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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풍경 69
69. 중국 고대 4대 재녀(才女): 이청조가 도박고수?
중국 고대 4대 재녀라면 첫 사람으로 이청조를 꼽게 된다.
리칭조우(李清照-이청조, 1084년-약 1155년)는 남송시기 제남사람이다. 부친은 소동파의 학생으로서 유명 산문가이다. 리칭조우는 문재주로 일찍 이름 날렸고 18살에 시집갔으나 남편이 일찍 죽었고 1132년에 재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갈라졌다. 1134년 저명한 저서 《금서록후서(金石录后序)》를 남기었다. 중국근대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여류 작가로서 완약파(婉约派)의 대표적 인물이다. 청나라 때 《수옥집(漱玉集)》5권이 출간되었는데 사 78수, 시18수, 문 5편이 수록되었다.
차이원지(蔡文姬 약 177년-?)는 한말시기 저명한 금가(琴家)이다. 사서에도 그녀의 박학과 재능에 대한 기록이 있다, 차이원지의 부친은 조조의 친한 친구였다. 16살에 결혼하였으나 1년도 못가서 남편이 죽었고 23살에 흉노에게 붙잡혀가 좌현왕의 왕비로 되었다. 12년 흉노생활에서 자식 둘을 보았다. 208년 조조는 친구의 정을 생각해서 황금 천 냥, 백옥 한 쌍으로 그녀를 되찾아 왔는데 그때는 35살이었다. 조조의 알선으로 뚱시(董祀-동사)와 결혼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남편이 죽을죄를 범하게 되자 차이원지는 조조를 찾아 애원하였고 동사는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조조가 차이원지가 소장한 서책에 흥취를 가진다고 하자 그녀는 4000 여권 장서가 있었으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었다고 아뢰었고 조조의 실망하는 기색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400편을 암송하여 조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빤조오(班昭-반소)자는 한나라 사람이며 부친 빤뾰오는 당대 대문호였고 반소는 늘 황궁에 입궁하여 황후와 기타 귀부인들에게 경사를 읽어 드리었다. 빤조오는 14살에 결혼하였고 오빠를 도와 《한서(汉书)》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중국 첫 기전체단대사로서 ‘사기’와 명성을 같이하고 있다. 당시 대문호 마룽(馬融-마융)은 반소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동관장서각외 꿇어앉았다는 일화도 있다. 반소의 또 다른 저서 《칠계(七戒)》 7편은 빤 씨 여자들의 가정교육 교재로 씌어졌으나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빤조오는 사학자이자 문학가이며 또 걸출한 정치가이다. 빤조오는 고희연을 넘어서 죽었다.
줘어원쥰(卓文君-탁문군, 약 기원전 179년-기원전 117년)은 한나라 사천사람으로서 대부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금은보화 속에서 자란 그녀는 17살에 시집갔지만 반년 후 남편이 죽어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가난한 서생이 타는 《봉구황(凤求凰)》에 마음이 움직여 17살 과부는 야밤에 서생에게로 달려갔고 이튿날 서생의 고향인 성도로 사랑의 도피를 연출하였다. 이 서생이 바로 훗날 서한시기의 유명한 재간둥이 사마상여(司马相如)였다. 한무제의 중용을 받은 사마상여는 점차 아내가 싫증났고 어느 날은 궁중에서 편지 한 장을 보내왔다. 13자가 적여 있었는데 ‘12345678910백천만’이었다. 총명한 줘어원쥰은 ‘만’ 뒤에 ‘억’ 없는 것을 알아보았고 ‘억’이 없다는 “무억(無亿)‘은 중국어에서 뜻이 없다는 ”무의(無意)’과 동음이므로 남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남편에 보낸 그녀의 답장 ‘도순서(倒顺书)’ 《원랑시(怨郎诗)》는 명구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두음(白头吟)》,《결별서(诀别书)》; 《망강정(望江亭)》도 널리 전해지고 있다. 탁문군과 사마상여의 사랑도주는 민간에 널리 전해졌으며 소설, 극의 소재로 되고 있다.
재미있는 ‘소문’이 있다. 이청조가 고금제일 여 도박고수라는 글이 인터넷에 떠 있다. 이유인즉 이청조는 중국도박유희를 전문 연구하였으며 《타마부(打马赋)》, 《타마도경(打马图经)》등 문장을 남겼고 각종 도박유희 오락성을 손금 보듯 잘 알고 있었다는 근거이다. 도박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큰 도박을 하던지 패한 적이 없다고 한다. 믿어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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