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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일이면 가족이 단란히 모이여 기쁘게 月饼을 먹으며 밝은 둥근달 바라보고 그간의 회포풀며 즐겁게 보내는 추석명절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산소에 가 일년내 자라난 잡초들을 벌초하고 저세상에 계시는 어른신님들과 시공테넬속에 술잔을 나누며 옛담을 나누고 그리는 명절이다.
나는 어렸을적부터 청명과추석에 기회가 되면 아버지를 따라 사촌형제들과 같이 봄에는 할아버지, 큰아버지 산소에가 겨울동기로 가라앉은 묘지에 흙을 올리고, 가을철 추석에는 일년내 무성히도 자란 잡초들을 벌초하여 주었다.
처음에는 어려선지 왜 가토하고, 벌초하는지 모르고 부친이 이끄는 대로 따라 다니였다. 가을에는 산중에 다른 사람들이 심어 놓은 과원에서 참외,수박들을 얻어먹고 나무에 바라올라 머루,다래등 야생과일들을 따 먹는 재미에 더욱 따라 다녔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어른들이 선조들의 령전에 술 부으며 외우는 소리, 일이 끝나고 린근 산소에 온 분들과 한자리에 모여 앉아 고인의 생전과 그 지난생활상들을 얘기하며 한 순간을 보내는 그자리가 얼마나 뜻있는 자린지 알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할머니는 부친이 어렸을때 일찍 돌아 가셨다.)사랑을 그리 받지 못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동네는 물론 린근에서도 이르는 유식한 분이시였다.
우리아버지가 항렬에서 둘째이시기에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집에 계시였다. 큰아버지가 나 소학교2학년때 병으로 돌아가시여 부친이 할아버지를 모시려 하여도 큰아들집에서 삶을 마쳐야 한다면서 별세 할때까지 큰어머니가 모셨으며 내가 소학교6학년(당시 학교사정으로 우리반은 전체가 한 학년 더 다녔다.) 다니던 가을철에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였다.
손군들중에서도 할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애지하는것 같았다. 어쩌다 내가 찾아가면 머리맡 작은 접시에 놓여있는 몇알안되는 사탕도 다른 사람모르게 쥐여 주었고 5학년학기말 전현적 통일시험에 공사적 학급별에서 2등을 하자 내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도 기뻐하시였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사랑도 얼마받지 못했다.(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여나 얼마안되여 별세하였다.) 외할머니를 처음본적은 초중1학년 여름방학이였는데 어머니가 수속받고 조선에 친척방문으로 외할머니집에 가게 되였는데 부친은 공사에서 파견하여 현성에서 전국적으로 처음 꾸리는 첫기 농촌맨발의사학습반에 가시여 내가 젖먹이 어린동생을 보살피며 모친을 배동하여 현성 마준켠에 자리잡은 조선 헤산시로 가겠되였다.
그때 그길이 외할머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은 걸음이였다.
다 자란외손자를 처음 보시는 외할머니는 품에 그러앉고 쓰다듬으머 그리도 우셨다. 그리고 그리 부유하지 않은 살림에 삼촌어머니의 눈을 피해가며 마른 명태를 방추로 두둘겨 구워서 주셨고 뭘 더 먹이고 주려고 허둥대였다. 그때 처음 먹어보는 명태맛이 그리도 좋았던지 아니면 외할머니의 사랑의 손맛이 익혀지지 않았던지 나는 지금도 마른 명태를 그리 좋와한다.
장가들어 다른사람들은 장모사랑을 받는 다지만 나는 말수적은 장모의 사랑은 얼마받지 못하여서도 인정깊은 장인의 사랑을 많히 받았다. 피지못한 살림이지만 어쩌다 내가 가면 장인은 몇마리 안되는 씨암탉도 잡고 장에 나가 작으만치 돼지고기도 끊어 오며 고간에 직접들어 가시여 얼마안되는 입쌀도 떠들여 오고(벼가 나지 않은 고장) 하였다. 어린처남,처제를 시켜 술도 따오게 하였다. 그리고 술도 그리하시지 않으면서도 저녁상에 앉으시면 사위하고 술잔나눠며 얘기도 참 잘하시였다. 군인출신인 장인은 성격이 곧고 바르며 그른행위에 대하여서는 그가 누구든 거저 보내는 일이 없었다.
장인,장모 세상뜨신후 둘째인 우리가 산소를 돌보고 하였는데 내가 북경에 온 후로는 마을에 마음씨고운분에게 산소건사를 맡기였다.
집 산소는 현성에 있는 두동생하고 사촌동생들이 다닌다.
작년 추석에는 멀리 현성에 있는 두동생이 마침 사연이 안돼 내려오지 못하여 80세에 가까운 부친께서 힘겹게(마을에서 3리길) 산소를 다녀 오셨는데 그일이 항상 마음에 걸려 전번에 동생들에게 전화하니 올해는 내려갈수 있다하니 안심된다.
이래도 마음한쪽이 여전히 쓸쓸하다.
고향마을의 썰렁한 풍기와 같이ㅡ그속에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여도 언제한번 친지、자손들의 소리 못듣고, 손길 못닫는 고향황산들에 묻힌 우리선조님들의 황량한 령墓지의 쓸쓸한 풍경이 가슴쓰리게 저미여 온다. 혹 이렇게 되는게 현대 사회의 리치고 당연한 일인지…?!
발 빠른 사회의 절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현재 사람들의 생활리념이 변하여 그런것인지? 아니면 고래문명문화에 드안한 마음에서 오는 풍기지? 그렇지 않으면 ……
89년도에 나와안해가 친천방문으로 조선 혜산시로 간적있다. 입경하여 4일만에 바로 단오였는데 삼촌어머니가 아침일찍 일어나시여 찌지고 볶으며 바삐 보내 시더니 아침먹은후 삼촌이 산소에 가자며 정복하고 아이들을 민족복장으로 단정히 입혀 앞세우고 우리를 데리고 외할아버지,외할머니산소로 향했다. 삼촌어머니는 깨끗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묵짓한 제상음식을 담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뒤를 따랐다. 시내안이라 묘지가 있는 산에 까지는 멀었다.
산기슭에 이르니 명절복장을 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단정한 옷차림한 가장들, 말쑥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묵짓한 대야를 머리에 인 여성들로 묘지로 통한 거리와산길에는 알록달록 사람천지로 가관이 였다. 그때;
아 ! 이것이 우리민족이 조상들로부터 이어 받은 문명한 경상(敬重先祖)문화이고 경지이구나 하는 감탄이 고국에 가서 느낀 제일 큰 감회였다.
한데 지금 우리 모두들 고향산천마다 에 모신 선조님들의 산소는 아마 많히 임자없는 묘지로 변하여 잡초가 무성지게 황량하고 쓸쓸할것이다.
09년 가을에 고향에 갔다 조상님들산소와 장인,장모산소를 돌아 보았는데 그때 인상이 지금도 앞에 선하다. 조상님들, 장인、장모산소 근처, 차타고 다니는 공로옆 산기슬과 마을근처에 있는 묘지들은 내가 고향에 있을 때 까지도 사람들손길이 다아 정결하던것이 인제는 언제 사람손이 돌아는지 모르게 황페하였다.
그기에 그렇듯하게 콩크리트길을 깔고 거리를 환히 쭉쭉 빼낸 마을엔 인적기 적어 썰렁하고 또 주인이 없어 볼품없게 허망해진 벽돌집과 찌들어 가는 초가집들은 협화음을 울리며 더 가슴쓰리게 하였다.
바로 여기에 올 추석에도 가지못하는 사연에 마음 무겁고 죄지은 감에 고개숙여 진다.
나를 비롯해, 모두 바쁘다는 리유, 시간이 안된다는 핑게를 붙이지만, 정말 그런가 ? !
이 세상에 돈 보다 더 귀중한것이 있으니; ? !
2011년 9월11일 밤 9시22분
북경에서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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