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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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하면 동북3성과 내몽골에 집중 거주하거나 또는 개혁개방 이후 동북에서 산해관 이남으로 많이 이동분포되어 있는 걸로 모두 알고 있지만, 하북성 청룡만족자치현의 어느 시골에 ‘박씨마을’이 있다는 것은 거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곳 ‘박씨마을’은 예전에 일부 학자 및 기자들이 왔다간 이외 우리사회에 많이 소외된 곳으로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의 사각지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씨마을’은 중국조선족 역사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표적지로 남아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를 간략히 말하면 아래와 같다.  명나라 말기 동북에 분포되어 있는 여진족의 한갈래인 누르하치가 점차 세력을 키워 내부를 통일한 후 후금정권을 건립하였다.    이후 후금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명나라와 대항하고 조선왕조를 침입하여 많은 조선사람들을 포로 납치해서 만족귀족들에게 배분해주고 만주8기군에 편입하기도 하였다.    1636년 후금정권이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하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1644년에는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하였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이때 만족 귀족과 8기군을 따라 많은 조선사람들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지역에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북경 근처, 하북 승덕, 청룡 등 지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청룡의 ‘박씨마을’ 선조들이 포함되었는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이 된다.    이와 같이 ‘박씨마을’ 선조들은 중국조선족 역사의 시초와 연결되었고 ‘박씨마을’도 우리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되었다. 물론 수백년의 시간이 흘러 이 곳 박씨사람들은 점차 현지에 동화되고 만족 또는 한족으로 되어있었으나 박씨성, 선조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잊지 않고 대대로 전해왔다.    이후 신중국이 건립되고 민족평등정책의 혜택하에 가슴 속에만 남아있던 민족의식이 되살아나서 1964년부터 민족성분을 조선족으로 고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80년대 말기 청룡현 소속의 몇개 마을에는 수백명의 조선족이 생활하고 있었다.   청룡현의 ‘박씨마을’에 관하여 20세기 80년대 말 이후 일부 학자와 기자들이 이곳을 다녀갔고 연변대학 역사학부 석사연구생들이 현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신문기사와 학술연구에 제한되었고 ‘박씨마을’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등한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한번 가본다는 것이 미루어져 이번에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2020년 10월 3일 도시우리말학교협의회 제6회 교사연수회가 진황도에서 개최하는 계기로 회의 참석자 전체가 ‘박씨마을’을 찾아갔다.    우리가 간 마을은 팔도하진 탑구촌으로 박씨가족이 제일 많이 사는 마을이었다. 탑구촌은 기타 농촌지역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산골마을로 예전에는 외계와의 연계도 많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 우리민족이 살고 있다는 것은 만약 사전에 일정한 요해가 없으면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조선족마을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였고 박씨사람들에게도 우리민족의 흔적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단지 ‘조선족’이라는 집념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필자는 마을에서 태어난 69세 노인 및 그 자녀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그들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의식만은 아주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김치랑 된장 같은 것을 좋아하고 한복도 한번 입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같은 민족의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하였다.      ▲사진설명: 마을에서 출생한 69세노인과 대화 중(2020.10.03)   이번 탐방에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박씨가족 사람들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대해주었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으며 우리가 가져간 한복을 입은 부녀들과 아이들의 얼굴엔 기쁨이 역력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이동 중에 마을사람들이 호기심 차서 누구냐고 묻기도 하였는데 박씨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친척들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는 아주 감동을 먹었고 한편 소외된 그들의 마음 오죽했을까 하는 착찹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단체행위로 박씨마을을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전 준비는 좀 있었지만 마을에 대한 요해는 아주 적었다.    현재 탑구촌은 도로가 마을을 지나고 외계와의 연계도 많아 보였으나 마을 면모는 산골마을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고 박씨사람들의 생활도 그리 넉넉하지 않는 것 같다. 한때는 석탄부업으로 생활이 좀 좋아지기도 하였다지만 마을을 떠난 사람들도 많아졌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20세기 80년대 말 이 마을의 박씨성을 가진 조선족이 260여명이 있었지만 현재는 20여 가구에 100명도 되지 않아 박씨마을사람들이 점차 더 흩어져 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이번 걸음에서 이곳은 우리민족사회와 완전히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여기 박씨사람들의 신분은 조선족이지만 조선족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여 있었고 조선족농민들이 노무로 많이 가는 한국과도 전혀 연계가 없었다.    박씨마을사람들은 민족사회에서 잊혀진 존재이지만 조선족이라는 집념속에서 지금까지 왔으니 참 대단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계속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리 역사과정에서 중요한 한폐이지를 장식하는 청룡현 박씨마을은 흐르는 세월 속에, 그리고 민족사회에 소외된 아픔 속에서 점차 초라해지고 소실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이렇게 호소하고 싶다.  박씨마을의 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고 기성세대들에 대한 도움도 필요없는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박씨마을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하여 우리사회에서 뭘 좀 할 수 없는지 심사숙고해보았으면 한다.    2020.10.08 흑룡강신문 연해뉴스
29    우리자신이 “선족”(鲜族)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댓글:  조회:2703  추천:0  2017-10-19
우리자신이 “선족”(鲜族)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정신철         우리는 일부 매체에서 조선족을 “선족”(鲜族)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가끔 보았다. 이에 대해 우리사회 일부에서는 그릇된 호칭을 고쳐야한다고 해당부문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도 을 작성하여 중공중앙선전부와 공안부에 보내여 각 매체와 공공기관에서 조선족호칭을 정확히 사용하도록 요구하였다.        하지만 항간에서는 아직도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호칭하는 현상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조선족자신들이 “선족”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적지않았다. 한번은 연교지역 모 가도판사처 부주임과의 대화에서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하기에 필자는 조선족을 “선족”으로 호칭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해 주었다. 이에 상대가 말하기를 “본인도 원래 ‘조선족’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조선족들이 ‘선족’이라고 자칭하는 것을 많이 듣고 자기도 모르게 ‘선족’소리가 나간다”고 하였다. 사실 필자도 조선족자신들이 “선족”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가끔 들었다.    여기서 보다시피 타민족의 입에서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호칭한다고 무조건 반발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자신이 “선족”이라고 호칭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선족”이란 호칭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통치의 유물이며 일본침략자들이 우리민족을 말살하고 비하하는 호칭이다. 이런 호칭을 우선 우리머리속에서 철저히 배제해 버려야 한다. 이래야만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호칭하는 현상을 단절할 수 있으며 타민족이 “선족”이라고 호칭할 때도 그 잘못을 정정당당하게 지적할 수가 있다.   
28    정음우리말학교를 지속적으로 꾸려나가자면… 댓글:  조회:3731  추천:0  2015-05-14
정음우리말학교를 지속적으로 꾸려나가자면… 정신철    이번 학기중에 교실문제로 정음우리말학교가 문을 닫지않을까하는 의구심마저 생긴적이 있다. 10개 반에 120여명이 되는  학생들이 장소가 없어 헤메는 정경을 상상만해도 가슴이 떨렸다.  다행히 어려운대로 교실을 찾아 수업을 이어갈 수가 있어 잠시나마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안정되지 못한 장소때문에 우리말학교가 언제 또 앞과 같은 일이 생길지 누가 장담하랴? 교실문제는 항상 나를 불안케 하였다.   지금 교실을 찾아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 하나는 교실임대조건와 요구가 아주 까다로와 합작이 잘 될는지 걱정이었고 또 하나는 임대료가 원래 예산보다 훨씬 높아 불안하였다. 사실 정음우리말학교가 개교되어 5학기째 되었지만 이전에는 학교후원회리사회의 정기적인 지원과 북경조선족사회의 후원으로 운영경비에 대하여서는 거의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보면 학교운영경비도 예산을 넘어 적자가 생길 우려가 없지않다.  학교 수입과 지출을 간단히 라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기적인 수입원은 후원회리사회자금 약  10만원, 모 재단지원 약 6만원, 그리고 학부모후원금(이번 학기부터 학부모후원금으로 학생일인당 300원을 받았음)4만원 정도로  모두 합하면 약 20만원이 된다. 지출은 현재 토요일 하루 수업에 소요되는 경비는  6950원(교실임대료 4200원, 강사료 2750원)으로 1년 2학기(32주)에 소요되는 경비는 222400원이 되고 이외 활동비용, 필수품지출 등 잡비까지 합치면 거의 250000원에 달한다. 즉 지금대로 나가면 약 5만원의 적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음우리말학교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다른 한면에서 보면 학교운영을 한 단계 높이는 새로운 계기가 될수도 있다. 현재 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둘러싸고 많은 방안들이 론의되고 있다. 하나는 회사를 꾸려 학교장소확보와 경비부담을 일부분 담당하여 학교운영의 뒷심이 되어주는 것인데 여기에는 헌신적인 경영자가 나서야 될 일이다. 두  번째는 학부모들의 후원금을 높여 자체의 힘으로 안정적인 장소를 확보하는 것인데 얼마나 많은 학부모들이 이에 호응할 수 있는지 파악이 가지 않는다. 세 번째는 북경조선족사회상대로 모금운동을 벌려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장소를 확보하고 학교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이것 역시 그리 쉬운 일이 아닌것 같다.    이상과 같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우리말학교운영을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 있으며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노력만 하면 실현할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시에서 민족적 정감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전승하는데는 우리말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정음우리말학교는 북경조선족사회 전체성원들의 힘을 합쳐 꾸려나가야 한다는 신념이다. 정음우리말학교를 안정하게 지속적으로 운영하려면 먼저 장소문제를 윤활히 해결해야 한다. 장소확보도 한마디로 말하면 역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학교운영에 소요되는 장소확보나 경비부담은 우리사회 전체성원들이  힘을 합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가령 우리 각 자가 일년에 단 외식 한번만을 줄이고 그 돈을 우리말교육에 쓰이게 되어도 어마어마한 자금력이 되지않겠는가… 문제는 단지 우리말교육에 대한 홍보와 동원이 잘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같이 동참하고 기여할 기회가 없었을 따름이다.   (2015.05.10)
27    교실을 찾은 순간 댓글:  조회:4544  추천:1  2015-04-11
교실을 찾은 순간 정신철   내일에 수업해야 하는데 오늘 오전에야 교실이 확정되었다. 잠시나마 숨을 돌리기는 하였지만 이번에 교실찾는 일을 통하여 나는 개개인의 무력함을 너무나도 깊게 느끼게 되었다. 혼자 아무리 뛰여다녀도 일이 잘 풀리지않으니 마지막에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않았다. 하지만 도시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아이들에게 민족언어문자만은 꼭 배워주어야 한다는 신념이 좌절감을 이겼다.  또 이것이 결국 교실을 찾을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정음우리말학교가 고고성을 울린지도 이제는 다섯학기가 된다. 북경조선족사회의 성원과 학부모들의 더 높은 열정으로 학교운영은 그런대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이번 학기가 시작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할 줄이야! 우리는 원래 사용하던 교실을 일시로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교실문제로 학기중에 기획했던 봄야유회를 학기초에 조직하게 되었고 교실을 찾아 헤메던 그런 시각들은 참 고통스럽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하여 새롭게 생각되는 일들이 많다. 그 하나는 무엇때문에 우리말을 배우는가?  두번째는 우리말을 배워주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세번째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우리말 배워주는 좋은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사회 전체 성원들이 깊게 생각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한 민족사회의 일원으로 어느 정도 민족성을 유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가령 민족언어와 문자를 잃게되면 민족성도 거의 상실되어 간다고 볼 수있다. 그럼 민족언어문자교육을 진행하는 과정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것은 해당 당국의 무관심도 있고 민족성원들의 등한한 점도 없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는 많은 민족성원들이 나서서 당국에 호소하여 제도적 지원을 유도하는 것도 좋지만 현재 상황은 그렇게 여의치 않다. 다시 말하면 제3자에 기대할 수 없기때문에 자기힘으로 해결할 수 밖게 없는 상황이다. 이러자면 민족성원 모두의 힘을 합쳐 훌륭한 우리말학교를 꾸려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아이들이 우리말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주 기특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안정적이고 쾌적한 환경을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는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곳곳에 있는 외국어학원의 조건을 초월하지 못해도 그들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우리말학교가  기타 외국어학원보다 여건이 더욱 좋을 때 우리아이들의 민족적 긍지감과 자신감이 얼마나 강할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이 번 교실찾기를 통해 현 상황에서  도시 우리말학교운영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되었고 의무감과 책임감이 더욱 무겁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 번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여서 이렇게 두서없이 느낌을 적어 본다.                                                                                                                                                  (2015.04.10)  
26    城市少数民族语言文化传承面临困境 댓글:  조회:4378  추천:2  2015-04-03
  改革开放以来,大量的少数民族人口从边远山寨、村庄进入大中城市,城市少数民族人口迅速增多。据不完全统计,我国目前少数民族流动人口规模有2000多万人。随着城市少数民族人口增多,在城市使用少数民族语言文字问题和传承发展民族文化问题日益凸显。然而,由于许多城市没有相关教育机构,少数民族成员,尤其是少年儿童没有机会接受民族语言文化教育,城市少数民族语言文化的传承与发展面临严重的困境。 语言是民族的重要特征之一,也是传承和发展民族文化的主要手段。在民族文化的传承发展中,民族语言是不可或缺的。为满足城市少数民族成员对民族文化的需求,解决城市少数民族儿童的民族语言文化教育问题,少数民族成员曾创办一些民族教育机构,如北京朝鲜族创办的“长白学校”、“中央民族大学附属小学朝鲜族部”等。但是,这些民族教育机构由于受多种因素的影响,最终不得不关闭。城市民间自办的民族教育机构难以存活,究其原因主要有:①不被城市政府及相关部门所重视,缺乏政策指导;②民族教育机构没有名分,开展活动缺乏合法性;③民间自身实力弱,缺乏师资、场地无法解决、办学经费不足等。 在城市,设立什么样的民族教育机构,如何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这些都是城市少数民族人口非常关注、并希望尽快得到解决的问题,也是各级政府及相关部门应该关注和重视的一个新问题。而从现实看,设立“民族学校”的条件、环境等不具备,但设立一些城市民族教育机构,利用周末进行民族语文培训却具有可操作性,它简捷、时效,家长们也乐于接受。然而,这样的民族教育机构及民族语言培训活动也需要政府相关部门的支持和支援,否则也很困难。 以北京为例,为满足北京朝鲜族群众对民族语言文化教育的需求,一些在京朝鲜族人士于2012年1月开办了周末民族语言培训班,它得到朝鲜族社会的广泛欢迎,坚持至今,参加学习的学生由6人增加到100多人。 参加民族语言培训的学生数量日渐增多表明,一是城市少数民族成员对于开展本民族语言文化教育的意愿很强,二是城市确实需要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的相关机构。然而,在进行民族语言培训活动中遇到了许多问题和困难,其中如下几个问题最为要紧。即,一是归属问题,不清楚类似公益性民族语言培训应该由哪些部门负责管理和指导(是民族工作部门还是教育行政部门?),怎样才能名正言顺?二是教室问题,民族语言培训要稳定而持续地办下去需要固定的场所,其最理想场所是借用当地中小学教室,但因没有名分几乎不可能,哪怕租赁都不行(据了解,当地教育行政部门规定不允许学校对外租赁教室);三是经费问题,培训活动基本靠城市本民族成员的赞助,但从其性质看,类似公益性民族语言培训像社区学校、公办职业技术培训学校一样应该得到政府相关部门的政策支持和资助。 如今,随着城市化进程加快,少数民族人口大量进入城市已变为常态,而且许多城市中非当地户籍少数民族人口远多于当地户籍少数民族人口。城市民族工作范围、对象需要拓展,其中也包括关注和解决城市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语言教育的问题,政府相关部门应拿出相应政策和措施。现阶段,由于受多种因素限制,在城市创办公立民族学校不太现实,但利用周末进行民族语文教育切实可行,实际上多数少数民族成员也是希望先将周末民族语言培训班办好。而且,作为公益性民族语言培训活动,应得到政府相关部门的支持和资助。 在城市,少数民族成员希望设立民族教育机构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的诉求,是他们正当合法的权益,少数民族学龄儿童接受民族教育是他们的权利。而根据宪法和相关民族政策,及时解决城市没有民族教育机构问题,满足少数民族合理诉求是城市政府及其相关部门应尽的责任和义务,也是贯彻落实党和国家民族平等政策和保障城市少数民族人口基本权益的重要举措之一。 城市政府及相关部门应该自觉地执行党和国家的民族政策,高度重视民族教育问题,切实采取有效可行的政策措施,积极主动地支持和帮助城市民族教育,解决好城市少数民族子女的民族语言文化教育问题,打消他们对民族语言文化传承断代的忧虑,让少数民族人口更好地融入城市,促进民族团结和城市社会和谐稳定。 现阶段城市民族教育,可根据当地实际采取如下几种途径:一是在少数民族人口比较聚居的社区学校增设周末民族语言文化培训项目;二是在一些公办学校内设立民族教育部(班),平时正常上课,利用业余时间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①] 三是从政策措施上,大力支持和帮助民间自办的民族语言周末培训班,及时解决面临的实际困难。 上述这些途径,无论哪一种都不是很难的事情,关键在于城市政府及其相关部门能否给予关注和认真对待。相信只要相关城市政府及民族、教育行政部门认真落实党和国家的民族政策,倾听城市少数民族成员的呼声,就一定能够满足城市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的要求与愿望,让民族语言在城市开花,让民族文化在城市传承和发展,并为城市多元文化增添和谐色彩。 郑信哲(中国社会科学院民族学与人类学研究所) 朝鲜语周末培训班 简介   一些在京朝鲜族人士开办的周末朝鲜语培训班(暂定名:正音朝鲜语周末学校)是一个公益性民族教育活动,其目的是开展民族文化、民族语文教育,为发展民族语文教育和传承优秀的民族文化做贡献。     20世纪90年代以来,大量的朝鲜族人口从东北聚居地区走向山海关以南城市,但由于这些地区没有相应的朝鲜族民族教育机构,朝鲜族青少年学习民族文化、民族语文的机会明显减少,许多家长因自己的子女没有机会学习民族语言和民族文化而苦恼。 2012年末,为满足城市朝鲜族群众对民族语言文化教育的需求,一些在京朝鲜族人士开办了以朝鲜族小学生为对象的朝鲜语培训班,于12月1日—2013年1月12日试办一期,当时有6名小学生参加。2013年3月9日,朝鲜语周末培训班正式开课,学生有30名,每星期六上课,每期32课时。 朝鲜语周末培训班的开办,得到北京朝鲜族社会团体及各界人士的大力支持,也得到了广大家长的积极响应,如今培训班已办第五期,学生由最初的6名增至100多名。 借此,对积极支持和资助开展民族教育的社会各界人士深表谢意!也真诚希望各级城市政府及其相关部门给予关注和相应的支持! [①] 如我们所知,由于历史等原因,在日本有几十万朝鲜人,但日本不愿承认朝鲜人的存在,随之朝鲜人民族教育也被排挤。就是这样一个日本,一些地方不仅承认朝鲜人自办学校,而且在公立学校里设分校或“民族班”,专门招收朝鲜人教师担任教学。如,1966年,在日本的朝鲜学校超过140所,公立学校分校14所,民族班30个,设民族下午班和晚班的学校有208所,学生达4万人;20世纪90年代,大阪府所辖地区130多所学校设置了“民族班”,民族教师有70名。(参见郑信哲《在日朝鲜人历史及其现状研究》,中国方正出版社,2007年,第154页)  
25    조선반도 통일과 중국조선족의 역할 댓글:  조회:3768  추천:2  2015-01-12
조선반도 통일과 중국조선족의 역할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1. 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재 세계상에서 동일민족이 아직 서로 등지고 통일을 이루지 못한 지역은 조선반도밖에 없을 것이다. 국토가 분단되고  동일민족이 갈라져 있는 한 통일문제는 계속 거론될 것이다.  하지만 통일을 어떻게 실현하고 어느 때 실현할 수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각자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반도가 통일해야 한다는 점은 남북조선정부 모두 다른바가 없지만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서는 남북조선입지가 서로 다르기때문에  그 주장과 이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조선반도분단은 주변대국의 세력분할이었고 세계냉전체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80-90년대 냉전체제가 완화되면서 한국인들의 조선반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부풀어졌다. 예컨데 중한수교이후 수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다녀갔다. 저도 그 때 한국학자들과 많이 만났으며 만나는 장소마다 조선반도통일에 대한 화제가 많이 거론되었다. 그 때 만났던 한국인 대부분이 통일에 대하여 아주 낙관적이고 빨리 될 것처름 여기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당시 본인의 소견는 약간 달랐다. 그 요점은 통일은 우리모두의 염원이나 분단이 주변대국의 조종하에 되었고 통일의 주체, 방법 등 면에서 남북조선의 대결이 존재하며, 남북조선의 거주민사이 민족적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더 심할 수도 있는 여건 등을 고려해 볼 때 통일이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통일이 되더라도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좀 늦어도 서로 이해하고 포용력을 일정한 정도 갖춘 다음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남북조선관계는 진전과 퇴보를 반복적으로 하는 양상을 면치 못 하는 것을 보면 위의 판단을 틀리다고 볼 수 없다. 때문에 본인은 현재도 시공적인 통일을 너무 서둘지 말고 통일을 위한 사전준비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돌발적인 변수가 있어 통일이 예상보다 빨리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더라도 이에 따른 엄청 큰 부작용을 감당할 용기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현재 박근혜대통령의 대북정책에서  서로 대화하고, 약속을 지키며, 호혜적으로 교류,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신뢰를 쌓아 통일기반을 구성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그래도 국제정세와 남북조선현실을 잘 파악하고 내 온 정책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통일을 위하여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는가? 물론 각자 정부측의 해당정책 변화와 전환, 상대방 존중과 경상적인 교류 그리고 양국민들의 통일대비의 각종준비 등도 중요하겠지만 이 모두가 아직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하에 더욱 시급한 것은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만남의 장소, 교류의 장소 등을 많이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역할담당에 재외동포들이 딱 맞춤할 것이다.  2. 통일을 위한 재외동포의 역할 현재 700만명의 재외동포가 있다고 하며 이는 남북조선인구의 10분 1를 차지한다. 지난날 재외동포들이 어떻게 조선반도를 떠나 세계 여러지역에 나갔던지간에 그들 모두 고국의 발전을 기원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은 한결 같다. 그리고 그들은 거주국과 고국사이의 관계향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 왔다.  때문에 재외동포는 고국의 아주 중요하고 귀중한 자산인 것이다. 특히 통일을 추진하는 일에 있어서 재외동포에게는 남북한이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할수 있다.  아시다싶이 현재 남북한사이 각 방면의 교류가 많지 않으며 남북조선사람들사이에는 일부 공식적인 만남이외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이 북을 료해하고 북이 남을 료해하는데 제일 적절한 위치에 서 있는 대상이 바로 재외동포이다. 글로벌화에 따라 재외동포사회는 남북조선체제와 관계없이 양쪽을 모두 상대할수 있으므로 남북조선사이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북조선양쪽의 교류와 이해증진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냉전시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진영에서 중국, 조선은 모두 사회주의진영의 형제나라로 중국조선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교류가 많았으나 한국과는 거의 단절돼 있었다. 하지만 냉전국면이 완화되고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한관계가 풀리면서 중국조선족은 조선과의 교류를 계속 유지하면서 한국과의 교류도 점차 깊어져 갔다. 따라서 중국조선족은 남북한과 제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재외동포로 조선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에 조선을 알리는 중요한 매파역할뿐만아니라 경제교류에서도 조선족은 남북조선양쪽과 직접적인 교류이외 남북조선사이의 교류증진을 위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짚어 이야기 할 수 있다. 하나는 조선족엘리트의 역할이다. 아시다싶이 조선족은 중국에서 교육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수천수만의 엘리트들이 있으며 중국의 여러 연구기관과 여러 대학교에 조선족학자들이 많이 있다. 중국과학원, 중국사회과학원, 북경대학, 청화대학, 중국인민대학, 중국정법대학 등 북경에만 하여도 수백명의 조선족학자들이 있다. 2013년까지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의 1557명 원사가운데2명의 조선족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대남북정책제정에 조선족에릴트들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현우, 주일공사와 베트남대사직 역임후 현재 외교부 아세아국 국장) 더욱이 남북한인사들의 서로의 만남, 학술, 예술 등 교류는 거의  조선족엘리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이루졌고 서로가 상대방의 산품을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조선족의  역할이 컸다. 단적인 예로 학술교류에 있어서 일찍히 중한수교이전 남북조선학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교류 할수 있는 장을 연변대학, 북경대학의 조선족교수들이 마련하였다(1989년8월, 1991년 8월 연변대학에서 이미 두 차례의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를 개최,1992년8월에 북경에서 조선학국제토론회 개최 등). 그리고 남북조선학자들 만남의 감격적인 장면들도 많이 있었다. 예컨대 역시 1990년대 중반 연변대학에서 개최한 조선학국제토론회때 마치 8.15노인절이어서 학자들이 경축에 동참하였는 바 그 때 남북조선학자들이  연출장에서 같이 아리랑노래를 합창하는 장면은 아주 감격적이었다. 두번째로 조선족기업인의 대남북조선경제활동 역시 중요하다. 중조변경의 무역의 대부분이 조선족기업인들을 통해 시행되고 있고 당초 한국인들의 중국진출도 거의 조선족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조선의 중국진출, 예컨대 동북, 북경, 상해 등 여러도시에 세운 평양식당 등도 거의 조선족을 통해 실현되었고 현재 조선평양 등 지역에 많아지고 있는 중조합자식당도 조선족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연변에는 벌써 조선의 로동인력을 사용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친인척간의 거래이었다. 중국조선족은 조선과 깊은 친인척관계를 갖고있다. 조선족은 조선과의 친인척거래를 통하여 조선에 많을 지원을 하고있다. 특히 조선경제상황이 어려울때 국제적 지원도 중요하였지만 조선족사회의 민간적인 지원도 아주 대단하였다. 연변같은 경우 조선족 거의가 조선에 친인척관계를 갖고 있으며 친인척거래때 항상 물질적 지원을 많이 하였으며 이것이 또 조선사람들이 중국을 접하는 기회와 간접적으로 한국을 료해하는 도경으로 되었고 친인척방문은 조선주민들이 바깥 세상을 접하는 중요한 루트로도 역할을 하였다. 위에서 보다싶이 지정학적 특정과 중국이란 특수요소 등으로 통일에 대한 중국조선족의 역할 어찌보면 숙명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남북조선통일을 위한 길에 조선족은 어떻게 보면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조선족은 통일고국과의 각 종 연계가 더욱 밀접해 질것이며 통일고국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3. 재외동포사회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이 필요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남북조선통일에 있어서 재외동포사회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면 재외동포사회가 고국통일을 위한 역할을 어떻게 하면  더욱 잘 할 수 있을까? 물론 재외동포가 남쪽과 북쪽과의 관계를 더욱 돈득히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재외동포사회가 거주국에서 더욱 튼튼히 자리를 잡아야 한다. 여기에는 재외동포들의 정치적 참여, 경제적 축적, 문화적 유지 등 여건으로 거주국 주류사회에서 입지를 튼튼히 하는 것이 아주 필요한 것이다. 재외동포사회는 거주국에 따라 그 입지가 각이부동하다. 중국의 경우 중한수교이전 조선족은 각 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수행하였다. 정치적 참여을 볼때 동북 집거지역 각 현시에는 조선족 부현장과 많은 행정간부들이 있어 민족의 권익을 잘 대변하였고 경제적으로 과거 조선족인구다수인 농민들은 거의 수전농사를 함으로 주위 한족들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하였으며 문화적으로 마을중심의 인구집거분포는 민족문화와 민족교육을 잘 지켤수가 있었다.  하지만 중한수교이후 다량의 인구이동에서 비롯된 영향은 조선족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 다른 한면 남북조선의 현 상황에서 조선족은 고국통일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로 그들이 거주국에서 튼튼한 사회기반구축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중국에서 조선족사회를 유지할수 있는 중요한 여건이기도 하고 통일에 더욱 큰 역할을 할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가령 조선족사회의 정치적 참여가 활발하면 남북조선각 방면 교류에서 더욱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 힘이 커진다면 남북조선경제교류에 더욱 직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선족기업이 확장되어 한국의 기술력, 조선의 노동력을 동시에 사용하게 되면 그 시너지효과가 얼마나 큰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재외동포사회기반을 튼튼히 닦으야 하는지? 재외동포들이 거주국에서의 피타는 노력도 필요하고 고국의 물심양면의 지원도 필요할 것이다. 고국의 정책적, 인재적 등 지원으로 재외동포사회의 힘을 키우고 입지를 튼튼히 하면 통일에 힘이 될뿐만아니라 고국와의 연대도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이외에 재외동포위상을 손상하는 일을 자제하였으면 한다.  중국조선족의 경우 현재 조선족이 한국에 많이 나왔고 이들 대부분이 3D산업에서 막노동을 하는 노동자이다. 다른 한면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조선족을 비하하는 경향이 아주 심하다. 이는 조선족위상에 아주 손상주는 현상이다. 여기서 특히 매체가 더 많이 반성해야 할 것 이다. 그리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재한조선족이 중국조선족의 주류가 아니므로  재한조선족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조선족을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조선족을 왜곡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북조선현실을 보면 중국조선족은 아주 특수하고 중요한 위치에 있다. 중국조선족의 힘을 잘 활용하면 남북조선통일과 발전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왜곡적으로 이용하면 중국조선족위상에 손상을 줄 수 밖에 없다. 예컨대 한 때 물의를 일으킨 “조선족 간첩사건”이라든가, 조선족을 정보수집에 이용하는 등 현상은 조선족위상에 악영향을 초래할 뿐만아니라 조선족의 처지를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좀 삼가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본문은 2014년 11월28일 한국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에서 발표한 토론문이다.)  
24    돈도 벌고 땅도 지키자 댓글:  조회:3924  추천:3  2014-08-22
돈도 벌고 땅도 지키자 정신철   얼마전에 중국조선민족사학회는 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조선족농촌 토지도급경영권확립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계시를 받고 아래의 글을 적어 본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중한수교 및 활발한 교류는 우리조선족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 날로 활성화되어가고 있는 시장경제체제와 민족이 갖고 있는 높은 진취성, 적응성, 소질성 등은 조선족으로 하여금 원래의 전통적인 농업생산에서 상공업으로, 농촌생활에서 도시생활으로, 농민신분에서 시민신분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추진력이 되었다. 또 중한수교와 량자의 밀접한 관계는 조선족들의 한국과의 교류와 한국진출을 다그치는 계기로 되었다. 이러한 결과 원래 농업위주인 우리조선족은 농촌과 토지를 떠나 재빨리 시장경제흐름속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중국에서 도시화과정이 제일 빠르고 도시화수준이 제일 높으며 국외진출이 제일 많은 민족으로 부상되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의 경제생활은 전에없이 활발한 양상을 보였고 농민들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목돈을 벌 수가 있었으며 그들의 생활수준도  한층 더 높아졌다. 어떻게 보면 조선족사회는 여러면에서 기타민족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나아가고  있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민족사회의 현황을 보면 딱 긍정적인것만은 아니었다. 빠른 도시화과정으로 농촌이 폐쇄되고 민족교육이 축소되고 민족문화가 약화되는 등 현상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민족성원들도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것은 역시 우리민족에게 가장 소중한 땅문제이다.  과거 우리선조들이 개척한 동북의 농촌과 수전땅은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과거 땅은 양가호구의 중요한 래원일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이전 조선족농민들이  주위 기타민족농민들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족교육과 민족문화를 전승하는 중요한 기지로도 역할하였다. 우리민족에게 이렇게 소중한 땅이 현재 울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농민들이 땅을 너무나도 등한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농민들은 장사 또는 출국에 소요한 목돈마련때문에 땅을 쉽게 양도하기도 하였고 도시진출한다고 땅을 쉽게 양도하기도 하였다. 양도하는데 까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한족에게 서뿔리 양도한 처사라고 하겠다. 단적인 례로 현재 흑룡강성 오상시 23개 조선족촌의 경작지 35.7만여무가운데 조선족농민들이 경작하는 땅은 4.7만여무로 전체 면적의 13.3%밖에 되지않는다. 이 결과 많은 조선족촌이 한족촌으로 변모되어가고 있으며 만약 이대로 간다면 땅도 한족들에게 넘어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겠는가! 때마침 중국공산당 제 18기  3중회의에서 농촌토지도급경영권확립을 강화하는 정책을 제정하였으며 농촌토지도급경영권이 “장기불변”한다는 방침하에 새롭게 토지도급경영권을 확립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농민들의 도급맡은 토지에 대한 명확한 측량과 권리확보이다. 우리는 이 기회에 해당 정책을 잘 료해하고 도급맡은 토지에 대한 측량, 권리확보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이 번 “토지확권”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리를 확고히 하며 발급에까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 “토지확권”을 통해 을 갖게된다면 농민들이 각종 토지류전에서 토지도급경영권소실을 방지할 수 있을뿐만아니라  “토지”가 농민들의 “재산”으로 “토지”를 통하여 재산성 수입을 얻을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은 와 같이 중요한 재산증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재산증명은 농촌에 있든, 도시에 가든, 출국을 하든 어디에 있어도 변함이 없는 것은 뚜렷한 바이다. 따라서 조선족농민들이 토지“재산권”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도급경영권확립과 증서발급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밖에 나가 돈을 벌면서 땅도 지키는 아주 중요한 고리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23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나도 한마디 댓글:  조회:6276  추천:1  2014-04-19
요즘 한국내에서 중국조선족을 “조선족”인가, “재중동포”인가를 갖고 많이 의론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보기에는 명칭차이지만 사실은 중국조선족을 어떻게 보는 것과 연관이 된다.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중국조선족을 해외동포의 한 부분으로 “재중동포”라 부르는 것은 일본의 “재일동포”나 미국의 “재미동포”를 부르는 것처럼 같은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적  시각에 불과하다. 사실은 위의 각 자가 처한 배경과 위치가 많이 다름으로 그들을 같은 차원에서 볼수 없다. 조선족은 이미 법적으로 인정받은 중국 다민족국가의 한 성원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족은 민족의 자치지역이 있고 각 급 정부기관에는 조선족 관료가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중국에는 정부관할의 조선족학교, 조선족문화관 등이 있고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에는 조선족교수, 연구원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에서 조선족은 자기특징을 갖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조선족”이란 명칭은 이미 특유의 고정된 개념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그 누가 승인을 하든 안하든 “조선족”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는 것을 갖고 논의하는 것은 하등의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한국적 시각에서 일반인들이 조선족을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정계, 학계에서까지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면서 “조선족”명칭을 무시하는 것은 중국조선족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타당성이 없는 언행은 권장할 바가 못 된다.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22    “연변시”구상에 대한 소감 (정신철) 댓글:  조회:4435  추천:2  2012-07-31
    “연변시”의 구상은 “연변조선족자치시”인지 아니면 일반 지구급“시”인지? ---“연변시”구상에 대한 소감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연구소 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리룡희씨가 얼마전 전국인민대표대회회의에서 “자치주”를 “시”로 고칠 의향을 제출하였고 또 이를 위하여 뛰여다녔다고 한다. 연변의 지방행정수뇌로서 본 지역의 발전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소위 경제발전구상만 강조하고 연변의 특수성, 즉 민족성을 회피한 감을 주기도 한다. 연변경제사회발전에서 연길시의 역할이 대단하다. 하지만 연길시는 현급시로 제 역할을 다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자치주”와 자치주소재지 현시와의 관계문제가 부각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분야에서 논의하기도 하였다.  중국민족리론학계에서는 이들의 관계문제를 해결하려면 “민족자치시”를 설치하여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가령 “자치시”가 현실로 되면 민족리론연구에서도 하나의 돌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보면 “자치시”설치가 아주 어렵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왜내하면 “자치시”를 개설하면 헌법으로 부터 일반 규정에 까지 모두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공정이 복잡한 것이다. 물론 중앙 주요책임자들이 결심하고 실행하다면 빨리 현실로 될수도 있다. 리룡희주장의 “주”를 “시”로 변화시키려는 의향 역시 연변조선족지치주 소재지 연길시의 행정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알수 있다. 다만 나의 소견같아서 몇 가지는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연변이 소수민족지역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행정구역변경을 거론할 때 항상 “민족”을 빼놓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강조하여야 한다. 두번째는 “민족자치시” 설치 가능성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 만약 연변자치주가 “민족자치시”로 개칭되지 않고 “연변시”로 개설된다면 이를 극력 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법은 민족자치를 약화 내지 취소할 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먼저 연변에 “자치”가 없을 때 행정수뇌에 꼭 조선족이 된다고 누구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음 연변이 자치지역이기 때문에 조선족이 주장이 되고 인민대표로도 되며 부성장/부서기 지어는 장관까지 될 수 있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전쟁시기를 겪은 원 흑룡강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리민동지이외 동북3성에서 발탁된 조선족 차, 장관급 인사가운데 누가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또는 서기를 겪지 않았는가? 한족도 예외가 아니다. 장덕강, 소영 등도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발판을 하지 않았는가? 세번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만 대표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200만 조선족의 중심역할을 하여야 하므로 자치주 책임자라면 “연변”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안목으로 전체 조선족사회 리익의 대변인으로 되어야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지역의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호남성의 장가계시가 상서토가족자치주를 이탈한 것이나 료녕성 봉성만족자치현 등이 봉성시로 개칭한 후 이러한 지역에서 민족정책의 혜택을 향수하는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룡희주장은 "국가에서 우리에게 ‘선행선시’를 부여한 만큼 우리는 응당 많은 면에서 보다 사상을 해방하고 보다 사로를 넓혀야 한다. 이래야만 '나아갈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조금 근심이 된다, 그 것인즉  경제사회발전을 추구하는데서 연변이 앞선다면 좋은 것이나 가령 “민족자치시”가 아닌 “연변시”가 사실로 된다면 .중국 기타 소수민족의 미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    城市民族工作面臨的新問題、新態勢及其對策 댓글:  조회:5803  추천:20  2010-12-16
城市民族工作面临的新问题、新态势及其对策——以山东省青岛市朝鲜族社会为例[①]       内容提要:中韩建交以来,随着韩资企业大量入驻青岛,青岛市朝鲜族人口迅速增多,青岛逐渐成为朝鲜族的新的聚居地。然而,朝鲜族作为少数民族人口,他们离开聚居地区而流向少数民族非聚居的城市,在实际生活中遇到了许多未曾有的问题,这为我们的城市民族工作提出了新的挑战。本文通过对青岛市朝鲜族社会的实地调查,指出城市民族工作面临的新情况、新问题,提出了要更加重视城市民族问题,加强城市民族工作,切实保障城市少数民族权益的建议对策。 关键词:城市民族工作  新问题  青岛市  朝鲜族  权益保障   我国的改革开放和城市化进程的加快,促进了少数民族人口流动,他们纷纷离开传统而偏僻的乡村、山寨而走进城市。少数民族人口流动,使城市居民的多民族化,为城市增添多元文化色彩,但另一方面也为我们提出了少数民族人口如何在城市适应与发展的问题。那么,少数民族人口在城市如何适应?他们在就业、子女民族教育、居住等方面的现状如何?他们对当地贯彻执行党和国家民族政策是怎样看?有何诉求?等等,这些都需要认真深入地研究。下面,我们以青岛市朝鲜族社会为例,予以阐述。   一、青岛市成为朝鲜族的一个新聚居地区 青岛市位于山东半岛东南部,东北与烟台毗邻,西与潍坊市相连,西南与日照市接壤,东南与朝鲜半岛隔黄海相望。2008年末全市户籍总人口为761.56万人,其中市区人口276.25万人,所属五市(县级)人口485.3万人。[②] 在青岛市人口中,除汉族外,还有满、回、朝鲜、壮、蒙古等50个少数民族,2007年少数民族人口33,012人,其中朝鲜族14,491人、满族7959人、蒙古族3179人、回族3027人、壮族831人,其他少数民族人口较少,有5个少数民族其人口只有各1人。[③] 青岛市地处我国改革开放的前沿地带,1981年被列为中国15个经济中心城市之一,1984年被列为中国14个沿海开放城市之一,1986年被列为5个计划单列城市之一,而1994年被列为全国15个副省级城市之一。改革开放以来,随着城市化进程的加快和少数民族人口流动频繁,青岛市少数民族成分增多,少数民族人口增长迅速。尤其是,随着中韩建交和山东省与韩国经济文化交流频繁,韩资企业增多,流动至青岛市的朝鲜族人口激增。     我国朝鲜族人口190多万,过去他们主要聚居于东北3省,据1990年第四次全国人口普查,朝鲜族总人口的97%以上都居住于此。然而,改革开放以来,尤其是中韩建交以来,许多朝鲜族离开传统聚居地区纷纷流向山海关以南城市,如今分布于山东半岛、京津地区、长江三角洲和珠江三角洲等地区的朝鲜族人口达50—60万名,也就是说我国朝鲜族的约三分之一人口已经离开传统聚居地区而流向山海关以南城市。[④] 朝鲜族人口在流动中,在一些城市聚集、定居,形成新的聚居区,其中山东省青岛市最为典型。据1982年全国第三次人口普查,青岛市常住朝鲜族人口只有83人,包括现纳入青岛市辖区的崂山县、即墨县等地的朝鲜族75人,也不到160人,到1990年也不到500人。到2000年第五次全国人口普查,青岛市朝鲜族常住人口已达14,491人,十年间增长近30倍。而包括暂住人口的流动人口数量远远多于常住人口,目前青岛市已经成为山海关以南城市中朝鲜族最为聚集的地方。关于青岛的朝鲜族人口数量众说纷纭,有说35万的,有说20万的,也有说5万多的,从中不难看出如今在青岛的朝鲜族人口的确不少。综合多方因素,我们估算在青岛朝鲜族人口超过15万人,即户籍人口3万多名加上包括暂住人口在内的流动人口10多万名。[⑤] 青岛市朝鲜族人口迅速增多,并呈现出聚集、定居之势。如今,青岛朝鲜族比较集中居住的城阳区、李沧区、市南区、即墨市等地,出现许多朝鲜族聚居的小区,如即墨西元庄小区开发9800套住房,其中6500套由朝鲜族购买;城阳区天泰城交付房款的3390住户中,20%的住户是朝鲜族;李沧区百通花园小区1000多住户中,朝鲜族约600户。[⑥]据不完全统计,如今在青岛购房的外来朝鲜族已有35,000多户。[⑦] 青岛市能够成为朝鲜族新的聚居地,与其站在我国改革开放的前沿分不开,也与韩资企业大量入驻青岛分不开。随着我国实施改革开放政策,青岛得益于其位居沿海,站在改革开放的前沿,最先开展与韩国经贸交流,1989年中韩两国建交以前,就有韩资企业落户青岛。1992年中韩建交以来,韩资企业更是不断地涌入青岛,至2008年末,曾在青岛得到许可的韩国投资项目件数达10,242个。[⑧] 随着韩资企业的源源流入,在青岛的朝鲜族人口迅速增多。我国朝鲜族是源于朝鲜半岛的跨境民族之一,他们与朝鲜半岛居民语言相通,习俗相近,他们之间是“同源异流”的同胞。朝鲜族正是借助同源、同语优势,为中韩两国经贸交流穿针引线,为当地招商引资起了重要的桥梁中介作用,为当地经济社会发展做出了重要的贡献。   二、青岛市朝鲜族社会现状与面临的问题     朝鲜族人口的大量流入,使得青岛成为朝鲜族的新的聚居地。在党和国家民族政策指引下,依靠当地政府的支持和朝鲜族自身努力,青岛朝鲜族社会已经为其发展打下了良好的基础。青岛市朝鲜族人口以异地来青岛创业及其父母子女随之迁居占主导,与其他少数民族情况有所不同。现在,在青岛的朝鲜族企业有1000多家,较大的企业150家,年生产总值15亿多人民币,利税3亿多元。仅青岛市城阳区,就有朝鲜族注册的有限责任公司42家,注册的个体户300多家。在中国海洋大学、青岛大学等高等学府任教以及在其他事业单位工作的朝鲜族人口有几百人,其中具有博士学位的有70多名。随着朝鲜族人口的增多,在朝鲜族社会内出现许多民间团体,还有两所朝鲜族民办学校和许多与朝鲜族生活相关的民族食品、餐饮等服务行业。青岛还驻有吉林的《延边日报》、黑龙江的《黑龙江新闻》等报刊的支社,发行朝鲜文报刊。在青岛,朝鲜族的消费水平也很可观,例如,据有关人士介绍,在青岛市城阳区朝鲜族人口不过该区总人口的10%,但他们的消费额却达该区消费总额的30%以上。 然而,朝鲜族作为少数民族人口,他们离开聚居地区而流向少数民族非聚居的城市,更属于少数,他们在实际生活中遇到许多新情况和新问题,其中一些是自身能够调整解决,而一些是靠自身根本无法解决。我们在调研中,听到最多的呼声就是要求认真贯彻落实党和国家的民族政策,采取切实措施解决他们在城市生活中遇到的问题和满足合理需求,以保障少数民族的各项权益,实现各民族共同发展繁荣。归纳起来有如下几个方面: 1、要求保障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的权益。在青岛,10多万朝鲜族人口中,学龄儿童、少年不占少数,但这里还没有公办朝鲜族学校,这些孩子无法接受民族教育。针对这种情况,朝鲜族民间创办了2所朝鲜族学校,学生约有1000名。但是,由于无法得到各级政府的支持支援,民族学校经营只能靠学费勉强维持,而学生每学期学费3500元,高出公办学校学费10倍以上,大大增加了家长负担。所以,朝鲜族民众要求各级政府设立纳入全日制义务教育阶段的各类民族教育机构,让其子女接受民族教育的呼声强烈。 2、希望当地各级党政机关吸收一定数量的朝鲜族干部。过去,居住青岛的朝鲜族人口微乎其微,不过几百人。但是,20世纪90年代以来,朝鲜族人口数量增速很快,并且相对聚居。随着朝鲜族人口增多,他们认为当地党政机关应该有一些朝鲜族干部,在参政议政机构应有一些朝鲜族代表,这不仅是体现各民族政治上一律平等的重要举措,而且对增强朝鲜族的民族自信和提高对所居城市的认同有着重要的作用。然而,当地实际任用的朝鲜族干部很少。例如,朝鲜族人口在青岛市少数民族人口总数中已占多数,然而青岛市民族宗教事务局在编33人中还没有朝鲜族;在市一级层面上,仅有2名朝鲜族市政协委员。 3、对民族文化方面的需求增多。在东北3省朝鲜族聚居地方,一般都有朝鲜族文化馆,有朝鲜文报刊杂志,有朝鲜语广播电视,开展民族文化活动的基础比较雄厚。但是,他们走进山海关以南城市,原有的这些条件都不存在,民族文化活动深受各种条件的限制。他们希望当地政府为开展民族文化活动提供一定的政策支持,以促进少数民族文化在城市的传承和发展。目前青岛朝鲜族社会在民族文化传承和发展方面比较迫切的要求有二:一是希望当地政府批准用地,少数民族自筹资金建立一个少数民族文化馆,为少数民族的各项民族文化活动提供场所,并使之成为进行民族文化传统教育的基地;二是要求从考虑朝鲜族群众的特殊需求和有效抵御境外文化渗透的角度,解决延边卫星电视频道免费落地青岛的问题(详情见后)。 4、对朝鲜族民间团体、民办学校或文娱体育活动不允许冠以“朝鲜族”名称表示困惑。随着朝鲜族人口的相对聚居,朝鲜族内部组成许多民间团体或时常举办各种体育、文娱活动,这些团体或活动在体现民族风貌和展示民族优良传统方面做了许多事情,为当地朝鲜族社会的健康发展起了重要作用。然而,在具体操作中当地有关部门要求冠以“少数民族”统称而不允许冠以单一民族族称。例如,将“青岛市朝鲜族企业家协会”为青岛市少数民族经济发展促进会的第一分会而不能直呼“青岛市朝鲜族企业家协会”;再如,如今青岛市有两个朝鲜族民办小学,但这两所学校不能冠以“某某朝鲜族小学”。另外,朝鲜族举办体育运动会,不能称其“朝鲜族体育运动会”而要求冠以“少数民族体育运动会”。对上述现象,很多朝鲜族感到困惑,认为明明是朝鲜族团体或朝鲜族活动,为什么不能冠以“朝鲜族”名称而只能冠上“少数民族”?而且,这些问题在东北朝鲜族聚居地区是根本不存在的。由此,许多人认为这种做法是对少数民族的不信任举措。   三、认真对待与解决城市民族工作面临的新问题 在城市随着少数民族人口增多,少数民族的各种诉求增多,保障少数民族各项权益的问题日益突出,城市民族问题变得更加复杂、敏感,城市民族工作出现了许多新情况、新问题。 青岛朝鲜族提出的上述要求或希望,应该说是城市民族工作遇到的新情况、新问题,其中既有全国少数民族人口流动中显现的共同性要求,也有朝鲜族社会的特殊需求。我们在调查中发现,在青岛市相关部门的一些人认为朝鲜族比其他少数民族提出的要求多,也就是认为朝鲜族“事多”。但我们认为不应该这么看,因为这是由于朝鲜族人口在青岛聚集较快而占该地少数民族人口的多数相关,也与朝鲜族站在我国改革开放和城市化进程之前列有关,它具有一定的超前性和代表性。如果其他民族在某个地方人口快速增多,城市化进程达到朝鲜族社会水平,一定会出现类似的要求或需求。所以,应该把朝鲜族社会提出的希求或存在的问题视为少数民族社会在改革开放和城市化进程中出现的新情况、新问题,予以认真对待和正确解决。具体地说: 一是要转变观念、与时俱进,更加重视城市民族问题,加强城市民族工作。20世纪90年代以来,随着我国改革开放的深入和城市化进程的加快,民族地区的少数民族人口不断地涌向东南沿海城市,城市少数民族人口数量增速较快,少数民族成员的各种诉求不断增多,少数民族权益保障问题更加突出,城市民族问题变得日益复杂和敏感,城市越来越成为民族问题的主要引发区,而城市功能使民族问题更加突出化、扩散化、规模化。这要求我们从中央到地方都必须加强马克思主义民族观教育和党的民族政策教育,更加重视城市民族问题,加强城市民族工作,尽快出台有关城市少数民族权益保障的政策法规,保障少数民族权益和维护社会稳定。 二是城市民族工作需要不断创新,不断完善城市民族工作体制。随着城市少数民族人口的迅速增多,城市民族工作面临许多过去未曾有的新情况、新问题。如果针对新情况、新问题仍然按照传统的政策措施依章办事,有些问题是无法解决的。这要求我们从实际出发,不断创新城市民族工作,完善已有的政策规章和制定一些新的政策措施,切实解决少数民族在融入城市生活中遇到的新问题和特殊困难,保障少数民族群众的各种合法权益,加快城市少数民族经济社会的发展,这对于我们统一的多民族国家维护各民族平等团结至关重要。 三是要从制度上保障少数民族在城市的适应与发展。随着我国城市化进程加快,少数民族人口大量走入城市,而目前他们之中大部分还不具有流入地城市户籍,即使在流入地城市居住时间较长,他们仍然被排斥于流入地政策制度之外,这严重地阻碍着他们在城市的适应与发展。然而,城市化进程不可阻挡,少数民族群体逐渐由“农业民族”向“城市民族”转化也属必然。为此,中央政府及各级相关城市政府应该从制度创新入手,尽快制定出台有关城市少数民族人口就业、教育、文化等方面的政策措施,从制度上切实保障少数民族群体在城市的适应与发展。 四是坚持依法管理,切实解决好少数民族最关心、最直接、最现实的问题。当前,在青岛朝鲜族社会需要解决的迫切问题有如下几个: (1)设立民族教育机构,保障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的权益。在我国,少数民族学龄儿童、少年无论在什么地方,都有接受民族教育的权利,而进行民族教育让少数民族适龄儿童、少年接受民族教育应该是各级人民政府的责任和义务,这是党和国家的民族政策所规定的。在青岛,朝鲜族人口已经达到一定规模,朝鲜族民族教育已经提到议事日程,朝鲜族家长提出设立民族学校或民族班的呼声也很高。他们认为,应该设立公办民族学校,如果建立公办民族学校的条件暂时还未成熟,那么先在当地中小学里附设一些民族班,或者从政策上、经费上鼓励民间创办民族学校,给少数民族适龄儿童、少年创造在义务教育阶段接受民族教育的机会。另外,对青岛现有的民办民族学校,应该从政策上给予支持,从经费、师资等方面给予一定的扶持和资助。 (2)给单一少数民族民间团体以正名,充分发挥这些少数民族团体自我管理功能和民族经济文化发展的中心作用,为少数民族发展和维护当地社会稳定服务。在青岛,随着朝鲜族人口聚居,朝鲜族社会内出现许多民间团体,大部分人参加社团活动属于纯情感交流,其功利性不强,而公益性较强。这些民间组织一般都遵纪守法,积极向上,自筹资金开展许多有益于民族团结、社会稳定的活动(例如2008年汶川地震后,朝鲜族民间团体曾募捐40多万元送至灾区),普遍得到了当地政府和民间的认可。但是,这些团体和其组织的活动一直不能冠以本民族名称,对此他们不理解,提出“在东北朝鲜族地区能行,在青岛怎么不行?” “在东北是朝鲜族,在青岛就不是朝鲜族了?”等疑问。那么,对某少数民族团体或活动“为什么不能冠以本民族名称”的反问,我们从国家宪法角度、从党和国家的政策法规角度,能否给予令人信服满意的回答?故我们认为,对于这些单一少数民族民间社团只要其组织比较健全,不违背党和国家政策,就应该给予认可,给予合法地位,使这些团体能够成为我们了解和管理少数民族事务的外围组织,而不能一味地予以拒绝或排斥。实际上,我们通过这些少数民族自行团体管理其内部事务,比我们直接管理更加方便、更加有效,关键在于对这些团体的正确引导。[⑨]     (3)关于延边卫视落地青岛问题,从其政治意义上考虑,应该实现免费落地。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卫星电视频道为全国首家地区级卫视频道,也是中国唯一的朝鲜语卫视频道,于2006年8月10日正式上星播出,这充分体现了党的民族政策的贯彻落实和国家“西新工程”对民族地区的高度重视。延边卫视节目以“民族”、“地方”、“外宣”为特色,以中国境内的朝鲜族和国外来华的同语种民族为主要收视目标人群,全天18小时不间断播出。[⑩]延边卫视作为党的一个宣传舆论阵地,它的播出不仅满足朝鲜族民众文化生活的需求,让朝鲜族民众及时了解党和国家的各项政策及其国内外大事,而且它作为中国对韩宣传的一个窗口也可以满足韩国人了解我国政策和环境的需要。 可以说,延边卫视是宣传党和国家各项政策的重要舆论阵地,也是对外宣传的一个重要窗口,而且还是抵御境外文化渗透的重要载体。鉴于青岛有10多万朝鲜族和将近10万的韩国人以及许多人不熟悉汉语而多看韩国卫视节目,延边卫视在青岛落地是一件十分重要的事情,其政治意义远远超过经济因素。然而,青岛朝鲜族社会自2007年1月开始向有关部门提出延边卫视免费落地青岛的请求,至今还没有得到落实(青岛市广电局要收取200—250万元落地费)。我们认为,从落实民族政策和满足青岛朝鲜族民众的特殊需求,从有效抵御境外文化渗透和维护社会稳定大局出发,各级政府及有关部门应该采取特殊扶持政策尽早解决延边卫视免费落地青岛的问题。 (4)适当增加朝鲜族干部和参政议政代表名额,以促进各民族平等团结。朝鲜族在青岛地区聚集定居时间不长,他们有许多需要解决的问题,有许多诉求。但从现实状况看,能够反映朝鲜族民众意愿和诉求的本民族干部在青岛还不多。我们应该重视朝鲜族干部的培养和使用,在当地各级行政机关适当增加朝鲜族干部,因为他们是党和政府联系少数民族群众的重要桥梁,通晓本民族的语言、风俗习惯和文化等,感情上更贴近少数民族群众,在处理民族事务上能够发挥更大的作用,少数民族干部的这种优势无可替代。重视民族干部的培养使用,是实现各民族政治平等的重要体现,也是增强少数民族自信心的重要举措。 以上问题,尽管是以青岛市朝鲜族为例,但从朝鲜族已站在我国改革开放和城市化过程之前列的角度看,他们今天遇到的问题,将是其他少数民族今后也会遇到的问题,因而具有一定的代表性和典型性,对这一点应该有个充分的认识。如果我们对少数民族城市化进程中出现的新问题不能给予及时解决,就有可能成为影响民族团结和社会稳定的严重隐患。 此外,少数民族在城市的适应和发展过程中出现的新问题,有些是当地政府能够自行解决的,有些是中央政府需要统一布置才有可能解决,但一个基本要求就是从上到下要更加重视城市民族问题,加强城市民族工作,认真对待和处理城市民族工作中出现的新情况、新问题。各级政府应该清醒地认识到:在我们这个统一的多民族国家里,少数民族人口不论在民族地区还是在东南沿海城市,都应该在党和国家的民族政策的普照下,能够享受党和国家民族政策的惠及。而顺利解决少数民族城市化进程中存在的问题和困难,消除社会不稳定因素,才能实现我们党提出的各民族“共同团结奋斗,共同发展繁荣”的伟大目标,实现各民族间真正的平等团结。         [①] 2009年8月2--8日,我们对青岛市朝鲜族社会进行了实地调查,调查得到了青岛市民族宗教事务局、青岛市少数民族联合会、中韩经济发展协会等有关部门和朝鲜族民间团体有关人士的大力协助,借此深表谢意。 [②] 《青岛》概况,http://baike.baidu.com/view/3393.htm [③] 刘太川主编:《青岛年鉴2008》,青岛:青岛年鉴社,2008年,第321页。这个数据实际上是2000年第五次全国人口普查资料数据。 [④] 郑信哲:《中国的农村政策与朝鲜族农民土地保护问题》,《中国民族》(朝鲜文版),2009年第5期。 [⑤] 据青岛市有关部门统计,在青岛已申领暂住证的朝鲜族外来人口约为11万名。 [⑥] 相关数据资料均系调查所获,如下未注明出处的均同。 [⑦] 南龙海:《青岛朝鲜族聚居地方的现状与展望》,中国朝鲜民族史学会《改革开放三十周年朝鲜族社会的变化与发展》研讨会论文集(2008年10月18—19日),第10页。 [⑧] 至2007年末正常经营的企业有4081家,占青岛外国投资企业数的50.6%。如果加上未注册的企业,现有韩资企业6000多个。见韩国驻青岛总领事馆网站相关资料:http://www.qdcon.org.cn,信息天地-韩与山东省关系-青岛市概况资料(韩文档) [⑨] 关于这个问题,可借鉴天津市经验。天津市朝鲜族联谊会源于20世纪80年代初期天津市朝鲜族自发的联谊活动,1988年11月,在天津市委、市政府支持下,经天津市民委批准成立了天津市朝鲜族联谊会,1993年7月根据《天津市社团法人登记管理暂行规定》,正式登记注册为社会团体法人单位,同时接受天津市民委的管理。天津市朝鲜族联谊会成立后,扮演了天津市政府民族事务部门与朝鲜族群众之间加强联系的桥梁和中介角色,当地将上述三者关系表述为:政府通过民族社团的作用得以上情下达、下情上传;民族社团得到政府的政策、经费支持,得以在少数民族群众中开展工作;少数民族群众通过民族社团向有关部门提出自己的建议和意见。这样,联谊会活动成为城市民族工作的新生力,为增强民族团结,弘扬朝鲜族传统文化,强化城市流动人口管理,维护社会稳定起到了纽带作用,也为天津市对外招商引资做了重要贡献。2006年,朝鲜族联谊会还将自发组织的其他朝鲜族社会团体纳入联谊会分支机构,统一接受政府管理,如今朝鲜族联谊会属下有朝鲜族商会、朝鲜族老人协会、朝鲜族科技工作者协会、朝鲜族足球协会、武清区分会等。天津市朝鲜族联谊会工作和活动得到当地政府和朝鲜族群众的认可,担任联谊会第2—5届会长的金汉范在1994年被国务院授予“全国民族团结进步模范个人”、1995年被国家民委和天津市授予“民族团结进步模范个人”;自2000年担任会长(第6—8届至今)的李昌熙于2009年被天津市政府推选为第五届全国民族团结进步模范个人。 [⑩] 参见辽宁省民族事务委员会、辽宁省广播电视局:《关于做好延边卫视节目在我省沈阳、抚顺、丹东市落地的意见》,2007年2月1日。
20    기업인과 사회기부 (정신철) 댓글:  조회:4623  추천:61  2010-11-14
기업인과 사회기부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인간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은 경제발전을 토대로 하고 경제발전에 있어서는 기업인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주생활에서 없어서 안되는 것이 각종 물품의 생산이고 물품생산의 주체는 기업이다. 기업이 생산한 각종 물품들은 인간사회의 생활을 통하여 소비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이 없으면 소비가 없고 소비가 없으면 생산도 없게 마련이다. 사회경제발전은 이런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적인 과정을  통하여 추진한다. 생산과 소비의 이러한 관계는 기업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반영된다. 기업은 각종 물품을 생산하여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는 기업이 생산하는 물품을 소비함으로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뒷바침한다. 그리고 기업들이 성장하면 사회에 더 풍부한 물품을 제공할 수 있고 사회의 각종 소비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기업의 더 큰 발전을 추진한다. 기업과 사회의 상생관계에서 기업운영의 주체인 기업인들의 사회기여 또한 중요한 것이다. 기업인들의 기업경영은 리익창출이 주된 목적이다. 하지만 참된 기업인들은 각종 물품생산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동시에 재산의 사회기부를 통하여 사회발전에 기여한다. 기업인들의 물품생산은 사회와의 상생관계에서 필연적인 행위이지만 사회기부는 각 기업인들의 자기나름의 행위이다. 사회는 인간생활의 각종 평등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재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간생활에서의 빈곤격차, 도농격차, 지역발전격차, 사회복지격차 등 현상은 어디나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데는 국가의 총체적 발전계획과 재정적 지원이 주된 힘이 될 수 있겠지만 기업인들의 사회기부도 한 몫 담당하고 있다. 사회현실은 기업인들의 사회기부를 소요한다. 얼핏 보기에는 기업인들의 사회기부는 자기재산을 사회에 내놓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러한 사회기부를 통하여 기업이미지와 기업가의 량심을 사회에 널리 홍보하고 사회의 신뢰와 인정을 받음으로 기업의 더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만약 일정한 규모에 도달한 기업인들이 자기타산만 하고 사회기부에 전전긍긍하면 눈앞의 리익손해는 없겠지만 결국에는 사회여론의 비난 또는 량심적 가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기업인들의 재산축적은 사회소비를 통하여 달성한 것으로 그들의 사회기부는 무조건적인 사회반환이 그 출발점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에서도 기부문화가 점차 형성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기업인계층은 없는데로부터 있기시작하였고 작은데로부터 점차 커갔으며 현재는 일정한 규모에 도달한 기업인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기업인들은 민족적 사명감을 지니고 민족사회에 대한 기부, 더우기 민족사회발전에 대한 기여도 점점 커가고 있다. 민족기업인들의 성장과 민족사회에 대한 기여는 민족집거지가 축소되고 민족교육이 하락되며 민족문화가 소실되고 있는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큰 힘으로 되고 있다. 조선족기업인들이 빨리 성장하기를 기원하고 그들의 민족적 관심이 더욱 깊어가며 민족사회명맥을 이어가는 사업에 더욱 적극적인 동참과 기여를 기대해 본다.
19    《관내 조선족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구상 댓글:  조회:3948  추천:55  2010-05-07
  필자의 말: 현재 산해관이남도시에 조선족인구가 널리 분포되면서 도시민족교육실행문제와 민족정체성유지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중국조선족이 “농경”민족으로부터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는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하지만 우리민족이 도시에서 어떻게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 발전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기회를 빌어 중국조선족사회의 미래발전에 있어서 꼭 필요한 민족의 도시공동체구축에 대한 화제를 제출하여 민족성원들의 관심과 반응을 기대해 본다.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구상   1. 문제제기와 목적:   200만좌우의 중국조선족가운데 인구이동으로 3분지1이상의 인구가 이미 산해관이남지역에 분포되어 있는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들이 동북지역의 민족전통집거지역을 떠나 한족인구가 절대다수인 산해관이남도시에  진출하고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당면한 제일 큰 고민이 아마 자녀들의 민족교육문제와 민족정체성 유지문제일 것이다.   민족교육은 학부모들의 민족성과 민족인구의 일정한 집중거주가 필요한 전제일 것이고 민족정체성유지에는 민족성원사이의 연대가 중요하다. 그리고 민족성원들의 연대는 크고 작은 집거지가 형성되고 민족문화바탕으로 공동체생활을 하는데서 더욱 강화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의 도시화과정과 더불어 산해관이남지역에 조선족인구가 많이 분포되면서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이 솔선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본 연구는 산해관이남 여러 도시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하여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필요한 조건, 당면한 문제등을 파악하고 도시공동체구축방안을 탐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의 바람은 조선족사회에 도시공동체구축의 필요성과 방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산해관이남지역에서 상대적인 집거지형성에 동조하며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문화를 유지하면서 생활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하였으면 한다.   2. 연구주제:   동북지역조선족들의 산해관이남지역도시진출에 따른 도시공동체구축문제   3. 연구제강:   1)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발전   - 민족은 여러가지 공동특징을 소유한 비교적 안정된 하나의 인간집단이다   - 민족의 형성에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하였지만 이 가운데 공동한 생활지역이 제일 기본적인 조건일 것이다.   - 민족문화와 민족교육은 민족발전의 기초와 핵심이고 민족교육진행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에는 민족집거지가 절실히 소요된다.   2) 중국조선족의 공동체생활   - 조선족은 이민민족이다   - 조선족은 이민,정착하면서 촌락중심으로 집거지를 형성하였다. - 조선족은 집거지가 있음으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문화를 유지하면서 민족공동체생활을 할수 있었다.   3) 도시화과정에 따른 조선족인구의 분산화   - 과거조선족은 이동성이 적은 민족집거생활을 하였다.   -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의 제일 돌출한 현상이 인구이동이었다.   - 인구이동은 조선족사회의 과거 공동체생활전통을 파괴하고 인구를 널리 분산시켰다.   - 조선족인구의 분산화는 전통집거지의 축소를 초래할뿐만아니라 민족특징의 약화 지어는 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4)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의 필요성   - 현재 조선족은 농촌에서 도시로, 집거에서 분산으로 향한 과정을 겪고 있다.   - 조선족의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으로의 진출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할뿐만아니라 민족교육과 민족정체성유지에도 많은 애로점을 낳고 있다.   - 한족이 대다수인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이 아주 필요하다.   - 도시공동체구축의 기본 조건은 도시에서 새로운 민족집거지의 형성이다.   5) 도시공동체구축의 여러 요소 분석   -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의 유리한 조건: 개혁개방과 인구이동의 자율화, 점차 강화되고 있는 민족성원들의 민족의식, 한국 및 한국인과의 밀접한 관계, 새로운 도시집거지형성을 위한 노력 등;   - 도시공동체구축의 불리한 요소: 한족인구가 절대다수인 환경, 신속한 도시화과정에 뒤진 사회제도개선, 도시민족정책과 일부제도의 경직성, 민족적 경제력의 결핍 등.   6) 도시공동체구축방안과 대책 - 조선족인구의 일정한 집거—민족교육—민족문화—민족사회단체—더 많은 조선족인구를 흡인—집거지 형성—도시공동체구축 - 도시조선족사이의 연대감 강화   - 민족경제력 강화   - 새로운 도시집거지형성에 관한 여론조성   - 해당 민족정책을 활용하여 도시민족교육, 민족문화조성에 주력   - 한국 및 한국인과의 화합과 유대감 강화   4. 연구실행계획:     - 산해관이남지역도시의 조선족사회현황에 관한 조사   - 해당도시조선족들의 민족정체성유지에 관한 설문조사   - 도시민족문제현황과 도시민족정책연구   - 한국 및 재중한국인과의 상호이해와 협력에 관한 연구   - 도시공동체구축방안 제시와 홍보   «   «   «   «   «   민족사회의 동참을 요청   우리사회는 현재 갈림길에 헤메이고 있다. 민족의 인구이동과 인구증장율저하는 전통집거지역축소를 초래하였고 도시진출과 인구분산화는 민적정체성약화를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산해관이남지역에 민족교육장소를 마련하고 민족의 도시집거지역을 구축하여야 한다. 이에 앞서 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리론적 근거와 실천적 가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공정은 우리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자체로 연구경비를 마련하고 우리자체로 연구하여야 한다. 요컨데 민족에 대한 관심과 애착심을 가진 모든 민족성원들이 물심량력으로 이에 동참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견해와 조언을 바라는 바이다.  
18    少數民族人口流動與城市民族&#25945;育問題之探討 댓글:  조회:4666  추천:31  2009-10-09
少数民族人口流动与城市民族教育问题之探讨 ——以山东省青岛市朝鲜族教育实践为例[①]     内容提要:随着城市化进程的加快和少数民族人口流动的迅速,城市居民多民族化现象日益显著,随之城市少数民族子女如何接受民族教育的问题也日益突出。本文以青岛市朝鲜族民族教育为例,阐述了城市民族教育的重要性与迫切性,指出了关注和实施城市民族教育是贯彻落实党和国家的民族平等政策和保障少数民族权益的重大举措。 关键词:青岛市   朝鲜族   民族教育  重要性   青岛市地处我国改革开放的前沿地带。改革开放以来,随着城市化进程的加快和少数民族人口流动频繁,青岛市少数民族成分增多,少数民族人口增长迅速。尤其是,随着中韩建交及山东省与韩国经济文化交流频繁,韩资企业增多,流动至青岛市的朝鲜族人口激增。青岛市成为朝鲜族的新的聚居地之一,他们面临着许多过去未曾遇到的问题,民族教育问题即属此例。鉴于此,2009年8月初,我们对青岛市朝鲜族社会进行了为期一周的实地调查,其间我们通过座谈、访谈等形式对青岛市朝鲜族教育现状进行了较为详细地了解,以便把握问题、研究对策。   一、青岛市成为朝鲜族的一个新的聚居地   青岛市地处山东半岛南部,东、南濒临黄海,东北与烟台市毗邻,西与潍坊市相连,西南与日照市接壤。青岛市居我国改革开放的前沿,1981年被列为中国15个经济中心城市之一,1984年被列为中国14个沿海开放城市之一,1986年被列为5个计划单列城市之一,而1994年被列为全国15个副省级城市之一。2008年末,全市户籍总人口为761.56万人,其中市区(市南、市北、四方、李沧、崂山、城阳、黄岛等七区)人口276.25万人,五个县级市(胶州、即墨、平度、胶南、莱西)人口485.3万人。在青岛市人口中,除汉族外,还有满、回、朝鲜、壮、蒙古等50个少数民族,据2005年《山东统计年鉴》,青岛市少数民族人口为45,100余人。 青岛市属于少数民族杂散居地区,50个少数民族中人口较多的有朝鲜族、满族、蒙古族、回族等。尤其是,随着朝鲜族人口的迅速增多,朝鲜族人口在当地少数民族总人口中占多数,青岛逐渐成为朝鲜族的新的聚居地方,许多在此工作生活的朝鲜族将青岛视为他们的“第二故乡”。 我国朝鲜族190多万,主要分布在中国东北的黑龙江、吉林、辽宁三省,据1990年第四次人口普查,朝鲜族总人口的97%以上都居住于此。随着我国改革开放的进一步深入,尤其是中韩建交以来,朝鲜族人口流动更加频繁,许多朝鲜族离开传统聚居地区纷纷流向山海关以南城市,如今分布于山东半岛、京津地区、长江三角洲和珠江三角洲等地区的朝鲜族人口达50—60万名,这表明我国朝鲜族三分之一人口已经离开传统聚居地区而流向山海关以南城市。[②] 随着人口流动,朝鲜族在一些城市聚集、定居,形成新的聚居区,其中山东省青岛市最为典型。据1982年全国第三次人口普查,青岛市常住朝鲜族人口只有83人,包括现纳入青岛市辖区的崂山县、即墨县等地的朝鲜族75人,也就是150多人,到1990年也不过500人。而据2000年第五次全国人口普查,青岛市朝鲜族常住人口已达14,491人,十年间增长近30倍。然而,包括暂住人口在内的流动人口数量远远多于常住人口,青岛市已经成为山海关以南的城市中朝鲜族最为聚集的地方。目前,关于青岛的朝鲜族人口数量众说纷纭,有说35万的,有说20万的,也有说5万多的,从中不难看出如今在青岛的朝鲜族人口的确不少。综合多方因素,我们估算的在青岛朝鲜族人口中,除了有户籍人口约3万多名以外,包括暂住人口在内的流动人口也已达到10多万名。 青岛市朝鲜族人口迅速增多,并呈现出聚集、定居之势。如今,青岛朝鲜族比较集中居住的城阳区、李沧区、市南区、即墨市等地,出现许多朝鲜族聚居的小区,如即墨西元庄小区开发9800套住房,其中6500套由朝鲜族购买;城阳区天泰城交付款的3390住户中,20%的住户是朝鲜族;李沧区百通花园小区1000多住户中,朝鲜族约600户。[③] 据不完全统计,在青岛购房的外来朝鲜族已有35,000多户。[④] 青岛市能够成为朝鲜族新的聚居地,与其站在我国改革开放的前沿分不开,也与韩资企业大量入驻青岛分不开。我国实施改革开放政策,青岛得益于其位居沿海,站在改革开放的前沿,最先开展与韩国经贸交流,1989年中韩两国建交以前,就有韩资企业落户青岛。1992年中韩建交以来,山东省作为与韩国最早联系的省份,与韩国的经济文化交流十分活跃,而青岛市借助其诸多优势更是走在中韩交流的前列。我们以青岛市与韩国城市缔结友好城市为例,1993年12月4日青岛市与韩国的大邱广域市(相当于我国的直辖市)缔结友好城市关系,1995年9月27日与仁川广域市、1999年8月10日与京畿道平泽市、2003年3月23日与釜山广域市、2003年9月21日与庆尚南道群山市等缔结了友好城市关系。 青岛市与韩国相关地区的密切交流,积极招商引资,吸引韩资企业不断地投资青岛。据统计,至2008年末,曾在青岛得到许可的韩国投资项目件数达10,242个。[⑤] 随着韩资企业的源源流入,与韩国人“同源异流”的我国朝鲜族凭借其族缘、人缘和语言优势,纷纷由东北流入青岛,在青岛的朝鲜族人口迅速增多。朝鲜族积极为中韩两国经贸交流穿针引线,为当地招商引资起了重要的中介桥梁作用,为当地经济社会发展做出了重要的贡献。       二、青岛市朝鲜族社会与民族教育   朝鲜族人口的大量流入,使得青岛成为朝鲜族新的聚居地。在党和国家民族政策指引下,依靠当地政府的支持和朝鲜族自身努力,青岛朝鲜族社会已经为其发展打下了良好的基础。开始,来青岛的许多朝鲜族与韩资企业密切相关,他们在韩企打工,许多经历了一个从普通职员、科长、理事(理事在韩企属于上层管理干部)到独立办企的成长历练过程。韩资企业为朝鲜族提供了一个锻炼的平台,1997年的亚洲金融危机后许多韩国老板回国,由朝鲜族接手许多韩资企业,也有一部分朝鲜族从韩资企业出来独立办企业。据统计,在青岛的朝鲜族企业有1000家左右,其中城阳区就有朝鲜族注册的有限责任公司42家,朝鲜族注册的个体户300多家。 来青岛的朝鲜族首先是男子,他们在青岛立足后,许多人就把家属(父母、妻子、儿女)带过来,朝鲜族人口迅速增多。随之而来,学校、饭店、宾馆、旅行社、车行、租赁行、超市等服务于民族群体的相关生活设施相继出现。在青岛的朝鲜族人群教育水平较高,他们当中除了办企业以外,许多还分布于大学、文化领域,例如在中国海洋大学、青岛大学等高等学府任教和以及其他事业单位工作的朝鲜族人口有100多人。朝鲜族也热心民族工作,如今在青岛市12区市属下的少数民族联合会会长中,有三位朝鲜族。此外,朝鲜族群体的消费也很可观,例如在青岛市城阳区人口总数中朝鲜族人口所占比重不到10%,而他们的消费额却达到该区消费总额的30%以上。     种种迹象表明,朝鲜族社会在青岛逐渐形成。一个明显的事例之一,就是在青岛朝鲜族教育已经议事日程。朝鲜族重视民族教育,从历史看,只要朝鲜族聚居的地方,那里一定会有学校。朝鲜族的这种优良传统经久不衰,也体现于当今的青岛朝鲜族社会之中。 在青岛,朝鲜族教育作为起步阶段还未能纳入公办教育系统,但已有两所朝鲜族民办学校——碧山朝鲜族学校和西元庄朝鲜族学校。 碧山朝鲜族学校位于青岛市李沧区,是青岛市教育局批准的民办全日制朝鲜族学校。该校设立于2000年8月,当时学生只有12名,校舍也是租用的。经过近10年的发展,学校初具规模,办学走向正规,已开设了小学一年级到六年级的全部课程,附设了幼儿园和朝鲜语周末学校,然校舍仍然是租用的。学校现有小学生300多人,幼儿园学生213人,教职工40余人(50%为汉族,50%为朝鲜族)。学校采用青岛市市区小学统一教材,增加朝鲜语课程,英语口语(外教)等特色语言课程,除朝鲜语,英语口语和音乐以外其他课程全部采用汉语教学,保证学生与义务教育的同步,从而实现了朝鲜语、汉语、英语“三语教学”。学校注重对学生进行特色教育,除了语言特色以外,还注重学生综合能力的训练和培养。开设多种特长课,培养学生掌握基本礼仪,自立生活能力,培养学生自主学习能力。学校拥有完备的特长教育设施,如音乐教室、美术教室、语音教室、计算机教室、科学实验室、图书室、播音室、多功能活动室,并由专业教师挖掘学生的兴趣爱好,培养学生掌握一门特长。学校具备完善的寄宿制度,宿舍食堂整洁有序,每天安排教师管理学生每天的晚自习、晨读、后进生的辅导等学习和食宿生活。学校配备班车每天接送,学生还可以选择走读。 西元庄朝鲜族学校,是由曾创办青岛碧山朝鲜族学校的金长雄在2006年所建。2006年7月1日,金长雄租用西元庄村校舍,先创办了西元庄朝鲜族幼儿园,8月28日创办了西元庄小学。现在,西元庄朝鲜族幼儿园和小学在校人数有500多人。由于是民办院校,学校常年处于亏损状态,仅2008年就亏损了10万元。   三、青岛市朝鲜族教育存在的问题及其对策   朝鲜族人口在青岛市开始聚居,民族教育提上日程,已经创办了两所民办朝鲜族学校。但是,由于民办得不到相关部门的支持,在校舍、师资及经费等方面面临诸多问题和困难,青岛市朝鲜族教育发展步履艰难。其主要表现如下: 一是得不到相关政府部门的重视。朝鲜族历来重视子女教育问题,普及教育水平和接受教育年限均居我国各民族之前列。在青岛,随着朝鲜族人口在聚居,也出现两所朝鲜族学校,但由于两所都是民办学校,生源也许多是不带当地户籍的孩子,总是得不到相关政府部门的经费资助。得不到政府相关部门的支持资助,这些民办朝鲜族学校经营只能完全依赖于学费。而每学期3500元左右的学费(另外住宿生每学期还要多交1000元的住宿费)比当地公办学校多10倍左右,这给家长带来较大负担。如果,不是念及民族教育,许多父母就不会将孩子送至朝鲜族学校读书,而把子女送当地学校。朝鲜族父母希望子女懂得民族文化与语言文字,但现实面临的是民族学校昂贵的学费,他们处于进退两难。面对这种无奈,他们更是渴望政府相关部门认真贯彻落实党的民族政策,政府出面给予解决民族教育问题。 二是学校校舍问题。目前,青岛市的两所朝鲜族民办学校的校舍、场地都是租用的。租赁校舍存在两个突出问题:一是要从每年的学费中拿出很大一部分缴纳租金,学校没有更多的资金以满足教学、教研以及校舍建设;二是租赁校舍具有不稳定性,因而办学投资者不敢也不愿意在学校基础设施配备以及办公条件改善方面投入大量资金,这种状况下学校无法走可持续发展之路。 三是师资问题。青岛的两所朝鲜族民办学校,老师都是招聘而来,教职工来自东北三省和本地,50%为汉族,50%为朝鲜族。他们学历达标,具有较高素质,但由于是民办学校,这些老师无经费,也没有时间接受继续教育过程。还有,受聘的老师均没有正式编制,享受不到公立学校教师应有的福利待遇。此外,老师人事、档案关系基本都留在原单位,给学校的管理也带来一定困难。 四是少数民族儿童无法享受接受义务教育的权利。由于朝鲜族学校经营完全依赖于学生交纳的学费,在民办学校就读的朝鲜族学生要交远高于当地公办学校。此外,朝鲜族学校的学生的大部分属于无当地户籍的外来人口(然应该属于常住人口)。所以,这些少数民族孩子在非户籍地要想接受民族教育很难,他们几乎无法享受国家规定的接受义务教育的种种权利。 青岛市属于少数民族杂散居城市,相关政府部门还没有引起对少数民族教育的重视。究其原因,一是因为不是民族地区,少数民族人口本来就不多,更何况许多少数民族成员及其子女不具有当地户籍,引不起当地政府相关部门的关注;二是民族教育有其特殊性,在非少数民族聚居的城市要进行民族教育,其人力、财力、物力在同样条件下要花费更多,而当上级政府还没有制定相关政策予以规范,当地政府又没有什么义务非要关注非当地户籍少数民族子女的民族教育不可。当然,从严格意义上说,在我们统一的多民族国家内,哪个地方都必须贯彻落实党和国家的民族政策,少数民族不论到哪个地方应该都能享受民族政策的关怀。尤其是,随着城市化进程的加快,少数民族人口越来越多地分布于非民族地区的城市,城市民族问题将日益复杂多样,这要求各级城市政府必须改变传统工作思路,转变观念,认真贯彻落实党和国家的民族政策。为此: 1. 必须要重视城市民族教育问题。随着改革开放的进一步深入,我国城市化进程加快,城市居民多民族化现象日益显著。城市居民的多民族化不仅带来了城市文化的多样性和城市民族关系的复杂化,也提出了如何在城市进行民族教育的课题。特别是,随着我国城市化进程的加快,加速了民族地区少数民族人口向大中城市的流动,其子女接受民族教育的问题变得日益突出,少数民族成员关于在城市设立民族教育机构,进行民族教育的呼声也日益强烈。然而,城市民族教育方面除了已有的冠以少数民族名称的学校以外,相关部门很少关注民族教育的实施,新设的民族教育机构微乎其微。这表明,在城市如何进行民族教育已提到议事日程,是各级城市政府必须面对的新问题。 在青岛,随着朝鲜族人口迅速增多,它已经成为朝鲜族在山海关以南城市中的一个新的聚居地方,民族教育问题日趋突出。民族教育关系到少数民族人口素质的提高和民族文化的传承和光大,民族教育也关系到增强民族成员自信心和自尊心。但是,由于得不到当地城市政府教育行政部门的支持和资助,现有的两所民办学校经营面临较大困难,朝鲜族教育步履艰难。这种局面,甚至让一些朝鲜族民众产生对党和国家民族政策的怀疑。所以,相关政府部门必须关注朝鲜族民族教育现状及其朝鲜族民众对政府的要求,采取一定措施切实解决民族教育问题。 2、要认真贯彻落实党和国家的民族教育政策。2006年修订的《中华人民共和国义务教育法》第三条规定:“义务教育是国家投资办教育,免收学生的学费的教育。”第四条规定:“凡具有中华人民共和国国籍的适龄儿童、少年,不分性别、民族、种族、家庭财产状况、宗教信仰等,依法享有平等接受义务教育的权利,并履行接受义务教育的义务。”这些规定强调了享受义务教育的权利与履行接受义务教育的统一性,也表明义务教育是国家投资免收学费的。依照这一规定,朝鲜族子女具有与其他民族子女一样接受义务教育的义务,同时应享有平等接受免费义务教育的权利。各级城市政府及其相关部门应该认真贯彻落实党和国家的民族教育政策,遵行《义务教育法》和《城市民族工作条例》关于“城市人民政府应当重视发展少数民族教育事业,加强对少数民族教育事业的领导和支持。城市人民政府应当采取适当措施,提高少数民族教师队伍素质,办好各级各类民族学校(班),在经费、教师配备方面对民族学校(班)给予适当照顾”的规定[⑥],重视实施民族教育,采取切实可行的政策措施为散居于城市的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创造条件。 3、积极设立形式多样的民族教育机构。在中华人民共和国境内,依照党和国家的民族政策,少数民族子女无论在哪个地方都有接受民族教育的权利,而进行民族教育让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应该是各级人民政府的责任和义务。以青岛市朝鲜族学龄儿童为例,如果这些孩子没有离开东北聚居地区,他们完全有机会、有条件接受公办学校进行的民族教育。但是,他们离开聚居地区,首先面临的是新的地方没有民族教育机构,其次得不到当地教育行政部门的支持资助,要接受民族教育不得不去民办民族学校,在这里他们不仅不能免除学杂费,还需要交纳远多于公办学校的费用,无法享受免费义务教育的权利。因此,类似青岛市这样朝鲜族人口比较集中,学龄儿童达到相当数量的城市,应该关注其民族教育,积极创造条件让这些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我们在调研中,经常听到朝鲜族人士关于创办民族教育机构的呼声,一些上了年纪的人甚至说:在青岛如果看不到朝鲜族教育前景,“我们这些老人死了也不能安心。” 当地朝鲜族社会认为,如今居住青岛市内的朝鲜族学龄儿童已达几千人,政府应该为他们设立公办民族学校,如果建立公办民族学校的条件暂时还未成熟,那么先在当地中小学里附设一些民族班,或者从政策上、经费上鼓励民办民族学校,给少数民族子女创造在义务教育阶段接受民族教育的机会。在少数民族新的聚居城市,各级设立民族教育机构(民族学校或民族班),这是落实党和国家的民族平等政策和民族教育政策,搞好城市民族工作的实际要求所决定的。 4、对现存的民办朝鲜族学校应给予政策上支持和经费上扶持资助。根据朝鲜族社会对民族教育的需求,在青岛应运出现两所民办朝鲜族学校,但学校经营,包括校舍租赁、教师聘请等,完全依靠学费,这不仅增加了接受民族教育儿童家庭的经济负担,而且无更多的余力投入学校的再发展,学校前景令人担忧。然而,从青岛朝鲜族社会实际看,民族学校不能没有。所以,应该认真对待现有的民办朝鲜族学校,由于采取一定措施,从政策上给予支持,从经费上给予资助,使之能够摆脱困境,为当地朝鲜族教育多做贡献。可以说,对于各级城市政府来说,关注少数民族群体,花费精力认真解决少数民族社会存在的实际问题,这应该是一项重大的政治任务,也是加强民族团结,构建城市和谐社会的重要举措。 总之,随着居民成分的多民族化,城市民族教育问题需要提到议事日程。中央政府对随父母流动至城市的少数民族子女如何接受民族教育应该有个政策规定,而相关城市政府及教育行政部门应该认真贯彻落实党和国家的民族政策,倾听少数民族的呼声并给予关注,采取有效可行的措施,在少数民族人口比较聚居的城市社区创办民族教育设施,切实解决好城市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的问题,将党和国家的民族政策要落实到实处,而不能流于形式上。   [①] 2009年8月2--8日,我们对青岛市朝鲜族社会进行了实地调查,调查得到了青岛市民族宗教事务局、青岛市少数民族联合会、中韩经济发展协会等有关部门和朝鲜族民间团体有关人士的大力协助,借此深表谢意。 [②] 郑信哲:《中国的农村政策与朝鲜族农民土地保护问题》,《2009朝鲜学—韩国学研讨会论文集》,中央民族大学朝鲜学—韩国学研究所,2009年6月,第26页。 [③] 根据调查所获资料,如下未注明出处的均同。 [④] 南龙海:《青岛朝鲜族聚居地方的现状与展望》,中国朝鲜民族史学会《改革开放三十周年朝鲜族社会的变化与发展》研讨会论文集(2008年10月18—19日),第10页。 [⑤] 至2007年末正常经营的企业有4081家,占青岛外国投资企业数的50.6%。如果加上未注册的企业,现有韩资企业6000多个。见韩国驻青岛总领事馆网站。 [⑥]沈林 李志荣编:《散杂居民族工作政策法规选编》,民族出版社,2000,第49页。
17    조선족과 한국인사이 반감초래의 악역은 누구? 댓글:  조회:5167  추천:81  2008-12-09
어제 밤 kbs 뉴스가운데 “중국동포 범행 급증”이란 제목으로 몇 건의 사건을 피로한 기사를 보았다. 이 기사를 보는 순간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인간세상 어느 나라, 어느 민족 할 것 없이 세계 각 곳에서 매일 수많은 범행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국인, 외국인들의 범행 역시 계속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소위 “중국동포의 범행”을 특히 부각시켜 한국인에게 알려주는 의도는 무엇일까? 기사의 인기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책임감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조선족이 한국에 많이 왔다. 하지만 그들은 놀러온 것이 아니고 더욱이 범행을 저질르려고 오지 않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한국인이 꺼려하는 3D 업종도 마다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은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이는 어는 인간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이러한 기사를 부각시키는 것은 현지사회의 안정, 조선족과 한국인사이의 상호관계, 상호이해에도 이로운 점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사회에서 조선족의 이미지가 좋지 않는 분위기(역시 매스컴들의 소행 때문에)가운데 이러한 기사는 조선족과 한국인사이의 서로의 반감만 키울뿐, 서로의 조화와 공존, 나아가서는 중한관계에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사의 마지막부분, 즉 동국대학의 교수가 한 말처럼 한국사회에 소외된 이들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부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우리 조선족사회에서도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희망컨대 이 같은 뉴스는 삼갔으면 한다.
16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대하여 댓글:  조회:4774  추천:73  2008-10-29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대하여    ---북경시 조선족교육을 중심으로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1.도시민족교육문제의 제기 개혁개방이후 중국의 도시화과정은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도시화와 더불어 도시주민의 다 민족화 현상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도시주민의 다 민족화는 도시문화의 다양성을 과시할 뿐만아니라  도시민족관계의 복잡성의 초래하고 있으며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하는 새로운 과제를 제출하였다. 더욱이 빠른 도시화과정과 더불어 대량의 소수민족인구가 대,중도시로 이동함에 따라 그들의 자녀들의 민족교육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소수민족성원들이 도시에 민족교육기구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더욱 높아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 문제가 이미 도시정부의 행정에 제출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표명하였으며 각급 해당도시정부가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었다.   2.조선족도시교육의 현황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인구이동은 그 어느 민족보다 빨랐으며 200만인구 가운데 3분지1이상이 이미 동북의 집거지역을 떠나 산해관이남 대,중도시지역 또는 해외로 진출하였는바 이 가운데 학령아동들도 적지않게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산해관이남 지역에는 조선족학교가 없으므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의 민족교육문제가 날로 심각해 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조선족민간에서 몇 개의 조선족학교를 꾸려보았지만 현지정부 및 교육행정당국의 지지와 지원이 없어 결국에는 학교문을 닫아야 할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북경에도 마찬가지이었다. 산해관이남 도시가운데 북경은 조선족인구가 가장 밀집한 도시의 하나이다. 일반 추측에 의하면 북경조선족인구가 1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조선족자녀들의 민족교육을 위하여 조선족민간인들이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조선족학교를 꾸렸보았다. 그 가운데 기숙제 조선족학교 “장백학교”도 있었고 현지 소학교와 협력하여 조선족학생부를 설립한 형식도 있었지만 현지 정부와 교육행정당국의 지지가 결핍했기에 결국에는 중도에서 실패의 맛을 보지않으면 안되었다. 예컨대 “장백학교”은 동북에서 온 조선족이 설립하였는데 시작부터 많은 애로점이 있었다. 먼저 해당기관에서 허가가 제때에 내려오지 않았고 후에 묵인은 받았지만 “조선족학교”란 간판을 달지 못하고 “´´장백학교”란 간판을 부득불 걸게 되었다. 현지정부의 해당기관에서는 민족문제가 민감하여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에게 불리할가봐 여러가지 이유로 제한을 하면서 “단일민족”이름으로 된 간판을 걸지 못하게 하였고 민족학교설립에도 공식 허가를 주지 않았으며 지원도 없었기에 장백학교는 여러 여건으로 부득불 폐교하게 되었다.   3.도시민족교육의 중요성 현재 많은 조선족아이들은 새로운 지역에 민족학교가 없어 민족교육을 받을 수 없는 경우에 처하게 되었고 그 결과  민족언어와 문자를 점차 잃어가게 되었으며 너무 빨리 민족동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소수민족성원들의 민족미래에 대한 비관적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 도시에 응당 설립되어야 할 민족교육기관이 해당정부기관의 주목을 받지 못할 경우 소수민족성원들의 중국공산당과 국가의 민족평등정책에 대한 의심 또는 불신임감을 자아낼 수 있다. 다른 한면 조선족상황을 보면 만약 우리가 도시 조선족민족교육을 관심하지 않고 조선족학교를 설립하지 않을 경우 많은 조선족아이들이 동일한 언어문자를 사용하는 한국인학교에 다닐 가능성이 많아진다. 료해에 의하면 재중 한국인의 교육기관은 비교적 많은 바 북경, 천진, 청도, 대련, 상행 등 지역에 한국인 학령아동대상을 세운 기초교육기관인 중소학교가 여러개 있고 또 일부 도시에는 30여개의 한국어 학교가 세워져 있다. 일부 조선족아이들은 조선족학교가 없어서 민족언어문자교육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인이 세운 한국학교에 가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도시조선족의 후대교육에 영향을 줄 것이며 엄중하게 말하면 도시조선족자녀의 민족교육이 한국화교육으로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도시에서 민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도시와 사회발전의 수요이므로 누구도 막지 못한다. 우리가 세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세울 것이다. 관건은 누구를 위하여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 주목해야 할 한가지 문제는 대,중도시로 이동한 많은 조선족자녀들이 민족교육을 받을 수 없어 부모들은 부득히 자녀를 고향에 보내여 공부하게 한다. 하지만 부모가 신변에 없어 아이들에 대한 관리가 따르지 못하여 기로에 들어선 아이들도 적지 않아 학부모들이 마음놓고 사업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물론 이런한 상황은 조선족에게만 존재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산해관이남 도시에서 사업 또는 장사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조건이 없어서 자녀을 옆에 두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교육을 받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고향에 보내거나  고향에 두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4.도시민족교육 전개의 가능성 현재 북경의 경우를 보면 조선족민족교육기구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왕징지역을 볼 때 이 지역에 거주하고 조선족이 약 만명에 달한다.[①]조선족인구구성을 보면 청장년인구가 위주이고 이 가운데 많은 경우는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가진 세식구의 가정들이다. 2008년5월 현지조사에 의하면 왕징지역의 4개 조선족유치원에 다니는 조선족아이가 130명에 가까우며 한국인이 경영하는 몇 개의 유치원에 다니는 조선족아이도 20여명이 된다. 그리고 왕징지역 여러소학교의 학전반과 한족유치원에 다니는 조선족아이들도 적지 않는 수에 달하고 있다. 가령 이미 한족학교에서 공부하는 일부 조선족학생수를 감안하면(동일언어를 구사하는 한국인자녀들까지 포함하면 학생내원이 더욱 많다) 하나의 특색있는 민족학교를 꾸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북경의 왕징지역은 산해관이남 각 도시에서 조선족인구가 제일 집결한 지역의 하나이고 그 밀집정도도 제일 높다고 할 수 잇다. 왕징지역의 조선족 학령아동들의 숫자를 보면 이 지역에 응당 민족교육기구(민족학교 또는 민족반)를 설립하여야 한다. 이것은 당과 국가의 민족평등정책과 민족교육정책을 참답게 집행하고 도시민족사업을 잘 해야 한다는 실제 요구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왕징지역에 민족교육기구를 설립하면 한국인자녀도 흡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왕징지역 거주의 한국인은 약 2만명이 되나 민간예측에는 6-7만명이 된다고 한다. 한국인자녀의 가입은 민족교육기구의 학생내원을 확대할 뿐만아니라 우리의 교육으로 한국인에게 영향을 줄수도 있으며(지금까지는 이 지역 조선족은 한국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다), 조선족과 한국인의 상호이해를 강화할 수 있다. 이것은 조화로운 왕징 다문화지역건설에도 아주 유익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왕징지역의 조선족민족교육은 이미 의사일정에 올랐고 조선족학부모들의 민족학교 또는민족반을 꾸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②]그들은 공립민족학교설립의 여건이 잠시 미성숙하며 현지 중소학교에 민족반을 부설하는 것은 되지않는가고 생각하고 있다. 가령 이것도 어렵다면 교육행정당국에서 사립민족학교설립을 용허하고 일정한 지도와 지지를 주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5.반드시 도시민족교육을 중요시하여야 주시하다시피 도시민족교육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도시 민족교육은 각급 도시정부 및 교육행정당국의 주목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원인를 따져보면 하나는 도시인민정부 및 교육행정당국에서 도시민족문제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고 두번째는 도시소수민족의 권익보장을 소홀히 하는 것이며 세번째는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결핍 또는 아예 의식치 못한데 있다. 개괄하여 말하면 이것은 당과 국가의 민족평등정책과 민족교육정책을 참답게  실행하지 않은데서 생긴 폐단이라 하겠다. 도시에 소수민족 학령자녀들이 민족교육을 받은 것은 그들의 권리이고 민족교육을 전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민족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도시인민정부의 책임과 의무라고 하겠다.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가운데도 산거지역의 소수민족교육을 발전할 때 관한 요구도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국무원이 공포한 《도시민족사업조례》제9조에서는“도시인민정부는 응당히 소수민족교육사업의 발전을 중요시하고 소수민족교육사업에 관한 지도와 지지를 강화하여야 한다. 도시인민정부는 응당히 적당한 조치를 취하여 소수민족 교원대오의 소질을 높이고 각급 각종의 민족학교(반)을 잘 꾸려야 하며 경비와 교원 배치면에서 민족학교(반)에 적당한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1998년 북경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통과한《북경시 소수민족 권익보장 조례》 제18조에서는 북경시의 “소수민족공민은 법에 의하여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기회를 향유한다. 본 시 각급 인민정부은 응당 소수민족교육사업의 발전을 중요시하여야 하고 소수민족교육사업에 대한 지도와 지지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제19조에서는 “소수민족공민이 비교적 집중된 지역에서는 소수민족의 특점과 수요에 의하여 해당기관의 허가를 거쳐 민족학교와 유아원(소)을 설치할 수 있다. 시와 구,현의 교육행정기관에서는 교육자금을 배치할 때 소수민족교육에 대한 지원을 생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도시에 민족교육기구를 새롭게 설립하는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것은 이유는 아니다. 오직 해당도시정부 및 교육행정당국에서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참답게 실행락실하고 소수민족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리며 이에 관심을 부여한다면 수 많은 도시 소수민족자녀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요구와 염원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6.우리민족이 해야 할 일   도시 민족교육의 진행과 발전을 위하여 현재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것인즉:     첫째,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과 현실상황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기초성적인 자료를 작성하여 널리 홍보하고 정부와 민족성원들의 도시민족교육에 대한 중시와 호응을 얻어야 한다.     둘째,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 및 민족교육정책을 참답게 활용하여 행정당국에 민족교육의 중요성, 절박성을 호소하고 당의 민족정책을 집행하는 중요한 조치의 하나로 정책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도록 노력함으로 민족교육진행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려야 한다.     셋째, 민족교육은 어디까지나 민족내부의 일로 민족의 전체성원이 이를 고민하고 힘을 합쳐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동북해방이후 조선족민중들이 일떠서 민족학교설립에 모든 힘을 이바지하는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매 개인이 힘이 자라는 데까지 도시민족교육의 진행과 발전을 성원하고 지원하였으면 한다. *                  *                 * 개괄적으로 말하면 도시거주민 성분의 다 민족화에 따라 도시민족교육문제가 날로 뚜렷해 지고 있다. 해당 정부기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참답게 대하며 효과있고 가능한 조치를 취하여 소수미족인구가 비교적 집거한 도시구역에 민족교육시설을 설립하고 착실히 도시 소수민족자녀들의 민족교육접수문제를 해결함으로 당과 국가의 민족평등정책이 형식에 지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이외에도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는 하나의 새로운 과제로 조선족민족교육전개를 도시민족교육을 탐구하는 하나의 시범으로 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시도라고 하겠다.   [①] 이 수자는 해당부문의 통계에 불과하고 민간에서 예측하건데 왕징의 조선족은 2-3만명은 된다고 한다. [②] 예측에 의하면 북경시에 조선족이 7만여명(북경호적을 지닌 인구가 1.5만명좌우이고 림시거주증소유자가 6만명좌우)이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북경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소재지도시 연길시의 조선족인구 다음으로 가는 조선족이 많은 도시이다. 이렇게 많은 조선족인구를 소유한 도시에 몇 개의 조선족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조선족인구가 밀집한 왕징지역에 조선족소학교 하나를 설립하자는 요구는 과분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15    민족경제인재 양성이 급선무 (정신철) 댓글:  조회:6146  추천:129  2007-12-24
민족적 경제력 제고에 관한 사고3민족의 경제인재와 경영관리인재의 양성이 급선무   정신철 중국 사회과학원 교수중국의 현실 환경을 보면 민족성원들의 정치행정적 출로는 좁고 제한적이지만 경제경영의 길은 점점 넓어져 가고 있는 추세이다. 따라서 조선족사회발전과정에서 민족적 경제력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더욱 많은 경영인, 기업인이 주류사회에 진출하도록 민족사회전체가 노력하지 않으며 안 된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여러 도경을 통하여 민족의 경제인재와 경영관리인재를 많이 양성하여야 한다.    첫째, 민족성원들의 경제의식을 강화하여야 한다. 경제는 일체 사회생활의 토대로 경제력의 강약은 민족의 강약과 연관된다. 특히 사회정치환경이 민족성원들의 정치적 출로를 제한하는 여건하에서 민족을 단합하고 민족의 힘을 강화하며 민족성을 유지하는데는 무엇보다가 경제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때문에 민족성원들에게 사람마다 경제인이 되자는 관념을 주입시켜 전 민족의 경제의식 제고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둘째, 경제인재와 경영관리인재를 양성에는 전체 민족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아직 시장경제의식이 박약하고 과소비경향이 심하다는 단점들이 있기는 하나 개혁개방이후 특히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후 민족성원들의 경제의식이 많이 강화되었고 여러 경제분야의 종사자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일정한 실력을 갖춘 기업인, 경영인들이 점차 두각을 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인들이 현존의 실력으로는 중국의 주류경제사회에 진출하기에는 아직 너무 미흡하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민족전체의 힘을 합쳐우리의 경제인, 경영관리인재를 더 많이 키울수 있는가 하는것은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좋은 방도를 찾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우세를 활용하여 민족적 네트웍을 형성시켜 민족의 경제인재와 경영관리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우리에게는 선진국 문턱에 닿은 한국이 있고 일본, 미국 등 나라에 진출한 수 많은 동포들이 있다. 한국은 우리와 직접 교류하는 이외에 경제인재 양성에 많은 도움을 줄수 있는 여건이 있다. 세계로 진출한 조선족들은 자신의 여러가지 기능을 련마하는 동시에 국내의 조선족 경제인과 제휴하여 같이 민족의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모국적, 인적 자원과 우세를 활용하여 민족의 경제인재. 경영관리인재를 양성하여 민족적 경제력 제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다른 한면 한국도 정말 중국조선족을 해외동포라 생각하면 국가차원에서 조선족 경제인재 양성을 착실히 지원할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모국인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자세이다.    현재의 세계는 경쟁속에서 휩싸여 있다. 어느 국가나 민족이든 치렬한 경쟁속에 살아 남아려면 반드시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가꾸어야 하는바 여기서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경제인재, 경영관리인재 등에 있다. 우리는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될수록 빨리 민족경제의식을 높이고 민족적 경제인을 많이 양성해야 한다.그리고 민족의 경제인, 기업인 그룹을 형성시켜 그들지간의 련대감을 강화하는 것도 우리앞에 놓인 중대한 과업의 하나이다.                                                                              끝
14    민족적 경제력 제고의 제 여건 (정신철) 댓글:  조회:5996  추천:109  2007-12-22
민족적 경제력 제고에 관한 사고2민족적 경제력 제고의 제 여건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중국은 다민족국가이나 인구적으로 한족이 절대다수 차지한 국가로 기타 민족들의 민족적인 발전에는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 특히 인구분산화에 따른 민족집중거주지역 인구의 소실은 민족성유지와 민족경제발전에 매우 불리한 영향을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민족이 존재하는 한 민족적인 추구, 즉 민족적인 경제발전 추구, 민족적인 경쟁력 추구, 민족적인 생활방식 추구, 민족적인 교육 추구 등은 사라질 수 없다.     민족적인 추구에는 민족적 경제력이 뒷받침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서는 꼭 민족적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조선족의 민족적 경제력제고에 여러 우세가 있다.    첫째, 조선족은 인구자질과 교육문화보급수준 등이 중국에서 앞서고 있다. 일찍이 1990년 중국인구 센서스자료에 의하면 중국 총인구 가운데 초등학교이상 교육을 받은 비율은 전 중국 평균수준은 69.81%이고, 한족수준은 70.67%이며 소수민족 평균수준은 60.60%인데 비해 조선족수준은 82.75%에 달하였다. 교육인구 매 만명가운데 대학수준 소유자 수효를 보면, 전국 평균수준은 78명이고 한족은 79명이며 소수민족평균은 61명인데 비해 조선족은 227명에 달한다. 그리고 15세 이상의 인구 문맹률을 볼 때, 중국 총체의 평균 문맹률은 22.21%이고, 소수민족의 평균 문맹률은 30.83%에 달하며 한족의 문맹률도 21.53%이다. 이에 비해 조선족의 문맹률은 7.00%밖에 되지 않는다. 15ㅡ39세 연령층의 조선족 문맹률은 0.49%에 불과하지만 한족의 문맹률은 8.75%에 달한다. 교육연한을 보면 전 중국 평균수준은 6.25년이고 소수민족 평균은 5.29년이나 조선족은 8.52년에 달하였다.[1]   조선족 교육문화발전의 이러한 수준은 지금에도 마찬가지이다. 민족의 인구자질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은 그 민족의 새로운 사물접수, 새로운 환경적응, 새로운 기술터득 등 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   둘째, 조선족에게는 중국 기타민족에게 없는 해외관계--조선과 한국이란 두 개의 나라가 있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20세기 60년대까지 조선과의 교류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고 80년대말부터, 더욱이 90년대 중한수교이후에는 한국과의 교류에서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현재 수많은 조선족이 한국에 나가 일을 하고 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국내에서 한국과의 각 종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한 방면으로 조선족의 관념갱신과 경제력 신장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또 한 방면으로는 한국의 대중국교류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기타민족에게 없는 유리한 해외여건을 활용하면 민족적 경제력의 더 빠른 신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조선족은 민족이 지닌 특수한 우세로 세계화흐름 속에 가세하고 있다. 그 일례로 조선족전체의 약 1/10에 달하는 인구가 현재 중국을 떠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국제화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적인 민족적 네트웍을 형성시켜 세계 기타 여러 나라의 동포들과의 경제, 문화 등방면의 교류를 추진하는 계기로 되어 민족경제력 제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셋째, 조선족유지인사들이 민족발전의식을 갖고 민족적 경제력신장을 위하여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 도시화과정과 인구이동으로 집중거주지역 농촌의 축소, 민족교육의 약화, 민족특성의 점진적 소실 등 문제로 많은 민족성원들이 걱정하는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더욱이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현재는 국외에 나가 있는 조선족인사들까지 조선족문제해결에 합류하여 민족발전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좋은 아이디어와 건설적인 견해를 내놓으면서 민족발전문제해결에 실질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현재 국내외 조선족의 네트웍건설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과정 등은 민족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 이 모임도 국내조선족, 해외진출한 조선족,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동포사회의 해당인사 등이 모이여 조선족발전을 탐구하는 실천의 한 부분으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민족경제발전에 있어서 우세가 있는 한면 단점 또한 없지 않다. 그 하나는 민족적 경제규모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과거 우리의 농촌경제는 자급자족의 소농경제위주로 분산적이고 소규모적이어서 전체적인 민족경제력을 키우지 못하였다. 따라서 우리민족경제에서 규모적인 농장, 유명한 민족기업, 굴지의 민족기업가 등이 많이 나타나지 못하였다. 두번째로는 민족의 경제력축적이 부족하다. 민족이 처한 외부환경의 특수성이 없지 않으나 우리민족습성에는 경제적 저축성이 약하다. 그 단적인 례로 과소비현상을 들수있는데 전통적이나 현재나 막론하고 민족성원들의 과소비현상은 놀랄 정도이다. 돈이 있으면 다 써버리고 없어면 꾸어서 써는 경향은 현재도 여전하였다.과소비를 비롯한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경제적 축적이 결핍하여 경영자금 확보, 확대생산 등이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세번째로는 민족의 우수한 경제인들이 매우 결핍하다. 조선족은 문화적으로 발달하였으나 경제경영면에서는 부족한 편이다. 지금까지 보면 조선족은 중국에서 인구당 비례로 보면 학자. 문화인, 행정인원 등은 기타민족에 비해 높은 비례를 차지하고 있지만 유명한 경제인, 기업인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하지만 민족적 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족의 영향을 넓히는데는 민족의 우수한 경제인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네번째로는 경제인들지간의 연대감이 약하다.현재 우리의 기업인들을 보면 분산적일 뿐만아니라 단체성이 부족하다. 이러한 약점은 총체적인 민족경제발전과 민족경제규모를 효시하는데도 불리하다. [1]国家统计局人口统计司  国家民族事务委员会经济司编:《中国民族人口资料》(1990年人口普查数据) 참조,中国统计出版社1994年。
13    조선족의 불량소비현상에 대한 검토 댓글:  조회:4796  추천:118  2007-10-13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의 경제발전이 빨랐고 그들의 생활수준은 전에 없이 제고되었다. 그러나 조선족의 비계획적인 소비경향은 조선족사회의 경제생활에 불리한 영향을 초래하였다.조선족의 경제생활에서 계획성이 결핍하고 생산보다 소비가 앞선 경향이 심하였다. 개혁개방이전 논농사 위주인 조선족농민들의 생활은 밭농사 위주인 주위 한족(汉族)들보다 더 윤택하였으나 돈은 있는 대로 다 써버리는 경향이 있어 저축은 거의 못하였다. 이에 비해 한족들은 수입은 조선족보다 적었지만 저축만은 언제나 조선족을 초과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의 생활은 한족들보다 풍요하게 보였지만 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조선족이 한족들의 돈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았다. 생산보다 소비를 선호하면서 점차《놀자주의》,《먹자주의》,《향락주의》등 성향이 한족들보다 더 짙어졌다. 현재 조선족은 전통적인 명절놀이 이외에《3.8국제부녀절》,《6.1국제아동절》등 정치색채를 띤 기념일도 모두 모여 노는 날로 변하였으며, 사회적으로 노인공경의 풍기를 세우기 위하여 규정한《8.15노인절》등도 노는 날로 변모해버렸다. 이러한 기념일에 한족들은 아무른 행사도 하지 않지만 조선족마을에서는 적어도 하루는 모여서 마시고 노는 풍습으로 변하였다.필자가 몇 해전에 흑룡강성의 한 조선족마을에 갔을 때 일이다. 조선족들과 한족에 대한 화제를 논의할 때면 보통《한족은 놀 줄 모른다》,《집은 허술하여도 돈은 있다》,《일전 한푼도 망탕쓰지 않는다》고 입을 모으나 대부분이《죽어도 한족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심지어《우리는 금년 3.8부녀절에 1인당 100원을 모아 며칠을 놀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필자는 또 그 마을에 몇 가구 되지 않는 한족과 조선족에 관한 화제를 나누었다. 한족들은 조선족은 낙천적이며 잘 마시고 잘 놀며 돈을 잘 쓴다고 말한다. 또 반면에 돈을 있는 대로 다 쓰고 급한 일이 생기면 자기네한테 돈을 꿔 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이후 조선족 가운데 한국을 비롯한 국외노무에서 많은 외화를 벌어 온 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국외에서 힘들게 벌어 온 돈을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하여 투자하지 않고 비생산성 소비에 많이 지출하였다. 이들은 도시에 주택을 마련하고 할 일없이 흥청망청 날을 보내는가 하면 농촌에서는 매일 마시고 놀면서 돈만 낭비하였다. 해당기관의 소개에 의하면 90년대 말 목단강시의 조선족농촌에서 국외 노무송출의 연인수 6000여명이 벌어 온 외화도 몇 천만 딸라가 되지만 직접 생활소비에 들어 간 액수가 전체의 1/3에 달하였다. 이러한 소비경향은 벌어온 돈을 거의 한족들 손에 들어가면서 또 한족들의 미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조선족은 돈이 좀 있다고 시내에 들어와 무조건 집을 사는 바람에 “꼬리빵즈가 집값을 올렸다”고 현지의 한족들이 말한다.그리고 조선족의 비생산성 소비성향은 한족들의 말에서도 반증이 잘 된다. 20세기 90년대말  현지조사때 필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한 부문의 한족책임자와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이 한족간부는《이 곳의 휴대폰 소유자, 택시이용자와 노래방 출입자가 대부분이 조선족이다》고 말하였다. 연길에서 한족 택시기사와의 대화에서 그는《조선족이 택시 타지 않으면 우리는 굶는다》고까지  말하였다.  돈을 과다하게 쓰다보니  사람들이 나태해지고 향락주의에 빠진다. 이러한 경향은 농사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많은 조선족 농촌에서는 논갈이부터 정미까지 삯꾼을 사용한다. 농번기나 또는 논이 많으면 부득이 삯꾼을 쓴다하겠으나 문제는 대부분이 때 없이  삯을 내여 농사를 짓는다. 심지어 그 한가한 여름철에 비료 주고 논둑풀 베기까지 삯 주고 맡긴다. 170여 가구가 사는 길림성 반석현의 어느 조선족마을에서 일년에 삯군요금이 30만원으로 가구당 1700여원에 달하였다. 조선족이 1390여 가구인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조선족향에서  한해에 삯값이 340만원에 달하며 이는 가구당 2000여원에 달한다. 조선족들이 이렇게 돈을 잘 써서 조선족 마을 부근의 한족들은 조선족마을을 하나의 수입원으로 날마다 여기에 모여 일을 기다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농촌에서 조선족은 말이 농민이지 그들은 과거의《지주》보다 더 편하게 보내고 있다. 그들은 농사일뿐만 아니라 마당의 나무 땐 재를 치고 변소를 치는 일까지 삯 주고 맡긴다. 때문에 그들에게 게을러지는 성향이 더 깊어지기만 하였다. 흑룡강성의 어느 마을에서는 도시에 10여원 되는 채소를 사려고 왕복 택시요금 40-50원이나 쓰는 일도 있을 정도로 조선족들의 소비에는 비생산성 경향이 이처럼 심하였다. 그럼 조선족에게 왜서 이런 소비경향이 생겼을까? 필자는 이 같은 경향을 이민성에서 많이 찾아 볼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시다싶이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주 온 집단이다. 이주민족으로 조선족 선조들이 중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지는 백 여년밖에 되지않아 중국조선족의 역사는 중국 기타 민족에 비해 길지 않다. 그리고 공식적인 정착으로 볼 수 있는 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이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조선족의 뿌리가 깊지 못하고 이민특성이 아직 농후하게 남아 있다. 그 표현으로첫째, 조선족선민들이 그 때 당시 생활적, 정치적 상황으로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때가 오면 고향에 돌아 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중국에 정착하려는 경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영주 이민자로 규정하기 보다는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이주한,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둘째, 중국에 이주하여 왔지만 당시 일제의 침략, 현지 土豪들의 착취, 그리고  비적들의 침습 등으로 내일에 대한 불안으로 나날을 보내었기 때문에 자산을 축적하지도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축적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중국의 국민이 된 조선족은 중국에 종국적으로 정착되었지만 그들의 혈관 속에는 조선민족의 피가 흐르고 조선반도에 대한 향수(乡愁)가 깊다. 특히 중국조선족 1세(현재 그리 많지는 않지만)들은 죽어서 뼈라고 고향에 묻을 수 있다면 하고 애탄을 하는 분이 적지 않았다. 중국조선족의 이러한 이민성은 그들의 경제생활에서 미래지향성보다 단기안목의 행위를 더 나타내었다. 그리고 1990년대이후 중국조선족의 한국 등 해외진출이 잦아지면서 국외의 유흥, 향락문화의 침습도 적지 않게 받아 이것이 조선족 소비성향에도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이와 같이 중국조선족은 移民집단으로 어려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한편 이민(移民)의 특성을 많이 띠였다. 이민성에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현시를 중요시하며 즉시 향락(享樂)하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이민성은 조선족의 소비문화에서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우에서 언급한 저축성이 약하고 생산성 투자보다 소비성 비용이 더 많으며 내일을 생각지 않고 즉시 향수(享受), 즉시 행락(行樂)하는 생활방식 등은 이민성의 노출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오늘의 생활에 집착하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은 소비경향을 짙게 하였다. 하지만 조선족이 중국국민으로 중국에 정착된 사실은 어떤 국제관계의 돌변이 발생하지 않은 한 개변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단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될수록 빨리 이민성향에서 벗어나 원래 역사적 뿌리가 깊지 않는 조선족은 중국에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닦고 민족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비가 없으면 생산도 필요 없듯이 소비는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하나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량한 소비, 과도한 소비현상은 인간의 나태함을 조장하고 사회의 재부를 랑비할뿐만 아니라 각자의 자금축적과 확대생산에도 아주 불리하다. 따라서 불량소비현상은 조선족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큰 장애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경제생활에서 불량한 소비경향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소비관념을 새롭게 정립하여 민족성원들이 자신의 경제력을 잘 키워 민족경제실력을 강화함으로 조선족사회가 중국에서 흔들리지 않은 입지를 세우는데 큰 힘을 이바지해야 한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12    땅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정신철13) 댓글:  조회:4425  추천:127  2007-09-20
땅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      현재 도시화와 국외진출에 따른 인구이동으로 조선족농촌은 날로 축소되어가고 있다. 농민들의 대량적인 리농현상은 사회발전의 추세라고 하나 민족집거지 농촌 땅의 소실은 민족의 운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민족집거지 농촌의 땅은 민족적 삶의 기반이며 민족적 특징을 지키면서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었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조선반도를 떠나서 중국 동북땅에 발을 붙이기 시작할 때 빈주먹밖에 없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당시 그들은 봉건세력의 압박과 착취, 동북지역의 렬악한 자연환경, 마적들의 무자비한 략탈 등의 어려움을 견디면서 억척스럽게 황무지를 개간하고 집거촌락을 세우면서 타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시작이 100여년의 세월이 지나가면서 현재는 중국 56개 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공인받는 우수민족의 하나로 되었다.    조선족이 중국의 우수민족의 하나로 부상될 수 있었든 주요한 리유의 하나가 바로 조선족은 시종일관하게 민족교육을 중요시함으로 교육보급수준이든가 인구당대학생비례이든가 모두 중국에서 으뜸되는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민족교육의 진행과 발전은 민족집거지 농촌과 갈라놓을 수 없다. 민족집거지 농촌은 민족교육의 주요한 장소이었으며 민족의 언어, 문자보급과 민족성 보존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민족집거지 향촌은 민족교육의 근거지로 자기 사명을 착실히 리행하여 왔다. 때문에 민족교육에 있어서 민족집거지 향촌의 중대한 기여를 어떻게 평가하여도 과분하지 않다.    그럼 이러한 민족집거지 농촌의 현 상황은 어떠한가? 개혁개방의 흐름속에 조선족농촌도 몰라보게 변화되었고 도시진출, 국외진출 등 인구이동 원인으로 농촌인구감소와 토지양도문제가 아주 돌출하게 대두되었다. 인구이동으로 민족촌 책임자 선출마저 힘들어졌고 타촌, 타지역 한족들이 조선족촌 토지를 임대한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이 가운데 토지양도는 응당 신중하게 처리하여야 할 문제가 아닌가?  민족집거지 농촌의 토지는 우리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것으로 민족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땅을 무분별하게 타민족에 양도할 경우 시간이 흘러가면서 소실될 가능성이 많다. 때문에 토지양도에서 본 마을, 본 민족에게 우선적으로 양도하고 될수록 타민족에게는 양도하지 말아야 후환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농촌토지정책을 보면 농민 매 개인에게  토지사용에 대한 권리를 더 부여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자의 권리는 더욱 확대되고 토지를 잃은 사람은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륜락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현재 많은 조선족농민들이 토지를 한족에게 양도하고 도시로, 국외로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당사자들은 눈앞의 물질이익을 향유하고 상대적으로 윤활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 또한 토지상실로 도시빈민으로 추락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마치도 자본주의 원시축적시기 “圈地运动”으로 인한 파산된 농민들이 도시무산자로 륜락하듯이 우리가 토지를 잃으면 역시 이러한 운명 피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도시진출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 정말 “소작농”이 아니면 도시빈민으로 되는 신세밖에 다른 출로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 우리가 농촌의 땅을 상실한 경우 민족적으로는 설자리를 잃은 것과 같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볼 때는 지금의 당사자들은 아무리 하여도 문제가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 후세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을 경우 성공한 자들은 다행이지만 출로가 없는 자들의 경지는 아주 어렵게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 현 시대 사람들의 잘못으로 그 후세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중국조선족은 정말 순환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선조들이 중국동북에 이주 와서 삶의 터전을 개척할 때 모두 빈곤한 농민이였다. 그들은 억척스럽게 싸워 삶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현재 도시화과정에서 땅 잃은 자의 후세들이 도시무산자로 되었을 때 역시 빈곤의 처지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중국조선족이 빈곤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아 결국은 우리선조들이 피땀을 헛되이 흘렸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즈음에 와서 우리는 도시화과정에서의 득과 실을 재삼 따질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럼 우리에게 민족집거지 농촌의 땅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필자는 본다. 우리는 현재 아무리 도시화과정은 필연적이라고 말하지만 농사지어야 할 사람은 역시 있어야 한다. 도시에 나갈 사람은 도시에 가고 남아 있는 사람은 역시 농사를 짓는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시진출농민들은 자기 담당의 토지를 남아 있는 조선족에게 맡겨 두고 절대로 타민족에게 맡겨두지 말아야 한다. 남아 농사짓는 사람은 될수록 규모경영의 길을 모색하여 적은 사람이 많은 농사를 질수 있도록 강구하게되면 수익도 더 많아 질 것이다. 우리는 농사를 짓는데 현존의 유익한 조건과 정책을 충분히 활용하여야 한다. 현재 중국정부는 농업, 농촌, 농민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농업발전과 농민들의 생활수준인상을 위하여 많은 우혜적인 정책제안들을 추진하고 있다. 례컨대 농업세 면제와 농업보조금 지불이든가 농촌의 의무교육을 지원하고 학잡비 등을 면제해 주는 정책이든가 새농촌건설사업추진 등은 조선족농촌에 현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아주 좋은 여건과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책과 기회를 활용하여 우리농촌을 더욱 아름답게 건설하고 민족집거지 농촌의 땅을 지키는데 유력한 힘으로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가령 땅을 잃고 집거지가 없을 질 때 우리민족은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 모두 심사숙고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1    조선족사회, 어디로 가야 하나? (정신철12) 댓글:  조회:4400  추천:95  2007-09-10
조선족사회, 어디로 가야 하나?정신철 필자가 처음 조선족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는 20세기 90년대 중반이후였다. 그 때는 조선족사회에서 개혁개방이후 나타난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위기설”, “해체설”이 돌기 시작한 이후이었고 필자 또한 이에 대응하여 당시 조선족사회에 로출된 문제를 중국의 개방과 도시화과정에서 불가피면적인 “진통”이라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이미 10년좌우의 시간이 지난  현재 조선족사회는 더욱 어려운 사정에 부딪치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이것을 아직도 “진통”속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지? 다른 한면 “진통”이 아니면 또 무엇이지? 조선족사회는 정말로 “위기”상태에 처하였는지?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에게 조선족사회발전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물음을 던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엄청 난 변화를 초래하였다. 조선족사회는 인구의 대량적인 류동, 민족집거지의 인구감소, 농촌실체의 약화, 민족교육의 축소 등 어려움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 뿐만은 아니다. 조선족사회는 개방과 도시화과정 및 국외진출에서 경제적 실력을 키워왔고 새로운 관념과 시대의 흐름을 터득하였으며 중국사회 및 지역발전에 대한 공헌도 이전 못지 않게 하였다.   조선족사회는 중국 개혁개방의 앞장에 섰기 때문에 개방과 도시화과정에서 새로운 문제, 새로운 곤란이 기타민족 먼저 우리민족사회에 대두하였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에 당황하지 말고 문제에 대한 참다운 해결방안을 강구하여 민족발전과정에 나타난 문제들을 원활히 풀어 나가야  할 시점에 도달하였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여기서 몇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 하나는 현재 조선족사회의 어려움을 어떻게 리해하는가에 대하여  “진통”시간이 다소 길다는 감이 없지 않으나 필자 역시 “진통”속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지금에 와서 중국 기타민족사회에서도 우리가 이미 체험한 문제점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조짐을 보면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우리민족 특유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은 발전과정에서 겪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진통”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치를 어떻게 확정할 것이며 집거지 농촌의 토지 어떻게 보존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조선반도에서 이주 온 우리 조선족은 중국에서의  력사는 불과 백여년밖에 되지 않지만 이미 중국에 뿌리를 튼튼히 박았고 혼신의 정열을 기우려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 사회주의혁명 및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피와 땀을 수많이 흘렸으며 중국에서 공인하는 우수한 민족으로 발돋움하였다. 현재 우리민족이 잠시 어려움 처지에 있을지라도 중국에서의 이러한 기반은 민족자신이 먼저 흔들리지 않으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자신이 당황하지 말고 여유있게 나타난 문제들을 윤활히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중국에서 조선족의 확고한 위치는 집거지 농촌의 토지보존과도 관련된다. 집거지 농촌은 우리 선조들이 당시의 사회체제, 렬악한 자연, 마적들의 략탈 등 어려움을 이겨가면서 성스럽게 개척한 땅이고 생활의 터전이였다. 우리는 이 터전 때문에 민족고유의 특징을 살리며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다. 사실 민족집거지 농촌은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큰 기반으로 되어 주었다. 가령 과거 민족집거지 농촌이 없었다고 한다면 현재 조선족은 운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민족집거지 땅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튼튼히 지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민족성원가운데서 과거 자본주의 원시축적시기 파산된 농민들이 도시 무산자로 륜락하는 운명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셋째,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한국은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혈연의 발상지로 갈라놓을 수 없는 연대감을 갖고 있다. 중한수교와 경제문화교류의 물꼬가 확 터인 현시점에서 조선족은 한국, 한국인과의 교류연대 및 한국진출로 민족의 정을 돈득히 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 이러한 와중에 일련의 불화합음도 없지 않았는바 례컨대 일방적인 기대감과 무작정의“코리안 드림”, 국민성의 약화, 투기와 사기행위 급증 등 많은 현안들이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즉 한국은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우월한 외부조건이다. 이것은 중국 기타민족이 부러워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중심이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 모든 것을 한국에 의거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정립에서 조선족은 응당 자주성을 수립하고 자체중심을 강조하는 동시에 한국이란 우월한 외부조건을 민족발전에 활용하여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 더 빨리, 더 크게  발전하는 계기로 되게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민족의 분산화 와중에서 어떻게 민족적 특징을 보존, 전승할 수 있는지? 현재 조선족사회는 다그치고 있는 중국의 도시화과정에 합류하여 도시진출에서 앞장서고 있으며 조선족사회의 도시화정도는 중국에서 제일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농경민족인 조선족은 농촌에서 집단적으로 생활을 영위하여 왔기 때문에 민족적 특징을 상대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화과정에서 과거 농촌의 집단적 생활방식은 점점 해체되고 도시진출의 농민들은 점점 분산 거주하게 되었다.    중국 특정의 환경에서 도시화는 소수민족의 분산화정도를 재촉함으로 민족적 특징의 보존전승문제가 민족발전에서 새롭게 대두하게 되었다. 조선족사회도 인구이동과 도시진출 등 과정에서 민족거주상태가 날로 분산되면서 민족적 특징의 유지, 전승이 날로 어렵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반면에 민족특징은 한 개 민족이 타민족과 구별하는 주요한 요소로 민족특징의 약화는 민족동화를 재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민족이 존재하려면 민족특징을 보존, 전승하여야 한다. 민족특징보존에는 민족의 상대적 집거지조성, 민족적 활동의 광범위한 조직, 민족적 긍지감과 자신심 고양 등에 주목하면서 민족성을 강조하고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의 매체, 우리의 지성인들이 응당 큰 역할을 하여야 한다.    중국조선족사회는 현재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 인구이동과 도시화 등에 따라 나타난 어려움을 발전과정의 “진통”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에 잘못 대응하면 위기를 초래할 위험도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위치, 현 상태 등을 잘 파악하고 우세와 약세를 명확히 나누고 이에 대한 정확한 대책을 탐구함으로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 더욱 튼튼한 입지를 조성하는데 우리 모두 힘써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조선족발전가운데 어려움도 많지만 발전의 촉매제도 적지 않다. 우리는 이미 20여년간의 발전축적이 있으며 발달국가로 향한 고국--한국이 있다. 더욱이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정확한 민족정책, 최근에 와서 농업지원정책, 농촌교육지원정책 등이 새롭게 실시되면서 과거의 농촌발전 부진으로 인한 농토포기, 자녀교육부담으로 인한 생육포기 등 현상이 많이 줄게 될 것이며 이는 조선족농촌발전, 조선족인구감소문제해결 등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예상된다. 따라서 우리는 상술의 각 항 정책과 우월한 외부환경을 활용하여 민족의 더 큰 발전에 뒷받침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집거지 농촌토지 보존, 민족적 특징 유지 등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미 있는 것을 보존, 유지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우나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는 점이다.   이상의 글은 문제제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 것인즉 전체 민족의 지혜를 합치여 우리 민족발전과정에 현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윤활히 해결하고 민족의 더 빠르고, 더 큰 발전에 약간의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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