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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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로지원군전사가 하고픈 말 2009 .01
2012년 04월 20일 13시 58분  조회:2237  추천:0  작성자: 오지훈
 한 로지원군전사가 하고픈 말 
“미안합니다”
 
일전 76세의 한 로지원군전사가 신문사를 찾아왔다. 죽기전에 39년전에 차사고로 피해를 끼친 당년 지식청년을 찾아 “미안합니다” 사과의 말을 전하고싶다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로지원전사가 바로 료녕성로간부이고 2008년지원군로전사방조대표단 단장을 맏았던 정덕홍씨이다. 16세 어린 나이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여러차 공을 세웠고 1953년 판문점전장터에서 통역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하여 고향의 뉴스인물로 되기도 하였고 또 여러차 차사고와 악연을 맺으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다재다난”의 인물로 현지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판문점전장터에서 통역으로
정덕홍씨는 16살의 어린 나이 지원군에 참군하여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수장들은 그가 너무 어려워 “꼬맹이”라고 불렀는데 한어, 조선어, 일어가 숙련하여 67군의 정찰처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는 “꼬맹이”이였지만 다른 두 정찰병과 함께 기민하게 적군을 생포하는데서 공을 세웠고 또 수장이 준 카메라를 메고 전장터 곳곳을 누비며 많은 귀중한 사진을 남겼다.
1953년 3월, 3국언어를 익숙히 구사할줄 하는 정덕홍은 개성군사위원회 제7련합군 관찰소조 통역으로 불리워갔다. 제54군 진지에서 350킬로의 군사분계선을 감독 확정하는 통역을 맡았다. 8월 적의 차량이아무런 저해없이 군사분계선을 진입해오다 아군에 의해 차압당하였는데 제7관찰소조 책임자이며 지원군상교 백병훈이 이끄는 정덕홍 등은 신속하에 사고발생지점에 도착하였다. 정덕홍의 통역하에 백병훈은 기고만장한 적병에게 질문을 들이대고 이 일을 신속하게 상급에 보고하였다. 이 사건은 후에시 32호 기록편으로 촬영되여 전국에 방영되였고고향 길림성 통화시 류하현 성관진에서 이 기록편이 방영되면서 그의 부모들도 참전하여 종무소식이던 아들의 소식을 알게 되였다. 고향에서는 정덕홍을 고향의 영웅이라 자랑했고 참군을 반대했던 부모들도 이러인해 가슴이 뿌듯해났다.
1953년 11월의 어느날, 하룡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지원군위문단이 금성전선에 위문하러 왔다. 54군은 환영식을 가졌고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공연이 끝난뒤 인민군 김학범대교가 정덕홍을 데리고 가 하룡장군을 만났다. 김학범은 “저는 조선인민군 대교 김학범입니다. 하룡장군이 이곳에 오신데 대해 환영합니다.”라고 인사의 말을 건늬자 하룡장군은 김학범과 악수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덕홍이 또박또박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통역하였다.
대화가 끝날무렵에 하룡장군이 웃으며 정덕홍에게 몇살이냐? 고향이 어디지? 라고 물었다. 정덕홍의 가정형편과 부대생활, 학습정황 등을 일일이 물을 때 하룡장군의 검고 까칠한 수염이 약간씩 떨렸는데 그를 보고 웃는듯 했다. 그때의 정경을 회고하는 정덕홍씨는 화기가 넘치고 자애로운 하룡장군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고 했다.
 
차사고에 대한 저주
조선전쟁에 참가하여  5년남짓한 시간에 그는 선후 3차 3등공을 기입하였고 1956년 귀국하여 제남군구 사령부에서 14년간 참모장을 담임하였다.
1951년 4월 그는 고향의 11명 동학들과 지원군에 참군하였지만 그를 포함해 3명이 무사히 귀국하고 기타 사람은 전장터에서 전사하였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것은 그가 수십여년간 여러차 차사고를 당하고 빈번히 구사일생으로 사선에서 탈출할수 있었다는것이다.
첫번째 사고는 1969년 1월 24일. 당시 그는 심양시 황고구무장부의 참모로 있었다. 음력설기간이라 공안부문과 배합하여 치안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이날 새벽 4시경에 찦차를 몰고 다른 한 동사자와 함께 우홍구 대흥향 등가황촌에 왔다가 마침 귀성하는 두 녀지식청년을 차에 태우고 시내로 들어가고있었다. 차가 정상툰 근처의 기차길에 이르렀는데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경적소리가 들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늦었다. 차는 기차에 부딪쳐 두고패 번진후 레루길아래로 떨어졌다.
네사람은 모두 병원에 호송되였고 정덕홍은 오른쪽 쇄골이 골절되여 두달남짓 입원치료를 받았고 기타 3명은 경상을 입어 그날로 집에 돌아갔다.
두번째 사고는 1983년 8월 8일이다. 한번 생사고비를 벗어난 그는 다시는 차를 운전하려 하지 않았고 차만 보면 멀리서 피해 다녔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료녕성사격대에 배치받았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서 그는 다시는 차사고를 당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 30분좌우 성위체육위원회에서 회의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장강북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누가 말이 놀랐다는 웨치는 큰소리가 뒤전에서 들려오는가 했는데 뒤도 돌아볼새없이 그는 말발굽에 차여 피못에 쓰러지고말았다. 인사불성이 된 그를 급히 병원으로 호송했고 4개 갈벼대가 끊어져 그는 한달동안 병원에 누어있어야 했다.
세번째는 20년이 지난 2002년 9월14일, 누가 차사고로 이젠 액을 다 때웠다해서 그런가했는데 액운은 또한번 그에게 덮쳤다. 이미 퇴직한 그가 친구 몇사람과 함께 와방점저수지에 가 고기를 낚았고 1메터가 넘는 고기를 낚은 그는 기쁜 나머지 고기를 안고 기념촬영까지 하였다. 하루종일 고기낚시질에 지친 그들이 봉고차에 앉아 눈을 부치다싶이 하면서 웅요부근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차가 또랑에 번져지면서 정덕홍을 차밖으로 팽개쳤다. 왼쪽 뒤잔등이 쑤셔나는듯한 통증을 느낀 그는 인차 움직일수 없었지만 자신이 살아있다는것과 다시 차사고를 당했음을 예감했
다. 이번에도 그는 끊어졌던 갈벼대가 다시 끊어지는 등 심한 상처를 입어 웅요에서 구급치료를 받고 심양병원으로 옮겨 한달동안 다시 치료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여러번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나고 빨리 회복할수 있은데 대해 그는 다행히 자신이 몸이 좋았고 력기운동과 권투운동을 한 덕이라고 자랑했다.
 
미안합니다 사과라도 한번
세차례 차사고를 겪고난 정덕홍로인은 오히려 차분해졌고 차사고와 인연을 맺었다고  우스개소도 거침없이 했다. 그는 큰사고에도 살아날수 있었다면서 이런 경력은 자신에게 행운일뿐만 아니라 생활가운데서 갑작스레 부닥친 일을 여하히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것을 알려주었다며 인생에서 귀중한 재부를 얻은것이라고 토로했다.
그의 구사일생 경력은 그의 로친구들속에서 미담으로 전해졌고 그를 보면 구사일생이면 꼭 뒤에 복이 따른다며 롱담을 던졌다. 그는 죽지 않은것 자체가 큰복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현재 안해와 함께 만년을 행복하게 살고있는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그의 생활도 매우 규칙적이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서 심양시로간부활동센터까지 걸어가서 운동했고 점심때에 집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
차사고경력에서 인생의 도리를 더 깨우쳤다는 정덕홍로인은 그래선인지 첫번째 차사고때 같이 승차했던 두명의 녀하향지식청년을 지금이라도 만나보고싶고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다를 꼭 전해주고싶다고 했다.
그는 2007년 1월 27일과 2008년 2월 18일에 두번에 걸쳐 “료심석간”지에 당년의 두 녀지식청년을 만나 사과 한마디 하고싶다는 간절한 념원을 절절하게 표달했고 또 료녕텔레비죤방을 통해서 같은 심경을 표달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그를 만나서 그 두사람을 만났는가 물었는데 이 말이 인사말로 되였고 그의 사실을 보도한 매체들에서도 만나면 꼭 알려달라고 부탁해오고있다.
그의 소박한 념원을 담은 기사가 처음 신문에 나간뒤 그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당년 하향지식청년들의 기념합동촬영사진을 얻을수 있었고 두사람의 이름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거처하고있는 곳도 알아냈지만 아직 여러가지 사정으로 만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기자가 꼭 사과할 필요성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만나서 자기의 진심을 표달하고싶다며 안해와 두 아들도 나의 행동을 지지해주고있다고 했다.
정덕홍로인은 만날수 있다면 꼭 사과파티를 열고 흘러간 세월을 돌이키고 자신의 불찰로 빚어진 사고에 사과할것이라며 기자에게 만나도록 주선해줄것을 신신당부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과 가슴아픈 추억이 있다. 이미 흘러간 수십년 세월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한순간을 추억의 한장으로 떠올리면서 사과하려는 정덕홍로인의 집요함에서 고통을 락으로 간주하는 한 로간부의 인생철학을 새삼스레 느껴본다.  오지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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