼수 있었는데 그때 이 종목은 형세에도 맞고 내용도 풍부하고 기교도 뛰여나는 등으로 하여 구문예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했고 강영삼 이름석자를 전구에 쫙 소문냈다.   투쟁을 받던 그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괴씸하고 눈물나기도 하지만 그때 음악에 눈을 틔이고 끈질긴 추구로 오늘날이 있었다는것이 희비가 엇갈리고 만감이 교차된다고 했다.   민족음악에 여생을 불살라   1994년에 딸애의 결혼식으로 한국에 나갔다 한국채무자와의 송사건으로 제시간내 귀국 못한것으로 하여 교원직을 떼우기도 한 그였지만 2004년 귀국하여서부터 현재까지 한국에서 일하다 아리랑예술단이나 로년협회무슨 활동이 있다면 두말없이 비행기를 타고 선후 4차 날아왔는데 거기에 든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지금 아리랑예술단 악대 부단장인 그는 로인들의 합창을 지도할라 무용을 감독할라 여념이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애호이자 자신의 쾌락, 자신의 인생이라 한다.   민족음악을 위해 쓰는 돈은 하나고 아깝지 않다는 그는 지금도 웬간해서는 택시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리용한다. 한푼이라도 아껴서 민족음악을 위한 사업에 쓰고싶다는 그다. 처음으로 귀국하여 심양에 아리랑예술단이 있는것을 보고 거기에 매료된 그는 애착감을 갖고 관심하고 정력투구는 물론 물심량면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재입국자 신분으로 귀국하여 다시 한국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로 한국에서 일하던 그는 아리랑예술단의 공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일당 12만원의 일감도 팽개치고 사비를 팔며 심양에 돌아와 공연에 참가했고 그후에도 노가데판에서 일하다가도 로년협회 활동이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 여러번 날아왔다. 그는 심양에 조선족가수들이 발전할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처음으로 조선족가수가요무대를 제안하여 실현시켰고 요새는 심양조선족노래자랑을 할뜻을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 내비치고 경비는 1차적으로 자신의 사비로 보태겠다고 선뜻 제안해 동감을 자아냈다.   1989년부터 민족악기인 장새납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접촉하기 시작한 그는 귀국하여서부터 선생을 찾아 배우고싶은 욕망에서 지난해 5월 연변에 연변가무단 1급 장새납연주원 김호윤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음색과 취법을 배워 성문예콩클에서 선후 금상과 은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10월 북경에서 있은 '올림픽맞이 2007-2008 화인의 별 음악콩클'(세계화인문화예술교류협회, 중화문화예술교류협회, 중국무용가협회, 중국연출가협회 등에서 조직)에서 장새납 독주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난해 5월 연변에 가서 한달간 장새납을 배울 때 어머님이 96세로 별세하였는데 만약 자신이 곁에서 돌봤다면 100세는 장수했을거라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이밖에 그는 비디어와 사진촬영에도 재간있어 사비를 팔아가며 무료로 아리랑예술단과 로년협회 활동 장면을 촬영하였고 심양한국주행사기간 여러가지 활동도 거의 빠지지 않고 록화하고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취미이자 자료로 남기고싶어서이다고 했다. 결혼과 축수연에도 로인들이 찾으면 가서 비지땀을 흘리며 록화해주고 사진을 찍어주느라 반찬도 제대로 들지 못했고 거의 무료로 하는때가 많았다. 또 반주곡을 미디음악(電腦音樂)을 통해 제작할줄 알았는데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고 자기 돈으로 CD를 사다가 공을 들여 공짜로 만들어주었다 한다.   그가 민족음악사업에 이처럼 여생을 불태우고 또 로년들을 위해 헌신할수 있은데는 문화대혁명기간 비인간적인 처우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꾿꾿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관과 시종 강인하면서도 락관하는 생활태도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 그의 여생에서 웃음과 민족음악가 더북어 빛을 발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오지훈기자     
12    중국조선족기업은 진흙속의 진주같은 존재 댓글:  조회:2102  추천:0  2012-02-14
중국조선족기업은 진흙속의 진주같은 존재        2010.02.26. 20:39 .bbs_contents p{margin:0px;} [removed]//[removed]         한국의 중국시장수출의존도가 20.5%(미국과 일본의 수출량을 합한것보다 더 많음)에 달하면서 중국 13억 내수시장 확보여부가 한국의 살길이라고 할만큼 중국시장에 대한 비중이 크게 실리고있으며 삼성, LG 등 대기업들의 새해화두 역시 중국을 제2의 르네상스로 대중국출구전략을 구사하고있다고 한국언론은 전하고있다.     따라서 중한경제교류에서 교량역할을 하고있는 중국조선족기업에 대한 연구가 그 어느때보다 값진 테마로, 시급한 연구분야로 떠오르고있다. 이에 한국 전남대학교가 앞장에 서고있다. 기자는 일전 한달동안 심양에 체류하면서 료녕성조선족기업인들을 집중 인터뷰하며 연구사업을 수행하고있는 이장섭교수와 만나 대담을 나누었다.       문: 중국조선족기업을 연구하게 된 배경 및 그동안의 진전상황은?   답: 700만 재외동포를 민족자산화하자는 정책하에 한상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전남대학교는 2002년에 한상문화연구단을 발족하여 2003년에 한국정부 유일의 재외동포연구단체로 선정되였으며 단장을 비롯해 연구교수 및 보조원 등 70여명 연구진을 갖추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33권의 전문서적외 국제학술대회 약 70회, 국내학술대회 150회 및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한상문화연구단은 11개 분과로 나뉘는데 그중 중국한상팀은 중국진출 한국기업 및 중국조선족기업을 연구, 특히 중국조선족기업을 집중연구하고있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중국조선족기업수는 1만 7,500여개소인데 이들은 많이는 한국기업과의 합작, 합자방식으로 운영되며 상호간 밀접한 관계로 상생의 길을 열어가고있다. 그동안 연변, 심양, 북경, 청도, 상해, 할빈 등 조선족기업인을 방문 면담해 중국조선족기업관련 3권의 책을 집필했고 여러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이 기초에서 중국 각 지역별 각론을 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미 연변, 흑룡강지역 기업인들과의 인터뷰를 마쳤으며 이번에 료녕지역 기업인들을 방문 면담하였다.     특히 《중국조선족기업네트워크》저서에서 그동안 면담하고 설문한 내용을 도표로 제작하여 독자들이 한눈에 중국 여러지역 조선족기업인들의 네트워크 상황, 진전과 그 필요성을 알게 하였는데 중국조선족기업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자료로 될것이다. 이 도서는 2009년 대한민국학술원 기초문학분야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문: 이 몇년간 중국 여러 도시들을 누비면서 적잖은 조선족기업인들을 인터뷰했는데 조사연구에서 착중한 점과 조선족기업들에 대한 총체적인 인상은?       답: 처음으로 시도하는 연구인만큼 조선족기업들의 창업동기, 성장과정, 판매거래처 상황, 그리고 한국기업과의 관계 등 네트워크정보와 향후 희망업종에 대해 많이 질의하였다.     조선족기업에 대한 느낌을 아래 몇가지로 개괄해볼수 있다. 첫째, 조선족기업 다수가 채무가 없이 자기 자본력에 의해 알찬 성장을 이루어왔다. 둘째, 끊임없는 노력과 정직, 성실성을 통해 성공을 이뤘다. 기업운영과정에서 상호신뢰를 원칙으로 파트너에 대한 최선의 배려와 투명, 신뢰경영을 엿볼수 있었다. 셋째, 년령층을 볼 때 30-40대가 주류를 이루었고 20대나 50대는 적었으며 교사출신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기업에서 4-5년간 근무하다 경영기법을 배운후 자체로 창업을 시작하였다. 지적수준이 높은데다 한국의 선진기법을 배워서인지 성장속도가 빠르다는 점이다. 넷째는 민족의식이 강한것인데 어렵게 성공하였지만 민족교육과 민족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고있다는 점이다. 우에서 말한것이 장점이라면 단점으로는 첫째는 지나치게 내실경영만 추구하다보니 기업성장에 한계가 있다. 둘째는 중국기업들과의 네트웍이 미약한데 특히는 중국내 대기업과의 협력이 부족하다. 셋째는 단순한 제품모방 즉 기존모델에 의한 생산판매에만 그치는데서 기업이 더 크지 못하고있다.   문: 조선족기업은 부의 축적에서 자본력을 키우고있는 중인데 아직은 걸음마를 타는 단계라 할수 있다. 조선족기업이 어떻게 하면 빨리 성장할수 있을지?     답: 방금 우에서 말했듯이 젊고 진취적이고 지적수준이 높고 중국내수시장이 크다는 장점을 잘 활용하여 성장을 꾀해야 하고 IT, BT, NT, ET 등 미래성장이 가능한 첨단산업에 과감히 뛰여들어 제품을 개발하여 중국내수시장뿐만아니라 세계시장에도 진출할 꿈을 키워야 한다. 그동안 한국기업과의 합작, 합자과정에 서로 언어적, 문화적 차이 등에 의한 상호갈등도 빚었지만 이제는 상생을 위한 리해폭을 넓히고 상호 신뢰와 투명경영을 통해 윈-윈관계를 모색해나가야 한다. 따라서 한국기업이 중국내수시장을 확장하는데 있어서 자체의 이중언어구사나 기존 판매네트웍 등 우세로 립지를 굳히고 탄탄한 경제기반을 마련하여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문: 현재 한국에선 중국조선족기업을 어떻게 보고있는지?     답: 중국조선족기업은 진흙속의 진주와도 같은 존재이다. 중국내수시장 확장에서 중국조선족은 천혜의 자원이라고 할수 있다. 이 점은 일본기업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점이다. 한중수교후 량국간 무역거래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데는 조선족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특히 한상문화연구단의 중국조선족기업연구는 한국사회에 중국조선족기업을 알리는 계기가 되였다. 한국언론에서도 조선족기업을 적극적으로 취재하여 홍보하고있어 한국내 조선족기업들의 위상이 높아지고있으며 한국기업들도 조선족기업을 과거보다 많이 신뢰하고 상호 합작이나 합자를 통해 투자하는 사례가 늘어나고있다. 또한 매년 한국에서 개최하는 한상대회에 중국조선족기업대표단이 참여하면서 상호리해 및 협력의 장이 마련되고있다.     아직은 힘이 약하나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에 편승해 발전잠재력을 갖고있는 조선족기업은 한국의 선진기술이나 우수제품을 리용하여 중국시장을 확장하는데서 성장가능성을 발굴할수 있다고 본다.     이장섭교수는 중국출장에서 촘촘한 스케줄을 갖고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손을 잡고 너무 고맙다고 인사하는 조선족기업인들을 대할 때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책임감이 더 커진다며 자신들의 연구가 단지 학문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업들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자그마한 힘이 되였으면 한다고 했다.            오지훈 기자  
암 결코 두려울것 없다 -안산시제2병원 이비인후과 주임의사 김귀덕씨 암을 말한다   암은 죽음의 대명사와 다름없다. 암은 불치의 병으로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고 인류를 죽음의 공포속에 몰어넣고있어 인류의 암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 할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매년 약 850만명이 암으로 사망되고있으며 우리 나라도 매년 190만명이 죽어가고있다. 특히 35살 이상 년령대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암은 정말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가?   안산시제2병원 이비인후과 주임의사 김귀덕씨(1957년 생)는 “결코 두렵지 않다”고 대답하고있다. 10년전 암환자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경력을 통해 인류가 암과 싸워이길수 있다는 희망과 신심의 메시지를 주고있다.                     암과의 인연   내가 암환자를 만난것은 1968년 11살때이다. 개원에 사는 잘아는 사람이 위암에 걸렸는데 나는 어머니가 안산의 한 병원에서 지어준 위암약을 들고 네시간 남짓이 홀로 기차를 타고 또 한시간 농촌길을 걸어서 그 환자에게 약을 갖다드린적이 있었다. 그러나 1년도 못가 그 환자는 죽었는데 그때부터 암이 무서운 병임을 알게 되였다.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하향지식청년이였던 나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심양에 있는 중국의과대학 의학학부에 진학하였고 암을 정복하겠다는 꿈을 갖고 의학공부에 진력하였다. 졸업후 기층병원에 배치받았고 림상실천속에서 암증이 이미 인간생활에서 일상적인 병, 다발적인 병임을 발견하게 되였다.   1987년 12월 어머니가 불행하게도 위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하였어도 별 효험이 없자 당시 곽림(郭林) 신기공을 접촉한 나는 이듬해 봄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공원에 가서 기공을 련마하였는데 2,3개월의 기공단련과 기타 재활치료를 거쳐 어머니의 기력은 많이 회복되였다. 그러나 위암말기여서 병세는 계속 진전되였고 경부와 복부에도 림파전이현상이 생겨 부득불 료녕성종류병원에 가서 화학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한개 치료과정을 거치니 몸은 더욱 허약해졌으며 정상외출마저 힘들어졌다. 후에 일루의 희망을 안고 침구치료를 시작하였는데 강호(江湖)의사는 어머니의 복부 림파덩어리에 작은 걸상으로 못을 박듯 침을 박아넣었다. 한번 치료하면 반년 문제없고 세번 치료하면 4년 문제없다고 하였지만 결국 한번 맞은 뒤 어머니는 식음까지 전페하였고 정맥혈액주사로 목숨을 부지하다 한달 좀 넘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이러한 일들은 나를 더욱 암연구에 집념하게 하였다. 나는 여러사람들이 암과의 싸움 특히 “암정복스타(抗癌明星)”들의 치료과정을 연구하면서 단순한 의학치료수단으로 암을 치료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심리요소를 통한 암치료의 중요의의에 대해 갈수록 깊은 인식을 갖게 되였다.   그런데 나에게도 암이 광림할줄이야. 2001년 2월 9일, 변혈(便血)로 반년 남짓 고생하던 나는 “직장암(중도분화)”으로 진단받았다. 이때 나는 그 어떤 공포와 근심을 갖지 않았다. 하느님이 나에게 실전의 기회를 준것이였기때문이였다. 나는 당황함이 없이 이미 받은 6,7명 환자들의 수술을 마친 뒤 1주일 뒤인 2월 17일 “직장암수술”을 하고 60€L?0미리메터의 종양을 제거하였다. 가운데에 궤양이 생긴걸 봐 조기는 아니였다. 수술후 12일만에 걸어서 퇴원하였고(집이 병원에 있었기에) 그뒤부터 거의 매일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회진하였으며 한달 좀 넘어서는 병원에 가서 병자들을 위해 직접 수술을 하였다. 나는 수술한후 화학치료나 방사선치료를 받지 않았고 또 한약이나 건강식품도 먹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기의 강한 신념을 갖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심태조절에만 주의하였다. 이렇게 십년 세월이 흘렀다. 내가 “암환자”라고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로 심신이 건강해졌고 얼굴에도 붉은 기색이 돌았다. 나는 친선경력을 통해 암을 정복할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암이 결코 두렵지 않다는것을 세인들에게 과시하였다.                 왜 암에 걸리나?   암의 유발원인에는 내적 외적 요소가 있다. 동등한 환경, 식습관, 돌발사건, 유전요소, 불량생활습관 등 외부환경속에서 암에 걸리는 확률은 매우 작다. 그러나 흡연은 직접 암을 유발시키는데 비흡연자에 비해 흡연자의 암확률은 몇배에 달한다. 그렇다면 암환자와 정상인간의 부동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마다 면역상태가 같지 않은데 있다. 정상적인 면역상태에서 기체(机€|?는 치밀한 자체회복과 완성능력을 갖고있지만 면역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는 파괴된 세포조직을 회복할 능력을 상실하여 국부에 암변이가 생긴다. 그렇다면 기체면역력의 실조는 왜 생기는가? 개체의 심태균형파괴(火, 화)라 본다. 심태의 실조는 왜? 개괄해서 말한다면 개인의 기대치(욕망)와 객관현실간 차이나 충돌 및 돌발사건의 의외적인 타격, 장기간 불량정서의 자극 등이라 할수 있다.   무릇 암환자는 개개가 이러한 심리특점을 갖고있다. 승벽심이 강하고 일정한 능력이 있으나 일이 순탄하지 않고 마음이 선량하고 일의 완벽을 추구하며 또 내심의 충돌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압력을 감당하기에 오랜기간 내심이 초조한 상태여서 자주 실면하는것으로 나타난다. 병리생리상에서 볼 때 장기실면하면 과도긴장되고 초조한 심리는 신경을 지나치게 흥분시켜 과다한 호르몬을 분비하게 하여 기체의 면역기능을 피로하게 만든다. 인체가 “면역피로상태”에 처하면 면역계통이 제구실을 할수 없게 된다. 따라서 “면역피로상태”가 즉시적으로 해결되면 면역계통이 정상기능을 하여 암세포의 생장을 억제할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 면역기능이 감퇴되고 쇄갈상태에 이르게 되고 병이 “골수”에 박히게 된다.   내가 암에 걸릴 때도 이와 비슷했다.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는 성미로 기층병원의 의사로 최고수준의 의사가 되는것을 목표로 했고 언제나 “제일”을 추구했다. 렬악한 조건에서 본 전업과 관련된 대수술들은 거의 내가 하였고 선진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평을 들었지만 계속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집착하다보니 결국 암에 걸리고말았던것이다.                    몇가지 암치료법   암을 치료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아래 몇가지만 요약 소개한다.   (1) 수술치료법. 국부의 암조직에 수술이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수술은 국부의 암조직을 제거하여 수량적으로 암세포를 감소시키는것을 통해 환자를 위해 면역력을 회복하는 시간을 쟁취하는데 있다. 그러나 “면역피로상태”가 지속된다면 암세포가 계속 생장할수 있고 지어 사망을 초래할수 있다. 그러므로 수술을 만사대길이라 할수 없다.   (2)  화학치료법. 혈액계통의 악성종양을 치료하는 주요 치료법이다. 화학치료는 혈액계통의 악성종양을 철저하게 제거할수 없을뿐더러 엄중한 부작용이 있어 앞으로 개진하고 보완할 부분이 많다. 화학치료는 암세포를 완전제거한다는 리론을 근거로 하고있지만 사실상 그렇지 못하며 기체의 면역력을 손상주기에 면역학원리와는 배치되고있다.   (3) 방사성치료법. 비인암(鼻咽癌) 등 모종의 특정된 종양에 대해 효과가 있다. 또한 수술치료를 받을수 없는 환자에게는 역시 적합한 방법이다. 그러나 부작용은 화학치료법과 마찬가지이다.   (4) 면역치료법. 암환자가 “면역력저하”라는 리론의 근거하에 외부로부터 면역인자(因子)의 수량을 증가시켜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량의 면역인자를 얻는 방법조차 해결되지 못하고있다.   이밖에 중약치료법, 기공치료법, 운동치료법, 음식치료법, 건강식품치료법 등이 있다. 이런 치료법들은 다 장단점이 있는데 중요한것은 수술치료를 받아 빠른 시간내 면역기능의 정상을 회복하는것이라 본다.           암 과학적으로 대처해야   나의 경험으로 보면 “과학적으로 암을 대처하는것(科.A抗癌)”이다, 암은 조기와 중기에는 “면역피로”에서 만기(:錮?에는 “면역저하”이고 말기에는 “면역쇄갈”이다. 그러므로 “면역실조”를 둘러싸고  “조절”해야지 “제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체는 하나의 완벽한 자체귀환과 자체완성의 체계를 갖고있으며 환경에 대해 아주 강한 적응성과 자체의 조해와 회복능력을 갖고있다. 따라서 암은 외부의 힘에 의해 치료하려 하지 말고 자체면역력에 의거해  전승해야 하며 자력갱생을 위주로 외부의 지원을 받는것이 암정복에서 취할바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암치료에서의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암치료에서 사람들은 왕왕 이런 중요사실을 홀시하고있다. 그렇게 많은 치료법이 있지만 림상에서 경전으로 알려진 3대, 4대 치료과정을 거치면 대부분 사람들이 죽고만다. 그러나 산 사람들중 3대 치료법보다 한가지 혹은 두가지 치료법(주요하게는 수술)이나 아예 이런 경전치료법을 쓰지 않은 사람도 많다.   심리심태조정도 암치료의 중요수단이다. 먼저 병자와 그 가족의 공포심리를 해결해야 한다. 암진단이 내려지면 사망판정이나 다름없어 환자 본인뿐만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까지 공포의 심리속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암은 심근경색, 뇌출혈, 교통사고에 비해 치료할 기회가 많다. 중국의 “암정복사령(抗癌司令)”으로 불리우는 고문빈(高文彬)은 1976년 페암에 걸려 북경301병원에서 수술후 3개월을 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을 깨고 20여년간 살아왔는데 이미 80고령을 넘겼다. 그러므로 가정의 사랑과 지지는 암치료에서 절대 홀시할수 없다. 다음 자책심리를 해결해야 한다. 많은 환자들이 지나친 기대치로 인해 암에 걸리거나 또 완벽주의때문에 암에 걸리기에 심신부담을 덜어야 하는데 특히 자책심리를 떨쳐버려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 강조할것은 수면이다. 정상수면이 보장되면 피로했던 면역기능이 회복될수 있다. 나는 매일 오후에 1, 2시간 수면을 취하고 저녁에도 6,7시간 잔다. 그러므로 수면은 암정복에서 매우 중요한것 같다.   20여년간의 림상실천과 십년간의 자신의 경력을 통해 암과 싸우는데 있어서 치료법보다 살아남은 사람을 관심하는데 있으며 암유발원인을 찾아내는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암은 치료해서 나은것이 아니라 자체 심태조절을 통해 좋아지는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의대 졸업생에서 주임의사와 심리자문사로, 료녕성의덕기준병에서 안산시명의로 암과 당뇨 자체치료과정의 체험을 아래와 같이 적어본다. “자기의 마음을 조절하고 자기의 입을 조심하고 타인과 적게 비교하며 하루하루를 괘활하게 살아간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암환자의 직접비용이 1,000억원으로 인당 평균 12만원 이상이다. 그러나 김귀덕씨는 암을 치료하는데 과학적인 대처방법과 심태조정으로 2만여원밖에 쓰지 않았다. 언제나 활달하고 쾌활하게 산다는 김귀덕씨는 암에 대해 “면역피로상태”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기하고 자신이 암과 싸워온 경력을 《나의 이야기》 책자속에 담을 계획이라고 한다.  오지훈기자  
10    중국화속의 향촌마을” - 안휘 굉촌 10/28/2011 댓글:  조회:1932  추천:0  2012-01-17
중국화속의 향촌마을” - 안휘 굉촌     황산 여맥의 양천령, 뢰강산 등에 의지하고있는 안휘 이현의 동북부에 위치한 굉촌(宏村)은 면적이 19.11헥타르로 지세가 높은데 운무가 드리워졌다 가셨다 하는것이 한폭의 긴 산수풍경화처럼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이 어우러져 “중국화속의 향촌마을”로 불리우고있다. 남송 소희년간(기원 1131년)에 건설된 고대건축들은 800여년이 넘지만 지금도 옛 건축모습이 잘 보존되여 관광철이 되면 이곳을 찾는 국내외 관객들의 발길이 끊길줄 모른다. 사진은 굉촌으로 향하는 관객들의 행렬.            
9    중국의 첫 습지국가공원ㅡ서계습지국가공원 11/25/2011 . 댓글:  조회:2368  추천:0  2012-01-17
중국의 첫 습지국가공원ㅡ서계습지국가공원    항주라면 쉽게 떠오르는것이 서호지만 서호외에 최근년에 관객들의 발길을 끄는 또하나의 풍경구가 생겨났다. 이 풍경구가 바로 절강성 항주시의 서부에 위치해있는 서계(西溪)습지국가공원이다.   강택민 전 국가주석의 친필제사 "서계습지국가공원"   서호에서 5킬로메터 떨어져있는 서계습지국가공원은 보기 드문 도심속 차생(次生)습지로 생태자원이 풍부하고 자연경관이 질박하며 문화침적이 두터운 곳으로서 일찍 서호, 서랭(西冷)과 함께 항주의 “3서”로 불리우기도 했다. 현재는 국내의 최초이면서도 유일한 도시습지, 농경습지, 문화습지를 아우르는 국가습지공원이다.   일명 또 “항주의 신장(腎臟)”이라고 불리우는 서계습지국가공원은 동쪽의 자금항로의 서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도시순환도로 동쪽까지, 남쪽의 연산하에서 북쪽의 문이로에까지 이르는데 부지면적이 약 10.08킬로메터이다. 현재 개방된 구역은 3.46평방킬로메터로 유원보행도로를 따라 한바퀴 도는 시간이 3시간 반이 소요된다. 고장마을 루각에서 내려다본 마을과 습지의 조화된 모습   관객들은 서계습지국가공원 문앞에서 입장권을 뗀 다음 공원안에 들어서서 축전지차를 타고 배를 타는 곳으로 향한다. 여기서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가다렸다가 다시 축전지배를 타면 즐거운 서계습지의 유람이 시작된다. 유유히 달리는 배우에서 관객들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풍경구의 소개를 들으며 대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어간다. 강폭처럼 때로는 좁아졌다 때로는 확 넓어지기도 하는 물줄기를 따라 습지소택지에 무연하게 펼쳐진 감나무, 매화나무 등 이름모를 나무들과 풀로 우거진 대자연의 조화에 감탄을 련발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서계습지국가공원이 개방되면서부터는 항주의 서호를 보고난 다음 전당강대교보다 이곳을 더 찾는다고 한다. 습지 한가운데서 유유히 달리는 유람선   배에서 내려 돌다리를 건너니 고건축의 마을이 나타났다. 서계산장이라는 고장(高庄)마을이다. 청나라 순치14년€뿰??년 사이 청나라 대학자인 고사기(高士奇)가 머물렀다던 별장으로 고장, 또는 서장이라고 부른다. 강희황제는 남방을 순라하면서 고장에 들려 “죽창(竹窓:)”과 시 한수를 하사한적 있다. 현재 고장은 고사기의 사택, 죽창, 서옥, 동음당, 초원시사 등 건축이 복원되여 당년의 강희황제가 고장에 묵었던 력사장면을 재현하고있다.   서계동북쪽에는 하저가(河渚街)라는 장마당을 방불케 하는 저자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유람객들의 휴식터이자 쇼핑장소였다. 거리 량켠으로 나란히 늘어선 다방과 상가들에서는 갖가지 명차와 서계의 작은 바구니, 막걸리, 떡, 죽순, 어류제품 등 특산물을 팔고있었다. 그리고 룡주(|基?전시관의 여러가지 룡주조각과 배, 서계극장에서 펼치는 월극공연 등으로 하여 하저가에는 먹을거리, 볼거리로 풍성하였다.   서계습지국가공원은 또한 젊은 련인들의 데이트장소이기도 하다. 강소텔레비죤방송국에서 제작한 181부의 대형교우(交友)프로 “비성물요”(非f%勿6[, 2010년 1월15일부터 방송되면서 전 23주 전국위성텔레비죤방송국의 련속 15차 주간시청률 1위에 오르기도 함)중 일부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여 강소, 광동 남방의 텔레비죤방송국에 의해 방영된후 이곳을 찾는 젊은 청춘남녀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있다.   서계습지를 개발하면서 개발자들은 생물, 생태 등 천연자연보호와 이곳의 력사유적지 발굴, 보호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음을 곳곳에서 볼수 있었다. 서계습지는 2005년 2월 국가로부터 첫 습지국가공원으로 명명되였고 2009년 11월 3일 국제 중요습지명록에 수록되여 우리 나라에서 습지공원개발의 전형으로 되고있다.           
8    성민족과학보급협회 제10기회원대표대회 개최 댓글:  조회:2157  추천:0  2012-01-17
성민족과학보급협회 제10기회원대표대회 개최 -김희성 조선족협회 신임 리사장으로 당선  본사소식 11월 26일, 료녕성민족과학보급협회 제10기회원대표대회가 료녕인민빌딩에서 개최, 심양과 대련, 안산, 무순 등 여러 지역의 조선족, 몽골족 회원 100여명이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먼저 박재림씨(조선족협회 리사장)가 제9기리사회를 대표하여 지난 4년간의 사업성과를 회고하였으며 오옥성씨(몽골족협회 리사장)가 “료녕성민족과학보급협회정관을 수정할데 관한 결정(초안)”(이하 정관)을 선독하였다. 이번에 통과된 “정관”에는 협회활동에서 학술교류와 과학보급활동을 전개한다는 내용을 명시하였는가하면 회원성분에 여러 과학연구기관 중고급과학기술연구원과 대학교수외 중소학교교원도 회원자격을 가지며 리사회의 임기를 기존 3년에서 4년으로 연장한다는 등 내용이 포함된다.   대회에서는 제9기리사회에서 대회에 제출한 제10기리사회 리사장 등 리사진 후선인명단을 다수가결로 통과하였고 선거를 거쳐 조선족협회에서는 료녕전자기술정보소 김희성소장이 제10기 신임리사장으로, 몽골족협회에서는 심양농업대학 식물보호학원 부주범원장이 신임리사장에 각각 당선되였다.   신임리사회를 대표한 발언에서 김희성씨는 “전기 리사회는 협회발전에 량호한 토대를 닦아놓았다”며 “민족과학보급사업에 대한 더 큰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협회를 진정한 ‘민족과학사업일군들의 집’으로 꾸리며 협회자원을 충분히 발굴하여 민족과학보급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해나갈것”을 다짐하였다.   다른 소식에 의하면 료성민족과학보급협회는 회원들간 원활한 정보교류와 상호련계 강화를 위한 협회사이트 www.lnmzkp.com를 이달 24일부터 공식개통하였다.                         
7    사증령사면담제 3개월간 800여건 접수 11/29/2011 댓글:  조회:2068  추천:0  2012-01-17
사증령사면담제 3개월간 800여건 접수 -사증신청불허에 대한 불만요소 대폭 감소 본사소식 주심양한국총령사관(아래 한총관으로 략칭)은 지난 8월부터 여러가지 원인으로 사증을 거부했던것을 령사면담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구제하는 등 사증령사면담제 시행으로 큰 효과를 거두고있다.    사증령사면담제는 담당령사가 사증발급을 희망하는 민원인들을 직접 만나 면담을 시행하는 제도인데 신청한 사증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불허되여 쉽게 불법중개업자들에 속아 사기당하는것을 막고 또 일부 미비한 서류때문에 한국행사증을 발급받지 못하는 조선족들을 구제하자는 취지이다.  한총관에 의하면 령사면담은 매주 목요일에 예약없이 방문선착순대로 면담하고있는데 3개월간 13회 실시하여 도합 817명을 면담, 그중 400여명을 구제하였다. 이 과정에 하루종일 면담을 수행하는 담당령사는 물론 밤늦게까지 불만없이 초과근무하는 접수창구의 직원, 보안요원 등 관련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많았다.   구제된 사례중에는 입국금지자에 대하여 다시 법무부 사증발급승인 상신을 통해 사증을 발급했거나 수차례 사증신청이 불허된 자에 대한 사증발급 사례외에도 입국금지자중 동명인으로 이미 출국하여 사증이 불허되는 억울한 사례도 있었다. 김모씨는 밀입국후 2006년 11월 강제퇴거되여 입국금지되였는바 이후 한국어시험에 합격하여 추첨에 당첨되였음에도 입국금지로 사증발급이 불가하였는데 령사면담을 통하여 사증을 발급받았다. 이런 사례가 5건이나 된다. 불법취업하던 허모씨는 2008년 10월 강제퇴거되여 입국금지조치, 한국국적을 취득한 모친의 병이 위중하여 사증신청하였으나 계속 불허되다 역시 령사면담을 통하여 사증이 발급되였다. 정모씨는 제12회한국어시험에 합격, 추첨에 당첨되였지만 한국어구사능력이 미약하다는 사유로 련속 4회 신청이 불허되여 령사면담결과 한족학교를 다녀 언어구사는 약하나 한국어시험에 합격할 정도의 한국어실력이 된다는 점이 인정되여 사증이 발급되였다. 또 김모씨는 2004년부터 불법체류하다 2008년 3월 자진출국후 입국금지되였다  2009년 4월 입국금지가 해제,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투병중인 부친의 병간호를 위하여 사증을 신청하였으나 2회 련속 신청이 불허되다가 령사면담을 통해 사증을 발급받을수 있었다. 불법체류로 입국금지규제에 묶였던 리모씨는 면담을 통해 올해 1월 규제기한이 만료된 사실을 알아 사증발급을 신청할수 있었다.    사증령사면담제가 시행되면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민원인들은 불허된 리유나 입국 금지기한, 보완해야 할 서류 등을 상세하게 알게 됐다며 령사관의 조치에 환영하고있다.   한달에 2만건 이상 사증신청서류 접수로 초부하업무를 수행하고있는 한총관으로 볼 때 사증령사면담제는 가히 파격적인 조치라 할수 있다. 사증령사면담제는 사증신청불허에 대한 민원인들의 불만요소를 대폭 감소하여 대민원서비스를 제고하였을뿐만아니라 사증관련 궁금사항에 대한 자세한 설명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증브로커의 유혹에 현혹될 위험성을 대폭 감소하였다는 평이다.   사증담당 김영근령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령사면담을 통해 한국에 꼭 갈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사증을 못받아 가지 못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는것을 새삼 알게 되였다”며 “사증령사의 주요임무는 문제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증을 발급하지 않는것이기는 하나 한국에 갈 타당한 사유가 있는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사증이 불허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것도 중요하다. 우리 공관은 앞으로도 불필요하게 사증신청이 불허되는 일이 없도록 심사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것이다”고 하였다.    해외한국공관중 처음으로 사증령사면담제를 도입한 한총관은 앞으로도 계속 사증령사면담제를 지속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지훈기자  
방문취업신규입국신청등록 첫날부터 먹통 -왜 이렇게 힘들지… 또 불만의 목소리 본사소식 11월 15일 오후 1시, 중국전역은 또다시 코리안드림분위기에 휘말렸다. 2012년 상반기 방문취업신규입국자 사전신청이 일제히 개시되여 조선족이 사는 곳마다 피말리는 컴싸움에 들어간것이다. 그런데 웬걸 법무부의 지정 신청등록사이트(www.hikorea.go.kr)에 도무지 접속할수 없었다. 서로 전화로 그 영문을 알아봤지만 신통한 답이 없었고 사이트에는 “시스템에 사용자가 많아 접속이 지연되고있습니다. 리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잠시후 다시 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란 량해메시지만 뜰뿐 여전히 열려지지 않았다. 후에 알아보니 신청자가 폭주하여 사이트가 다운로드되였다는것. 컴 전체가 다시 거의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하이코리아에서는 급히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www.immigration.go.kr)의 홈피로 이전할것이라며 공지사항을 띄웠는데 첫날 알려준 홈피주소가 틀려 부득불 검색하여 찾아야 하는 불편을 겪은데다 또 “방문취업기술교육 신청절차 및 요령안내”파일도 “아래한글”(文杰)프로그램으로 되여 중국에서 많이 쓰이는 워드파일로 도무지 열수 없는 일도 벌어졌다.     브로커의 원천차단과 신청자편의를 위한 하이코리아를 통한 프로그램개발에서 한국법무부와 주심양한국총령사관의 사전설명 등 철저한 대비책에도 불구, 예상외의 일이 발생하자 컴에 우두커니 앉아 접속을 시도하던 사람들의 불만의 목소리도 컸다.  결국 지난번의 중국교육부고시중심을 통해 신청하는것보다 별로 더 낫지 않다며 한국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가 하는 원성과 불만이였다.     개인집과 컴퓨터방, 직장 등 여러곳에서 컴접촉을 시도하였지만 다 별로 순조롭지 않았고 컴을 모르는 신청자들을 위해 령사관이나 비영리단체에서 대리등록을 한다고 하였지만 역시 접속이 여의치 않아 신청사이트의 프로그램과 시스템 자체가 문제로 제기되고있다. 김모씨는 인터넷접속에서 중국망통(W욝?은 접속이 그대로 가능하나 중국전신(K儒?이나 철통(p`通)은 접속도중 자꾸 애로가 생겨 신청이 더 어렵다는 기술적문제도 제기하였다. 이처럼 여러가지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신청등록을 마쳤다는 사람은 많지 않은것으로 알려지고있다.    다행히 이번 신청이 11월 15일에서 12월 15일까지 한달기간으로 여유는 좀 있었으나 하루빨리 신청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조급한 마음이 바질바질 타들어가기는 마찬가지이다. 언제쯤 통쾌하게 컴이 열려 신청이 접수되려는지?    지난 8일에 있은 령사관의 심양과 연길에서의 사전설명회에 많은 인파들이 몰린것을 보면 어림잡아도 한국행희망자가 10만명을 헤아리고있어 자칫하면 이번에도 또다시 중국조선족사회를 울릴가봐 심히 걱정된다.                           
내실 다져 상호윈윈 기한다 ㅡ주심양한국총령사관 조백상총령사 인터뷰 본사소식 11월 실시예정인 한국정부의 방취제관련 신규 입국정책을 앞두고 일전 기자는 주심양한국총령사로 취임한지 7개월이 된 조백상총령사를 단독인터뷰하여 그동안의 사업실적과 추진상황, 향후 계획,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관심사 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조총령사는 흔쾌히 취재에 응하면서 “료녕성은 한국과 력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국내 그 어느 지역보다도 긴밀한 뉴대관계가 있는 지역으로서 마치 고향을 방문한것처럼 친밀감을 느끼는 한편 이 지역 총령사로서 막중한 책임을 갖는다”고 했다. 아래는 인터뷰내용이다.   문: 총령사로 부임이후 지방정부와의 주요 사업실적과 협력사항 및 진척현황은?   답: 지난 3월 부임이후 동북3성 각 지역 정부인사를 면담하고 한-동북3성간 경제, 문화, 교육 등 제반 분야의 교류협력 강화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금년 7월 심양시정부와 함께 제10회심양한국주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금년 한국주에 한국의 중진급 국회의원들이 대거 방문하여 심양시의 발전된 모습과 미래 계획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였을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란타공연을 심양시민들과 함께 향유하는 기회도 있었는바 이를 통해 한국과 심양시간 우호협력관계가 더욱 깊어진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한국주행사기간 당관과 화평구 만융경제구간 심양한국국제학교이전에 관한 의향서도 달성하였다.   래년 한국주는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이를 기념하는 행사로 치룰수 있도록 준비하고 더 많은 한국기업인과 우리 정부측 인사들이 방문할수 있도록 다양한 계획들을 준비중에 있는바 심양시정부의 협조하에 더 알찬 한국주행사가 열릴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금년 8월에는 이규형 주중대사 등 많은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제5회할빈한국주간행사가 개최되였는바 동 행사를 통하여 한국과 할빈시간 협력수준을 한단계 격상시켰다.      갈수록 중요해지고있는 동북3성과의 협력강화 필요성을 감안, 금년 9월 코트라 주심양대표처가 개관한데 이어 현재 주대련령사사무소 설치를 추진중에 있다.  또한 금년도에 전두환 전 대통령, 이홍구 전 총리, 노신영 전 총리, 김문수 경기지사, 김두관 경남지사, 안상수의원 등 주요귀빈이 상당수 동북지역을 방문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한국과 동북3성간 협력이 강화되고있다.    래년도 한중수교 20주년을 계기로 한국과 동북3성간 협력이 도약해나갈수 있도록 제반 분야의 교류를 더욱 강화해나가는 한편 6만 5천여명 교민의 안정된 생활과 합법적인 권익보호를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나갈 계획이다.      문: 동북3성 특히 료녕성은 한국기업이 많이 진출한 중요한 중심지로 부상하고있다. 미래에 한-료녕성간 경제무역합작에 기대되는 새로운 계획이 있다면?                                                                                                               답: 중국정부의 동북진흥정책 등에 힘입어 료녕성을 포함한 동북3성지역에 최근 대기업을 위주로 한 우리 기업들의 투자가 증가되는 양상이다. 우리 나라의 대중국 전체투자중 동북3성 투자비률은 2006년 6.6%에서 2010년 19.5%로 대폭 증가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한-동북3성 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빠른 발전세를 나타내고있다.    특히 료녕성은 심양경제구건설과 료녕연해경제벨트계획의 중국국가전략 채택으로 2010년도 14.1%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외자기업의 투자는 207억딸라로 중국내 31개 성시중 2위를 기록하였는바 이런 발전잠재력으로 하여 향후 보다 많은 한국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질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동북3성에는 4,500여개의 한국기업이 진출해있으며 이중 3,900여개의 기업이 심양 및 대련 등 료녕성에 집중되고 그 투자분야도 종전의 제조업에서 IT, 부동산, 금융, 서비스업 등으로 다양해지고있다.    료녕성을 포함한 동북3성의 중요성을 감안, 당관은 2010년 12월에 동북3성 한중경제포럼을 심양에서 개최하였고 금년 8월에는 장춘에서 제2회 행사를 성과있게 개최하였다. 동시에 한국과 동북3성 정부간 경제협력채널을 체계화하고 공고화하기 위하여 래년도부터 정기적으로 한국과 동북3성 정부 및 기업 관계자가 참여하는 한국-동북3성 경제협력협의회 개최방안을 적극 추진중에 있다.    문: 최근에 한국정부는 중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한국려행편의조치와 민원서비스개선책을 마련한것으로 알고있는데?     답: 당관은 한국관광공사 심양지사와  공동으로 각 시의 교육국 관계자를 면담, 방학기간 한중 량국 청소년교류를 위한 초중고생의 한국방문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팸투어도 실시할 예정이다. 미래의 주역인 량국 청소년 교류확대를 위하여 다양한 수학려행코스를 개발, 방한시 한국학생들과의 교류프로그램, 공연참관, 기념품제공, 방한일정추천, 각종 물품지원 등을 지원하고있다. 한국관관공사는 2010년 서울 FIT관광을 위한 가이드북을 발간하였으며  2010~2012년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한국방문객들에게 쇼핑할인혜택 등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하고있다. 이밖에 로인단체 방한상품, 의료서비스와 관광금융복합상품, 고가의 럭셔리상품, K-pop 참관상품, 제주노비자 골프단체상품 등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있다.                           사증발급관련 민원편의서비스를 강화하였다. 중국211대학의 재학증명서가 있는 경우 재정보증서류 제출 면제, Fax민원 접수처리 및 관리강화, 사증대행려행사대상 간담회 주기적 개최, 령사면담제 실시(금년 7월부터), 사증대행려행사대상 순회간담회 실시계획, 콜센타운영 등이다. 특히 령사면담제 실시, 홈페이지 및 SNS 구축, 경제사랑방 및 각종 간담회 개최, 순회령사, 뉴스레터 발송 등을 통하여 교민 및 조선족동포와의 소통을 강화했다.    문: 중국경제의 신속한 발전과 중한경제협력의 강화속에서 중국조선족기업인은 최근년에 크게 성장하였다.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조선족기업간 상생협력 구축방안이라면?   답: 최근 한국기업들은 동북3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나가고있는바 중국내수시장개척을 위해서는 중국어 및 중국문화에 정통하고 중국내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있는 조선족동포와의 긴밀한 협력이 긴요한 상황이다. 한중수교이후 조선족기업은 무역, 제조업 및 로무수출 등을 통하여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한중 량국간 관계발전과정에 중요한 교량역할을 수행하고있다. 당관은 경제사랑방 정례개최와 한중기업인교류회 개최 등을 통해 동북3성내 한국 및 조선족 기업간 상생협력을 강화하고 내수시장개척을 지원하고있다. 또한 조선족기업들의 한국투자도 적극 추진하고있는바 조선족기업들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동북3성에서 한국기업과 조선족기업간 상호 교류협력이 잘 이뤄지고있는데 한국주행사와 같은 행사에서 조선족기업인들의 지원이라든가 심양한국국제학교에 대해서도 조선족기업인들이 지원의향을 밝혀오고있는데 이를 기쁘게 생각한다.     문: 방취제는 중국조선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1월에 실시예정인 방취제의 신규 입국정책에 대해 조선족사회는 아주 관심하고있는데?    답: 한국정부는 방문취업사증 발급대상 선발방식을 한국어시험합격후 전산추첨방식에서 인터넷사전예약후 전산추첨방식으로 전환하고 11월초경 인터넷예약을 접수받을 예정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사전예약한 사람에 대하여는 매년 추첨에 의하여 방문취업사증 발급대상자를 선발할 예정이며 그중 학원에서 기술연수를 받을 사람들에 대하여는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게 된다.    인터넷예약, 특히 기술연수희망자에 대한 선착순예약이 공정하게 실시될수 있도록 기술적인 사항을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고있으므로 동포들은 사증브로커 등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한국정부 및 당관의 안내를 특별히 류의하시기 바란다. 또한 사증브로커의 개입을 차단 내지 최소화시키기 위하여 당관은 모든 사증신청은 대행사를 통하지 못하도록 하고 신청인 본인이 직접 당관을 방문하여 접수하도록 할 예정이다.   조백상총령사는 “조선족동포들이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중 량국관계의 교량역할을 하는 동시에 중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할수 있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오지훈기자  
4    "당뇨에 치료약이 있습니다" 댓글:  조회:2989  추천:0  2012-01-06
 "당뇨에 치료약이 있습니다"    -당뇨에 희망을 주는 송문기박사   재미과학자 송문기박사(78세)는 세계 100인의 유명 인명록에 등재된 인물이다. 그는 일찍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론문과 저술을 통해 생화학분야와 의과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 심어놓았으며 이러한 론문과 저서들은 미국 의학계의 많은 지침으로 되고있다. 특히 그는 40여년간 인체의 당뇨병과 비만 같은 난치병을 공략하여 많은 성과와 업적을 이뤄냈다. 일전 기자는 중국과학원의 초청으로 대련에서 열리는 세계생물과학협회의 국제학술대회(IBS-2008)에 참석하여 론문을 제공한 120여명의 세계적과학자중 주요 주제발표자 4명중 한사람으로 대회에서 발언하게 되는 송문기박사를 심양에서 만났다.   기자는 지난 2006년 료녕중의약과대학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학술대회때 잠깐 인사를 드린적이 있으며 이번에는 송박사와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할 행운의 기회를 가졌다. 그는 기자에게 당뇨의 발병원인, 치료가능성 등에 대해 자상히 설명해주었는데 과학자로서의 진지한 탐구정신을 보여주었다.   현재 송박사의 당뇨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리론과 림상실험은 상당한 결실을 보이고있다. 당뇨병은 1형당뇨(소아당뇨, 10%에 해당)와 2형당뇨(성인당뇨, 90%)로 구분되며 송박사의 연구는 2형당뇨의 원인과 치료에 초점이 맞추어있다. 2형당뇨는 주로 현대인이 나쁜 생활습관에서 기인된것으로서 과다한 영양을 섭취하고 상대적으로 운동량이 적어 발생하기에 성인병 또는 문화병이라고 한다.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면 소화가 되여 에너지원인 당으로 전환되는데 이때 이 당을 세포안으로 운반해주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인 인슐린이 있다. 인슐린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호르몬물질로서 당과 함께 세포안으로 들어간다. 당은 세포내에서 산소와 결합하여 에너지로 사용되고 인슐린은 세포내에 있는 인슐린소화효소에 의해서 소화되여 소멸되며 수용체인 세포의 문은 다시 세포의 표면의 문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세포에 들어온 인슐린이 사용후에 찌꺼기형태로 세포내에 남아 적체되면 세포의 신진대사기능이 저하된다. 이렇게 되면 인슐린은 당을 세포내로 류입시킬수 없기에 인슐린저항상태에 이르게 되고 당이 세포내에 들어오지 못하므로 하여 혈액은 끈적끈적하게 되고 모세혈관이 막혀 당은 합병증을 유발하게 된다. 합병증으로 손, 발, 안구, 심장 등 모세혈관이 많이 지나가는 장기 및 신체부위에 손상을 주게 된다. 또한 세포의 에너지원인 당을 적절히 사용할수 없으므로 저혈당증을 일으켜 어지럽고 힘이 없어 활동의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성인당뇨의 주원인을 인슐린저항증에서 찾았다. 즉 인슐린저항의 주원인은 음식의 과다복용에 의한 인슐린 과다사용에 있다. 인슐린의 과다사용은 사용된 인슐린의 페기물이 너무 많이 세포내에 쌓이므로 세포내에 있는 페인슐린 쓰레기를 소화시키는 소화효소가 부족하여 발생한다. 몰론 이외에도 췌장의 기능이 저하되여 인슐린분비가 적은 원인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당뇨병에 걸려 당뇨병합병증으로 췌장이 손상되여 발생되는것이므로 인슐린저항이 가장 원천적 원인제공자라고 했다. 송박사는 오랜 연구를 통해 이 인슐린 소화효소를 활성화시킬수 있는 물질을 찾아내였는데 그 물질의 이름을 싸이클로지(Cyclo-Z)라고 명명하였다. 아연(Zinc)을 싸이클로히스프로(CHP)라는 물질과 혼합하여 조성한 물질로 인슐린쓰레기 소화효소(IDE)의 생성과 활성화를 가속화시키는 성질이 있다.    송박사의 연구는 현재 1단계에서 2단계에로 들어갔는데 이미 현저한 효과를 보이고있다. 임상보고에 의하면 싸이클로지를 복용한 당뇨환자들이 3개월에서 6개월이상인 경우 현재 맞고있는 인슐린주사를 중단하거나 회수를 줄일수 있고 혈당강화제도 줄이거나 끊을수 있는 가능성과 결과를 보여주고있다. 싸이클로지는 미국련방 재향군인병원 특허로 5년전부터 처방없이 자유롭게 복용할수 있는 보건식품을 출시하였으며 동시에 제약으로 등록하기 위하여 FDA 지휘하에 임상실험을 진행하고있다.   송박사는 당뇨약을 당뇨치료제와 혈당강화제로 구분할수 있는데 혈당강화제는 일시적으로 혈당을 조절해주어 합병증에 가는 형태를 막아주거나 지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면서 병원의 당뇨관련 처방약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당뇨치료제는 2000년도에 처음으로 개발한 아반디아가 최초이나 독성이 강하고 그 후유증이 심하여 이를 변형한 액토스가 개발되였으나 효과가 별로 없다. 그러나 싸이클로지는 부작용이 없이 당뇨병을 치료할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임을 림상실험에서 립증해주고있으며 갈수록 환자들의 호평과 의학계의 중시를 불러일으키고있다고 했다.    송박사는 1959년 도미하여 하와이의과대학에서 생화학과 분자생물학 등의 학위를 받았고 UCLA의과대학 교수 겸 연구원으로 재직, 1994-1996년 해외우수두뇌초빙프로그램 한국과학기술원 초청으로 2년간 연구에 전념한바 있으며 현재는 미국련방 재향군인병원의 당뇨병 및 성인병의 연구원, 미국 국립보건원 농림부 등 미국 주요기관의 자원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있다.   그는 또 지난 2004년부터 중국을 방문하기 시작하여 수차례의 학술세미나 및 의학세미나에 참석했고 지난 2006년에는 료녕중의약과대학 초청으로 2일간 특강을 진행한바있다. 그는 특히 조선족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선족의학도를 양성하기 위한 준비도 하고있다. 기전학분야 송박사가 펴낸 많은 론문과 저서로 하여 중국 내분비과에서도 송문기박사의 이름을 높이 하고있으며 현재 그의 싸이클로지는 연변한미병원뿐만 아니라 중국의 십여개 의과대학에서 림상실험을 하고있다. 그는 또 중국 미래생물과기유한공사, 연변한미병원 등과 협력하여 싸이클로지가 더많은 당뇨환자들에게 복음을 줄것을 기대하고있으며 제2단계로 제약화사업에도 열정을 보이고있다.    송문기박사가 개발한 싸이클로지는 현재 중국 위생부이 허가신청을 획득하였고 늦어도 10월중 허가가 완료될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싸이클로지로 하여 한국인으로서 송문기박사가 노벨의학상을 받을수 있는 기회가 또 마련될것을 기대해본다.   (2008/10/16)
3    지진구재현자의 사선을 넘나들며 댓글:  조회:1960  추천:0  2012-01-06
지진구재현자의 사선을 넘나들며   -뢰봉식소방전사 김춘명의 항진구재의 나날   5월 14일 오후 4시 본계소방항진구재소분대는 사천성 광원시 청천현 목어진에 도착했다. 이번 사천특대지진 진중앙에서 백여킬로로 안되는 목어진은 전체 건물의 80%가 거의 무너져 평지가 되다싶이했다. 사천지진구조팀의 한 성원으로 뢰봉식소방전사 김춘명일행의 눈앞에 나타난 정경은 참으로 눈뜨고 볼수 없는 현실이였다. 건물들이 참혹하게 무너져내린 페허더미속에서 친인의 생존희망을 애타게 바라고있는 그 가족들과 필사적으로 구조작업을 벌리고있는 사람들... 2차로 사천지진구재현장에 투입된 료녕성소방구조팀에 맡겨진 임무는 피해현장에서 계속 인명을 구조하고 재산을 하나라도 건져내 피해를 최대한 줄이라는것이다.   마지막 희망이라도 건지자   김춘명소속 구조대는 차에서 목어진에 내리자마자 리재민들에게 곧 포위되고말았다. "저희 부친이 저속에 있어요. 아직 신음소리가." 한 중년남자의 다급한 목소리다. 구조팀의 손에 들고있는 생명탐측계기엔 건물더미에 묻힌 사람의 생존기미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가닭 마지막 희망이라도 놓지 않으려는 그 중년남자와 가족들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시선에서 김춘명은 그 어떤 설명도 없이 곧 구조에 뛰여들었다. 부대가 현장에 도착한지 얼마안되여서 대형 기계설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조립식판넬과 철근, 별돌을 제껴내야 안에 깔린 사람을 구해낼수 있었는데 사천가옥의 건축구조는 북방과 달라 천장이 정방형 모양의 2,3메터에 두께가 2,30센치메터되는 조립식판넬이여서 몇사람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김춘명 등 10명 구조대는 두손과 구조용바줄로 안깐힘을 써가면서 그 커다란 조립식판넬을 옮기고야말았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그들은 한 조난자의 손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맥박을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김춘명과 구조대원들은 수난자의 몸을 조심스레 페허더미속에서 끄집어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김춘명과 대원들은 현지의 풍속대로 하얀 천으로 수난자를 덮었다. 수난자의 사체를 담가대우에서 올려놓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은 소방전사들이 수난자에 대한 존경에 모두들 눈물범벅이가 되여 무릎을 꿇고 오래동안 일어설줄 몰랐다.   이번 사천지진구조대에 김춘명은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당시만해도 김춘명은 곤명소방대학교 학원신분이여서 임무가 그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5월 12일, 사천특대지진소식을 접한 김춘명은 더는 잠을 이룰수 없었으며 이튿날로 상급을 찾아가 강의한 태도로 요청했고 최종 료녕성소방총대의 비준을 받아 본계소방소분대 일원으로 될수 있었다. 퇴근무렵 그는 련풍소학유치원에서 근무하고있는 안해 우영을 찾아가 "이번 지진파괴가 참혹한데 우리가 갈수 있을것 같아서......"라고 말을 던졌고 조국의 부름이라면 서슴없이 나서는 김춘명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리해하고있는 우영씨도 "알아요..."라고 짧은 말로 남편을 지지해나섰다. 그리하여 김춘명은 대리대장으로 임명되여 구조대에 합류할수 있었다.     하루에 14구 사체를 사출   5월 15일, 목어진천황가 48호 층집에 아직도 6명이 묻혀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춘명은 주동적으로 구조작업에 뛰여들것을 신청했다. 그는 구조팀을 이끌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상황을 살피고 생명탐측계기로 세세히 탐조해서야 한 남성조난자가 묻혀있는곳을 찾아낼수 있었다. 조난자의 몸이 두개의 콘크리판에 끼여있어 기중기로 콘크리판을 들어내야 했는데 그 콘크리판에 작은 틈새조차 없어 기중기의 철사를 끼워넣을수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김춘명은 곧 도기로 내리찍고 손으로 파서 겨우 철사를 넣을만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구조과정에 콘크리판이 수난자의 몸에 떨어질것이 우려돼 김춘명은 기중기로 콘크리판을 1메터가량 옮기게 한후 원목을 그 콘크리판밑에 놓고 계속 콘크리판을 옮겨 수난자를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이어 김춘명 소속 구조대는 페허더미속에 갇힌 사람이 어데 있는지 몰라 당황해하는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반복적인 탐사를 진행하여 층계위치에서 조난자가 있다는것을 발견하였다. 한시간남짓 간고한 구조작업끝에 4명의 수난자 사체를 찾아냈다.   긴장한 하루의 구조작업이 끝나자 대원들이 대충 요기하고있을 때도 김춘명은 지친몸을 이끌고 계속 수색작업을 벌렸다. 대원들이 두쪼각의 과자를 굽내기전에 김춘명이 뛰여와서 "또 한 수난자를 찾아냈소"라고 했다. 김춘명과 대원들이 그 수난자를 페허더미속에서 끄집어내자 가족들은 김춘명의 손을 꼭 잡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김춘명과 대원들은 평소 련마한 구조기능과 쌓은 경험으로 악전고투하여 페허속에서 14구의 사체를 찾아냈다.   당신들은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이오   5월 17일, 목어진의 구재현장. 한 사람이 본계소방장병들이 위험한 건물에서 구해낸 카메라를 들고 감동되여 전체 장병들과 촬영을 요구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소방대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만원의 케메라기자재를 구해주었던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점심을 먹지 못한 본계소방구조대원들이 지친 몸으로 숙영지로 돌아와서 요기하려 할때였다. 한 사람이 "본계소방'의 이름을 듣고 찾아와서 자기재산을 구해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김춘명 등 대원들은 점심도 먹지 못한채 곧장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참으로 아슬한 현장이였다. 사진관은 3층으로 된 작은 층집이였는데 이미 무너 내려앉은 천장아래로 벽돌장이 수시로 떨어지고있었다. "귀중물품이 몇층에 있어요?" 김춘명의 말에 "저 3층에"라고 주인이 대답했다. 주인의 기대어린 시선과 수시로 위험이 덮칠 현장을 지켜보면서 잠깐 침묵을 지키던 김춘명은 량자지간 서슴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가 선참으로 층계에 뛰여오르자 그를 따라나섰던 5명의 소방대원들도 곧 구조작업에 뛰여들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듯한 벽체의 갈라지는 소리는 매 한발자욱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것을 의미했다.   먼저 텔레비, 다음 랭장고, 오디오 하나하나의 물품이 위험이 도사리고있는 건물에서 빠져 안전한 지대로 옮겨졌다. 세심한 소방대원들은 마지막에 집주인의 생계가 달려있는 카레라기자재를 찾아냈다.   사선을 넘나들며 필사적으로 자기의 재산을 구해준 소방대원들에게 감동된 사진관주인은 당신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사람들이라며 소중한 기념사진 한장을 찍자고 부탁했다. 작별시 주인은 김춘명에게 주소를 남기게 하고 "사진을 씻아서 꼭 보낼거요"라고 거듭 말했다.   이때 또 한 사람이 찾아와 페허더미속에서 생활필수품을 건져달라고 간청했다. 여진이 수시로 일어나는 페허더미에 다시 들어간다는것은 말그대로 생사의 판가름이였다. 그러나 김춘명은 그들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고 층집 계단이 완전히 두쪼각난 상황에서도 방법을 대여 층집에 뛰여들었다. "그 침대매트를 던져줘요. 우리가 잘수 있도록....." 김춘명이 매트를 제끼자 그 밑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돈이 발견됐다. "매트밑에 무슨 물건이 없어요?" "없는데요" "돈이 없어요?" "없을건데, 없어요....." 그가 매트밑에서 찾아낸 돈을 건네주자 그 집주인은 떨리는 두손으로 돈을 헸다. 모두 850원이였다.     이날 김춘명과 그의 대원들은 무너져내린 페허속에서 가치가 2만여원의 가전 등 물자와 현찰 2580원을 구해내여 모두 주인들에게 돌려줬다.   사천지진현장에서 8일간 주야 구조작업을 펼쳤던 김춘명소속 구조대가 귀로에 올랐다. 5월 21일, 큰비가 내리는 도선공항. 비속에서 료녕성상무부성장 허위국은 귀로에 오른 료녕소방장병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이 사람이 뢰봉식소방전사 김춘명입니다." 료녕소방총대 대대장 장고조가 마르고도 캄캄한 얼굴을 한 소방전사를 가리키며 허부성장에게 소개한다.   얼마전 곤명소방대학교를 졸업한 김춘명은 본계소방지대명산중대대리패장에서 지도원으로 승급했다.          (2008/07/24)
2    견정불굴의 항일투사ㅡ리원명 댓글:  조회:2210  추천:0  2012-01-06
 견정불굴의 항일투사ㅡ리원명  ㅡ리원명탄신125주년을 기념하여 1월5일은 리원명 탄신125주년 기념일이다. 료녕성당사연구실은 지난해 전 중국기자협회서기처 서기 리현덕의 요청을 받고 약1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들여 조선과 중국에서의 리원명의 항일투쟁사적을 발굴하고 “리원명동지의 일생은 위대하고 비장한 일생이였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항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고 귀중한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그의 항일투쟁사적은 중조인민의 빛나는 항일력사에 기록되여 영원히 간직되여야 할것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 전국인대상위회 비서국 국장 리재덕동지도 리원명의 항일투쟁사적에 대해 “조상지장군은 생전에 리원명동지는 우리 항일부대에 많은 필수품을 제공했고 투옥후에도 견정불굴하고 용감하게 싸웠다고 말했다”고 리현덕에게 전했다.   의병운동과 리진룡의 희생   리원명의 원명은 리종생, 가명은 리고려, 리명도이다. 1884년 1월 5일(음력12월8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연봉동의 가난한 전주리씨의 가문5남2녀중 맏아들로 태여났다. 11살 어린 나이에 그는 왜놈이 마을에 내붙인 “안전고시”를 뜯어내여 개울물에 처넣는 등 일제의 침략행위를 저주하였다. 16살에 일제의 만행으로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아버지 리윤경을 도와 수상운송에 나섰고 후에는 의병운동에 뛰여든다. 1907년5월 리원명은 홍범도가 조직하는 의병에 참가하여 청천강에서 군수품을 운송하면서 때론 평양에 내려가 무기와 약품을 구해오기도 하였다. 어느날 우연히 조선독립운동지도자 리동휘의 연설을 들은 뒤 항일구국의 도리를 깨우치고 조선독립운동조직 신민회(新民会)에 가담하였고 조선 의사 안중근이 이도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을 알리는 삐라를 살포하는 등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0년 8월 28일, “조일합병조약”후 의병운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고 일부 애국지사와 진보적 인테리들이 중국 동북지역에로 들어와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때 리원명은 많은 반항독립운동가들을 동북지역으로 운송했는데1910년4월, 리동휘를 동북지구에로 호송했고1911년 저명한 의병지도자 리진룡을 관전경내까지 호송하였다.   1918년 여름, 리원명은 고향 정주에서 의병 지도자 백광운(일명 채찬)과 알게 되여 그와 함께 정주,창성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후에 백광운의 제의로 여러명과 함께 도강하여 관전현에 가 리진룡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리진룡은 조선 황해도의병의 주요지도자로서 한정만이 이끄는 의병대와 손잡고 수차 일본군경을 습격했다. 리원명의 도움으로 밤도와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의 청산구 은광촌으로 온 리진룡은 그곳에서 “반일회”를 조직하여 조선인과 한족민중을 단합해 항일독립운동기지를 세웠다.   리원명은 리진룡의 도움으로 “부빈회”를 설립하여 자금을 모아 생산을 조직했다. 그는 늘 압록강과 파저강(지금의 혼강) 량안에서 중국과 조선을 드나들며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였다. 1919년3월, 리진룡이 조선인첩자의 고발로 일본특무에게 피살되였고 비보를 받은 리진룡의 부인도 당장에서 까무라쳤다가 당날로 나무에 목을 매여 자결하였다. 이때 압록강 북안 하구에서 배를 몰고있던 리원명은 소식을 듣자 즉시 청산구로 달려가 의병들과 함께 비통을 참고 이 한쌍의 의부렬녀(义夫烈女) 를 은광촌의 석가골에 매장하였다. 리원명은 이를 악물고 결단코 이 비겁한 간첩을 잡아 리진룡의사의 원쑤를 갚으리라 다짐했다. 압록강량안에서의 항일투쟁   천마산(天摩山)은 조선북부 압록강 남안 최대산간지대이다. 주봉은 해발1,160메터에 달하며 산이 높고 밀림이 우거진데다 인가가 드물어 일본군경들이 쉽게 드나들수 없는 곳이므로 항일복국독립운동이 날개를 펼수 있는 안성맞춤한 지역이였다.   1919년 “3.1”운동후 최시흥, 백광운, 최지풍 등이 이곳에다 천마산독립군과 천마산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였고 천마산을 중심으로 초산, 창성, 의주 등지를 습격해 일본군경과 수십번 싸워 적에게 호된 타격을 주었다. 1920년5월,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는 련락관 리작을 동북지구로 파견하여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참리부(参理部)를 광복군총영으로 개편, 천마산독립군을 천마산별동영(别动营)으로 개칭할것을 제의하였다. 광복군 총영장 오진동의 지시를 받아 리원명은 광복총영의 최시흥을 별동영장으로, 최지풍과 백광운을 중대장으로 임명하는 지시를 전달하였다. 최시흥은 리원명더러 천마산부대 후근을 맡아줄것을 부탁했다.    1921년 여름, 리원명은 최시흥의 지시에 따라 박태봉이 고향 녕변에 잠행하여 누님과 어머니를 관전으로 모셔오는데 동행했다. 박태봉이 천신만고로 누님 박순명과 어머니 등 가족을 거느리고 지정된 곳에 이르렀으나 이미 약속한 시간이 지났고 군무가 급한 리원명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태평초로 떠났다. 그들 일행이 태평초려관에서 류숙한 당날, 주변 백화산(현재의 화발산) 산채의 비적들은 려관주인과 짜고들어 박순명을 랍치했다. 박순명은 노기가 충천하여 비적들을 한바탕 꾸짖고는 산꼭대기를 향해 결사적으로 달려갔다. 나무가지를 잡고 깎아지른 절벽을  에돌아가던 박순명은 그만 나무가지가 부러지는바람에 산골짜기에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이 소식을 들은 리원명이 독립군을 이끌고 달려와 그녀를 범의 굴에서 구원해낼수 있었다. 이로 하여 그들은 기이한 인연을 맺었고1921년 가을 리원명과 박순명은 결혼하였다. 그해 리원명은37살, 박순명은22살이였다.  1922년 봄, 리원명은 천마산별동영을 거느리고 도강하여 관전에 찾아온 최지풍을 맞았고 태평초 동쪽5킬로되는 괘방자촌에 안치하였다. 당시 관전현 경내에는 대한독립단(大韩独立团), “한족회(韩族会)”,“대한청년단”, “광복군사령부”,“천마산독립영” 등 여러 류형의 독립운동과 복국반일조직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도합 천여명에 달했다. 이들의 의식주와 무기탄약 등을 해결하는 후근임무가 리원명에게 맡겨졌다. 그는 셋째 처삼촌 박윤범과 련락을 취했다. 일찍 일본류학을 다녀온 진보적 인테리인 박윤범은 혼강북안의 관전과 환인현 사이에 있는 작은 진인 사첨자(沙尖子)에서 조선인거류민들로 소규모의 독립무장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한편 수동식재봉틀 세대를 갖춘 피복공장을 운영하고있었다. 리원명부부는 그 기지를 리용해 생산을 확대했고 구식 페달재봉틀 두대를 더 구해서 조선부녀들을 동원해 회색과 황색 두가지 색상의 군복을 만들었다. 두달동안의 노력끝에 관전경내에 있는 독립군의 수요를 기본상 만족시킬수 있었다.   1922년6월, 천마산별동영에서50여명의 병사가 환인현으로 이동한후에도 리원명은 계속해서 후근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7월, 최시흥과 백광운도 각기 조선으로부터 도강하여 길림의 림강과 집안으로 왔다. 8월, 환인현 마권자촌 골안에서17개의 조선독립운동조직에서 파견한71명 대표가 참가한 남만조선통일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회의에서 “통일부(统一部)”혁명조직을 세우고 산하 의용군을 건립하였다.  9월 상순, 최시흥이 이끄는 소분대는 조선경내에 들어가 왜놈경찰소와 사무소를 기습하여 적지 않은 무기를 로획하고 또한 백성들로부터4천여원의 항일자금을 모아왔다. 부대를 더 잘 은페시키기 위해 그들은 천마산으로 돌아가는 도중 창성을 지나가다 당년 리진룡을 팔아먹은 첩자 정씨를 찾아내서 당장에서 총살했다.    채목회사 두목 아라키를 암살  왜놈들은 “압록강일본채목공사”라는 기구를 세우고 동북지구의 림강, 관전, 안동 등 여러곳에 분회사를 설립하여 중국의 삼림자원을 마구 략탈하였다. 관전현 로흑산(일붚)에는 압록강으로 운송하는 목재만 해도 수천만립방메터에 달했다. 이 분회사는 일본퇴역군관인 아라키가 경영을 맡고있었는데 그자는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 조선난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리원명은 박윤범, 박태봉과 상론하고 아라키를 처단해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채목공사에 호림대가 있었는데 일본사무라이들과 부분 조선인첩자로 구성되였고 또 모두들 무장을 갖추고있어 거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23년 8월 30일(음력7월19일)  깊은밤, 벌목장의 내선한테서 아라키가 술에 취해 처소에서 자고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리원명은 즉시 어둠을 타고 로흑산분공사문어구로 접근해 잠에 졸고있는 두 보초병을 단매에 쓰러뜨린후 잽싸게 그들의 총을 빼앗고 아라키의 처소로 갔다. 아라키는 잠에 푹 빠져있었는데 리원명은 맹호같이 달려들어 아라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놈의 권총을 집어들고 돌아나오다 한 조선인첩자가 다급히 삼림속으로 도망치는것이 보였지만 시간이 긴박하고 위험이 큰지라 더는 추격못하고 재빨리 로영구로 돌아왔다. 그는 안해 박순명더러 가족을 거느리고 먼저 북산 대우골조선인집거구에 피신가도록 했다.   그날 도망친 자가 압록강변하구의 삼림호위대 총부에 가서 리씨성을 가진 조선인독립군이 처소에 뛰여들어 아라키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호위대장(일본인)이 로흑산분공사에 달려가보니 아라키는 피못속에 쓰러져 죽었다. 날이 밝을 무렵, 조선인첩자를 앞세운 놈들이 태평초까지 추격해왔으나 헛물만 켜고말았다. 놈들은 조선복장으로 차림새를 바꾸고 동쪽10여리 떨어져있는 로영구로 뒤쫓다 공교롭게 막 문을 나서려던 리원명과 맞띄웠다. 미처 몸을 빼지 못한 리원명은 붙잡히고말았다. 흉수를 잡았다고 흐뭇해난 대장은 리원명을 한 마구간에 가두어놓고 간수 한사람만 남기고는 술집에 갔다. 태평초의 지리환경을 손금보듯 잘 아는 리원명은 바로 이 마구간뒤쪽에 옥수수대로 만든 변소가 생각났다. 마침 간수는 연명을 위해 삼림호위대에서 일하고있는 조선인청년이였다. 리원명은 조선말로 뒤를 보러 변소에 가겠노라고 청을 들고 변소의 뒤켠으로 도망쳐나와 수수밭속에 잠입했다가 북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박윤범은 거사를 하고 무사히 돌아온 리원명을 보고 큰일을 해냈다고 치하했고 소분대를 거느리고 사첨자로 리원명을 찾아온 최석순도 흥분되여 조선인들의 본때를 보여주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최지풍이 “통일부”에서 퇴출하여 대한진동도독부(大韩镇东都督府)를 따로 세웠고 최지풍이 중앙부총사령원을, 자기가 참모장을 맡았다고 하면서 수배령이 내렸으니 환인현에 가 후근일을 계속 하는것이 어떤가고 제의했다. 리원명은 리종생이란 원명을 리원명으로 고쳤다면서 이 제의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1923년 음력8월 하순, 리원명은 환인현 마권자촌 북구리차자에 있는 대한진동도독부 총사령부에 가서 오랜 전우인 최지풍과 상봉했고 최지풍은 그를 후근부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당시 골안에 수백명 인구가 거주하고있었는데 부녀와 아이들이 날마다 광물질함유량이 많은 물을 마시고 배앓이를 하거나 캐신벡병에 걸려 시달렸다. 또한 전사들의 건강도 엄중한 위협을 받았다. 그는 맹씨성을 가진 개명지주의 둘째아들 맹소당이 조선인들의 처우를 동정하는 심리를 리용하여 맹소당이 자기네 우물물을 매일 우마차로 골안까지 운송해주게 함으로써 식용수문제를 해결하였다. 식량은 환인과 관전 변경에 가서 조선교민들로부터 량식을 구매해들이는 한편 맹소당이 골안에 있는 자기네 밭 옥수수를 전부 걷어들여 독립군의 겨울식량으로 주어 해결할수 있었다.   1924년 1월말, 대한진동독도부가 대한민국림시정부 륙군만주주재 참의부로 재편성되면서 내부 파벌투쟁이 커졌고 형세가 좋지 못한것을 본 리원명은 서둘러 가족을 잠시 환인현 서부 이호래(二户来)와 고태자(高台子)로 옮겼다.   1924년6월, 최지풍의 제의를 받은 리원명은 최지풍, 백광운, 최석순 등 생사고락을 같이 한 오랜 전우들과 눈물로 작별하고 북만청년총동맹을 찾아 할빈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가 먼저 환인현 고태자에 가서 가족과 거처하고있을 때 갑자기 백광운이 일본특무에게 암살당했다는 비보가 들어왔다. 리원명은 형세가 급변하는것을 간파하고 급히 고태자를 떠났다.   할빈 옥중투쟁   1924년12월말, 리원명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할빈에서 무려 한달동안이나 북만청년총동맹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빈서진에서 조선에서 면목있는 한 로인을 만났고 이 로인의 집을 거점으로 반일조국광복선전활동을 하였다. 얼마뒤 북만청년총동맹(이때는 북만조선혁명통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의 한 성원으로 됨) 책임자 황기찬을 만났다. 황기찬은  리원명을 총동맹의 지도자성원으로 임명하고 리명도(李明道)란 가명을 지어주었다.    리원명은 빈주, 일면파, 주하정거장 등 지에서 양로공, 건축공, 하역부 등 일을 하면서 조선인로동자들속에서 북만청년총동맹 회원을 발전시켰다. 1927년4월, “신민부”가 파괴당하자 리원명은 빈주의 황인툰에서 조선독립운동 지도자 류원제의 조카와 손잡고 진보적인 조선인학교 복흥학당을 세우고 조선인쳥년들에게 애국주의를 각성시켰다. 1928년초, 조선혁명가 석만추가 쏘련에서 빈주지구에 와 신민부를 재건하고 복흥학당의 교원신분으로 자기 신분을 엄호하였댜. 동북당국 정보부문에서는 그를 “쏘련특무”로 의심하고 오래전부터 그의 행적을 밟기 시작했고1928년 여름, 리원명의 호송하에 빈주지구를 빠져나가려던 석만추를 체포하였다. 미구하여 리원명도 동북헌병대에 체포되였다.   석만추와는 어떤 관계냐? 석만추는 어디로 뭐하러 가는거냐? 그가 쏘련에서 월경해온 임무는 무엇이냐? 놈들은 리원명을 욱박질렀다. 헌병들의 가혹한 고문에 리원명은 “나는 조선혁명가이고 나라가 망하여 중국에 망명왔으며 복국을 위해 조선학생을 양성했다. 석만추는 우리 복흥학당의 교원일뿐 쏘련 홍색특무와는 상관없다”고 한마디로 잘랐다. 몇달동안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헌병대는 하는수없이 리원명을 빈주 지방당국으로 압송했다. 가족들은 수소문하다 여러방면의 관계를 통해 오랜 력사배경을 갖고있는 빈주 청련사의 주지스님을 찾아 빈현 조지사(현장)를 통했지만 석방시킬수 없었다.   전 중공중앙 대외련락부 부부장, 중앙기률검사위원회 부서기 겸 비서장 조의민(赵义敏)은1991년 북경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1928년 할빈에서 나는 통일전선사업의 수요로 여러차 ‘북만청년총동맹’조선독립운동조직을 찾아간적 있다. 그때 리고려(리원명의 가명)가 체포되기전에 그와 만난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의 신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체포된후 우리 당조직은 여러 방면으로 관계를 찾아 동북헌병사령원 류흥아를 설복하려 했다. 후에 장학량이 대사면을 하게 되여 리고려는 그해말에 풀려나왔다.”   출옥할 때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리워 집으로 돌아간 리원명은 온몸에 상처가 랑자했으나 여전히 견강한 의지로 복국독립운동과 항일혁명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후에 리원명은 조선공산주의자 리계동과 접촉하였는데 리계동은 리원명이 세번째로 접촉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이시기 공산주의영향을 받아 그는 항일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여들었다.   1931년 “9.18”사변후, 조선국적의 공산당원 장남운은 중국에 망명해있는 조선교민들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진행할 임무를 받고 쏘련으로부터 중국에 왔다. 먼저 리원명을 찾았는데 그들은 겉으로는 모피장사를 한다고 했으나 내막은 리원명을 통해 유격대가 필요한 군수품을 제공하는 할빈도외삼과수지구에 항일련락거점을 세웠다. 이때 리원명은 할빈성위군사위원회사업 책임자로, 후에는 파언공농반일유격대 참모장으로 된 조상지를 만나게 된다.     그해 가을, 리원명은 밤에 두번이나 조상지 등을 비밀리에 자기의 동생 리원국의 집으로 데리고 간적 있다. 파언공농유격투쟁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실패하고 일부 성원들이 왜놈에게 붙잡혔다. 변절자의 밀고로 하여1933년 초여름, 리원명의 련락점은 파괴되고 리원명도 일본특무기관에 체포되였다.   할빈일본헌병대는 그에게 잔혹한 고문을 들이댔다.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리원명은 “너희 일본인들이 조선을 삼켜버렸고 우리들은 중국의 동북으로 살길 찾아 올수밖에.”라고 꿋꿋이 맞섰다. 화가 잔뜩 치민 일본특무는 그를 허공에 매달고 채찍으로 때리며 고문했다.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고 깨여나면 다시 혹형을 들이대면서 모피상과 유격대 및 중국공산당, 조선공산당, 쏘련공산당에 대해 대라고 하였다. 리원명은 모른다며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두달동안 고문하여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일본현병대는 전신이 만신창이 된 리원명을 일본령사관 지하실 특별간수소에 가두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대부분이 비밀리에 처형당하거나 혹형으로 죽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때 지하실의 감방에 파언유격대원3명이 갇혀있었는데 모두 몸에 상처를 입고있었다. 한 전사가 나서서 조금 마른 가마니를 내주며 리원명을 그우에 누워 쉬게 하였다. 리원명은 일본을 류학한 처삼촌한테서 일본어를 조금 배운적 있어 몸이 약간 나을 때면 종종 일본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조선에 가본적 있는 한 젊은 간수장은 리원명의 처지를 조금씩 동정하기까지 했다.   “그해18살인 나는 혹형을 받아 옷이 다 찢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채로 지하감방에 갇혔다. 한 감방에 있는 리고려가 간수더러 더운물을 가져오게 하여 내 상처를 씻어주었다. 리고려는 외용약을 꺼내여 내몸에 발라주고 조선족들이 입는 흰옷 한벌을 꺼내여 내게 입혀주었다. 나는 너무 감동되였다. 리고려는 굳센 혁명자로서 몸이 그토록 심하게 상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조선독립군 사람이였다. 나와 리고려는 두달동안 감방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어떻게 적의 고문에 대처하는가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조선의병운동으로부터 빈현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말해주었고 거기서 나는 커다란 계발을 받았다. 당시 그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나는 그가 적어도 공산당을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신앙한다는것을 긍정할수 있었다.∼”1933년10월 반일시위를 하다 붙잡혀 일본령사관 지하실에 같힌적 있었던 하능(서안광업학원당위서기)은1988년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후에 중국공산당 할빈당조직의 구출로 리원명은 마침내 할빈시 도외(道外)감옥으로 옮겨졌고 남강법원에 기소되여 공개심판을 받게 되였다. 당시 할빈호제회(互济会, 전문 옥중 동지들을 구출하는 기구)의 책임자 조상박(조상지의 친형)동지는1989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쏘련에서 돌아온 중공당원 장남운이 우리 호제회를 찾아와 원 할빈련락점의 리고려(리원명)를 구출해줄것을 간청했다. 나는 곧 관계를 통해 남강법원을 찾아서 법관에게 은화100여냥을 쥐여주었다. 내 기억에 남강법원은 ‘이 상인은 리익에 눈이 어두워 정치를 불문하고 치안법규를 무시하며 산중 유격구에서 장사를 했다. 금지품을 도매해 적을 지원한 행위로 하여 징역8개월에 판결한다. 허나 이미 갇혀있은 시간이8개월이상 되였으니 즉시 석방한다.’고 판결하였다.”   리원명은 동생 리원식과 리원보에게 들리워 집으로 온지 얼마 안되여 상처가 너무 심한 탓으로1934년 3월 19일(음력2월5일)에 눈을 감았다. 그때 나이50세였다. 그날로 박순명은 리원명의 유복자 리현덕을 낳았다. 살림이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은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었다. 북만당조직에서는 장남운동지를 파견하여 리원명의 후사를 처리하고 로씨야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 공동묘지는1958년 할빈시유원지로 개조되면서 그의 묘와 비석은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남편이 사망된후35살의 박순명은 가냘픈 녀인의 몸으로 올망졸망한 여섯아이를 데리고 완강한 의력과 두려움모르는 정신으로 운명에 도전했다. 비밀리에 독립군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왜놈의 추격을 받고있는 독립군 정찰원을 엄호해준 “죄”로 옥살이까지 하였다. 리원보와 리원국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1944년에 선후로 병사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여 항전이 승리하고 조선이 광복을 맞았다. 박순명은 눈물을 흘리며 “리원명이 살아있어도 겨우61살밖에 안되는데 몇십년동안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오늘을 기다리지 못했군요. 그래도 구천에서 기쁘게 웃을거예요.”라고 말했다.  일전 리원명탄신125주년기념일에 즈음하여 전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 전 국가민위주임, 현 통전부 부부장 리덕수, 전 공군부사령원 리영태, 전국정협위원 정순주는 각기 “영렬충혼, 만고류방(英烈忠魂万古流芳)”, “렬사정신수우주, 영웅호기관장홍(烈士精神垂宇宙英雄浩气贯长虹)”“충혼소일월 호기장건곤(忠魂昭日月浩气壮乾坤)”, “민족충렬, 천추만년(万古忠烈千秋万年)”, 이란 친필제사를 써주어 그의 정신을 높이 구가하였다.           오지훈기자  2009/01/23  (전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서기 리현덕의 구술과 료녕성당사연구실의 리원명관련 자료에 근거하여 정리함)   
1    오빠는 조선의 무명묘소에 묻혀있다 댓글:  조회:2774  추천:0  2012-01-06
오빠는 조선의 무명묘소에 묻혀있다 -서탑 홍성희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지금도 서탑 “구시장”이라 부르는 골목에 가면 유일하게 층집에서 연탄(장작)을 때는 4층건물이 있다. 1970년대 평양에서 도입한 조선건축공법으로 지은 건물인데 당시에는 신축건물로 이름났었지만 수십년 지난 현재는 서탑지역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축으로 당년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볼수 있다. 철거를 기다리다못해 많은 원주민들이 빠져나가고 지금은 로인들이나 외지세입자들만 살고있다. 일흔여덟의 홍성희할머니가 어머니의 병시중을 들면서부터 이곳에서 산지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은 두 아들 다 딴살림을 하고있으며 가끔 손녀가 와서 할머니를 동무해주고있다. 할머니는 둘째아들의 “퇴물”인 전자풍금을 갖다놓고 심심하면 치군하는데 악보를 배운적 없지만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70여곡은 무난하게 연주할수 있다고 자랑했다.             어머니는 안중근의사의 고종륙촌녀동생 어머니가 생전에 안중근에 대해 특별히 들려준것은 없지만 두가지 일은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한가지 일은 어머니가 18살에 시집갈 때 친정어머니가 없어서 일가집에서 혼례를 치뤄주었는데 당시 고향인 황해도 해주근처에서 살던 안중근의 안해가 찾아와 옥양목속옷을 선물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는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는 홍할머니가 11살 되던해인 1946년 민주동맹에서 개원조선족중학교 회당에서 3.1운동을 기념할 때 어머니더러 안중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하였는데 그때 어머니는 “안중근옥중가”까지 불렀다고 한다. 홍할머니의 어머니 곽희종은 안중근의사의 고종륙촌녀동생이면서도 의병대장의 딸, 혁명렬사의 어머니이다. 곽씨는 1912년 조선 황해도에서 곽재경과 안현경(안중근의사의 5촌고모)의 막내딸로 태여났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곽재경은 성질 또한 불같아서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앞에서 굴할줄 몰랐다. 왜놈들이 흰옷을 못입게 하고 상투를 자를것을 강요했지만 그는 버젓이 상투를 틀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초기에 그는 화승총을 쥐고 의병대장이 되여 선두에서 왜놈들을 족쳤다. 유년시절 곽씨는 안중근의사가 살던 천계동의 외가에서 근 4년간 살면서 한동네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막내녀동생 안익근언니네 집에 자주 놀러갔다. 그때 안익근은 그에게 가족사진첩과 안중근의사의 유상을 꺼내보이면서 안중근의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안중근옥중가”도 배워주었다. 당시 이 노래는 완전히 금지된 노래였다. 할빈역에서 안중근의사의 “코리아독립만세!” 웨침소리로 하여 간담이 서늘해진 왜놈들은 이 노래를 엄밀히 단속하였다. 동네어른들도 애들에게 이 노래를 배워주는 곽희종이 걱정되여 “음전(애명)아, 너 아무데서나 함부로 이 노래를 부르면 안된다. 왜놈들이 알면 큰일난다”고 타일렀다. 그렇지만 어린 곽희종은 “이 노래는 우리 칠성오빠(안중근의 애명)가 감옥에서 왜놈들과 싸우면서 부른 노래”라며 열심히 배워주었다. 곽희종은 17살에 홍안표와 가정을 이루어 아들딸을 보았다. 조선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에 왔건만 석달만에 장대같던 남편이 급병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세상뜬 뒤 그는 재가하지 않고 모든 사랑과 정성을 오로지 두 남매에게 쏟아부었다. 곽희종은 2000년에 88세로 세상떴는데 돌아가기전에도 “안중근옥중가”를 불렀다고 한다.       오빠는 중국인민지원군 렬사 홍성희할머니의 오빠 홍성필은 홍씨집안의 3대독자였고 곽종희의 대들보였다. 개원에서 8.15를 맞고 이듬해 3월 곽희종은 17살나는 홍성필을 설득하여 해방군(당시 지방공안대)에 참군시켰다. 아들이 떠나는 날, 곽희종은 남매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성필아, 우리는 모주석과 공산당의 덕분에 광복의 날을 맞아 기를 펴고 살게 되였다. 너의 외조부는 의병대장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몸바쳤고 또 너의 칠촌외숙(안중근의사)은 빼앗긴 삼천리강토를 되찾기 위해 할빈역에서 일본침략괴수 이등박문을 쏴눕혔다. 너도 총을 메고 우리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 없이 잘 싸워라!” 홍성필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용감히 싸워 수차 공을 세웠다. 그는 참군하여 부대를 따라 동북해방전역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48년 동북해방 당시 제4야전군 118사 353퇀 정치처 견습참모로 되여 남진하여 평진해방전투, 해남도해방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홍성필은 다시 부대를 따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떠나기 3일전 홍성희는 어머니와 함께 개원에서 오빠를 만나러 단동에 있는 부대를 찾아갔다. “우리 부대는 곧 조선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인민군과 협동작전을 잘 벌리면 전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중조인민군대의 승리로 끝날것이다. 그때 오빠가 돌아오면 어머님을 모시고 우리 한번 잘 살아보자꾸나!” 그런데 이번 상봉이 오빠와의 마지막상봉일줄을 홍성희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매불망 오빠가 돌아오기만 고대했던 홍성희모녀에게 불행한 소식이 날아든것은 1951년 봄철이였다. 신나게 국어랑독을 하던 홍성희는 “쟈는 제 오빠가 죽은줄도 모르네.” 옆에서 동학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얼결에 듣게 되였다. 촌정부에서 이 비보를 차마 모녀에게 전달할수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던것이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 모녀는 붙어잡고 련며칠 통곡하였다. 어머니가 아예 병석에 드러눕게 되자 16살난 성희는 생산대에 나가 농사일을 하였다. 전교 문오위원으로 노래 잘 부르고 활약했던 그 역시 강한 충격을 받아 과묵해졌다. 가난한 집 아이가 빨리 셈이 든다고 성희는 낮에는 생산대로동과 전선원호, 가마니짜기를 하는 한편 밤에는 피곤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1951년 개원조중 초중반을 졸업한 그는 개원조선족소학교 교원으로 되였고 모범교원의 영예를 지녔다. 오빠 홍성필은 조선전쟁에 나가서 1951년 1차전역때 21세의 어린 나이에 전사하였는데 결국 싸워보지 못하고 죽었다며 홍성희할머니는 가끔 눈물을 훔쳤다.         남편과 짝사랑에서 결혼까지 성희는 남편 윤유갑씨에 대한 짝사랑에서 종국에는 결혼에까지 이른다. 소학시절부터 성희의 사모를 받은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다름아닌 상급반학생 윤유갑이다. 신체가 건강하고 생김새가 시원하게 생긴 윤유갑은 학교 마라톤에서도 1등을 하여 녀학생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1948년 11월 2일 심양이 해방되자 윤유갑은 개원현공안국경찰대에 참가하였고 그후 해방군에 편입되여 장사군관학교에서 군사, 정치, 시사 등 학과정을 마쳤다.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사령부 소속부대에 배치되여 조선에 나간 그는 지원군총부 소재 평안남도 인평회창군에서 지원군공정지휘소 초대소 소장직을 맡고 각종 복잡한 임무를 완수하였다. 주요하게 동북에서 오는 참전부대를 인솔하여 지정된 목적까지 안전하게 보내주고 조선 각 지방과의 긴밀한 련계로 지원군부대의 활동을 적극 협조하며 수시로 적정을 알아내여 지원군총부에 보고하고 또한 최전선 부상병들을 후방근거지 혹은 동북으로 후송하는 등 임무들이였다. 윤유갑은 1차전역때부터 운산, 상소리, 덕천, 개천, 령원, 회령 등 묘향산맥 서쪽지구에서 적정을 살폈는데 임무를 훌륭히 완성하여 수차 공을 세웠다. 2차전역에서 제38군은 팽덕회사령관의 제의로 “38군만세”란 영웅부대로 명명되여 전군에 명성을 날렸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후 윤유갑은 초대소에서 사업하면서 주요하게  전선복구건설을 지원하였다. 1956년 5월 휴가를 맡고 고향인 개원에 왔을 때 오래동안 부대생활로 장가를 못간 로총각은 중매로 홍성희와 맞선을 보게 된다. 성희도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슴 한곳에는 윤유갑을 사모하고있었는지라 더없이 기뻤다. 그리하여 6월 5일 청춘남녀는 약혼사진을 찍었고 이튿날에는 윤유갑을 따라 렬차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단교와 복구건설이 한창인 조선의 산천을 목격하는 성희는 오빠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지원군총사령부는 울창한 수림으로 뒤덮인 곳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여기서 성희는 윤유갑과 돌격식결혼식을 올렸다. 38군 소속 공정지휘소 지휘관이 주례를 선 간단하지만 뜻깊은 결혼식이였다. 결혼뒤에도 하나는 조선에서, 하나는 중국에서 서로 떨어져 살다가 1958년 남편이 귀국해서 심양중형광산기계연구소(현재의 화평구조선족소학교 자리)에 배치받은 뒤 밀월을 보낼수 있었다. 1963년 단위가 사천으로 옮겨질 때 자식교육때문에 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여 남편은 심양소재 경공업부 심양판사처에 남게 되였다. 단위에선 일능수, 모범이여서 영예게시판에는 언제나 그의 남편의 사진이 버젓이 붙어있었다. 단위책임자도 “우린 대학생보다 로우윈(老尹)만 있으면 되오.”라고 그의 사업실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남편과 성희의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어 남부러움없이 살았는데 1999년에 남편이 불시에 암으로 돌아갔다. “우리 남편같은 사람 정말 보기 드물어요.” 언제나 튼튼한 뒤심이 되여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주었던 남편, 그와의 로맨틱하였던 과거를 돌이키면서 홍성희할머니는 지금도 이렇게 남편자랑을 늘여놓는다.             오빠는 조선의 무명묘소에 묻혀있다 홍할머니와 그의 오빠 홍성필 두 남매의 사이는 유별났다. 아버지없이 어머니의 사랑과 엄한 교육속에서 자라나면서 빨리 철이 들었고 성희는 오빠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 오빠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차마 믿을수 없었고 그토록 슬퍼했으며 조선에 나가는 날이 있으면 꼭 오빠의 묘를 찾겠다고 몇번이나 다졌는지 모른다. 1956년 7월 24일 방학기간 조선에 가서 윤유갑과 결혼식을 올린 성희는 이튿날 남편과 함께 지원군총사령부에서 1킬로메터 떨어져있는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을 찾았다. 부지가 9만평방메터인 렬사릉원은 1954년에 지어졌는데 130여명의 렬사들의 유골이 정중히 모셔져있었다. 정문에는 중조 두나라의 글로 “중국인민지원군렬사릉원”이라고 새겨져있었고 정문중앙에는  “항미원조보가위국의 렬사들은 영생불멸하라”는 글귀를 새긴 돌기둥이 세워져있었다. 그 뒤면에는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 라성교 등 전투영웅들의 화상이 있었다. 지원군의 조선전쟁을 반영한 청동조각상과 중조우의의 군상이 새겨진 비석 뒤켠으로는 희생된 지원군장령들의 유골이 모셔져있는 묘지였다. 성희는 렬사릉원으로 발길을 향하면서 오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여 서러움이 북받쳐올랐다. 그러나 묘지의 맨 앞줄 중앙에 세워진 비문을 보고 화뜰 놀랐다. “모안영지묘”라고 쓴 묘비가 눈에 안겨왔던것이다. 설마 모주석의 아들이?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남편에게 물으니 일찍 모안영과 한 부대(제38군)에서 싸워온 남편으로서는 감회가 더욱 깊었다. 성희 또한 학교에서 배운 모안영의 사적이 떠올라 감개무량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어정쩡하게 서있는 성희를 끌어당겨 모안영의 묘앞에 정중히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세번 절을 올렸다. 앞줄에서부터 하나하나 세면서 오빠의 묘를 찾기 시작하였다. 어떤 묘비에는 이름과 소속부대가 적혀있는가하면 또 어떤 묘비에는 이름만 있었으며 지어 어떤 묘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의 묘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가로 훑고 세로 훑어봤지만 찾지 못하였다. 혹시나 해서 이튿날에도 계속 찾아봤지만 찾을길이 없었다. 안타깝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편이 처남의 유골은 아마 무명의 묘지에 묻혀있을터니 더 찾지 말고 고향에 있는 렬사릉원에 가서 참배하자고 하였다. 모안영의 묘를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성희도 남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모주석도 보가위국을 위하여 조선전장터에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또한 우리 가족처럼 무수한 가정들에서 혈육을 잃었다. 오빠는 조선민족의 아들로 고국에서 싸우다 희생되여 고국땅에 묻혀있는데 어디에 묻혀있은들 어떠하랴? 오빠, 고국땅에서 부디 고이 잠드시라. 오빠의 유골을 꼭 찾고야말겠다는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아들을 그리워하고있는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그후부터 항미원조기념일때면 부부는 심양항미원조렬사관을 찾아가 참배하였다.   취재를 마치면서 만년생활이 고달프지 않냐고 묻자 “자식들이 다 커서 제노릇을 잘하는것이 지금세월엔 효자다”라며 온돌방이 습관되여 15년째 이곳에서 산다고, 이 “보금자리”가 없어지기전까지는 이곳에서 계속 살고싶다고 하였다. 행복은 자기 스스로 창조하고 또 그것으로 만족을 느끼며 산다는 홍할머니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