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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정신철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족학교가 없는 곳에서 민족의 언어와 문화교육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과거 인구분포의 특징으로 산해관이남지역에는 민족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산해관이남지역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은 부득불 현지 한족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민족언어와 문화를 습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민족언어는 민족의 주요한 특징인바 그의 상실은 민족성 상실과 한족화의 과정을 재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국외진출은 집거지인구의 분산화를 초래하는 반면 인구의 도시집중을 다그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도시진출과 더불어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국외에 나간 사람들도 귀국후 재정착시 역시 도시지역에 집결되는 추세가 보였다. 조선족사회는 인구의 도시이동으로 날로 분산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분산은 또한 민족문화의 약화를 다그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민족특성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의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여러도시에서 조선족자녀들에게 민족언어와 전통문화를 배워주기 위한 민족교육기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먼저 출현한 것이 민간에서 꾸린 조선어주말학교와 사립조선족학교이었다. 설립시간 선후로 나열해 본다.
1) 북경 조선어학교
1989년4월 북경조선어학교가 북경시 해전구 교육부문의 인가를 거쳐 설립, 1992년5월 제1기 졸업생 428명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주말을 이용하여 조선어와 민족전통문화를 배우는 곳으로 기존의 학교시설이나 기관의 시설을 빌려 민족어교육을 진행하는 주말학교이다. 학생구성은 초등학교학생에서 직장청년까지 있어 초등학생반, 중등학생반, 대학생반과 직장인반으로 나누고 수준에 따라 초급, 중급과 고급으로 나누고 학습시간은 3년으로 되어 있다. 이 학교는 개교이래 천여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이후 북경조선어학교은 심양, 길림, 장춘, 할빈, 목단강, 단동, 위해, 석가장 등 도시에 분교를 세워 민족언어문자교육을 진행하였다.
2) 천진시 조선어학습반
1990년 천진시조선족연합회에서 조선어기초반을 개강하였다. 첫 학기에 수강생 35명(대부분은 직장인)이었다. 형식은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8개월기간 조선어문과 문자의 기초를 터득, 사용한 교과서도 자아편집한 것이였다. 1991-1993년에 선후로 <연변한족간부조선어학습자료>, <조선족기초과본>, <조선어회화과본>등 교재를 사용하였고 초급반, 중급반과 통신반을 모집하였다. 1994년에는 천진시 하서구 직공대학과 연합하여 조선어학습반을 꾸렸다. 당시 조선어붐이 천진에서 일기 시작하였고 각 부문에서 조직한 여러 형식의 조선어학습반이 17개나 되었다. 이 시기 조선족연합회가 꾸린 조선어학습반은 천진시 조선어학습붐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1995년에 여러 여건으로 연합회에서 조선어합습반을 중단하게 되었다.
3) 천진시 새별조선족학교
1993년7월 <천진시새별조선족학교>가 천진시인민정부의 정식인가하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산해관이남에 첫 번째로 꾸린 조선족학교이다. 1998년 5월에는 부지면적이 1650평방메터에 달하는 교실, 기숙사, 식당 등을 포함한 종합청사가 천진시 유일한 조선족집거촌—동려구 신립촌진 보원촌에 마련되었다. 1999년에는 재학생 60여명에 15명 교직원으로 모두 조선족으로 구성되었다. 학생당 학비, 기숙사비,식사비를 포함하여 1년에 3000원을 받고 있지만 학교 운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즉 다시 매년 기본지출이 30만원 정도로 해마다 10만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었든 것이다. 학교의 학생래원 및 교원의 빈번한 이동 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2005년9월에 학교청사를 팔게되어 결국에는 문을 닫지 않으면 되었다. 예컨대2000년통계를 보면 당시 학생의 각종비용은 3000원으로 65명학생이 내는 경비수입이 20만원좌우이지만 학교의 지출은 난방비,전기세와 물세등이 5만원, 교직원의 월급 156,855원이고 식비가 6만원이며 사무비용이 4만원으로 모두 306,855원이 된다. 보는 바와같이 학교는 해마다 10만원좌우의 적자를 내면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4) 북경장백학교(김정국 시기)
1994년 8월 김정국이 북경에 조선족소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모두 12명(1학년생10명, 유치원생2명)이었으나 이후 빠른 발전을 가져와 1997년에는 학생수가 23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학생수의 증가에 따라 학교시설을 확대하였으나 비싼 학교건물 임대료 등으로 운영상의 부담 또한 적지않아 1998년에는 북경시외지역인 통주로 학교를 옮겼다. 하지만 이 계기로 학생수가 170여명으로 감소되는 등 학교규모가 갈수록 축소되었다. 2001년 김정국은 장백학교운영에서 손을 떼였다. 본 학교는 민간인이 꾸린 사립조선족학교이지만 “조선족학교”라는 간판은 해당기관의 불허가로 걸수 없었고 결국에는 “장백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5) 북경장백학교(김영옥 시기)
1994년 설립한 장백학교는 몇 년간 잘 운영되다가 경비부담 등으로 점차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흑룡강성 계서출신의 녀성 김영옥씨가 이어받아 학교의 운영자로 되었으며 학교도 여러번 옮기게 되었다. 2003년8월부터 북경시내에 들어와 현지학교와 합작하는 형식으로 운영이 되었으며2006년에 장백소학교(찐숭제4소학교, 약60명 학생)과 장백중학교(찐숭제1중학교 약30명 학생)의 형식으로 남아 있었다. 이 두 학교는 숙소은 각기 있고 수업은 그 학교에 편입하여 하고 과외 기숙생활에서 조선어 학습, 학교보도, 그리고 피아노, 손풍금 등 특기교육을 진행하였으며 당시 조선족교원이 13명(월급 1500원정도)있었으며 한국학생과 북조선학생이 10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대사관 자녀이고 주요하게 한어공부를 하였다.
현재 장백학교의 연장선으로 성아 쌍어초등학교, 연교 중학교, 따창 고급실험중학교와 협력하여 조선족학생을 모집하여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학교의 초중부 학비는 6000원/학기이고 고중부는 7000원, 여기에 기숙사비, 식비 및 기타비용을 합치면 한 학기에 초중부는 11350원에 또 일차적으로 내는 입학금6000원을 내야 했고 고중부는 14200원에 입학금5000원을 더 내야 했다. 학생들의 이러한 경비는 산해관이남진출의 보통 조선족가정각도에 보면 아주 어려운 부담이 아닐수 없다.
6) 북경금잔디 유치원
1998년9월7일 <북경금잔디유치원>이 설립되었다. 당시 유치원생은 12명에 불과하였다. 이는 1992년 북경에 진출한 김혜민(흑룡강성 탕원현조선족중학교 일본어교원)이 꾸린 조선족유치원이었다. 이후 유치원은 교육프로그램, 기숙환경, 건강식 등 모든 면에서 부근 기타 유치원수준을 월등하여 현지역의 우수교육기관이라는 좋은 평판을 받는 한면 조선족어린이 내원의 불안정 때문에 2005년부터 한족아이들도 받기 시작하였다. 한족아이들도 조선말, 조선글을 잘 배웠다. 현재 유치원생 220명가운데 조선족이 3분지1정도 된다. 그리고 주변 소학교의 저학년 학생대상으로 방과후에 조선말, 조선글을 배워주고 있다.
7) 북경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 조선족부
1999년9월 북경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 조선족부가 설립되었고 최초에 44명의 소학생이 모였다. 형식은 조선족학생 단독반을 꾸리지 앟고 일반 수업은 부속소학교의 학생들과 같이 하고 과외만는 민족교육중심으로 조선어문과 민족전통문화를 배우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현지 교육질이 좋은 학교와 연합하여 민족교육의 장소를 마련하는 이러한 방식이 학부모들의 호응을 받아 조선족부의 학생수가 증가하는 추세가 보였고 부속소학교가 폐교하기 직전 이 학교에 조선족학생이 140여명이 되었다.
학생들이 내는 비용은 한 학기에 소학생은 3500원, 중학생은 4500원이다. 이 비용에는 부속소학교에 내는 의탁 수업비 1000원과 식비, 기숙사운영,민족교육인력 사용 등이 포함되었다.
8) 북경 삼강학원
2005년 7월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가 폐교되고 해정구 실험소학교와 합병되면서 조선족부 학생도 실험소학교로 전이되고 삼강학원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조선족학생이 115명이었으며 그 후 한때는 학생이 170여명까지 되었다(이 가운데 한족학생이 30명). 하지만 실험소학교에서 매 학생당 2만원의 찬조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조선족학생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한족학생이 증가되는 추세로 2008년에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다.
9) 청도벽산조선족학교
청도조선족학교은 청도시 교육당국으로부터 공식허가를 받은 사립학교로 2000년 8월 28일에 개학하였으며 그 때 학생이 13명이었고 학교는 이창구 구수로에 있었다. 2001년 5월 필자가 방문할 시기 학생이 60명(1--4학년생)되고 교원이 14명 있었다. 2004년3월 청도벽산소학교로 개칭하였고 교사를 이창구 천수로에 옮겼다. 2006년에는 학생이 200명이고 교원은 35명이며 3기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아 졸업생들은 현지 한족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나 2007년9월에는 중학부가 설치되었다.
근 10년간의 발전을 거쳐 학교는 초보적으로 규모를 갖추고 학교운영도 정규화에로 나아가고 있으며 지금 소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전부 과목을 개설하고 유치원과 주말한글학교를 부설했다. 하지만 교사는 여전히 임대한 상태이다. 학교에는 지금 소학생 300여명, 유치원생 213명, 교직원 50여명(50%가 한족, 50%가 조선족)을 갖고있다. 학교에서는 청도시 시구의 소학교 통일교과서를 채용하고 조선어과목과 영어회화(외국인 교원) 등 특색언어과목을 증설했으며 조선어, 영어회화와 음악을 제외한 기타 과목은 모두 한어로 수업하여 학생과 의무교육의 동기성을 보장함으로 조선어, 한어, 영어 "세가지 언어 교학"을 실현했다. 현재(2009년5월) 새로운 교사를 건축하고 있는바 부지가 약 61,540평방메터이고 건축면적이 22,000평방메터 되며 2012년8월에는 준공될 계획이다. 그 때 학생규모는 총1500명으로 소학생 720명, 중학생360명, 고등학생 360명, 그리고 유치원생220명 등으로 전망하고 있다.
10) 청도 서원장조선족학교
2006년8월 청도서원장조선족학교는 벽산조선족학교의 초대교장 김장웅선생이 설립했다. 2006년 7월 1일, 김장웅선생은 서원장촌 교사를 임대하여 먼저 서원장조선족유치원을 설립한뒤 8월 28일에 서원장소학교를 설립했다. 지금 서원장조선족유치원과 소학교는 재학생 500여명을 갖고있다. 민영 유치원과 학교이다 보니 학교는 장기간 결손상태에 처해 있으며 2008년만 해도 10만원의 결손을 보았다.
도시민족교육의 특수성으로 학교운영 경비가 보통학교보다 더 지출된다. 왜냐하면 산재하므로 학생수가 적고 학교규모가 크지 않지만 교직원편제와 정상적 경비지출이 보통학교보다 많을 수 밖에 없으므로 재정적으로 더욱 큰 어려움이 있다.
위에서 보다시피 민족교육의 필요로 산해관이남지역에 여러 형식의 민족교육기구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현지정부의 해당정책미비, 재정적 어려움 등 여러 원인으로 어떤 곳에서는 폐교가 되고 어떤 곳에서는 어렵게 운영하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운영자체의 성격을 바꾸기도 하였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현황은 낙관적이 못 된다.
산해관이남지역에서 민족교육기관의 성쇄원인 가운데 하나는 조선족학부모들의 민족교육의욕이 약화되면서 그들은 자녀을 학교에 보내면서도 수학, 영어, 어문 등을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민족언어, 민족문화 터득에는 열성이 부족하였다. 두번째는 의무교육접수에 비해 10배내지 더 많은 경비부담을 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는 정부의 정책적,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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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95년도에 북경장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하여 소학교 졸업했어요~
어느듯 서른이 다되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