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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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정불굴의 항일투사ㅡ리원명
2012년 01월 06일 16시 08분  조회:2212  추천:0  작성자: 오지훈
 견정불굴의 항일투사ㅡ리원명 
ㅡ리원명탄신125주년을 기념하여

1월5일은 리원명 탄신125주년 기념일이다. 료녕성당사연구실은 지난해 전 중국기자협회서기처 서기 리현덕의 요청을 받고 약1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들여 조선과 중국에서의 리원명의 항일투쟁사적을 발굴하고 “리원명동지의 일생은 위대하고 비장한 일생이였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항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고 귀중한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그의 항일투쟁사적은 중조인민의 빛나는 항일력사에 기록되여 영원히 간직되여야 할것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 전국인대상위회 비서국 국장 리재덕동지도 리원명의 항일투쟁사적에 대해 “조상지장군은 생전에 리원명동지는 우리 항일부대에 많은 필수품을 제공했고 투옥후에도 견정불굴하고 용감하게 싸웠다고 말했다”고 리현덕에게 전했다.
  의병운동과 리진룡의 희생
  리원명의 원명은 리종생, 가명은 리고려, 리명도이다. 1884년 1월 5일(음력12월8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연봉동의 가난한 전주리씨의 가문5남2녀중 맏아들로 태여났다. 11살 어린 나이에 그는 왜놈이 마을에 내붙인 “안전고시”를 뜯어내여 개울물에 처넣는 등 일제의 침략행위를 저주하였다. 16살에 일제의 만행으로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아버지 리윤경을 도와 수상운송에 나섰고 후에는 의병운동에 뛰여든다.
1907년5월 리원명은 홍범도가 조직하는 의병에 참가하여 청천강에서 군수품을 운송하면서 때론 평양에 내려가 무기와 약품을 구해오기도 하였다. 어느날 우연히 조선독립운동지도자 리동휘의 연설을 들은 뒤 항일구국의 도리를 깨우치고 조선독립운동조직 신민회(新民会)에 가담하였고 조선 의사 안중근이 이도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을 알리는 삐라를 살포하는 등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0년 8월 28일, “조일합병조약”후 의병운동이 크게 타격을 받았고 일부 애국지사와 진보적 인테리들이 중국 동북지역에로 들어와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때 리원명은 많은 반항독립운동가들을 동북지역으로 운송했는데1910년4월, 리동휘를 동북지구에로 호송했고1911년 저명한 의병지도자 리진룡을 관전경내까지 호송하였다.
  1918년 여름, 리원명은 고향 정주에서 의병 지도자 백광운(일명 채찬)과 알게 되여 그와 함께 정주,창성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후에 백광운의 제의로 여러명과 함께 도강하여 관전현에 가 리진룡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리진룡은 조선 황해도의병의 주요지도자로서 한정만이 이끄는 의병대와 손잡고 수차 일본군경을 습격했다. 리원명의 도움으로 밤도와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의 청산구 은광촌으로 온 리진룡은 그곳에서 “반일회”를 조직하여 조선인과 한족민중을 단합해 항일독립운동기지를 세웠다.
  리원명은 리진룡의 도움으로 “부빈회”를 설립하여 자금을 모아 생산을 조직했다. 그는 늘 압록강과 파저강(지금의 혼강) 량안에서 중국과 조선을 드나들며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였다. 1919년3월, 리진룡이 조선인첩자의 고발로 일본특무에게 피살되였고 비보를 받은 리진룡의 부인도 당장에서 까무라쳤다가 당날로 나무에 목을 매여 자결하였다. 이때 압록강 북안 하구에서 배를 몰고있던 리원명은 소식을 듣자 즉시 청산구로 달려가 의병들과 함께 비통을 참고 이 한쌍의 의부렬녀(义夫烈女) 를 은광촌의 석가골에 매장하였다. 리원명은 이를 악물고 결단코 이 비겁한 간첩을 잡아 리진룡의사의 원쑤를 갚으리라 다짐했다.
압록강량안에서의 항일투쟁
  천마산(天摩山)은 조선북부 압록강 남안 최대산간지대이다. 주봉은 해발1,160메터에 달하며 산이 높고 밀림이 우거진데다 인가가 드물어 일본군경들이 쉽게 드나들수 없는 곳이므로 항일복국독립운동이 날개를 펼수 있는 안성맞춤한 지역이였다.
  1919년 “3.1”운동후 최시흥, 백광운, 최지풍 등이 이곳에다 천마산독립군과 천마산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하였고 천마산을 중심으로 초산, 창성, 의주 등지를 습격해 일본군경과 수십번 싸워 적에게 호된 타격을 주었다. 1920년5월,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는 련락관 리작을 동북지구로 파견하여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참리부(参理部)를 광복군총영으로 개편, 천마산독립군을 천마산별동영(别动营)으로 개칭할것을 제의하였다. 광복군 총영장 오진동의 지시를 받아 리원명은 광복총영의 최시흥을 별동영장으로, 최지풍과 백광운을 중대장으로 임명하는 지시를 전달하였다. 최시흥은 리원명더러 천마산부대 후근을 맡아줄것을 부탁했다. 
  1921년 여름, 리원명은 최시흥의 지시에 따라 박태봉이 고향 녕변에 잠행하여 누님과 어머니를 관전으로 모셔오는데 동행했다. 박태봉이 천신만고로 누님 박순명과 어머니 등 가족을 거느리고 지정된 곳에 이르렀으나 이미 약속한 시간이 지났고 군무가 급한 리원명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태평초로 떠났다. 그들 일행이 태평초려관에서 류숙한 당날, 주변 백화산(현재의 화발산) 산채의 비적들은 려관주인과 짜고들어 박순명을 랍치했다. 박순명은 노기가 충천하여 비적들을 한바탕 꾸짖고는 산꼭대기를 향해 결사적으로 달려갔다. 나무가지를 잡고 깎아지른 절벽을  에돌아가던 박순명은 그만 나무가지가 부러지는바람에 산골짜기에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이 소식을 들은 리원명이 독립군을 이끌고 달려와 그녀를 범의 굴에서 구원해낼수 있었다. 이로 하여 그들은 기이한 인연을 맺었고1921년 가을 리원명과 박순명은 결혼하였다. 그해 리원명은37살, 박순명은22살이였다.
 1922년 봄, 리원명은 천마산별동영을 거느리고 도강하여 관전에 찾아온 최지풍을 맞았고 태평초 동쪽5킬로되는 괘방자촌에 안치하였다. 당시 관전현 경내에는 대한독립단(大韩独立团), “한족회(韩族会)”,“대한청년단”, “광복군사령부”,“천마산독립영” 등 여러 류형의 독립운동과 복국반일조직이 갈수록 많아졌는데 도합 천여명에 달했다. 이들의 의식주와 무기탄약 등을 해결하는 후근임무가 리원명에게 맡겨졌다. 그는 셋째 처삼촌 박윤범과 련락을 취했다. 일찍 일본류학을 다녀온 진보적 인테리인 박윤범은 혼강북안의 관전과 환인현 사이에 있는 작은 진인 사첨자(沙尖子)에서 조선인거류민들로 소규모의 독립무장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한편 수동식재봉틀 세대를 갖춘 피복공장을 운영하고있었다. 리원명부부는 그 기지를 리용해 생산을 확대했고 구식 페달재봉틀 두대를 더 구해서 조선부녀들을 동원해 회색과 황색 두가지 색상의 군복을 만들었다. 두달동안의 노력끝에 관전경내에 있는 독립군의 수요를 기본상 만족시킬수 있었다.
  1922년6월, 천마산별동영에서50여명의 병사가 환인현으로 이동한후에도 리원명은 계속해서 후근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7월, 최시흥과 백광운도 각기 조선으로부터 도강하여 길림의 림강과 집안으로 왔다. 8월, 환인현 마권자촌 골안에서17개의 조선독립운동조직에서 파견한71명 대표가 참가한 남만조선통일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회의에서 “통일부(统一部)”혁명조직을 세우고 산하 의용군을 건립하였다. 
9월 상순, 최시흥이 이끄는 소분대는 조선경내에 들어가 왜놈경찰소와 사무소를 기습하여 적지 않은 무기를 로획하고 또한 백성들로부터4천여원의 항일자금을 모아왔다. 부대를 더 잘 은페시키기 위해 그들은 천마산으로 돌아가는 도중 창성을 지나가다 당년 리진룡을 팔아먹은 첩자 정씨를 찾아내서 당장에서 총살했다.  
 채목회사 두목 아라키를 암살
 왜놈들은 “압록강일본채목공사”라는 기구를 세우고 동북지구의 림강, 관전, 안동 등 여러곳에 분회사를 설립하여 중국의 삼림자원을 마구 략탈하였다. 관전현 로흑산(일붚)에는 압록강으로 운송하는 목재만 해도 수천만립방메터에 달했다. 이 분회사는 일본퇴역군관인 아라키가 경영을 맡고있었는데 그자는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 조선난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리원명은 박윤범, 박태봉과 상론하고 아라키를 처단해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채목공사에 호림대가 있었는데 일본사무라이들과 부분 조선인첩자로 구성되였고 또 모두들 무장을 갖추고있어 거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23년 8월 30일(음력7월19일)  깊은밤, 벌목장의 내선한테서 아라키가 술에 취해 처소에서 자고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리원명은 즉시 어둠을 타고 로흑산분공사문어구로 접근해 잠에 졸고있는 두 보초병을 단매에 쓰러뜨린후 잽싸게 그들의 총을 빼앗고 아라키의 처소로 갔다. 아라키는 잠에 푹 빠져있었는데 리원명은 맹호같이 달려들어 아라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놈의 권총을 집어들고 돌아나오다 한 조선인첩자가 다급히 삼림속으로 도망치는것이 보였지만 시간이 긴박하고 위험이 큰지라 더는 추격못하고 재빨리 로영구로 돌아왔다. 그는 안해 박순명더러 가족을 거느리고 먼저 북산 대우골조선인집거구에 피신가도록 했다.
  그날 도망친 자가 압록강변하구의 삼림호위대 총부에 가서 리씨성을 가진 조선인독립군이 처소에 뛰여들어 아라키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호위대장(일본인)이 로흑산분공사에 달려가보니 아라키는 피못속에 쓰러져 죽었다. 날이 밝을 무렵, 조선인첩자를 앞세운 놈들이 태평초까지 추격해왔으나 헛물만 켜고말았다. 놈들은 조선복장으로 차림새를 바꾸고 동쪽10여리 떨어져있는 로영구로 뒤쫓다 공교롭게 막 문을 나서려던 리원명과 맞띄웠다. 미처 몸을 빼지 못한 리원명은 붙잡히고말았다. 흉수를 잡았다고 흐뭇해난 대장은 리원명을 한 마구간에 가두어놓고 간수 한사람만 남기고는 술집에 갔다. 태평초의 지리환경을 손금보듯 잘 아는 리원명은 바로 이 마구간뒤쪽에 옥수수대로 만든 변소가 생각났다. 마침 간수는 연명을 위해 삼림호위대에서 일하고있는 조선인청년이였다. 리원명은 조선말로 뒤를 보러 변소에 가겠노라고 청을 들고 변소의 뒤켠으로 도망쳐나와 수수밭속에 잠입했다가 북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박윤범은 거사를 하고 무사히 돌아온 리원명을 보고 큰일을 해냈다고 치하했고 소분대를 거느리고 사첨자로 리원명을 찾아온 최석순도 흥분되여 조선인들의 본때를 보여주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최지풍이 “통일부”에서 퇴출하여 대한진동도독부(大韩镇东都督府)를 따로 세웠고 최지풍이 중앙부총사령원을, 자기가 참모장을 맡았다고 하면서 수배령이 내렸으니 환인현에 가 후근일을 계속 하는것이 어떤가고 제의했다. 리원명은 리종생이란 원명을 리원명으로 고쳤다면서 이 제의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1923년 음력8월 하순, 리원명은 환인현 마권자촌 북구리차자에 있는 대한진동도독부 총사령부에 가서 오랜 전우인 최지풍과 상봉했고 최지풍은 그를 후근부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당시 골안에 수백명 인구가 거주하고있었는데 부녀와 아이들이 날마다 광물질함유량이 많은 물을 마시고 배앓이를 하거나 캐신벡병에 걸려 시달렸다. 또한 전사들의 건강도 엄중한 위협을 받았다. 그는 맹씨성을 가진 개명지주의 둘째아들 맹소당이 조선인들의 처우를 동정하는 심리를 리용하여 맹소당이 자기네 우물물을 매일 우마차로 골안까지 운송해주게 함으로써 식용수문제를 해결하였다. 식량은 환인과 관전 변경에 가서 조선교민들로부터 량식을 구매해들이는 한편 맹소당이 골안에 있는 자기네 밭 옥수수를 전부 걷어들여 독립군의 겨울식량으로 주어 해결할수 있었다.
  1924년 1월말, 대한진동독도부가 대한민국림시정부 륙군만주주재 참의부로 재편성되면서 내부 파벌투쟁이 커졌고 형세가 좋지 못한것을 본 리원명은 서둘러 가족을 잠시 환인현 서부 이호래(二户来)와 고태자(高台子)로 옮겼다.
  1924년6월, 최지풍의 제의를 받은 리원명은 최지풍, 백광운, 최석순 등 생사고락을 같이 한 오랜 전우들과 눈물로 작별하고 북만청년총동맹을 찾아 할빈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가 먼저 환인현 고태자에 가서 가족과 거처하고있을 때 갑자기 백광운이 일본특무에게 암살당했다는 비보가 들어왔다. 리원명은 형세가 급변하는것을 간파하고 급히 고태자를 떠났다.
  할빈 옥중투쟁
  1924년12월말, 리원명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할빈에서 무려 한달동안이나 북만청년총동맹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빈서진에서 조선에서 면목있는 한 로인을 만났고 이 로인의 집을 거점으로 반일조국광복선전활동을 하였다. 얼마뒤 북만청년총동맹(이때는 북만조선혁명통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의 한 성원으로 됨) 책임자 황기찬을 만났다. 황기찬은  리원명을 총동맹의 지도자성원으로 임명하고 리명도(李明道)란 가명을 지어주었다. 
  리원명은 빈주, 일면파, 주하정거장 등 지에서 양로공, 건축공, 하역부 등 일을 하면서 조선인로동자들속에서 북만청년총동맹 회원을 발전시켰다. 1927년4월, “신민부”가 파괴당하자 리원명은 빈주의 황인툰에서 조선독립운동 지도자 류원제의 조카와 손잡고 진보적인 조선인학교 복흥학당을 세우고 조선인쳥년들에게 애국주의를 각성시켰다. 1928년초, 조선혁명가 석만추가 쏘련에서 빈주지구에 와 신민부를 재건하고 복흥학당의 교원신분으로 자기 신분을 엄호하였댜. 동북당국 정보부문에서는 그를 “쏘련특무”로 의심하고 오래전부터 그의 행적을 밟기 시작했고1928년 여름, 리원명의 호송하에 빈주지구를 빠져나가려던 석만추를 체포하였다. 미구하여 리원명도 동북헌병대에 체포되였다.
  석만추와는 어떤 관계냐? 석만추는 어디로 뭐하러 가는거냐? 그가 쏘련에서 월경해온 임무는 무엇이냐? 놈들은 리원명을 욱박질렀다. 헌병들의 가혹한 고문에 리원명은 “나는 조선혁명가이고 나라가 망하여 중국에 망명왔으며 복국을 위해 조선학생을 양성했다. 석만추는 우리 복흥학당의 교원일뿐 쏘련 홍색특무와는 상관없다”고 한마디로 잘랐다. 몇달동안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헌병대는 하는수없이 리원명을 빈주 지방당국으로 압송했다. 가족들은 수소문하다 여러방면의 관계를 통해 오랜 력사배경을 갖고있는 빈주 청련사의 주지스님을 찾아 빈현 조지사(현장)를 통했지만 석방시킬수 없었다.
  전 중공중앙 대외련락부 부부장, 중앙기률검사위원회 부서기 겸 비서장 조의민(赵义敏)은1991년 북경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1928년 할빈에서 나는 통일전선사업의 수요로 여러차 ‘북만청년총동맹’조선독립운동조직을 찾아간적 있다. 그때 리고려(리원명의 가명)가 체포되기전에 그와 만난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의 신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체포된후 우리 당조직은 여러 방면으로 관계를 찾아 동북헌병사령원 류흥아를 설복하려 했다. 후에 장학량이 대사면을 하게 되여 리고려는 그해말에 풀려나왔다.”
  출옥할 때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리워 집으로 돌아간 리원명은 온몸에 상처가 랑자했으나 여전히 견강한 의지로 복국독립운동과 항일혁명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후에 리원명은 조선공산주의자 리계동과 접촉하였는데 리계동은 리원명이 세번째로 접촉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이시기 공산주의영향을 받아 그는 항일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여들었다.
  1931년 “9.18”사변후, 조선국적의 공산당원 장남운은 중국에 망명해있는 조선교민들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진행할 임무를 받고 쏘련으로부터 중국에 왔다. 먼저 리원명을 찾았는데 그들은 겉으로는 모피장사를 한다고 했으나 내막은 리원명을 통해 유격대가 필요한 군수품을 제공하는 할빈도외삼과수지구에 항일련락거점을 세웠다. 이때 리원명은 할빈성위군사위원회사업 책임자로, 후에는 파언공농반일유격대 참모장으로 된 조상지를 만나게 된다. 
   그해 가을, 리원명은 밤에 두번이나 조상지 등을 비밀리에 자기의 동생 리원국의 집으로 데리고 간적 있다. 파언공농유격투쟁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실패하고 일부 성원들이 왜놈에게 붙잡혔다. 변절자의 밀고로 하여1933년 초여름, 리원명의 련락점은 파괴되고 리원명도 일본특무기관에 체포되였다.
  할빈일본헌병대는 그에게 잔혹한 고문을 들이댔다.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리원명은 “너희 일본인들이 조선을 삼켜버렸고 우리들은 중국의 동북으로 살길 찾아 올수밖에.”라고 꿋꿋이 맞섰다. 화가 잔뜩 치민 일본특무는 그를 허공에 매달고 채찍으로 때리며 고문했다.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고 깨여나면 다시 혹형을 들이대면서 모피상과 유격대 및 중국공산당, 조선공산당, 쏘련공산당에 대해 대라고 하였다. 리원명은 모른다며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두달동안 고문하여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일본현병대는 전신이 만신창이 된 리원명을 일본령사관 지하실 특별간수소에 가두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대부분이 비밀리에 처형당하거나 혹형으로 죽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때 지하실의 감방에 파언유격대원3명이 갇혀있었는데 모두 몸에 상처를 입고있었다. 한 전사가 나서서 조금 마른 가마니를 내주며 리원명을 그우에 누워 쉬게 하였다. 리원명은 일본을 류학한 처삼촌한테서 일본어를 조금 배운적 있어 몸이 약간 나을 때면 종종 일본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조선에 가본적 있는 한 젊은 간수장은 리원명의 처지를 조금씩 동정하기까지 했다.
  “그해18살인 나는 혹형을 받아 옷이 다 찢겨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채로 지하감방에 갇혔다. 한 감방에 있는 리고려가 간수더러 더운물을 가져오게 하여 내 상처를 씻어주었다. 리고려는 외용약을 꺼내여 내몸에 발라주고 조선족들이 입는 흰옷 한벌을 꺼내여 내게 입혀주었다. 나는 너무 감동되였다. 리고려는 굳센 혁명자로서 몸이 그토록 심하게 상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조선독립군 사람이였다. 나와 리고려는 두달동안 감방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어떻게 적의 고문에 대처하는가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조선의병운동으로부터 빈현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말해주었고 거기서 나는 커다란 계발을 받았다. 당시 그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나는 그가 적어도 공산당을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신앙한다는것을 긍정할수 있었다.∼”1933년10월 반일시위를 하다 붙잡혀 일본령사관 지하실에 같힌적 있었던 하능(서안광업학원당위서기)은1988년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후에 중국공산당 할빈당조직의 구출로 리원명은 마침내 할빈시 도외(道外)감옥으로 옮겨졌고 남강법원에 기소되여 공개심판을 받게 되였다. 당시 할빈호제회(互济会, 전문 옥중 동지들을 구출하는 기구)의 책임자 조상박(조상지의 친형)동지는1989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쏘련에서 돌아온 중공당원 장남운이 우리 호제회를 찾아와 원 할빈련락점의 리고려(리원명)를 구출해줄것을 간청했다. 나는 곧 관계를 통해 남강법원을 찾아서 법관에게 은화100여냥을 쥐여주었다. 내 기억에 남강법원은 ‘이 상인은 리익에 눈이 어두워 정치를 불문하고 치안법규를 무시하며 산중 유격구에서 장사를 했다. 금지품을 도매해 적을 지원한 행위로 하여 징역8개월에 판결한다. 허나 이미 갇혀있은 시간이8개월이상 되였으니 즉시 석방한다.’고 판결하였다.”
  리원명은 동생 리원식과 리원보에게 들리워 집으로 온지 얼마 안되여 상처가 너무 심한 탓으로1934년 3월 19일(음력2월5일)에 눈을 감았다. 그때 나이50세였다. 그날로 박순명은 리원명의 유복자 리현덕을 낳았다. 살림이 찢어지게 가난한 그들은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었다. 북만당조직에서는 장남운동지를 파견하여 리원명의 후사를 처리하고 로씨야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 공동묘지는1958년 할빈시유원지로 개조되면서 그의 묘와 비석은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남편이 사망된후35살의 박순명은 가냘픈 녀인의 몸으로 올망졸망한 여섯아이를 데리고 완강한 의력과 두려움모르는 정신으로 운명에 도전했다. 비밀리에 독립군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왜놈의 추격을 받고있는 독립군 정찰원을 엄호해준 “죄”로 옥살이까지 하였다. 리원보와 리원국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1944년에 선후로 병사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여 항전이 승리하고 조선이 광복을 맞았다. 박순명은 눈물을 흘리며 “리원명이 살아있어도 겨우61살밖에 안되는데 몇십년동안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오늘을 기다리지 못했군요. 그래도 구천에서 기쁘게 웃을거예요.”라고 말했다.
 일전 리원명탄신125주년기념일에 즈음하여 전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 전 국가민위주임, 현 통전부 부부장 리덕수, 전 공군부사령원 리영태, 전국정협위원 정순주는 각기 “영렬충혼, 만고류방(英烈忠魂万古流芳)”, “렬사정신수우주, 영웅호기관장홍(烈士精神垂宇宙英雄浩气贯长虹)”“충혼소일월 호기장건곤(忠魂昭日月浩气壮乾坤)”, “민족충렬, 천추만년(万古忠烈千秋万年)”, 이란 친필제사를 써주어 그의 정신을 높이 구가하였다.           오지훈기자  2009/01/23
 (전 중국기자협회 서기처 서기 리현덕의 구술과 료녕성당사연구실의 리원명관련 자료에 근거하여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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