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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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선족농민과 토지도급경영권에 관하여 댓글:  조회:3080  추천:3  2013-12-26
조선족농민과 토지도급경영권에 관하여            ----중공중앙 제18기 3중 전체회의  과 더불어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1. 날로 좋아지는 농촌정책     중국력사의 몇 천년 흐름속에 토지와 농민의 관계는 제일 중요한 사회생산관계와 경제관계라고 하겠다. 중국 력대 왕조들의 성쇄흥망은 거의 다 통치자들이 토지와 농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토지와 농민의 관계를 원활히 처리하려고 노력하여왔다. 신 중국 건립과 더불어 농민들은 지주계급의 압박과 착취를 벗어나 토지의 주인으로 되었다. 이것은 사회생산관계의 중대한 변혁을 초래하였고 사회생산력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과거 “3급소유, 생산대가 기초”인 농촌집체토지소유제는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을 저해하였다.  개혁개방이후 농촌에서 실시한 “토지도급제”는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을 크게 자극하였고 농업생산력발전을 추진하였다.  이 후 중국정부는 항상 농업, 농촌, 농민문제를 중요시하였으며 농업발전과 농촌실정에 따라 농촌정책을 계속조절하고 새로운 대책들을 마련하여 농민들의 생산과 생활수준제고에 주력하여 왔다.  개혁개방 30여년간에 중국정부는 농업, 농촌, 농민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중요한 정책을 제정하였고 중공중앙과 국무원의 각년에 발표하는 문건가운데 제1호 문건으로 농촌문제주제를 다룬것만 해도 15개나 된다. 중공중앙 “1호 문건”은 각기 부동한 시기 “3농”문제를 파악하고 농촌발전과 농민들의 물질적 리익보호에 심혈을 기울렸다. 때문에 “1호문건”은 지금에 와서 중공중앙이 농촌문제를 중요시하는 전용명사로 되기도 하였다. 1982년 중공중앙 “1호 문건”에서는 일부농촌에 나타난 “토지도급”현상을 긍정하면서 농촌개혁의 중대한 정책으로 토지경영권을 농민들 개인에게 직접 부여하였다. 그후 일련의 “1호 문건”(1983-1986년, 2004-2008년)은 농민들의 생산자주성과 경영자주권을 강조하고 농업에 대한 투자를 증가하며 농민들의 부담을 감소하는데 주력하였다.     2008년 10월에 개최된 중공중앙 제17기 3중 전체회의에서는 전문적으로 농촌문제를 토론하고 《농촌개혁발전을 추진하는 약간의 중대한 문제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를 체결하여 농촌발전문제를 깊이 다루었고 농촌의 기본경영제도의 안정과 개선을 강조하고 농민들에게 더욱 충분하고 보장적인 토지도급경영권을 부여하여 현재의 토지도급관계의 안정을 유지하고 장구불변한다는 원칙을 강조하였으며 농업경영방식을 전환하고 농민들의 련합과 합작으로 조직화수준을 높이며 전문적인 합작사의 발전을 부축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에도 해마다 3농문제에 관한 “1호문건”을 발표하였으며 2013년 1호문건에서는 토지를 전업농호, 가정농장, 농민합작사에 류전하는 것을 권장하고 지지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가정농장”개념은 이 번 “1호 문건”에서 처음으로 거론되었다.  특히 얼마전에 개최한(2013년 11월12일) 중공중앙 제18기 3중전체회의에서 통과한 은 중국개혁발전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계기로 되였으며 농촌개혁발전의 새장을 열기고 하였다. “3농”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제18기 3중 전체회의에서는 도농 이원구조해결에 입각하여 일련의 농촌토지제도개혁을 심화하는 조치를 제출하였다.  “3농”문제는 중국미래와도 관련이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은 농업의 발전, 농촌의 진보와 농민의 행복을 둘러싸고 일련의 개혁조치를 제출하였으며 이 가운데 농촌토지개혁이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에서 두 가지가 농촌집체토지제도개혁과 집적 관련있는바 하나는 도농통일의 건설용 토지를 확립하고 또 하나는 농촌토지의 집체소유권을 견지하고 농민들에게 도급토지의 류전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에서는 “통일적인 도농건설용 토지시장을 만들고 기획과 용도제한에 부합되는 전제하에 농촌집체경영성 건설용지의 양도, 임대, 주식가입에 허락하며 국유토지와 동등하게 입시하고 동등한 권한과 가격을 실행한다”고 명확히 지적하였고 “엄격한 경지보호제도를 견지하고 완벽하게 하는 전제하에서 농민들에게 도급토지의 점유, 사용, 수익, 류전 및 도급경영권의 저당, 담보권한을 부여하고 농민들이 도급경영권으로 주식에 가입하여 농업산업화경영을 발전하는 것을 허락하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것은 에서 명확히 지적한바와 같이 “농민들에게 더 많은 재산권리를 부여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싶이 이번 농촌토지제도개혁의 관건적인 요소는 토지의 류전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명확히 하고 증서를 발급하는 것으로 농민들이 도급경영하는 토지의 장기 불변한 정책을 락실하고 농민들의 주택기지와 가옥의 점유, 사용, 수익, 류전, 저당, 담보 등 권한을 락실함으로 농민들의 토지권익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자신이 경영하는 토지를 류전한 농민들이 다시 신경을 써지 않아도 되며 마음놓고 타곳에서 다른 경영을 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또 “토지류전”에서 생기는 안정적인 수익도 챙길수 있게 되는 것이다. 17기3중 전체회의에서 농민들의 토지경영권 확립에 중점을 두었다면 18기 3중전체회의에서는 농민들의 토지류전문제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농민들의 토지경영권 확립과 류전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토지경영권을 확립하여야 아무리 류전되여도 소실될 념려가 없고  토지경영권이 류전되어야 농민들이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토지경영권확립과 류전으로 시작되는 농촌의 2차 토지개혁은 또 다시 도농사회생산력을 해방하고 도농발전의 활력을 발산하여 발전성과의 혜택이 농촌과 농민들에게 더욱 많이 더욱 공평하게 돌아 가도록 할 것이다.        2. 토지와 조선족농민   과거 조선족은 농업민족이었다. 농민에게 땅은 제일 소중한 존재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전 조선족 선조들은 인적이 드문 중국동북땅에 발을 붙이고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들의 이동는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화전을 일구어 호구양가(糊口養家)의 방편으로 시작하였고 후에는 떼를 지어 중국땅에 이주, 정착하게 되였다.  그들은 원래 황무지였던 동북지역을 비옥한 농토로 만들고 그 추운 동북지역에 벼농사를 성공적으로 시작하고 보급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20세기20년대 길림성의 연변지역과 길림지역의 수전 100%, 통화지역의 85%가 모두 조선족들이 경작하였고 흑룡강성 수전의 100%, 료녕성 개원지역의 90%, 흥경지역과 심양지역의 85%, 무순지역의 80%과 단동지역의 70% 수전은 모두 조선족이 개발하고 경작하였다고 한다. 1930년대초기에 전 동북지역인구의 3%밖에 되지 않는 조선족의 벼농사는 당시 동북의 전체 벼생산량의 90.1% 차지하였다.  동북지역에 벼농사가  보급되고 발전됨에 따라 예전의 밭농사에 사용하지 못하던 진펄 등이 수전경작과 더불어 옥토로 개간되었고 토지경작율도 크게 높혔다. 이와 같이 조선족은 중국 북방지역의 유일한《벼재배민족》으로 중국 북방의 벼재배력사에 빛나는 한 페지를 남기였다.   봉건압박과 제국주의 침략시기 조선족 선인들이 고국에서 가난과 봉건핍박에 의해 국경을 넘어 바람거친 만주땅을 밟았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만주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벼농사의 선두자로 되였지만 자기땅은 여전히 없었고, 이 곳에서 줄곧 피어린 항일운동을 진행하였지만 정치적으로도 위치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가 개간한 땅에서 소작농을 하면서 땅가진 자들의 압박과 착취를 받지않으면 안되였다. 때문에 자기가 개간한 땅의 주인됨은 오매에도 잊지 못 하던 념원이였다.  1945년 동북해방이후  조선족은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분배받았고 토지소유권을 취득하였다. 토지개혁에서 연변지역 9만여가구의 조선족농민들은 12만여헥타르의 땅을 분배받았고 흑룡강성 원 송강지역의 4만여가구의 조선족농민들은 5만여헥타르의 수전을 분배받았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토지문제의 해결은 특수한 의의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토지소유권의 획득은 조선족이 중국에서 토지의 주인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할 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치가 정립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정치적위치를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토지의 주인이 되였다. 땅을 분배받은 조선족농민들은 이전에 땅이 없어서 받은 설음과 땅의 주인으로 된 행복을 대조하면서 공산당의 옳바른 정책을 찬양하였고  더 없는 열정과 책임으로 새중국 건설과 사회주의혁명에 참가하였다.  땅은 인간생활의 터전이고 우리에게 의식주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땅은 인류사회의 공동한 재산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땅은 또한 민족의 특수한 내용이 포함되여 있다.    첫째, 이 땅은 우리민족의 애환이 잠겨있는 곳이였고  또 대대로 삶을 지켜온 증인이기도 하였다. 조선족선조들이 부득불 고향산천을 등지고 중국동북지역에 올때 그들을 맞아준 것은 풀초 우겨진 황막한 산야와 비적들의 략탈  그리고 현지관리의 억압이였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리선조들은 이곳에 자리잡고 수세대를 이어왔다. 다시 말하면 이 곳은 우리선조들의 피와 땀이 새겨있는 민족력사의 장이였다.    둘째, 동북지역은 우리민족의 생활터전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우리선조들은 처음 강을 건너 중국동북지역으로 향하였을때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황무지를 비옥한 논밭으로 개척하였으며 그것이 현재 조선족의 생활터전으로 민족적 생활을 영위하는 무대로 되였다.    셋째, 이땅은 우리가 민족문화를 유지할수 있는 장소였다. 우리선조들이 이땅을 개척하면서 민족성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형성하였기에 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장소가 있었고 민족문화를 고스란히 지킬수가 있었다.    이렇게 선조들이 개척한 땅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것을 남기였다. 이 땅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하였을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장소를 조성하였으며 민족문화를 고스란히 지킬수 있는 근저로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건립이래 조선족농촌의 경제생활이 주위 기타민족보다 더 풍요럽고 민족교육보급수준이 기타민족보다 높은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바로 우리는 조상들이 개척한 땅에 모여서 수전농사를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였다.     3. 토지경영권 확정과 활용에 관하여 개혁개방의 흐름속에 조선족농촌도 몰라보게 변화되었고 도시진출, 국외진출 등 인구이동 원인으로 농촌인구감소와 토지양도문제가 아주 돌출하게 대두되었다. 인구이동으로 조선족촌 책임자 선출마저 힘들어졌고 타촌, 타지역 한족들이 조선족촌 토지를 임대한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어떤 농민들은 외지에 간다고 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토지를 소홀히 하였고 또 어떤 농민들은 일시 목돈을 위해 일차적으로 토지를 한족에게 장기간  양도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농민은 토지양도계약서에 소위 “영원”이란 글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땅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땅을 포기하거나 또는 다른민족들에게 양도하였다.  이 결과 수많은 조선족농촌마을의 절반이상의 토지가 기타민족들에게 의해 경작되고 있으며 농토뿐만 아니라 마을도 점차 한족마을로 변모되 가고 있는것이 지금 우리농촌의 현실이였다.   얼마전(2013년11월말) 흑룡강성 조선족농촌에 대한 현지조사에서 얻은 수자 하나만 실례로 들자. 흑룡강성 230개 조선족마을상황을 보면 조선족인구 186471명가운데 외지에 나간 사람이131324명으로 전체수의 70.4%차지하며 촌에 남은 사람수는 65263명밖에 되지않는다. 토지를 보면 조선족들이 소유한 면적 124.2만무 가운데 조선족자신이 경작하는 면적은 30.6만무로 전체면적의 24.6%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에 임대면적이 85.8만무로 전체면적의 69.1%나 차지하였으며 매매한 면적도 7.2만무로 5.8%차지하였다. 보는바와 같이 조선족농민들이 양도하고 매매한 토지가 거의 전체토지면적의 75%차지하였다. 가옥상황을 보아도 조선족가옥 26495채 가운데 자가용 가옥은 10174채로 전체가옥수의 38.3%이고 한족들에게 판 가옥수가5338채로 전체 가옥수의 20.1%차지하였다.  위의 실례에서 우리는 조선족농촌문제의 심각성을 감안할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90년대 이후 조선족농민들은  분분히 농촌을 떠나 도시와 국외로 진출하였다. 농민들이 더 윤활한 생활을 추구하려고 농촌을 떠나는 것까지는 나무랄 것 없다. 이것은 개혁개방정책의 혜택이였고 인간의 정상적인 추구라고 할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농민들은 선조들이 개척한 땅, 자기가 다루었든 땅을 너무 소홀히 대한 것이다. 그럼 현재 조선족농촌문제에서 응당 해결해야 할일은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중국정부의 농촌토지정책에 의하여 도급받은 토지경영권을 확실히 하고 류전에서 소실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개혁개방초기 토지도급정책을 실시한지 얼마되지 않아 1984년 중공중앙 “1호 문건”에서는 농민들의 토지사용기한을 15년으로 규정하였으며 10년후인 1993년에는30년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2008년 10월 중공중앙 제17기 3중 전체회의에서는 “장구 불변”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이 도급받은 땅은 거의 대를 이어 경영할 수 있다는 정책이다. 그리고 이번 제18기 3중전체회의에서 토지경영권확립을 다시 강조하는 한편 농촌토지의 류전을 권장하였다.   때문에 이 시점에 와서 자기의 경작지 면적을 정확히 측정하고 권익을 보장하여야 한다. 따라서 외지에 나간 조선족농민들은 지금 빨리 서둘러 도급받은 토지의 경계선과 면적을 더욱 명확히 하고  새로운 농촌토지정책에 근거하여 양도 또는 임대 계약을 규범화하여 자신의 토지경영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현재 정책에 의하여 명확히 해놓지 않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특히 1-2 세대가 지나가면 누구도 확실치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과거의 잘못된 계약등을 고치는 문제이다. 우리농민들이 일시적 필요 또는 타지역 진출으로 토지를 소홀히 양도한 경우가 많다. 현재 정책을 보면 과거 어떤 방식으로 토지를 양도했던지를 막론하고 본인 이름으로 된 도급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다. 때문에 먼저 국가에서 제정한 농촌정책을 참답게 리해하고 “법에 따라 농민들의 토지 점유, 사용, 수익등 권리를 보장하고”, “농촌토지에 대한 권리확정, 등록, 증서발급제도를 참답게 해야하다”는 정책에 근거하여 정부의 도급경영권확정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과거 잘못된 계약등을 새롭게 고쳐야 한다. 그리고 민족집거지 농촌의 토지는 우리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것으로 민족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땅을 무분별하게 타민족에 양도할 경우 시간이 흘러가면서 소실될 가능성이 많다. 때문에 토지양도에서 본 마을, 본 민족에게 우선적으로 양도하고 될수록 타민족에게는 양도하지 말아야 후환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토지경영권 활성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제18기 3중 전체회의 에서 제정한 농촌토지정책의 중요한 내용이 토지경영권의 활성화이다. 즉 농민들이 토지경영권을 중도 이전, 임대, 양도, 주식합작등 형식으로 류전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지경영권의 류전을 권장하고 활성화를 제창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토지경영권을 양도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농업합작사형식으로 토지에 대한 규모경영을 할수 있고 토지를 주식화하여 수익분배에 참여할수도 있는 등 여러 방법이 있다. 우리농민들은 토지경영권의 류전을 빌어 더 큰 수익을 기대할수 있기 때문에 토지경영권 활성화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네 번째는 가능하면 토지경영권확대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중국의 농촌정책은 갈수록 농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가고 토지사용권도 더욱 확대되리라고 믿는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 차례진 토지경영권을 소중히 여길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여 힘이 닿는 대로 토지경영권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농민들은 자신이 농장주가 되고 목장주가 되는 꿈도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의 농촌토지정책을 보면 농민 매 개인에게  토지사용에 대한 권리를 더 부여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자의 권리는 더욱 확대되고 토지를 잃은 사람은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륜락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토지를 잃으면 역시 이러한 운명 피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족농촌토지는 우리의 중요한 자산이고 땅을 잃을 경우 우리의 설자리가 좁아진다. 때문에 이러한 땅을 우리는 소중히 여기고 튼튼히 지켜야 한다. 
18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하여 댓글:  조회:3370  추천:2  2013-08-01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하여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목 차   1. 민족정체성이란?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3. 조선족사회의 형성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5. 조선족의 미래전망     요약문: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활발한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한국을 비롯한 해외진출은 민족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동시에 급속한 인구이동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하였는바 이는 민족적 정체성유지와 강화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이 살아남려으면 정체성을 상실하여서는 않된다. 그러면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으며 현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고 또 앞으로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겠는지? 본 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간략한 답이라고 할수 있다. 주제어: 조선족,  조선반도,  민족정체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온 이민자 및 그들의 후손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원천적인 것으로부터 이민 온 지역의 상황에 의하며 일정한 변의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 중국적 요소가 많이 첨가된 탈조선반도적인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이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반도주민과의 “同源”이라는 전통적인 연대성은 무시할 수 없다.   1. 민족정체성이란? 정체성이란 심리학적 개념으로 영어 “identity”와 중국어 “認同”과 서로 통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많으나 주요하게 신분 및 자아동일성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 뜻인즉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 또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으로 한마디로 귀납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민족정체성이란 무엇인가? J.Carla와 J.Reginald는 민족정체성은 개인이 자기민족에 대한 신념, 태도 및 민족신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①]J.Phinney는 민족정체성은 복잡한 구조의 하나로 민족에 대한 귀속감와 승낙, 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및 민족활동에 참여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②] 종합하면 보면 민족정체성이란 인간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에 대한 깨달음과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과 믿음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세상은 종족, 민족 등 여러 인간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바 민족은 여러 공동체가운데서 제일 상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족은 혈통적인 연대감과 같은 언어,  같은 경제, 같은 지역 그리고 동일한 문화기초위의 같은 의식 등 여러 공동적 요소를 구비한 인간공동체이다. 그리고 민족이 형성되기까지는 오래 역사를 경과하였기때문에 민족은 상대적인 안정성을 갖고 있다. 매개 민족은 자아민족이 소유한 특징으로 기타 민족과 구별된다. 여기서 민족정체성이 거론되는데 그 뜻인즉 주요하게 자아민족에 대한 깨달음으로 소속 성원들이 본인은 어느 민족에 귀속한다는 의식 또는 태도을 말한다.  민족정체성은 타민족과의 만남과 부딪침에서 더욱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민족정체성은 자아민족에 대한 신념과 귀속감이 커가면서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민족정체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므로 사회발전과 민족이 처한 상황의 변화함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되고 해체되어 새롭게 생성될 수도 있다.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국가정체성은 국민들이 국가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고 민족정체성은 민족성원들이 자아민족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한 근대적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근대 국가는 서방 자산계급의 힘에 의하여 처음 수립되었다. 당시 봉건사회말기에 산생하여 성장한 자산계급은 “자유”, “민주”, “박애” 등 정치적 구호로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건세력을 뒤엎고 근대적 국가건립에 성공하였다. 이 때 출현한 국가는 근대 민족주의기치하에 세운 단일민족의 국가로 민족국가라고도 한다. 이러한 민족국가정체성은 민족정체성과 통일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이후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폭발한 민주, 민족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단일민족국가가 아닌 다민족국가이었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이 꼭 일치하다고 할 수 없다. 국민으로서 그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 등은 여러 민족들이 모두 소유하고 있으나 개별 민족으로서는 그 민족에 대한 귀속감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국가정체성은 상위이고 민족정체성은 하위이며 민족정체성은 반드시 국가정체성에 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다민족국가의 분열 또는 동란 등이 생길 수도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아도 일부 민족내부의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의 경향하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모순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민족국가의 차원에서는 국가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족정체성을 약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③] 3. 조선족사회의 형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 이민에 의하여 형성된 조선민족의 한 갈래이다. 지연적 관계로 중국과 조선반도국가와의 왕래는 오래전부터 진행해 왔다. 이 가운데 인적교류도 아주 활발하였으며 많은 경우는 그들이 상대방지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점차 그 지역 민족공동체에 동화되어 원래 소속된 민족공동체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현재 조선족의 대부분은 19세기 중엽이후 중국동북에 이동,이주와 더불어 정착한 조선인 및 그들의 후손들이다. 특히 청나라의 봉금정책해제와 일본제국주의 조선침략은 더 많은 조선인들의 중국진출을 부추겼다. 하여 중국재류의 조선인이 제일 많을 때 200만명을 초과하였다. 1945년 8월 일본패전이후 광복의 환희속에서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이 조선반도로 귀환하였다. 동시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계속 남게되었다. 이 부분의 조선인들이 중국 국내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을 겪어면서 중국정착의 경향이 날로 강해졌다. 당시 그들은 토지를 배분받았고 지방정부의 관리간부로 많이 발탁받았다. 예컨대 중화인민공화국설립직전에 “동북조선인민의 95%이상을 차지한 농민은 모두 마찬가지로 토지 마소와 가옥을 나누어가지었다.” 그리고 “전동북조선인민의 74%을 차지한 길림연변지구에 있어서 전원공서로부터 구촌에 이르기까지 절대 대부분이 모두 조선인민이 자기로 선거한 조선간부이다.”[④]이와같이 동북재류의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법적으로 중국조선족에로의 전환을 완성하였다. 조선족 선조들은 중국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국동북변강지역을 개척하였고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에 앞섰으며 국내해방전쟁에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족이 중국 다민족국가의 일원으로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원의 하나인 동북조선민족은 바로 간고한 30-40년 반침략의 혁명역사투쟁의 과정에서 수 많은 피를 흘렸고 수 많은 생명을 희생하였으며 부지런히 생산하고 열심히 전선을 지원하여 항일전쟁과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면서 자연히 형성된 것이다.”[⑤]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과 확립은 일정한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이란 불안정한 이동, 이주에서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실현된 안정적인 정착까지를 말할수 있다.   (1) 이동, 이주와 정착과정에서 조선족정체성의 형성 조선족선조들이 두망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오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우선 생활난이었다. 당시 만주의 넓은 땅과 풍부한 물산이 그들을 유혹했을 뿐 언제는 꼭 조선반도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체성은 원천적인 조선반도적인 성향, 즉 “나는 조선인이다”는 관념이 아주 농후하였다. 그 후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중국에 “귀화입적”한 경우도 있어 점차 정착성향도 뚜렷해 졌다.[⑥] 하지만 민족정체성은 여전히 조선반도적인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중국땅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항일투쟁을 진행하면서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보지 않고 언제가 조선반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하여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재류조선인들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국광복의 기쁨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조선반도로 돌아간 것이다. 동시에 중국에 체류한 조선인들의 중국적인 요소도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신문기사을 통하여 중국체류 조선인들의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전의 중국정착취향을 볼 수 있었다.[⑦] 특히 일본패망이후 귀환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중국국내해방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토지개혁과정에서 토지를 부여받으면서 중국정착을 고정화시켰으며 민족정체성도 탈조선반도적인 중국적 경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조선족 국적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한 중공중앙 東北局은 1945년 9월말에 조선족의 상황을 역사적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 곳의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그들은 한족과 같이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⑧] 1946년1월1일, 당시 연변전원공서 부 전원인 동곤일은 새해《신년헌사》에서 “현재 우리 연변지역의 민주정권은 이미 건립되었다. 의심할 바없이 연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은 반드시 정부의 법령을 준수하여야 하며 동시에 정부의 법률적 보호를 받는다. 중국국적에 가입하려는 한국인은 입적할수 있으며 중화민국 국민으로 될수 있다. 이렇게 조족(朝族)은 중화민족가운데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될수 있다. 우리정부는 민족평등원칙에 근거하여 조선족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와 문화상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며 민족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똑같이 존중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⑨] 1948년 8월 중공 연변지역 위원회에서는 결의문을 작성하고 연변 조선민족인민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였다. 이 결의문에서 “우리 당과 정부가 연변조선민족인민을 중국경내의 소수민족 지위를 비준한 이 정책은 어디까지나 옳다”고 강조함과 동시에 “이 민족은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의 특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승인하여야 한다”고 하였다.[⑩] 그리고 조선족과 조선 僑民간의 구별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였다.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인민으로서 호적이 있는 사람은 공민이며 잠시 내왕하는 처지로서 호적이 없는 사람은 교민이다. 정부의 허가를 거쳐 이주해 갔다가 다시돌아 온 사람, 우리측 고급정부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최근에) 이주해온 자는 교민이다. 가족이 조선에 있지만 가장과 재산이 연변에 있는자는 정부의 허가를 거쳐 공민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공민과 교민은 권리 및 의무상에서 구별되어야 한다.”[11] 결의문에서 중국조선족과 조선교민의 표준에 대한 명확한 지적은 중국조선족정체성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조선족정체성의 확립 1949년 10월1일 북경천안문성루에서 모택동주석은 전세계를 향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포하였다. 이 직전에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가 동북조선인민대표로 1949년9월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권리대행 기구) 제1차회의에서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까지 참석하였다. 동시에 동북지역의 조선인 사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동북의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족간부들이 많이 발탁되었고 연변대학, 연변조선족 고급중학교 등 조선족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더우기 1952년 “연변조선민족 자치구”설립과 더불어 기타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민족 자치향, 자치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이 모든 것은 조선족이 이미 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법적 확립은 되었으나 관념적으로나 실지적으로는 좀 늦었다. 당시 조선과의 연계도 밀접하였고 “조선인”, “조선인민”, “조선민족” 등 칭호가 “조선족”보다 더 많이 사용하였다. 1948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건립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에 간 중국동북조선인민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주석은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기원하는 중국동북 재류동포들의 성원과 대표단일행의 래조를 환영”한다고 하였고[12] 12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조선민주건설사진전”을 보도하는 기사에서는 “조선관중들은 조국의  승리적 발전에 무한한 감격과 흥분을 느끼게 되었고 중국관중들도 세계민주진영의 일환으로소 조선의 비약적 발전에 경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13] 연변대학을 창설할 때 이를 “동북조선인민대학”으로 가칭하였고 “동북경내 재주조선인 최고학부”라고 일컸다. [14] 그리고 조선을 “동북에 있는 조선민족의 민족조국이면 세계화평민주진영의 일환”이라는 기사보도가 있었고[15]조선전쟁시기 “동북의 수많은 조선인민들 조국의 자유독립을 보위키 위해 조선전장에 자동적으로 떠났다”[16]는 기사도 우리말 신문에 보였다. 여기서 보다시피 당시 조선족은 “조국”문제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특히 조선전쟁시기 중, 조 양국의 조선민족사이에 있은 빈번한 이동은 “고국”, “모국”과 “조국”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였고 “중국은 인민 조국이요 조선은 민족조국이다”말도 있었다. 하지만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조국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을 통하여 조선족가운데 존재하는 “다 조국론”, “민족조국”, “법률조국” 등 모호한 이해를 기본상 해결하였고[17] 기타 조선족지역에서도 조국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비판함에 따라 조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였다.[18] 이러한 것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확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농업합작화 운동, 사회주의 개조와 문화대혁명 등을 겪어면서 자신의 중국국민성과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수립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에게는 탈조선반도적인 중국국민의식과 중국다민족가정의 일원인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보다 강하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반도주민과의 “同一源流”의 전통적인 연대감을 완전히 털어버릴수는 없다. 20세기 90년대말 필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6%이상의 응답자가 조국을 “중국”이라고 적었고 “중국 조선족의 귀속”이란 물음에서는 응답자의 73%가 “중국”이라고 하였다.그리고 “기타 민족과의 교류에서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점을 표명하는가”하는 물음에서 79%의 응답자가 “떳떳히 밝힌다”다고 하였고 신문매체에서 기타 민족이 조선족의 우수성을 언급할 때  응답자의 97%이상이 “자긍심을 느낀다”고 답하였다. [19] 이와 같이 조선족에게는 중국국민이란 의식과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이미 깊어졌다. 이러한 의식속에서 조선족은 중국국민으로 중국사회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주류사회진출에도 게으러지 않았다. 조선족가운데 중국국가급 영도자가 나오고 정부장관이 나왔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중장, 소장 등 장군계급을 지닌 사람들도 10여명 산생하였고 또 10여명의 정부 차관급과 수 백명의 국장급 인물들이 나왔으며 또 수천, 수만명의 대학 교수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와 기술인원들이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우주선발사, 위성발사 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선족과학자도 있었다. 조선족은 민족적 긍지감를 갖고 중국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평등한 중국의 민족정책하에 민족언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키워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는 공식사용문자를 조선어로 규정하였고 수 십개 민족향에서도 민족자치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 집결한 동북 3성과 내몽골에서 수백, 수천개의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가 있으며 조선글 출판사, 조선어 방송국, 조선족 문화관 등이 설립되 있다. 이러한 것은 민족언어 유지와 민족문화 전승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민족정체성 강화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조선족은 중국사회의 흐름에 따라 개혁개방까지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3)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정체성의 변화양상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인구이동에 따른 거주 분산화, 민족집거지역의 슬럼화, 민족교육의 급속한 축소, 한국과의 교류 등은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많은 변수를 초래하여 다중양상을 보였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시기에 따라, 대상에 따라 강화-약화-강화의 교체가 반복되었다. 하나는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중국 기타지역으로 진출한 경우 그 당사자들의 기타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더욱 체감하였고 또 사업과정에서는 민족적 차별감도 느끼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강화되는 한 면 의식적으로 민족성을 감추려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민족정체성은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한국의 성장과 중국진출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강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민족정체성 약화의 돌출한 현상은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민족교육을 받을 여건과 기회가 없어 민족언어과 민족문화를 터득하지 못하고 민족의식이 점차 희미해짐에  따라 민족에 대한 애착이 날로 멀어져 가고 민족정체성도 약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였다. 이들에게 처음에는 중국국민의식보다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앞섰고 코리안 드림에 많이 기대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한국에서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심각한 차별과 편견을 느끼면서 한국에 대한 기대는 날로 약해지고 한민족이라는 의식보다 중국인, 그리고 중국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더욱 강해지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경우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느끼면서 돈을 벌려고, 좀 더 자유로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친척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한국국적가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들에게는 중국국민과 조선족이라는 정체성보다 생존과 이익이 더 우선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정체성이라는 것도 매 개인의 실제적 이익앞에서는 한순간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조선반도적인 특징과 중국적인 특징으로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현재 논란도 일고 있다.[20] 일부에서는 조선족정체성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소위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서 언급한 “중국공민”과 “조선민족”의 개념은 동차원의 개념이 아니며 특히 중국에서는 상하위 개념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등하지 않은 두 개념을 합쳐서 조선족의 “이중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것이 성립되면 중국의 56개 민족이 모두 “이중성”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않겠는가?   5. 조선족의 미래전망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민족의 생존과도 연관된다. 조선족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적 입지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민족정체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민족적 지혜가 필요하면 민족적 힘을 키워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볼 때 조선반도주민들과의 연대감도 강화하여야 한다. 도시화와 세계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이미 중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은 중국의 도시화과정에 발맞추어 과거 농경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하고 세계화의 흐름속에 고국인 한국과의 유대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서로의 이해와 신뢰를 쌓고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의 많은 부정적 결과는 한국을 향한 코리안 드림이 아주 큰 화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정부의 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또는 차별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한국정부는 명확하고 무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을 제정하여야 하며 (현재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조선족입지를 튼튼히 하는데 힘을 기우려야 한다. 다음 조선족자신도 경제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 경제력에 커짐에 따라 도시의 집거지역도 조성할 수도 있고 민족학교도 세울수 있으며 문화활동장소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것 모두가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는 우리 모두 “한 민족”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조선족의 정체성, 한국과 조선의 민족정체성, 제일 조선인의 정체성 등을 떠나서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세계적인 민족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재외동포들이 더욱 많이 한국에 진출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로 진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는 “한국인”이고 나는 “조선족” 또는 “재일 korean”이다고 따지지 말고 현지에서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여 공통적인 민족전통문화를 살려서 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중국의 예로 현재 한국에서 중국진출한 사람들이 수십만이 된다. 앞으로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도 동북 집거지역을 떠나 산해관이남으로 수 십만명이 진출하였다. 도시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민족집거지역 형성이 아주 중요하다. 일정한 민족인구의 집거지역이 생기면 민족교육의 장소가 점차 형성될 것이고 민족교육이 가능하면 더 많은 조선족이 몰려 올 것이 당연하고 한국인들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시에서도 민족문화를 꽃피우고 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돈득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발전은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다.   참고문헌   陈明: “中国东北境内的朝鲜民族”, 『人民日报』1950年12月6日。 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局(館):『中共延边吉敦地委延边专署重要文件汇编』(1945.11-1949.1)第一集,1985. 朝鮮族簡史編寫組: 『朝鮮族簡史』, 延邊人民出版社, 1986. 韓俊光 等 主編『中國朝鮮族歷史硏究論叢』Ⅱ,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2. 崔洪彬 主編『朝鮮族硏究論叢』4, 연변대학출판사, 1995. 韓俊光,『朝鮮族』, 民族出版社, 1996. 조룡호 박문일 주필,『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발전방략연구』, 요녕민족출판사, 1997. 홍만호: “한국나들이와 도시진출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있는가?” 『문화산맥』2,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7. 金钟国 主编:『党的民族政策与延边朝鲜族』,延边大学出版社,1998. 정신철, 『중국 조선족사회의 변천과 전망』, 요녕민족출판사,1999. 최우길: “중국 조선족의 정체성 변화에 대한 소고”,『재외한인연구』제8호(1999) 김강일 주필,『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연변인민출판사, 2001. 정신철: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 도서출판모시는 사람들, 2004. 황유복: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중국조선족사연구』2009, 민족출판사,2011     [①] Carla J., Reginald J.,“Racial Identity, African Self-consciousness and Career in Decision Making in African American College Women,”Journal of Multicultural Counselling and Development, 1998 Vol. 26(No. 1)참조。 [②] Jean.S.Phinney., “ Ethnic Identity in Adolescents and Adults: Review of Research” Psychological Bulletin, 1990,Vol 108(No. 3)참조     [③]戴晓东:《浅析族裔民族主义与公民民族主义》,《现代国际关系》2002年12期;陈晓婧:《浅析中华民族多元一体格局中的民族认同》,《广西民族研究》2005年4期;钱雪梅:《从认同的基本特性看族群认同与国家认同的关系》,《民族研究》2006年6期;都永浩:《民族认同与公民、国家认同》,《黑龙江民族丛刊》2009年6期;谢俊春:《中华民族认同:西部民族地区社会稳定的重要心理基础》,《牡丹江大学学报》2009年7期; 金志远:《论国家认同与民族(族群)认同的共生性》,《前沿》2010年19期; 苏昊:《民族认同和国家认同研究综述》,《民族论坛》2010年8期;吴青海:《试析新疆加强对中华民族认同的意义》,《福建党史月刊》2011年6期;丽君:《论民族认同与国家认同》,《长江大学学报》2012年3期; 温少玲:《中华民族认同研究》,华南理工大学2010年博士论文; 毕跃光:《民族认同、族际认同与国家认同的共生关系研究》,中央民族大学2011年博士论文 등 다수. [④] “동북 조선민족의 새기원—조선인민대표 주덕해동지를 찾아서”,《동북조선인민보》,1949년8월29일。 [⑤] 陈明:《中国东北境内的朝鲜民族》,《人民日报》1950年12月6日。 [⑥] 중화민국4년(1915년)에 화룡현에서 두번째로 조선인입적수속을 하였고 훈춘, 연길, 왕청 등 3개현에서도 이어 수속하였다. 조선인들이 입적한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향유하였는바 당시 화룡현의 12개사(社)가운데 陳德新社 사장이외 기타 사장은 모두 조선인이 담당하였고 연길의 5개향에서는 향장이외 부향장은 모두 조선인이었으며 왕청, 훈춘의 상황도 만찬가지였다. 《延边与朝鲜族》,延边朝鲜族自治州档案馆编《中共延边地委延边专署重要文件汇编》第2集,1986,14-15쪽。 [⑦] “滿洲의 조선 사람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순전히 만주에 정착하고 名實이 함께 만주국의 鮮系國民으로서 미래 영원히 滿洲國의 一翼을 이을 사람이고, 하나는 出稼기분을 청산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조선 내지로 돌아갈 사람들이다.”(《滿鮮日報》1940년3월20일 2면)   “만주에 온 조선 사람들은 과거나 현재나 돈벌이 하여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소위 出稼根性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될 것인데...”(《滿鮮日報》1940년 4월 3일2면) “중국에 있는 우리 교민이 약 400만이 있다. 그중 약 300만이 山海關이외 즉 東三省에 있는데 間島에 있는 100만 교민은 오랫동안 있어서 거기에서 토지소유권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바 아미 이것은 소수민족으로서 해결될 줄 믿는다.” 《동아일보》1945년12월9일)등에서 조선인들의 중국정착경향을 볼수 있다. [⑧]姚作起:, 韓俊光 等 主編《中國朝鮮族歷史硏究論叢》Ⅱ, 흑룡강조 선민족출판사, 1992, 295쪽. [⑨]董昆一:《新年献辞》,延边朝鲜族自治州档案馆编《中共延边吉敦地委延边专署重要文件汇编》(1945.11-1949.1)제1집,1985,8쪽. [⑩]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局(館):《中共延邊吉東吉敦地委  延邊專署重要文件彙編》(1945.11-1949.1)제1집,1985,386-389쪽。 [11] 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局(館):《中共延邊吉東吉敦地委  延邊專署重要文件彙編》,1985,387쪽。 [12] 《연변일보》,1948년11월23일。 [13] 《연변일보》,1948년12월10일。 [14] 《연변일보》,1949년2월10일。 [15] 《동북조선인민보》,1950년6월29일。 [16] 《동북조선인민보》,1950년11월11일。 [17] 정신철: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 도서출판모시는 사람들, 2004, 203쪽. [18] “조국관념문제에서의 모호한 인식을 비판”,《목단강 일보》, 1958년8월22일 [19] 정신철: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 도서출판모시는 사람들, 2004, 157쪽.   [20] 황유복:《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담론》,《중국조선족사연구》2009,민족출판사2011; 조성일:《편찬의 시말》,《문화시대》2009년제1기 등.  
17    민족문화산업활성화에 관하여 댓글:  조회:2998  추천:7  2012-08-16
민족문화산업활성화에 관하여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현재 인구이동, 도시화와 더불어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민족문화전통이 날로 희박해지는 추세가 보인다. 하지만 민족문화전통은 민족구성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민족존속과 발전에도 연관이 되므로 민족이 살아남아려면 귀중한 민족문화를 반드시 보존 전승하여야 한다. 다른 한면 경제발전에 따라 크게 늘어나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생활수요에 호응하여 문화산업이 신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민족문화는 그 풍부성과 특수성으로 날로 주목을 받고있다. 우리는 이러한 계기를 활용하여 민족문화산업을 부흥시킴으로 민족문화의 발전과 전승에 더욱 기여하여야 할 것이다.     1. 문화산업이란? 문화산업이란 각종 문화자원에 대한 투자와 경영의 경제행위를 말한다. 현재 사회발전과 생활수준의 제고에 따라 인간들의 생활추구도 날로 다양해져 물질적 패션을 추구할뿐만 아니라 생활에서의 문화적 요소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산업이 흥기되고 신속히 성장하여 그 경제적 효과도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더우기 문화산업은 특정지역의 경제, 사회발전에서 더욱 큰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한 지역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각종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과 관리, 활성화 및 각종 형식의 문화활동 등은 그 지역 문화산업발전을 추진하는 근저이다. 그리고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특징이 하나의 흡인력이 되어 외부로 부터 인재와 투자를 유치함으로 최종에는 그 지역개발과 경쟁력제고에 더욱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한 지역에서 문화예술활동 및 문화산업이 부흥되면 기업의 투자와 생활소비를 추진할수 있으므로 그 지역경제사회발전의 하나의 중요한 기초로 될수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제조업의 30%과 서비스업의 50%이 투자를 결정할 때 먼저 그 지역 문화자원의 가용성을 중요시한다고 한다.[①] 다시 말하면 민족지역에서 문화예술활동과 문화산업이 흥기되면 기업의 투자와 소비생활을 신속히 추진할 수 있어 그 지역발전의 중요한 기초로 될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활동이 문화산업과 지역발전을 추진하는데는 영상, 출판, 음악, 영화 등 문화산업을 유치하는 것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속활동 예컨대 민간명절, 전통음식, 세시풍속 등과 그 지역 역사유적, 역사사건, 역사인물 등 소재를 활용하여 산업화하는 방법이다. 특히 후자는 지역특색을 발휘하고 지역주민의 지원과 참여를 흡인하는 효과가 전자보다 더욱 강하다. 그리고 이것이 관광, 레저문화와 밀접히 연접되어 일종의 산업链으로 형성되면 지역경제사회발전에 강력한 활력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문화산업의 흥기와 신속한 성장은 민족지역 경제, 사회발전에 중요한 기여을 할 수 있다.   2. 우리의 풍부한 민족문화자원 민족문화란 한 민족의 생산,생 활과정에서 형성발전한 민족특징을 띤 문화로서 주요하게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로 분류한다. 물질문화로는 음식, 복식, 주택와 생산기구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신문화로는 언어문자,  문학예술, 철학종교, 풍속습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을 갖고 있으며 풍부한 민족문화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민족문화자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아래와 같다. 하나는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지역에 민족의 역사흐름을 반영하는 수많은 문화유적이고 또 하나는 장기적인 생산과 생활에서 형성발전한  민속문화이다. 이 가운데 민속문화는 민족문화자원의 개발과 산업화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민속은 민간풍속으로 민중들이 생산, 생활과정에서 창조하고 향유하며 전승해 가는 물질적, 정신적 문화현상으로 민속문화는 대중의 생활문화에 속한다. 우리민족은 장기적인 생산생활과정에서 의, 식, 주, 행 등 방면에서 민족특징이 농후한 민속문화를 창조하고 전승하여 왔다. 우리민족은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로 노래와 춤을 즐겼고 다채로운 생활습속, 즉 경사로운 혼인풍속, 감격적인 환갑, 사랑와 미래의 희망이 깃들어 있는 돌잔치, 힘차면서 순박한 체육경기 등 풍속은 지금도 전승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음식들인 냉면, 찰떡, 김치 등은 그 독특한 맛으로 타민족에게도 많이 전파보급되었으며 아름다운 민요, 전통가무, 특색의 주거, 고풍스러운 복식 등에도 농후한 민족문화의 전통을 넉넉히 감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민족의 전통춤 농악무는 2009년에 유네스코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에 뽑히여고 춤으로는 중국에서도 유일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러한 민속문화 등이 민족문화산업의 기초로 되어 민족경제,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3. 민족문화산업의 현실 민족문화산업의 중요성이 날로 부각되어가고 있는 현재 각 지역에서는 민속문화와 역사문화유적 등 바탕으로  민족문화산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상적이 못 된다. 예컨대 민족문화산업발전의 하나로 현재 많은 지역에서 민속촉건설과 민속관건설을 하고 있지만 모두 단조롭고 획일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으며 단지 표상적인 민속현상을 전시하는데 그치고 마는 수준 낮은 중복건설에 불과하다. 문화경영인재가 아주 결핍할 뿐만아니라 전반적 문화자원을 조합하여 활용하지 못하고 단조롭고 획일적인 품목투자는 지역간의 경쟁만 부추기고 있다. 합리적인 문화산업구조가 형성되지 못하여 축제나 민속촌건설은 많으나 문화산업고리가 연결되지않아 산업화정도가 아주 낮다. 그리고 전시나 디지털 기술 등 산업화 될수있는 품목이나 상품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 지역에서 건설하고 있는 민속촌과 민속관은 거의 자기 특색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다. 단조롭고 획일적인 형식, 취미성과 체험성이 결핍한 내용, 그리고 민속문화관광에 있어서 민속문화산품의 상품화가 되어있지 않는 현실 등을 보면 역시 장기성이 없어 보인다.   4. 민족문화산업활성화를 위한 제안 한 민족에게 있어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화자산에 대한 보존, 활용 및 다양한 문화활동은 문화산업발전을 추진하는 저력이다.     우리에게는 풍부한 민족문화유산과 전통문화자원이 있다. 우리의 풍속습관, 음식, 복식, 체육과 민간유희 등은 뚜렷한 민족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민족문화산업발전의 우세이다.     그럼 민족문화산업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     하나, 민족문화자원의 중요한 부분인 민속문화자원과 역사문화자원을 충분히 발굴하여야 한다.     둘째, 현재 민족문화산업발전의 중점은 민속문화의 산업화에 있다. 예컨대 민속문화전시, 민속음식, 민속오락, 민속공예품가공, 민간예술홍보 등 민속문화를 신속히 발전시켜 민속문화브랜드와 민속문화산품을 창출하여야 한다. 셋째, 민족의 민속문화, 역사문화 등에 대한 지식성, 취미성, 체험성을 부각시켜 관광속에 문화, 문화속의 관광을 포괄하는 특색이 있는 하나의 문화관광산업의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 네째, 민속촌건설과 레저문화를 충분히 조합하여  민속촌에 가면 볼 것이 있고 놀 것이 있으며 먹을 것이 있고 조용히 쉬어갈수 있으며 또 돌아갈 때면 선물을 사 갈 수 있도록 다원화의 길을 가야 한다. 다섯째, 민족문화의 산업화과정에서 단순화, 획일성을 피하여 매개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민족문화산업은 문화자원시장화의 과정으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동시에 민족사회발전에 대한 기여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민족문화의 전시를 통하여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각 민족사이의 상호이해증진을 추진하는 매개로 될 수 있으며 또 사회안정과 민족화목의 풍경을 과시함으로 국제교류, 투자유치를 추진하여 지역경제사회발전의 계기로 될 수도 있다.    [①] European Commisssion, Culture, the Cultural Industries and Empoloyment, 1998.
16    오직 선진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댓글:  조회:2396  추천:2  2012-07-31
  조선족은 두만강, 압록강 넘어에서 이민 온 중국“과계민족”(跨界民族)의 하나이다. 과거 100여년간 조선족은 강한 생명력과 꾸준한 노력으로 중국사회에서 공인하는 우수민족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한족인구가 절대다수 차지하고 한문화가 주체를 이룬 중국에서 민족전통을 보존발전하면서 또 한문화에 적응해야 하였다. 이 가운데 많은 모순과 갈등이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민족의 전통을 완전하게 지켜왔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은 조선족의 전통거주구조와  생활양식을 다 각도로 개변시켰다. 과거 조선족은 정치생활에서는 완전한 중국식을 면치 못하였지만 사회생활은 상대적으로 집결된 지역에서 민족내부의 교류를 위주로 하여왔다. 하지만 개혁개방은 조선족의 민족적 울타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시장의식이 싹트고 경제리익 추구에 발동을 걸은 수 많은 조선족인구의 이동은 민족적 범위를 벗어나 활동령역을 더욱 넓히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농민들과 동북집거지역의 조선족들의 도시진출이었고 산해관이남지역 진출이었으며 한국을 비롯한 해외 진출이었다.  조선족인구의 동북지역과 농촌탈출은 현재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하였는바   민족교육의 기본장소인 조선족학교가 날로 줄어 들었고 장가들 나이의 총각들이 결혼대상자 없어 고민하였다. 그리고 집거지역의 조선족인구가 급격히 줄어 들면서 옛날 그들이 모여 살던 우리농촌은 날로 쓸쓸해 가고 있다. 원래 소수에 속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제들은 민족특성의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결국에는 민족동화의 길을 다그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와같이 일부에서 “위기설”,”해체설”등이 돌 정도로 조선족사회는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다.   물론 조선족사회발전도상에는 불리한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족은 문화소질이 높고 변화에 잘 적응하는 능력이 있을 뿐만아니라 민족의 현황을 잘 파악하고 원활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다. 조선족은 광범한 시장진출에서 민족의 경제실력을 키웠으며 외계과의 접촉에서 민족의식도 강화되였다. 그리고 조선반도에는 두개의 주권국가가 있고 조선족이 그들과의 연대가 더욱 깊어가고 있는 것도 유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만 다민족국가에서 민족이 동화되지 않고 살아 남으려면 반드시 민족특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특성을 보존하려면 민족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지위를 확고해야 한다. 이 길은 오직 선진민족으로 부상하는 길밖에 없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경제, 문화가 발달하고 영향력 있는 과학대가, 석학들이 많이 출현하면 민족적 긍지와 자신감은 자연히 증가되고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강렬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선진민족으로 탈바꿈되면 우리는 인구로는 비록 소수에 속하지만 동화되지 않고 민족특성과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구분포도의 변화는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부각시켰고 민족성원들의 각종형식의 모임은 민족적 연대감증대에 필요하다. 특히 도시민족교육은 민족문화계승에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이고 도시의 민족모임은 교류의 장소로 서로의 연대감을 깊이 하며 민족의식을 자각케 한다. 우리는 주인의식을 키우고 민족발전사업에서도 과거 항일전쟁, 해방전쟁과 합작화운동시기의 열정으로 일을 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술 마시기, 놀기와 과소비의 돈을 적당히 아껴서 도시민족교육기금, 민족인구발전기금 등을 마련하여 민족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의 인구를 증가하는데 활용할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였으면 한다. 현재 우리앞에는 도전과 기회가 동시에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민족이 위축되거나 발전시킬 수도 있다. 민족의 모든 성원들이 모두 각성하여 힘을 합쳐 당면한 문제들을 제때에 해결하고 민족사회성장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위기를 지혜롭게 피면하고 아름다운 앞날을 펼쳐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저자의 《조선족사회의 현황과 미래》란 책자의 머리말이다)
15    4.관내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댓글:  조회:2069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정신철       산해관이남지역을 향한 조선족인구이동이 활발함에 따라 민족교육문제도 날로 돌출해 지고 있다. 민족성원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생각과 의욕 등을 파악하고저 우리는 북경, 천진, 청도 등 지역에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설문조사시간은 2009년8월에 시작하여 12월에 끝마쳤고 227부의 유효 설문지를 회수하였다.       1) 응답자들의 기본 상황     응답자의 성별을 보면 무응답자 10명을 제외한 217명가운데 남자가 98명이고 여자는 119명으로  여자의 수가 약간 많았다. 표1:     표1: 응답자의 성별비교     빈도 유효 % 유효수 남 98 45.16% 여 119 54.84% 무응답   10   합계   227           응답자의 연령을 보면 31--40세가 103명으로 제일 많고 41-50가 그 다음으로 기본상 자녀교육문제에 대두한 연령층이 다수인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표2:     표2: 응답자의 연령     빈도 유효 % 유효수 60세이상 6 2.75% 59-41세 71 32.57% 40-31세 103 47.25% 30-21세 37 16.97% 20세이하 1 0.46% 무응답   9   합계   227           응답자의 혼인상황을 보면 기혼자가 대부분이고 미혼자는 약 13% 차지한다. 표3:     표3: 응답자의 혼인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기혼 181 86.60% 미혼 27 12.92% 기타 1 0.48% 무응답   18   합계   227           응답자의 가정식구상황을 보면 3명가족이 절반이상 차지하고 4명가족이 3분지1를 차지하였다. 표4:     표4: 응답자의 가족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1명 4 1.88% 2명 8 3.76% 3명 113 53.05% 4명 70 32.86% 5명 12 5.63% 6명 5 2.35% 7명 1 0.47% 무응답   14   합계   227                                               응답자의 호적지 상황을 보면 동북3성에 호적을 둔 사람이 70%이상 차지하고 그 다음 산동성과 북경시 호적을 가진 사람들이 약 19% 차지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현 거주지에서 보면 기타지역 사람이었다. 표5:     표5: 응답자의 호적지 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길림성 72 33.33% 흑룡강성 72 33.33% 료녕성 13 6.02% 산동성 23 10.65% 북경시 18 8.33% 천진시 9 4.17% 광동성 4 1.85% 내몽고 2 0.93% 하북성 1 0.46% 하남성 1 0.46% 상해시 1 0.46% 무응답   11   합계   227           응답자의 현 거주지 상황은 청도시, 북경시, 천진시 순으로 각 지역의 설문조사규모와 대응이 된다. 표6: 표6 현 거주시 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북경시 69 30.40% 천진시 60 26.43% 청도시 98 43.17% 무응답   0   합계   227                         응답자의 현 거주지에서 거주한 시간을 보면 4년이상이 70%이상 차지하고 이 가운데 7년이상 거주한 비중이 약 75%차지한다. 이것은 비록 호적지는 아니지만 이들은 이미 현 거주지에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표7:     표7: 현 거주지에서의 거주시간     빈도 유효 % 유효수 1년이사 9 4.46% 1년 10 4.95% 2년 15 7.43% 3년 15 7.43% 4-6년 39 19.31% 7-10년 56 27.72% 11-15년 30 14.85% 16-20년 19 9.41% 20년이상 9 4.46% 무응답   25   합계   227           응답자의 학력을 보면 대학이상이 126명으로 60% 차지하고 중학교이하 학력을 가진 자가 많지않다. 이것은 이들의 생활적응능력이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8:     표8: 응답자의 학력     빈도 유효 % 유효수 대학원 15 7.14% 대학 111 52.86% 고등학교 72 34.29% 중학교이하 12 5.71% 무응답   17   합계   227           응답자의 소득상황을 보면 대부분이 2000-3000원이상이고 이 가운데 5000원이상의 소득자들이 응답자가운데서 약 3분지 1를 차지한다. 표9:     표9:     빈도 유효 % 유효수 1000-1500원 7 3.63% 1500-2000원 16 8.29% 2000-3000원 41 21.24% 3000-4000원 33 17.10% 4000-5000원 20 10.36% 5000원이상 61 31.61% 무소득 15 7.77% 무응답   34   합계   227           2) 응답자들의 민족언어생활       응답자가운데 대부분은 민족언어를 잘 장악하고 있으면 낮은 수준 또는 모른다고 답한 자는 아주 적다. 표10:     표10: 민족언어 장악수준     빈도 유효 % 유효수 잘한다 158 74.18% 보통이다 46 21.60% 잘하지 못한다 5 2.35% 모른다 4 1.88% 무응답   14   합계   227           응답자의 자녀상황을 보면 한명을 둔 가정이 제일 많고 자녀가 없는 응답자는 6명밖에 되지 않는다. 표11:     표11: 응당자의 자녀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0명 6 3.11% 1명 127 65.80% 2명 56 29.02% 3명 4 2.07% 무응답   34   합계   227           응답자 가운데 자녀와 같이 있는 자가 대부분이고 자녀와 떨어져 생활하는 경우의 사람이 29명에 달한다. 표12:     표12: 응답자의 자녀들과 동거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같이 생활 163 84.90% 떨어져 생활 29 15.10% 무응답   35   합계   227           자녀들과의 대화에서 조선어 사용상황을 보면 사용한다는 응답자가 143명으로 무응답자를 제외하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사용하지 않은다는 응답자도 44명으로 적지 않았다. 그리고 무응답자도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이들 가운데서 민족언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는지? 표13:     표13: 자녀들과 대화에서 민족어사용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사용한다 143 76.47% 사용하지 안 함 44 23.53% 무응답   40   합계   227           응답자 자녀들이 학교 또는 유치원에 다니는 상황을 보면 조선족학교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모두 95명으로 무응답자를 제외하면 약 56%차지하고 한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약44% 차지한다. 표14:     표14: 조선족 자녀들이 민족학교 다니는 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조선족학교 81 47.65% 한족학교 58 34.12% 조선족유치원 14 8.24% 한족유치원 17 10.00% 무응답   57   합계   227           3) 응답자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의욕       자녀들이 어느 학교 또는 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희망하는가에 대하여 응답자 대부분이 조선족학교와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다고 답하였고 한족학교와 유치원을 희망한다는 응답자도 있었다.표15:     표15: 자녀들의 민족교육접수에 대한 희망     빈도 유효 % 유효수 조선족학교/유치원 159 83.25% 한족학교/유치원 32 16.75% 무응답   36   합계   227                  도시에서 꼭 조선어와 민족문화를 알아야 하는지에 대하여서는 절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매우 긍정적인 답을 하였으며 부정적 또는 모르도 괜찮다고 답한 자는 5%좌우밖에 되지 않는다. 표16:     표16: 민족어와 민족문화에 대한 태도     빈도 유효 % 유효수 알아야 한다 206 94.50% 그렇지 않다 5 2.29% 관계없다 7 3.21% 무응답   9   합계   227                   도시에서 민족교육의 제일 적합한 도경에 대하여서는 공립조선족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답이 대부분이고 사립학교, 주말학교 및 현지학교에 조선족반을 설립하는 등에 대하여서는 호응이 많지않다. 표17:     표17:도시민족교육의 적합한 도경     빈도 유효 % 유효수 공립조선족학교설립 157 74.76% 사립조선족학교설립 15 7.14% 주말조선말학교 23 10.95% 현지학교에 조선족반설립 15 7.14% 무응답   17   합계   227                             현 거주지에 조선족학교가 꼭 필요하는지에 대하여서는 절대부분의 응답자들이 긍정적인 답을 하였으며 없어도 괜찮다는 답과 무관심이다고 답한 응답자들은 아주 적다.표18:     표18: 도시에서 조선족학교의 필요성     빈도 유효 % 유효수 꼭 필요하다 199 91.28% 없어도 된다 17 7.80% 관심이 없다 2 0.92% 무응답   9   합계   227                     현재 조선족학교 운영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절반이상의 응답자는 국가 공교육계열에 개입하는 것이다고 답하였고 그 다음은 정부의 지원과 민족경제의 강화가 중요하다고 답하였으며 민족자체의 힘을 합치는 것이다고 한 응답자도 10분지 1이 된다. 19표:     표19: 현재 조선족학교 운영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     빈도 유효 % 유효수 국가 공교육계열에 개입 120 55.56% 민족자체의 힘을 합쳐 20 9.26% 정부의 지원과 민족경제의 강화 76 35.19% 무응답   11   합계   227                            정부에서 조선족학교설립허가만 주고 경제적 지원이 없을 때 민족의 힘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정부의 경제지원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민족의 힘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답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표20:     표20: 학교운영을 민족의 힘으로 할 수 있는지?     빈도 유효 % 유효수 할수 있다 75 34.72% 할수 없다 18 8.33% 그래도 정부의 지원이 중요 123 56.94% 무응답   11   합계   227                          4. 간단한 결론     상술의 설문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     첫째, 설문지 응답자들의 기본상황에서 연령, 가족식구, 자녀수자, 호적지와 거주지 등을 볼 때 거의가 자녀의 민족교육문제에 당면하고 있으면 민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수 있다.     둘째, 많은 학부모들은 될수록 자녀들과 조선어로 대화하고 자녀들이 민족교육을 받는것을 희망하고 있으나 현 거주지역에 조선족학교 또는 유치원의 미흡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민족교육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거주지에 조선족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지역정부에 민족정책관철을 호소하고 민족교육장소설립에 정책적,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는 마음도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민족의 힘으로 민족교육을 진행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우리가 처한 외부적 환경으로부터 많은 제한을 받고있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총체적으로 현재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은 어려움을 맞고 있다. 하지만 민족교육은 민족발전과 민족문화보존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존재로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고달프도 민족교육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 우리는 어째든 민족성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지역에 민족교육의 장을 개척하여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갖고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을 위하여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14    도시민족공동체구성과 네트웍의 역할(요지) 댓글:  조회:2065  추천:0  2012-07-31
도시민족공동체구성과 네트웍의 역할(요지)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현재 조선족사회는 급속한 인구이동으로 많은 문제점을 로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문제들은 민족의 생존과도 깊은 련관을 갖고 있다. 이에 우리는 깊은 성찰을 하고 해결대책마련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1. 인구이동조류에 앞장 선 조선족 중국의 개혁개방과 도시화과정은 인구이동을 추진하였으며 이 가운데 조선족인구이동은 중국 각 민족가운데 앞장에 섰다. 조선족인구이동의 급속화는 동북지역의 민족집거지의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는 조선족농촌마을의 황폐화이었고 동북지역 집거지 조선족인구의 대량감소였다. 특히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원래 조선족이 없거나 드문 산해관이남도시지역에 진출하는 것은 민족인구의 초분산화를 의미한다. 현재 도시진출한 조선족사회의 양상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착되었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작게는 민족성원들의 활동장소로부터 크게는 민족문화전승, 민족교육전개등에까지 이어지는 문제들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지금의 경향을 볼때 중앙과 현지도시정부에서 새로운 정책과 조치를 내놓지 않는 한 상기의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쉽지않다. 하지만 민족사회에서 가만 있어서도 안 된다.  2. 화제로 되고있는 도시공동체구성문제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민족의 도시공동체구상이다. 민족은 일정한 공동특징을 소유한 인간집단으로 민족의 공동특징은 기타민족과 구별하는 계선이고 민족내부응집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민족의 공동특징을 유지하는데는 집단적인 공동체생활이 필요하다. 과거 대부분 조선족은 향촌단위로 상대적인 공동체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민족교육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고 민족문화전승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상황과 완전히 다른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것인 즉 조선족인구의 대량적인 도시진출에 따른 일련의 문제로출이다. 민족인구가 분산거주하고 민족학교가 없으며 민족문화시설이 없는 산해관이남지역도시의 실정은 민족공동체생활과 민족정체성유지에 있어서 큰 도전이 아닐수 없다. 도시진출은 매 개인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상대적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민족인구의 분산을 재촉하였다. 원래 인구수가 많지않는 소수민족성원으로 집거지역을 떠나 도시에 진출한다는 것은 민족인구의 거주분산을 의미하고 민족동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민족성원으로 그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도시에서도 반드시 민족공동체생활을 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야 한다. 도시에서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려면 역시 민족인구의 상대적인 집거지역이 있어야 하고 민족교육장소가 있어야 하며 민족문화시설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현안들을 해결하는데는 내적, 외적환경의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 사회적, 정책적 외적환경을 제쳐놓고 민족자신의 내적환경을 보더라도 민족성원들의 도시공동체구성에 대한 절박성과 정체성유지에 대한 관심 및 노력등이 비교적 결핍한 상황이다. 조선족은 도시화과정에 앞장서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도시가 “농업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귀속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도시공동체구성이 우리에게 날로 절박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3.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의 중요성 도시에서 민족공동체생활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민족의 상대적 집거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여론을 조성하고 함께 모여살수 있는 여건마련에도 힘을 기울려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는 것이 민족적 네트웍일 것이다. 과학기술과 교통의 신속한 발달로 세계는 날로 작아지고 있지만 인구이동은 더욱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선족인구이동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인구이동에 의한 민족인구의 분산거주추세는 민족내부의 교류와 련대의 필요성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교류와 련대에는 네트웍의 역할이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따라서 네트웍은 현재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다. 특히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은 더욱 중요하다.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은 민족문화를 바탕으로 민족성원들을 련결하는 중요한 매체이다.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의 기초는 민족교육을 통한 민족력사전수, 민족언어문자유지발전, 민족전통문화전승등이다.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을 통하여 민족성원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의식하고 민족자호감과 자신심을 느끼게 하며 민족일체성과 민족정체성을 강화한다. 때문에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은 민족성원들의 교류와 련대를 더욱 추진하고 어디에서도 자아민족을 감각케 하고 민족성유지에 힘을 기울리게 한다. 이것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과도 련관된다. 물론 도시의 민족공동체구성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              ⊙              ⊙ 현재 우리민족은 중요한 전환기에 처해있다. 전진하지 못하면 후퇴하기 마련이다. 민족성원들은 발전앞에 놓인 어려움을 회피하고 말고 민족에 대한 애착과 신심을 가지고 힘을 합쳐 대면한 문제들을 착실히 해결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필자의 말: 현재 산해관이남도시에 조선족인구가 널리 분포되면서 도시민족교육실행문제와 민족정체성유지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중국조선족이 “농경”민족으로부터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는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하지만 우리민족이 도시에서 어떻게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 발전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기회를 빌어 중국조선족사회의 미래발전에 있어서 꼭 필요한 민족의 도시공동체구축에 대한 화제를 제출하여 민족성원들의 관심과 반응을 기대해 본다.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구상   1. 문제제기와 목적:   200만좌우의 중국조선족가운데 인구이동으로 3분지1이상의 인구가 이미 산해관이남지역에 분포되어 있는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들이 동북지역의 민족전통집거지역을 떠나 한족인구가 절대다수인 산해관이남도시에  진출하고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당면한 제일 큰 고민이 아마 자녀들의 민족교육문제와 민족정체성 유지문제일 것이다.   민족교육은 학부모들의 민족성과 민족인구의 일정한 집중거주가 필요한 전제일 것이고 민족정체성유지에는 민족성원사이의 연대가 중요하다. 그리고 민족성원들의 연대는 크고 작은 집거지가 형성되고 민족문화바탕으로 공동체생활을 하는데서 더욱 강화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의 도시화과정과 더불어 산해관이남지역에 조선족인구가 많이 분포되면서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이 솔선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본 연구는 산해관이남 여러 도시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하여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필요한 조건, 당면한 문제등을 파악하고 도시공동체구축방안을 탐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의 바람은 조선족사회에 도시공동체구축의 필요성과 방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산해관이남지역에서 상대적인 집거지형성에 동조하며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문화를 유지하면서 생활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하였으면 한다.   2. 연구주제:   동북지역조선족들의 산해관이남지역도시진출에 따른 도시공동체구축문제   3. 연구제강:   1)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발전   - 민족은 여러가지 공동특징을 소유한 비교적 안정된 하나의 인간집단이다   - 민족의 형성에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하였지만 이 가운데 공동한 생활지역이 제일 기본적인 조건일 것이다.   - 민족문화와 민족교육은 민족발전의 기초와 핵심이고 민족교육진행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에는 민족집거지가 절실히 소요된다.   2) 중국조선족의 공동체생활   - 조선족은 이민민족이다   - 조선족은 이민,정착하면서 촌락중심으로 집거지를 형성하였다. - 조선족은 집거지가 있음으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문화를 유지하면서 민족공동체생활을 할수 있었다.   3) 도시화과정에 따른 조선족인구의 분산화   - 과거조선족은 이동성이 적은 민족집거생활을 하였다.   -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의 제일 돌출한 현상이 인구이동이었다.   - 인구이동은 조선족사회의 과거 공동체생활전통을 파괴하고 인구를 널리 분산시켰다.   - 조선족인구의 분산화는 전통집거지의 축소를 초래할뿐만아니라 민족특징의 약화 지어는 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4)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의 필요성   - 현재 조선족은 농촌에서 도시로, 집거에서 분산으로 향한 과정을 겪고 있다.   - 조선족의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으로의 진출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할뿐만아니라 민족교육과 민족정체성유지에도 많은 애로점을 낳고 있다.   - 한족이 대다수인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이 아주 필요하다.   - 도시공동체구축의 기본 조건은 도시에서 새로운 민족집거지의 형성이다.   5) 도시공동체구축의 여러 요소 분석   -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의 유리한 조건: 개혁개방과 인구이동의 자율화, 점차 강화되고 있는 민족성원들의 민족의식, 한국 및 한국인과의 밀접한 관계, 새로운 도시집거지형성을 위한 노력 등;   - 도시공동체구축의 불리한 요소: 한족인구가 절대다수인 환경, 신속한 도시화과정에 뒤진 사회제도개선, 도시민족정책과 일부제도의 경직성, 민족적 경제력의 결핍 등.   6) 도시공동체구축방안과 대책 - 조선족인구의 일정한 집거—민족교육—민족문화—민족사회단체—더 많은 조선족인구를 흡인—집거지 형성—도시공동체구축 - 도시조선족사이의 연대감 강화   - 민족경제력 강화   - 새로운 도시집거지형성에 관한 여론조성   - 해당 민족정책을 활용하여 도시민족교육, 민족문화조성에 주력   - 한국 및 한국인과의 화합과 유대감 강화   4. 연구실행계획:     - 산해관이남지역도시의 조선족사회현황에 관한 조사   - 해당도시조선족들의 민족정체성유지에 관한 설문조사   - 도시민족문제현황과 도시민족정책연구   - 한국 및 재중한국인과의 상호이해와 협력에 관한 연구   - 도시공동체구축방안 제시와 홍보   «   «   «   «   «   민족사회의 동참을 요청   우리사회는 현재 갈림길에 헤메이고 있다. 민족의 인구이동과 인구증장율저하는 전통집거지역축소를 초래하였고 도시진출과 인구분산화는 민적정체성약화를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산해관이남지역에 민족교육장소를 마련하고 민족의 도시집거지역을 구축하여야 한다. 이에 앞서 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리론적 근거와 실천적 가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공정은 우리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자체로 연구경비를 마련하고 우리자체로 연구하여야 한다. 요컨데 민족에 대한 관심과 애착심을 가진 모든 민족성원들이 물심량력으로 이에 동참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견해와 조언을 바라는 바이다.  
12    7.관내 조선족 교육발전의 대책 댓글:  조회:2054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정신철       도시화흐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민족의 도시화과정은 필연적이다. 현재 몇 십만명에 달하는 조선족인구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의 대, 중 도시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만약 동북 3성의 여러 도시에 집결된 조선족인구까지 합하면 우리민족의 도시인구는 이미 상당수에 달할 것이다. 조선족인구의 분산과 민족문화의 약화에 따라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크게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교육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민족교육은 민족 언어문자의 사용과 보전, 민족문화전통의 유지와 발전 및 민족연대성을 강화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여건의 하나이다. 도시화와 더불어 우리의 민족교육은 과거의 농촌중심에서 점차 도시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며 도시 민족교육의 사명은 더욱 중대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도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발전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이 탐구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도시 민족교육의 진행과 발전을 위하여 현재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것인즉: 첫째, 현지 조선족사회에 대한 파악과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과 현실상황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추진하여햐 한다는 근거를 조성하여 널리 홍보하고 정부와 민족성원들의 도시민족교육에 대한 중시와 호응을 얻어야 한다. 둘째,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 및 민족교육정책을 참답게 활용하여 행정당국에 민족교육의 중요성, 절박성을 호소하고 당의 민족정책을 집행하는 중요한 조치의 하나로 정책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도록 노력함으로 민족교육진행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산해관이남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보장일 것이다. 셋째, 민족교육은 어디까지나 민족내부의 일로 민족의 전체성원이 이를 고민하고 힘을 합쳐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동북해방이후 조선족민중들이 일떠서 민족학교설립에 모든 힘을 이바지하는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매 개인이 힘이 자라는 데까지 도시민족교육의 진행과 발전을 성원하고 지원하였으면 한다.   넷째, 국내외 모든 민족성원들의 지원도 필요하다. 고국인 한국에서는 도시민족교육에 필요한 서적, 교학시설, 특히 교원파견 가능성도 타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끝)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11    6.관내 조선족 교육전개의 유형 댓글:  조회:2130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정신철         현재까지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진행과정을 보면 세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단독으로 조선족학교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지 한족학교와 연합하여 민족교육의 장소를 만드는 유형이며 세번째 유형은 주말 조선어학교와 학습반 꾸리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을 볼 때 서로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1) 단독 조선족학교 운영 동북지역처럼 조선족학교를 꾸려 민족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이다. 민족언어와 민족문화를 빨리 배울 수 있고 민족의 동질성유지와 응집력양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민족적 기반이 약한 산해관이남지역에서 공영으로 단독 조선족학교를 꾸릴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도 문제이다. 그리고 단독학교운영은 처음에는 현지화과정이 잘 되지않을 가능성이 많고, 학생들의 사회적 교류과 사회진출에서 약세를 보이는 점 등 문제가 존재할 수도 있다. 또 민간경영의 경우  학교부지를 마련하는 등 학교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학생들의 학비로 확보하여야 함으로 학부모들의 부담을 크게 증가한다. 그리고 현지 학교교육과정과 동일한 수준으로 나갈 수 있는지도 문제일 것이며 교원들도 불확실성이 많아 안심하지 못 하는 성향도 있을 것이다. 가령 국가 및 현지정부의 정책적, 재정적 지원이 없을 경우 민족단독학교운영이 매우 어렵다.   2) 현지 한족학교과 연합형식으로 운영하는 경우 현지 교육질이 좋은 한족학교와 연합하여 민족교육을 진행하는 경우 그 우세가 현저하다. 첫째는 조선족학생들의 학습질과 자질을 높일 수 있고 둘째로는 도시진출한 학부모들의 부담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으며 셋째로는 한어 배우는데 도움이 되고 시야와 사회교제를 넓히는데 좋은 기초를 닦을 수 있다.[1] 이러한 형식도 현지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공교육계열에 속하여 질 좋은 학교에 조선족학생부를 설립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그렇지 않고 민간경영의 경우 적당한 학교를 찾는 것도 중요하고 경비부담도 만만치 않으며 학교운영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단점일 것이다. 3) 주말 조선어 학교- 이 형식은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거나 조선어을 터득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업여시간을 이용하여 민족언어와 민족문화를 전수하는 좋은 형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기성이 없고 강제성이 약하여 민족어와 민족문화 터득의 효과가 크지 못하는 것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럼 세가지 유형가운데 어떤 것이 적합한지? 한 마디로 단언하기 어려우나 출발점은 현지 상황에 맞는 유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가령 조선족학령아동들이 비교적 집결된 도시에서는 단독학교를 꾸리는 방향을 타진할 수 있다. 만약 학령아동들의 수량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너무 분산거주한 도시에서 현지학교에 조선족부를 설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기숙사도 운영해야 할 것이다. 주말학교는 공교육계열에 들지 못하며 민족내부에서 경우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이왕의 경우 세 가지 경우의 공동적인 어려움은 민간차원의 운영이다. 따라서 국가의 정규교육계열에 포함시켜 정책적으로, 경제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도록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일 것이다.    [1] 정신철: “조선족 도시민족교육의 출로”, 《민족단결》,1999년 제6기.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10    5. 관내 조선족교육의 현황 댓글:  조회:2310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정신철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족학교가 없는 곳에서 민족의 언어와 문화교육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과거 인구분포의 특징으로 산해관이남지역에는 민족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산해관이남지역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은 부득불 현지 한족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민족언어와 문화를 습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민족언어는 민족의 주요한 특징인바 그의 상실은 민족성 상실과 한족화의 과정을 재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국외진출은 집거지인구의 분산화를 초래하는 반면 인구의 도시집중을 다그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도시진출과 더불어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국외에 나간 사람들도 귀국후 재정착시 역시 도시지역에 집결되는 추세가 보였다. 조선족사회는 인구의 도시이동으로 날로 분산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분산은 또한 민족문화의 약화를 다그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민족특성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의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여러도시에서 조선족자녀들에게 민족언어와 전통문화를 배워주기 위한 민족교육기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먼저 출현한 것이 민간에서 꾸린 조선어주말학교와 사립조선족학교이었다. 설립시간 선후로 나열해 본다.   1) 북경 조선어학교 1989년4월 북경조선어학교가 북경시 해전구 교육부문의 인가를 거쳐 설립, 1992년5월 제1기 졸업생 428명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주말을 이용하여 조선어와 민족전통문화를 배우는 곳으로 기존의 학교시설이나 기관의 시설을 빌려 민족어교육을 진행하는 주말학교이다. 학생구성은 초등학교학생에서 직장청년까지 있어 초등학생반, 중등학생반, 대학생반과 직장인반으로 나누고 수준에 따라 초급, 중급과 고급으로 나누고 학습시간은 3년으로 되어 있다. 이 학교는 개교이래 천여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이후 북경조선어학교은 심양, 길림, 장춘, 할빈, 목단강, 단동, 위해, 석가장 등 도시에 분교를 세워 민족언어문자교육을 진행하였다.   2) 천진시 조선어학습반 1990년 천진시조선족연합회에서 조선어기초반을 개강하였다. 첫 학기에 수강생 35명(대부분은 직장인)이었다. 형식은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8개월기간 조선어문과 문자의 기초를 터득, 사용한 교과서도 자아편집한 것이였다. 1991-1993년에 선후로 , , 등 교재를 사용하였고 초급반, 중급반과 통신반을 모집하였다. 1994년에는 천진시 하서구 직공대학과 연합하여 조선어학습반을 꾸렸다. 당시 조선어붐이 천진에서 일기 시작하였고 각 부문에서 조직한 여러 형식의 조선어학습반이 17개나 되었다. 이 시기 조선족연합회가 꾸린 조선어학습반은 천진시 조선어학습붐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1995년에 여러 여건으로 연합회에서 조선어합습반을 중단하게 되었다.    3) 천진시 새별조선족학교 1993년7월 가 천진시인민정부의 정식인가하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산해관이남에 첫 번째로 꾸린 조선족학교이다. 1998년 5월에는 부지면적이 1650평방메터에 달하는 교실, 기숙사, 식당 등을 포함한 종합청사가 천진시 유일한 조선족집거촌—동려구 신립촌진 보원촌에 마련되었다. 1999년에는 재학생 60여명에 15명 교직원으로 모두 조선족으로 구성되었다. 학생당 학비, 기숙사비,식사비를 포함하여 1년에 3000원을 받고 있지만 학교 운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즉 다시 매년 기본지출이 30만원 정도로 해마다 10만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었든 것이다. 학교의 학생래원 및 교원의 빈번한 이동 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2005년9월에 학교청사를 팔게되어 결국에는 문을 닫지 않으면 되었다. 예컨대2000년통계를 보면 당시 학생의 각종비용은 3000원으로 65명학생이 내는 경비수입이 20만원좌우이지만 학교의 지출은 난방비,전기세와 물세등이 5만원, 교직원의 월급 156,855원이고 식비가 6만원이며 사무비용이 4만원으로 모두 306,855원이 된다. 보는 바와같이 학교는 해마다 10만원좌우의 적자를 내면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4) 북경장백학교(김정국 시기)   1994년 8월 김정국이 북경에 조선족소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모두 12명(1학년생10명, 유치원생2명)이었으나 이후 빠른 발전을 가져와 1997년에는 학생수가 23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학생수의 증가에 따라 학교시설을 확대하였으나 비싼 학교건물 임대료 등으로  운영상의 부담 또한 적지않아 1998년에는 북경시외지역인 통주로 학교를 옮겼다. 하지만 이 계기로 학생수가 170여명으로 감소되는 등 학교규모가 갈수록 축소되었다. 2001년 김정국은 장백학교운영에서 손을 떼였다. 본 학교는 민간인이 꾸린 사립조선족학교이지만 “조선족학교”라는 간판은 해당기관의 불허가로 걸수 없었고 결국에는 “장백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5) 북경장백학교(김영옥 시기) 1994년 설립한 장백학교는 몇 년간 잘 운영되다가 경비부담 등으로 점차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흑룡강성 계서출신의 녀성 김영옥씨가 이어받아 학교의 운영자로 되었으며 학교도 여러번 옮기게 되었다. 2003년8월부터 북경시내에 들어와 현지학교와 합작하는 형식으로 운영이 되었으며2006년에 장백소학교(찐숭제4소학교, 약60명 학생)과 장백중학교(찐숭제1중학교 약30명 학생)의 형식으로 남아 있었다. 이 두 학교는 숙소은 각기 있고 수업은 그 학교에 편입하여 하고 과외 기숙생활에서 조선어 학습, 학교보도, 그리고 피아노, 손풍금 등 특기교육을 진행하였으며 당시 조선족교원이 13명(월급 1500원정도)있었으며 한국학생과 북조선학생이 10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대사관 자녀이고 주요하게 한어공부를 하였다. 현재 장백학교의 연장선으로 성아 쌍어초등학교, 연교 중학교, 따창 고급실험중학교와 협력하여 조선족학생을 모집하여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학교의 초중부 학비는 6000원/학기이고 고중부는 7000원, 여기에 기숙사비, 식비 및 기타비용을 합치면 한 학기에 초중부는 11350원에 또 일차적으로 내는 입학금6000원을 내야 했고 고중부는 14200원에 입학금5000원을 더 내야 했다. 학생들의 이러한 경비는 산해관이남진출의 보통 조선족가정각도에 보면 아주 어려운 부담이 아닐수 없다.   6) 북경금잔디 유치원 1998년9월7일  이 설립되었다. 당시 유치원생은 12명에 불과하였다. 이는 1992년 북경에 진출한 김혜민(흑룡강성 탕원현조선족중학교 일본어교원)이 꾸린 조선족유치원이었다. 이후 유치원은 교육프로그램, 기숙환경, 건강식 등 모든 면에서 부근 기타 유치원수준을 월등하여 현지역의 우수교육기관이라는 좋은 평판을 받는 한면 조선족어린이 내원의 불안정 때문에 2005년부터 한족아이들도 받기 시작하였다. 한족아이들도 조선말, 조선글을 잘 배웠다. 현재 유치원생 220명가운데 조선족이 3분지1정도 된다. 그리고 주변 소학교의 저학년 학생대상으로 방과후에 조선말, 조선글을 배워주고 있다.   7) 북경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 조선족부 1999년9월 북경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 조선족부가 설립되었고 최초에 44명의 소학생이 모였다. 형식은 조선족학생 단독반을 꾸리지 앟고 일반 수업은 부속소학교의 학생들과 같이 하고 과외만는 민족교육중심으로 조선어문과 민족전통문화를 배우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현지 교육질이 좋은 학교와 연합하여 민족교육의 장소를 마련하는 이러한 방식이 학부모들의 호응을 받아 조선족부의 학생수가 증가하는 추세가 보였고 부속소학교가 폐교하기 직전 이 학교에 조선족학생이 140여명이 되었다. 학생들이 내는 비용은 한 학기에 소학생은 3500원, 중학생은 4500원이다. 이 비용에는 부속소학교에 내는 의탁 수업비 1000원과 식비, 기숙사운영,민족교육인력 사용 등이 포함되었다.   8) 북경 삼강학원 2005년 7월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가 폐교되고 해정구 실험소학교와 합병되면서 조선족부 학생도 실험소학교로 전이되고 삼강학원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조선족학생이 115명이었으며 그 후 한때는 학생이 170여명까지 되었다(이 가운데 한족학생이 30명). 하지만 실험소학교에서 매 학생당 2만원의 찬조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조선족학생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한족학생이 증가되는 추세로 2008년에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다.   9) 청도벽산조선족학교 청도조선족학교은 청도시 교육당국으로부터 공식허가를 받은 사립학교로 2000년 8월 28일에 개학하였으며 그 때 학생이 13명이었고 학교는 이창구 구수로에 있었다. 2001년 5월 필자가 방문할 시기 학생이 60명(1--4학년생)되고 교원이 14명 있었다. 2004년3월 청도벽산소학교로 개칭하였고 교사를 이창구 천수로에 옮겼다. 2006년에는 학생이 200명이고 교원은 35명이며 3기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아 졸업생들은 현지 한족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나 2007년9월에는 중학부가 설치되었다. 근 10년간의 발전을 거쳐 학교는 초보적으로 규모를 갖추고 학교운영도 정규화에로 나아가고 있으며 지금 소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전부 과목을 개설하고 유치원과 주말한글학교를 부설했다. 하지만 교사는 여전히 임대한 상태이다. 학교에는 지금 소학생 300여명, 유치원생 213명, 교직원 50여명(50%가 한족, 50%가 조선족)을 갖고있다. 학교에서는 청도시 시구의 소학교 통일교과서를 채용하고 조선어과목과 영어회화(외국인 교원) 등 특색언어과목을 증설했으며 조선어, 영어회화와 음악을 제외한 기타 과목은 모두 한어로 수업하여 학생과 의무교육의 동기성을 보장함으로 조선어, 한어, 영어 "세가지 언어 교학"을 실현했다. 현재(2009년5월) 새로운 교사를 건축하고 있는바 부지가 약 61,540평방메터이고 건축면적이 22,000평방메터 되며 2012년8월에는 준공될 계획이다. 그 때 학생규모는 총1500명으로 소학생 720명, 중학생360명, 고등학생 360명, 그리고 유치원생220명 등으로 전망하고 있다.   10) 청도 서원장조선족학교 2006년8월 청도서원장조선족학교는 벽산조선족학교의 초대교장 김장웅선생이 설립했다. 2006년 7월 1일, 김장웅선생은 서원장촌 교사를 임대하여 먼저 서원장조선족유치원을 설립한뒤 8월 28일에 서원장소학교를 설립했다. 지금 서원장조선족유치원과 소학교는 재학생 500여명을 갖고있다. 민영 유치원과 학교이다 보니 학교는 장기간 결손상태에 처해 있으며 2008년만 해도 10만원의 결손을 보았다. 도시민족교육의 특수성으로 학교운영 경비가 보통학교보다 더 지출된다. 왜냐하면 산재하므로 학생수가 적고 학교규모가 크지 않지만 교직원편제와 정상적 경비지출이 보통학교보다 많을 수 밖에 없으므로 재정적으로 더욱 큰 어려움이 있다. 위에서 보다시피 민족교육의 필요로 산해관이남지역에 여러 형식의 민족교육기구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현지정부의 해당정책미비, 재정적 어려움 등 여러 원인으로 어떤 곳에서는 폐교가 되고 어떤 곳에서는 어렵게 운영하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운영자체의 성격을 바꾸기도 하였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현황은 낙관적이 못 된다.  산해관이남지역에서 민족교육기관의 성쇄원인 가운데 하나는 조선족학부모들의 민족교육의욕이 약화되면서 그들은 자녀을 학교에 보내면서도 수학, 영어, 어문 등을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민족언어, 민족문화 터득에는 열성이 부족하였다. 두번째는 의무교육접수에 비해 10배내지 더 많은 경비부담을 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는 정부의 정책적,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9    1.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댓글:  조회:2209  추천:0  2012-07-31
    산해관이남지역으로 조선족인구의 다량적인 이동은 이 지역에 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초래하였지만 현재까지 산해관이남지역의 조선족사회현황과 민족교육현황에 대한 파악과 연구는 아주 결핍하였다. 아래는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사회 및  민족교육문제에 대한 필자의 초보적인 연구결과물이다. 이 글이 우리사회에서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사회와 민족교육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과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필자로 부터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목  차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서언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조선족은 도시진출, 국외진출가운데서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얻었지만 사회발전도상의 “진통”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인구이동으로 인한 농촌의 황폐화 현상과 민족집결지역의 축소 등은 민족의 정상적인 발전에 많은 저해를 주고 있다. 이 가운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민족교육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교육의 지역범위를 말하면 민족자치지역과 민족산재지역, 즉 집거지역의 민족교육과 산재지역의 민족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중국조선족의 민족자치지역으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밖에 없다. 이외에 조선족들은 민족향을 포함한 기타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곳을 민족산재지역이라고 한다. 물론 산재지역이라고 하지만 조선족들은 여러 지역에서 향, 촌 단위로 상대적으로 집중거주하고 있음으로 민족학교를 운영하는 등 민족교육을 실행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민족교육의 보급과 발전은 조선족의 위상향상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민족교육이 인구이동, 인구감소와 더불어 현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특히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임하여 있다.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1)민족교육의 중요성 매개 민족은 자기가 보유한 여러 특징으로 타민족과 구별된다. 중국조선족의 특징은 주요하게 언어문자와 역사에 기초한 전통문화에서 주로 표현되고있다. 지금까지 중국조선족은 한문화의 겹겹 포위속에서 비교적 완전하게 민족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중국조선족이 민족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민족교육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민족의 전면적인 발전, 민족성유지와 민족문화전승에 없어서는 안될 요인의 하나가 바로 민족교육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면: 첫째, 민족교육은 민족성원들의 과학문화적 소질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조선족교육의 특징의 하나가 조선말이 교학언어로 되어있는 점이다. 민족언어는 그 민족이 제일 많이 사용하고 또 제일 쉽게 터득할수 있는 언어이다. 때문에 본 민족의 언어문자로 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사실은 교육을 보급하고 민족성원들의 과학문화적 소질을 높이는데 아주 유리하다. 그리고 조선족의 문화교육보급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문맹률이 중국 각 민족가운데 제일 낮은 사실에서도 조선어가 수업언어인 민족교육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점을 말한다. 둘째, 민족교육은 민족의 우수한 인재양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교육의 기능에 있어서 하나는 문화를 보급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민족교육은 민족성원들에게 기초지식과 문화를 보급하는 동시에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준다. 때문에 민족교육의 건전한 발전은 민족의 인재양성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있다. 셋째, 민족교육은 민족언어와 문자의 사용과 발전을 추진하고있다. 민족언어문자의 교학은 민족교육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구성부문이다.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성원들은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장악하고 그의 사용범위를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또 민족언어문자의 연구를 추진시킨다. 따라서 민족교육은 민족언어문자의 보존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넷째, 민족교육은 민족의 력사와 전통을 대대로 전수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민족언어문자는 민족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로 세계상의 모든 문화는 그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민족역사와 문화도 민족언어 또는 문자를 통하여 대대로 전하게 된다. 때문에 민족역사를 후세에 알리며 민족문화전통을 전승하고 발전하는데 있어서 민족의 언어문자를 떠날 수 없다. 만약 민족언어문자를 장악하지 않으면 민족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깊이 있게 장악할 수가 없다. 민족교육이 민족전통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기여는 아무리 높게 평가하여도 과분하지 않다. 다섯째,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키울수 있다. 민족교육은 민족학생들에게 지식만 배우주는 것이 아니고 민족성원들의 민족적 자신심과 긍지심을 심어주는데도 중요한 작용을 하고있다. 예컨데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선양하고 민족의 우수한 인물들을 소개하며 조선족이 중국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실을 널리 알림으로 민족적 긍지심과 자신심을 키워주는 것이다. 2) 중국에서의 조선족교육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민 온 과경민족(跨境民族)으로 중국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국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동북변강의 개척과 건설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수전농사의 성공으로 중국북방의 벼재배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신민주주의혁명의 각 시기마다 적극 참가하여 중대한 기여를 하였고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시기에도 앞장에 섰다. 그리고 조선족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우량한 전통이 있어 교육보급과 문화수준이 국내 기타민족보다 높았다. 1990년 중국인구 센서스자료에 의하면 중국 총인구 가운데 초등학교이상 교육을 받은 비율은 전 중국 평균수준은 69.81%이고, 한족수준은 70.67%이며 소수민족 평균수준은 60.60%인데 비해 조선족수준은 82.75%에 달하였다. 교육인구의 매 만명가운데 대학수준 소유자 숫자를 보면, 전국 평균수준은 78명이고 한족은 79명이며 소수민족평균은 61명인데 비해 조선족은 227명에 달하였다. 또 15세 이상의 인구 문맹률을 볼 때, 중국 총체의 평균 문맹률은 22.21%이고, 소수민족의 평균 문맹률은 30.83%에 달하며 한족의 문맹률은 21.53%이다. 이에 비해 조선족의 문맹률은 7.00%밖에 되지 않았다. 15ㅡ39세 연령층의 조선족 문맹률은 0.49%에 불과하지만 한족의 문맹률은 8.75%에 달하였다. 교육연한을 보면 전 중국 평균수준은 6.25년이고 소수민족 평균은 5.29년이나 조선족은 8.52년에 달하였다.  2000년 중국 제5차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대학수준 소유자 숫자를 보면 중국평균수준은 매 만명에 122명이고 한족은 126명에 비해 조선족은 381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석, 박사은 중국평균이 매 만명가운데 8명이고 한족 역시 8명이나 중국조선족은 17명에 달하였다. 조선족은 문화를 숭상하고 교육을 중요시하는 우수한 전통을 갖고 있다. 어려운 이주와 정착시기에도 우리 선조들은 이 전통만은 잊지 않고 마을이 생기는 대로 자기들의 말과 글을 배우고 민족문화를 터득하는 민족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 중국 건립이후 상대적인 안정속에서 조선족교육은 신속한 발전기를 맞이하였으며 그 수준은 중국에서 앞섰다. 단적인 예로 1949년 중국에서 첫 번째로 되는 민족대학―연변대학이 연길에 설립되었고 1958년에는 중국에서 첫 번째의 농민대학―새벽농민대학이 용정에 세워졌다. 그리고 1952년에 조선족지역에는 초등교육이 보급되었고 1958년에는 중학교교육이 기본적으로 보급되었다. 이것은 중국 어느 민족보다 높은 문화교육보급수준이었다. 그리고 1995년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등이 합병되기전의 몇 십년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내에 3-4개의 대학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의 같은 행정구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경관이었다. 조선족교육보급수준이 중국에서 앞선 원인에는 조선족이 문화와 교육을 숭상하고 민족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조선족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장소가 있기 때문에 민족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도 가필하여야 한다. 조선족은 이주시기부터 모여 생활하는 집단마을을 건설하여 인구의 다수가 농촌마을을 단위로 집결해 있었다. 이러한 민족촌락 공동체는 민족교육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8    中国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中的朝鲜族官兵及其伟绩 댓글:  조회:5306  추천:0  2011-12-05
中国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中的朝鲜族官兵及其伟绩     内容提要:中国朝鲜族具有光荣的革命传统,他们与兄弟民族一道共同开发了东北边疆,共同抗击了日本侵略者,并为全中国的解放做出了重要贡献。其中,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内的朝鲜族官兵不怕流血牺牲,英勇善战,建立卓越战功,为中国朝鲜族光荣的革命史册里留下了一笔重重的笔墨。 关键词:中国解放战争   朝鲜族官兵  伟绩   中国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中有6万多名朝鲜族官兵,他们不怕牺牲,英勇善战,谱写了许多可歌可泣的历史篇章,为解放战争的胜利做出了突出的贡献。借此,就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中的官兵及其对解放战争的贡献予以简述。   一、解放战争初期东北地区的朝鲜族人口   朝鲜族是我国跨界民族之一,他们从朝鲜半岛迁移、定居至我国东北地区的过程,也是逐渐成为中华民族大家庭成员的过程。朝鲜族先民开始越过鸭绿江、图们江,落根于中国东北地区,可追溯至明末清初。然而,他们连续大量地移居中国,却是19世纪60年代以后的事情。朝鲜族移居、定居过程,可分三大阶段:     第一阶段为19世纪60年代至1910年,主要是苦于生计的人们的自由流入。1860年以后朝鲜半岛北部遭受了连续几年的自然灾害,广大朝鲜农民纷纷背井离乡,不顾两国政府的封禁,“冒禁潜入”越江到中国东北垦荒种地或挖参打猎。1885年以后,随着封禁令的废除,更多的朝鲜农民移居至中国东北。     第二阶段为1910年日本强迫朝鲜政府签订《韩日合并条约》,朝鲜沦为日本殖民地至1931年“九·一八”事变以前。这一时期,除了破产的朝鲜农民继续移居中国东北地区以外,还有工人、知识分子、军人等各个阶层的人,其中许多人是为抗日救国而来。据统计,到1922年居住在我国东北地区的朝鲜人已有651,096名。[①]     第三阶段为1931年“九·一八”事变以后至1945年日本战败止。这一时期的特点是,日本帝国主义的强制移民。“九·一八”事变以后,日本为了加强对东北地区的统治,组织日本农民移入东北地区的同时,还强制朝鲜人移居我国东北。据1940年8月统计,自1937年到1940年,日本以“集团开拓民”名义强制移民到东北各地的朝鲜农户就达14,725户。[②] 经过上述几个阶段的移居流动过程,到1945年日本战败前夕在华朝鲜人数量达216万5615人。[③] 1945年8月日本投降以后,大批朝鲜人开始陆续返回朝鲜半岛,其人数达100多万。当时,与分布于关内的朝鲜人大部分返回朝鲜相比,居住历史较长的东北地区的朝鲜人中许多却没有返回。据不完全统计,到1947年东北境内朝鲜族人口约110万名,他们的大概分布如下:国民党统治区内有210953名,延边地区521900名,通化地区73918名,牡丹江地区108611名,松江地区64585名,合江地区42134名,内蒙古地区5718名等。此外,黑河、龙江、热河及旅顺、大连等地区也有一些分布。[④]这些没有返回朝鲜半岛的朝鲜人构成了中国朝鲜族社会的主流。   二、人民军队中的朝鲜族官兵   抗战胜利前后,中国共产党把握时局,很快将注意力集中于东北地区,把东北问题看作战后全局工作中的“重中之重”。毛泽东曾在中共七大上说:“东北是一个极其重要的区域,将来有可能在我们的领导下,如果东北能在我们领导之下,那对中国革命有什么意义呢?我看可以这样说:我们的胜利就有了基础,也就是确定了我们的胜利。”[⑤]此后不久,毛泽东将东北地区重要性提得更高,说“从我们党,从中国革命的最近将来的前途看,东北是特别重要。如果我们把现有的一切根据地都丢了,只要我们有了东北,那末中国革命就有了巩固的基础。当然,其他根据地没有丢,我们又有了东北,中国革命的基础就更巩固了。”[⑥] 1945年8月8日,苏联宣布对日作战。150万苏联红军大举跨过边境进入我国东北地区,迅速控制东北各大城市和主要交通线。8月15日,日本天皇裕仁向公众宣布无条件投降,到8月底日本在东北的关东军全部被解除武装。中国共产党把握时机,立刻采取了相应行动。8月10日,朱德总司令发出第二号命令,要求原东北军吕正操、张学思、万毅部和现驻冀热辽边境的李运昌部立刻向东北和内蒙地区进发,以“配合苏联红军进入中国境内作战,并准受日‘满’敌伪军投降”。[⑦]与此同时,八路军总部派遣大批干部和朝鲜义勇军部队前往东北地区,并调遣10万大军陆续进入东北。 东北是朝鲜族人口聚居地区,他们的主要活动舞台也在东北地区。朝鲜族人民具有优良的革命传统,他们在中国共产党领导下,积极投身于东北解放战争,建立革命武装力量,为中国的解放事业做出了不朽的贡献。 1945年8月,与苏联红军一同进入东北地区的东北抗联部队里的朝鲜族指战员和与八路军一同进入东北的朝鲜义勇军指战员在东满、北满、南满等朝鲜族聚居地区,秘密建立中共组织和各种形式的群众革命团体。例如,以姜信泰为首的抗联延吉分遣队在延吉、汪清、龙井、和龙积极建立中共党组织,1945年10月在此基础上建立中共延边委员会。分遣队还在延边五县先后成立工农青妇总同盟,后改称延边民主大同盟。 同时,他们还积极组织朝鲜族为主的武装队伍。例如,由八路军冀热辽军区派遣到沈阳进行地下工作的韩清在沈阳、营口一带组织了朝鲜义勇军先遣纵队,金泽明在哈尔滨组织吉黑保安总队朝鲜独立大队,金光侠在牡丹江组建高丽警察队,姜信泰在延吉组建了延边警备团等。而且,进军东北的朝鲜义勇军组建第一、第三、第五支队活动于南满、北满、东满,其中第五支队到吉林地区后,其部分兵力与当地武装队伍联合组建了第七支队。 这些武装队伍在清剿土匪、肃清敌伪残余等斗争中不断发展壮大,而随着解放战争的深化,逐渐编入中国人民解放军正规部队,这些朝鲜族官兵集中于3个“朝鲜族师”和一个“朝鲜族团”。它们分别是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166师、164师、156师和141师的“朝鲜团”,成为人民军队内朝鲜族官兵的主要组成部分。 166师的前身为朝鲜义勇军第1支队。朝鲜义勇军第1支队由通化、柳河、清原3个朝鲜族中队和集安、桓仁两个朝鲜族大队合编,后易名为李红光支队。该支队成立后,即在通化一带担任保卫地方和剿匪任务,支队兵力5000余人,主要在南满进行游击战争。1948年4月,李红光支队改称东北人民解放军独立第4师,下辖3个团,归辽东军区建制。1948年11月,改称中国人民解放军第166师,辖第496、第497、第498团,改归东北军区指挥。这个师干部战士绝大多数为朝鲜族,战斗力强。 164师前身为朝鲜义勇军第3支队,它主要活动于北满地区。1948年3月,以朝鲜义勇军第三支队改编的松江军区独立8团和朝鲜义勇军第7支队改编的吉南军分区72团及牡丹江军区独立3团为基础,组建东北人民解放军独立11师,11月改称中国人民解放军第164师,辖第490、第491、第492团,该师8000多人,营以下指战员都是朝鲜族。 156师前身为朝鲜义勇军第5支队,它在吉林朝鲜族聚居地区建立革命政权、进行土地改革和清剿土匪中逐渐壮大。1946年1月朝鲜义勇军第5支队合并延边警备1团、2团改建为朝鲜义勇军第15、第16团,后15团改编为吉林军区3团,与独立6团、和吉南军分区独立71团.合编为独立6师,后改称中国人民解放军156师,辖第466、第467、第468团,配属43军建制。这是一支以朝鲜族为主的朝汉族混合部队,其中466团除2连两个排是汉族官兵外,均是朝鲜族官兵;467团1营为汉族官兵,2、3营及团直均为朝鲜族官兵;468团除直属警卫连为朝鲜族官兵外,其余是汉族官兵。 而延边警备2团改建的16团与独立4团合并成为东满独立师,后与独立1师(359旅)、独立3师(东满与合江部队)合并成为中国人民解放军47军的141师的“朝鲜族团”。 除了上述朝鲜族官兵比较集中的3个正规师和一个正规团以外,许多朝鲜族官兵还活跃于炮兵、工兵、铁道兵等兵种在内的东北人民解放军各主力部队之中,如解放战争时期,中国人民解放军铁道兵部队内就有3000多名朝鲜族指战员。[⑧]   三、朝鲜族官兵的丰功伟绩   在解放战争时期,这些以朝鲜族官兵为主体的3个“朝鲜族师”和141师“朝鲜族团”以及活动于其他部队内的朝鲜族官兵,不怕牺牲,英勇善战,建立卓越战功,为新中国的建立做出了突出贡献。 首先,积极参与清剿土匪战斗,为创建和巩固东北根据地做出积极贡献。 日本宣布投降后,东北成为国共两党激烈争夺的地区。国民党为抢占东北,派遣大批特务、“接收要员”等进人东北地区,收编委任敌伪残余(伪官吏、警察、宪兵)、惯匪和被清算的地主恶霸等,组成所谓的“地下军”、“先遣军”、“保安军”、“忠义救国军”等反动武装。据统计,国民党在东北组织的匪伪系统就有16个,有37种名目,先后委任“总司令”和“总指挥”32个、“军长”33名,“师长”158个。[⑨]到1945年12月,土匪活动达到最高峰时,其总数达10万人左右,较大土匪群有3千至5千人。当时,延边及其周围地区的武装土匪就有1万多,北满地区三分之二县城由政治土匪所控制。这些土匪武装大肆进行骚扰破坏,迫害群众,严重威胁我东北根据地的建立和巩固。     中共东北局和东北民主联军总部根据党中央关于建立巩固东北根据地的指示,在东满、北满和部分南满地区开展了大规模的剿匪斗争,由朝鲜族组成的队伍跟随各地主力部队投入剿匪斗争。在东满,1946年1月,延吉、和龙警备团捣毁安图县土匪据点,歼灭其主力,俘虏350多名;2月,吉东警备1团围剿汪清县庙岭、天桥岭一带土匪,俘虏土匪780多名;警备2团配合汪清保安团围剿罗子沟一带土匪,俘虏土匪600多人,又配合牡丹江剿匪部队在老黑山一带消灭土匪390多人;在北满,松江第3支队和牡丹江第2支队分别在阿城、马莲河、马桥河等地歼灭了谢文东、马喜山等残余土匪。[⑩]1946年6月,歼灭土匪大小数百股,在东满、北满公开活动的土匪基本被肃清。在清剿土匪斗争中,朝鲜族指战员不怕牺牲,数以千计的朝鲜族指战员献出生命,为解除匪患做出贡献。 朝鲜族组成的部队不仅在清剿土匪中表现突出,他们还阶级立场坚定,不为敌伪策反所动摇。在解放战争初期,由于国民党军队大举进攻且深入东北,形势一时不利于我,导致了新组建的我地方武装纷纷叛变。在各地众多武装叛变事件中,唯朝鲜族武装变质较少,且对敌斗争意志坚决。例如,日本投降后,磐石组建县大队武装共3个连.其中两个连由朝鲜族战士组成。1946年5月底,迫于美式装备的国民党军队的进攻,中共磐石县委领导率领县大队及时撤离县城,当撤退至细林区大黑崴子时,汉族连发生动摇,连长带着该连多数人叛离逃跑,而两个朝鲜族连没有一人离队,他们在危机时刻保卫了县委机关领导;[⑪]再如,1946年春,有一次土匪武装包围了中共敦化县委领导机关,当时县委属下有八个武装大队,但其中七个大队都投敌,只要一个朝鲜族大队顽强战斗打退了敌人的进攻,保卫了县委机关。[⑫]     其次,朝鲜族官兵英勇善战,为东北解放战争做出突出贡献。     1946年6月,蒋介石发动全面内战,在东北占领四平、长春等地。10月,再次对东北解放区发动大规模进攻。面对国民党军队的大举进犯,解放区的朝鲜族人民与其他民族一起为粉碎国民党军队的军事进攻,保卫解放区,积极地参军参战。在解放战争时期,参军的朝鲜族青壮年达62942名,占东北解放区朝鲜族人口总数的5%以上,延边五县有34855名参军,占该地参军总数的85%。[⑬] 那时,参军的朝鲜族战士大都被编入东北民主联军第10纵队第28、29、30师,同时在延边、牡丹江、通化、哈尔滨和吉林等地组建朝鲜族为主的东北军区直属的3个独立师,这些部队在东北曾参加过“三下江南”、“四保临江”战役,参加四平保卫战和攻坚战,参加解放吉林、长春战役和辽沈战役等。 朝鲜族指战员不怕牺牲,顽强杀敌,涌现出许多战斗英雄和模范集体。例如,原吉东警备1旅1团团长朴洛权参加第一次解放长春战斗时,指挥正面攻击部队向敌军总指挥部——伪满中央银行大楼发起攻击,他身负重伤仍继续指挥战斗,然伤势过重壮烈牺牲;韩永权曾在四平战役和辽沈战役中,荣立3次大功,成为有名的战斗英雄;金学镇在长春、锦州、辽沈和平津等战役中,荣立7次大功和1次特等功,被授予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特种兵模范共产党员称号等;由汪清县朝鲜族组成的某部金成范连,在1947年攻打长春东站战斗中,仅用8分钟攻下敌人堡垒,俘虏敌人70多名,荣获“战斗模范连”称号和“猛打猛冲”奖旗;1948年辽沈战役黑山阻击战中,由五常县和延吉县朝鲜族组成的某部8连在大白屯战斗中用2个排的兵力击退了敌人2个营的5次进攻。在高家窝棚、黄家窝棚战斗中,全连消灭敌军846名,摧毁敌14师师部。由金在范等3人战斗小组曾摧毁20个敌军火力点,俘敌150多名,缴获步枪80支、轻重机枪13挺和炮1门。全连127名,除1名战士立2次小功外,都曾荣立了大功,其中20名荣立两次大功,1排被授予“英雄排”称号,8连获一面“钢铁连守得顽强,攻得勇敢”的锦旗,由此被誉为“钢八连”。这些英雄和战斗模范集体举不胜数,朝鲜族官兵在东北解放战争中立下了汗马功劳,为东北解放做出了突出的贡献。 第三,随大军南下,为全国解放战争做出应有贡献。 东北解放后,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挥师南下,参加平津、中南战役等,转战10多个省区一直打到海南岛。“四野”中的朝鲜族指战员继续发扬大无畏革命精神,英勇善战,勇敢杀敌,在各个战场打出威风。例如,某部“钢八连”随大部队挺进重庆途中,奉命奔驻大庸县城的敌122军军部和所属主力,在大庸外围战斗中,李斗燮等3名战士生俘逃敌174名,缴获重机枪二挺、炮一门及各种枪械140余支,而解放大庸战斗中“钢八连”取得歼敌750多名的战绩,师党委授予“钢八连”的锦旗上写道:“奖给在解放战争中战功卓著,大庸战役中起决定作用的钢八连”,由此在当地威名远扬“东北虎”的传说;[⑭]长江渡江战役时,在四野渡江的突破口团风战役中,156师466团担任主攻任务,并任命为渡江先锋团,团政委全宇(后任156师副师长、独立15师师长)亲赴营连做战前动员,经过3个小时的激烈战斗,466团击毙击伤敌军489名,全部缴获集中于码头大型木船68只。团风战斗是黄冈解放的标志,也是四野渡江战役的前奏曲。[⑮]海南岛渡海战役时,四野第40军所属的300多名朝鲜族组成的炮兵营将炮装在12支竹船,在敌军飞机、军舰堵截下安全护卫500多只运兵木船渡海成为解放军和当地群众中传为以竹船击退美制军舰的美谈。 在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内的朝鲜族官兵同其他各民族指战员一道,不怕牺牲,英勇善战,消灭敌人,战功卓著,为全中国的解放做出了突出的贡献,赢得了荣誉。同时,也付出了重大的牺牲,数以千计的朝鲜族指战员在各种战斗中献出了宝贵的生命。例如,在北满剿匪战斗时,1946年3月马桥河战斗中,93名朝鲜族指战员英勇牺牲。1946年9月,舍利屯战斗中,朝鲜义勇军3支队第3大队第7中队的中队长、副中队长等21名朝鲜族指战员牺牲。1948年3月,北古流战斗中,我军指战员牺牲26人,其中朝鲜族22名等;[⑯]1948年10月黑山阻击战中的黄家窝棚战斗后,参战的127名“钢八连”指战员大都牺牲,只剩下20多名;[⑰]156师466团在横渡长江的团风战役中,负伤、牺牲115名,其中牺牲43名,牺牲者中多数为朝鲜族。[⑱]如此等等,在解放战争时期,有3550多名朝鲜族指战员光荣牺牲,其中吉林省3262名,原松江省521名,原辽东省264名;[⑲]在延边,解放战争时期,共有烈士4313名,其中朝鲜族3713名,占烈士总数的86%。从朝鲜族烈士职务看,有9名团长、18名营长、90名连长、253名排长及547名班长。[⑳] 朝鲜族具有光荣的革命传统,他们与其他民族一道不仅为东北地区的开发建设,抗击日本侵略者做出了重要的贡献,而且为保卫抗战胜利果实,打倒国民党反动统治,建立新中国做出了积极的贡献。正如《人民日报》刊文所说的那样“在三年的解放战争中,五万以上的朝鲜人民志愿地参加了中国人民解放军,在从东北一路解放到海南岛的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中,多少万新的老的朝鲜同志英勇负责地站在各种岗位上。他们从司令员到战士,从炮手到坦克手,从开卡车到挖地雷,从医生到护士,从多少重要的艰苦的岗位上,从多少壮烈的决定性的战役里,涌现了无数的英雄模范。尤其值得我们深记不忘的是:数不清的朝鲜兄弟,为打倒我们共同的敌人流尽了他们最后的一滴血。在后方,上百万朝鲜人民热烈地生产支前,保证了中国革命的胜利。”[21]      The Korean`s Peope in People`s Army and Their Feats during Liberation War   ABSTRACT: The Korean group of China have a glorious revolutionary tradition. They exploited the Northeast frontier with other ethnic groups, fighted Japanese invaders, made important contributions to the liberation of China. In the China`s War of Libertatin, the soldiers of Korean group did not afraid of blooding and sacrifice heroically. They left a heavy ink in the glorious revolutionary history of Korean group.   KEY WORDS: China's War of Liberation , Soldiers of Korean Group,  Great Feats   港东航的、 *郑信哲,中国社会科学院民族学与人类学研究所研究员,历史学博士。 [①]王慕宁编译:《东三省实况》,上海中华书局,1929,第29-30页。 [②]朝鲜总督府:《朝鲜事情》,1941,第282页。 [③][韩]玄奎焕:《韩国流移民史》(上),语文阁,韩国汉城,1967,第664页。 [④]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2页。 [⑤]《毛泽东文集》第3卷,人民出版社1996年版,第410页。 [⑥]《毛泽东文集》第3卷,人民出版社,1996,第426页。 [⑦]《中共中央文件选集》第15册,中共中央党校出版社,1991,第219页。   [⑧]李政文:《在铁道兵部队的朝鲜族指战员们》,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694页。 [⑨]http://mwc8589.blog.163.com/blog/static/89720757201012242843865/ [⑩]《朝鲜族简史》,延边人民出版社,1986,第174页。 [⑪]金应三:《保卫磐石县领导机关的朝鲜族连》,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584-586页。 [⑫]刘俊秀:《在朝鲜族人民之中》,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710-711页。 [⑬]《朝鲜族简史》,延边人民出版社,1986,第186页。   [⑭]金宇钟李炳哲:《朝鲜族人民在东北解放战争中的贡献》,韩俊光金元石主编::《中国朝鲜族历史研究论丛》2,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2,第71页。 [⑮]《渡江战役的进军号在这里吹响——纪念团风解放和渡江战役胜利六十周年》,http://www.tfzf.gov.cn/Article/tfa/tfah/HSTF/200905/601.html(团风政府网);《156师实战录》(朝文),延边教育出版社,2002,第309页。 [⑯] 徐基述主编:《黑龙江朝鲜民族》,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88,第92、96-97页。 [⑰] 金教镇等:《钢铁八连》,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359页。 [⑱]《渡江战役的进军号在这里吹响——纪念团风解放和渡江战役胜利六十周年》,ttp://www.tfzf.gov.cn/Article/tfa/tfah/HSTF/200905/601.html(团风政府网) [⑲]《朝鲜族简史》,延边人民出版社,1986,第189页。 [⑳]《从“数字”看延边革命烈士》,《辽宁朝鲜文报》,2011年4月19日,第4版。 [21] 陈明:《中国东北境内的朝鲜民族》,《人民日报》1950年12月6日,第3版。 中国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中的朝鲜族官兵及其伟绩   郑信哲*    内容提要:中国朝鲜族具有光荣的革命传统,他们与兄弟民族一道共同开发了东北边疆,共同抗击了日本侵略者,并为全中国的解放做出了重要贡献。其中,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内的朝鲜族官兵不怕流血牺牲,英勇善战,建立卓越战功,为中国朝鲜族光荣的革命史册里留下了一笔重重的笔墨。 关键词:中国解放战争   朝鲜族官兵  伟绩   中国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中有6万多名朝鲜族官兵,他们不怕牺牲,英勇善战,谱写了许多可歌可泣的历史篇章,为解放战争的胜利做出了突出的贡献。借此,就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中的官兵及其对解放战争的贡献予以简述。   一、解放战争初期东北地区的朝鲜族人口   朝鲜族是我国跨界民族之一,他们从朝鲜半岛迁移、定居至我国东北地区的过程,也是逐渐成为中华民族大家庭成员的过程。朝鲜族先民开始越过鸭绿江、图们江,落根于中国东北地区,可追溯至明末清初。然而,他们连续大量地移居中国,却是19世纪60年代以后的事情。朝鲜族移居、定居过程,可分三大阶段:     第一阶段为19世纪60年代至1910年,主要是苦于生计的人们的自由流入。1860年以后朝鲜半岛北部遭受了连续几年的自然灾害,广大朝鲜农民纷纷背井离乡,不顾两国政府的封禁,“冒禁潜入”越江到中国东北垦荒种地或挖参打猎。1885年以后,随着封禁令的废除,更多的朝鲜农民移居至中国东北。     第二阶段为1910年日本强迫朝鲜政府签订《韩日合并条约》,朝鲜沦为日本殖民地至1931年“九·一八”事变以前。这一时期,除了破产的朝鲜农民继续移居中国东北地区以外,还有工人、知识分子、军人等各个阶层的人,其中许多人是为抗日救国而来。据统计,到1922年居住在我国东北地区的朝鲜人已有651,096名。[①]     第三阶段为1931年“九·一八”事变以后至1945年日本战败止。这一时期的特点是,日本帝国主义的强制移民。“九·一八”事变以后,日本为了加强对东北地区的统治,组织日本农民移入东北地区的同时,还强制朝鲜人移居我国东北。据1940年8月统计,自1937年到1940年,日本以“集团开拓民”名义强制移民到东北各地的朝鲜农户就达14,725户。[②] 经过上述几个阶段的移居流动过程,到1945年日本战败前夕在华朝鲜人数量达216万5615人。[③] 1945年8月日本投降以后,大批朝鲜人开始陆续返回朝鲜半岛,其人数达100多万。当时,与分布于关内的朝鲜人大部分返回朝鲜相比,居住历史较长的东北地区的朝鲜人中许多却没有返回。据不完全统计,到1947年东北境内朝鲜族人口约110万名,他们的大概分布如下:国民党统治区内有210953名,延边地区521900名,通化地区73918名,牡丹江地区108611名,松江地区64585名,合江地区42134名,内蒙古地区5718名等。此外,黑河、龙江、热河及旅顺、大连等地区也有一些分布。[④]这些没有返回朝鲜半岛的朝鲜人构成了中国朝鲜族社会的主流。   二、人民军队中的朝鲜族官兵   抗战胜利前后,中国共产党把握时局,很快将注意力集中于东北地区,把东北问题看作战后全局工作中的“重中之重”。毛泽东曾在中共七大上说:“东北是一个极其重要的区域,将来有可能在我们的领导下,如果东北能在我们领导之下,那对中国革命有什么意义呢?我看可以这样说:我们的胜利就有了基础,也就是确定了我们的胜利。”[⑤]此后不久,毛泽东将东北地区重要性提得更高,说“从我们党,从中国革命的最近将来的前途看,东北是特别重要。如果我们把现有的一切根据地都丢了,只要我们有了东北,那末中国革命就有了巩固的基础。当然,其他根据地没有丢,我们又有了东北,中国革命的基础就更巩固了。”[⑥] 1945年8月8日,苏联宣布对日作战。150万苏联红军大举跨过边境进入我国东北地区,迅速控制东北各大城市和主要交通线。8月15日,日本天皇裕仁向公众宣布无条件投降,到8月底日本在东北的关东军全部被解除武装。中国共产党把握时机,立刻采取了相应行动。8月10日,朱德总司令发出第二号命令,要求原东北军吕正操、张学思、万毅部和现驻冀热辽边境的李运昌部立刻向东北和内蒙地区进发,以“配合苏联红军进入中国境内作战,并准受日‘满’敌伪军投降”。[⑦]与此同时,八路军总部派遣大批干部和朝鲜义勇军部队前往东北地区,并调遣10万大军陆续进入东北。 东北是朝鲜族人口聚居地区,他们的主要活动舞台也在东北地区。朝鲜族人民具有优良的革命传统,他们在中国共产党领导下,积极投身于东北解放战争,建立革命武装力量,为中国的解放事业做出了不朽的贡献。 1945年8月,与苏联红军一同进入东北地区的东北抗联部队里的朝鲜族指战员和与八路军一同进入东北的朝鲜义勇军指战员在东满、北满、南满等朝鲜族聚居地区,秘密建立中共组织和各种形式的群众革命团体。例如,以姜信泰为首的抗联延吉分遣队在延吉、汪清、龙井、和龙积极建立中共党组织,1945年10月在此基础上建立中共延边委员会。分遣队还在延边五县先后成立工农青妇总同盟,后改称延边民主大同盟。 同时,他们还积极组织朝鲜族为主的武装队伍。例如,由八路军冀热辽军区派遣到沈阳进行地下工作的韩清在沈阳、营口一带组织了朝鲜义勇军先遣纵队,金泽明在哈尔滨组织吉黑保安总队朝鲜独立大队,金光侠在牡丹江组建高丽警察队,姜信泰在延吉组建了延边警备团等。而且,进军东北的朝鲜义勇军组建第一、第三、第五支队活动于南满、北满、东满,其中第五支队到吉林地区后,其部分兵力与当地武装队伍联合组建了第七支队。 这些武装队伍在清剿土匪、肃清敌伪残余等斗争中不断发展壮大,而随着解放战争的深化,逐渐编入中国人民解放军正规部队,这些朝鲜族官兵集中于3个“朝鲜族师”和一个“朝鲜族团”。它们分别是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166师、164师、156师和141师的“朝鲜团”,成为人民军队内朝鲜族官兵的主要组成部分。 166师的前身为朝鲜义勇军第1支队。朝鲜义勇军第1支队由通化、柳河、清原3个朝鲜族中队和集安、桓仁两个朝鲜族大队合编,后易名为李红光支队。该支队成立后,即在通化一带担任保卫地方和剿匪任务,支队兵力5000余人,主要在南满进行游击战争。1948年4月,李红光支队改称东北人民解放军独立第4师,下辖3个团,归辽东军区建制。1948年11月,改称中国人民解放军第166师,辖第496、第497、第498团,改归东北军区指挥。这个师干部战士绝大多数为朝鲜族,战斗力强。 164师前身为朝鲜义勇军第3支队,它主要活动于北满地区。1948年3月,以朝鲜义勇军第三支队改编的松江军区独立8团和朝鲜义勇军第7支队改编的吉南军分区72团及牡丹江军区独立3团为基础,组建东北人民解放军独立11师,11月改称中国人民解放军第164师,辖第490、第491、第492团,该师8000多人,营以下指战员都是朝鲜族。 156师前身为朝鲜义勇军第5支队,它在吉林朝鲜族聚居地区建立革命政权、进行土地改革和清剿土匪中逐渐壮大。1946年1月朝鲜义勇军第5支队合并延边警备1团、2团改建为朝鲜义勇军第15、第16团,后15团改编为吉林军区3团,与独立6团、和吉南军分区独立71团.合编为独立6师,后改称中国人民解放军156师,辖第466、第467、第468团,配属43军建制。这是一支以朝鲜族为主的朝汉族混合部队,其中466团除2连两个排是汉族官兵外,均是朝鲜族官兵;467团1营为汉族官兵,2、3营及团直均为朝鲜族官兵;468团除直属警卫连为朝鲜族官兵外,其余是汉族官兵。 而延边警备2团改建的16团与独立4团合并成为东满独立师,后与独立1师(359旅)、独立3师(东满与合江部队)合并成为中国人民解放军47军的141师的“朝鲜族团”。 除了上述朝鲜族官兵比较集中的3个正规师和一个正规团以外,许多朝鲜族官兵还活跃于炮兵、工兵、铁道兵等兵种在内的东北人民解放军各主力部队之中,如解放战争时期,中国人民解放军铁道兵部队内就有3000多名朝鲜族指战员。[⑧]   三、朝鲜族官兵的丰功伟绩   在解放战争时期,这些以朝鲜族官兵为主体的3个“朝鲜族师”和141师“朝鲜族团”以及活动于其他部队内的朝鲜族官兵,不怕牺牲,英勇善战,建立卓越战功,为新中国的建立做出了突出贡献。 首先,积极参与清剿土匪战斗,为创建和巩固东北根据地做出积极贡献。 日本宣布投降后,东北成为国共两党激烈争夺的地区。国民党为抢占东北,派遣大批特务、“接收要员”等进人东北地区,收编委任敌伪残余(伪官吏、警察、宪兵)、惯匪和被清算的地主恶霸等,组成所谓的“地下军”、“先遣军”、“保安军”、“忠义救国军”等反动武装。据统计,国民党在东北组织的匪伪系统就有16个,有37种名目,先后委任“总司令”和“总指挥”32个、“军长”33名,“师长”158个。[⑨]到1945年12月,土匪活动达到最高峰时,其总数达10万人左右,较大土匪群有3千至5千人。当时,延边及其周围地区的武装土匪就有1万多,北满地区三分之二县城由政治土匪所控制。这些土匪武装大肆进行骚扰破坏,迫害群众,严重威胁我东北根据地的建立和巩固。     中共东北局和东北民主联军总部根据党中央关于建立巩固东北根据地的指示,在东满、北满和部分南满地区开展了大规模的剿匪斗争,由朝鲜族组成的队伍跟随各地主力部队投入剿匪斗争。在东满,1946年1月,延吉、和龙警备团捣毁安图县土匪据点,歼灭其主力,俘虏350多名;2月,吉东警备1团围剿汪清县庙岭、天桥岭一带土匪,俘虏土匪780多名;警备2团配合汪清保安团围剿罗子沟一带土匪,俘虏土匪600多人,又配合牡丹江剿匪部队在老黑山一带消灭土匪390多人;在北满,松江第3支队和牡丹江第2支队分别在阿城、马莲河、马桥河等地歼灭了谢文东、马喜山等残余土匪。[⑩]1946年6月,歼灭土匪大小数百股,在东满、北满公开活动的土匪基本被肃清。在清剿土匪斗争中,朝鲜族指战员不怕牺牲,数以千计的朝鲜族指战员献出生命,为解除匪患做出贡献。 朝鲜族组成的部队不仅在清剿土匪中表现突出,他们还阶级立场坚定,不为敌伪策反所动摇。在解放战争初期,由于国民党军队大举进攻且深入东北,形势一时不利于我,导致了新组建的我地方武装纷纷叛变。在各地众多武装叛变事件中,唯朝鲜族武装变质较少,且对敌斗争意志坚决。例如,日本投降后,磐石组建县大队武装共3个连.其中两个连由朝鲜族战士组成。1946年5月底,迫于美式装备的国民党军队的进攻,中共磐石县委领导率领县大队及时撤离县城,当撤退至细林区大黑崴子时,汉族连发生动摇,连长带着该连多数人叛离逃跑,而两个朝鲜族连没有一人离队,他们在危机时刻保卫了县委机关领导;[⑪]再如,1946年春,有一次土匪武装包围了中共敦化县委领导机关,当时县委属下有八个武装大队,但其中七个大队都投敌,只要一个朝鲜族大队顽强战斗打退了敌人的进攻,保卫了县委机关。[⑫]     其次,朝鲜族官兵英勇善战,为东北解放战争做出突出贡献。     1946年6月,蒋介石发动全面内战,在东北占领四平、长春等地。10月,再次对东北解放区发动大规模进攻。面对国民党军队的大举进犯,解放区的朝鲜族人民与其他民族一起为粉碎国民党军队的军事进攻,保卫解放区,积极地参军参战。在解放战争时期,参军的朝鲜族青壮年达62942名,占东北解放区朝鲜族人口总数的5%以上,延边五县有34855名参军,占该地参军总数的85%。[⑬] 那时,参军的朝鲜族战士大都被编入东北民主联军第10纵队第28、29、30师,同时在延边、牡丹江、通化、哈尔滨和吉林等地组建朝鲜族为主的东北军区直属的3个独立师,这些部队在东北曾参加过“三下江南”、“四保临江”战役,参加四平保卫战和攻坚战,参加解放吉林、长春战役和辽沈战役等。 朝鲜族指战员不怕牺牲,顽强杀敌,涌现出许多战斗英雄和模范集体。例如,原吉东警备1旅1团团长朴洛权参加第一次解放长春战斗时,指挥正面攻击部队向敌军总指挥部——伪满中央银行大楼发起攻击,他身负重伤仍继续指挥战斗,然伤势过重壮烈牺牲;韩永权曾在四平战役和辽沈战役中,荣立3次大功,成为有名的战斗英雄;金学镇在长春、锦州、辽沈和平津等战役中,荣立7次大功和1次特等功,被授予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特种兵模范共产党员称号等;由汪清县朝鲜族组成的某部金成范连,在1947年攻打长春东站战斗中,仅用8分钟攻下敌人堡垒,俘虏敌人70多名,荣获“战斗模范连”称号和“猛打猛冲”奖旗;1948年辽沈战役黑山阻击战中,由五常县和延吉县朝鲜族组成的某部8连在大白屯战斗中用2个排的兵力击退了敌人2个营的5次进攻。在高家窝棚、黄家窝棚战斗中,全连消灭敌军846名,摧毁敌14师师部。由金在范等3人战斗小组曾摧毁20个敌军火力点,俘敌150多名,缴获步枪80支、轻重机枪13挺和炮1门。全连127名,除1名战士立2次小功外,都曾荣立了大功,其中20名荣立两次大功,1排被授予“英雄排”称号,8连获一面“钢铁连守得顽强,攻得勇敢”的锦旗,由此被誉为“钢八连”。这些英雄和战斗模范集体举不胜数,朝鲜族官兵在东北解放战争中立下了汗马功劳,为东北解放做出了突出的贡献。 第三,随大军南下,为全国解放战争做出应有贡献。 东北解放后,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挥师南下,参加平津、中南战役等,转战10多个省区一直打到海南岛。“四野”中的朝鲜族指战员继续发扬大无畏革命精神,英勇善战,勇敢杀敌,在各个战场打出威风。例如,某部“钢八连”随大部队挺进重庆途中,奉命奔驻大庸县城的敌122军军部和所属主力,在大庸外围战斗中,李斗燮等3名战士生俘逃敌174名,缴获重机枪二挺、炮一门及各种枪械140余支,而解放大庸战斗中“钢八连”取得歼敌750多名的战绩,师党委授予“钢八连”的锦旗上写道:“奖给在解放战争中战功卓著,大庸战役中起决定作用的钢八连”,由此在当地威名远扬“东北虎”的传说;[⑭]长江渡江战役时,在四野渡江的突破口团风战役中,156师466团担任主攻任务,并任命为渡江先锋团,团政委全宇(后任156师副师长、独立15师师长)亲赴营连做战前动员,经过3个小时的激烈战斗,466团击毙击伤敌军489名,全部缴获集中于码头大型木船68只。团风战斗是黄冈解放的标志,也是四野渡江战役的前奏曲。[⑮]海南岛渡海战役时,四野第40军所属的300多名朝鲜族组成的炮兵营将炮装在12支竹船,在敌军飞机、军舰堵截下安全护卫500多只运兵木船渡海成为解放军和当地群众中传为以竹船击退美制军舰的美谈。 在解放战争时期,人民军队内的朝鲜族官兵同其他各民族指战员一道,不怕牺牲,英勇善战,消灭敌人,战功卓著,为全中国的解放做出了突出的贡献,赢得了荣誉。同时,也付出了重大的牺牲,数以千计的朝鲜族指战员在各种战斗中献出了宝贵的生命。例如,在北满剿匪战斗时,1946年3月马桥河战斗中,93名朝鲜族指战员英勇牺牲。1946年9月,舍利屯战斗中,朝鲜义勇军3支队第3大队第7中队的中队长、副中队长等21名朝鲜族指战员牺牲。1948年3月,北古流战斗中,我军指战员牺牲26人,其中朝鲜族22名等;[⑯]1948年10月黑山阻击战中的黄家窝棚战斗后,参战的127名“钢八连”指战员大都牺牲,只剩下20多名;[⑰]156师466团在横渡长江的团风战役中,负伤、牺牲115名,其中牺牲43名,牺牲者中多数为朝鲜族。[⑱]如此等等,在解放战争时期,有3550多名朝鲜族指战员光荣牺牲,其中吉林省3262名,原松江省521名,原辽东省264名;[⑲]在延边,解放战争时期,共有烈士4313名,其中朝鲜族3713名,占烈士总数的86%。从朝鲜族烈士职务看,有9名团长、18名营长、90名连长、253名排长及547名班长。[⑳] 朝鲜族具有光荣的革命传统,他们与其他民族一道不仅为东北地区的开发建设,抗击日本侵略者做出了重要的贡献,而且为保卫抗战胜利果实,打倒国民党反动统治,建立新中国做出了积极的贡献。正如《人民日报》刊文所说的那样“在三年的解放战争中,五万以上的朝鲜人民志愿地参加了中国人民解放军,在从东北一路解放到海南岛的中国人民解放军第四野战军中,多少万新的老的朝鲜同志英勇负责地站在各种岗位上。他们从司令员到战士,从炮手到坦克手,从开卡车到挖地雷,从医生到护士,从多少重要的艰苦的岗位上,从多少壮烈的决定性的战役里,涌现了无数的英雄模范。尤其值得我们深记不忘的是:数不清的朝鲜兄弟,为打倒我们共同的敌人流尽了他们最后的一滴血。在后方,上百万朝鲜人民热烈地生产支前,保证了中国革命的胜利。”[21]      The Korean`s Peope in People`s Army and Their Feats during Liberation War   ABSTRACT: The Korean group of China have a glorious revolutionary tradition. They exploited the Northeast frontier with other ethnic groups, fighted Japanese invaders, made important contributions to the liberation of China. In the China`s War of Libertatin, the soldiers of Korean group did not afraid of blooding and sacrifice heroically. They left a heavy ink in the glorious revolutionary history of Korean group.   KEY WORDS: China's War of Liberation , Soldiers of Korean Group,  Great Feats   港东航的、 *郑信哲,中国社会科学院民族学与人类学研究所研究员,历史学博士。 [①]王慕宁编译:《东三省实况》,上海中华书局,1929,第29-30页。 [②]朝鲜总督府:《朝鲜事情》,1941,第282页。 [③][韩]玄奎焕:《韩国流移民史》(上),语文阁,韩国汉城,1967,第664页。 [④]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2页。 [⑤]《毛泽东文集》第3卷,人民出版社1996年版,第410页。 [⑥]《毛泽东文集》第3卷,人民出版社,1996,第426页。 [⑦]《中共中央文件选集》第15册,中共中央党校出版社,1991,第219页。   [⑧]李政文:《在铁道兵部队的朝鲜族指战员们》,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694页。 [⑨]http://mwc8589.blog.163.com/blog/static/89720757201012242843865/ [⑩]《朝鲜族简史》,延边人民出版社,1986,第174页。 [⑪]金应三:《保卫磐石县领导机关的朝鲜族连》,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584-586页。 [⑫]刘俊秀:《在朝鲜族人民之中》,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710-711页。 [⑬]《朝鲜族简史》,延边人民出版社,1986,第186页。   [⑭]金宇钟李炳哲:《朝鲜族人民在东北解放战争中的贡献》,韩俊光金元石主编::《中国朝鲜族历史研究论丛》2,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2,第71页。 [⑮]《渡江战役的进军号在这里吹响——纪念团风解放和渡江战役胜利六十周年》,http://www.tfzf.gov.cn/Article/tfa/tfah/HSTF/200905/601.html(团风政府网);《156师实战录》(朝文),延边教育出版社,2002,第309页。 [⑯] 徐基述主编:《黑龙江朝鲜民族》,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88,第92、96-97页。 [⑰] 金教镇等:《钢铁八连》,中国朝鲜族历史足迹丛书(5)《胜利》(朝鲜文),民族出版社,1992,第359页。 [⑱]《渡江战役的进军号在这里吹响——纪念团风解放和渡江战役胜利六十周年》,ttp://www.tfzf.gov.cn/Article/tfa/tfah/HSTF/200905/601.html(团风政府网) [⑲]《朝鲜族简史》,延边人民出版社,1986,第189页。 [⑳]《从“数字”看延边革命烈士》,《辽宁朝鲜文报》,2011年4月19日,第4版。 [21] 陈明:《中国东北境内的朝鲜民族》,《人民日报》1950年12月6日,第3版。
7    朝鮮民族在抗戰中的積極貢獻 댓글:  조회:3250  추천:24  2010-08-23
简论朝鲜民族在中国抗日战争中的积极贡献                            郑信哲   提要:朝鲜民族直接或间接地参与了中国的抗日战争,并为此做出重大牺牲和积极贡献。朝鲜民族在中国的抗日斗争属跨国界抗战,难免其斗争的双重性,既属于争取朝鲜独立的斗争,又属于中国抗日战争的一部分,因而有其特殊性。朝鲜民族在中国抗日斗争的具体表现为朝鲜爱国志士的抗日独立运动与中国共产党领导下的抗日斗争;从地域上,可分为东北和关内地区。 关键词:朝鲜民族  抗日斗争   积极贡献   朝鲜民族直接或间接地参与了中国的抗日战争,并为此做出重大牺牲和积极贡献。关于中国抗日战争中朝鲜民族的作用与贡献的研究,至今还没有比较系统的研究论著,只有一些不连贯的片断性研究。当然,就某一方面来说,有一些研究著作,如石源华、杨昭全、辛珠柏等人的著作。[①] 本文以笔者所接触到的资料为基础,叙述朝鲜民族在中国进行抗日斗争过程、贡献及其评价。       一、朝鲜民族移居中国略史     朝鲜民族起源于朝鲜半岛,其先民开始越过鸭绿江、图们江,落根于我国东北地区,可追溯至明末清初。然而,朝鲜民族连续大量地移居我国,却是19世纪60年代以后的事情。朝鲜民族移居我国的过程,大致分为三个阶段:     第一个阶段为19世纪60年代至1910年。1860年以后朝鲜半岛北部遭受连续几年的自然灾害,众多的朝鲜农民饥寒交迫,他们纷纷背井离乡,不顾两国政府的封禁,越江到我国东北的荒芜地带垦荒种地。1885年随着封禁令的废除,越江移居变得比较自由,于是更多的朝鲜农民移居至我国东北。据不完全统计,至1897年移居到通化、桓仁、宽甸、新宾等地的朝鲜农户已有37,000多名,1905年已落户于长白、临江、集安等地的朝鲜农户有39,440多名,1909年已在延边地区落户的朝鲜移民达184,867名。[②]     第二阶段为1910年日本强迫朝鲜政府签定《韩日合并条约》,朝鲜沦为日本殖民地至1931年“九·一八”事变以前。这一时期,除了破产的朝鲜农民继续移入我国东北地区以外,还有大量的民族志士移居我国从事抗日救国运动。据统计,1910—1912年间东北地区的朝鲜人数就增加了49,000名,在1910—1920年间移居至鸭绿江、图们江以北地区的朝鲜人数达192,540名。[③] 到1922年3月,居住在我国东北地区的朝鲜人已有651,096名。[④] 第三阶段为1931年“九·一八”事变以后至1945年日本战败止。这一时期的特点是,日本帝国主义的强制移民。“九·一八”事变发生后,日本只用三个月时间就把我国东北地区沦为其殖民地。日本为了加强对东北地区的统治,组织日本农民移至东北地区的同时,还强制朝鲜人移居我国东北。据1940年8月统计,自1937年到1940年,日本以“集团开拓民”名义强制移民到东北各地的朝鲜农户就达14,725户。[⑤] 此外,当时分布于关内地区的朝鲜族人口并不多,他们杂居于许多城市和一小部分农村。朝鲜族在关内地区分布主要于1910年朝鲜被日本吞并以后的陆续移居,到1937年“七七”事变前夕约有3万人,此后几年激增,至1945年前后大约有10万人,其中华北地区最为集中。日本投降后大部分人回国,1948年关内地区朝鲜族只剩2500名左右。    经过上述几个阶段的移居流动过程,到1945年日本战败前在中国的朝鲜人数量达216万5615人。[⑥] 1945年8月日本投降以后,不少朝鲜人开始陆续返回至朝鲜半岛。经过几年的人口变动,至1949年中华人民共和国建立后趋于基本稳定,1953年中国第一次人口普查时,朝鲜族人口为111万1275人。[⑦]     从朝鲜族分布看,移居当时主要集中于鸭绿江、图们江以北地区。之后,随着水田的开发,其分布地域逐渐向西、向北扩大,大多分布在易于水田开发的江河流域。到30年代末,东北地区的松花江、牡丹江、绥芬河、嫩江、乌苏里江以及东、西辽河等流域都有他们的足迹。     朝鲜族擅长水稻耕作,他们移居我国东北,主要居住在适于水田耕作的河谷平原地区。他们不顾东北地区的气候寒冷,积极试种水稻并获成功,由此揭开我国近代东北耕种水稻的历史。水稻耕作不同于旱田,它需要一定的水利设施,而拦河筑坝、挖沟开渠以及开荒造水田,都要靠一定人力并相互协作。所以,朝鲜族移居我国东北时,他们一般都结群而来,居住比较集中,其居住地便形成村落。在苦难年代,民族村落是朝鲜族互相帮助、赖以生存的基本单位。     朝鲜族具有重视教育的优良传统,而民族村落为其进行民族教育、发展民族文化创造了有利条件。可以说,民族村落对于保持民族文化传统,发展民族语言文字,起到了非常重要的作用。 朝鲜族人民勤劳、勇敢,他们从朝鲜半岛移居我国东北时一无所有,在中国仍受反动政府和封建地主的压迫和剥削,因而他们的革命性很强。朝鲜族人民积极参加中国共产党领导的新民主主义革命时期各个阶段的反帝、反封建的革命斗争,为新中国的建立做出了自己应有的贡献。   二、朝鲜族在中国抗日战争中的贡献 中国朝鲜族作为跨界民族,与生俱来便具有双重身份,他们既属于某一民族集团的成员,同时又是某一国家的居民。迁入初期,朝鲜族人民虽然身居中国,但几乎没有人把自己视作中国人,他们只是把中国当作临时居住地而已。此时,他们无法割舍对故土的深厚情感,其民族意识也好,国民意识也好,都与朝鲜半岛密切相关,而对中国的事情则以“局外人”的心态旁观。然而,另一方面朝鲜族先民不管抱着何种心态,事实上他们在迁移、定居中国的过程中,“居住年久,生活安定”,[⑧] 逐渐对中国这一新的居住地产生爱恋之情,并在建设新的家园过程中,逐渐表露出作为中国“国民”的爱国主义情结,积极参与当地反帝反封建的斗争,捍卫中国的主权,保卫自己的家园。   1、“九.一八”前朝鲜族人民的反帝反封建斗争 20世纪初日俄战争后,日益膨胀起来的日本帝国主义更加垂涎于我国东北地区,并加紧对东北地区的侵略。对此,朝鲜族人民自觉地举起反抗的旗帜,以维护中国的主权与保卫自己的家园。 1907年8月,日本帝国主义打着“保护”朝鲜人的幌子,悍然在延边地区的龙井设立所谓的“统监府间岛派出所”,以干涉中国内政。“统监府间岛派出所”非法调查延边地区朝鲜族人口,取消以乡约为基础的中国行政制度,强行推行“都社长制”,还在13个重要村镇分设“宪兵分遣所”,派驻67名宪兵和警察,以监视和镇压朝鲜族人民。面对日本帝国主义的侵略和挑衅,延边朝鲜族人民(占该地人口76.6%)纷纷起来反抗,他们依靠吉林边务公署,在各地以处死亲日走狗和特务,反对“都社长制”,拒绝纳税等形式,与日本帝国主义展开了坚决的斗争。 同时,朝鲜族人民为摆脱日本帝国主义的所谓“保护”,掀起了加入中国国籍的热潮。1909年,当日本与清朝政府签定《间岛协约》,获得对延边地区的“领事裁判权”时,朝鲜族人民又掀起反对《间岛协约》的斗争。局子街(今延吉)朝鲜族反日人士联名上书吉林边务公署,申明“今垦岛之地乃中华之地,垦岛之民乃中华之民”[⑨]愤怒声讨日本侵略者强加于朝鲜族人民头上的“领事裁判权”。朝鲜族志士纷纷组织反日团体和义兵队伍,一方面推进朝鲜族归化入籍运动,另一方面开展武装斗争,以反抗日本帝国主义的侵略。 1918年,北洋军阀政府与日本签定《吉会铁路修筑贷款合同》后,延边和吉林地区的朝鲜族学生同兄弟民族学生一道展开了反对卖国协定的集会和示威活动;1922年,朝鲜族同其他民族一起掀起反对日本修筑天图(天宝山—图们)铁路的护路保权运动;1928年,又积极展开反对日本修筑敦老铁路、收买天图铁路的斗争,迫使日本帝国主义修筑吉会铁路的阴谋迟迟未能得逞。 朝鲜族初期移民中,有许多人是朝鲜半岛被日本吞并后,不堪忍受日本的殖民统治或为了反对日本统治而移居中国的,故他们的反日意识特别浓。他们移居中国,一方面积极创办各类学校致力于民族的启蒙教育,另一方面组织各种反日团体与日本侵略者进行斗争。1919年3月,东北朝鲜族人民掀起了一场以延边地区龙井的“3.13”反日大示威为中心的大规模的反日运动,并着手组织反日武装团体,开始进行武装斗争。1920年,朝鲜族反日武装取得著名的“风梧洞战斗”和“青山里战斗”的大捷,有利地打击了进犯延边地区,妄图“剿讨”朝鲜族反日武装队伍的日本侵略军。此后,各地朝鲜族反日武装先后成立“正义府”、“参义府”和“新民府”等团体,与日本侵略军进行了不懈的斗争。 当时,朝鲜族人民反日斗争由于自身的处境与时代的局限,其立脚点只放在朝鲜民族的自救和朝鲜的独立,他们的反日斗争未能与处于同样命运的中国各族人民的斗争联系起来。但是,我们应该肯定的是,朝鲜族人民的反日斗争不仅增强了民族的内聚力,使之能够以整体的、团结的力量投入中国反帝反封建的革命斗争,而且更重要的是客观上促进了东北各族人民的反日觉悟,牵制了日本帝国主义对东北的侵略,并使朝鲜族聚居地区成为东北抗日战争的主要根据地。 朝鲜族人民通过移民初期的民族生存斗争和反日民族独立运动的洗礼,尤其是20年代末开始朝鲜族的反帝反封建斗争得到中国共产党的领导以后,他们的阶级意识和民族意识不断得到升华,朝鲜族作为中华民族一员的意识明显地得到增强,朝鲜族在反帝反封建斗争中,自觉地把民族的命运与前途和中华民族的命运与前途联系在一起。     朝鲜族来自朝鲜半岛,最初在朝鲜民族爱国志士组织下他们尽管在中国境内进行反帝反封建斗争,但其目的由于局限在民族的解放和朝鲜的独立,故他们往往是孤军奋战,得不到其他民族的支持和帮助,处于非常被动的局面。20年代末,在中国共产党的领导下,朝鲜族人民的反帝反封建斗争逐渐步入正确轨道。以东北为根据地进行民族独立运动的朝鲜民族爱国志士和民众在斗争实践中深切认识到,在日本帝国主义侵略和国内反动派的压迫剥削下,中国各族人民有着共同命运和共同斗争目标,朝鲜革命和中国革命的关系密切,朝鲜民族解放和朝鲜独立离不开中国革命的胜利。这样,朝鲜族人民更加坚定地举起“为中国革命而斗争”的旗帜,积极参加中国反帝反封建的革命斗争,并把它视为民族解放和朝鲜革命胜利的正确道路。在东北,朝鲜族人民的“革命热情尤其是反日的情感特别浓厚”,他们“不但成反日本帝国主义者的主要革命要素并为现阶段土地革命的主要动力。”[⑩] 朝鲜族的革命斗争不再为狭隘民族主义所左右,朝鲜族人民以中华爱国主义为前提,积极投入了中国共产党领导下的新民主主义革命各个阶段的斗争。   2、“九.一八”以后朝鲜族人民的抗日斗争 在长期而艰苦的反帝反封建的斗争实践中,朝鲜族人民认识到他们之所以遭受国内外反动派的压迫和剥削,并不仅仅因为他们是朝鲜族,而是因为他们是在殖民地、半殖民地和半封建制度下深受压迫和剥削的劳苦大众。朝鲜族人民要翻身得解放,不仅要赶走外国侵略者,还要推翻直接统治和压迫本民族的东北军阀势力及其社会支柱——封建制度。而这种斗争,只靠朝鲜族本身的力量和“朝鲜民族的独立”是不能取得成功的。朝鲜族只有和处于相同命运的中国各族人民紧密团结、共同斗争,才能获得民族的彻底解放。朝鲜族人民在这种共识下,自觉地调整民族内部关系,努力维护中华民族的整体利益,积极参与中国共产党领导下的反帝反封建斗争。        “9.18”事变后,在中国共产党的领导下,广大朝鲜族党员积极投入抗日斗争的洪流,站在武装斗争的最前线。朝鲜族革命者积极参与东北地区中共党组织建设,并积极加入了中国共产党。在20年代末,东北地区的中国共产党组织还不健全。1928年中共满洲省委正式建立后,特别是在共产国际“一国一党”原则指导下,朝鲜族早期共产主义者纷纷加入中国共产党,党在东北地区的力量得到迅速壮大。1930年前后,东北地区的中共党员由300名左右猛增至2000多名,其中朝鲜族占90%以上。[⑪] 当时,南满地区农村党员200名中,朝鲜族为193名;东满地区农村党员636名中,618名为朝鲜族;在北满,中共汤原中心县委领导下的50名党员中,朝鲜族有45名。[⑫] 在中国共产党的领导下,朝鲜族人民积极投身于土地革命,在东满地区先后掀起了“红五月斗争”、“五卅”暴动和“八一”吉敦起义等,还建立了东北地区第一个苏维埃政权——药水洞苏维埃政府。在南满、北满地区,朝鲜族人民也展开了声势浩大的减租减息斗争。 “九.一八”事变发生后,朝鲜族人民不畏艰险,坚决抗击了日本侵略者。1931年,日本发动“九一八”事变,武装入侵我国东北地区。朝鲜族人民同仇敌忾,与各族人民一道站在反对日本侵略军的前沿,进行了不屈不饶的斗争。在中国共产党的领导下,朝鲜族地区抗日情绪高涨,各地纷纷组织反日游击队抗击日本侵略者。如东北最早一支由中国共产党直接领导下的武装抗日队伍——磐石工农反日意义勇队,就是以朝鲜族李红光领导的中共磐石县委“打狗队”为基础发展起来的。后来这些游击队发展壮大,成为东北抗日联军最重要的组成部分。正如东北抗日联军主要领导者周保中同志所说“1932年所建立的坚强的东满游击队和1933年所建立的强大的磐石游击队、珠河游击队、密山游击队、汤原游击队、饶河游击队都是由革命的朝鲜同志所创建的。后来它们发展成为抗日联军第一、二、三、四、六、七军。第五军里也有不少优秀的朝鲜同志。”[⑬] 朝鲜族不仅在中国共产党领导的抗日游击队的初创活动中起过很重要的作用,而且也积极参加了建立抗日游击根据地的斗争,做出了杰出的贡献。东北的抗日游击根据地最初主要建立在朝鲜族聚居地区,根据地的朝鲜族人民不仅从人力、物资等方面全力支援抗日游击队,还与之并肩作战,有力地粉碎了日军接连不断的“讨伐”,成为东北抗日游击队伍的坚强后盾。 在长达十四年的东北抗日战争中,朝鲜族人民浴血奋战,他们或在战火纷飞、硝烟弥漫的战场上,或在敌人的血腥刑场上,都表现出中华爱国主义的强烈情感,为争取中华民族的解放做出了重大牺牲,在“全部抗日战争中,先后有十数万朝鲜人民参加了这一艰苦的英雄事业。数以万计的朝鲜烈士伟中朝民族解放战争的革命事业流血牺牲。”[⑭] 例如,在抗日战争时期,只延边地区牺牲的革命烈士就有2726名,其中朝鲜族为2560名;[⑮] 这一时期,吉林省牺牲的革命女烈士有398名,其中朝鲜族女烈士为397名。[⑯] 事实表明,朝鲜族为捍卫中华民族的尊严,前赴后继,在东北抗日战争中起了很大作用,在抵御日本侵略者的斗争中付出了巨大的代价,为取得中国人民反对外来侵略斗争的胜利做出了重要的贡献。       三、关于朝鲜民族在抗日战争中的积极贡献的评价 朝鲜民族在中国的抗战活动有目共睹,从东北到关内到处可见朝鲜民族抗击日本侵略军的足迹。安重根在哈尔滨车站击毙侵华魁首伊藤博文,大长抗日民众的志气;东北抗日联军转战东北大地痛击日本侵略军,可歌可泣;尹奉吉舍身炸死侵华日军头目的义举,浩气长存。朝鲜民族在中国的抗日斗争得到中国社会各界的广泛关注和高度评价。 1942年,周恩来在中韩文协招待会上的讲话中提到:“记得在学生时代、和在黄埔时代以及革命军队中,都曾和韩国的同志们同过事。韩国人民的勇敢牺牲精神是大家目睹的事实。他们为了中华民族的解放在中国大地上流过血。抗战以后,朝鲜义勇军(现已属韩国光复军)在各战线、各战场上与日寇作战,流血流汗。在北方平原上,牺牲了很多壮士。这些壮士都出身于黄埔军校。朝鲜志士们的热血洒遍在中国的大地上。”[⑰] 1943年,朱德在纪念朝鲜“3.1”运动二十四周年会上的讲话中,高度评价朝鲜民族在中国的抗日斗争,说:“在中国境内,流亡我国的朝鲜人民,直接参加了抗日的武装斗争。”9.18“以后,千百的朝鲜志士参加了东北抗日义勇军,十一年来与中国同志一道坚持了顽强艰苦的抗日武装斗争。”7.7“以来,朝鲜人民援助我国抗战,许多朝鲜志士已为抗日事业和中国的解放贡献了他们的生命。这是我们中国人民永远不能忘记并深为感谢的。”[⑱] 李公朴在谈建立中韩民族反日联合战线时,曾指出“朝鲜民族的反日斗争,直接是要求朝鲜民族的独立,间接就是帮助中华民族抗战的胜利。”王炳南也强调“我们一定指出朝鲜民族解放运动,是构成中国抗战胜利的一种重要因素。”[⑲] 朝鲜民族在中国抗日斗争中做出了重要的作用与贡献,相比之下我们对此研究还比较薄弱。具体地说: 1、过去关于东北抗日斗争、尤其是对东北抗日联军的研究欠缺,其在中国抗日战争中的作用和贡献没有得到应有的评价。“9.18”事变以后,东北各族人民早于中国其他地区掀起了抵御日本侵略军的抗战,在东北抗日军民的坚决打击下,自“9.18”到“7.7”事变的六年间日本关东军死伤病者共有17.82万名。[⑳] 可见,东北各族人民的抗日斗争牵制了日本关东军几十万兵力,直接延缓了日本帝国主义侵略中国的步骤,这种历史作用应得到充分肯定。 2、东北抗日联军中朝鲜族的作用和贡献没有充分地予以肯定。近些年来,对东北抗日联军的研究有所好转,但东北抗日联军中的朝鲜族作用和地位往往被忽略。实际上,在东北地区中国共产党领导下组建抗日游击队、开辟抗日游击根据地及东北抗日联军初创时期,朝鲜族的作用和贡献是很大的,应给予充分地肯定。 3、研究侧重点方面,以朝鲜民族独立运动角度研究的相对多(这与韩国政府有关部门和财团资助中国大学和研究机构研究韩国独立运动密切相关),而以中国朝鲜族角度研究其在抗日战争中的作用与地位等方面相对薄弱,这反映于已出版的研究论著中。 4、研究文种方面,本来不那么深入的研究还局限于朝鲜文,以汉语文直接反映朝鲜民族在中国抗日战争中的地位与作用的论著很少见。     可见,应该加强这一领域的研究,积极评价朝鲜民族在中国抗日战争中的作用和贡献。而为这一领域的深入研究,有关部门在研究资金、出版等方面应该给予大力支持。 今天,我们在这里举行纪念抗日英雄、东北抗日联军创建人之一的李红光诞辰100周年学术研讨会,缅怀英雄业绩,探讨朝鲜民族在中国抗日战争的积极贡献,对于弘扬中华爱国主义精神,提高民族自信心将起积极的促进作用。   郑信哲: 吉林磐石人。中国社会科学院民族学与人类学研究所研究员、研究生院教授,历史学博士。主要从事马克思主义民族问题理论与中国民族问题研究及朝鲜民族研究。   [①] 杨昭全 李铁环 编:《东北地区朝鲜人革命斗争资料汇编》,辽宁民族出版社,1992年;潘石英 主编:《深厚的友谊—朝鲜抗日独立运动论文及史料》,世界知识出版社,1993年;石源华《韩国独立运动与中国》,上海人民出版社,1995年; 辛珠柏:《东北地区朝鲜民族运动史(1920—45)》,韩国.亚洲文化社,1999年。 [②]《朝鲜族简史》编写组:《朝鲜族简史》,延边人民出版社,延吉,1986年,第4--5、8页。 [③] 同上,第22页。 [④] 王慕宁编译:《东三省实况》,上海中华书局,上海,1929年,第29-30页。 [⑤] 朝鲜总督府:《朝鲜事情》,京城(汉城),1941年,第282页。 [⑥] 玄奎焕:《韩国流移民史》(上),语文阁,韩国汉城,1967年,第664页。 [⑦] 据中国第一次人口普查资料。 [⑧] 李峰:《延边略史》,延边历史研究所编《延边历史研究》第一辑(1986),第3页。 [⑨] 金鼎奎:《金鼎奎日记》(手抄本,延边大学民族研究所藏),第16页。 [⑩] 《满洲省委关于省委少数民族运动委员会对满、韩国工农群众运动的决议案草案》(1930年5月24日),见杨昭全《东北地区朝鲜人民革命斗争资料汇编》,辽宁民族出版社,1992年,第703页。 [⑪] 徐学新:《试论满洲省委实行的民族政策和国际主义原则》,韩俊光等主编《中国朝鲜族历史研究论丛》2,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1992年,第90页。 [⑫]《中共满洲省委主要文件汇编》,第462页。 [⑬] 周保中:《吉林省委民族工作会议上的报告》(1946年12月),《胜利》,民族出版社,1992年,第704页。 [⑭] 陈明:《中国东北境内的朝鲜民族》,《人民日报》1951年12月6日,第三版。 [⑮] 韩俊光:《朝鲜族》,民族出版社,1996年,第93页。 [⑯] 崔洪彬:《朝鲜民族在中国革命中的贡献》,鲁朱哲主编《朝鲜民族文化研究》,辽宁民族出版社,1997年,第193页。 [⑰]《新华日报》1942年11月11日。 [⑱]《解放日报》1943年2月1日。 [⑲]《朝鲜民族战线》第4期,1938年5月25日。 [⑳]《东北抗日联军斗争史》编写组:《东北抗日联军斗争史》,人民出版社,1991年。
6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댓글:  조회:2538  추천:45  2010-02-08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3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정신철   과거 우리민족교육의 중요한 장소는 농촌마을이었다. 농촌마을은 우리의 상대적인 집거지로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민족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지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교육의 판도는 과거 몇 십년 동안 여전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민족교육의 환경이 전에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의 제일 뚜렷한 변화가 인구이동과 그에 따른 영향이라고 하겠다. 개혁개방이전 조선족은 상대적인 안정 속에서 주위 기타 민족들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이러한 안정은 개혁개방과 더불어 사라졌고 조선족사회는 급진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재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모두 인구이동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조선족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동북지역에서 산해관이남 지역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끓임 없이 이동하고 있어 “제2의 민족대이동”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인구비례를 놓고 보면 중국 각 민족가운데서 조선족은 국내이동이나 국외진출에서 모두 제일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족사회의 급속한 인구이동은 인구분포의 새로운 변화를 초래하였다. 원래 중국조선족인구 190여만 가운데 절대다수가 길림, 흑룡강, 료녕 등 3성에 집중거주하였는바 1990년 중국제4차 인구조사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인구의 97%이상이 상술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하지만1990년대이후 특히 중한수교이후 한국의 대중투자 및 한국인의 대거 중국진출은 조선족인구이동을 재촉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선족인구 분포구조도 많이 바뀌었다. 현재 조선족인구분포를 볼 때  크게 3개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통집거지역인 동북3성에 남아있는 인구이고 하나는 산해관이남지역에 진출한 인구이며 또 하나는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 진출한 인구이다. 이 세 부류인구가 점한 비중을 보면 각기 3분지1로 나눌 수 있다. 인구의 빈번한 이동으로 정확한 통계는 할 수 없어도 여러 방면의 숫자를 분석해 보면 이러한 분포구조를 짐작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조선족인구가운데 실제로 동북의 전통 집거지역에 남아있는 사람은 3분지 1에 불과하고 전통집거지역을 떠난 인구가 3분지2가 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3분지1는 원래 조선족인구가 많지않는 산해관이남지역의 많은 도시에 흩혀져 있는 것이다. 조선족인구분포구조의 이러한 변화는 조선족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원래의 집거지역은 조선족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농촌마을이 무너지고 민족교육이 약화되며 민족집거지가 축소되고 있으며 집거지를 떠난 민족인구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민족적 생활을 영유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족교육 역시 이러한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집거지역에서는 민족학교가 무너지고 민족교육이 날로 축소되는 한면 새로운 지역에서는 민족교육기구가 없고 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산해관이남지역의 조선족인구분포를 보면 북경지역지역에 10여만명, 천진지역에 5만여명[1], 산동지역에 20여만명, 주강삼각주지역에 약10만명,[2] 장강삼각주지역에 몇 만명 등 총 50—60만명이 된다. 이 가운데 약간의 집중거주형태를 갖고 있는 지역도 있다. 예컨대 북경왕징, 청도의 이창, 성양, 즉묵 등 지역에는 각 기 몇 만명의 조선족들이 분포되어 있다. 조선족인구이동은 조선족의 사회활동영역과 문화영역을 넓히였고 민족의 도시화과정 추진, 경제수익 증가, 시장의식 강화 등 민족사회발전에 적극적인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인구이동에 따른 새로운 문제점도 적지 않게 노출되고 있다. 도시로 향한 인구 대이동이 낳은 중요한 결과의 하나가 농촌 민족교육의 축소이었다. 다른 한면 농촌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은 동북지역 도시의 민족교육규모를 상대적으로 확대하였지만 산해관이남에는 민족교육을 접촉할 장소마저 없는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가운데 산해관이남지역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의 민족교육문제가 날로 심각한 문제로 나서고 있다. 조선족인구의 급속한 이동현상은 민족교육영력에도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즉 동북지역의 전통 집거지에서는 도시나 농촌할 것 없이 공립 조선족학교가 있어 민족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현재 인구감소로 여러 조선족학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민족교육의 맥은 끊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산해관이남지역에는 원래 조선족인구가 많지않고 분산거주하여 조선족교육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으나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인구분포의 변화로 산해관이남지역에서 조선족교육문제가 조선족사회에서 하나의 큰 이슈로 되었다. 조선족인구의 대거 진출은 이 지역에서도 민족교육을 전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과시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성으로 여러 지역에 사립 조선족학교가 세워졌지만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경제적 부축이 없어 학교경영이 아주 어려움에 처하여 있고 또 어떤 학교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사라지고 마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 이 시점에서 조선족교육을 어떻게 산해관이남지역에서 전개해야 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각 급 정부에 중국공산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집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민족인구가 어디에 있으면 민족교육도 그 곳에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1] 2007년말 천진시조선족상주인구는 2000년의 11,041명에서 20,356명으로 증가되었는바 년평균1331명 증가되었다.천진시 조선족연합회의 추측은 50,000명좌우이다. [2] 2000년이전에는 광동성 조선족인구는 주요하게 광주시와 심천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현재는 주강삼각주 각 도시에 분포되어 있는바 2008년초 광주시 조선족인구는 약 25,000명, 심천시 약 25,000명, 동관시에 약 10,000명, 중산시에 2000명, 불산시에 1000명, 주해시에 800명, 혜주시에 300명, 조경시에 200명 등, 주강삼각주에 모두 103,000명좌위의 조선족이 있다고 한다.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글싣는 순서서언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5    2.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댓글:  조회:2731  추천:73  2010-02-02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정신철 이주시기부터 개혁개방이전까지 조선족교육은 농촌마을을 토대로 꾸준히 발전하여왔다. 조선족교육이 중국에서 앞선 것은 실제적으로 말하면 농촌의 민족교육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앞선 교육수준을 자랑하던 조선족교육도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풍랑속에서 현재는 흔들리고 있다. 특히 산재지역의 민족교육은 민족교육행정의 미비와 지역적 분산화로 인하여 더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같은 경우는 집거지로서 민족인구의 상대적 집중으로 민족교육과정에서 기타지역의 조선족교육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큰 지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산재지역의 민족교육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산재지역 민족교육의 특징을 말하면 첫째, 집결지역에는 교육행정기구가 전면적으로 민족교육을 다루고 있지만 산재지역에는 민족교육행정기구가 설립 되어있지 않거나 혹은 있어도 교육행정기구의 한 부문으로 추진력이 약하다. 둘째, 집결지역의 민족교육경비에 비하여 산재지역의 민족교육경비는 아주 약소하여 심지어 교원들의 필요한 출장과 없어서는 안 될 교수용품의 구입마저 어려운 정도로 경비가 결핍하였다. 셋째, 산재지역의 민족교육은 인구의 분산으로 범위는 넓고 규모가 작아 인력, 재력 등이 더 필요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럼 조선족 민족교육의 현황은 어떠한가? 여러 현상을 보면 낙관적이 못 된다. 하나는 학교분포가 넓고 규모가 작다. 예컨대 료녕성의 경우 1996년 말 조선족소학교가 모두 165개 있는데 이중 학생이 100명 미만의 학교가 105개 있고 이 105개 가운데 학생이 50명 미만의 학교가 66개 달하였다. 50명 미만 학교의 학생수가 1936명으로 학교당 29.3명이고 학급당4.2명이다. 이 가운데 학생수가 20명 미만의 학교가 16개이고 학생수은 212명으로 학교당 13.3명이고 학급당 1.9명이었다.  분산적인 학교운영은 제한된 자원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없어 교육수준 제고 등에 아주 불리하였다.둘째는 학생내원이 날로 줄어들고 있으며 민족학교수가 날로 감소되고 있다. 이 가운데 여러 학교의 합병으로 줄어진 것은 괜찮으나 학생 내원이 없어서 부득불 학교문을 닫는 경우가 적지 않아 걱정이다. 흑룡강성 하르빈시의 상황을 보면 1997년에서 2003년까지 조선족소학교의 학생수는 9442명에서 2530명으로 감소되었고 학교수는 102개에서 32개로 감소되었다.  또 길림성 서란시 평안진의 경우 1990년 조선족소학교와 중학교의 재학생이 2800명이었는데 2004년에는 이 두 개학교의 학생수는 327명으로 줄어 들었다.  세 번째는 교원들의 유실로 교육수준 제고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시장경제의 충격하에 많은 조선족 교원들이 교직을 떠나면서 민족교육발전에 더 큰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 한족들은 교원직을 얻어려고 많은 노비를 하는데 비해 우리 조선족교원들은 하던 교원직을 아주 쉽게 그만두는 현상이 부지기수이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조선족중소학교 교원들이 시장조류에 합류하면서 교원직을 떠나 산해관이남 도시로 또는 국외로 진출하였는바 이 가운데 현성학교와 농촌학교의 교사유실이 더욱 심각하였다. 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농촌 소학교의 경우 교직을 떠난 사람이 172명으로 1995년의 59명에 비해 거의 세배에 달하였다.  요녕성 심양시의 경우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조선족 중소학교의 교사가운데 426명의 교직을 떠났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유실한 교원가운데 대부분이 학교에서 중견역할을 담당한 교원들이라는 것이다. 교원대오의 불안정성은 조선족학교의 교육수준 제고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고 조선족학교의 인기하락에 동조하면서 민족교육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네 번째는 민족교육의 내용과 특색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 민족교육이라 하면 민족주체성 교육이 아주 중요하나 과거 우리민족교육에서 이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교과과정에 민족적인 것이 결핍되고 민족교육의 특징부여가 부족한데서도 잘 표현된다. 예컨대 현재 대부분 조선족학교의 교과과정에 민족역사과목이 없고 조선어문 등도 한어문 교과서를 번역한 것이 주된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섯 번째는 민족교육의 인기 하락이다. 민족성이 결핍한 교육, 생존기능 양성에 부족한 교육, 민족학교의 경쟁력 추락 등이 인기하락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민족교육의 인기하락은 많은 조선족학생들로 하여금 한족학교로 가게 한다. 집거지역인 연변의 경우만 보더라고 조선족학령아동가운데 1998년에 조선족소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2493명이고 한족소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1651명이었으며 2003년에는 조선족소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1271명이나 한족소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1900명이나 되었다. 위의 조선족교육에 관한 담론은 어디까지나 조선족이 집거한 동북지역에 관한 것이다. 현재 조선족교육에서 새로운 현상의 하나가 바로 과거에 없던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문제가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글싣는 순서서언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4    소수민족 인구류동과 도시 민족교육 문제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3268  추천:53  2009-10-11
소수민족 인구류동과 도시 민족교육 문제에 대한 연구——산동성 청도시 조선족교육 실천을 실례로 [①]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 청도시는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전연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개혁개방이래 도시화 행정이 다그쳐 지고 소수민족의 인구류동이 잦아지면서 청도시의 소수민족 성분이 늘어나고 소수민족 인구장성이 가속화되였다. 특히 중한수교와 산동성과 한국의 경제문화 교류가 잦아지면서 한국기업이 증가하고 청도시에로 흘러드는 조선족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청도시는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의 하나로 되였으며 그들은 지난날 부딪혀본적이 없는 허다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였는데 민족교육문제가 바로 그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비추어 2008년 8월초, 우리는 청도시 조선족사회에 대한 한주동안의 실지고찰을 진행했다. 그 사이 우리는 간담회, 탐방 등 형식을 통해 청도시 조선족교육의 현상태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료해했는데 그 목적은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책을 검토하기 위한것이였다.    1. 청도시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로 부상  청도시는 산동반도 남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쪽과 남쪽은 황해에 린접해 있고 동북쪽은 연태시와 잇닿아 있으며 서쪽은 유방시와 이어져 있고 서남쪽은 일조시와 린접해있다. 청도시는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전연지대로서 1981년에 중국 15개 경제중심도시의 하나로 되였고 1984년에는 중국 14개 연해개방도시의 하나로 되였으며 1986년에 5개 계획단렬도시의 하나로 되였고 1994년에는 전국 15개 부성급 도시의 하나로 되였다. 2008년 말, 전 시 호적의 총인구가 761만 5600명으로 늘어났으며 그중 시구역(시남, 시북, 사방, 리창, 로산, 성양, 황도 등 7개 구)의 인구가 276만 2500명에 달하고 5개 현급 시(교주, 즉묵, 평도, 교남, 래서)의 인구가 485만 3000명에 달했다. 청도시에는 한족을 제외하고 또 만족, 회족, 조선족, 쫭족, 몽골족 등 50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2005년 <산동통계년감>에 따르면 청도시 소수민족 인구가 4만 5100여명에 달했다.   청도시는 소수민족이 섞여 사는 산재지역으로서 50개 소수민족가운데 인구가 비교적 많은 민족은 조선족, 만족, 몽골족, 회족 등이다. 특히 조선족 인구가 신속히 늘어나면서 조선족 인구가 현지 소수민족 총인구가운데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였고 청도는 점차 조선족의 집거지로 부상하였으며 이곳에서 정착하거나 생활하고 있는 많은 조선족들은 청도를 자기들의 "제2의 고향"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190여만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주로 중국 동북의 흑룡강, 길림, 료녕 3개 성에 분포되여있다. 1990년 제4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조선족 총인구의 97%이상이 모두 이곳에 살고 있었다. 우리 나라 개혁개방이 더한층 심화되면서, 특히 중한수교이래 조선족 인구류동이 더욱 잦아지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전통적 집거지를 떠나 분분히 산해관 이남의 도시로 진출함으로써 오늘날 산동반도, 경진지역, 장강삼각주와 주강삼각주 등 지역의 조선족 인구가 50-60만명에 달한다. 이는 우리 나라 조선족 인구의 3분의 1이 이미 전통적 집거지를 떠나 산해관 이남의 도시로 류동했다는것을 보여준다.   인구의 류동에 따라 조선족은 일부 도시에 모여 살면서 정착하여 새로운 집거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중 산동성 청도시가 가장 전형적이다. 1982년 제3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청도시 상주 조선족 인구가 83명에 불과했고 지금 청도시 관할구역에 들어간 로산현, 즉묵시 등지에 살고 있는 조선족 75명까지 포함하여 고작 150명 남짓했으며 1990년까지만해도 5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0년 제5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청도시 조선족 상주 인구가 이미 1만 4491명으로 밝혀져 10년사이에 거의 30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림시거주 인구를 망라한 류동인구 수량은 상주인구 보다 훨씬 더 많아 청도시는 이미 산해관 이남의 도시가운데서 조선족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되였다. 지금 청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수량에 대해 35만, 20만, 5만 등 여러가지 설법이 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청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 인구가 확실히 적잖다는것을 알수있다. 여러가지 요인을 종합하여 개략적으로 계산할 경우 청도의 조선족 인구가운데 호적을 갖고 있는 인구 약 3만여명을 제외하고 림시거주 인구를 망라한 류동인구도 이미 10만여명에 달하는것으로 추측된다.   청도시 조선족 인구가 신속히 늘어남과 아울러 집거와 정착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청도에서 조선족이 비교적 집중되여 살고있는 성양구, 리창구, 시남구, 즉묵시 등지에 조선족들이 집거하고 있는 아파트단지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즉묵 서원장 아파트단지에서 개발한 9800세트 주택가운데 6500세트가 조선족에게 팔리고 성양구 천태성 아파트단지에 집 값을 선불한 3390세트 가운데 20%가 조선족이며 리창구 백통화원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는 1000여세대 가운데 조선족이 약 600세대를 차지하고 있다. 불완전 집계에 따르면 청도시에서 주택을 구매한 외래 조선족이 이미 3만 5000여 세대에 달한다.   청도시가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로 부상하게 된것은 그가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전연지대라는 사실과 갈라놓을 수 없으며 한국기업이 청도에 대거 입주한것과도 갈라놓을 수 없다. 우리 나라가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청도는 연해지역에 위치한 덕분으로 개혁개방의 전연지대에서 제일 먼저 한국과 경제무역거래를 하기 시작했으며 1989년 중한량국 수교전에 벌써 한국기업이 청도에 진출한 상태였다. 1992년 중한수교이래 산동성은 한국과 제일 먼저 련계를 맺는 성으로서 한국과의 경제문화교류가 자못 활발했으며 청도시는 자체의 여러가지 우세를 리용하여 더욱더 중한교류의 앞장에서 나아갔다. 청도시와 한국의 도시가 친선도시 관계를 맺는것을 실례로 든다면 1993년 12월 4일 청도시가 한국의 대구광역시(우리 나라의 직할시와 맞먹음)와 친선도시 관계를 맺고 1995년 9월 27일 인천광역시, 1999년 8월 10일 경기도 평택시, 2003년 3월 23일 부산광역시, 2003년 9월 21일 경상남도 군산시와 친선도시 관계를 맺었다.   청도시와 한국 관련 지역의 밀접한 교류는 외자를 적극 유치하고 한국기업을 흡인하여 부단히 청도에 투자하게 했다. 집계에 따르면 2008년말까지 현재, 청도에서 허가를 받은 한국투자 프로젝트 수자가 1만 242개에 달했다. 한국기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청도에 들어오면서 한국과 뿌리는 같으나 가지가 다른 우리 나라 조선족들은 친척 인연, 연고와 언어우세를 리용하여 분분히 동북으로부터 청도에 흘러들어 청도의 조선족 인구가 재빨리 늘어나게 되였다. 조선족들은 중한 량국의 경제무역거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알선했고 현지 외자유치를 위해 중요한 중개 및 뉴대 역할을 했으며 현지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  2. 청도시 조선족사회와 민족교육  조선족 인구의 대량 류입은 청도로 하여금 조선족의 새로운 집거지로 되게 했다.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지침으로 삼고, 현지 정부의 지지와 조선족 자체의 노력에 의거하여 청도시 조선족사회는 이미 자체의 발전을 위해 량호한 토대를 닦았다. 애초 청도에 온 많은 조선족들은 한국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한국기업에서 일하면서 일반직원, 과장, 리사(리사는 한국기업에서 상층 관리간부에 속함)로부터 기업을 독립적으로 운영할수 있는 성장과 단련 과정을 겪었다. 한국기업은 조선족들에게 단련의 무대를 제공했으며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후 많은 한국인 사장들이 귀국하고 조선족이 많은 한국기업을 인수했으며 부분적 조선족들은 한국기업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기업을 꾸렸다. 집계에 따르면 청도에 있는 조선족 기업이 1000개 가량되였는데 그중 성양구에만 해도 조선족이 등록한 유한책임회사가 42개나 있었고 조선족이 등록한 자영업자가 300여개나 되였다.  청도에 온 조선족은 처음에는 남자들이였는데 그들은 청도에 발을 붙힌뒤 많은 사람들이 가족(부모, 아내, 자녀)을 데려와 조선족 인구가 재빨리 늘어나게 되였다. 이에 따라 학교, 식당, 호텔, 려행사, 자동차 판매점, 임대업소, 슈퍼마켓 등 민족군체를 위해 서비스하는 관련 생활시설들이 잇달아 생겨나게 되였다. 청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교육수준이 비교적 높았으며 그들가운데 기업을 운영하는것을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들이 또 대학교, 문화 분야에 분포되였다. 이를테면 중국해양대학, 청도대학 등 고등학부에서 교편을 잡거나 기타 사업단위에 취직한 조선족 인구가 100여명에 달한다. 조선족들도 또 민족사업에 적극적이여서 지금 청도시 12개 구 시 산하의 소수민족련합회 회장가운데 조선족이 3명이나 된다. 이밖에 조선족 군체의 소비도 아주 어마어마하다. 례를 들면 청도시 성양구 인구총수가운데 조선족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10%도 안되지만 그들의 소비액은 오히려 성양구 소비총액의 30%이상에 달한다.   여러가지 현상들은 청도시에 이미 조선족사회가 형성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뚜렷한 사례의 하나가 바로 청도에서 조선족교육이 이미 의사일정에 올랐다는것이다. 조선족은 민족교육을 중시하고 있다. 력사적으로 볼때 조선족이 모여살고 있는 곳이면 그곳에 꼭 학교가 세워졌다. 조선족의 이와 같은 우량한 전통은 오랜 세월속에서 변하지 않았으며 오늘날 청도 조선족사회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청도에서의 조선족교육은 걸음마단계에 처해있으며 아직까지 공립교육계통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이미 두개 조선족 민영학교들인 벽산조선족학교와 서원장조선족학교가 운영되고있다.    벽산조선족학교는 청도시 리창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청도시교육국으로부터 학교설립 허가를 취득한 민영 전일제 조선족학교이다. 이 학교는 2000년 8월에 설립되였는데 당시 학생이 12명 뿐이였고 교사도 임대한것이였다. 근 10년간의 발전을 거쳐 학교는 초보적으로 규모를 갖추고 학교운영도 정규화에로 나아가고 있으며 지금 소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전부 과목을 개설하고 유치원과 주말한글학교를 부설했다. 하지만 교사는 여전히 임대한 상태이다. 학교에는 지금 소학생 300여명, 유치원생 213명, 교직원 40여명(50%가 한족, 50%가 조선족)을 갖고있다. 학교에서는 청도시 시구의 소학교 통일교과서를 채용하고 조선어과목과 영어회화(외국인 교원) 등 특색언어과목을 증설했으며 조선어, 영어회화와 음악을 제외한 기타 과목은 모두 한어로 수업하여 학생과 의무교육의 동기성을 담보함으로써 조선어, 한어, 영어 "세가지 언어 교학"을 실현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특색교육에 주의를 돌려 언어특색을 제외하고 또 학생들의 종합능력에 대한 훈련과 양성을 중시하고 있다. 여러가지 특장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의 기본적 례의를 장악하고 자립생활하는 능력과 자주학습능력을 양성했다. 학교에는 음악교실, 미술교실, 어음교실, 계산기교실, 과학실험실, 도서실, 방송실, 다기능 활동실 등 완비한 특장교육시설을 갖추고 전문교원을 배치하여 학생들의 흥취와 애호를 발굴하고 학생마다 한가지 특장을 장악하도록 양성하고 있다. 학교는 완벽한 기숙제도를 갖추었고 숙사와 식당은 깔끔하고 질서가 있으며 날마다 교원을 배치하여 학생들의 매일 저녁자습, 아침독서, 지진아 과외지도 등 학습과 숙사생활을 관리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통근차량을 배치하여 날마다 학생들을 실어 오고 실어다 주고 있기에 학생들은 통학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서원장조선족학교는 일찍 청도벽산조선족학교를 창설했던 김장웅선생이 2006년에 설립했다. 2006년 7월 1일, 김장웅선생은 서원장촌 교사를 임대하여 먼저 서원장조선족유치원을 설립한뒤 8월 28일에 서원장소학교를 설립했다. 지금 서원장조선족유치원과 소학교는 재학생 500여명을 갖고있다. 민영 유치원과 학교이다 보니 학교는 장기간 결손상태에 처해있으며 2008년만 해도 10만원의 결손을 보았다.   3. 청도시 조선족교육에 존재하는 문제점과 대책  조선족인구가 청도시에서 집거생활하면서 부터 민족교육문제가 의사일정에 올랐으며 이미 민영 조선족학교 두개를 설립했다. 하지만 민영학교는 관련 부문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에 교사, 교원대오와 경비 등 면에서 여러가지 문제점과 애로에 부딪치고 있으며 청도시 조선족교육발전이 아주 어려운 상태에 처해있다. 그 주요 표현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련 정부부문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족은 예로부터 자녀교육문제를 중시해왔으며 교육보급수준과 교육을 받은 년한이 모두 우리 나라 여러 민족가운데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청도에서도 조선족 인구가 모여살게 되면서 조선족학교 두개가 설립되였으나 모두 민영학교이다 보니 학생래원가운데 현지 호적을 취득하지 못한 학생들도 많아 늘 관련 정부 부문의 경비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 관련 부문의 지지와 경비지원을 받지 못하기에 이런 민영 조선족학교들의 경영은 완전히 학비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하여 매학기 3500원 가량되는 학비(이밖에 주숙생들은 매학기 마다 1000원의 주숙비를 더 내야 함)는 공립학교보다 10배가량 더 많아 학부모들에게 비교적 큰 부담을 주고있다. 만약 민족교육을 념두에 두지 않는다면 허다한 학부모들은 자녀를 조선족학교에 보내 공부시키지 않고 현지의 학교들에 보낼것이다. 조선족 학부모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민족문화와 언어문자를 장악하게 하고 싶지만 민족학교의 비싼 학비때문에 진퇴량난이다. 이와 같이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들은 정부 관련 부문에서 당의 민족정책을 참답게 관철하고 정부가 나서서 민족교육문제를 해결해줄것을 더욱더 목이 마르게 기대하고 있다.   둘째, 학교의 교사문제이다. 지금 청도시의 두개 조선족 민영학교의 교사와 장소는 모두 임대한것들이다. 교사임대에는 다음과 같은 두개의 두드러진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해마다 학비에서 아주 큰 일부분을 떼내여 임대료를 바쳐야하기에 학교는 교수, 교수연구와 교사건설 수요에 만족줄수 있는 보다 많은 경비가 없게 된다. 다른 하나는 교사를 임대하면 안정성이 없기에 학교운영에 투자하는 분들이 감히 학교기초시설과 사무조건 개선에 대량의 자금을 투입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또 투입하기 싫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로 나아갈수 없는것이다.  셋째, 교원대오문제이다. 청도시 두개 조선족 민영학교의 교원들은 모두 초빙한것으로서 교직원들은 동북3성과 현지에서 왔으며 50%가 한족이고 50%가 조선족이다. 그들은 학력이 기준에 도달하고 비교적 높은 자질을 갖추었으나 민영학교이기 때문에 교원들은 성인교육과정을 수료할 경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없다. 그리고 초빙된 교원들은 모두 정식 편제가 없어 공립학교 교원들이 받아야할 마땅한 복리대우를 향수하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교원들의 인사, 서류 관계는 기본상 모두 원래 단위에 남겨두었기에 학교관리에 일정한 어려움을 가져다주고 있다.   넷째, 소수민족 어린이들이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를 향수하지 못하고있다. 조선족학교의 경영이 완전히 학생들이 납부하는 학비에 의존하기에 민영학교에 다니는 조선족 학생들은 현지 공립학교보다 훨씬 높은 학비를 바쳐야한다. 이밖에 조선족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현지 호적이 없는 외래 인구(응당 상주인구에 속해야한다)에 속한다. 때문에 이런 소수민족 아이들은 비호적지에서 민족교육을 받기 아주 어려우며 그들은 국가에서 규정한 의무교육을 받을 여러가지 권리를 거의 향수할수 없다.   청도시는 소수민족이 섞여서 사는 산재도시에 속하며 관련 정부부문에서는 아직까지 소수민족교육을 중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첫째로 민족지역이 아니기에 소수민족 인구가 워낙 많지 않으며 더군다다 많은 소수민족 성원과 그들의 자녀가 현지 호구가 없기에 현지 정부 관련 부문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민족교육은 그 자체의 특수성을 있으며 비소수민족 집거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려면 인력, 재력, 물력이 같은 조건하에서 더욱 많이 들며 또 상급 정부에서 아직 관련 정책을 제정하여 규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지 정부가 꼭 비현지 호적 소수민족 자녀들의 민족교육문제에 중시를 돌려야 할 의무가 없는것이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의 통일된 다민족 국가에서 어느곳에서나 반드시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관철시달해야하고 소수민족은 어디에 가나 막론하고 모두 민족정책의 배려를 향수할수 있어야 한다. 특히 도시화 행정이 다그쳐지고 소수민족 인구가 갈수록 많이 비민족지역의 도시에 분포되면서 도시민족문제가 날따라 복잡해지고 다양성을 띠게 된다. 이는 각급 도시 정부들에서 반드시 전통적 사업구상을 바꾸고 관념을 전변시켜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참답게 관철시달할것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반드시 도시 민족교육문제에 중시를 돌려야한다. 개혁개방이 더한층 심화되면서 우리 나라 도시화 행정이 다그쳐지고 도시주민의 다민족화 현상이 날따라 뚜렷해지고 있다. 도시주민의 다민족화는 도시문화의 다양성과 도시민족관계의 복잡화를 불러왔으며 또한 도시에서 어떻게 민족교육을 실시할것인가 하는 과제를 제기했다. 특히 우리 나라 도시화 행정이 다그쳐 지면서 민족지역의 소수민족 인구가 대, 중 도시로 류동하는 템포를 가속화하고 그 자녀들이 민족교육을 받는 문제가 날따라 두드러지게 했으며 소수민족 성원들의 도시에 민족교육기구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해야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도시민족교육 면에서 소수민족 명칭을 붙인 기존 학교들을 제외하고 관계 부문에서는 민족교육 실시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새로 설치한 민족교육기구가 너무나도 적은 실정이다. 이는 도시에서 어떻게 민족교육을 실시할것인가 하는 문제가 이미 의사일정에 올랐으며 각급 도시 정부는 반드시 새로운 문제를 직시해야한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청도에서 조선족 인구가 재빨리 늘어나면서 이미 산해관 이남 도시가운데서 조선족들의 새로운 집거지의 하나로 되였으며 민족교육문제가 날따라 두드러졌다. 민족교육은 소수민족 인구자질의 제고와 민족문화의 계승발양과 관계되며 민족교육은 민족성원들의 자신심과 자존심 증강에도 관계된다. 하지만 현지 도시정부 교육행정부문의 지지와 경비지원을 받지 못해 두개의 기존 민영학교 경영은 비교적 큰 애로에 직면했으며 조선족교육발전이 아주 어렵게 되였다. 이와 같은 국면은 심지어 일부 조선족 민중들로 하여금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에 의심을 가지게 하고있다. 하기에 관련 정부부문들에서는 반드시 조선족 민족교육 현상태와 조선족 민중들의 정부에 대한 요구에 관심을 갖고 일정한 조치를 걍구하여 민족교육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해야한다.   둘째, 당과 국가의 민족교육정책을 참답게 관철시달해야한다. 2006년에 개정한 <중화인민공화국 의무교육법> 제3조에는 "의무교육은 국가에서 투자하여 교육을 운영하고 학생들의 학비를 면제하는 교육이다"고 규정되였다. 제4조에는 "무릇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갖고 있는 적령기 어린이, 소년은 성별, 민족, 인종, 가정재산상황, 종교신앙 등을 구분하지 않고 법에 의해 평등하게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를 향수함과 아울러 의무교육을 받을 의무를 리행해야한다"고 규정되였다. 이와 같은 규정들은 의무교육을 향수할 권리와 의무교육을 받을 의무의 통일성을 강조했으며 의무교육은 국가에서 투자하여 학비를 면제해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 규정에 좇아 조선족 자녀들은 기타 민족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의무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응당 평등하게 무료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를 향수해야한다. 각급 도시정부와 그 관련 부문들에서는 응당 당과 국가의 민족교육정책을 참답게 관철시달하여 "도시인민정부는 응당 소수민족교육사업발전에 중시를 돌리고 소수민족교육사업에 대한 령도와 지지를 강화해야한다. 도시인민정부는 응당 적당한 조치를 강구하여 소수민족 교원대오의 자질을 제고시키고 각급, 각류형 민족학교(반)를 잘 꾸려야하며 경비, 교원 배치 면에서 민족학교(반)을 돌봐주어야한다"는 <의무교육법>과 <도시민족사업조례>의 규정에 좇아 실행해야한다. 민족교육실시에 중시를 돌리고 실제적이고 실시가능한 정책과 조치를 강구하여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민족 자녀들로 하여금 민족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조건을 마련해주어야한다.   셋째, 형식이 다양한 민족교육기구를 적극 설립해야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경내에서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에 좇아 소수민족 자녀들은 어느곳에서나 막론하고 모두 민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소수민족 자녀들로 하여금 민족교육을 받게 하는것은 각급 인민정부의 마땅한 책임과 임무인것이다. 청도시 조선족 학령기 어린이를 실례로 만약 이런 애들이 동북 집거지역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완전히 공립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을 기회와 조건이 주어졌을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집거지역을 떠난뒤 먼저 직면한것이 새로운 정착지에 민족교육기구가 없는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현지 교육행정부문의 지지와 경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서 민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부득불 민영 민족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이곳에서 그들은 학잡비를 면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 공립학교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납부해야하며 무료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를 향수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청도시와 마찬가지로 조선족 인구가 비교적 집중되고 학령기 어린이들이 상당한 수량을 가진 도시들에서는 응당 그들의 민족교육에 관심을 갖고 적극 조건을 마련하여 소수민족 자녀들로 하여금 민족교육을 받게 해야한다. 우리는 조사연구 과정에 조선족 인사들의 민족교육기구를 창설할데 관한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되였으며 일부 나이가 많은 로인들은 심지어 청도에서 만약 조선족 교육의 앞날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 늙은이들은 죽어도 안심할수가 없다"고 말하는것이였다.   현지 조선족사회는 지금 청도시내에 살고 있는 조선족 학령기 어린이가 이미 수천명에 달한다면서 정부에서 응당 그들을 위해 공립 민족학교를 설치해 주어야하며 만약 공립학교를 설치할 조건이 잠시 성숙되지 않았다면 먼저 현지 중소학교에 일부 민족반을 부설하거나 정책상, 경비상에서 민영 민족학교를 고무격려하여 소수민족 자녀들에게 의무교육단계에 민족교육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수민족의 새로운 집거도시에서 각급 민족기구(민족학교 또는 민족반)를 설치하는것은 당과 국가의 민족평등 정책과 민족교육 정책을 시달하고 도시 민족사업을 잘하는 실제적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것이다.   4.기존 민영 조선족학교에 대하여 정책상의 지지와 경비상의 부축, 지원을 주어야한다. 민족교육에 대한 조선족사회의 수요에 따라 청도에는 두개의 민영 조선족학교가 설립되였으나 학교경영은 교사임대, 교원초빙 등을 망라하여 완전히 학비에만 의거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는 민족교육을 받는 어린이 가정의 경제부담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여력을 학교발전에 투입할수 없게 했으며 학교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수 없다. 하지만 청도 조선족사회의 실정으로 보면 민족학교가 없어서는 안된다. 때문에 반드시 현유의 민영 조선족학교들을 참답게 대하고 일정한 조치를 대여 정책상에서 지지하고 경비상에서 지원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곤경에서 벗어나 현지 조선족교육사업을 위해 보다 많은 기여를 할수 있게 해야한다. 각급 도시정부로에 놓고 말하면 소수민족 군체를 관심하고 정력을 들여 소수민족사회에 존재하는 실제문제들을 참답게 해결하는것은 하나의 중대한 정치임무라고 할수 있으며 민족단결을 강화하고 도시의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중요한 조치라고도 할수 있다.   총적으로 주민 성분의 다민족화에 따라 도시 민족교육문제를 의사일정에 올려놓아야한다. 중앙정부는 부모를 따라 도시로 이주해온 소수민족 자녀들이 어떻게 민족교육을 받게 할것인가에 대해 마땅히 정책적으로 규정해야하며 관련 도시정부와 교육행정부문에서는 마땅히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참답게 관철시달해야 하며 소수민족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관심을 돌려야하며 효과적이고 실시 가능한 조치를 대여 소수민족 인구가 비교적 집중된 도시 지역사회에서 민족교육시설을 세우고 도시 소수민족 자녀들이 민족교육을 받는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해야 하며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실제에 시달해야하며 절대 형식에 그치지 말아야한다.
3    中國朝鮮族發展現狀與對策 댓글:  조회:3964  추천:41  2008-12-02
中国朝鲜族发展现状与对策 郑信哲       朝鲜族是由朝鲜半岛移居而来的“跨境民族”,他们在中国分布、定居的过程中,逐渐形成为一个有别于朝鲜半岛居民的民族共同体,而随着中华人民共和国的成立便成为中国各民族大家庭的一员。改革开放以前,朝鲜族作为农业民族,其人口分布比较集中于民族聚居村庄。他们从事传统的水稻生产,过着比较安定的田园生活,保持了较浓厚的民族特点。改革开放以后,随着城乡体制改革的深化和对外交流的扩大,朝鲜族社会、经济、文化等各方面得到重大发展和变化。尤其是,随着市场经济意识的增强,朝鲜族改变了过去单一的水稻耕作,民族经济日渐多元化,其人口从乡村流入城镇,由小城镇流入大中城市,由东北聚居地区流向关内发达地区,进而流向国外,经济发展成就令人瞩目。但是,朝鲜族社会在其发展过程中出现了不少新问题和新困难,朝鲜族社会正在经历着“阵痛”。正确把握朝鲜族社会发展现状,及时解决存在的问题,是朝鲜族社会顺利发展的重要保障。   一、       中国朝鲜族人口及分布     据2000年中国第五次人口普查统计,中国朝鲜族人口为192万3842人,其人口总数在55个少数民族中居第13位。     朝鲜族人口主要分布于吉林、黑龙江、辽宁等东北三省,该三省的朝鲜族人口为177万5198人,占朝鲜族总人口的92.27%。其中,吉林省朝鲜族人口为114万5688人,占朝鲜族总人口的59.55%,黑龙江省为38万8458人,占20.19%,辽宁省为24万1052人,占12.53%。[①]     朝鲜族有两个自治地方,一是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另一个为吉林省长白朝鲜族自治县。此外,40多个朝鲜族民族乡镇分布于东北三省及内蒙古自治区。     延边朝鲜族自治州位于吉林省东部,地处中俄朝三国交界,东与俄罗斯滨海边疆区毗邻,南隔图们江与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咸镜北道、两江道相望。延边朝鲜族自治州于1952年9月成立,是中国朝鲜族最大的聚居地区和东北唯一的少数民族自治州。2003年延边总人口为218.8万,其中朝鲜族人口为83.4万,占中国朝鲜族总人口的朝鲜族的40%以上。[②]     长白朝鲜族自治县成立于1958年9月,它地处吉林省东南部,隔鸭绿江与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两江道相望。2002年末,该县总人口为85,410名,其中朝鲜族人口为12,587名,占全县总人口的14.74%。[③]      二、中国朝鲜族移居略史与贡献   朝鲜族属于跨境民族,朝鲜族先民开始越过鸭绿江、图们江,落根于中国东北地区,可追溯至明末清初。然而,朝鲜族先民的连续大量地移居中国,却是19世纪60年代以后的事情。朝鲜族移居中国的过程,可分为三个阶段:     第一个阶段为19世纪60年代至1910年自由移动时期。1860年以后朝鲜半岛北部遭受了连续几年的自然灾害,加上封建没落王朝残酷的压迫与剥削,广大的朝鲜农民饥寒交迫,他们纷纷背井离乡,不顾两国政府的封禁,“冒禁潜入”越江到中国东北的荒芜地带垦荒种地。1885年随着封禁令的废除,越江移居变得比较自由,于是更多的朝鲜农民移居至中国东北。据不完全统计,至1897年移居到通化、桓仁、宽甸、新宾等地的朝鲜农户8722户、37,000多名,1905年已落户于长白、临江、集安等地的朝鲜农户有8750余户、39,440多名,1909年已在延边地区落户的朝鲜移民达34,133户、184,867名。[④]     第二阶段为1910年日本强迫朝鲜政府签订《韩日合并条约》,朝鲜沦为日本殖民地至1931年“九·一八”事变以前的民众自由移动与来华抗日并举时期。这一时期,除了破产的朝鲜农民继续移入中国东北地区以外,还有大量的民族志士移居中国从事抗日救国运动。据统计,1910—1912年间东北地区的朝鲜人数就增加了49,000名,在1910—1920年间移居至鸭绿江、图们江以北地区的朝鲜人数达192,540名。[⑤] 到1922年3月,居住在东北地区的朝鲜人已达651,096名。[⑥]     第三阶段为1931年“九·一八”事变以后至1945年日本战败前自由迁移与朝鲜总督府强制移民时期。这一时期特点,主要是日本帝国主义的强制移民。“九·一八”事变发生后,日本只用三个月时间就把中国东北地区沦为其殖民地。日本为了加强对东北地区的统治,把东北建成其物资供应地,组织日本农民移至东北地区的同时,还强制朝鲜人移居中国东北。据1940年8月统计,自1937年到1940年,日本以“集团开拓民”名义强制移民到东北各地的朝鲜农户就达14,725户。[⑦]     经过上述几个阶段的移居流动过程,到1945年日本战败前在中国的朝鲜人数量达216万5615人。[⑧] 1945年8月日本投降以后,不少朝鲜人开始陆续返回至朝鲜半岛。经过几年的人口变动,至1949年中华人民共和国建立后趋于基本稳定,1953年中国第一次人口普查时,朝鲜族人口为111万1275人。[⑨]     从朝鲜族分布看,移居当时主要集中于鸭绿江、图们江以北地区。之后,随着水田的开发,朝鲜族分布地域逐渐向西、向北扩大,并大多分布在易于水田开发的江河流域。到20世纪30年代末,东北地区的松花江、牡丹江、绥芬河、嫩江、乌苏里江以及东、西辽河等流域都有他们的足迹。     朝鲜族擅长水稻耕作,他们移居中国东北,主要居住在适于水田耕作的河谷平原地区。他们不顾东北地区的气候寒冷,积极试种水稻并获成功,由此揭开中国东北地区耕种水稻的历史。水稻耕作不同于旱田,它需要一定的水利设施,而拦河筑坝、挖沟开渠以及开荒造水田,都要依靠一定人力并相互协作。所以,朝鲜族移居中国东北时,他们一般都结群而来,居住比较集中,其居住地便形成聚居村落。在苦难年代,民族村落是朝鲜族互相帮助、赖以生存的基本单位。     朝鲜族移居之始,东北地区仍属人迹罕见的“封禁”之地,他们冒禁潜入,开垦荒地,是以生命为代价的。但是,朝鲜族先民不畏艰巨,刨地拓荒,为开发和建设这块黑土地做出了不朽的贡献。据珲春招垦总局调查,1881年朝鲜族聚居的延边地区熟地面积已达27815垧;[⑩] 1907年,延边地区和龙峪管辖区汉、满族人口有264户,而朝鲜族人口则达5990户,其耕地面积有25,501垧。[⑪] 朝鲜族人民不仅披荆斩棘,开拓东北疆域,建设新的家园,而且积极试种水稻,普及水田耕作技术,为中国北方的水稻农业发展历史写下光辉的一页。据统计,至20世纪20年代吉林省延边地区、吉林地区水田的100%和通化地区水田的85%,黑龙江省水田的100%,辽宁省开原地区水田的90%、兴京地区和沈阳地区水田的85%、抚顺地区水田的80%和丹东地区水田的70%均由朝鲜族人民开发和耕种的。[⑫] 朝鲜族人民勤劳、勇敢,他们从朝鲜半岛移居中国东北时一无所有,在中国深受日本殖民统治者、反动政府和封建地主等三重压迫和剥削,因而他们的革命性很强。朝鲜族人民积极参加中国共产党领导的新民主主义革命时期各个阶段的反帝、反封建的革命斗争,为新中国的建立做出了自己应有的贡献。 至20世纪20年代末,东北地区的中国共产党组织还不健全。1928年中共满洲省委正式建立后,特别是在共产国际“一国一党”原则指导下,朝鲜族早期共产主义者纷纷加入中国共产党,党在东北地区的力量得到迅速壮大。1930年前后,东北地区的中共党员由300名左右猛增至2000多名,其中朝鲜族占90%以上。[⑬] 当时,南满地区农村党员200名中,朝鲜族为193名;东满地区农村党员636名中,618名为朝鲜族;在北满,中共汤原中心县委领导下的50名党员中,朝鲜族有45名。[⑭] 也就是说,土地革命时期,东北地区的中共党员大多数为朝鲜族,据1931年11月中共《满洲省委扩大组织的问题决议案》记载,当时东北的“党员人数由百余人发展到二千多人”,其中“85%的党员是朝鲜族同志”。[⑮] 在抗日战争时期,朝鲜族人民不畏艰险,坚决抗击了日本侵略者。1931年,日本发动“九一八”事变,武装入侵我国东北地区。朝鲜族人民同仇敌忾,与各族人民一道站在反对日本侵略军的前沿,进行了不屈不饶的斗争。在中国共产党的领导下,朝鲜族地区抗日情绪高涨,各地纷纷组织反日游击队抗击日本侵略者。后来,这些游击队发展壮大,成为东北抗日联军最重要的组成部分。正如东北抗日联军主要领导者周保中同志所说“1932年所建立的坚强的东满游击队和1933年所建立的强大的磐石游击队、珠河游击队、密山游击队、汤原游击队、饶河游击队都是由革命的朝鲜同志所创建的。后来它们发展成为抗日联军第一、二、三、四、六、七军。第五军里也有不少优秀的朝鲜同志。”[⑯] 东北的抗日游击根据地最初也主要建立在朝鲜族聚居地区,根据地的朝鲜族人民不仅从人力、物资等方面全力支援抗日游击队,还与之并肩作战,有力地粉碎了日军接连不断的“讨伐”,成为东北抗日游击队伍的坚强后盾。     解放战争时期,朝鲜族人民踊跃参军参战,积极投身于新中国的解放事业。1945年,随着抗日战争的全面胜利,朝鲜半岛获得光复,一些在中国参加反日斗争或居住的朝鲜人开始回国。但对大多数朝鲜族来说,他们与各族人民共同开拓疆域和反对外来侵略者斗争中,已深深地爱上了这一国度,中华热土已变为他们的生存之地,他们的命运已经和中国紧紧联系在一起。所以,当中国革命的命运面临两种选择时,朝鲜族人民毫不犹豫地投身于中国共产党领导下的人民解放战争。这个时期,朝鲜族人民一方面积极响应党关于建立巩固东北根据地的指示,建立巩固的东满、南满根据地,并在根据地开展了热火朝天的土地改革运动,积极支援解放战争。另一方面,朝鲜族聚居地区掀起参军热潮,出现许多送子、送夫参军,兄弟姐妹争相报名参军的感人场面。据统计,当时东北解放区参军的朝鲜族青壮年共有62,924名,这占朝鲜族人口的5%;人口只有60多万的延边地区参军的朝鲜族青壮年近3.5万,占该地参军人数的85%,此外还有10余万朝鲜族青壮年参加了地方公安部队、武装民兵队伍等。[⑰] 如上所述,朝鲜族在中国整个新民主主义时期,都表现出极大的革命热情,他们浴血奋战,为争取中华民族的解放做出了重大牺牲,为新中国的建立做出了应有的贡献。据延边朝鲜族自治州政府统计,政府登记在册的革命烈士有14,740名(占吉林省革命烈士总数的41%),其中朝鲜族革命烈士占92%以上。[⑱] 人口只占吉林省总人口3%的延边朝鲜族中,出现如此多的革命烈士,这在其他地区、其他民族中可谓少见。 中国朝鲜族在新民主主义革命时期为各民族的解放进行了艰苦卓绝的斗争,而1949年随着中华人民共和国的成立,朝鲜族便成为中国多民族大家庭的一员,迎来了比较稳定的发展时期。   三、中国朝鲜族经济社会发展现状      中华人民共和国成立以来,朝鲜族作为统一的多民族国家的一员积极参加了社会主义革命和社会主义建立事业,其在政治、经济、文化等方面得到较快的发展。朝鲜族整体文化素质也得到很大提高,1952年朝鲜族地区普及了小学教育,1958年基本普及了中学教育。朝鲜族接受小学以上教育的比率、每万人中接受大学教育的水平等方面,均高于中国平均数。例如,每万人中接受大学教育的情况看,据2000年第五次中国人口普查统计,中国平均数为122名,汉族为126名,而朝鲜族为381名;每万人中硕士、博士拥有数看,中国平均为8名,汉族为8名,而朝鲜族为17名。[⑲] 尤其是,自中国共产党第十一届三中全会制定把党的工作中心由过去以阶级斗争为主转向经济建设为主的大政方针以来,我国社会逐渐由封闭走向开放,其经济、社会得到了迅速发展。朝鲜族社会也不例外,在改革开放的强劲东风吹拂下,朝鲜族社会迎来了巨变。 农业经营体制得到重大改变 朝鲜族曾是农业民族,他们擅长水稻耕作。中华人民共和国成立后,朝鲜族农民在“互助组”、“合作社”、及“人民公社”的旗帜下组织起来,实行集体生产,搞平均分配,过着相对平静而稳定的田园生活。但是,那时“平均分配”、“大锅饭”未能唤起农民的生产积极性,劳动效率低下,表现出严重的生产非效益性。中国实行改革开放政策,尤其是进入80年代全国普遍实施农业生产个人联产承包制以来,朝鲜族农村经济和群众生活有了很大提高。生产承包制极大地调动了农民的生产积极性,劳动效率明显提高,例如过去集体生产时插秧、收割均需二十多天,而实施个人承包制以后,不到一个星期就能完成。此外,农民种田与自己的收益密切相关,他们比集体时更加精耕细作,在高产、稳产方面下工夫,如今朝鲜族地区的大部分水田亩产均超过1,000斤,垧产在15,000斤以上。 农业经营逐步走向集约化     农村家庭联产承包责任制赋予了农民的生产自主经营权,这调动了农民的生产积极性,提高了农业劳动生产率,解放了大量的农业劳动力。从土地中摆脱出来的朝鲜族农民,纷纷走出家门,进入城市从事第二、第三产业,掀起了朝鲜族人口流动大潮。目前,朝鲜族农村劳动力中,离土离乡到国内大中城市经商、打工或去国外从事劳务的大约有三分之一以上。有的农村甚至一半以上的劳动力离土离乡另谋出路,而种地的劳动力不及总劳动力的一半,黑龙江省海林市朝鲜族农村劳动力中,20世纪90年代末已形成了三分之一劳动力在家种田,三分之一劳动力到大中城市经商务工,三分之一劳动力去国外从事各种劳务的格局。这种局面不仅大大减轻了农村的就业压力,而且促使农业经营逐渐走向规模化和集约化,黑龙江省朝鲜族地区水田约有20%已集中至种田大户,其产量、国家上缴粮各占朝鲜族地区水稻产量和上缴粮的30%和45%;牡丹江市6个民族乡镇已有300多户经营100亩以上的种田大户。[⑳]     3、民族经济产业结构有所调整 过去,朝鲜族作为农业民族,80%以上都从事农业生产,且经营单一的种植业,这种局面一直持续至80年代。随着改革开放及其农村经济体制改革,朝鲜族农民从单纯的种植业中摆脱出来,广开生产门路,从事多种经营,积极地参与第二、第三产业,朝鲜族私营企业、个体工商户迅速增多,改变了以往单一种植业生产的局面。于是,过去第一产业占绝对优势的局面逐渐得到改变,第二、第三产业比重日趋上升,民族经济结构得到调整,并逐渐向合理方向发展。黑龙江省朝鲜族乡镇第一、第二、第三产业比重,1990年为70%、20%、10%,到1996年底变为45%、35%、20%,乡镇企业产值超亿元的有7个;吉林省延边朝鲜族自治州的国内生产总值中,第一、第二、第三产业所占比重分别由1980年的23.7%、51.1%、25.2%改变为1995年的16.3%、42.2%、41.5%。此外,收入构成要素也发生变化,以牡丹江市朝鲜族乡镇为例,农村经济总收入中,1991年农林牧渔收入占89.1%,非农业收入只占10.9%;到1996年,农林牧渔收入在农村经济总收入中的所占比重下降至46.2%,而非农业收入比重上升为53.8%。     4、生活更上一层楼     农、工、商兼备,劳动力从农业生产中分离出去从事多种经营及国外劳务,大大改变了朝鲜族农村过去只靠单一水稻生产营生的局面,如今农业收入只是朝鲜族农民整个收入的一部分,工商业和出国劳务等收入相当可观。随着朝鲜族农民收入的增多,其生活质量有了明显提高。不仅衣、食、住、行大变样,而且充满现代气息的家用电器、电话等也进入了农民家庭,并得到了基本普及。   当然,改革开放以来朝鲜族地区间的发展也是很不平衡,贫富差距悬殊,目前还有许多比较封闭落后,没有摆脱贫困的朝鲜族农村。     5、意识结构变化深刻 改革开放打破了过去朝鲜族农村的封闭和沉寂,促使广大的朝鲜族群众从传统的小农经济束缚中解放出来。朝鲜族群众不再满足过去的“温饱型”田园生活,纷纷涌入商品经济大潮之中,其人口流动变得非常活跃。人口流动不仅扩大朝鲜族分布领域和经济多元性,而且为朝鲜族更新观念,树立现代意识提供了可能。朝鲜族人口大量从农村走入城镇,开辟市场,参与竞争,逐渐习得驾驭市场的本领,加速了城市文明的熏陶,其观念得到很大的更新。特别是朝鲜族抓住中韩经济文化交流日益频繁和扩大的机遇,利用其族缘、人缘、语言等优势,大量地投入到涉外经济领域,他们一方面在国内到韩国独资、合资企业打工或在贸易、旅游等行业中担任韩方代理人或直接与韩国进行经营活动。另一方面,直接走出国门,到国外打工或经商。朝鲜族通过这些经营活动,不仅获得了一定的“资本原始积累”,为扩大再生产创造条件,而且在与资本主义市场体制的接触中,学习了它们比较先进的经营管理,开阔了眼界,传统保守观念得到改变,现代市场意识大为加强,加速了民族自身的现代化进程。   四、 朝鲜族社会发展中的困惑   改革开放以后,朝鲜族社会重大变化中的一个明显特征就是朝鲜族人口的急剧而大量流动。朝鲜族人口流动始于20世纪80年代中后期,而90年代进入人口流动旺盛期。例如,据笔者调查了解,1996 年黑龙江省宁安市朝鲜族乡村离土离乡的劳动力约占总劳动力的35%,该市江南乡明星朝鲜族村280多户中,全家不在村的有79户;吉林省九台市红光朝鲜族村1996年387户中50户离开村子,400多名劳动力中离土离乡的约占50%。[21] 进入21世纪,朝鲜族人口流动之强势不减,2002年初黑龙江省海林县海林乡南拉古村全村有504户、1942人,其中进城出国人员716人,占全村人口的36.87%。[22] 朝鲜族人口流动可谓走在中国各民族的前列,我们从下列几组数据中可见一斑: 据黑龙江省民族事务委员会统计,1996年末全省924个民族村总劳动力(少数民族占71.8%)中,外出劳务半年以上者占9.7%,而全省491个朝鲜族村总劳动力(少数民族占96.1%)中,外出劳务半年以上者占19.4%;相比之下,全省283个满族村(少数民族劳动力占58.0%)的外出劳务者,只占其劳动力的4.2%,78个蒙古族村(少数民族劳动力占54.2%)的外出劳务者占其总劳动力的1.5%,44个达斡尔村(少数民族劳动力占46.1%)外出劳务者为2.5%,13个回族村(少数民族劳动力为67.2%)外出劳务者占6.1%;此外,全省924个民族村的外出劳务者30,001名中,491个朝鲜族村外出劳务者为22,630名,占总数的75.4%。[23] 笔者从辽宁省大洼县荣兴朝鲜族乡获悉,该乡总人口20,118人,其中朝鲜族2996人,占其总人口的14.89%。据2005年3月统计,该乡外出劳务人员3362人,占全乡人口的16.71%。其中,中央屯村和海滨村两个朝鲜族村外出劳务人员1025名,占两村人口的35.04%,其余7个村、一个居委会的外出劳务人员为2337人,占其人口的13.59%。[24] 朝鲜族人口流动中,尤其显著的是以韩国为流入国的出国劳务。上述南拉古村外出劳务人员716人中,出国劳务者532人,占74.30%;中央屯村外出劳务513人,其中出国劳务者213人,占其41.52%;海滨村外出劳务512人,其中出国劳务人员444人,占其86.72%。   南拉古村、中央屯村出国劳务流入国简表  单位:人 流入国家 南拉古村 中央屯村 合计 韩国 505 191 696 日本 7 10 17 俄罗斯 15 4 19 美国   4 4 其他国家 5 4 9 合计 532 213 745 (资料出处:根据实地调查数据自制)     朝鲜族人口的急剧流动对于民族的城市化进程,减轻农村劳动力就业压力,逐步实现农业生产的规模经营,改变单一的经济结构,提高群众的生活水平,转变传统观念等方面,具有很大的促进作用。然而,频繁的人口流动给朝鲜族社会带来的负面影响也是不可忽视的。其主要表现:     1、民族基础教育面临困境 随着朝鲜族农村人口流动日趋频繁,其聚集地区人口大为减少,其中也包括学龄儿童少年,加之朝鲜族人口出生率的下降,朝鲜族农村学校生源日益短缺,许多农村中小学不得不关闭或合并。以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族中小学为例,1989年乡村民族中学有19所,1995年中学减少至6所,2002年 只剩2所;1989年民族小学有188所小学,1995年减少至77所,2002年只剩43所。[25] 黑龙江省哈尔滨市辖区朝鲜族小学在1997年到2003年间,由102所减少至32所,学生数由9442人减少至2530人。[26] 吉林省吉林市辖区从1989年到2004年,进行了规模较大的朝鲜族学校布局调整(1993年、1995年、1999年、2002年),农村朝鲜族小学由1989年的137所减少到26所,中学由18所减少到9所,比1989年共减少120所,目前剩下的35所,在今后两年还有可能减少。[27] 学校撤并减少,主因在学生数急剧减少。例如吉林市辖区的舒兰市平安镇属于朝鲜族相对集中的乡镇,1990年朝鲜族中小学在校生为2800人,而到2004年减少为327人;1999年,蛟河市的朝鲜族中小学在校生2985人,到2004年下降为1923人。[28] 还有,如今虽然没到被关闭的地步,但由于农村人口大量流动和出生率急剧下降,许多农村学校的前途未卜。例如,延边朝鲜族自治州境内的和龙市南坪镇南坪中学建于1956年,10年前学生还有280多名,如今只剩41名(初中一年级10名,二年级9名,三年级22名),再过几年就无法继续办下去;[29] 南拉古村小学在20世纪70年代学生数曾达500人,此后也保持了200~300人左右,但90年代以后急剧减少,到2002年全校学生只有60人(一年级8人,二年级10人,三年级10人,四年级12人,五年级4人,六年级16人);[30] 荣兴朝鲜族乡朝鲜族中心小学在1999年合并附近两个村小学以后,在校学生曾达380人,但此后逐渐减少,到2005年学生数降至87人(一年级12人,二年级23人,三年级16人,四年级8人,五年级9人,六年级19人),据校长讲,由于学生数还在减少,再过几年各乡村朝鲜族小学有可能都撤并到下洼县城朝鲜族寄宿小学。[31] 朝鲜族农村学校的大量减少,使农村学龄儿童少年就学遇到多种难题,其接受教育的机会相对缩小,农村青少年文化程度明显下滑。 农村学校教师的流动也给朝鲜族农村教育发展带来不利影响。在农村,乡村教师属于有知识、有见识的阶层,当他们看到许多村民流向城市、走出国门,从经济生活上大有改善的情况后,想到自己付出与得到之间的极大不平衡,就下决心弃教而加入到人口流动之行列,在教师当中“下海潮”、“出国热”也盛行一时,造成教师队伍,尤其是中青年骨干教师流失情况严重。荣兴乡朝鲜族中心小学现有教师16人,其中5人为代课教师,而自1995年到2005年7月间流失教师16人(2005年就有2人去韩国),且这些流失教师均属于正规师范学校毕业的教学骨干;2002年延边朝鲜族自治州朝鲜族乡村小学教师中离职的172人,比1995年59人增加近3倍;[32] 黑龙江省尚志市朝鲜族小学在1985年教师数量最多时达215人,1997年减至175人,2000年又减至140人,2004年已减至79人,10年间教师流失人数高达136人;[33] 吉林省吉林市,1989年时全市朝鲜族教师总数为2584人,2004年已锐减到1770人,减少814人。[34] 朝鲜族学校的教师流失严重,其中不乏教学骨干,这难免导致朝鲜族学校教学质量的下降,而这又是朝鲜族学校生源减少的重要原因之一。     还有,流动人口大部分属青壮年,他们中的许多人把学龄子女托付给家中老人或亲戚照看,因而子女教育方面出现漏洞,导致他们在人生导向、价值观方面的混乱和学业的倒退。     2、农村男青年“娶妻难”问题日益突出     朝鲜族农村人口流动的显著特点之一,是女性人口、尤其是未婚女青年的大量外流。因为她们进城比较容易找职业,还多一条婚嫁至韩国等外国的渠道。根据第五次全国人口普查统计,延边朝鲜族自治州外出人口280,757名,其中边境城市83,540名,边境乡镇12,031名,这些人绝大部分属于朝鲜族,其中女青年比重更大。[35] 例如,自1993年到2001年,延边朝鲜族自治州涉外婚姻共有18,885件,其中朝鲜族妇女18,000人,而这些朝鲜族妇女涉外婚姻事例中,未婚女性9540人。[36] 据延边朝鲜族自治州对9个乡镇23个村的调查,年龄20岁以上的朝鲜族女青年有520人,其中410人出国或进城打工。[37] 另据2002年韩国有关部门的结婚登记统计,从1900年到2002年中国朝鲜族女性与韩国男性婚姻件数增加到54,799,占15岁到24岁中国朝鲜族女性总数的20%。[38] 朝鲜族年轻妇女的大量外流,造成朝鲜族农村男女青年比例严重失调,如今去朝鲜族农村,几乎看不到未婚女青年,男女青年比例一般达20:1,如2003年龙井市三合镇20岁~45岁的未婚男青年560人,女青年30人,近19:1,更有甚者达40~50:1。 在朝鲜族乡村,该成家而找不着对象的大龄男青年大有人在。据调查,拥有400—500户家庭的朝鲜族村庄里,大龄未婚男青年有50—60名是非常普遍的现象,如荣兴朝鲜族乡两个朝鲜族村留在村里的24岁以上的大龄男青年有146人。与此形成对比的是,朝鲜族乡村周围的汉族村庄里却几乎不存在因为没有女青年而找不着对象的情况。朝鲜族农村大龄男青年找对象难,从当前看还没有导致严重的问题,但其问题的严重性已露出端倪。许多青年因找不到对象,思想苦闷,经常喝酒闲逛,滋事,造成了一些社会问题。笔者在调查过程中也感受到这些青年的焦急、烦躁、不安心和情绪发泄欲,如果不及时采取措施缓和这种情况,再过若干年,它不仅会成为朝鲜族社会发展的最主要问题之一,而且会成为影响朝鲜族社会稳定的最主要因素之一。      另外,在朝鲜族人口中具有生育能力的妇女跨国流动和跨国婚姻,对朝鲜族人口的缓慢增长及朝鲜族聚居地区人口负增长有着直接的影响。据韩国汉城大学权泰焕教授等的研究,朝鲜族在过去10年间,由于朝鲜族妇女的跨国婚姻减少了约20%的出生人口。[39] 还有,许多朝鲜族家庭在急剧的人口流动中摇摇欲坠。去国外劳务长期不归、涉外婚姻增多、离婚率上升等现象,正在动摇着许多朝鲜族家庭的安定。随之而生的夫妇感情危机、子女教育、老人赡养等问题变得愈益严重,家庭是构成社会的最基本单位,家庭不稳必然影响社会的稳定。     3、农村基层干部流失严重 在朝鲜族农村人口流动大军中,原来担任村干部的中青年人也不少。这些人思想相对活跃,思路比较清晰,是属于较早地进入城市、走出国门的一班人。这些人的流动,导致农村基层干部队伍的不稳,极大地削弱了朝鲜族农村基层干部队伍的力量。据了解,20世纪90年代中期以后,由于朝鲜族村干部不断出国,黑龙江省海林市新安镇已经补选过11名村党支部书记,尚志市河东乡6个村的朝鲜族村干部全都是新任的。更有甚者,有的朝鲜族村在7名干部中,出国劳务或进城经商打工的有4名,有的村在26名中共党员中外出打工经商者达12名。有的地方村干部流失后出现空缺,而另一方面村中稍有能力的青年人也几乎不在村,造成后继乏人。黑龙江省牡丹江市朝鲜族农村干部中,年龄超过50岁的人占20%以上,且文化素质较低;有的村干部到了60岁,然没有人接替,只好继续留任;还有,由于村中找不出合适的干部人选,出现乡镇下派机关干部兼任或到汉族村借用干部的情景。以上所举事例只是笔者于20世纪90年代末实地调查中了解到的现象,而如今这种现象比过去有过之而无不及。朝鲜族农村基层干部的外流及后继乏人,致使一些农村运营处于半瘫痪状态,而农民看不到希望又大举离农离村,加速一些农村的萧条,呈现出朝鲜族农村社会的不稳定。 4、              朝鲜族聚集地区民族人口的减少     朝鲜族人口的大量流动,一个直接的后果就是民族聚集地区朝鲜族人口的急剧减少,逐渐改变了朝鲜族人口的分布格局。     据1982年中国第三次人口普查统计,居住于东北三省的朝鲜族占中国朝鲜族总人口的98.23%。然而,自20世纪80年代中期开始出现的朝鲜族人口流动逐渐改变着朝鲜族人口的传统分布格局。据1990年第四次中国人口普查,东北三省朝鲜族人口所占比例为97.14%,比1982年下降了1.09%。1982年~1990年朝鲜族人口平均增长率为8.96%,其中东北三省朝鲜族人口增长率为7.75%,其他地区朝鲜族人口增长率却达76.04%。     特别是,20世纪90年代开始的朝鲜族人口急剧流动,导致朝鲜族聚集地区人口比例日益减少。据2000年第五次中国人口普查统计,东北三省朝鲜族人口比例为92.27%,比1990年下降4.87%。并且,1990年~2000年中国朝鲜族人口的平均增长率为0.03%,其中东北三省朝鲜族人口的增长率为-4.99%,而其他地区朝鲜族人口的增长率达到170.34%,一些地区朝鲜族人口更是增加了5倍以上。例如,1990年~2000年江苏省朝鲜族人口由963人增加到5048人,增长率为524.20%;天津市朝鲜族由1820人增加到11,041人,增长率为606.65%;上海市朝鲜族由782人增加到5120人,增长率为654.73%;山东省朝鲜族由3362人增加至27,795人,增长率为826.74%;广东省朝鲜族由611人增加到10,463人,增长率达1712.44%。[40]   四、正确把握朝鲜族社会发展现状   如上所述,近20年多来朝鲜族社会得到长足的发展。然在发展过程中,也出现了不少新情况、新问题,有的问题还很严重。对朝鲜族社会发展现状的正确把握,是巩固已经取得的成就,及时解决问题,保持朝鲜族社会持续、稳定发展的基本需要和出发点。     1、发展迅速,然随之而来的问题也比较严重。     众所周知,改革开放和人口流动为朝鲜族社会带来了经济、文化的迅速发展和观念意识的更新以及生活水平的极大提高。同时,显露的问题也较严重。例如,农村人口的大量流动,带来了民族传统聚居地的日益缩小,削弱了农村的民族教育基础,导致了农村男青年婚姻难问题的深刻化。此外,围绕海外劳务输出而出现的诈骗、偷渡及一些人在流入地的非法行为等严重地损害了朝鲜族整体形象。这些都是影响朝鲜族社会正常发展的比较严重的问题。     2、问题虽然严重,但这是发展过程中的“阵痛”。     如今,人口流动是现今中国社会的一个普遍现象,又是社会发展进步的重要表现之一。在改革开放和城市化过程中,少数民族的人口流动也是不可避免的。我们从朝鲜族发展进程看,可以说朝鲜族已走在改革开放的前列,故朝鲜族在先于其他民族享受快速发展、人口流动所带来的实惠的同时,在其他民族中还未出现的问题也首先在朝鲜族社会中显露出来了。可以说,如果其他民族随着改革开放的发展,人口流动达到一定程度,也会不可避免地经历类似问题。所以,笔者认为,如今朝鲜族社会所经历的过程,是改革开放和现代化进程中一般都要经历的过程,出现的问题可以说是发展过程中不可避免的“阵痛”。我们对朝鲜族社会发展过程中所出现的问题既不该视如洪水猛兽,过分渲染,也不能掉以轻心,放任自流。对发展中的问题予以高度重视,通过积极探索,寻找得力措施,不断地给予解决,这才是我们应持的态度。     3、朝鲜族农村社会仍有朝气,充满生命力。     面对朝鲜族社会所出现的比较严重的问题,一些人甚至提出了朝鲜族社会的“危机说”、“解体说”。对此,笔者不敢苟同。其理由是:     第一、任何社会、任何民族在发展过程中,不可避免地会出现问题,甚至是比较严重的问题,关键在于如何正确地对待和解决这些问题。     第二、朝鲜族社会基础还很牢固,农村社会仍有朝气。还有,正在进行中的农业经营的集约化、规模化趋势,不会因农村人口的大量流动而使朝鲜族农村荒废。事实上,笔者在调查中看到那些经济发展水平较高的朝鲜族农村中,农业的萧条、民族教育的削弱、男青年的婚姻难等问题并不存在或不明显。     第三、随着朝鲜族社会的发展和农村现代化水平的提高,积极建设民族聚集乡镇,若干年以后,可期待那些离土离乡的人们的大举回返。     第四、许多人们已经认识到问题的深刻性,正在积极地探索解决对策。     4、要充分理解朝鲜族地区之间的发展不平衡。     各地区朝鲜族社会经济的发展,由于其所处的自然条件和交通等要素的相异而不同。朝鲜族人口的大部分仍聚居在东北三省,其分布可分为平原地区和山区,农业经营主要分为水田和旱田。一般地说,水田地区的生活水平高于旱田地区,这一特点在改革开放前比较明显。改革开放以后,随着第二、第三产业的发展,过去的以水旱田地区衡量生活水平的情况有所改变。从现在的生活水平看,非农产业收入高的地区好于农业地区,人口流动频繁的地区好于其它地区,特别的劳务输出活跃的地区,其生活水平明显好于其它地区。如今,在朝鲜族社会内,已呈现出贫富差距拉大之趋势。     5、朝鲜族与韩国的交往中增强了“中国人”之意识。     中韩关系实现正常化,为朝鲜族进出韩国提供了未曾有的好机遇。朝鲜族利用其亲缘、语言等优势,大量走出国门,去韩国探亲、访问以至经商务工。但是,由于朝鲜族是“跨境民族”,与韩国人民族相同,语言相近,又有较浓的亲缘关系,朝鲜族与韩国的密切交往容易给人造成一种不可信任之嫌。加上,一些别有用心的韩国人利用民族感情拉拢、腐蚀我国朝鲜族和一些朝鲜族在经济利益的诱惑下被人所利用,做出一些丧失国格、人格的事情的现象,更加深了这种印象。然而,事实上朝鲜族在与韩国的交往中,尽管从经济上得到很大实惠,其观念、意识及价值观等方面的变化很大,但有一点,即自己是“中国人”的意识,在大部分朝鲜族中却得到了进一步的增强。特别是,那些在韩国滞留过一定时间的朝鲜族留学或劳务人员,更是异口同声地说,在韩国的时候,每时每刻都使你觉得自己是中国人,而不是什么别国人。    五、中国朝鲜族社会发展对策   在改革开放与对外交流中,中国朝鲜族社会得到了重大发展,但也出现了一些严重问题。尤其是朝鲜族作为跨境民族,与朝鲜半岛有着千丝万缕的联系,期间难免鱼龙混杂,受着一些来自境外的不利影响,这样加快发展朝鲜族地区经济,保持其社会稳定就显得更为重要。朝鲜族社会正处在一个大变革时期,不前进就意味着退步。尽管在发展过程中出现这样或那样的问题,有的问题还比较严重,但只要我们认真对待,积极探索对策,就一定能克服面临的困难,把朝鲜族社会建设得更加美好。为此,我们应该从解决认识问题和制定实际对策方面下功夫。   (一)关于认识问题 1、应该充分肯定成绩。 在改革开放、尤其与韩国的密切交流中,朝鲜族以其特有的优势与机遇涌进社会大变革潮流,从中获得了较大的发展。他们的传统小农意识得到很大改变,改革开放意识与市场竞争意识得到加强,物质基础更加雄厚,民族城市化、现代化进程得到加快,并为中韩交流,为国家、故乡建设做出了应有的贡献。 2、              如何看待发展中出现的问题?     我国朝鲜族走在改革开放之前列,一些过去未曾有过的问题出现也先于其他民族,在世间引起一些不良反映,形象有所受损,但这些均是社会发展过程中在所难免的问题。如果其他少数民族也发展到一定水平也会出现类似问题。故,应对发展中出现的问题要有一个正确的估计和认识,不能一点带面地予以全盘否定。 要充分理解跨境民族的特殊性。 跨境民族的特殊性在于他们同境外联系比内地民族多。由于同境外联系较多,鱼龙混杂,难免受一些不良影响,甚至会发生一些内外勾结影响我国安全的政治性问题。然而,这些毕竟属于极少数人的个人所为,与其整个民族没有关系。所以,要相信大多数少数民族干部和群众,不应该把某些事或某些人的问题与民族整体挂钩起来,这容易使其民族感情受到伤害,也容易使人产生对这个民族的成见或歧视,不利于民族团结。 对朝鲜族地区的宗教渗透问题,要有一个正确地认识。     中韩建交以后,随着韩国人的大量入境,其中以传教为目的的人也不少。在他们的渗透影响下东北朝鲜族地区一时盛行宗教活动,甚至一些宗教活动还属于非法,有一种宗教大传播之势,在当时确是属于宗教被渗透地区之一。为此,我们也做了反渗透工作,其成效也很显著。如今,朝鲜族地区宗教活动已经进入平稳发展时期。所以,我们在工作中掌握一定的“度”很重要,不能总是以老眼光对待宗教渗透问题,这不利于民族团结与地区稳定。       (二)实际对策 1、要积极扶持经济发展,坚实民族经济基础。     改革开放以来,朝鲜族社会发展过程中出现的一系列问题,几乎都与朝鲜族人口大量流动相关。而人口流动,是与人们获取更多的经济利益,追求更高的生存质量密不可分。如果能够在家乡提高收入,过着比较富裕生活的话,几乎没有人会离开自己熟悉的故乡而到人生地不熟的地方去闯荡。对于少数民族来说,更是如此。因为他们知道,汉族人口占绝大多数的我国,少数民族离开自己的聚居地区,向大中城市的流动,就是意味着加速了民族文化、民族语言等民族特点的消失过程。可见,迅速发展民族经济至关重要。 朝鲜族民族经济的主干还在于农村,为促进朝鲜族经济的更快发展,一是要加大农业投入,大力推行科技兴农,发展高产、优质、高效农业,巩固和发展农村经济,为众多农民在生产、生活各方面创造有利的环境和条件,推进农业的现代化;二是扶持乡村企业发展,使之与农业经济相辅相成,互相支持,互相促进;三是加强农村精神文明建设,移风易俗,更新观念,提倡健康文明的生活方式,正确引导农民把更多的资金用于扩大生产或经营项目上,而减少和避免盲目消费或超前消费。      2、要积极支持和支援转型期朝鲜族教育发展,合理调整民族教育布局。   教育是提高人口素质,培养科学人才和有文化、有技能的劳动者的关键环节。每个民族要在生存竞争中站稳脚跟,就必须加强教育,提高民族整体的素质。朝鲜族一向以重视教育、尊重知识为荣,而近几年朝鲜族整体教育水平的滑坡之势不能不令人担心。朝鲜族农村人口的大量流动和人口自然增长率的急剧下降,农村学校教育面临困境,如今要保持过去村村有小学、乡乡有中学的局面已不现实。要使朝鲜族教育在现有的基础上继续发展,现在要做的:一是合理调整学校分布网点,集中办学。集中办学是集中师资、财力等,有效地提高教育质量的可行措施,尤其是现在各个学校生源不断减少的情况下,集中办学更是显示其优越性;二是加速城市教育体制改革,扩大东北地区城镇朝鲜族学校的规模;三是应支持和支援山海关以南朝鲜族流动人口较多的地方建立朝鲜族学校,以解决朝鲜族流动人口子女民族教育问题。 3、              大力培养基层少数民族干部。 朝鲜族人口流动频繁,而引领人口流动的首先是那些在基层工作的头脑相对清醒,有一种进取精神的干部。由于这部分人和农村动脑筋的人首先加入人口流动行列,基层干部队伍也出现断层现象,几乎达到如果原有的少数民族干部卸任就没有替代人选的地步,甚至在农村选村长、村支部书记都成为问题。基层少数民族干部缺少,也导致了上级政府中少数民族干部来源不足、数额越来越少的状况。可见,大量培养和使用少数民族基层干部,是迫在眉睫的任务,有关部门应该有意识地加强基层干部在内的少数民族干部的培养,这对于边疆地区社会发展和保持稳定具有重要意义。 4、加强小城镇建设,打造具有一定规模的民族人口聚居的城镇。     过去,朝鲜族人口大部分居住于相对集中的乡村。改革开放以来,朝鲜族纷纷离土离乡,大量地走入城市,走向国外。由于人口流动,朝鲜族乡村人口减少,出现“空洞”现象。如今,朝鲜族农村面临把分散居住在各小村庄的朝鲜族农民集中起来的问题,因为只有这样才能解决农村劳动力缺乏而耕地荒废,民族教育生源不足而学校倒闭的现象。所以,要加强小城镇建设,尤其在边疆地区以朝鲜族相对集中的地方为基础,把周围分散村屯的朝鲜族集中起来,形成一个较大的聚居区,形成规模效益,能够在其范围内得到民族发展的良性循环。为此,要从政策上有所倾斜     5、树立正确的人口问题意识,积极探寻人口发展对策。     人口问题是影响朝鲜族未来发展的一个重大问题。如今,朝鲜族人口问题并不在于人口过多,而在于人口自然增长率剧减。保持一定数量的人口是民族发展和兴盛的基本前提,而现今朝鲜族人口问题从哪个侧面看也都具有深刻性。人口自然增长率由于结婚者和生育者减少和死亡者的增多而日益下降。另外,人口流动导致朝鲜族农村人口急剧减少,而流向城市的民族人口居住分散加速了民族语言文字和民族特性的弱化。所以,必须要加强民族人口意识,探寻民族人口发展的途径。 6、进一步加强爱国主义和祖国观教育,正确树立国民意识和民族意识。     朝鲜族自朝鲜半岛大量迁移到中国东北地区定居,成为中国多民族家庭的一员,已经有100多年的历史。这期间,朝鲜族依靠自己的勤劳和努力,与各民族一起共同开发了东北地区,并深深扎根于中国这块土地上。如今,在中国共产党和国家正确的民族政策指导下,朝鲜族作为中国公民行使和履行自己的权利和义务,这是无可争辩的事实。但是,近些年随着朝鲜族与韩国的接触和交流的增多,给少数朝鲜族造成了一种自以为“韩国人”的错觉,也给周围其他民族的一些人造成了把朝鲜族误认为“韩国人”的倾向。这两者都是错误的,我们必须予以澄清。朝鲜族是中国国民,而不是韩国人,中国朝鲜族通过自己的努力,已深深扎根于中国社会,他们适应中国文化的同时,已形成了与朝鲜、韩国有所不同的民族特征和文化。 另外,中国朝鲜族、韩国人和朝鲜人虽然是同一民族,但由于他们各自在政治体制、社会环境及经济文化发展相异的国度里长期生活,其民族性格、思考方式、价值观等方面得到不同的变化,他们之间的民族相同性减少而相异性增大是很自然的。这一点,在朝鲜族和韩国人的接触中也已经得到证实。因此,要进一步加强爱国主义教育,处理好祖国观、民族观问题,明确“中国人”这一国民意识,消除模糊观念。同时,树立正确的民族意识,向青少年进行系统的民族语言文字、民族历史、民族风俗习惯等民族传统教育,使青少年了解朝鲜族发展过程,明确朝鲜族与朝鲜半岛居民的关系,以发扬民族的优良传统,促进民族发展。 7、加强朝鲜族问题研究。 朝鲜族社会凭借其文化素质相对高的优势与亲缘、地缘等优势,较早地涌入改革开放和社会主义市场经济大潮,其人口流动、对外开放等方面已经走在其他民族之前列。正因为这样,朝鲜族社会发展过程中一些未曾有过的问题也先于其他民族而出现,如果其他少数民族发展到一定程度也会出现类似问题。 此外,我国与朝鲜半岛隔江相望,作为跨界民族的朝鲜族与朝鲜半岛具有割舍不断的联系,且多居住于边疆。这表明,朝鲜半岛局势变化,如朝鲜核问题、非法越境者问题、朝鲜改革开放、南北和解及朝鲜半岛统一等,首先会影响到朝鲜族地区。在朝鲜族地区,来自朝鲜半岛上的各种影响(包括一些敌对势力的渗透 )不可避免。可以预测,随着朝鲜半岛走向和东北亚地区局势变化,朝鲜族问题将有可能更加显现出来。 可见,加强对朝鲜族问题的研究,探寻朝鲜族社会发展趋势,不仅对解决处于转型期“阵痛”的朝鲜族社会正常发展问题和保持东北边疆地区稳定有利,而且能够为解决国内其他少数民族发展中出现的问题提供有益的借鉴,因而具有重要的现实意义和理论意义。   **                 **               **        改革开放加速了我国朝鲜族社会的变迁,而人口流动为朝鲜族社会发展带来重大影响。朝鲜族人口的大量流动,大大改变了其人口分布格局和经济结构,加快了其城市化和非农业化。尽管朝鲜族社会发展过程中出现了一些问题和混乱现象,但这是走向现代化过程中必然要经历的“阵痛”,只要我们正确认识,积极解决,一定会顺利渡过“阵痛”关,朝鲜族社会发展前程将更加辉煌。另一方面,朝鲜族社会发展及人口流动问题的正确解决,将对解决我国其他少数民族的社会发展、人口流动等问题也具有较大的借鉴意义。                                      [①] 参见国务院人口普查办公室 国家统计局人口和社会科技统计司 编:《中国2000年人口普查资料》(上),第23页,中国统计出版社,北京, 2002。 [②]  延边朝鲜族自治州政府:《延边朝鲜族自治州概况》,第1页,延吉,2003.3。 [③]  长白朝鲜族自治县统计局:《长白朝鲜族自治县国民经济和社会发展情况统计资料汇编》(2002),第8-9页,2003.6。 [④] 《朝鲜族简史》编写组:《朝鲜族简史》,第4--5、8页,延边人民出版社,延吉,1986。 [⑤] 同上,第22页。 [⑥] 王慕宁编译:《东三省实况》,第29-30页,上海中华书局,上海,1929。 [⑦] 朝鲜总督府:《朝鲜事情》,第282页,京城(汉城),1941。 [⑧] 玄奎焕:《韩国流移民史》(上),第664页,语文阁,韩国汉城,1967。 [⑨]  中国第一次人口普查资料, [⑩] 《吉林通志》,第505页,吉林文史出版社,长春,1986。 [⑪] 长白丛书《光绪丁未延吉边务报告》,第68页,吉林文史出版社,长春,1986。 [⑫] 牛丸润亮等编 《最近间岛事情》,第369页,朝鲜及朝鲜人社,日本,1926年。 [⑬] 徐学新:“试论满洲省委实行的民族政策和国际主义原则”,韩俊光等主编《中国朝鲜族历史研究论丛》2,第90页,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牡丹江,1992。 [⑭] 《中共满洲省委主要文件汇编》,第462页。 [⑮] 王霖:“论朝鲜族在东北抗日战争中的作用及其历史地位”,见韩俊光 金元石主编《中国朝鲜族历史研究论从》2,第126页,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牡丹江,1992。 [⑯] 周保中:“吉林省委民族工作会议上的报告”(1946年12月),《胜利》,第704页,民族出版社,沈阳,1992年。 [⑰] 参见《朝鲜族简史》,第186页,延边人民出版社,延吉,1986。 [⑱] 参见延边朝鲜族自治州民政局《烈士登记》资料。 [⑲] 参见国务院人口普查办公室 国家统计局人口和社会科技统计司 编:《中国2000年人口普查资料》(上),中国统计出版社,北京, 2002。 [⑳] 1998年笔者实地调查所获(虽然要求2000年以来的数据,但要说明改革开放前后的变化,笔者认为1990年代的这些数据也是需要的),下文未注明处相同。 [21] 根据笔者1998年实地调查。 [22] 李秀鹤 编著:《开拓70年之足迹——南拉古村史》,第80页,南拉古村村民委员会,牡丹江,2002。 [23] 参见《黑龙江省民族工作统计资料》(1996年度),第1页,黑龙江省民族事务委员会,哈尔滨,1997。 [24] 2005年7月实地调查所获。 [25] 许明哲等著:《延边朝鲜族教育现状调查与对策研究》,第25页,辽宁民族出版社,沈阳,2003。 [26] 李成一  姜镐燮:“审时度势,开拓进取,努力开创民族教育改革与发展的新局面”,《中国朝鲜族散杂居地区民族教育问题及对策学术讨论会论文集》,第2页,中央民族大学中国民族理论与民族政策研究院,2004年11月。 [27] 吉林市民族事务委员会:“朝鲜族教育存在的问题不容忽视”,《中国朝鲜族散杂居地区民族教育问题及对策学术讨论会论文集》,第58页,中央民族大学中国民族理论与民族政策研究院,2004年11月。 [28] 同上,第57页。 [29] 根据2003年4月对该地的实地调查。 [30] 李秀鹤 编著:《开拓70年之足迹——南拉古村史》,第81页,南拉古村村民委员会,牡丹江,2002。 [31] 2005年7月4日上午与该校李学梅校长的访谈。 [32] 许明哲等著:《延边朝鲜族教育现状调查与对策研究》,第38页,辽宁民族出版社,沈阳,2003。 [33] 朱正奎、具本振:“认清形势,看清方向,取得发展民族教育的主动权”,《中国朝鲜族散杂居地区民族教育问题及对策学术讨论会》论文集,2004年11月。 [34] 吉林市民族事务委员会:“朝鲜族教育存在的问题不容忽视”,同上论文集。 [35] 金松:“朝鲜族人口负增长的原因和对策”,《统计参考》,延边朝鲜族自治州统计局,2002年8月19日。 [36] 朴春山:“涉外婚姻对延边朝鲜族人口负增长的影响”,《延边朝鲜族人口负增长问题研讨会》论文集,第95页,延边朝鲜族自治州计划生育委员会,2002年12月。 [37] 中共延边朝鲜族自治州委员会  延边朝鲜族自治州政府:“延边朝鲜族自治州人口负增长问题的现况”,《延边朝鲜族人口负增长问题研讨会》论文集,第5页,延边朝鲜族自治州计划生育委员会,2002年12月。 [38] 韩国统计厅:《人口动态统计:2002年婚姻、离婚篇》 [39] 权泰焕  朴光星:“家族的分散与解体”,《中国朝鲜族社会的变化—1990年以后为中心》,第53页,[韩国]汉城大学社会发展研究所,2003年9月。 [40] 根据第三、第四、第五次中国人口普查资料。* (本文已刊载于<中国民族发展报告>蓝皮书2001-2006,社科文献出版社2006年)
조선족 현황 및 중한량국과의 련관성에 관한 사이버 조명-조글로포럼 2008년 1월~6월〈명사미니홈〉칼럼평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연구소 교수   이 글은 조글로포럼 운영자의 위탁하에 2008년 1월에서 6월까지 조글로포럼 〈명사미니홈〉에 올린 글의 내용과 경향에 대한 종합서술이라고 하겠다. 이 기간 올린 글들이 500여 편이 되는데 평가대상을 조선족사회의 현실과 미래발전, 그리고 조선족사회의 중국과 한국 량국과의 련관성 등 주제로 한정하고 이와 관련된 내용의 글 120여 편 뽑았고 읽는 가운데서 시한성, 주제성 등 제한으로 30편을 제외하여 사실 여기 평가에 해당되는 글은 90여 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필자 나름이라서 좋은 글들이 평가에 들어오지 못했거나 빠뜨린 경우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량해를 바란다. 그럼 주제에 따라 종합서술 해 보려 한다.본 서술의 큰 주제는 조선족사회 현황과 미래 및 중한 량국과의 련관성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글이 다양하여 여러 시각으로 나누어 서술하려 한다. 시각1: 조선족의 미래 중국 개혁개방에 따라 급변하고 있는 조선족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지어 “위기설”, “해체설”까지 나오는 현 상황에 많은 사람들은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나름대로 민족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발전상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연변대학 손춘일 교수는 《조선족사회의 미래와 경쟁력》에서 조선족은 한국진출, 도시진출로 농경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나 도시민족으로서의 경쟁력은 아직 미흡한 가운데 한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은 생활무대와 활동무대가 중국인 조선족사회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족은 한국과의 관계를 활용하고 민족이 보유한 문화자원과 교육자원을 리용하여 중국주류사회에 합쳐서 생존경쟁을 하여야 미래가 있다고 강조하였다.연변과학기술대학 이승률 부총장은 《조선족 사회 대망론》에서 중국어와 한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일어와 영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조선족 사회가 바로 한·중·일 3국간의 이질문화와 남·북간의 갈등을 정화시키고 조정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매체집단이라고 강조하면서 아직은 비록 인구수가 적고 세가 약한 집단이지만, 장차 인재양성과 국제교류 등으로 왕성하게 거듭날 수 있다면 조선족 사회는 초국가주의 신문명시대를 준비하는 ‘코스모폴리탄 매트릭스’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가 반드시 온다고 지적하고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조선족 사회를 동북아시대의 국제협력을 활성화시키고 맛깔스럽게 만드는 소금과 같은 집단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중앙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네트워크와 새문화창조가 조선족의 살길》에서 중국조선족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한국의 재외동포정책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앞으로도 한국의 차별정책이 지속된다면 한국정부가 조선족인 중국계 동포들을 동포로 지켜낼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중국조선족은 자기나름대로 민족교육을 전개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가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 민족인구의 이동과 분산거주를 대비해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글로벌 코리언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 가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연변 안도석문진중심소학교 교원 신계옥 고급교사는  《조선족문화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서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는 몰라보게 변하였고 민족의 이미지도 약간 흐려졌다고 지적하면서  오늘날 개방과 국제화의 시대적 안목에서 보면 조선족문화의 중요성은 날로 뚜렷해지고 있는바 허망한 욕망과 환상을 버리고 착실하게 중국땅에서 살아가면서 민족문화를 살려나가야 하고 다른 민족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주동이 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단결도, 협심도, 래일의 문화 창출에도 앞장서서 우리 민족의 좋은 이미지를 더욱 굳건히 다듬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중앙민족대학 교사 박광성 박사는 《중국조선족 세계화 물결에 앞서가는 선두집단》에서 조선족은 국외 진출과 산해관 이남 중심도시로의 진출로 이제는 더 이상 동북의 농촌지역에 집중되여 농사를 짓고 있는 농경집단이 아닌 세계화의 선두에 서있는 집단으로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적인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국제교류와 협력에서 자신의 우세를 잘 발휘한다면 조선족에게 찬란한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중국 교육부 중앙교육연구소 교수 리수산은 《조선족은 부지런히 걸어야 앞날이 밝다》에서 착실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고 민족의 우세를 활용하며 창업과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각 종 재간을 키워가면서 부지런히 걸어야 민족의 희망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조선족 선진화 경로에 관해》에서는 긴 학위론문을 쓰기보다 하나하나 기획하고 실행해 나갈수 있는 구체적인 경로를 모색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면서 기초교육을 튼튼히 하고 연변대학같은 민족대학을 일류대학으로 꾸리며 기업경영인재를 많이 육성하며 민족문화사업을 활성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우리는’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은 《‘조선족 정체성’의 위기》에서 인구감소 등 물리적인 요소보다 약화되는 민족의식이 민족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나는 조선족이다. 조선족으로 살겠다”는 정체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연변대학 허명철 교수는 《중국동포사회는 어디로?》에서 조선족은 민족문화를 지키고 거주국의 우수한 민족의 하나로 또 중한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왔지만  여러 요소로 귀엽게만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처지를 똑똑히 알고 민족으로서, 국민으로서 자기의 권리행사를 보장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고 만약 주어진 권리마저 재대로 행하지 않을 경우 민족의 미래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중앙민족대학 정매 박사는 《조선족의 시대적 마인드와 민족정체성》에서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정확한 세계시민 의식을 갖추는 동시에 정확한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아니하고 자신이 속한 민족 공동체내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를 경쟁력으로 “세계화”에 림할 때, 이러한 민족적 자발성과 문화적 자생력을 겸비한 “시민”들 자체가 민족 공동체 자체의 경쟁력이 되고, 비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시각2: 선조들이 개척한 땅에 관하여 조선족농민들의 대량적인 한국진출, 도시진출로 조선족농촌은 날로 황폐해 가고 땅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땅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으로 응당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라고 하겠다. 박광성 박사는 《농토가 큰 재산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에서 농산품의 수요증가와 공급제한으로 토지의 가치는 날로 높아가고 농토는 기존처럼 단지 농민들이 의존하여 생활하는 생산수단이 아닌 중요한 증식의 가치가 있는 큰 재부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나 조선족농민들은 땅의 소중함에 인식이 결핍하여 소홀히 처리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토지와 같은 중요한 자산에 대해서는 더욱 중시를 돌려야 하며 미래를 위해서는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여도 자산으로서 토지를 경영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연변에 살고 있는 농민 네티즌 장형순은 《우리는 밭과 고향을 버릴 수밖에 없는가?》에서 한족들은 많은 밭을 사들이거나 양도받아 농장주의 꿈을 꾸고 있는데 우리 조선족은 밭을 버리거나 아예 팔아버리고 돈벌이로 떠나가 조선족마을은 썰렁하기 그지없는 현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젠 우리 조선족들도 목돈만 바라보지 말고 날로 높아가는 땅의 가치를 일찍히 인식하고 미래를 설정해야 하지 않는가도 지적하기도 하였다.이와 같은 차원에서 네티즌 룡파는 《소중한 우리의 것 우리가 지켜야》에서 시장경제의 흐름속에서 과거 우리가 개척한 민족적인 브랜드, 례컨대 심양의 《서탑조선족냉면점》같은 전통음식점 등이 운영자, 복무원 모두 타민족으로 바뀌고 이름만 남아 있는 유명무실의 존재로 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우리 스스로가 지금껏 누려온 우리의 것의 소중함을 의식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라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것은 항상 우리가 지켜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시각3: 조선족과 중한 량국과의 련관성 관계 중한수교이후 중국과 한국의 경제, 문화 등 교류가 날로 밀접해졌다. 이는 중국조선족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조선족사회 급변에 따른 고통도 고국인 한국과도 연관이 깊었다. 중국조선족은 이제 반성할 때가 왔다고 본다. 한국 한국학연구원 김범송 박사는 《고국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이다》에서 조선반도는 중국조선족에게 있어 불가분리적인 연계를 지닌 고국으로  현재 중한교류의 와중에 조선족은 많은 혜택을 받은 동시에 한국 및 한국인과의 불조화 현상도 없지 않다. 하지만 고국과 해외동포의 관계는 ‘물과 고기의 관계’로 서로가 원하는 불가분의 유대관계이며, 고국과의 원활한 관계유지는 조선족사회가 맞고 있는 인구감소와 민족교육 퇴보 및 지역경제 슬럼프 등  현존하는 조선족사회 위기를 극복하고, ‘제2 도약’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 및 발판으로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조선족과 고국의 상부상조·공생공영관계는 서로가 이익을 얻는 윈-윈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반면 반목질시와 사분오열은 공동쇠퇴를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연변대학 최균선 교수는 《조선족의 비극은 어디서 막을 열었는가?》에서 현재 조선족사회는 자녀교육문제, 토지유실문제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로 앓고 있는데 이러한 비극이 한국바람으로 막이 열렸다면 우리는 하루빨리 각성하여 민족사회의 근신, 자중, 자강으로 민족의 미래를 이어가야 하지 않겠는가는 물음을 던졌다.연변대학 손춘일 교수는 《한국을 향한 행렬》에서 조선족은 한국이란 고국이 있어 한국행에 따라 경제적 혜택을 많이 받고 있지만 조선족들은 이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여기에 안주하면 절대 안 되고 고국에서 준 이런 기회를 잘 이용하여 일정한 기능도 배우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후, 반드시 중국에 돌아가 새로운 삶을 개척할 의식을 가져야 바람직하며 이것이야말로 고국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라고 강조하였다. 한국 명지대학교 한상대 교수는 《조선족의 직종》에서 현재 조선족은 한국에서 이렇다할만한 특유의 직종이 없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으려면 조선족은 그들의 적성에 맞고 한국도 필요로 하는 직종을 개발하여 자기네만의 ‘상표’를 만들어 그 직종이 한국경제나 사회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면 그게 상생의 길이며 한국민들도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조선족이 자성할 주제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 윤운걸 기자는 《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ABC》에서 중국조선족과 한국인의 교류가운데서 생긴 여러 갈등을 나열하면서 이러한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은 지나온 력사배경, 교육, 문화, 체제의 차이, 경제가치관념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러한 갈등해소는 제반 조선족사회와 한국인사회에서 공동히 풀어나가야 할 중대한 과제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한국 방송통신대학 조남철 교수는 《조선족을 위한 변명》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사이 편견과 불신은 서로의 몰이해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각자가 문화와 인식차이를 좁히고 상호 이해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한국 신문화보에 근무하는 조선족 김정룡 기자는 《한국 언론 ‘조선족 동포 때리기’ 이제 그만》에서 일부 언론들이 사실을 과장 보도하는 일을 삼가하고 문화차이를 인정하고 더불어 사는데 도움이 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시각4: 중한교류에서의 조선족의 기여 중한교류에서 조선족의 역할이 아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홍보가 아주 적은 편이다. 중한교류에서 조선족의 기여를 홍보함으로써 민족의 위상과 자긍심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 윤운걸 기자는《중한관계에서 중요작용을 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에서 중국조선족은 독특한 언어우세와 문화적 우세로 중한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앞으로의 동아세아 경제공동체 형성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대비하여 조선족 고급인력양성에 중시를 하여야 하며 한국도 여기에 많이 동조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연변대학 력사학부의 김성걸 학생은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중국조선족사회의 역할》에서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시대이며 조선족은 그가 위치한 지정학적, 인연적 우세로 중한관계와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가교역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1992년 중한 수교이후 조선족은 중국과 한국을 이어주는 튼튼한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눈부신 중한관계 발전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고 지적하고 특히 한반도의 남과 북이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거나 맞이하게 될 경우에 중국조선족은 또다시 동북아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며 자신의 특수한 역할을 발휘함으로써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시각5: 재한 조선족과 한국의 재외동포정책 중한수교이후 조선족은 혈연, 인연, 언어 등 우세로 한국에 많이 진출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불적절한 재외동포정책과 재한 조선족사회문제는 세인들의 많은 주목과 관심을 초래하였고 이에 대한 논의도 많다.한국 중국동포타운신문 김용필 국장은 《재한 조선족 20년史, 얻은 것과 잃은 것《 에서 2000년 말부터 현재까지 한국 내 조선족사회의 변화상을 현장취재하며 기록으로 남겨온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재한조선족의 변화상을 조망해보고 지난 조선족동포의 코리안드림 20년 동안,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조선족동포를 위한 적절한 관심과 정책이 부재했고 뒤늦게 관심을 가졌지만 조선족동포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정책을 마련해 조선족사회에 이중고를 안겨다준 결과를 초래한 점을 지적하고 재한 조선족사회의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조리 있게 귀납한 후 향후 재한 조선족의 발전방향모색에서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의 중요한 역할을 기대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 조선족타운에 따뜻한 관심을》에서는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 '차이나타운'이 마치 조직폭력 범죄집단 온상인양 취급하는 경향을 버리고 이런 지역에 대한 한국사회의 바른 인식과 따듯한 관심이 필요하고, 정부는 지역민과 동포들이 함께 화합하며 생활할 수 있는 마을이 되도록 효율적인 관리방안과 지원책을 수립하여 자체적으로 범죄예방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유도해주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강조하였다.박금철씨는 《한국방문취업제 이래야만 되나》에서 지난해부터 실시된 방문취업제로 인해 무연고 조선족동포들이 합법적으로 한국에 가 취직할 수 있는 길이 열림으로써 조선족동포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와 방문취업응시자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방문취업제를 통해 한국으로 나갈 수 있는 확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방문취업제는 과연 믿고 기다려도 좋은 정책인지? 재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김용필 국장은 《중국동포정책, 이명박 정부에 바란다》에서 중국동포사회는 한중수교 이후 母國을 만나 혜택도 받았지만 정책부재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그러진 사회’가 된 현실을 파악하고  중국동포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여건과 기반을 모국사회에서 관심을 갖고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외에 허명철 교수의《방문취업비자 발급에 즈음하여》, 김정룡 기자의 《고용허가제의 10폐》, 《동포들과 약속을 깨버린 정부정책》, 《정책은 좋았으나 혼란도 많았다》, 《동포귀국정책과 고용허가제는 빛과 어둠》, 《외나무다리에서 우왕좌왕하는 동포들》, 김일선의 《중국동포 이명박정부에 바란다》, 최길도의 《재외동포법과 방문취업제》, 조남철의 《방문취업제 1년을 돌아보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류대식 편집의 《방문취업제 시험 이렇게 하면 안되나?》, 한국 명지대 한상대 교수의 《한국정부의 재외동포정책변화》, 김범송 박사의 《방문취업제 시행현황과 향후과제》, 귀한동포연합 김천 총회장의 《방문취업제도 다시 생각해 보자》 등에서 한국의 해외동포정책, 특히는 중국조선족 정책은 현재까지 많은 개선을 가져 왔지만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정부는 더욱 명확하고 획기적인 정책추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시각6: 민족언어교육에 관하여 언어는 민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중국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민족어와 공용어 한어의 관계를 놓고 민족교육과정에서 많은 탐구를 해왔으며 현재도 많은 문제제기로 여러모로 주목받고 있다. 중화서국 사전부 고급편집이며 청화대학 겸임 교수인 정인갑선생은 《대입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의 득과 실》, 《〈제도〉가 초래한 치명적인 문제점》, 《조선족의 한어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한어수준과 조선족의 출로》, 《어문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제도〉의 개혁과 민족의 전망》등 6편의 시리즈 문장으로 지난 30여 년간 대학입시시험을 조선어로 치르는 제도를 평가하고 그 득과 실을 총화하면서 조선족학생에 대학 한어문 교육을 강조하면서 구체적 방안도 제시하였는바 대학입시에서도 한어문으로 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네티즌의 찬반이 엇갈려 있었다. 그리고 한어문 교육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찬동하지만 대학입시에도 한어문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데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연변대학 최균선 교수는《자기를 잃은 이들에게》에서 민족어교육은 결국 민족성교육이라 강조하면서 “대학입시에 한어사용 주장”의 위험성을 거론하기도 하였고 《아직도 한어때문에 근심하시는가요?》에서 너무 한어에 치우치는 현상을 비평하기도 하였다.감숙성에서 려행사를 경영하고 있는 허동식 사장의 《조선족학생의 대학입시 語種선택 그리고 기타》, 남일성의 《조한(朝漢) 2중 언어 장악은 시대적 요구이다----조선족언어의 발전전망에 관하여》등은  조한 이중 언어를 모두 잘 장악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지만 대학입시에 꼭 한어문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허명철 교수는 《조선족교육의 개혁안을 두고》에서 민족교육개혁의 중요한 요소인 《두 가지 언어교육》에서 한어는 실용도구 차원에서, 조선어는 민족문화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하였다. 시각7: 연변의 이미지와 미래발전 연변은 그가 처한 특수성으로 중국조선족의 중심으로 되어왔다. 다음은 연변에 대한 이미지와 연변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를 놓고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들어 본다. 허동식 사장은 《연변내기와 남도치 그리고 한국인》에서 《연변내기《와 《남도치《라는 단어가 생긴 시대적, 생활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서로의 인식과 이해의 차이를 좁히고 편견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아주 재미 있는 글이였다. 은퇴한 리조구 건축공정사는 《연변사람, 어디가 잘못 되었는가》에서 위기 같은 맥락에서 연변조선족의 과거현상에 대하여 해부하는 동시에 과거 인정이 박하고 물정에 박했던 시대는 이제 지나간 옛말로 되고 우리는 자랑찬 연변사람이라고 외칠 때가 다가오고 있지만 남들이 연변이라 꺼린다고 하여 연변사람인 우리들이 남을 꺼린다거나 반발심에 대항적 태세로 나오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연변사람의 이미지는 개변되기 힘들 것이라 지적하면서 연변에 .현존하는 일부 현상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하였다.김정룡 기자는 《연변은 아직도 ‘문화혁명’중》에서 과거 조선족사회의 고정불변 또는 극단적인 의식의 유래와 그 페단을 지적하면서 이념과 사상을 해방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폐쇄된 언저리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였다. 리혜선 소설가는 《연변이미지의 창출과 경제문화 공생의 길-북방관광교역회 및 조선족민속관광박람회 유감》에서 연변의 문화이미지의 핵심은 바로 중국조선족이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이미지를 잘 살리는 길이 바로 조선족적을 살리는 길이 라고 강조하였다. 문화를 통해 중국조선족특색의 연변이란 강한 감성적 이미지를 이끌어내고 그것이 시장에서의 연변의 이미지로 이어짐으로써 문화에 대한 정부 및 기업의 리윤, 경제적인 창출로 이어지고 이러한 순환을 통해 경제도 살고 문화도 사는 공생의 길이 열리기를 필자는 기대하기도 하였다.임완근은 《이제는 연변에 산업을 키워야 한다》에서 조선족의 중한교류에서의 역할을 긍정하면서 이제 한국정부와 기업들은 새로운 시각에서 연변과 조선족을 바라보고 우수한 기업들이 연변에 많이 진출해 연변의 산업을 키우고 우수한 조선족 배출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 한중간 튼튼한 다리를 놓는 동시에 남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동북아 경제권 공략에도 매우 유용한 일이라고 강조하였다.허명철 교수는 《조선족 력사, 문화를 관광자원화 해야》에서 새 천년에 와서 연변조선족자치주차원에서 민속문화와 관광문화를 골자로 대형행사를 여러 번 개최하였지만 우리의 민속문화와 관광문화는 질적으로 변화된 양상을 보여주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연변은 조선족자치주인 것만큼 조선족 력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관광자원을 창출해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연변관광산업발전을 위하여》에서는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봉사태도마저 열정적이 되지 못한 연변관광산업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새롭게 출발하여야 희망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기타시각ABC: 김정룡 기자는《나는 왜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쓰는가?》에서 스스로의 반성을 통하여 민족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조선족문제를 다룬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심사숙고하여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조선족 호칭에 관하여 흑룡강신문 전은종 특약기자는 《우리는 조족인가? 선족인가?》에서 “선족”은 일제가 조선족을 비하하여 일컫던 낱말이고 정확한 명칭은 “조족(조선족)”이라 지적하면서 민족의 력사와 전통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허명철 교수는 《조선족 호칭에 대하여》에서 중국조선족은 이주시기부터 조선족이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아니며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이후 1953년도부터 중국경내에서 중국국적을 소유한 우리민족이 조선족이란 공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손춘일 교수의 《조선인과 조선족》에서는 조선인은 남북한 한인을 지칭하고 조선족은 중국56개 민족가운데의 하나라고 서술하였으며 김정룡 기자의 《한국인은 왜 조선족호칭을 싫어할까?》에서는 한국인이 조선족호칭을 싫어하는 까닭은 “조선”이란 개념에 대한 거부감에 비롯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윤운걸 기자는  《민족의 부흥과 언론인의 사명》에서 민족 언론인의 사명감, 책임감을 역설하고 언론인은 우선 민족리익을 대변하는데 앞장서야 하며 뿐만 아니라 민족력사홍보와 전통문화보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조남철 교수는 《중국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에서 조선족문학이 조선반도이외의 한글문학에서의 위치를 긍정하고 건국에서 문화대혁명전의 중국조선족 문학발전 및 시대적 제한성을 지적하였으며 현재 조선족문학이 겪고 있는 문학지간행의 어려움, 작가 및 독자층의 감소등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데는 한국문단과의 적극적인 교류, 한국인 독자층 확보 등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우스리스크 한민족 문화학교를 아십니까?》에서는 한민족 문화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을 통하여 한국 정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 동안 해외동포들의 우리말, 글 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해야 할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연변대학 김강일 교수는《연변조선족의 대 남북한관에 관한 실증적 조사--한중 수교 이후의 변화를 중심으로--》에서 설문지를 통하여 1992년 한중수교이후 연변조선족의 한국관과 조선관의 변화를 다룬 기초우에서 연변조선족의 대한국, 대조선관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한국 스포츠서울 배우근 기자의《남과 북, 피는 같아도 삶은 다르다》에서는 남북한 주민은 같은 한 민족임은 분명하나  정치적, 국가적 한계로 서로 간에 벽이 생기고 균열이 커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한국 조선족문화예술인 후원회 이상규 회장은 《민족을 버려야 민족이 산다》에서 단일민족의 제한성을 지적하고 협애한 민족주의 또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경향을 극복하고 더불어 사는 지혜로 타민족을 배려할 때 그 민족이 더욱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여 잘못 리해 할 우려가 없지 않으나 한국에 존재하는  과분한 민족 우월성와 민족배타주의를 비판하는 좋은 글이라고 하겠다.한국 매일경제신문 허연 기자는 《다문화사회와 디아스포라》에서 디아스포라는 역사적 격변이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태어나서 자란 곳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그 집단을 의미하는 단어로 디아스포라의 아픔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다고 하면서 디아스포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인도적인 눈길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디아스포라 문제가 이제 모든 나라에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이제 한국도 다문화 사회를 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현실, 그리고 `다문화 사회`는 디아스포라에서 시작되므로 단일민족사관을 주입받아 디아스포라에 대한 개념이 없는 한국에서 개념조차 생소한 디아스포라에 눈길을 돌리고 이를 한국사회에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김정룡 기자의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 《조선족은 왜 냄비성이 강한가?》등 조선족의 일부 성격을 해부하는 글에 대하여 허동식 사장은 《나도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에 한마디》, 《나도 ‘냄비성’에 한마디》등으로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족특성을 해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외에도 김범송 박사의《 ‘상상의 공동체’민족에 대한 사회학적 담론》, 길림신문사 박문희 부사장의 《 ‘민족과 혈통’문제에 대한 통신》, 중앙당학교 조호길 교수의 《조선의 경제회생과 그 변수》등 많은 좋은 글들이 우리 민족사회와 련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학구적인 탐구라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 우리 민족의 많은 지성인들이 각성하여 민족을 생각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새 기상을 조글로포럼에 올린 글들을 통하여 력력히 보아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활동과 모임을 통하여 서로의 우정과 리해를 깊이 할뿐만 아니라 민족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큰 힘으로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을 키우자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열정, 지혜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참여도의 광범성,  적극성을 보다 부추겨 더 많은 사람들이 민족발전과 미래에 관심을 갖고 유익한 토론과 모임에 스스로 참여하게 했으면 한다.
1    민족적 경제력 제고에 관한 사고1 (정신철) 댓글:  조회:3152  추천:130  2007-12-18
민족적 경제력 제고에 관한 사고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     경제는 인간의 의식주를 포함한 일체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이나 막론하고 생존과 발전을 하려면 반드시 의식주를 해결하고 경제건설에 심혈을 기울려야 한다. 그리고 경제는 사회발전의 중요한 상징이며 국가 및 민족발전의 중요한 척도이기도 하다. 모든 국가, 모든 민족의 발전수준은 그 국가와 민족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우리는 경제를 떠날수 없으며 경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민족적 경제력 신장은 민족생존과 발전의 관건    지금의 세계는 많은 경우 경제력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다. 어느 국가나  민족이든 경제력이 약하면 그 영향력과 발언권도 약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국가지간, 민족지간에 경쟁이 치열한 현재 경제력 신장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도 밀접히 관련되고 있다. 어느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경쟁시대에 살아 남고 자신의 입지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경제발전과 경제력 신장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하나이다. 개혁개방이전 중국은 농업대국의 하나로 경제발전수준이 그리 높지 못하고 민중들의 생활도 유족하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농경민족인 조선족의 민족적 경제 역시 농업경제위주로 기본적인 의식주유지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경제생활수준도 중국 기타민족에 비하면 약간 우위를 차지하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족 농촌경제의 주축은 논농사이다. 논농사는 산출과 가격이 밭농사보다 높으므로 자연적으로 논농사위주인 조선족농민들의 수입이 기타 민족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개혁개방이후 중국경제의 신속한 발전은 전통적인 경제구조를 많이 변화시켰다. 따라서 전통적인 농업위주의 경제는 점차 하위로 밀렸으며 조선족의 논농사위주의 경제적 우세도 점점 사라졌다. 개혁개방이후 중국은 도시화 과정의 급속화와 더불어 공업경제, 특히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날로 커 가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조선족사회발전을 보면 역시 중국 개혁개방의 앞장에 섰다. 인구적 소질이나 조선족의 도시화수준[1] ,  공업과 서비스업의 비중 등은 중국 여러 민족보다 앞섰고 민족적 경제도 많은 발전상을 보이고 있지만 민족적 경제력을 보면 아직 매우 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도시화와 농촌인구의 대량적인 이동은 매 개인의 경제생활을 상대적으로 더 풍부하게 하였고 전체적인 민족경제도 많은 발전을 가져왔지만 민족인구의 분산화는 민족적 경제력의 분산도 초래하였다. 다시 말하면 총체적으로는 민족적 경제력이 강화된 것 같지만 단위적으로 볼 때 민족경제는 더욱 분산적이여 그 영향과 효력이 뚜렷하지 못 하였다.    민족의 경제력신장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연관되는 관건적 문제로 민족의 입지를 굳히고 타민족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반드시 전 민족성원들이 힘을 합쳐 민족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다음문장:   2.민족적 경제력 제고의 제 여건   3.민족의 경제인재와 경영관리인재의 양성이 급선무   [1] 2004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도시화비율은 64.38%으로 중국 30개자치주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당시 30개 자치주 도시화비율의 평균 수치는 22.92%밖에되지않았다. (国家民委民族问题研究中心民族问题研究系列报告06—03:《中国民族自治地方发展评估报告》,民族出版社2006.12,89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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