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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속 4군 밀영과 피어린 서정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5월14일 00시00분    조회: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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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0월, 밀산항일유격대와 항일구국유격군은 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그때 제4군 소속 안순복 등 4군의 조선족동지들과 가족들은 밀산현 서대림자(西大林子)에 있다가 그곳에서 80리 떨어진 양강구(杨岗沟)에 자리잡고있었다. 그해 겨울에 안순복, 허현숙(许贤淑), 리동숙, 리범숙 등 녀전사들은 부대와 더불어 밀산을 떠나게 되면서 자기들의 사랑스러운 8명의 어린 아이를 양강구의 루경명(娄景明)과 당지 군중들에게 부양을 부탁하였다. 이를 본 군중들은 깊이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신들은 정말 녀영웅호걸들이요!”

1936년 2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고 황옥청이 군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안순복은 4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하면서 부대를 따라 벌리(勃利), 부금(富锦)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6월과 7월 사이에 부금과 보청(宝清) 일대에 새로운 항일유격구가 개척되면서 보청현 리금위자(李金围子) 서남의 대엽자골(大叶子沟)에 4군의 밀영이 들어섰다.

4군 재봉대는 군부를 따라 대엽자골 밀영에 자리잡았다. 그 시절 4군 재봉대는 20여명 녀전사로 구성되였는데 밀산현 서대림자와 양강구를 거친 안순복, 허현숙, 리동숙, 리범숙 등 모두가 대엽자골 밀영에서 재봉대 녀전사로 활동하게 되였다.

1936년 겨울에 항일련군 제4군 군부와 4군 장병들은 대엽자골 밀영에서 동기강습을 받았다. 재봉대원들도 동기강습의 한 부분이였다. 그들은 군사와 문화 등 지식을 보다 익히면서 ‘민족해방전쟁과 통일전선’, ‘무산계급혁명’ 등 문제를 가지고 학습하며 토론을 벌리였다. 그해 겨울의 강습을 거치면서 4군 재봉대는 물론 부대장병들의 정치와 군사, 문화 수준은 새로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7년 1월에 이르러 4군은 원래의 700명으로부터 4개 사, 10개 퇀 2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성과에는 황옥청은 물론 부대의 후방공급의 일익을 맡아나선 4군 재봉대 녀전사들의 숨은 노력도 크게 깃들어있었다.

허현숙의 남편 황옥청은 1936년 그해 제4군의 제1퇀을 거느리고 밀산, 벌리 등지에서 맹활동을 벌리였다. 1937년 음력설(2월 11일)을 앞둔 2월 초경에 황옥청은 소속 1퇀 3련의 30여명 기병대를 인솔하여 벌리로부터 보청의 대엽자골 4군 밀영에 들어섰다. 황옥청과 4군 녀전사인 안해 허현숙과의 만남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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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 밀영에 들어선 황옥청은 군장 리연평(李延平)에게 그간 군사활동을 회보하는 한편 설맞이 전리품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 군부와 밀영의 재봉대는 한결 생기를 띠였다. 군장 리연평과 황옥청은 보청과 부금간의 4군 교통선을 어떻게 다시 열 것인가를 토의하면서 황옥청이 내놓은, 지방의 방가대원(方家大院) 지주무장을 소멸할 방안을 짜고들었다.

방가라는 이 지주놈은 우리 항일련군의 활동을 백방으로 저애하면서 4군의 몇몇 동지들을 해친 일까지 있었다. 1937년 섣달그믐날인 2월 10일, 황옥청은 ‘일본토벌대’로 가장한 1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자태름름하게 방가대원에 들어섰고 총 한방 쏘지 않고 지주무장을 해제하여 버리였다. 많은 식량 등도 해결하여 4군 밀영은 그해 음력설을 즐거운 기분 속에서 쇠게 되였다. 잇달아 방가대원은 4군 부대가 부금에서 보청으로 가는 련락장소로 되였다.

1937년말에 이르러 일본침략자들은 일위군 5만여명의 병력을 긁어모아가지고 우쑤리강, 송화강, 흑룡강 하류의 삼강(三江)지구에 대해 전대미문의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항일련군 제2로군 소속 제4군과 제5군, 제7군, 제8군, 제10군 부대들은 반토벌전에 총궐기하여 일정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병력 등 여러 면의 현저한 차이로 말미암아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현실의 불리한 국면에서 벗어나며 여러 항일련군 부대들과의 련계를 가지기 위하여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1938년 4월에 제4군과 제5군의 주력부대가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족 황옥청(黄玉清)은 제4군 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부 주임이였다. 그는 4군과 5군의 동지들과 함께 목단강지구의 5군 후방기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병력을 집중하여 서정(西征)을 다그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5월에 제4군과 제5군은 보청(宝清)에서 출발하였다. 서정부대는 도합 680여명으로 구성되였다. 7월 2일에 서정부대는 제4군 군장 리연평(李延平)과 부군장 왕광우(王光宇)의 지휘하에서 목단강 연안의 삼도통(三道通)을 습격하였다. 이날 그들은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분주소를 까부시고 많은 무기와 탄약, 식량을 로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4군과 5군으로 구성된 서정부대에는 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의 안해 허현숙이나 4군 재봉대 대장 안순복 등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부대와 함께 풍찬로숙하면서 삼도통전투에 뛰여들었다. 평소엔 선전원, 봉사원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며 부대의 사기를 높이였다.

삼도통전투 이후 아군의 서정부대는 적들의 저지선을 돌파하면서 사도하자(四道河子)와 삼도하자(三道河子)를 지나고 로야령(老爷岭)을 넘으면서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300리 심산밀림을 헤치고 나갔다. 그 속에는 4군 재봉대 소속 녀전사들과 5군 부녀퇀의 녀전사들이 섞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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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에 서정부대는 위하현(苇河县, 즉 珠河县, 후에 尚志县, 尚志市로 개칭) 경내에 들어서면서 단기적인 휴식정돈 시간을 가지였다. 12일 이른새벽에는 적들이 낌새를 챌 사이도 없이 위하현 동북쪽 루산진공격전투를 벌리여 일위군 14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경기관총 2정과 보총 100여자루, 탄알 1만여발 그리고 적잖은 식량 등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적들의 교량과 통신설비를 짓부시기도 하였다. 4군과 5군의 조선족녀전사들은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

루산진진공전투에서 아군은 빛나는 승리를 얻었으나 적들이 계속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지꿎게 달려들어 제4군과 제5군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행동하게 되였다. 제4군의 녀전사들은 제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이때의 부녀퇀은 4군과 5군의 녀전사들을 합치여 20여명으로 구성되였다. 안순복과 허현숙, 리봉선 등의 첫 만남이고 어울림이였다.

허현숙의 남편인 제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도 4군의 일부 장병들과 더불어 5군 1사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였다. 그런데 허현숙 관련 자료는 허현숙이 5군 1사 속에서 활동하고 황옥청이 다른 갈래 아군부대에서 행동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헤여져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연변인민출판사 출판(2015년 8월)으로 된 《항일련군의 조선족녀전사들》에 올린 허현숙 전기에서 아래와 같이 소개하는 실수를 빚어냈다.

 

석별의 시각, 황옥청은 안해 허현숙의 두 손을 뜨거이 잡아주었다.

“나는 당신을 돌볼 수 없게 되였소. 매사에서 무척 조심하길 바라오. 우린 꼭 승리할 것이요. 우린 꼭 다시 만나게 될 것이요.”

그러는 남편을 두고 허현숙은 금방 한뜸한뜸 만들어낸 헝겊신 한컬레를 남편에게 맡기면서 평온스레 말하였다.

“시름 놓으세요. 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거예요. 당신도 항상 조심하세요.”

허현숙은 서정길에서 이렇게 남편 황옥청과 헤여졌다. 그들은 이 리별이 영원한 리별로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지금 보면 이는 분명 실수로서 5군 1사와 행동을 같이한 황옥청을 잘 모르고 빚어낸 오유적 기록이였다.

서란(舒兰), 오상(五常) 일대에로의 서정길은 피로 얼룩진 서정길이였다. 허현숙, 안순복 등은 강의한 의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부대와 함께 오상현 경내에 들어갔다. 부대는 오상 경내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 속에 빠지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대거 진공하였는데 낮에는 수십대의 비행기가 마구 폭격하고 밤에는 포사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도처에서 가렬처절하게 벌어졌다.

1938년 7월 25일의 전투도 그러하였다. 이날 허현숙 소속 서정부대는 길동성위 서기이고 5군 정치부 주임인 송일부(宋一夫)와 4군 군장 리연평, 4군 부군장 왕광우 등의 지휘하에서 오상현 원보진(元宝镇) 부근의 집단부락 진공 전투를 벌리여 일부 식량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곳 집단부락 진공 전투는 상상외의 치렬한 전투여서 40여명의 장병들이 희생되는 피눈물의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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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서정부대는 일면파 남사진(一面坡南沙镇)을 야습(夜袭)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주야행군중 적들과의 조우전을 치르기도 하면서 탄약이 따르지 못하고 사상자가 늘어갔다. 극히 어려운 투쟁환경 속에서 서 정부대에서 떨어지는 사람과 도망현상도 없지 않았다. 더우기 서정부대의 주요 책임자인 송일부(宋一夫)도 공금을 가지고 달아나 그 영향이 아주 나빴지만 부대내의 녀전사들은 어느 하나도 부대를 떨어지지 않았다.

8월에 이르러 서정부대가 오상현 충하(冲河, 오늘의 오상시 충하진)지구에 이르렀을 때 4군의 서정부대는 100명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8월 15일에 아군은 충하 부근의 한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일부 식량을 얻었지만 적들의 추격을 받았다. 치렬한 전투 가운데서 4군 1사 2퇀 퇀장 마국신(马国臣) 등 64명이 불행히 포로가 되고 부대는 엉망이 되였다. 4군의 1사 사장 곡성산(曲成山)은 적들에게 붙잡혀 변절하고 말았다.

이날 전투에서 허현숙도 한창 적들과 싸우고 있을 때 한 녀전사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허현숙은 결사적으로 그 녀전사를 구출하다가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여 오상현 일본수비대감옥에 끌려갔다. 오늘의 충하진은 오상현소재지에서 동남으로 72킬로메터 떨어진 곳이다.

일본수비대 감옥에서 적들은 허현숙에게 부대의 행동부서를 대라고 미쳐 날뛰였다. 허현숙은 적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갖은 악형으로도 항일련군의 이 녀전사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나중에 악착하기 그지 없는 적들은 허현숙을 끌어내다가 무참히 살해하였다. 허현숙은 자기의 희생으로 한 공산당원, 한 항일련군 녀전사의 숭고한 맹세를 실천하였다.

황옥청은 안해의 희생으로 인한 모진 슬픔을 이겨냈다. 부대의 거듭되는 손실도 그를 거꾸러뜨리지 못하였다. 1938년 10월, 황옥청은 사태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5군 1사와 함께 림구 조령(刁翎)일대에 돌아와 5군의 후방기지를 찾았다. 후에 그는 중공길동성위 위원, 항일련군 제2로군 총정치부 주임 중책을 짊어지고 적들과 싸우다가 1940년 2월 20일에 보청현 태평구의 석회가마(石灰窑)가 있는 곳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허현숙과 황옥청의 작은 아들 황동순(黄东淳)은 아버지 소속부대인 항일련군 제4군에서 꼬마교통원으로 활약하다가 1939년 겨울 밀산현 합달하(合达河)에서 왜놈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우소웅(于绍雄) 주필로, 흑룡강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 《동북항일련군장령전》(2009년 10월 출판) 황옥청 전기에서는 허현숙과 그의 작은 아들이 오상현 충하전투에서 불행히 체포되였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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