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달 전 4월 8일 어머니를 잃은 아픔에 시름시름 앓던 심장이 터져버린 듯, 내 인생의 어버이 방우영 고문도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는 진짜 고아가 되어버렸다. 100세를 넘겨(103세) 눈 감은 어머니 빈소에서 친구가 말했다. “고아가 된 기분 내가 알지, 힘 내라구.”
엊그제 연세대 병원 방 고문 빈소에서 흐느끼는 나에게 후배가 울먹였다. “아버지 같던 분이 가셨네요.” 나만이 아니라 모든 조선일보 맨들에게 그분은 ‘아버지’였음을 새삼 절감하는 비통의 오열이 뱉은 말이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거대한 스승, 아니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 방우영 사장.
51년전 1965년 1월 조선일보 수습기자 7기 25세 대학생은 37세 신문사 사장이 진두지휘하는 조선일보 혁명에 앞장을 서야 했다. “제호 빼고 다 바꾼다”며 밀어붙인 세대교체, 편집혁신, 재정독립, 컬러인쇄와 컴퓨터 시스템 최초도입등 신문제작 기술 혁신, 그리고 무엇보다 날마다 쏟아내는 수많은 아이디어들---당시 한국 언론계를 뒤집어놓은 ‘방우영 신문 혁명’은 대한민국 근대화 혁명에서 가장 필수적인 국민의식 개화의 횃불이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부정부패 추방 캠페인’을 시작으로 캠페인 또 캠페인, 경제성장에 걸 맞는 국민정신을 정립하자며 ‘한국인의 의식개혁’ ‘역사는 흐른다’ ‘새해 주제’ ‘갈등은 해소돼야 한다’ ‘국제인이 되자’ ‘마이홈 마이카 시대의 한국인’ ‘일본을 이기자’ ‘다 같이 생각합시다’ ‘쓰레기를 줄입시다’ ‘선진화로 가자’ ‘다시 뛰자’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국민계도 기획물들은 타고난 신문인 방우영의 철학이 내놓은 명품들이다. ‘이규태 칼럼’ ‘아침논단’ ‘기자수첩’ ‘칼러 기행’은 또 어떤가.
꼴지 신문 조선일보는 10년만에 1등으로 올라서고, 조선일보 따라잡기 바빴던 경쟁지들도 덩달아 성장하기에 이르는 과정은 박정희의 경제혁명과 맞물린 한국사회의 미디어혁명이라 할만 하다.
“임금인상? 농성할 시간에 취재를 해, 취재를!” 좋은 신문 만들어야 신문이 잘 팔려 월급 올라간다며 소리치던 방우영. “언론 자유는 신문재정이 독립돼야 보장된다” “중산층 육성에 나서자. 중산층이 많아지면 민주화는 저절로 된다. 독재를 하래도 못할 것이야.” “욕먹을 각오하고 다 쓰라, 정론직필(正論直筆) 책임은 다 내가 진다.” 기자들의 방패, 언론자유의 파수꾼, 방우영의 리더십은 한국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찌들고 찌든 투쟁일변도의 정론지(政論紙)가 언론의 정도를 확립하는 정론지(正論紙)로 환골탈태하는 역사의 대전환이었다.
지난 1월22일 88세 미수(米壽)를 맞은 그 분을 인터뷰하였다.
다음은 조우(朝友:조선일보 사우회보, 2015.11.22)에 게재했던 마지막 인터뷰 전문이다.
대한민국 '기적' 낳은 '조선일보 神話'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꿈이었던 중학생은 조선일보 사장이 되어 ‘신문 혁명’을 일으켰다.
“방(方)씨라서 차장도 못했던” 경제부 기자 방우영(方又榮)은 박정희 5.16군사혁명 다음해 1962년 조선일보를 맡아 활화산처럼 폭발하였다. “제호만 빼고 다 바꾸자” 세대교체-재정독립-편집혁신의 혁명공약을 스스로 다짐, 8년 만에 ‘빚 없는 신문사’로 거듭나는데 성공, 동시에 ‘젊은 혁명군’을 진두지휘, 온몸으로 부딪친 신문전쟁 끝에 마침내 ‘1등신문 조선일보’를 만들어 ‘대한민국 대표 언론사’로 세계 선진국 언론계에 깃발을 꽂는다.
군인 박정희(朴正熙)는 18년만에 대한민국 경제혁명을 완성하였고, 타고난 신문천재 방우영은
같은 기간 대한민국 국민정신을 업그레드 시킨 언론혁명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내셔널 아젠다 세팅(National Agenda Setting)의 두 전략전술가는 사사건건 싸우고 비판하고 치고 받으며 자주 국권(自主國權)과 자유 민권(自由民權)의 두 수레바퀴를 끌고 내달린 역사창조의 경쟁자들! 현대사의 터닝 포인트에서 만나고보니 그것은 다른 듯 같았던 꿈 ‘대한민국 만들기 기적의 신화’였다.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동반 성장을 이끌었던 위대한 두 지도자는 그리하여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선진화의 ‘글로벌 대한민국’ 중흥 파트너! 이제 벼락부자로 출세한 G12 대한민국은
불철주야 국격(國格)을 키워주고 받쳐주던 ‘국민의 애인’ 조선일보 있음에 행복하지 아니한가.
한국 언론계와 조선일보 맨들의 영원한 우상 방우영 회장! 창간 100주년(2020년)쯤 자유통일이 되어 “내 고향 땅을 밟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꿈을 역사의 고속도로는 평안북도 정주(定州) 고을까지 데려다주지 않을 것인가. 태어나 4시간 만에 2살이 된 비범한 아이의 88년 생애...음력 섣달 그믐날, 양력 새해 1월22일 미수(米壽)를 맞이한다.
“축하합니다!” 머리 숙인 우리들에게 방회장도 정중히 얼굴을 숙인다.
“오늘이 있기까지 참으로 고맙습니다. 모두 선후배들 덕분입니다. 동지요 형제요 한몸 같은 조우(朝友) 여러분, 오늘의 조선일보는 여러분의 삶을 뭉친 나라의 보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미수(米壽)를 맞으신 회장님께 저희 조우회원들의 축하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내년이야, 내년. 어머님이 음력 12월 그믐날 밤 8시에 날 낳으셨어, 자고나면 새해가 되고 난 출생 4시간 만에 두 살이 되잖아. 아버님이 너무 억울하셔서 양력으로 출생신고 하셨지. 1928년 1월22일, 그러니까 음력으론 토끼띠, 양력으론 용띠가 된 것이네. 그래서 토정비결 보기도 사주팔자 따지기도 힘들어.”
-출생 즉시 2살 되셨으니 역시 큰 인물은 다르십니다(웃음). 격동의 역사 속에서 신문전쟁 시대에 조선일보를 1등 신문으로 만들어 놓으신 한 평생 ‘88세 미수’의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고맙다는 말 뿐이야, 돌아보면 조선일보 사원들 여러분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 어려운 시절 나를 잘 따라주고 헌신해준 선후배 여러분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야. 죽느냐 사느냐 천신만고 다 함께 힘을 합쳐 이겨낸 사우들 덕분에 오늘의 조선일보가 있는 거 아닌가.”
-회장님은 ‘사람 욕심’이 참 많으셨습니다. 저도 회장님에게 꼭 붙잡혀서 입사했지요. 50년전 1965년 수습7기 면접하던 날 즉석에서 회장님이 ‘내일 당장 출근하라’고 명령하셨으니까요. 그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다 합격한 사람이 6명인데 동아와 반반씩 나누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내일 동아일보 면접에 가면 너희들 다 떨어진다‘ 이러시니 어쩝니까? 저는 당시 MBC에 먼저 들어간 선배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더니 그분 말이 ”주저 말고 조선일보 들어가라, 지금 언론계는 ‘방우영 혁명’ 바람에 난리가 났다, 동아일보는 층층시하 선배들이 많지만, 조선일보는 방사장이 늙은 기자들 다 내보내고 젊은이 세상이다. 기회의 땅이다.“ 이 대답을 듣고 동아일보 입사 목표를 포기했지요. 다음날이 일요일 휴간일인데 회장님에게 찍힌 3명은 구 사옥 편집국으로 첫 출근을 하였습니다.
당시 ‘신문 혁명아 방우영’이란 유행어, 기억하십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내가 그랬던가? 그 3명이 누구더라? 인보길, 김학준, 송진혁? 맞았어.
젊은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던 때야. 경쟁지 조간 한국일보가 젊은이 신문으로 인기 좋았잖아.
우리는 꼴찌였거든. 그해 신아일보가 창간되고 중앙일보도 창간하고...재벌이 신문 하면 어떻게 이기겠나. 이병철 회장한테 신문만은 만들지 말라 했지만, 우리가 이길 길은 사람뿐이잖아.
저 액자 보라구, 계초(啓礎) 할아버지 말씀 <제제다사(濟濟多士)> 저 유훈을 실천하려 했지.
그 옆에 조만식 선생 말씀 <기인위보(其仁爲寶)>, 인재를 많이 뽑아서 키우면 신문사의 보물이 된다, 언론사는 인재산업이라는 말씀대로 언론의 승리는 ‘두뇌경쟁’ 뿐이었다. ‘선배님들 나가주십시오’ 편지 보냈더니 솔선수범해준 홍종인 회장이 어찌나 고마운지, 그때부터 ‘1등 인재를 1등 대우 해주면 1등신문 된다’는 ‘계초 지침’ 실현을 본격화했다. 그해 1년에 40명쯤 뽑았더나? 올해 수습이 56기, 700여명 축적된 인력이 조선일보의 든든한 재산이야.“
-1등 신문 만드신 비결, 잊지 못할 추억이랄까, 언론 혁명사를 책 2권에 남기셨지요.
“아카데미 극장을 운영하다가 조선일보 발행인이 되면서 세운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재정 자립, 둘째 지면혁신. 먼저 <빚 지고는 신문 만들지 말라. 재정독립 없이는 신문 안된다>는 계초 할아버지의 유훈을 충실히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빚부터 갚자, 신문사가 빚이 많으면 힘을 쓸 수가 없다, 기자들이 취재할 때도 기사 쓸 때도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어. 그때 언론사들이 은행 빚이나 고리 사채등 얼마나 시달렸나. 겉으론 큰 소리쳐도 올바른 언론정신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정부나 금융등 외부압력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재정 독립이고, 재정이 독립돼야 언론 자유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쥐꼬리만한 월급을 한달에 보름씩 두 번 쪼개서 줄 정도로 자금 만드는데 진땀을 흘리던 기억은 지금도 끔직하다. 그때 내가 맡았던 아카데미 극장도 처분하고 코리아나 호텔도 짓고, 10년 가까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70년 들어서야 빚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한숨 돌릴 만 하니까 임금인상 투쟁이 일어났잖아. 주동자가 당신들이지?”
-죄송합니다. 그때 사장님도 기꺼이 승급과 함께 보너스를 400%로 올려주셨습니다. 항상 기자들 입장에서 이해하여 주셨고 격려하여 주셨습니다. 회장님은 중학교때부터 ‘편집국장이 꿈’이라 하셨는데, 저희가 입사했을 때 <참신한 기획, 화려한 편집, 괄목할 특종>을 캐치프레이즈를 곳곳에 붙여놓고 저희들을 독려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회장님이 편집국장보다 더 열성이셨습니다. 밥도 술도 잘 사주셨지요.
“빚 갚으려면 신문을 잘 만들어야지. 독자들에게 잘 팔리는 신문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그게 내가 주장한 ‘편집 제일주의’야. 발행인 되자마자 세대교체와 편집혁신을 밀어붙인 이유다. 신문들이 다 똑 같은 기사에 먹칠만 하는 편집을 확 뒤집어엎으라 했지. 참신한 기획은 젊은 머리에서 나와야 하고 특종 경쟁도 젊은이들이 뛰어야하고, 젊은 편집도 젊은이들이 해야 한다고 믿었지. 편집국 데스크 진을 젊은 세대로 물갈이 하고, 편집국장도 편집을 아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면 신문이 뭐가 달라지겠나. 편집부장 출신 편집국장이 정답이다, 이건 당시 언론계로선 최초의 파격적인 조치였다구.”
-김경환 편집국장 말씀이군요. 회장님 책에서 읽었습니다.
“내가 가장 잘 한 일이 뭐냐하면 김경환을 편집국장 시킨 거야. 조선일보를 잘 만들어서 빚도 갚고 타사를 이겨야겠는데 ‘다른 신문’을 만드는 방법은 편집뿐이다. 당시 명편집자로 알려진 민국일보 편집부장 김경환을 스카웃 하고 나서 이 사람을 편집국장 시키겠다니까 모두 반대하는 거야. 특히 형님(당시 방일영 사장)께서 조용중 정치부장을 시키라며 반대하시는 통에 정말 힘들었다. 매사 형님을 아버지처럼 모셔왔지만 ‘이것만은 안됩니다’ 설득에 나섰지. 두 달 동안 사표 내겠다고 버티었다. 공부나 하려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비자까지 얻었어. 솔직히 형님이 편집을 뭘 알아? 동생한테 신문 맡겼으면 인사를 맡겨 달라. 끝가지 고집하니까 형님도 결국 ‘알아서 하라’며 허락해주셔서 죄송하고 고맙고...이렇게 편집혁명이 시작되었다. 김경환 국장이 참 큰일을 해주었어. 조영서 조병철 인보길을 묶어서 ‘편집이라면 조선일보’라는 명성을 정착시켜 주었으니 나의 목표를 이루어준 1등 공신이야.”
-경쟁지 한국일보나 동아일보를 제압한 결정적 순간이나 계기를 꼽는다면...
“오프셋 칼러 윤전기를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도입한 것, 1970년 과감한 투자로 ‘칼러시대’를 열었지. 읽는 신문이 아니라 보는 신문, 지면의 비주얼화로 화려한 칼러 편집이 언론계의 기선을 제압했지. 한국일보 장기영이 놀라 “조선일보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내가 졌다”고 두손 들었어. 이때부터 칼러 조선일보는 70년대 타지를 압도해 나갔다. 판매도 광고도 신이 났지. 판매의 송석환, 김화헌, 악바리 광고국장 목사균 송형목등 맹장들과 선두를 향해 현장을 함께 달리던 그 시절이 조선일보의 욱일승천 도약기야. 손발이 그렇게 잘 맞았지, 편집국 논설실등 내가 ’이거 합시다‘ 하면 아무런 반대도 없이 호흡이 척척 맞았어. 뭐랄까, 물 흐르듯이 파도 타기 하듯이....“
-호흡이 저절로 맞춰지도록 이끌어간 방사장님의 리더십 아니었습니까. 지장(智將) 용장(勇將) 덕장(德將) 3박자를 갖춘 ‘용인술의 명장’이 진두지휘하는 조선일보 ‘혁명군’의 질주라고 할까요. 방우영 혁명군(웃음). 저는 매주 화요일 사장실에서 열린 <화요편집회의> 열기를 지금도 그리워합니다.
방사장 스스로 기획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자료를 주고 편집국 국부장들 머리를 쥐어짜게 만들던 그 뜨거운 분위기, 의식화 세뇌교육의 용광로였다 할까, 바로 조선일보 1등신문 혁명의 산실이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읽을거리, 칼럼, 논단, 캠페인들은 경쟁사들이 흉내 내고 따라오느라 허겁지겁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웃음). 칼러 신문을 팔려면 괄목할 기획물이 많아야 하니까 1등 갈 수 있는 길잡이를 만들어 그대로 흘러가는 물결처럼 대세를 이루도록 몰아쳤던 것이야. 그러다보니 ‘역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 아니면 안된다’는 평가도 나오고 매력있고 격조높은 앞서가는 언론은 조선일보라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었다. 수 많은 칼러 기행물, 연재 소설, 특히 <명기열전>은 빅히트 쳤잖아, 중산층이 급증하는 걸 보면서 작가 정비석에게 부탁했더니 예상 적중했거든.
<연산군>을 혁명군주로 연재하려니까 이씨(李氏)문중이 들고 일어나 할 수 없이 <대원군>으로 바꿔야 했고, <별들의 고향> <잃어버린 왕국>등 연재소설 전성기를 열었던 것도 조선일보였었네.“
-그 연재소설을 조선일보가 시대변화에 따라 중단하고 있는데, 새로이 연재하고 싶은 소설깜이라도 있는지요?
“이승만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는데 우물우물 소식이 없어. 이승만 만큼 파란만장한 혁명아도 없을뿐더러 평생 독립운동과 건국과정이 재미있잖아. 더구나 지금 건국대통령 잘 모시자는 여론도 높아지고 타이밍이 좋은데 민감한 소재라서 마땅한 작가를 찾기 힘들다네. 미국엔 건국 아버지들 소설이 많잖아. 일본도 그렇고...”
-‘조선일보가 아니면 못하는 것들’중에 내셔널 아젠다 세팅(National Agenda Setting)이 국민 계몽과 국가 개조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찍이 방사장께서 ‘납북자송환 백만인서명운동’과 ‘부정부패추방 캠페인’을 벌였던 조선일보는 70년대 <조선일보 신년주제>를 내세워 유신체제 독주와 국민감정의 갈등을 교묘하게 비판하고 어루만지는 아젠다 세팅, 이것도 방사장님 아이디어였죠. 그 첫 번째 신년주제가 <갈등은 해소돼야 한다>는 테마였습니다. 이 주제 제목이 완성되기까지 사장님은 1인3역을 하셨습니다.
“사람이란게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지면 자유를 찾게 마련이거든. 언론자유도 제약된 긴급조치를 피하면서 국민의식 계도에 나섰던 것이야. 조선일보가 독자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듬어주는 기획물, 박정희 유신체제와 갈등을 일으키는 국민들 사이에 요즘말로 소통이랄까, 일년내내 같은 테마로 경제성장에 걸 맞는 의식개혁을 동시에 진행하고 싶었던 거야. 그게 전통이 돼서 유명한 캠페인이 계속 이어졌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든지, <쓰레기를 줄입시다> 이건 내가 낚시터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나중에 유엔 환경상도 받았잖아.”
-그때 사장님은 편집자였어요. 왕편집자, 신년주제 아이디어를 모아 주제를 선택하고 제목을 만들고 다듬고, 칼러편집 담당이던 제가 사장님방과 선우휘 주필 방을 수없이 들락거리면서 시국을 분석하는 안목, 역사를 보는 시각 등 공부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제 2015년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아젠다 세팅이나 캠페인을 한다면 무엇이 좋겠습니까?
“국사교과서 문제, 좌파들이 장난치는 걸 오래 방치해 둔 대통령들 잘못인데, 조선일보가 벌써 바로잡아 주었어야지. 공산당한테 나라 역사를 다 빼앗긴 거 아닌가. 이걸 조선일보가 학생들과 학부모, 정부에게 가르쳐 줘야지. 신문의 역할은 계도(啓導)야 계도, 이것은 평생 나의 주장이고 나의 철학이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TV가 많아지고 인터넷 신문도 엄청나고 뉴스중심 특종경쟁은 벌써 지났다. 뉴스의 배경을 파헤쳐 주고 좌파의 실체를 폭로해주고. 신(新)계도주의로 앞장서 나팔 불어줘야지. ‘진보’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반대야. 두 마리 토끼 다 놓친다.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좌파에 양보하면 조선일보부터 죽는다는 걸 왜 모르나. 조선일보가 피를 흘려 싸워야 나라도 살고 조선일보도 산다. 우린 늘 그래왔어요. 욕 먹지 않으려면 신문이 아니지. 욕먹으면서 바른길로 이끌었기에 조선일보가 1등을 했다. 정론의 원칙, 오래된 역사의 의무를 잊어선 안 된다. 종이신문이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욱 참신한 기획, 더욱 화려한 편집이 좌우한다는 것을 거듭 명심하기 바란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을 가장 실감나게 성공시켜 보여주셨다는 평에 대하여...
“시작부터 위기였지. 신문전쟁, 권력과의 투쟁, 3.6사태, 5공청문회, 세무사찰...어떻게 이겨냈냐고? 조선일보의 힘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치단결, 조선일보 신념, 조선일보 기질, 우리 조선일보는 도전을 받으면 더 강해지는 특유의 장점을 갖고 있다. 내가 이것이 옳다 하면 다들 똘똘 뭉쳐서 잘 따라주었거든. 이런 조선일보 정신을 계속 살려나가야지. 정치권력과의 싸움에서도 그랬지. 내가 역대대통령 11명을 겪었어.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누가 제일 맘에 드느냐고? 박정희...용기와 신념 있는 지도자. 박근혜 대통령도 잘해야 할 텐데 여자라서 참...밑에 남자들이 왠지 꾸물거리니. 한국은 아직 멀었어(웃음). 남은 기간 애국애족을 잘해달라고 당부해야지.”
-평생 일기를 쓰셨는데 지금 들춰보시면 어떻습니까?
“나는 음치야, 음치였어. 노래방 가서 노래 못하는 음치 있잖아. 신문사에서 경영 외길만 걸었으니 언론인은 못되고 신문인이었다고 해야지. 그래도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을 많이 키워 놓은 것이야, 편집 논설등 훌륭한 인재들이 잘 맡아서 해주니 내가 할 일은 이제 끝났다.”
-끝나다니요. 그래도 못 다 한 일, 못 다 이룬 뜻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통일과 나눔, 잘 되고 있잖아. 조선일보 애국애족의 뜻을 국민들이 많이 호응해주니 고마운 일이야. 남은 꿈은 창간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 그리고 내 고향 평안북도 정주(定州) 땅을 꼭 한번 밟아보고 싶어.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치니 통일 기회도 생기지 않을까 꿈을 꾼다. 또 한 가지는 나의 취미, 등산 사냥 낚시를 해왔는데 지금은 그것도 생각처럼 안돼.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써 볼까 구상중인데 제목은 뭐가 좋을까. ‘산 넘어 물 따라’...?“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방 회장은 담배 두 대 쯤 불을 붙였다. 미국산 말보로 라이트.
-담배 끊으셨다더니...통일을 보시려면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지요.
“담배 없이 인터뷰를 어떻게 해? 옛날 생각나서 피운다. 이것도 안 되겠니? 하루 종일 찾아오는 사람들도 뜸해지고 늙으면 외롭다구.”
<인보길 조우회장, 뉴데일리 미디어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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