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우디아라비아 소녀가 강제 중매결혼과 가족들의 학대를 피해 호주로 망명을 가다가 중간 기착지 태국에서 붙잡혔다. 21세기 강제 중매결혼이라니 무슨 이야기인가 싶지만, 와하비즘(Wahhabism·이슬람 근본주의)을 추종해 종교적·사회적 통제가 엄격하고 여성 인권이 낮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와 유사한 일이 수차례 발생해왔다.
지난 5일 사우디 출신 라하프 모하메드 알 쿠눈(18)은 가족과 함께 쿠웨이트로 향하던 도중 태국 방콕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태국에서 호주행 비행기로 갈아타 호주에서 망명을 신청할 계획이었으나 태국 수완니폼 공항에서 붙잡혀 방콕 환승 공항에 구금됐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쿠눈이 본국으로 송환될 경우 살해당할 수 있다"며 태국 당국에 그를 추방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쿠눈은 강제 중매결혼과 가족의 학대를 피해 도망치던 중이었다. 이슬람 수니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와하비즘이 우세한 사우디에서는 일부다처제와 중매결혼이 흔하다. 특히 매우 어린 소녀와 나이 많은 남성의 중매결혼도 흔해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다.
앞서 2008년 사우디 법원은 아버지의 강요로 50대 남자와 결혼한 8세 소녀의 이혼청구를 기각해 국제적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소녀의 아버지는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결혼지참금 선금으로 3만 리얄(8000달러)을 받고 50대 남자에게 8세 딸을 시집보내는 계약을 했다. 하지만 사우디 법원은 8세 소녀가 아직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이 같은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건 사우디에서는 여성이 마음대로 결혼을 할 수 없고 대신 남성 가족이나 친척의 허락 하에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남성 후견인 제도'(male guardianship system) 탓이다. 제도에 따르면 여성은 여권을 신청할 때, 해외여행을 할 때, 정부 장학금으로 해외유학을 갈 때 등 보호자로 돼 있는 남성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남성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고 일터나 공공장소에서 남녀가 동석하는 것도 금지돼 있다. HRW는 사우디가 국가의 인권 의무를 위반하고 있다며 이 제도를 비판해왔다.
지난해 9월에는 사우디 제다에서 이집트 국적 남성이 여성 동료와 단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는 이유로 노동 당국에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우디 노동부는 두 사람이 아침식사한 영상이 트위터 상에서 공유됐다면서 이를 매우 '불쾌한'(offensive) 일이라고 칭했다. 영상에서는 아바야(검정색의 긴 옷)와 니캅(얼굴 가리개)을 착용한 여성이 이집트 국적 남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여성은 식사 도중 영상을 촬영하는 남성을 향해 손을 흔들고, 그에게 음식을 먹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사우디에도 매우 느리지만 변화가 오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비전 2030'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세계 유일의 여성 운전금지 규정을 해제했고, 첫 여성수사관을 고용하는 등 과감한 여권 신장 정책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지난해 9월부터는 사우디 법무부가 남편이 제기한 이혼소송에 대해 법원이 이혼 결정을 내리면 아내에게 의무적으로 문자메시지가 전달되도록 하는 새로운 규정도 시행됐다. 지금까지 사우디에서는 남성이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해 사우디는 배우자와 협의 없이 이혼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경우 여성은 자신이 법적으로 이혼 당한지 모르고 지내므로 위자료조차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규정 시행으로 이혼을 확인해주는 문자메시지가 발송되므로 여성이 본인이 모르는 사이 이혼을 당하더라도 위자료라도 청구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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